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 변하고 있다. 우선 대학의 간판 노릇을 하던 총장직이 유능한 행정가 위주로 바뀌고 있다. 명망높은 거물보다 '경영마인드'를 가진 활동가들이 갈수록 선호되고 있다.

 

대학평가제가 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시설투자비율, 도서관 장서 수, 교수 대 학생 비율, 졸업생 취업률 등 각종 계량적 지표들이 정부의 재정지원에서부터 신입생의 지원 경향까지 좌우하게 돼 가고 있다. 그 압력으로 인해 대학 내에 교수평가제의 움직임까지 생겨나고 있다.

 

대학에 관한 얘기에서 '경쟁력'이 빠질 수 없는 기준으로 제기되고 대학교육을 일종의 서비스로 보는 관점이 힘을 얻고 있다. 초연한 '상아탑' 대신 대학을 하나의 기업체로 보는 관점이 강화되는 시점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일까. 이 현상의 궁극적 의미는 무엇일까. 빌 리딩스의 유저 <무너지는 대학>을 보면 이것이 세계적 현상임을 알 수 있으며 우리 대학이 겪고 있는 문제의 좌표를 찾아볼 수도 있다.

 

리딩스는 대학의 붕괴를 탈근대현상(post-modernism)의 일환으로 본다. 그는 근대적 대학의 발전을 세 단계로 나눈다. 첫 단계, 형성기의 대학은 이성(理性)의 대학이었다. 종교를 바탕으로 하던 중세 대학이 칸트적 이성을 담론의 매체로 하는 새로운 대학사회로 재편된 것이다.

 

둘째 단계, 전성기의 대학은 문화의 대학이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며 민족국가의 발달에 따라 대학은 민족문화의 본산으로 1차적 기능을 발휘하게 됐다. 각국의 문화적 특성을 체계화해 재생산하는원천이 된 것이다.

 

지금의 단계인 대학의 몰락기를 저자는 수월성(秀越性.excellence)으로 상징시킨다. 우리 사회에서도 대학의 이념으로 제기되고 있는 수월성이 아무 가치기준을 담지 않은 공허한 개념임을 저자는 지적한다. 수월성은 계량적 수치로만 나타난다. 그 수치가 어떤 이념적 의미를 갖는지는 전혀 설명이 없다. 수월성이란 대학이 지켜온 문화적 개별성을 분쇄하는 부정적 개념일 뿐 대학의 진로를 가리키는 지표가 되지 못한다는 풀이다.

 

국가간 대립을 거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을 끝으로 문화대립의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대학은 문화의 본산으로서의 의미를 잃게 됐다. 자본주의 가치관의 일률적 지배로 재편되는 세계 속에서 개별적 가치관을 만들어내는 대학의 기능은 더 이상 설 땅이 없는 것이다.

 

수월성의 대학을 지배하는 것은 생산성이다. 일정시간 내에 얼마나 많은 지식을 전달하느냐, 유용한 인재를 배출해 내느냐, 실용적인 연구업적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이 대학의 지상과제가 된다. 시장경제의 부속품이 된 대학은 상품을 생산해낼 뿐 이념을 창출하지 않는다. 대학이 고유한 의미를 잃어간다는 뜻에서 저자는 오늘날을 대학의 몰락기로 보는 것이다.

 

영국 출생으로 캐나다 몬트리올대학에 있던 저자는 세계화의 문제를 여기에 이어서 본다. 세계적으로 고유문화가 시장경제에 휩쓸려나가는 와중에도 민족문화를 최대한 지키려 버틸 것인지, 아니면 민족문화를 앞장서서 팽개쳐버릴 것인지 하는 선택의 문제임을 대학의 운명에서 읽는 것이다.

 

민족문화 보루로서의 역할을 대학이 포기한다면 그 고유문화는 생식기능을 거세당하는 셈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곧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우리의 세계화 구호도 한낱 위로에 그칠 수밖에 없다. 재생산 기능을 상실한 문화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러져가기만 할 그림자와 같은 것일 뿐이니.

 

세계화가 곧 '미국화'로 보이는 것도 저자가 제시하는 대학의 역사에 비춰보면 당연한 일이다. 미국은 애초에 민족국가의 성격을 가진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가적 이념은 언제나 '새로운 시대정신'을 체현하는 데 있었으며, 그 초강대국으로의 발돋움 자체가 세계적인 민족주의 퇴조에 따른 상대적 현상이라는 설명이다.

 

대학의 고유기능 상실을 노골적으로 아쉬워하는 저자도 대세는 거스를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념창출집단으로서 전통을 가진 대학사회가 새로운 상황속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역할을 맡을 것을 내다본다. 비록 기존의 문화대립이 사라진 탈역사(post-historical)시대라 하더라도 어떤 형태의 것이든 이념대립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학력의 상품화라는 면에서 우리의 대학은 이미 시장원리에 깊이 물들어 있다. 대학평가제를 비롯한 작금의 변화는 크게 보아 효율성의 향상작업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와중에 민족문화의 재생산기능이 휩쓸려 사라질 위험을 조심스레 살펴야 할 것이다. 1996. 7. 13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