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이 일으킨 중국 경제개혁은 이미 30년의 역사적 과정을 거쳤다. 뒤돌아보면, 30년 전 개혁을 시작할 당시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사건을 예상하지 못했다.
 
첫째, 개혁 과정이 이렇게 길어지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개혁의 지도자는 처음에는 약 5~10년이면 개혁을 완성하리라 생각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많은 개혁가들이 1990년, 늦어도 1995년에는 개혁이 마침표를 찍을 거라고 낙관적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은 여전히 개혁 중이고, 이 개혁이 언제 끝날지 우리는 아직도 그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둘째, 중국 경제의 발전 속도가 이렇게 빠르고 개혁의 성과가 이렇게 클 줄 예상하지 못했다. 1980년대 초, 덩샤오핑은 2000년이 되면 국민소득이 두 배 늘어나리라는 목표를 제시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는 태도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무모'하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실제로 중국 경제는 덩샤오핑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했다.  지난 30년, 중국의 1인당 GDP는 매 10년이 되기도 전에 두 배나 증가, 2007년에는 2,500달러에 도달했다. 중국의 경제총량 순위는 1978년 세계 13위에서 2007년 4위로 상승했다. 중국의 수출입이 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78년 23위에서 2007년 3위로 상승했다. 애초에 우리는 30년 후 위안화의 환율이 국제적인 경제 문제로 부상하리라곤 예측하지 못했다.
 

 

장웨이잉이 편집한 <중국개혁 30년>(이영란 옮김, 산해 2009, 원서는 2008)의 서문 모두입니다. 2008년 1월 베이징대학교 광화관리학원 신년포럼 "중국의 경제개혁 30년: 평가와 전망" 내용을 발판으로 만든 책이죠. 이 글에서 장웨이잉이 놀라워하던 중국 경제의 발전 속도는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고, 개혁 기간은 6년 더 길어졌습니다. 이 개혁이 언제 끝날지는 아직도 분명치 않습니다.
 
이 거대한 나라의 그토록 크고 빠른 변화는 역사상 유례가 드문 현상입니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궤도에 오르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이 일본을 위시한 주변의 자본주의 국가들을 조금 따라오는 정도로 개혁의 성과를 예상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지금 와 있는 G2의 위치를 10년 전까지도 상상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고, 어느 방향으로 어디까지 갈지 지금도 명확한 예상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주변의 먼저 산업화된 나라들을 따라오는 길에서 벗어나 이제 '중국만의 길'에 접어들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웃의 이 큰 나라가 백여 년 동안의 잠에서 깨어나 천하를 상대로 자기 몫을 찾게 되리라는 것도 분명히 내다보이는 상황입니다.
 
역사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큰 영향을 끼쳐 온 중국이 지난 백여 년 동안 힘을 쓰지 못하고 지낸 것이 매우 특이한 상황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나라가 지난 60여 년 동안 미국이 한반도에 끼쳐 온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변화가 어디로 향할 것인지, 중국은 한반도에 어떤 성격의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지, 심각하게 궁리하지 않으면 안 될 일입니다.
 
저는  '서세동점' 현상을 일으킨 산업화-자본주의  중심 '근대체제'의 문제점과 한계에 대해 생각해 왔습니다. 냉전 종식 후 중국의 변화를 놓고도 그로부터 이어지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변화가 세계체제의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 성급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민족의 장래를 좌우할 큰 변수라는 점을 놓고 보면, 이 방향의 생각을 함께 열심히 해보자고 여러분께 촉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Posted by 문천

 

1988년 7월의 7-7선언을 나는 ‘북방정책’의 출발점으로 본다. 사실 공산권과의 교류 확대나 남북대화의 발전을 위한 한국 정부의 움직임은 그 몇 해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굳이 7-7선언에 출발점으로서 의미를 두는 것은 북한을 대화상대로 인정하는 남한 정부의 자세가 이를 계기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앞 회에서 말했다. 그 전에는 북한을 적대와 이용의 대상으로만 여겨 왔다는 것이다.

 

공산권과의 교류 확대는 기본적으로 경제발전의 결과였거니와 1980년대 들어 서울올림픽 추진이 직접적 계기를 만들어줬다.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의 득표활동을 위해, 그리고 공산권의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보이콧이 재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재계의 도움을 받아 공산권과 제3세계 국가들을 상대로 전례 없는 구애작전에 나섰다. 이 노력이 마침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 조짐과 맞물려 애초의 목표를 넘어서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런 망외의 성과가 쌓이고 쌓여 어느 수준에 이르고 보니 공산국가와의 수교라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상상도 못해온 사태가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자 여태까지 눈앞의 목표만을 위해 임시방편으로 꾸려오던 대 공산권 정책을 새로운 차원에서 정비할 필요가 떠올랐다. 이렇게 북방정책이 형성되면서 공산권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분명히 세우기 위해 7-7선언이 나온 것이다.

 

공산권 국가들은 한국과의 관계 발전을 놓고 그들의 오랜 수교국인 북한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7-7선언 당시 헝가리와의 국교 수립이 추진되고 있었는데, 한국이 북한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헝가리 입장에서, 그리고 이후 수교를 시도할 모든 공산국가의 입장에서 국교 수립의 필요조건이었다.

 

1983년 10월 아웅산 폭파사건이 있었다. 전쟁 이후 최악의 적대행위 중 하나였던 이 사건을 당하고도 한국 정부는 북한과 적십자회담과 체육회담을 계속했다. 그리고 1984년 9월에는 남한의 수재에 대한 북한의 구호물품 제공 제안을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서울올림픽 성공을 위해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 것으로 풀이된다. 예컨대 남북 체육회담에 관해 강준만은 이렇게 적었다.

 

85년 10월 8일~9일 사이에 처음 열린 남북체육회담을 포함하여 모두 4차례에 걸쳐 남북간의 체육회담은 열렸지만, 아무런 실질적인 소득을 얻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당시 올림픽조직위원장이었던 박세직과 IOC위원장 사마란치는 애초부터 북한과의 공동개최가 성사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체육회담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북한이 공산권 국가들의 올림픽 참가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일 수 없다는 점에 착안해 북한의 돌출행동을 통제하고자 체육회담을 진행했을 뿐이었다. 체육회담이 완전하게 실패로 돌아간 후, 박세직은 일련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완전히 궁지에 몰렸다. (...) 우리나라와 IOC는 3년에 걸친 인내심과 상호협조, 신중한 계획으로 북한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북한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보여주었으므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서울올림픽 참가여부를 자유롭게 결정할 명분을 얻었다.”(<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편 2권 308-309쪽)

 

전두환 정권의 남북 정상회담 추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일이다. 그 추진에 관해서는 두 가지 기록이 있다. 하나는 손장래의 회고담 “84년 전두환-김일성 정상회담 했으면 95년 통일됐다”(<말> 1999년 1월)인데 나는 찾아보지 않았다. 강준만이 이 글을 참고해 위 책 301-306쪽에 서술한 것을 보면 주미대사관 공사를 지낸 손장래와 장면 정부 때 유엔대사를 지낸 임창영이 나섰다는 이 사업은 정부의 정식 위임 없이 안기부 차원에서 추진한 하나의 ‘공작’ 수준이었던 것 같다.(손장래는 1985년에 안기부에서 대북 문제를 담당하는 2차장이었다.)

 

또 하나의 기록은 2005년에 나온 박철언의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2책, 랜덤하우스중앙 펴냄)이다. 1985년 초 안기부장을 맡은 장세동이 추진한 남북접촉은 장세동과 허담(조국평화통일위원회위원장) 특사의 교차방문과 김일성-전두환의 친서 교환 등 1972년 7-4공동성명을 앞둔 이후락 정보부장과 박성철 북한 부주석의 특사활동과 맞먹는 깊이에 이르렀다. 안기부장 특보로 이 사업을 담당했던 박철언의 ‘증언’에는 그의 정치적 입장에 따른 굴절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접촉 내용을 깊이 드러낸 자료로서 큰 가치를 가진 것에 틀림없다.

 

장세동이 청와대 경호실장에서 안기부장으로 옮길 때 ‘특보’ 자리를 만들어 청와대 비서관이던 박철언을 앉히면서 남북 간 비밀접촉 시도가 시작되었다. 그해 5월 한상일 안기부장 비서실장이 적십자회담 대표단 일원으로 서울에 온 림춘길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부부장에게 접근, 통로 개설 의사를 타진하면서 접촉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7월 11일 판문점에서 박철언과 한시해를 수석대표로 하는 첫 실무회의가 열렸다.

 

박철언의 회고로는 남쪽에서 접근해 간 것이고 첫 회의에서 정상회담을 제안했다고 하는데, 그 후 진행에서는 북쪽의 의지가 앞서 나간다. 7월 26일 2차 회의에서 북측이 특사 교환을 제안하고 8월 9일 3차 회의에서 합의가 이뤄지자 바로 9월 4일 북측 특사단의 서울 방문이 진행되었다. 반면 남측 특사단의 평양 방문은 9월 22일로 예정되었다가 늦춰져 10월 16일에야 이뤄졌다. 특사와 친서 교환 수준 접촉의 준비가 북측에서 먼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전두환 측은 정상회담을 통해 어떤 합의를 이끌어내느냐 하는 구체적 목표 없이 만남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었던 감이 든다. 박철언의 첫 회의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하지만 이날 회담에서는 정상 회담을 바라보는 남과 북의 현격한 시각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북한은 정상 회담 이전에 정상 회담에서 양 정상이 논의할 의제와 정상 회담의 결과, 발표할 합의 선언 내용을 미리 구체적으로 정해놓자는 입장이었다.

 

물론 정상적인 국가 간의 정상 회담이라면 북한의 주장이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적개심으로 40년을 보내왔던 남과 북이 실무 차원에서 사전에 구체적 의제를 조정하고 세부적인 합의문 내용을 조율하다 보면, 대립과 갈등은 더 깊어지고 정상 회담은 무산되고 말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남측의 전두환 대통령이나 북측의 김일성 주석이나 각자 자기 진영에서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결국 두 정상의 만남 그 자체가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알파이자 오메가일 수밖에 없었다.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1, 156쪽)

 

박철언의 ‘증언’은 더러 스스로 뜻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증거능력을 보여준다. 당시 남한 권력집단이 전두환을 김일성과 대등한 수준의 카리스마 소유자로 여겨, 남북관계도 국가기관의 공식적 작용 없이 양쪽 두목의 회동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본 사실이다. 박철언에게 보고받는 전두환의 태도에서도 이 생각이 그대로 나타난다.

 

두 시간에 걸친 대화 내용을 비교적 소상히 보고하자, 전 대통령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우리의 최고위급 회담 제의에 북한이 선뜻 응하지 못하는 배경을 나름대로 분석해서 길게 설명했다.

 

전 대통령은 “김일성이가 선뜻 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내가 혜성처럼 나타나 여러 나라와 성공하기 어려운 정상 회담을 계속 성공시키니까 불안해하는 것이다. 박정희와 카터 간의 회담은 완전히 실패했었다. 또 다른 나라 정상들이 만나는 경우도 내막적으로는 완전히 실패하는 경우가 대다수가. 그런데 우리는 성공한 경우가 다수이니 내 능력과 수완에 당황하는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겪어보고 비교하여 나를 이대로 놔두면 안 되겠다 싶어 나를 해치우려고 미얀마 사태를 벌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작년에 수해 물자를 보내준다고 했을 때, 모두들 반대하는데 실무자 의견과 달리 내가 이를 받는 걸 보며 ‘인물이구나!’ 생각하고 얘기할 만하니 정상 회담을 주선하라고 지시한 것일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같은 책 157-158쪽)

 

첫 회의를 연 그 날 보고 장면을 그린 이 이야기에서는 정상 회담 지시가 김일성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으니, 남측에서 정상 회담을 제안했다는 박철언의 주장도 분명치 않다. 아무튼 전두환은 자기가 ‘인물’이기 때문에 정상회담도 잘 할 수 있는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름 후의 두 번째 회의에서 북측이 특사 교환을 제의한 것은 정상회담의 의제를 조율하는 과정을 갖고자 한 것이었다. 이 회의의 보고를 받는 전두환의 반응에서 역시 준비의 필요성을 경시하고 정상회담 자체에서 ‘한탕’을 기대하는 심리를 읽을 수 있다.

 

또 특사의 교환 방문에 대해서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전 대통령은 “특사들이 왕래하기 전에 정상 회담과 관련해 사전에 최소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을 접근시켜야 한다. 그리고 완전 합의를 위해 노력해야 발전적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또 그것이 특사 파견을 앞둔 예의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두 정상이 만나 서로 자유롭게 토의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무조건 남북 정상의 만남 자체가 중요하다는 기존의 지침이 조금 변경된 듯했다. (같은 책 161쪽)

 

준비를 열심히 하는 것이 ‘예의’이긴 하지만 준비가 잘 안 되더라도 만날 수는 있다는 정도의 생각이 ‘기존의 지침’에서 조금 변경된 것이라면 ‘기존의 지침’이란 무엇이었겠는가? 특사고 뭐고 관계없이, 남북의 ‘인물’끼리 무릎을 맞대기만 하면 된다는 것 아니었겠는가.

 

당시의 남한 집권세력에게는 서울올림픽이 하나의 전쟁과도 같은 거대한 사업이었다. 이 사업에 대한 북한의 방해공작을 피하기 위해 대화 시늉을 하는 것이 대북정책의 기조였다. 정상회담 제안은 이 기조 위에 펼쳐진 하나의 ‘작전’이었다. 회담 준비를 하는 동안 북한이 적대행위를 삼가게 할 수 있으면 됐지, 회담을 통해 무엇을 이뤄야겠다는 목표가 없었다.

 

이쪽에서 정상회담 추진을 하나의 작전으로 여기니 상대방 의도에도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전두환은 북한 특사단 접견을 앞두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만년필 모양의 호신용 무기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같은 책 164쪽) 007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장세동과 박철언이 이끄는 남한 특사단이 10월 16~18일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직후 전두환이 정상회담의 뜻을 접었다고 박철언은 적었다. 10월 20일 부산 청사포 앞바다에서 침투하던 무장간첩선 한 척이 격침되었는데, 이것이 북측에 회담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회담 반대파가 빌미를 잡은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철언이 적은 사실만 보더라도 정상회담을 더 이상 추진하지 않는다는 방침은 특사단 귀환 전에 결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은 특사단의 귀환 보고를 10월 30일에야 받았다. 앞서 판문점의 실무회의 때 회의 당일에 박철언의 보고를 받던 것과 대조가 된다. 특사단 귀환 보고는 이미 급한 일이 아니었고, 귀환 보고 전에 공교롭게 청사포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아웅산사건에 구애받지 않고 추진되던 정상회담을 청사포사건 정도 때문에 포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한 시간 동안의 보고 장면의 일부를 박철언은 이렇게 그렸다.

 

(...) 이어 전 대통령은 “이번 사건도 변명과 발뺌만 한다면 김일성이 나를 평양으로 초청한 후 정치적으로 활용할 의도만 가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순간 나는 어안이 벙벙해지며 속으로 ‘아하, 우리가 평양에 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구나’ 생각했다. 교전 상태에서도 평화를 위해 밀사 왕래나 정상 회담이 열리고, 동-서독도 통일 직전까지 서로 간첩활동을 해왔다. 침투 중이던 간첩선 한 척을 바다에서 격침시킨 사건을 두고 그렇게 엄청난 정책 변화를 해야 하는가.

 

북한 특사 일행이 서울을 방문할 때, 또 우리가 평양을 방문하기에 앞서, 국무총리를 비롯한 핵심적인 관계 장관들과의 회의 때마다 느꼈던 우리 집권 세력 내부의 친미 일변도, 극우적 흐름이 전 대통령에게 강하게 전달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신영 국무총리, 이원경 외무장관, 이규호 대통령 비서실장, 허문도 정무1수석은 말할 것도 없이 그런 성향이었고, 심지어 안기부 내에서 대북 문제를 담당해온 손장래 2차장의 경우도 개성 출신의 예비역 육군 소장으로, 5년간이나 주미 대사관 공사를 지낸 경력을 갖고 있었다.

 

전 대통령의 말은 계속되었다. “우리는 이미 목표를 달성하였다. 전쟁의 위험을 충분히 강조했다. 전쟁이 나면 핵전쟁으로 이어지고 모두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알림으로써 남침 야욕을 저지했다. 회담을 하기 위해 질질 끌려다니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나로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불과 열흘 남짓 만에 대통령의 태도가 180도 바뀌어 있었다.(같은 책 203-204쪽)

 

집권세력 내부의 “친미 일변도, 극우적 흐름”이라고 했는데, 박철언은 이 책에서 자신과 ‘친미 수구세력’을 몇 차례 대비시킨다. ‘진보적 민족주의자’를 자임하는 모습이다. 이 점은 장세동 안기부장이 자신과 공유한 것으로 박철언은 생각한 모양이다.

 

(1987년) 3월 24일, 장세동 부장은 전 대통령과의 대화 내용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장 부장은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노신영 총리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보고를 했다는 것이었다.

 

장 부장은 정부-여권의 분열 조짐에 대비할 것을 전 대통령에게 건의하면서 “당내 민주주의의 명분 아래 경선 형식을 빌려 노신영, 이종찬, 남재희, 권정달 등이 기회를 포착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이 대미 관계의 혼선을 야기하고, 내각제를 이원집정부제로 (야당과) 타협하려 할 수 있습니다. 주요 정책의 누설,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처사를 경계해야 합니다. 여권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후계 구도를 조속히 가시화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했다고 나에게 귀띔을 해주었다.(같은 책 250쪽)

 

“주요 정책의 누설”이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처사” 바로 앞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대북정책이 미국 측으로 누설되는 문제를 가리킨 것으로 생각된다. 1985년 9-10월의 특사 교환을 둘러싸고 미국 측과의 협의나 조율 과정에 대한 언급이 없고, 그해 12월 23일 ‘88계획 관계 한미 협의회’가 열린 이야기가 있다.(같은 책 207쪽) ‘88계획’이란 대북접촉 사업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 측에서 워커 대사, 던롭 참사관, 디레이니 CIA 거점장과 브레드너 8군사령관 보좌관이, 한국 측에서 이상옥 외무부 차관과 안기부 3국장, 정보문화국장, 그리고 박철언이 참석한 회의였다고 하는데, 한국 측에서 단독으로 추진한 88계획을 미국 측에서 따지는 자리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88계획의 초점인 정상회담 추진은 두 달 전에 이미 꺾여 있었으니, 이 회의는 ‘사후 부검’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상회담 추진이 좌절된 후에도 박철언과 한시해 사이의 판문점 실무회의는 계속되었다. 박철언의 기록 중에 1987년 3월 12일의 제24차 접촉과 전두환 퇴임 직전인 1988년 2월 초의 제 33차 접촉이 언급되어 있다. 정부 간 접촉이라기보다 정보기관 간의 특별한 목적 없는 접촉 수준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제 24차 접촉에서 “총리 회담을 제의”했다고 박철언은 적었지만, 정부 내의 논의에 따른 정식 제안은 아니었을 것이다. 혼자 생각했거나 장세동과 의논해 본 정도의 ‘아이디어’였을 것 같다.

 

이 비밀접촉이 유지되는 동안 남한 집권세력의 북한에 대한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1986년 가을의 ‘금강산댐 소동’이었다. 박철언의 비밀접촉은 이 소동을 막는 데 아무 역할도 못했다. 이 소동에 관해 잘 정리된 글 하나를 소개한다.

 

1986년 10월 30일 당시 이규효 건설부 장관은 “2백억 톤의 물을 담은 북한 금강산댐이 붕괴할 경우 화천 등 다섯 개 댐이 순식간에 파괴되고 한강 하류 전역을 급류가 강타해 강원-경기-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황폐화시키는,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는 내용의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이런 날벼락이 있는가? 북한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물폭탄을 준비하고 있다는 엄청난 재난 경보였다. 보수 언론들은 일제히 금강산댐을 무너뜨리면 서울이 물에 잠길 것이라고 보도했다. 어떤 신문은 ‘63빌딩의 절반 가까이가 물에 잠긴다’고 했고, ‘남산도 거의 잠길 것’이라는 전문가의 분석도 있었다. 텔레비전에 나와 국민을 겁주던 유명 대학의 토목공학 교수들, 그분들은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짓이 아닐 수 없다.

 

금강산댐은 북한에서는 임남댐이라고 부른다. 1980년대 초반부터 공사를 시작한 이 댐의 목적은 수력발전이었고, 농업-공업용수-생활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기부의 초기 분석도 이 점을 주목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는 북한의 ‘수공’ 가능성을 부각시켰다. 당시 안기부가 어떻게 정보를 왜곡하고 과장했는지에 대해서는 1993년 김영삼 정부의 ‘5공 청산’ 과정에서 속속들이 드러났다. 1993년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 따르면, 안기부는 금강산댐의 저수량을 부풀렸다. 미국의 공병 수로국이 37억 톤으로 계산한 저수량을 안기부는 최소 70억 톤에서 최대 2백억 톤으로 과장해서 홍보했다.

 

얼마나 급했던지 당시 금강산댐의 규모는 한국전력 직원 1명이 위치를 추정해 8시간 만에 계산했다고 한다. 장세동 안기부장은 이 과정에서 국민들의 대북 경각심을 고취하기 위해 최대치를 발표하도록 지시했다. 서울이 물에 잠긴다는데, 어떤 국민이 불안하지 않겠는가? 평화의 댐을 하루라도 빨리 건설하라는 보수 언론의 나팔 소리도 높았다. 전국에서 규탄 시위가 줄을 이었고, 신문과 방송은 어린이 저금통까지 털어 성금에 참여하자는 선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아진 국민 성금이 661억 원이었다.

 

올림픽 이전에 대응 댐을 건설하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는 절박성, 그것은 거짓이었고, 한편의 거대한 사기극이었다. 감사원 감사에서 밝혀졌지만, 금강산댐의 저수량이 겨우 9억 톤 정도가 되는 시기는 빨라도 1989년 10월이었다. 올림픽 이전이 아니라, 올림픽이 끝난 이후였다. 감사원은 북한이 그 정도 규모를 일시에 남쪽으로 흘려보낸다 하더라도, 화천댐에 비상 배수구를 설치하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김연철 <냉전의 추억-선을 넘어 길을 만들다>(후마니타스 펴냄) 108-109쪽)

 

독자들에게 각별히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 작업을 처음 구상할 때 이 책에 담긴 것과 같은 내용을 많이 담고 싶었다. 이 책이 나와 있는 것을 나중에 알고 겹치지 않도록 내 작업 계획을 조정했다. 이 책 덕분에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에만 노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맙기 한량없다.

 

 

Posted by 문천
2014. 1. 18. 12:38

 

2009년 <역사 앞에서> 증보판이 나온 뒤 창비사에 들르는 일이 없게 됐다. 고세현 선생이 대표를 맡고 있을 때는 출판도시 가는 길에 더러 얼굴 보러 들르기도 했었는데...

 

그런 중에 한 가지 마음속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역사 앞에서> 인세 지불이 없는 것이다.

 

2002년 초였던가, 아버지 50주기를 막 지났을 때 창비에서 연락이 왔었다. 저자 사후 50년이 지나면 저작권법상 판권이 소멸하게 되어 있으나 창비사에서는 <역사 앞에서> 인세 지급을 계속하기로 방침을 정했다는 것이다.

 

고맙다고 응답했다. 법적으로 어떻든 보내준다면 어머니를 위해 잘 쓰겠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후에 인세를 받지 못했지만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온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매출이 별로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증보판 나온 후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따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냥 지냈다. 고 선생이 대표로 계속 있었다면 언제든 들러서 방침이 바뀐 건지 스스럼없이 물어봤을 텐데.

 

그러다가 며칠 전 창비사에서 편지가 왔는데, 600부 더 찍었다며 인세 지급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편지에 적힌 통장번호가... 10년 너머 쓰지 않고 있는 XX은행 통장이었다. 어제 그 은행에 들러 통장 재발급을 받아 보니... 일곱 자리 금액이 쌓여 있었다.

 

착실히 보내 준 인세를 몰아 받으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인세 지급 방침을 일방적으로 바꾸고 알려주지도 않는 게 아닌가 의심했던 일이. 그러면서 이걸 계속 받아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12년 전에는 어머니를 위해 쓴다고 마음속으로도 이유를 댔던 건데, 이제 어머니도 안 계신 걸...

 

잠깐 생각하는 시늉만 하다가 그냥 받아먹기로 마음을 정해버렸다. 법률 관계는 잘 모르지만, 사후 50년으로 판권을 제한한 저작권법의 취지에 비춰 보더라도 사후 40년이 지나 발행된 글이라면 발행 시점부터 보호 기간을 적용시키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도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책 인세 수입이 시원찮은 판에 아버지 책 아니라 할아버지 책이라도 인세가 들어온다면 마다할 주제인가!

 

하지만 만약 창비사에서 인세 지급을 중단하기로 언제고 결정한다면 다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창비사에서 '법 없이' 살 길을 열어줬는데, 내가 '법대로' 하자고 달려들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마음속으로 의아하면서도 그 동안 건드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법 없이 상대할 수 있는 회사의 존재가 참 고맙다.

 

모처럼 조상 음덕이 통장에 나타나니 마음이 느긋하다. 해밑에 가까운 친구들 불러 고기나 한 번 구워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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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