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의 변화는 ‘화평’스러운 ‘굴기’인가?

 

2001년 12월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치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때까지 중국은 세계정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구 공산권 국가의 하나로 여겨졌다. 자본주의 원리를 급격히 도입한 동유럽 국가들에 비해서도 1당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국의 앞길이 더 막막해 보였다. 이 단계 변화의 의미를 원톄쥔은 <백년의 급진>(김진공 옮김, 돌베개, 2013) 124쪽에 이렇게 설명했다.

 

거시경제에 파동을 일으킨 배경을 시간에 따라 네 단계로 나누어본다면, 각각의 시작 시점은 1980년, 1988년, 1994년, 2002년이 될 것이다. 성격을 기준으로 분류를 하자면 21세기 이전 대외개방의 세 단계는 일반적인 후발국가의 경우와 유사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즉 자본이 극도로 부족한 상황에서 외부 자본을 유인하기 위해, 그들이 들어와 이익을 얻는 데 유리하도록 조건을 마련한 임시방편의 성격을 띤다. 새로운 세기에 들어온 이후의 네 번째 단계는 일반적인 후발국가의 경우와 현저하게 다르다. 3대 차별이 심화됨으로써 심각한 내수 부족 현상이 초래되고 산업자본 과잉의 압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자,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는 것을 계기로 중국 내 생산능력 과잉의 압력을 국제시장을 통해 해소하려 한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는 이미 빌붙어 사는 처지로 전락한 국제 산업자본도 금융 버블의 압력에 밀려서 중국으로 대거 확장해 들어왔다.

 

기존 세계체제의 주변부 현상이던 중국의 변화가 세계적 변화의 한 중심축으로 부각된 것이다. 막강한 발전 동력과 함께 상당한 안정성을 가진 ‘강대국’의 모습을 중국이 갑자기 드러낸 것이다. 자본주의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독자적 발전을 계속하는 중국의 존재에 서방 관측자들은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을 국제사회의 위험 요소로 보는 ‘중국위협론’이 일어났다.

 

중국인들은 중국위협론이 중국의 발전을 견제하려는 서방 일각의 책략이라고 보고, 중국의 발전이 세계경제 전체에 좋은 효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중국기회론과 중국공헌론으로 대항했다. 그러다가 2003년 10월 원로학자 정비젠이 ‘화평(和平)굴기(崛起)’란 말을 쓰고 두 달 후 원자바오 총리와 후진타오 주석이 공식석상에서 이 말을 씀에 따라 널리 퍼지게 되었다.

 

‘굴기’라 함은 중국이 19세기 중엽 이래 치욕과 고난의 역사를 헤치고 대국으로 일어서는 모습을 그린 말이다. 이 굴기를 통해 남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발전을 이룬다는 뜻에서 ‘화평’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몇 달 후부터 중국 지도부는 ‘화평굴기’란 말을 더 쓰지 않고 ‘화평발전’이란 말을 대신 쓰기 시작했다. ‘굴기’(rising)는 강대국으로 일어서면서 국제적 권력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개념인 데 반해 ‘발전’(development)은 단순히 중국의 위치가 상승한다는 뜻이다. ‘화평굴기’가 민간에서는 계속 쓰이고 있는데 당과 정부에서 굳이 ‘화평발전’이라 하는 것은 외부의 경계심을 피하기 위한 뜻으로 이해된다.

 

이 ‘화평굴기’란 말에 생각을 모아본다. 중국의 변화가 과연 ‘발전’에 그치지 않는 ‘굴기’를 바라보는 것인지, 그리고 ‘굴기’든 ‘발전’이든 그 변화가 ‘투쟁’ 아닌 ‘화평’의 길을 걸을 것인지 판단하는 것이 중국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초점이라고 생각한다.

 

 

2. 중국 변화의 4대 과제

 

조영남은 <21세기 중국이 가는 길>(나남, 2009) 278-279쪽에서 중국 변화의 큰 과제를 (1) 엘리트 정치의 안정화, (2) 국가체제의 합리화, (3) 정치민주화, (4) 세계 강대국화의 네 가지로 지목했다.

 

정치-외교분야에서 중국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추동력에 주목해야 한다. 이 네 가지는 중국의 특수성과 모든 국가의 보편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도출한 것이다.

 

첫째는 엘리트 정치의 안정화이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통치능력 강화와 통합유지를 목표로 한다. 중국은 당-국가로서 공산당과 국가가 조직적-기능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실제 정치과정에서 공산당이 국가기관의 역할을 종종 대체하는 특징을 가진다. 따라서 중국의 현황과 전망을 검토할 때에는 엘리트 정치의 안정성 문제를 먼저 분석해야 한다. 만약 중국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통치 엘리트의 안정성에 이상이 생길 경우이다.

 

둘째는 국가체제의 합리화이다. 1978년 중국이 시장화, 사유화, 개방화, 분권화를 핵심내용으로 하는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한 이후, 국가체제의 정비와 국가 통치능력 강화는 핵심과제로 제기되었다. 계획경제 시대의 국가체제로는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지난 30년 동안 연평균 9.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각종 사회문제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엘리트 정치의 안정화와 함께 국가체제의 합리화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정치민주화이다. 이는 민주개혁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고 전체주의적 국가-사회관계를 개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개혁기 중국에서는 수많은 사회 불안정 요소가 증가했다. 국민의 비관습적 정치참여의 급증은 이런 불안요소의 하나이다. 지금까지 중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실시했고, 향후 중국정치는 민주화 정도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

 

넷째는 세계 강대국화이다. 이는 중국이 아시아 지역 강대국에서 세계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중국은 지난 30년 동안의 고도 경제성장과 지속적 군비증강, 소프트 파워 강화 등을 통해 지역 강대국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현재는 이를 바탕으로 미국 등 기존 강대국과 함께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세계 강대국으로 발전하려고 한다. 중국의 강대국화는 아시아 및 세계질서를 변화시킬 역사적 사건이고, 이것은 다시 중국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네 가지 과제는 서로 맞물린 것이거니와, 나는 가장 기본적 과제가 (4) ‘세계 강대국화’라고 본다. 10년 전 중국 지도부가 ‘굴기’란 말을 피해 ‘발전’이란 말을 쓴 것은 중국의 목표가 세계 강대국 아닌 지역 강대국에 있다고 엄살을 떤 것이다. 2008년 미국의 금융대란 이후로는 중국의 G-2 위상에 의문의 여지가 일체 없어졌다.

 

‘세계 강대국화’를 변화의 기본 축으로 보는 것은 역사적 복원력 때문이다. 2천 년 전부터 중국은 세계 최대의 물적-인적 자원을 가진 ‘강대국’ 역할을 해왔다. 주변부에 대한 중국의 통제력은 역사를 통해 일시적으로 약화된 시기도 있고, 그럴 때는 오랑캐의 정복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제국의 ‘굴기’를 보게 되는데, 그 방대한 물적-인적 자원이 뒷받침한 현상이다.

 

19세기 중엽 이후 서세동점의 물결 앞에 중국이 치욕의 시대로 빠져든 것은 과거에 거듭 겪었던 제국의 해체가 또 한 차례 반복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중국의 굴기는 그 인적-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강대국의 위치를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하면 다른 과제들은 부수적-지엽적인 것이다. 특히 (2) ‘국가체제의 합리화’는 국가 기능의 심화와 확대에 따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기술적 문제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에는 국가통치의 원리가 이데올로기 측면에 쏠려 있다가 문화혁명을 겪은 후 ‘개혁-개방’ 정책을 선포한 것은 국가 기능의 실용주의적 발전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그 후 얼마 동안은 경제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리고 근래에는 강대국으로서 역할에 맞춰 국가체제의 합리화가 진행되어 왔다.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특별히 제기할 논점이 없다. 그 밖의 과제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세계 강대국화’의 의미에 접근해 보겠다.

 

 

3. ‘엘리트 정치의 안정화’는 전통적 신분제 질서구조의 회복

 

근대의 만인평등 이념은 19세기를 풍미한 원자론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물질세계가 독립성을 가진 원자로 구성되었다는 관점 그대로 사회를 독립성을 가진 개인의 집합체로 보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당연한 현상이고, 투쟁의 효과적 방법을 찾는 데 정치제도의 목적이 있다.

 

반면 중국의 전통적 질서구조, 특히 유가적 질서구조는 유기론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공자는 “임금이 임금 노릇, 신하가 신하 노릇, 아비가 아비 노릇, 자식이 자식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이 질서의 근본이라 했다. 각자의 신분에 따른 역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기(禮記)>에는 “예(禮)는 서인(庶人)에게 내려가지 않고 형(刑)은 대부(大夫)에게 올라가지 않는다”고 했다. 예법에 따라 움직이는 높은 신분 사람들과 형벌에 따라 움직이는 낮은 신분 사람들을 구분한 것이다.

 

엘리트 정치의 담당자가 예법에 따라, 즉 명예를 기준으로 행동하는 지배계급이었고, 역사를 통해 ‘사대부’, ‘진신’ 등의 이름으로 존재했다. 그 역할을 지금 중국공산당이 맡고 있다. 지금의 공산당원들은 ‘마레주의’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대학 입학을 위해 수능시험을 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입당을 위해 한 차례 시험을 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당원의 명예에 대한 의식은 확고하고, 이 위에 ‘엘리트 정치의 안정화’가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인류문명 발생 이래 유기론적 세계관이 일반적인 것이었고 원자론적 세계관이 세상을 휩쓴 것이 특이한 현상이다. 생명체인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가 유기적 특성을 가지는 것은 직관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고, 물질세계도 이로부터 유추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스템공학 관점에서도 원자론-기계론적 조직방법은 과도한 경쟁으로 낭비를 불러오기 때문에 지속가능성이 약하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2백 년간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세상을 휩쓴 것은 특수한 상황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상황의 한 측면은 ‘자연의 타자화’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부정하는 풍조에 있었다.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규정하고 절제 없이 착취하는 동안 지속가능성 문제에 눈감고 지냈던 것이다. 20세기 후반 들어서야 자원과 환경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반성이 널리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측면은 ‘자연의 타자화’를 연장한 ‘미개인의 타자화’ 풍조였다. 미개사회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무절제한 정복과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환경론자 머레이 북친은 이렇게 말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관념 자체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다.” 그 역(逆)도 성립하는 것 같다.

 

근대세계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서방세력은 자연과 미개사회에 대한 착취를 발판으로 지속가능성 없는 체제를 억지로 지금까지 끌고 왔다. 그런데 중국은 그와 같은 외부 착취에 의존할 수 없는 나라다. 원톄쥔은 <백년의 급진> 11-12쪽에서 중국의 개발은 내부 착취를 통해 이뤄져왔다고 했다. 중국의 개발 논리는 서방의 것과 같은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서구처럼 해외 식민지를 통해 재부를 약탈하고 모순을 전가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초대형 대륙국가인 중국은 주로 내향형의 원시적 축적에 의존해서 공업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방식은 첫째, 고도의 조직화를 통해 전체 노동자의 노동잉여가치를 점유하고, 공업과 농업 생산품의 협상가격 차이를 이용하여 농업의 잉여를 추출하는 것이며, 둘째, 노동력 자원을 자본화하여 국가의 기본적인 건설에 대규모로 집중 투입함으로써 거의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결핍되어 있는 자본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 ‘중국의 경험’의 본질은 ‘정부의 기업화’라는 조건 하에서 산업구조를 상대적으로 온전하게 유지해온 데 있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제도와 문화의 차원에서 보면, 중국은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수천 년 전통의 관개농업으로 형성된 집단문명을 지켜낼 수 있었고, 동시에 동방의 특색을 갖춘 중앙집권체제 내부에서 사회적 자원을 통합할 수 있는 두 가지의 효과적인 메커니즘을 형성할 수 있었다. 첫째, 유구한 역사적 유산의 핵심인 집단문화를 통해, ‘시장경제의 심각한 외부성 문제를 내부화해서 처리’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다. 둘째, 수천 년 이어진 농가경제에 내재하는 ‘대가를 따지지 않는 노동력을 자본을 대신해서 투입’하는 메커니즘인데, 극도의 자본 부족 문제를 이를 통해서 완화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가운데 중국은 ‘서구인들이 완전히 식민지로 점령을 해서, 설령 독립을 하더라도 여전히 서구인들이 만들어놓은 상부구조를 계승할 수밖에 없는 일반적인 제3세계 국가들’과 비교할 때, 훨씬 빠르고 손쉽게 공업화 단계로 진입했다.

 

미국 등 서방세력이 중국의 인권문제를 비판해온 중요한 근거가 신분제에 입각한 중국의 ‘엘리트 정치’에 있다. 인권문제는 어느 사회에서나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무절제한 착취를 전제로 한 ‘행복추구권’ 같은 것을 인권의 보편적 기준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조정하는 데 따라 인권의 기준도 조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4. ‘정치민주화’는 중국에게도 필연의 과제일까?

 

‘정치민주화’가 가장 논란이 많은 문제다. 조영남은 위 책에서 중국정치가 전체주의로부터 권위주의로 지금까지 옮겨왔고, 이제 민주주의로 이행할 것을 당위적 과제로 본다. 정치민주화에 실패하면 중국의 변화가 파국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한국과 타이완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권위주의 체제 하에 경제발전을 이룩한 다음 정치민주화를 성취한 것을 중국을 위해 바람직한 모델로 제시하는 것이다.

 

사회의 어떤 변화든 그에 적합한 정치적 발전이 따르지 않으면 파탄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발전이 꼭 ‘민주화’여야만 하는가? 민주주의가 널리 실현된 것은 인류의 역사 중 최근 몇 백 년에 불과하다. 최근의 제도이기 때문에 최고로 발달시킨 성과물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민주주의 외의 여러 근대적 현상에 대해 회의적 시각이 커지고 있는 21세기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모든 인간사회의 절대적 과제로 보는 관점은 흔들리고 있다.

 

‘민주주의’를 넓은 의미로 본다면 바람직한 정치질서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념으로 제시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근대서양식의 선거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로 제한해서 생각한다면 모든 인간사회에 적용시킬 당위성이 성립하지 않는다.

 

위에 인용한 원톄쥔의 글 중에 “노동력 자원의 자본화”란 말이 보인다. 지난 30여 년간 중국 경제발전의 핵심 원리를 짚은 말이다. 십여 년 전 중국에 처음 갔을 때 가장 놀랍게 본 특징이 사회경제적 낙차, 즉 불평등이 크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그 비슷한 낙차가 있다면 당장 뒤집어질 정도인데, 큰 문제없이 사회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댐의 낙차가 커야 큰 동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댐이 튼튼하지 않으면 큰 낙차를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져버린다. 중국의 노동력시장은 큰 낙차를 버텨내 왔고, 그것이 “노동력 자원의 자본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서양식 평등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에 익숙하다. 사회경제적 낙차를 견뎌내기 힘든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 이념이 우리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아직 민주화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흔히 생각하며, 민주화의 완성에 매진할 다짐을 한다. 이것을 원톄쥔이 말하는 바 “서구인들이 완전히 식민지로 점령을 해서, 설령 독립을 하더라도 여전히 서구인들이 만들어놓은 상부구조를 계승할 수밖에 없는” 질곡의 일부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1990년대에 싱가포르의 리콴유와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는 미국 등 서방의 압력에 대항해서 ‘아시아적 가치’를 제창했다. 1997~1998년 금융공황의 직격탄을 맞으며 이 주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 주장에 타당성이 전혀 없어서가 아니라 이 조그만 나라들에게는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에 저항할 힘이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일이다. 이제 중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중국식 민주주의’ 주장은 기존 세계체제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저항일 수 있다.

 

 

5. 유기론적 세계체제로의 전환점?

 

우리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경험 때문에 ‘중국식 민주주의’ 주장에도 나쁜 선입견을 갖기 쉽다. 이 주장 중에 그런 수준의 편의주의가 꽤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70년대의 ‘한국적 민주주의’에 비해 지금의 ‘중국식 민주주의’에는 진지하게 검토할 만한 의미가 훨씬 더 많이 들어있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순전히 내부용이었다. 반면 지금의 중국식 민주주의는 대외관계 해명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앞에 말한 ‘화평굴기’, ‘화평발전’ 외에도 중국 지도부는 ‘책임대국’, ‘신안보관’, ‘조화세계’ 등의 구호로 원만한 대외관계를 표방하는데, 이것이 모두 중국식 민주주의와 표리를 이루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충효사상’만을 단편적으로 내세운 한국적 민주주의와 달리 중국식 민주주의는 넓고 깊은 사상적 체계성을 추구한다.

 

이 추구의 겉으로 드러난 표적이 유가사상이다. 2004년 이래 ‘공자학원’의 이름으로 세워지고 있는 중국의 해외문화원 조직이 그 상징이다. 유가사상 부활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부활된 유가사상이 진짜 유가사상인지는 따질 필요가 없다. 유가사상 자체가 긴 역사를 통해 내용과 형식을 조정해 온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서방 정치학자들은 리콴유와 마하티르의 ‘아시아적 가치’를 민주주의와 구별되는 권위주의로 규정했다. 그 기준으로는 중국식 민주주의도 권위주의 규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무슨 상관인가. 인민의 생활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데 충분한 효용성을 가진다면 ‘민주주의’의 이름을 가지건 말건 ‘정치발전’의 가치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나는 중국식 민주주의 또는 유가적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를 유기론적 세계관에서 찾는다. 19-20세기를 지배한 원자론적 세계관은 지속가능성을 가진 체제를 만드는 데 근본적 결함을 가진 것이었다. ‘승자의 싹쓸이’(winner-take-all) 원리를 내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과 20세기 미국의 헤게모니는 이 원리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 원리의 문제점을 지적한 사람의 하나가 아인슈타인이었다. 1945년 원자폭탄 투하에 충격을 받은 아인슈타인은 ‘세계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세계 차원에서 구성원의 권리와 의무를 조정해주는 세계정부 없이는 인류의 자기파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는 무정부상태에 머물러 있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제기된 ‘세계화’는 정치적 세계화가 아닌 경제적 세계화로서, 오히려 무정부상태를 더욱 심화시키는 추세였다. 유가적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중국의 굴기가 세계정부로의 접근을 위한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중국인 중에도 패권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많다. 그들은 ‘책임대국’이나 ‘조화세계’를 편의적인 구호로만 활용하고, 중국의 힘이 정말 커지면 과거의 영국이나 미국처럼 패권을 휘두르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중국인의 대다수라고 단정할 일은 아니다. 중국에게는 과거의 패권국가와 다른 방향을 바라볼 두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다.

 

그 하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큰 정치경제적 변화가 없더라도 몇 십 년 내에 인류문명이 큰 벽에 부딪칠 것이 분명한 사실로 확인되어 왔는데, 세계 인구의 20%를 점하는 중국인이 패권국가다운 소비수준을 추구한다면 파국이 바로 코앞에 닥칠 것을 그들도 모를 수 없다.

 

또 하나의 조건은 문명 전통이다. 역사상 대부분의 인간사회는 유기론적 원리에 따라 조직되고 운영되어 왔다. 유기론적 조직-운영 방법을 가장 고도로 발전시킨 것이 중국문명이었다. 중국은 기존 패권주의적 세계체제를 바꾸기 위한 문화적 자원을 가진 나라다.

 

기존 세계체제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세력들은 중국의 굴기를 견제할 이기적 동기를 갖고 있다. 그 목적을 위해 중국의 모든 현상을 나쁜 것으로 규정하고 중국의 변화가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선전한다. ‘중국위협론’이다.

 

중국위협론은 오래 전부터 힘을 잃기 시작했다. 조영남의 <21세기 중국이 가는 길> 176쪽에 미국의 퓨 리서치센터가 2005년 6월 발표한 조사결과가 인용되어 있는데, 유럽인들이 미국보다 중국에 대해 더 우호적으로 느낀다고 한다. [영국 55:65, 프랑스 43:58, 독일 41:46, 스페인 41:57, 네덜란드 45:56] 아시아지역(터키,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레바논, 요르단, 인도)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중국의 굴기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중국의 경제성장이 자국에 유리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나는 중국의 변화에서 좋은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데, 이것이 정확한 의견이라고 장담하지는 않는다. 설령 정확한 의견이라 하더라도 중국의 변화가 인류에게, 특히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고난과 고통을 더해줄 측면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의 변화가 세계정세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 내다보이는 이 시점에서 이웃의 피해가 적은 방향으로 중국의 발전 진로를 찾는 데 생각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다.

 

Posted by 문천
2014. 1. 30. 12:14

 

몇 달 전부터 '산삼' 이야기를 하는 일이 종종 있다. 처음 떠오른 것은 중국에서 돌아와 유시민 선생과 11월 초 만났을 때 원톄쥔 교수 이야기를 하다가였다. 책을 아직 보지 못한 나도 경향신문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보고 흥미가 많이 끌려 있었다.

 

그 책과 원 교수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유 선생이 거듭거듭 탄성을 발한다. 서로 다른 여러 계열의 분석도구를 그토록 효과적으로 함께 활용하는 경제학자를 처음 봤다는 것이다. 여러 분석도구를 그렇게 병용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상상도 못했었다는 것이다.

 

내게는 그보다 더 앞서서 놀라운 일이 있다고 했다. 내 또래의 중국 학자(원 교수는 나보다 한 살 아래다.)에게서 괄목할 만한 업적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고 했다. 내 분야의 국제 학회에서 나보다 열 살 아래위로는 학자다운 학자를 본 일이 없었다. 소질과 적성에 따라 학문의 길로 나아가는 길이 문혁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원 교수도 고중(고등학교) 때 문혁을 맞아 하방했다가(부모가 모두 인민대학 교수였는데도!) 10여 년 공백 뒤에야 학문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고 한다. 서른 살 나이까지 육체노동으로 살았던 것이다. 한창 공부할 시절을 그렇게 지낸 사람이 그처럼 풍성하고 탄탄한 학문을 쌓아올리다니, 참 놀라운 일이다.

 

그때 떠오른 것이 산삼 생각이다. 토질도 척박하고 볕도 적은 곳에서 자라는 산삼은 덩치가 작지만, 산삼 중에서도 진짜 약효가 뛰어나다고 한다. 환경 좋은 온실에서는 우수한 학자들이 많이 자라날 수 있지만, 그저 우수한 정도를 넘어 획기적인 업적을 낼 수 있는 큰 학자는 오히려 척박한 조건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닐지. 문혁의 척박한 환경에서 학자들이 많이 자라날 수 없었지만, 진짜 큰 학자를 그런 데서 얻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유 선생도 그냥 그럴싸한 정도가 아니라 현실의 정확한 설명일 수 있겠다고 수긍해 주었다.

 

얼마 후 산삼 얘기를 또 꺼낼 기회가 있었다. 연말에 정욱식 선생을 만났을 때다. <냉전 이후> 작업 중 군사적 측면에 정 선생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청해 인사를 나눈 자리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정 선생이 겸양의 말씀을 이런 식으로 했다. "저는 연구자도 아니고 운동가일 뿐인데요." 그냥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는 이 말씀에 내가 왠지 좀 흥분해서 잠깐 열변을 토하게 됐다.

 

학문의 본질을 문제 해결(problem solving) 아닌 문제 제기(problem raising)로 보는 내 관점을 앞세워, 운동가의 자세에서 문제 제기의 동력을 얻는 것이 진정한 학문의 필요조건이라는 얘기였다. 동력이 없이 운전대만 있는 자동차는 떠밀어주는 흐름이 있을 때는 그럴싸하게 자동차 노릇을 하는 것 같지만, '스스로 움직인다는' 자동차의 본질을 실현하지 못한다, 연구자와 운동가의 입장을 상호보완적으로 받아들일 때 연구자 노릇도 운동가 노릇도 제대로 할 수 있으리라는 내 생각을 얘기했다.

 

이런 얘기 끝에 산삼 생각이 나서 덧붙였다. 우리 사회에는 운동가와 연구자를 겸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이 미비한데, 그런 여건에서 길을 만들어가는 정 선생이 척박한 땅에서 자라나는 산삼처럼 훌륭한 성과를 바라볼 것을 기대한다고. 정 선생도 내 격려의 뜻을 고맙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고, 함께 앉았던 이들도 감동적이면서 설득력 있는 말씀이라고 칭찬해줬다.

 

심꾼들 중에 산삼이 눈에 잘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차이를 가져오는 원인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절실한 마음도 하나의 요소일 것 같다. 내게 산삼의 비유가 쉽게 떠오르는 것은 그 이치가 내게도 적용되기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아닐까. '사이비'의 길을 피하고 '비이사'의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린 일이 있는데, 요컨대 내 분수를 알고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확인한다.

 

원톄쥔의 책이 어제 도착해서 읽기 시작했다. 내가 키워온 생각과 통하는 점이 놀랄 정도로 많다. 몇 해 동안 매달려 있던 한국현대사 공부로부터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공부로 돌아갈 생각을 근래 굳히고 있는데, 좋은 출발점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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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에는 두 개의 측면이 있었다. 하나의 측면은 공산권 국가와의 관계 확대였다. 1988년의 서울올림픽이 이 측면에 유리한 계기를 만들어주었고, 뒤이어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에 따라 노태우의 임기 말까지 대한민국은 거의 모든 국가와 정식 외교관계를 맺게 된다. 이 측면은 큰 성공이었다.

 

또 하나의 측면은 북한과의 관계였다. 이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발전이 이뤄지는 것 같았는데, 연재 앞머리에 소개한 1992년 9월의 ‘훈령 조작사건’을 계기로 좌절되고 말았다. 이 측면의 중심축은 1990년 9월부터 2년간 8회에 걸쳐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열린 ‘남북고위급회담’이었다. 임동원은 이 회담의 출범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노태우 정부의 이런 전향적인 대북정책과 자세는 국제정세에 대한 예리한 판단력을 가진 외교안보 문제 전문가요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합리적 현실주의자 김종휘 외교안보수석비서관과 검사 출신으로 전향적 역사의식과 예리한 판단력을 가진 서동권 안기부장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산파 역할을 한 정치학자 출신 이홍구 통일부장관이 닦아놓은 기초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선양하는 계기가 된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평양이 서울의 제의를 받아들여 1989년 2월 초부터 판문점에서 남북고위급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합의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1년 반의 시간이 걸렸으며, 이 기간 동안 무려 8차의 예비회담을 거듭했다. 예비회담에서 합의된 주요 내용으로는, 회담 명칭을 ‘남북고위급회담’으로 하고 제1차 회담은 1990년 9월 4일부터 서울에서, 제2차 회담은 10월 16일부터 평양에서 개최하며, 의제는 ‘남북 간의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와 다각적인 교류-협력 실시 문제’로 결정했다. 대표단은 각각 7명으로 하고 수행원은 33명, 취재기자 50명 등 총 90명으로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피스메이커>(중앙북스 펴냄) 171-172쪽)

 

1985년부터 안기부장 특보로 ‘남북 비밀 회담’을 맡아 온 박철언은 노태우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 정책보좌관에 임명되었다. 그 업무는 첫째 북방정책 추진, 둘째 대북 비밀접촉과 대북 문제 전반, 셋째 국내 정치의 중장기 기획, 넷째 당면한 주요 현안 문제에 대한 심도 깊은 판단의 네 가지였다고 한다. 박철언은 새 자리에서도 비밀 회담의 대표 자리를 지켰고, 그 운영을 위한 직통전화 ‘88핫라인’을 청와대 사무실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정책보좌관실 안에 ‘기밀실’을 만들었다.(<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1권 299쪽, 302-303쪽)

 

청와대 비서실은 정책 집행이 아니라 대통령 보좌를 위한 부서다. 그런데 정책보좌관이 회담 대표를 지속적으로 맡는다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고, 이로 인해 상당한 혼선이 빚어졌다. 박철언 자신의 기록에도 1988년 7월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제기된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의 중국 및 소련 방문설’을 언급하며 “나의 북방 정책 추진과 대북 접촉에 대해 누군가가 야당에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리고” 있었다는 말이 있다.(같은 책 2권 31쪽)

 

임동원의 <피스메이커> 내용에 관해 저자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물어보고 싶은 점 하나가 있다. 박철언의 역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노태우 정권에서 외교안보연구원장 직책으로 고위급회담 대표를 지낸 저자의 회고에 당시 북방정책의 기수를 자임하던 박철언의 역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뜻밖의 일이다.

 

확실한 설명을 듣지 못한 채(저자를 만나도 묻지 않는 게 예의일 것도 같다.) 짐작한다면, 참모 신분의 박철언이 현장 활동에 너무 열성적으로 나섰다는 모순점을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서술에서 배제한 것이 아닌가싶다. 임동원이 이 책에서 서술한 것은 행정가들의 손으로 진행된 정규적 대북관계다. 정규적 진행에서 벗어난 정치인 박철언의 ‘와일드카드’ 역할을 배제함으로써 서술의 안정성을 지키려 한 것으로 이해된다.

 

박철언의 활동 폭을 놓고 당시 논란이 많았다.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2권 51-52쪽에 박철언이 기록한 1989년 1월 4일의 청와대 회의 상황에도 이 문제가 나타난다.

 

1989년 1월 4일, 대통령 주재로 수석비서관 및 보좌관 회의가 열렸다. 나는 남북 문제, 북방 정책, 정책 보좌 문제에 대해 보고했다. 1989년 12월 8일에 정치특보로 임명된 노재봉 특보가 북방 정책 이야기를 꺼냈다. 노 특보는 “북방 외교와 남북 문제를 구분해서 혼동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북방 외교의 속도 조절이 필요합니다. 미국, 일본, 타이완과의 관계를 먼저 다져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자유민주 신봉 세력들이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자세이니 간접적인 지원을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를 했다.

 

당시 일부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나의 주도하에 추진되는 북방 정책에 대하여 ‘용공 외교’ ‘밀사 외교’ ‘밀실 외교’ ‘졸속 외교’라며 마구 비판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친미 일변도의 시각과 극우 보수주의 측에서도 우려하는 분위기가 높았다. 이를 대변하는 듯한 노재봉의 문제 제기였다.

 

논란이 된 자기 역할을 박철언은 ‘대통령 지시’로 정당화했다. 1988년 12월 6일 박세직 신임 안기부장의 대통령 보고에 홍성철 비서실장과 자신이 배석한 자리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발언 내용을 이렇게 인용한 곳이 있다.

 

“북방 정책, 남북 문제, 국내 정치의 중장기 판단, 당면 주요 현안에 대한 깊은 판단은 청와대 정책보좌관실에서 하니 안기부도 특보제를 강화하여 뒷받침해주도록 하라. 박철언 보좌관 팀이 남북 정상 회담의 비밀 창구이다. 고도의 보안을 필요로 한다. 보안을 지켜줘야 한다. 또 안기부가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한다.”(같은 책 2권 47쪽)

 

박철언의 사조직 월계수회의 63빌딩 본부에 ‘북방정책연구소’ 간판을 걸어놓았던 사실을 보더라도 정치인 박철언과 북방정책 담당관 박철언 사이의 경계는 모호했다. 1988년 4월에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을 만났을 때 직원들 회식이나 시켜주라며 준 봉투에 “보좌관실 직원 50여 명이 회식을 몇백 번 하고도 남을 큰돈”이 들어 있기에 정중하게 돌려줬다는 이야기가 위 책 308-309쪽에 적혀 있다. 그가 정치자금을 필요로 하는 정치인이라고 하는 세간의 인식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1989년 1월 싱가포르에서 가진 ‘비밀회담’ 이야기는 그와도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 1월 22일에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싱가포르에서 한시해 대표와 ‘88계획’ 상의 남북 비밀 회담을 갖기 위해서였다. 강재섭, 강근택, 김용환이 나를 수행하였다. 1월 26일, 보안을 위해 호텔 수영장에서 한시해와의 비밀좁촉을 가졌다. 한시해 대표는 “고위 당국자 회담에 박 대표도 참석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한 대표의 생각은 어떻습니까?”라며 한시해의 의견을 물어봤다.

 

한시해 대표는 “박 대표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도록 여러 측면에서 뒷받침해줄 수 있습니다. 언제라도 상의해주십시오. 이번에 10만 불 정도를 지원해줄 수 있는데 어떻습니까?”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마음속으로는 ‘아니! 이 양반이 돌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 대한 호의는 고맙지만 민족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돈 얘기는 피차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고 정색을 하면서 응수했다.(같은 책 55-56쪽)

 

말도 안 되는 제안으로 박철언은 생각했다지만, 한시해는 4년간 거의 매달 박철언과 회담을 가져 온 카운터파트였다. 한시해가 이상한 사람이라서 이상한 생각을 한 것만일 수는 없다. 한시해가 자기 돈 갖고 그런 제안을 한 것일 수도 없다. 박철언이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인지 떠볼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북측에서는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돈 얘기가 나온 김에 대기업이 북방정책에 관여한 흔적도 박철언의 ‘증언’ 중에 언뜻언뜻 살펴볼 수 있다. 대우의 김우중은 헝가리 수교에 큰 기여를 하는 등 공산권에서의 활발한 활동이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인데, 박철언과의 접촉은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1988년 4월에 돈 봉투를 받았다가 돌려준 얘기 외에 같은 해 7월 29일에 북한을 방문할 예정인 김우중과 만나 대북 정책 문제, 헝가리 투자 문제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는 정도가 보일 뿐이다.(같은 책 2권 30쪽) 김우중이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을 것은 틀림없는 일인데 다른 채널을 통한 것인지, 아니면 박철언이 말을 아낀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반면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과의 협력관계에 관해서는 훨씬 소상히 밝혔다. 1988년 10월 4일 프라자호텔 2085실의 만남에서는 소련 방문 계획에 대한 협조 요청과 함께 금강산 관광특구에 대한 구상을 설명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12월 17일과 1989년 1월 5일에 청와대 사무실로 찾아와 임박한 북한 방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같은 책 2권 32쪽, 48-49쪽, 52쪽)

 

가장 흥미로운 것은 1989년 2월 2일 정주영이 북한에서 돌아왔을 때의 기록이다.

 

2월 2일, 정주영 회장이 귀국했다. 공항에서 동행을 요구하는 안기부 직원들을 따돌리고, 오후 1시 50분경 바로 청와대의 내 사무실로 달려왔다. 정 회장은 “허담 비서가 ‘박 대표에게 정중한 안부를 전해달라’고 당부하더군요. 허담 비서는 비방 방송의 중지 제의를 총리 회담 예비 회담에서 할 예정이라며,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내가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허 비서는 군비 축소도 주장했습니다”라고 허담과의 대화 내용을 설명했다. (...)

 

그러나 정주영과 내가 구상-추진했던 금강산 관광-개발은 엄청난 역풍에 부닥쳐야 했다. 물론 9년 후인 1998년 11월에야 역사적인 첫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졌으나, 당초의 구상대로였다면 1989년 7월에 첫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지고 대북 경협도 10년은 빨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전향적인 대북 정책과 자주 세계 외교 시대를 향한 북방 정책에 대한 안팎의 비판과 견제가 너무 심했다.(같은 책 57-58쪽)

 

정주영은 무슨 재주로 공항에서 안기부 직원들을 따돌렸을까? 안기부를 따돌리고 바로 달려온 곳이 박철언의 사무실이었다는 사실에서 추측이 가능하다. 안기부는 박철언이 3년간 몸을 담은 곳이었고, 청와대 보좌관 입장에서 현장 활동에 관여하려면 제일 먼저 도움을 받아야 할 기관이었다. 그런데 안기부마저 따돌리고 정주영과의 관계를 혼자 챙기려고 드는 것은 참으로 ‘밀실 외교’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자세다.

 

그리고 금강산 관광을 “정주영과 내가 구상-추진”했다고 하는 데서도 박철언의 업무에 대한 인식과 자세를 알아볼 수 있다. 실행 부서도 아닌 청와대 보좌관이 그런 사업의 구상-추진에 재벌 총수와의 합작 주체로 자신을 인식하다니, 그를 둘러싸고 혼선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박철언은 이 책의 여러 곳에서 관계와 학계의 ‘친미파’와 대비되는 ‘자주파’로 자신을 내세운다. 나 자신 우리 사회, 특히 엘리트계층의 ‘종미’에 가까운 지나친 친미 경향을 걱정하는 사람이지만, 미국과의 공조 필요성을 제기하는 정도의 주장을 박철언이 “친미 일변도”로 비판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미국과의 관계가 가진 현실적 중요성까지 부정하는 ‘자주파’라면 진정한 자주의식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수사(修辭)에 불과한 것이기 쉽다.

 

박철언의 기록’ 내용을 검증할 다른 자료를 찾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기록만을 놓고도 세심히 들여다보면, 남북 정상회담 추진을 최대의 과제로 내세운 그의 활동이 고위급회담을 주축으로 진행된 정상적 대북관계와 별도로 전개되었고, 이로부터 많은 혼선의 소지가 발생한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강준만이 노태우 정권 북방정책의 정략성을 크게 보는 이유도 여기 있고, 1992년 말 고위급회담이 정략적 의도로 좌초될 위험도 이런 분위기에서 자라난 것이 아닐지.

 

1990년을 전후한 국제정세 변화는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한 초유의 기회를 가져왔다. 이 기회를 소중히 여겨 더 큰 계기를 만들기 위해 고초를 무릅쓴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 직책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정상회담은 대박”이란 식의 정략적 사고를 갖고 모처럼의 기회를 그르친 사람들도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