한덕수 주미대사 사임 소식을 들으며 생각나는 옛날 일들이 있다. 여러 일들이 모아지는 장면은 1967년 봄 어느 날의 고교영어경시대회 시상식이다. 내가 두 가지 새로운 경험을 겪은 날이다. 하나는 학생 노릇 12년 만에 '상'이란 걸 처음 탄 일. 초등학교부터 우등상은커녕 개근상 한 번도 타본 일이 없었다. 또 하나는 역시 처음으로 '줄빳다'를 맞은 일. "죄와 벌"은 아니고 "상과 벌"의 날이었다.

서울대 언어연구소에서 개최한 영어경시대회의 제2회 대회였다. 전 해의 첫 대회에서는 한덕수가 종합우승을 차지하는 등 경기생들이 휩쓸었다. 그런데 2회 대회에서 우리 기는 죽을 쒔고, 응원 왔던 1-2년 선배들에게 줄빳다를 맞았다.

대회의 첫 날은 필기시험이었고, 거기서 커트라인을 통과한 학생들이 둘째 날 회화시험을 치렀다. 회화시험을 치러 갔을 때, 나를 잘 모르는 영어 선생님이 "김기협이가 누구야?" 찾는다. 주최측에 가서 은밀히 알아보니 필기시험에서 내가 최고 점수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작년보다 경기생들 성적이 좀 떨어지지만, 그래도 면피는 될 수준이니 회화시험에서 분발하라는 격려가 뒤따랐다.

그러고 들어가서 인터뷰 형식의 회화시험도 잘 치렀다. 아무래도 회화 경험이 적기 때문에 경쟁자들의 추격이 예상되었지만, 내가 크게 죽쑤지 않았으니 깎여봤자 얼마나 깎였겠나 하는 느긋한 배짱으로 발표를 기다렸다. 그런데 발표가 나온 걸 보니 종합점수에서 나는 입상권에 들지 못했다. 독해력인가 작문인가 부문상을 받았던가? 아니, 부문상은 없고 종합 3위였던가? 오래 돼서 가물가물하다. 생전 처음 타본 상이었는데 그것까지 가물가물하다니 벌써 노인병인가?

아무튼 종합 우승은 외교관 자제인 어느 여학생이었고, 경기고는 체면이 구겨졌다. 그렇다고 줄빳다까지 나올 일이 아닌데, 한덕수 등 1년 선배들이 너무 설친 바람에 대조가 되어 버린 거다. 그래도 좀 고소했던 것은 1년 선배들이 우리를 손봐준 다음 2년 선배들이 우리를 때리면서 1년 선배들까지 후배 지도 잘못한 죄를 물은 것이다.

그 당시 그 줄빳다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나와서 맞은 애들은 괜찮게 한 편이었다. 경기의 명성을 지키는 데 앞장선 편이기에 회화시험, 말하자면 본선에까지 나온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1년 선배들은 대개 전 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들이 나와 있었다. 아주 못한 놈들은 안 맞고 왜 잘한 놈들이 맞아야 하나?

한참 지나고야 그 불합리의 성격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엘리티즘의 속성으로. 못하는 놈들은 관심 대상도 못 된다. 좀 하는 놈들끼리 서로 때리고 맞으면서, 격려하고 따르면서 유대감을 키우는 거다. 나처럼 맞으면서 매에 담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억울한 생각만 하는 놈은 그 그룹에 끼기 어려운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경기에서도 굉장한 엘리트그룹에 속해 있으면서 그게 얼마나 굉장한 건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영자신문반이다. 경기고에서는 <Kyunggi Youth>란 제호의 영자신문을 학생 손으로 내고 있었다. 개교기념일과 졸업-입학 때 한 차례씩 타블로이드 4면인지 내는 것이었으니 별 것 아닌데, 영어 실습 기회가 적던 당시에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한 학년에 세 명씩 반원을 뽑고 있었고, 지도교사가 아니라 선배들이 뽑았다. 엘리트 학교를 자랑하는 경기에서도 최고의 엘리트 서클이었다.

이광훈, 홍석현 두 친구와 함께 뽑혔을 때 나는 내가 무슨 재주로 뽑혔는지 알지 못했고, 그저 어려운 자리에 뽑힌 것만 신이 났다. 1년 선배들 중엔 세 사람이 있어도 실제로 한덕수 혼자 일을 하는 감이 있었는데, 우리 기는 그럭저럭 힘을 합쳐 꾸려나가다가 후배들에게 물려줬다. 90년대에 중앙일보 일 할 때 나와 홍 사장(회장) 사이의 관계를 대충 알고 묻는 사람이 있을 때, 열여섯 살 때부터 신문 함께 만들던 사이라고 대답하며 웃곤 했다.

신문반 선배가 된 한덕수는 나를 물 좋은 교외 클럽에도 끌어들여 줬다. 영어회화클럽이 유행이었는데 그중 물 좋은 곳의 하나인 HSCC였다. 여학생들과 함께 하는 클럽이 너무 신나서 참 열심히 다녔다. 몇 달 전 충남대에 강연 갔을 때 클럽 동료였던 임선희 학장을 만났더니 나를 "엄청 조용한 학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한덕수가 주미대사 그만두는 소식을 들으며 우리 또래에게 '영어공부'가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이었는지 되돌아본다. 나도 한 영어 했지만 그건 목적의식 없이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었다. 초딩 때 만화로 시작해서 영어를 습득한 이래 영어로 읽으면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많기 때문에 영어에 익숙해진 것이다. 대부분 우리 또래 학생들은 대학입시에서 영어의 비중 때문에 영어공부에 내몰렸는데, 나는 입시 영어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한덕수의 영어공부도 입시에 매인 것이 아니었다. 한덕수나 내 수준에서는 영어에서 깎일 점수가 몇 점 안 됐고, 따라서 더 노력한다고 점수 올릴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나 나나 입시를 넘어 평생 활용할 '도구'로서 영어를 익힌 셈이다. 그런데 고딩 때도 한덕수가 회화에 중점을 꽤 둔 반면 나는 읽기에만 매달렸다. 우리 또래에서 그와 홍석현이 영어 회화를 제일 잘하는 사람 중에 꼽히는 반면 (유학 가서야 필요에 몰려 겨우 익힌 사람들과는 '격'이 다르다.) 나는 영어 문장을 제일 잘 읽고 쓰는 사람 중에 꼽힌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한다.

지금 새삼스레 '영어공부'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해방일기> 작업을 하면서 '친미'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철이 없을 때도 영어의 독해에만 힘을 쓰고 회화에 공을 들이지 않은 것이 '친미'보다 '지미(知美)'에 기울었던 까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어린 내게는 미국을 동경하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도 그곳에 능동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애써 닦을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파악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평생 영어로 이야기 나눌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1984-85 1년간의 해외 체류, 그리고 그 후 1991년까지 해마다 두어 달씩 밖으로 다닐 때가 고작이다. 학술 토론에는 큰 지장 없었고,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과 언어감각을 바짝 음미할 때가 더러 있었다. 유창하지 않은 사람이 어쩌다 맛좋은 표현을 하면 친구들이 놀라며 즐거워하곤 했다. 영어 회화는 내게 생존 수단이나 놀이개 정도였지, 무기로 구사할 수준까지 익히지는 못했다.

영어 회화를 활동의 중요한 도구로 익힌 선배와 친구들을 생각하면 학생 때부터 그쪽으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본인이 판단한 것이든 부모가 가르쳐준 것이든 주어져 있는 한미관계를 전제로 할 때 대단히 현명한 판단이었다. 나는 그쪽으로 뛰어난 적성과 소질을 보였는데도 나 자신 그리 내키지 않았고 어머니도 전혀 권하지 않았다.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내 자세가 빚어져 오는 데 영어와의 관계가 하나의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한 것 같다. "You are what you eat."이란 말 대신 이런 말을 하고 싶다.

"You are what you speak."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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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2.19 08:31

    경기고의 신화를 들을 때 마다 이런 곳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히 당시에 그만큼의 자율성은 주어지지 않았을 것 같은데(현재같이 시험도 많았을테고), 그 와중에서도 학생들이 취미생활도 하나 하고, 한 분야에서 상당한 내공을 쌓는 것을 보면 역시 천재들의 집합소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덕수총리가 관료로서 하버드에 가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따지 않았고 학생으로 하버드에서 경제학공부를 했더라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아쉬움이 남는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선생님 뒤늦게나마. 저번에 중국민족문제관련 여러 도서 추천해주셔서 정말 유용하게 잘 썼고 성적도 잘 받았습니다. 페이퍼 찾으러 갔더니 교수가 "요즘 세대도 홉스봄을 읽는군" 하면서 칭찬까지 해줬습니다.

    • 2012.02.19 11:29

      '입시지옥'이란 말을 그때도 했지만, 요즘에 비하면 어수룩한 지옥이었죠. 시험의 변별력이 중요한 조건이었던 것 같아요. 서울대 커트라인 제일 높은 학과가 500점 만점에 300점 겨우 넘는 정도였어요. 운이 작용할 여지가 작기 때문에 선택을 분명하게 할 수 있는 여건이었죠.
      홉스봄이 요즘 거기 학생들에게 많이 안 읽히나요? 그럼 뭘 읽지?

    • 2012.02.19 11:45

      "시험의 변별력" 얘기 하고 보니 도박의 성격과 관련된 생각 떠오르는 걸 얼른 적어놓고 싶네요.
      "운7기3"이니 뭐니 하는 대로, 도박의 승부는 운과 기술이 합쳐져 결정합니다. 단기적, 미시적으로는 운의 작용이 크고 장기적, 거시적으로는 기술의 작용이 크죠. 운만 바라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잠깐은 재미를 봐도 결국은 기술을 갖춘 '꾼'들에게 '밥'이 되고 말죠.
      1 대 99의 체제를 만들 수 있는 것도 불확정성을 늘림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운에 매달리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10 대 90만 돼도 불공평하다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어야 정상인데, 사행심으로 판단력이 마비되기 때문에 1 대 99 체제가 가능한게 아닌지. 기술과 힘을 가진 자들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인데 약자들이 운만 바라고 들이미니까.
      서상철의 책 <무한경쟁...>에 그려진 불합리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시각이 될 것 같습니다.

    • 2012.02.19 13:44

      탈락자들을 보듬어 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일텐데, 1퍼센트의 영광은 너무 화려하고 80%의 생활상은 너무 초라하니 다들 그 불확정성에 자신의 운만 믿고 뛰어드는 듯 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말도 하기 힘든 것이 워낙 우리의 생산성은 낮은데, 외부의존성(단순 수출만이 아닌 자원, 기술도입 등의 요소)은 너무 큰 상황에서 세계경제가 장기적 침체국면에 들어가서, 아무리 분배에 신경을 쓰더라도 개개인의 욕망을 채울 수는 없을텐데, 참 걱정입니다.

      결국 어떻게 사회적연대를 키우는지가 문제가 될텐데, 쿠바같은 사회(국민들이 공평한 급여를 받고, 1/6이상의 국민이 해외봉사를 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남아프리카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침탈을 보지 못하고 수십만의 군대를 파견하고, 오히려 어려운 시기에 복지자원을 확충하는 등 사회적연대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회)를 보면 이해가 되는데, 우리는 너무 자본화의 길로 와 버려서, 어떤 방법으로 사회적연대를 키울 수 있을지 답답합니다.

      홉스봄은... 미국은 아무래도 맑스주의자들이 얼마 없으니까요. 워낙 사회과학의 방법론으로 positivism이 주축이라서... 하버드출신인 정치경제학교수가 "음.. 영국은 좋은데,,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보다가 아 좋은 생각이 낫다면서 논문쓰기 시작한다"면서, 증명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주장할 수 있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대학원은 영국쪽으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2. 2012.02.20 04:11

    요즘도 영자신문반은 우수한 학생이 들어가는 곳이죠. 2005년도 부터인가 내신등급제가 되기 전에는 고등학교에서 학교간의 연합동아리 활동까지 운영될 정도로 활성화되었어요. 왕따나 학교폭력문제도 예전처럼 학교행사가 활성화되어 있으면 잘 일어나지 않을거에요. 줄다리기나 학급별 합창대회 등을 하면 반원들끼리 서로 협력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3. 2012.02.26 10:39

    앞으로 십수년내에 중국의 GDP가 미국을 추월하고 중국의 시대가 도래하면, 다시 예전의 월사 이정구가 대명 외교문서로 일세를 풍미하듯이, 오늘의 한덕수 대사처럼 영어로 성공한 것처럼, 한어로 성공하는 사람들의 시대가 되지 않을까요?? 더 올라가면 고려후기 원간섭기 당시 몽골어 통역으로 입신한 조인규, 유청신처럼요..

    지금의 40대까지는 당분간은 영어패권의 시대이기에 영어 하나로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30대 이하에서 성공하려면 중국어도 공부해야하는 이중부담의 시대일 것 같습니다..세계적 패권교체기에 우리처럼 주변부에 있는 나라는 한동안 혼란이 있겠지요..중국패권이 부상하고 있는 것이 빤히 보이는데, 그동안의 미국과의 끈이라는 자산을 잃고 싶지 않아서 한미동맹/ 한미FTA에 목을 매는 보수층을 보면, 명청교체기에 조선의 지배층(특히, 서인집권층)이 왜 판단의 착오를 해서 병자호란이 일어난지 알 듯도 합니다...

    • 2012.02.26 11:49

      '중국의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동아시아의 20세기>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건데... 지나가다가님 말씀 들으며 마음이 또 바빠지네요. <해방일기> 빨리 끝내고 그거 해야 하는데~

  4. 2012.02.26 17:51

    유태인들은 일반인들은 바빌론 유수 이후 페르시아 제국 시절까지는 당시의 공용어인 "아람어"를 쓰고, 다시 알렉산더의 정복 이후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어"를, 에루살렘 봉기 이후 디아스포라된 상태에서는 각지의 현지어로 형편껏 언어를 쉽게 쉽게 바꾼 반면에, 학자/지식인(지배층)에서는 "히브리어"가 계속 이어져 내려오다가 전후에 이스라엘 건국 이후에는 거의 사어/문어 수준인 히브리어를 일상어로 부활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는데,

    우리나라 지식인/학자/지배층은 당시의 주도적 패권어를 빨리 빨리 바꾸어서 출세의 방편으로 삼고, 일반 민중은 전래어를 계속 사용하는 점이 다른 것 같습니다..

    (최근의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탄압에서 보듯이)유태인들의 양태가 다 썩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히브리어"라는 고유의 정수를 바탕으로 외래문화를 수용하고, 서양 정신문명에 헬레니즘과 함께 헤브라이즘을 넣은 유태인의 저력을 생각할 때, 외래문화를 재빨리 습득하여 일반 민중을 통치하는 기술/ 지대로 활용한 우리나라 지식인/학자/지배층과 비교하여 여러모로 생각하게 됩니다..

    교수님이 번역하신 <메디치가 살인 사건>을 읽었는데, 막연히 아름다운 그림이라 여겼던 보티첼리의 그림 속에도 다양한 은유가 숨겨 있고, 사연이 있으며, 웬지 모를 엄혹한 피냄새가 나서 소름돋더군요^^ 그리고, 마키아벨리가 갖은 미사여구를 날려가며 쓴 헌사로 <군주론>을 바쳤던 메디치가가 "대 로렌쪼"시기에는 아직 이탈리아권에서도 정치적 동맹을 위해서 다른 영주들에게 갖은 아양과 헌사를 보내며 협력과 지원을 부탁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대 로렌쪼"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웬지 작아 보이기도 하고^^ 경쟁자인 파치가를 압박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치사한/(메디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고도 기발한) 책략들을 구사하는 것을 보고, 좀 깨더군요^^ 그 시절까지는 아직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왕후가 되는 까트린느 드 메디시스 수준으로 유럽세계의 강대국과 정략결혼(동맹)할 정도로 메디치가의 위세가 확고해지지 않았던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