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3월 중국 국부군이 공산당의 오랜 근거지 연안을 탈취하면서부터 잘만 하면 공산군의 완전 박멸에 성공할 수도 있겠다는 상황이 꽤 오래 계속되었다. 그러나 해가 바뀔 무렵에는 국민당 지지자들도 그런 희망을 지키기 힘들게 되었고, 여름에 와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중국 양분을 점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공산당의 위세가 자라났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은 일본과의 전쟁 중부터 미국의 지원에 의존해 왔다. 일본 항복 후 유리한 조건을 누리게 된 국민당 정권의 원조 수요는 줄어들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국민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하고 미국의 원조를 더 많이 요구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미국 여론이 돌아서고 그에 따라 미국 정부와 의회의 태도도 갈수록 엄격해졌다.

 

“미 대중 원조 결정 - 동시 장 정권 부패상 통격”

 

[워싱턴 27일 발 UP 조선] 상원 외교위원회는 중국에 대한 4억6300만 불 원조안을 가결하였는데 동시에 장개석 영도 하 국민정부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13명으로 구성된 동 위원회는 원조 계획을 전원 일치로 승인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이 보고서는 중국 내의 민간 파업, 경제적 혼란에 언급한 후 장개석 정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비난하였다.

 

“비능률, 부패, 관료적 폐해는 혼란과 인플레이션 시기에 더욱 파괴적 효과를 내고 있다. 군사 지도의 부적당한 것과 국 지휘관 사이의 부패는 국부군대의 저열한 사기의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에 깊은 동정을 가지고 있으나 미국의 원조는 중국의 자조 노력을 조장하지 못한 것이 상례였다. 현재 계획은 중국 인민 자신이 장 정부를 신임하지 않고 있으므로 미국 측에 유망한 열의를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 대중 원조 계획은 중국 내 건설적이고 민주주의적 분자를 격려하기 위하여 채택하여야 한다. 그리고 중국 지도자들은 현재 차별대우로 부진 상태에 있는 미국 실업가의 활동을 조장하기를 바란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28일)

 

미국 여론을 만족시키기 위해 국민당정부는 1948년 봄에 입헌정부 수립의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장개석의 ‘비상대권’이 유지되었으므로 ‘장개석정부’의 성격을 바꿀 수는 없었다. 공산군(인민해방군)과의 내전은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장개석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미약하게나마 보이고 있었다.

 

“장개석 씨의 고문 우 주교, 이승만 김구 양씨에 친서 - 정부조직 앞두고 의의 심대”

 

정부 탄생 전야의 국내 정계는 아연 활발히 움직이고 있음은 물론이려니와 조선 독립에 지대한 성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는 우방 중국의 열의는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즉 지난 15일 상해에서 발행된 화문지 신문(申聞)보(報)에 의하면 김구 씨 영도 하의 단체의 인물을 정부에 포섭하기를 종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최근 유 영사의 경교장 방문은 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며, 또 국내에서는 혁명애국지사의 포섭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이러한 순간에 있어서 일찍 이승만 박사와 김구 씨와는 망명시대부터 친교가 있고 현재는 장개석 대통령의 고문으로 있는 남경 우(于)빈(斌) 주교는 17일 여(呂)자(子)훈(勳) 씨를 통하여 친서를 양 영수에게 각각 전달하였다 하는데 동 주교의 서한은 정부 수립을 목첩에 둔 이때 의의가 깊은 것이며 이 박사에게는 정부 조각에 큰 참고가 될 것이라 한다. 그리고 북조선에서 단정을 수립하려는 때이니만큼 김구 씨 본연의 노선에 환원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18일)

 

김구의 “본연의 노선”이라 함은 1948년 들어 남북협상에 나서기 전까지의 ‘반공반탁’ 노선을 말하는 것이다. 이북의 정부수립 추진이 7월 10일의 총선거 계획 발표로 분명해진 이상 남북협상은 물 건너가 버렸고, 이제 이승만 대통령 아래 국무총리를 맡는 것이 그에게 유력한 진로일 것으로 관측되고 있었다.

 

중국 땅에 있으면서 국민당정부의 보호와 지원을 받던 임시정부에 경력의 근거를 둔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이 손잡고 한국 정부를 이끌게 되면 그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갖게 될 것으로 장개석은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 누구도 장개석의 권유에 따르지 않았다. 장개석의 권위가 떨어지고 국민당정부의 장래가 어두워진 것도 원인의 일부였을 것이다.

 

한민족의 역사는 2천년 이상 중국의 상황을 중요한 배경으로 삼아 전개되어 왔다. 개항기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식민지시대에도 한민족의 해외 항일운동이 대부분 중국 땅에서 펼쳐졌고, 국민당정부와 공산당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이제 국민당정부의 영향력이 임시정부 출신 인사들에게도 잘 먹히지 않게 된 것은 한중관계의 역사상 공식적 관계가 이례적으로 약화된 상황이다. 미국과 소련의 힘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국민당정부의 영향력이 이처럼 약화된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의 역할은 어땠을까? 이북 정권과 중국공산당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었을 것을 여러 가지 여건으로 짐작할 수 있다.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출신의 연안파는 물론이고 김일성 등 빨치산파 지도자들도 중국공산당 당원이었다. 그리고 이북 정권은 만주의 ‘해방전쟁’을 적극 도와주고 있었으며 조선인의 참여가 인민해방군에게 큰 힘을 보태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초기의 이북 정권과 중국공산당 사이의 관계는 별로 드러난 것이 없다. 지금까지도 밝혀진 것이 많지 않고, 당시에도 미군 첩보기관에 포착된 것이 별로 없었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터질 때까지도 미군이 북-중 관계의 중요한 사실 세 가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350쪽)

 

1. 이북에서 소련의 영향보다 중국의 영향이 우월했다는 사실.

2. 조선인과 중국인이 혁명의 협력관계로 연대되어 있었다는 사실.

3. 역사가로서 돌이켜볼 때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로 생각해야 할 만큼 그 연대관계가 강력한 것이었다는 사실.

 

커밍스는 이어서 이후 북-중 관계의 중요성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한다.

 

1. 북한 학자들은 김일성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이것을 감추려 들었다.

2. 소련 측은 중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이것을 묵살했다.

3. 남한 학자들은 북한이 ‘소련 괴뢰’라는 주장에만 집착했다.

4. 1970년대까지 미국 학자들은 공산권을 한 덩어리로 보는 관점에만 매달렸다.

 

커밍스의 설명에는 중국 학계의 입장이 빠져 있다. 이 빈틈을 내 추측으로 메운다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지나친 좌경노선으로 학술연구가 원활하지 못한 기간이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겠다. 1980년대까지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외부 학계에서 참고할 만한 연구 성과를 거의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학술계의 공황상태가 대단히 심각한 것으로 보였다.

 

초기 북-중 관계에 대한 연구의 중요한 실마리를 10년 전 연변에 체류할 때 감지한 것이 있다. 조선족 연구자 류연산의 구술자료 수집 작업이다. 류연산(1957~2011년)은 당시 연변인민출판사 편집원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고, 그 후 연변대학 조선어문학계 교수로 부임했다가 연전에 작고했다.

 

류연산은 1990년대 초부터 조선족사회의 역사 탐구를 위한 구술자료 수집 작업에 매진했다. 이 작업에 초기 북-중 관계가 상당히 포함되었다. 중국 해방전쟁과 한국전쟁에 연이어 참전했던 사람들을 포함해 당시 상황을 여러 위치에서 겪은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그가 수집한 자료에 들어 있다. 그 자료가 제대로 활용된다면 초기 북-중 관계를 비롯한 많은 주제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류연산은 타계를 앞두고 녹음테이프 4백여 개를 비롯한 수집 자료를 연변대학에 남겼는데, 그 자료의 원활한 처리를 위해 한국 학계에서도 관심을 갖고 협력을 제공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다음 달에 “해방일기” 집필을 끝내면 3년 만에 연변을 방문할 예정인데, 그 길에 그 자료가 처해 있는 상황도 알아보고자 한다.

 

류 선생의 명복을 빌며, 그가 남긴 녹음테이프 목록 일부를 아래 붙여놓는다.

 

록음 테잎(A) 목록

 

1) 대련시 장상현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

2) 대련시 김도영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

3) 대련시 백석형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

4) 대련시 리림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

5) 무순시 허관문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

6) 무순시 예운혜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

7-10) 무순시 최강 2000.3월/ 조선의용군 관련

11) 무순시 최혜순(최강 부인) 2000.3월/ 해방전쟁

12) 무순시 김성한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

13-14) 무순시 리영우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

15-16) 무순시 량덕준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17-18) 무순시 윤재환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19) 무순시 최광길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

20) 무순시 려쾌술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21) 심양 김창원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22) 심양 최창수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23) 단동 최정순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24) 단동 윤옥순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25) 단동 김정자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26) 단동 권태영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27) 단동 황의간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28) 매화구 산성진 김경수 2000.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29) 매화구 산성진 리용기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30-31) 매화구 산성진 강룡권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32-33) 매화구 산성진 강룡권 2005. 5. 22일/ 매화구시 강씨 딸집에서

34) 매화구 산성진 金潤益 2000. 3월/ 지원군, 장진호전투, 비행기 로획

35) 매화구 산성진 韋忠院(漢族) 2000. 3월/ 지원군 담가대

36) 매화구 산성진 孫秉義(漢族) 2000. 3월/ 지원군

37-38) 단동시 李景洙 2005.8.10일/ 반우파투쟁 관련

39) 단동시 韓石梅(리경수의 부인) 2005.8.10일/ 조선전쟁시기 단동 군병원, 김성수의 남만방직공장, 오애은 목사 이야기

40-42) 봉성시 李秀哲, 金福順 부부 2005. 8. 11일/ 광복 후 서울 다녀옴, 조선의용군 참가, 해방전쟁시기 토지개혁, 감옥, 문혁시기 투쟁-

43) 연길 최하진 2006.1.3일/ 해방전쟁, 조선전쟁 간호병

44-45) 룡정 최근갑 2003년/ 은진중학, 반우파, 룡정역사기념사업(선구자탑 관련)

46) 연길 崔高峰 2006년 8월/ 부친 崔性純 관련/ 문혁시기 중심으로(문자정리 됨)

47) 서란시 金太福 2005. 3. 24일/ 서란시 조선족 일반, 문혁시기 군 생활 관련

48-49) 연길 崔高峰 2005. 6. 2일/ 부친 최성순 관련

50) 서란시 金太福 2004. 10. 18일/ 서란시 조선족 관련/ 광복초기 피난살이 등

51) 서란시 朴守振 2004. 10. 19일/ 부친 朴在浩 관련

52-53) 서란시 허춘자(박재호 부인), 박수진(박재호 아들), 朴仙嬌(박재호의 딸) 2005. 3. 24일/ 박재호 관련 가정사

54) 서란시 高光東 2004. 10. 19일/ 해방전쟁 전투영웅, 1950년 8월 19일 조선 최후로 나감

55) 서란시 金海鎭, 高正熙(강원도 출신), 林興龍 2005. 3. 24일/ 김해진은 3천리 구국동맹원으로 18년 감옥/ 고정희 이민단 생활, 귀국길/ 해군 생활 등/ 림흥룡의 부친 3천리 구국동맹원 18년 감옥살이

56-58) 서란시 崔元集, 李春福 夫婦 2005. 3. 25일/ 강원도 출신의 농촌생활, 이주, 해방전쟁, 지원군 포병, 3천리구국동맹, 문혁시기, 며느리 시집살이 등

59-67) 길림시 김영아 권사, 조인순(딸), 김영자(신도/ 강원도출신) 2001, 5, 2-3일 / 길림시 조선족 역사관련, 신앙생활 중심으로

68-70) 본계시 왜두산 조선족교회 2005, 12, 25-26일/ 성탄절 기도와 신앙생활 이야기

71-73) 교하시 朴相源, 姜京愛, 朴尙來 손자와 손녀와 손녀사위 2005. 5. 24일/ 해방전쟁 군 생활, 토지개혁, 신앙생활, 박상래 관련(박상래 맏손자 조선 감)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