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복무기간이 짧아진 요즘은 군대 풍속도 많이 바뀐 모양이다. 1970년대에는 육군사병 복무기간이 만 3년에 육박했는데, 지겹게 길었다. ‘고참’ 대우가 각별했던 것도 그 긴 시간에 변조(變調)를 좀 넣어주지 않으면 견뎌내기가 너무 힘들고, 따라서 사고 위험이 엄청나게 커질 것이기 때문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부대 성격에 따라 편차가 있기는 했지만 대개 3년차에 접어들면 공식적인 고참 대우를 받기 시작하고, 전역이 서너 달 앞으로 다가오면 ‘말년고참’이라 하여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존재가 된다. 말년 고참 자신도 ‘몸조심’을 한다. 근 3년 고이 지켜온 몸을 사회 복귀를 앞두고 다친다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또, 그만큼 은인자중하는 존재를 잘못 건드렸다가 무슨 탈이 날지 알 수 없으니 윗사람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

 

말년 고참을 ‘갈참’이라고도 불렀다. 이제 갈 사람이니까 관계를 정리할 대상이란 말이다. 1948년 6월, 미군정도 갈참이 되어 있었다. 진주한 지 33개월이 되었고, 철수 조건인 정부수립도 카운트다운에 들어가 있었다. 병력은 이미 진주 초기에 비해 많이 줄어들어 있었고, 최근에는 조선에 와 있던 군인가족의 귀국 명령이 떨어졌다.

 

군대생활을 조용히 하던 고참은 말년에 별로 긴장할 일이 없다. 그런데 조그만 권력을 악착같이 휘둘러 졸병들의 원한을 많이 샀던 악질 고참은 말년이 전전긍긍이다. 누가 들이받아도 보복할 길이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말년고참이 있는 내무반에는 응징의 수위를 둘러싸고 긴장이 흐르기도 한다.

 

1948년 6월 말년의 미군정은 어떤 모습이었나? 엊그제 일기에서 하지가 국회의원들에게 ‘공함(公函)’이랍시고 보냈다가 국회에서 ‘사한(私翰)’으로 규정당하는 수모를 겪은 이야기를 했다. 이 무렵 일어난 다른 두 가지 사건에서도 당시 미군정이 조선인의 눈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총독부 고관 출신 일본인들이 조선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나돈 것이 하나의 사건이다.

 

“전범자, 전 총독부 고관들, 해방된 이 땅에 다시 출몰”

 

서른여섯 해 동안 조선민족의 피를 빨아먹다가 나중에는 세계질서를 교란시키는 전쟁을 일으키고 이를 빙자하여 젊은이들은 싸움터와 군수공장으로 끌려가고 창씨령을 나리어 성을 갈게 하고 머리를 깎게 하고 농촌으로부터는 곡식과 심지어는 볏짚에 이르기까지 깡그리 훑더듬어 빼앗아가서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오직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치며 침묵의 한숨을 쉬게 하던 불공대천지원수인 일본인 그중에서도 총독 시절의 고관급들이 해방 이후 무사히 제 땅으로 돌아간 것만도 천행이거늘 건국기에 처한 오늘날 무슨 까닭인지 조선 땅에 하나씩 둘씩 자취를 나타내어 조선민족의 분격을 사는 동시에 항간에 불길한 유언비어를 빚어내고 있다.

 

그 한 가지 실례로 지난 4일 오후 부산에서 모 통신사 기자가 그전 조선총독부 재무국장 미즈다(水田直昌)를 만났는데 미즈다는 당황한 빛을 띠며 말하기를 자기 외에 학무국장을 하던 시오바라(鹽原時三郞)와 조선은행 부두취 기미지마(君島一郞)도 조선에 와 있다고 하며 조선에 온 이유와 행방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었다 한다. 이밖에도 항간에는 여러 명의 그전 총독부 시절 일본인 고관이 조선에 와 있다는 풍문과 함께 상서롭지 못한 이야기가 떠돌고 있는데 특히 일본인에 대하여서 조선민족은 절치부심하는 원한을 가진 만치 만일 부득이한 사정으로 미군당국에서 데려온다면 그때마다 데려오는 이유를 명확히 발표하여 민중에게 불안한 자극을 주지 말도록 하기를 바라는 요망이 높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8일)

 

일본인 몇 명 얼굴이 보였다고 해서 이렇게 긴장하는 것이 지금 사람 눈에는 과민반응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수십 년간 일본인의 폭압지배를 받은 직후의 피해의식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해방 전의 피해에 대한 원한만이 아니다. 일본과 남조선을 점령한 미국의 조선인 대접이 일본인 대접보다 못하다는 불만까지 겹쳐져 있었다.

 

“조선인보다 일인 우대 - INS 특파원의 조-일 군정 비판”

 

[동경 6일 발 INS 합동] 최근 서울을 방문했던 INS 특파원 리처드 씨는 조선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최근까지 미국의 적이었던 일본인은 미국에 협력하였던 조선인보다도 좋은 이지적(理智的) 대우를 받고 있다. 조선은 불행히도 미-소 양국의 열강정책의 무대화하여 있으며 미 국무성 당국은 조선인이 엄혹한 개인적 제한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일본인에게 그네들이 종래 향유하지 못하던 자유를 일상생활에 부여함으로써 일본인에게 민주주의의 덕택을 부여하려는 맥아더 장군의 대일 정책과 현저한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인은 가로를 통행할 때 희색을 보이지 않는 반면 일본인은 희색이 넘쳐 가로를 활보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인은 해외에서 교양을 받은 조선 지도자를 갖고는 있으나 조선인은 자기 자신이 저능아 혹은 죄인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은 맥아더사령부 관할 하에 전쟁을 야기한 책임은 중대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권리와 위엄성은 존중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맥아더 장군이 일본을 친미국가로서 아시아 반소 민주전선의 보루화하려고 기도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미 국무성의 대조선 정책은 민주주의화한 조선의 장래 중요성과 조선인의 미국관에 대한 고려를 등한시하고 있는 듯하다. 조선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지의 하나이다. 현재 허다한 남조선 인민은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북조선 인민과 마찬가지로 일본으로 입국하려고 하고 있다.

 

또 맥아더사령부는 야간통행금지를 실시하지 않고 있는 반면 조선에서는 밤 10시 이후 통행을 금지하고 있으며 또 조선주둔 미군은 조선인과 사회적 교제를 못하고 있는 반면 맥아더 사령관은 일본인과 미 군인 간의 사상교류를 장려하고 있는 것이다. 또 조선에서는 50대 1의 비현실적인 미화 교환율이 지정되고 있는 반면 일본에서는 실제성 있는 500대 1의 시세가 시인되어 일본 무역은 조장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은 무역 발전을 자랑하고 있으나 조선 상품은 제반 제한 금지로 말미암아 무역 진흥이 불가능한 실정에 있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7일)

 

미군의 일본인 편애에 대한 조선인의 의심은 뿌리 깊은 것이었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상륙하는 인천부두에서 일본 경찰이 환영인파에 발포하여 사상자를 낸 일이 있었는데도 미군정은 정당한 치안 행위로 인정하고 불문에 붙였다. 그리고 총독부의 조선인 통치를 물려받으면서 몇 달 동안 일본인 간부들의 도움을 받았다. 갓 해방된 민족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 뿐 아니라 ‘외세’로서 미군의 성격을 의심하게 하는 일이었다.

 

이제 전 총독부 고관들의 모습이 보인다니 ‘갈참’이 된 지금까지도 미군정이 조선인 통치에 일본인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널리 일어난 것이다. 딘 군정장관이 서둘러 해명에 나선 것은 이런 불온한 분위기 때문이었지만, 효과는 신통치 않았다. 바로 그날로 언론계의 반박이 들어왔다.

 

우리겨레의 고혈을 착취하던 전 총독부 고관들이 내조하여 이 강산을 활보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전 겨레의 격분을 사고 있는 이때 9일 딘 군정장관은 일인 내조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모 통신기자가 6월 4일 부산에서 미즈다라는 일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였다는 보도는 허보이다. 이 허보로 인하여 조선 언론기관이나 개인 간에 비난이 자자하였다. 이것은 허보 또는 오보의 전파로 야기되는 혼란과 흥분의 불행한 일례이다. 재일 미군당국에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문제의 일인은 모 기자가 부산에서 만났다는 날에는 동경에 있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군정당국에서 미즈다의 내조를 요청한 일도 없으며 또 같이 보도된 미즈다 이외의 기타 일인 2명에 대하여도 요청한 사실이 없다. 본관이 작일 발표한 바와 같이 미군당국은 조선국민을 해하는 일인을 조선에 불러올 의사는 전연 없다.” (<서울신문> 1948년 6월 11일)

 

전 총독부 시대의 일인고관이 내조하여 당당이 우리 땅을 활보하고 있으며 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 하여 일반의 의혹이 점점 심해 가고 있는데 대하여 9일 딘 군정장관은 철저 조사 후 발표할 것을 약속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이나 10일 군정장관실에서는 조사의 결과 전연 허보로 판명되었다고 단정하였다. 그런데 동 발표에 의하면 미즈다의 내조도 근거가 없고 또 동시에 보도된 시오바라·기미지마의 2명도 요청한 일이 없다고 발표되어 의혹이 풀리기는커녕 다시 어떠한 다른 의혹을 자아내고 있다.

 

기미지마에 관하여서는 지난번 사임한 안 민정장관이 다녀간 일이 있다고 기자단 회견석상에서 언명하였고 또 그전 군정장관에 물어달라는 의뢰를 받은 군정장관실 모 씨가 역시 중앙청 기자실에서 기미지마와 오쿠무라라는 자는 왔다 갔다고 언명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며 미즈다 내조에 관하여도 이 문제를 보도한 기관에서는 내조를 확인했다고 하고 있어 앞으로의 진전은 극히 주목을 끌고 있다.

 

◊ 조선통신 본사 담: “이번 기사에 관하여 공보부에 가서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고 돌아온 길인데 방금 이 기사를 보도한 부산 기자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그 기사 내용에 허보가 없을 뿐더러 그 왜놈들의 사진까지 취재 당시에 찍어두었으니 틀림없다는 확답이 왔군요.” (<조선일보> 1948년 6월 11일)

 

의혹이 가라앉기는커녕 확산되기만 하자 6월 15일 공보부장과 경무부장 연명으로 이 소문이 남로당 세포인 신문기자가 만들어낸 허위선전이라고 발표했다.(<동아일보> 1948년 6월 16일) 그러나 이 발표는 씨가 먹히지 않았는지 이튿날 하지가 직접 특별성명을 내야 했다. 이 성명에서 하지는 크레믈린이 “미국의 위신을 손상시킴을 의도하는 신노선을 발견”한 것이라며, 공산당의 선전이 이런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1. 미국은 목하 일본을 군국(軍國)으로서 재건시키고 있는 중이라는 것. 이것은 미국 당국이 최근 일본인 자신의 의식을 자급하여 이 이상 나머지 세계경제에 부담이 되지 않게 하려는 인도적 계획안을 발표한 고로 실정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점차 신빙케 된 것으로서 전연 허언이다. 이 계획은 실재적으로나 또는 잠재적으로나 일본의 군사력을 복구시키는 문제와는 전연 관련이 없는 것으로서 이는 다만 세계평화에 공헌하며 인류의 생존을 원조함을 목적으로 할 뿐이다.

 

2. 주조선미군사령부는 목하 전 조선총독부 고관들을 비호하며 또한 이들을 사용 중이라는 것. 이것은 공산당 선전에 빠지기 쉬운 조선인들에게는 좋은 화제이다. 그러나 그중에 내지 그 의미하는 바에는 하등의 진실도 없는 것이다. 본 사령부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조선에 일본인 전 총독부 관리가 있음을 모른다.

 

3. 제주도 평화회복에 무장한 일본인이 참가 중이라는 것. 이것은 제주도에 격렬한 정치적 소요를 일으키고 있는 공산당이 그들의 형제자매 살육계획에 조력시키고자 약간의 일본인 공산당원을 수송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전면적으로 미군 점령 하의 조선에 있어서는 제주도나 어느 곳을 막론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어 일본인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17일)

 

당장 문제는 3개항 중 제2항이다. 하지는 “조선에 일본인 전 총독부 관리가 있음을 모른다”며 현재형을 썼다. 앞서 들어온 적이 있었느냐 하는 질문에는 대답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앞에 옮겨놓은 딘의 6월 9일 담화문에는 “조선국민을 해하는 일인을 조선에 불러올 의사는 전연 없다”고 했다. 조선국민을 해하지 않는 일인이라고 생각되면 불러올 수 있다는 말이다. 정병준은 <독도 1947> 240-241쪽에 이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미군정이 일본인 고관들을 활용하고 있다는 소문은 강력한 반일감정과 반군정-반미 감정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것은 진주 후 미군이 한동안 일본인 관료들을 그대로 활용했던 과거의 정책과 연결되면서 나름대로 있음직한 일이라는 의혹을 자아냈다. (...) 한국인들에게 일본이라는 존재는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었다. 일본의 그림자는 곧바로 침략 혹은 한국 이익의 침해로 해석되었다. 사상적-이데올로기적 차이와 대립은 반일과 민족이익 수호라는 용광로 속에서 용해되었다.

 

전 총독부 고관들이 잠입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독당과 민독당을 비롯한 총 11개 정당이 6월 15일 반일제투쟁위원회 준비위원회를 결성해 반일투쟁을 천명하며, 미국의 일본 재무장 정책을 비판했다. 주한미군 정보당국은 미군 감독하에 일본이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으려고 한다는 소문이 만연하고 있으며, 제주도 반군진압에 일본군이 활용되며, 독도폭격사건의 조종사가 일본인이라는 얘기가 신뢰를 얻고 있다고 적었다. 한독당 선전부는 미국이 일본을 재무장시키기 위해 특공대를 훈련시키고 있는데, 독도폭격사건이 “그 왜적들의 소위(所爲)”가 아닌가 심히 우려되고 격분되는 바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사건, ‘독도폭격사건’이 나온다. 1948년 6월 8일 정오 가까운 시각에 독도 인근에서 조업하고 있던 수십 척의 어선이 ‘정체불명’의 비행대의 폭격을 받아 십여 명이 목숨을 잃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사건이었다. 6월 11일 <조선일보>에 첫 기사가 나간 후 며칠 동안은 비행대가 ‘정체불명’으로 계속 보도되었지만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피해 어민의 증언으로 미국 비행대라는 사실에 애초부터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일본에 주둔하는 미공군 비행대가 독도에 와서 조선 어민들에게 폭격을 퍼붓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니 ‘일본인 조종사’ 설까지 나온 것이다. 이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하겠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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