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창설된 올림픽대회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국제행사의 하나가 되었다. 창설 초기에는 참가 주체가 개인이었는데 1908년 런던대회부터 국가별 참가가 제도화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국가’보다 ‘민족’이 참가 주체였다. 독립국가를 갖지 못한 민족도 각자의 올림픽위원회를 조직해서 올림픽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통치 하의 조선인은 올림픽위원회를 조직하지 못했다. 그래서 해방 전 마지막 대회인 1936년의 베를린대회에 손기정은 일본선수단에 끼어 참석해야 했고, 그래서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해방 후 첫 대회인 1948년 런던대회 참가는 독립한 민족으로서 국제무대에 나설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다. 1946년 7월 조선체육회 내에 올림픽대책위원회가 만들어져 런던대회 참가를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대책위 위원장은 미군정 문교부장이며 체육회 부회장인 유억겸이 맡았고 부위원장은 전경무와 이상백이 맡았다.

 

전경무의 역할이 두드러진 것이었다. 어린나이에 부모를 따라 하와이에 이주했다가 사업가로 성장한 전경무는 재미동포 재력가의 한 사람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에 공헌했고, 해방 후 미국과 조선을 오가며 민족 독립을 위한 노력을 계속한 사람이다. 자기 사업을 하면서 그 성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점에서 이승만 같은 직업적 운동가와 대비된다.

 

[전경무와 이상백 사진 올렸으면 좋겠습니다. 캡션은

“정치적 야심 없이 조선 독립운동에 성실히 공헌하던 재미 사업가 전경무(1900~1947)는 1947년 5월 29일 스톡홀름 IOC총회 참석을 위해 미군기를 타고 조선을 떠났다가 일본 후지산 부근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이상백(1902~1966)은 영남 부호의 자제로 해방 전 일본 체육계의 거물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 학계와 체육계 양쪽에서 큰 역할을 맡았다. 1947년 서울대에 사회학과를 만들어 사망 시까지 재직했고, 한국체육회장과 KOC 위원장, IOC 위원을 지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1641&docId=538934&mobile&categoryId=1641

http://terms.naver.com/entry.nhn?cid=1593&docId=542199&mobile&categoryId=1593

 

1946년 12월 5일 전경무가 유억겸에게 전보를 보냈다. IOC 부위원장이며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인 브런디지를 만나 조선의 올림픽 참가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언질을 받았다는 것이었다.(<서울신문> 1946년 12월 22일) 외부에서 들어온 첫 청신호였다. 그런데 이 보도가 나온 며칠 후 이를 뒤집는 브런디지의 발언이 합동통신을 통해 전해졌다.

 

“최근 나는 조선 올림픽참가 여부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조선은 통일된 독립국가가 될 때까지는 올림픽대회에 참가할 시기를 고대할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1946년 12월 28일)

 

이에 대해 올림픽대책위원회 이상백 부위원장이 ‘독립국가’가 되어 있지 않아도 올림픽 참가에 문제가 없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것은 통신원의 오전이나 혹은 속단일 것이다. 나는 올림픽 경기회의 정신으로나 관례로나 조선이 당연히 참가할 자격이 있으며 또 우리의 희망은 능히 관철될 것이라고 믿는다. 과거 일제시대라도 일본이 반대만 하지 않고 조선에 NOC(국내 올림픽위원회)만 있었다면 조선 단위로 참가했을 것이다. 이 예를 들면 필리핀 캐나다 애란 호주 남아프리카 이집트 및 인도지나 팔레스타인 등은 예전부터 당당히 독립단위로 승인을 받고 참가하고 있으며 다만 법규상으로 올림픽경기 일반규정 제9조에 의하여 정식 참가신청은 NOC를 거칠 필요가 있으므로 NOC가 없는 곳에는 이것을 창설해서 IOC에 승인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아직 IOC와 OOC의 정식 교섭도 연락도 되지 못하고 브런디지 씨와의 연락이 이번 전경무 씨의 도미로 겨우 시작된 것뿐이니 대외교섭에 여러 계단은 많이 취하겠으나 조선 참가는 확신이 있다고 단언한다. 참가선수를 양성하는 각 경기단체는 자신을 가지고 선수를 양성할 것이고 일반도 적극 후원해 주기를 바란다. 언제든 통일된 정권이 서고 완전독립이 하루라도 속히 되기를 고대하는 열의는 올림픽 문제를 떠나서도 국민의 일원으로 바라는 바이나 그러나 올림픽법규와 관례상 우리는 당당히 런던 올림픽참가를 주장할 근거와 자신이 있다.” (<경향신문> 1947년 1월 1일)

 

조선올림픽위원회(KOC)는 1947년 5월 16일 결성되었다. 조선체육회 회장과 부회장인 여운형과 유억겸이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스톡홀름의 IOC총회에 전경무 위원 파견을 결정했다. 전경무는 그 길에 비행기사고로 목숨을 잃었지만 IOC총회는 6월 20일에 KOC 승인을 의결했다. 그로써 1948년 7월의 런던대회 참가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올림픽 참가를 위해 도장 받을 곳이 아직 남아있었다. 미군정이었다. 출국 허가는 물론, 참가 경비도 미군정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올림픽후원회가 결성되어 후원권과 기념우표를 발매하고 국악원의 <대춘향전> 공연(1948년 1월 15~20일, 국도극장) 등 후원행사를 열었지만 수십 명 선수단을 런던에 보낼 비용에는 턱도 없었다. 환금에도 물론 미군정의 승인이 필요했다. 1인당 비용은 2천 달러로 책정되었다.

 

“63명으로 내정 - 올림픽 참가인원과 종목 상미결정(尙未決定)”

 

조선체육회에서는 세계올림픽대회에 파견할 연원과 선수 문제로 오랫동안 토의를 거듭하여 오던바 지난 15일 육상 역도 농구 레슬링 축구 권투 등의 역원을 포함한 선수 63명이 결정되어 KOC의 최후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한다. 그런데 최근 자전거선수의 추가참가 문제로 동 체육회에서 문제가 되어 있으나 또한 금명간 참가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군정당국에서는 기정한 63명도 많다고 말하고 있느니만큼 어떻게 될는지 주목을 끌고 있다 한다. 한편 올림픽준비위원회에서는 선수 1인당 2천 달러의 여비와 양복 가방 기타 15만 원을 계상하고 있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22일)

 

사이클이 추가되었다는 며칠 후의 기사를 보면 선수단 규모가 미군정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본부임원 경질 요구는 무슨 이유일까?

 

제14회 국제올림픽대회에 우리 조선대표로 파견할 단원의 최후 인선 문제는 자전거경기 종목의 추가로 인하여 일대 난항에 봉착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어니와 그 동안 군정당국의 호의로 인하여 총인원수 63명이 66명으로 3명의 추가를 보게 되어 이 문제는 일단락을 지었으나 이번에는 군정당국으로부터 본부위원 2명의 경질을 요구하여 또다시 파견단원의 최후결정에 막대한 지장을 던지고 있다.

 

즉 군정당국에서는 지난번 조선체육회이사회에서 결정한 본부위원 중 부단장 겸 총감독 이병학과 총무 김용구 대신에 부단장에 신기준 총감독에 이상백 양 씨로 경질하라는 요구가 있어 지난 28일에 동 이사회를 개최하고 전기 요구의 수락 여부를 토의한 결과 이것을 전적으로 거부하게 되어 그 최후심리를 KOC에 위촉하였다는데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는지 자못 주목되는 바이다. 그리고 자전거경기의 감독 및 선수는 다음과 같다. 감독 장일홍. 선수 권익현, 황산웅. (<조선일보> 1948년 5월 30일)

 

조선체육회와 KOC가 6월 4일부터 6일까지 결정한 선수단 본부임원은 단장 정환범, 총감독 이병학, 부단장 신기준, 총무 정상윤-김능구, 재무 심재홍, 의무 유한철, 수원(隨員) 손기정의 8명이었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8일) 군정당국이 경질을 요구한 두 명 중 한 명이 바뀐 것이다. 그런데 출발을 보름 앞둔 이 시점까지도 딘 군정장관은 사람을 바꾸라는 요구를 계속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출발 1주일 앞두고 아직도 올림픽 파견단 편성문제는 결정을 보지 못하고 지난 12일에는 다시 딘 군정장관이 역원진의 일부를 변경한 문제를 가지고 KOC와 조선체육회 이사회가 각각 개최되었는데 KOC에서는 이묘묵·안동원·김용택·정환범 제씨 외 1명의 5의원이 선출되어 KOC에서 승인한 명부를 개정한 이유를 규명하는 동시 KOC에서 승인한 원안대로 추진시킬 것 등을 군정장관에게 건의할 것 등을 결의하여 14일 오전 군정장관을 방문하였다고 하며 일방 체육회 이사회에서는 대표단 편성에 있어 불필요하게도 시간적으로 지연시켜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주었음과 올림픽 파견에 관한 군정청과의 교섭 자주실행이 불가능상태에 이름은 동 이사회의 책임이라는 결론으로 회장 이하 이사·감사가 총사직을 결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동 회의에 이어 14일 오후 1시부터는 임시 평의원회의가 개최되게 되었는데 이 회의에서의 결의가 또한 주목되고 있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6월 15일)

 

간부진의 ‘자폭’이라 할 이 사태가 벌어진 구체적 경위는 확인할 수 없으나 맥락으로 보아 미군정의 선수단 본부임원 교체 요구로 촉발된 것은 분명하다. 교체 요구의 이유가 무엇일까? 기능상의 필요는 미군정이 아니라 체육회와 KOC가 판단할 일이었다. 선수단 참여를 특혜로 여긴 인물들이 로비를 통해 미군정의 힘을 빌리려 한 것으로 짐작된다.

 

미군정이 교체를 요구한 것으로 나타난 두 사람 중 하나가 이상백이었다. 이상백은 한국인으로 첫 IOC 위원을 지내는 등 체육계의 독보적 거물이 될 사람이었다. 1984년 10월 27일자 <경향신문>에 “여명의 개척자들” 시리즈 제30회에 이상백이 등장하는데, 1948년 올림픽을 둘러싼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실관계의 착오가 더러 눈에 띄지만 맥락 파악에는 크게 문제되지 않으므로 그대로 옮겨놓는다.

 

“여명의 개척자들(30) 이상백 - 올림픽 눈뜨게 한 스포츠계의 ‘큰 별’”

 

1923년 일본의 와세다대학 근처의 다카다노바바의 귀족촌. 최고급 양복을 차려입은 184cm의 훤칠한 한국청년이 하숙을 구한다. ‘조센징’이라며 기피하던 그들도 하숙비는 요구하는 대로 주겠다는 청년의 말에 큰 방을 내준다. 다음날 그는 일본 귀족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초호화 가재도구를 들여놓는다. 하숙집 주인도 20세밖에 안 된다는 청년의 엄청난 씀씀이에 깜짝 놀란다. 더구나 한국인이... 상백(想白) 이상백. 한국 올림픽의 선구자인 그는 이렇게 갈고닦아진다.

 

(...) 와세다대학 2학년 때 농구부를 창설한 그는 28년 일본대학농구협회를 조직, 천부적인 수완을 발휘하게 된다. 28년 와세다대학 농구팀의 선수 겸 인솔자로 미국 원정을 시도한 그는 샌프란시스코시장의 환영연에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며 답사를 읽어 “일본에도 영어를 저렇게 잘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말을 들었다.

 

(...) 32년 LA올림픽 일본대표단 본부임원으로 일본 체육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한국 젊은이들이 국제무대에 참가하는 데 후원자로서, 또 해방 후 한국 올림픽운동을 펴는 데 필요한 경험을 축적한다.

 

32년 일본선수단이 LA에 가는 도중 하와이에 기항하자 한국 독립에 앞장을 섰던 한인회에서 일본선수단 일원으로 참가한 마라톤선수 김은배와 권태하, 그리고 복싱의 황을수를 초청, 환영연을 베푼다. 한인회는 이들을 데리고 당시 비참하게 살던 동포들의 생활상과 나라를 찾기 위한 운동을 소개, 애국심을 고취시킨다.

 

뒤늦게 이 얘기를 들은 이상백은 한인회를 찾아가 “나는 일본사람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살아왔다. 또 일본대표단의 한국선수들도 용기와 포부를 불태우고 있는 젊은이들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 동포의 비참한 생활상을 공개하는가?”라고 항의했다. 그의 지론은 비록 나라를 빼앗긴 설움 속에서 살고 있지만 조국광복의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백배사죄한 한인회는 이튿날 한국어신문에 그의 멋진 사상을 대서특필한다.

 

35년 일본체육회 전무로 발탁된 이상백은 36년 베를린올림픽 일본대표단 총무로 참가, 뒷날 그의 절친한 친구가 되는 브런디지를 만난다. 한국선수 출전을 가로막던 일본 집행부의 횡포를 저지시킨 것도 그가 전무로 있었기 때문이다.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우승의 월계관을 쓴 것도 바로 이상백의 노력으로 출전이 가능했던 것.

 

민족 해방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일본 체육계에서 갈고닦아 온 조직력과 외교수완을 마음껏 발휘한다. 한국의 올림픽위원회가 이상백에 의해 만들어진 지 1년 후인 47년 5월 15일, 조선주둔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브런디지 IOC 위원장으로부터 이상백을 도와 조선의 올림픽 참가에 힘써 달라는 서한을 받는다. 하지는 다음날 KOC 부위원장인 이상백과 오찬을 함께 한 자리에서 브런디지의 편지를 공개하며 “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선의 IOC 가입 문제를 서둘러 달라.”고 당부했다.

 

일에 착수한 이상백은 36년 베를린올림픽 때 처음 대면한 후 서신 왕래 등으로 우정을 나누었던 브런디지의 서신에 감사하면서 당시 KOC 부위원장 전경무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가 5월 27일 저녁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자 이상백은 후속조치로 미국에 거주하던 이원순을 6월 15일 스톡홀름에서 열린 IOC 제40차 총회에 급파, KOC의 IOC 가입을 정식으로 승인받고 한국의 올림픽 참가 결정 선물을 얻게 된다.

 

이로써 한국은 48년 7월 29일부터 8월 14일까지 열린 런던올림픽에 69명의 선수단을 파견한다. 이상백의 수완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미 1회 대회를 51년 3월 인도에서 치른 아시안게임 정식 회원국이었던 북한을 축출하고 한국을 가입시켰다. 66년 유니버시아드대회 때는 한국에 “KOREA”를, 그리고 북한에는 “NORTH KOREA”라는 국호를 표기하게 한 것도 모두 그의 탁월한 외교능력 덕분이었다.

 

이상백. 그가 한국스포츠를 위해 해온 일들은 너무나 많다. 그는 66년 4월 14일 심근경색증으로 세상을 등졌다. 당시 나이는 64세였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로 매도되기도 했고 이 때문에 그의 수완도 능력만큼 발휘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

 

신상돈 기자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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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6.17 19:29

    미군정이 올림픽 선수단 본부 임원 중 조선이 올림픽에 참가하도록 가장 노력을 해 온 이상백을 교체하도록 요구한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군요. <해방 일기>를 통해서 체육관련 내용까지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어서 흥미진진합니다.

    • 2013.06.17 22:07

      히~ 오독하셨네요. 이상백을 교체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이상백으로 교체하라는 거였어요.
      프레시안에 제목이 좀 아쉬웠어요. 이상백을 부각시킨 것은 친일파 출신 '실력자'들이 해방 조선에서 어떻게 행세하고 있었는지 하나의 사례로 내놓은 건데... 끝에 붙인 1984년 경향신문 기사 내용은 대개 이상백 자신의 회고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1984년의 경향신문은 지금의 경향신문과 성격이 전혀 다른 신문이었죠.

  2. 2013.06.18 11:49

    네~ 제가 오독했군요. 예전 신문의 글이 한문장 길이가 너무 길군요. 올림픽 정신이 온국민의 단합과 통일, 나아가서 여러 민족과 국가의 화합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이상백이 일제시대에 일본 스포츠계의 중진으로 활약했다 하더라도 해방공간에서 올림픽에 참가하고자 노력을 했던 것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주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