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11일 선교사이자 교사인 마셀라 셔우드 양은 인도 펀자브 주 암리차르 시에서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향해 가다가 좁은 골목길에서 폭도들과 마주쳤다. 폭도들은 그 머리채를 잡아 쓰러트리고 실컷 때리다가 죽은 줄 알고 버려두고 갔다. 착한 인도인 몇이 셔우드를 구해 감춰놓고 치료해준 다음 폭도들 몰래 영국군 요새로 데려다줬다. <Wikipedia> "Jallianwala Bagh massacre"항에 나오는, 할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 이야기는 아마 셔우드 본인의 진술에 의거한 것이리라 짐작된다.

 

며칠 후 병상의 셔우드를 방문한 지역 주둔군사령관 레지널드 다이어 대령(임시 준장)은 괴이한 명령 하나를 내렸다. 셔우드가 폭행을 당한 그 골목을 지나가는 인도인은 골목 끝에서 끝까지(200야드 거리) 네 발로 기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몇 달 후 다이어는 조사위원회의 심문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도인들은 자기네 신들 앞에서 엎드려 기지 않습니까. 영국 여인은 힌두교의 신 못지않게 신성한 존재이며, 따라서 인도인은 영국 여성 앞에서도 네 발로 기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주고자 한 것입니다.”

 

다이어가 심문을 받은 것은 셔우드 폭행사건의 이틀 후 암리차르에서 벌어진 참혹한 일 때문이었다. 일요일이자 축제일인 이 날 오후 1만5천 명의 군중이 공원에 모여 있을 때, 다이어 대령이 일군의 병력을 이끌고 와서 아무런 경고나 해산명령도 없이 공원 입구를 막고 군중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사격은 탄약이 거의 떨어질 때까지 10분간 계속되었다. 대영제국 최악의 만행 중 하나로 꼽히는 ‘암리차르 학살’이었다.

 

그 날 아침에 계엄령이 내려진 사실을 군중 대부분은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다이어에게 군중의 해산보다 살해가 목적이었다는 사실이 심문 과정에서 밝혀졌다. 그는 군중이 밀집한 곳으로 사격을 집중하도록 소총수들을 독려했다. 차마 사람을 쏠 수 없어 조금 조준을 높이는 병사에게 “조준 낮춰! 너 여기 뭐 하러 온 거야?” 외치기도 했다. 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정문 외의 네 군데 비좁은 출입구에 사격이 집중되었고, 그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깔려죽기도 했다.

 

몇 달 후 식민당국은 암리차르에서 379명이 살해되었다고 발표했으나 인도인들은 믿지 않았다. 발사된 탄환이 1,650발 가량이었다는 사실은 확인되었지만, 총 맞아 죽은 사람보다 밟혀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광장 모퉁이의 우물에 많은 사람이 탄환을 피해 뛰어들었다가 압사했는데, 이 우물에서만 120구의 시신이 나왔다. 국민회의는 별도의 조사를 통해 사망자가 1천 명이 넘는다고 발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인도의 정정이 불안할 때였다. 인도 민족주의자들은 전쟁 중 영국에 대한 협력을 인민에게 호소했고, 1백여만 명의 인도인이 군인과 노무자로 전선에 나갔다. 자치와 독립의 길을 열어가기 위해서였다. 간디도 여기 동참했기 때문에 그의 비폭력주의와 모순되는 것 아니냐는 시비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끝나 군사력에 여유가 생기자 영국은 거꾸로 인도에 대한 강압통치를 더욱 조이는 정책을 취했다. 1919년 3월 10일 인도에서의 테러 방지를 목적으로 언론 통제와 임의 체포 등 억압정책을 허용하는 롤래트 법(Rowlatt Act)의 통과를 계기로 인도 민족주의자들이 영국에 대한 협력노선을 포기하면서 민중소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소요는 펀자브 지역에서 특히 심했고, 암리차르에서도 학살 전 며칠 동안의 시위 중 경찰의 발포로 십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분노한 인민의 영국인에 대한 습격이 일어나는 가운데 셔우드 폭행사건도 일어났던 것이다.

 

학살을 지휘한 다이어는 상급자들에게 “혁명군과 조우해 교전을 벌였다”고 보고했다. 펀자브 주의 대리총독 마이클 오드와이어는 다이어의 조치가 정당한 것이었다고 승인하고 첼름스포드 인도총독에게 계엄령 선포를 요청했다. 총독은 이것을 승인했다.

 

다이어는 인도인들에게 “암리차르의 백정”이란 별명을 얻었으나 본국에서는 많은 지지를 받았다. 러드야드 키플링은 그를 “인도의 구원자”로 치켜세우며 모금운동을 벌여 2만6천 파운드를 모았다.(피살자 유족들은 옥신각신 끝에 1인당 37파운드 10실링씩을 보상금으로 받았다.) 상원에서도 다이어를 애국영웅으로 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하원은 달랐다. 학살 15개월 후인 1920년 7월 8일 하원은 다이어의 조치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247 대 37로 통과시켰다. 표결 직전 윈스턴 처칠의 발언 중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군중은 곤봉 정도 외의 무장을 갖추고 있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공격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 사격이 시작되자 군중은 달아나려 했습니다. 트라팔가 광장보다 훨씬 작고 거의 아무 출구도 없는 공간 속에 총알 하나가 서너 사람을 뚫고 나갈 정도로 빽빽하게 들이찬 상황에서 사람들은 미친 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격이 중앙을 향하면 군중은 측면으로 달아났고, 그러면 사격이 측면으로 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땅에 엎드리자 사격은 땅바닥을 향해 내려갔습니다. 이런 상황이 8분 내지 10분 동안 계속되었고, 탄약이 떨어질 지경이 되어서야 사격이 그쳤습니다.”

 

학살에 대한 보도는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한 달여가 지난 5월 22일에야 소식을 들은 시인 타고르는 며칠 후 첼름스포드 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 기사작위를 버린다고 선언했다.

 

“펀자브 주에서 국지적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정부가 취한 끔찍한 조치로 인해 우리 마음에는 모멸적인 충격과 함께 영국 신민으로서 인도인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깨달음이 떠올랐습니다. (...) 슬픔과 공포 속에 말문이 막힌 수많은 동포들의 항의를 위해 어떤 어려움이라도 무릅쓰고 목소리를 제공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입니다. 어처구니없는 모멸의 상황이 명예로운 훈장으로 하여금 수치심으로 번들거리게 하는 때가 왔습니다.”

 

식민당국과 영국정부는 암리차르 사태에서 다이어의 역할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며 파장을 차단하는 데 주력했다. 영국 언론에 학살의 진상이 보도되기 시작한 것은 8개월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다이어를 옹호하는 공식보고만으로도 정치계와 관계에서 논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 내각의 인도장관 에드윈 몬테이규는 사건 반년 후인 10월에 인도의 소요사태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윌리엄 헌터 위원장의 이름에 따라 ‘헌터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사법적 권한이 없는 위원회였으므로 증인에게 선서를 요구할 수 없었다. 그래도 위원들은 엄격한 심문을 통해 중요한 쟁점들을 잘 밝혀낸 것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11월 19일 위원회에 출두한 다이어는 많은 사상자를 내려는 의지를 내내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혔다. 출동 몇 시간 전부터 군중의 결집을 알고 있었지만 결집을 막으려는 조치를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고, 출동할 때는 군중을 향해 발포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명예와 당국의 명예를 위해 발포가 꼭 필요했다는 것이다.

 

“발포 없이 군중을 해산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면 군중이 도로 모여 우리를 비웃었겠지요. 그것은 나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길이었습니다.”

 

헌터위원회의 조사 결과가 알려지면서 영국에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정책에 미련을 가진 수구세력과 환멸을 느끼는 일반인 사이에 심각한 국론분열이 일어났는데, 수구세력의 정보 독점이 차츰 풀리면서 학살에 대한 비판이 확대되고 고조되었다.

 

헌터위원회는 1920년 3월 8일 방대한 증거를 첨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다이어와 식민당국의 몇 가지 중요한 조치를 ‘오류’(error)로 규정했다.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기술적인 실수 정도로 본다는 것이다. 결론의 중요한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 사격 시작 전에 해산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은 오류다.

* 사격을 길게 계속한 것은 중대한 오류다.

* 군중의 기세를 꺾어놓으려 했다는 다이어의 의도는 잘못된 것이다.

* 다이어의 행동은 권한을 넘어선 것이다.

* 펀자브 지역에는 영국의 통치를 전복하려는 음모가 존재하지 않았다.

 

헌터위원회의 9인 위원 중 인도인은 두 명이었다. 그들은 위원회의 보고서 내용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소수의견을 별도의 보고서로 작성했다. 이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추가되었다.

 

* 군중집회를 금지하는 포고령이 충분히 알려져 있지 못했다.

* 군중 속에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었고, 공원 내에서 아무런 폭력적 행동도 없었다.

* 다이어는 부상자를 구조하도록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행정당국에 알려야 했다.

* 다이어의 행동은 “비인도적이고 비영국적”이었으며 인도에서 영국 통치의 위신을 손상했다.

 

영국의 비판 여론 가운데 “대영제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수치스러운 참사”라는 처칠 국방장관과 애스키스 전 수상 등 정계 요인들의 지적이 두드러진다. 학살의 야만성과 대영제국의 문명 사이에 선을 그으려는 의도가 읽힌다. 그런데 사실 따져보면 이 정도 “수치스러운 참사”는 대영제국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 영국인의 활동 중에는 더 심한 것도 꽤 있었다. 이 정도 만행이 영국의 여론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어찌 보면 오히려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두 가지 큰 배경조건이 생각된다. 그 하나는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으며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감이 자라나고 있던 영국의 상황이고, 또 하나는 영국과 인도 사이의 문화적 친연성이 튼튼히 자리 잡고 있던 상황이다.

 

세계 각지의 영국 식민지 중에 인도는 특이하게 높은 수준의 토착문명을 가진 곳이었다. 영국 지배를 받는 동안 영국의 많은 문물이 인도에 수입된 것은 물론이지만 인도의 문명과 문화에 대한 영국인의 애정과 존경도 상당히 일어났다. 영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인도의 색채를 조화시킴으로써 전 세계인이 우러러볼 경지에 이른 인도인들도 있었다. 인도인을 다른 식민지 원주민처럼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던 다이어 대령 같은 사람들을 영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오히려 야만인으로 보고 있었다.

 

헌터위원회가 구성될 때까지의 정황을 세밀히 보여주는 자료는 접하지 못했다. 그러나 반년이나 지난 후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는 사실에서 약간의 추측이 가능하다. 강압통치를 지지하는 수구세력은 다이어의 ‘애국적’ 행동이 조사 대상이 되는 일을 극력 막으려 했을 것이다. 인도총독부에서는 정보의 본국 전달을 최대한 막음으로써 의혹을 품는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몇 달에 걸쳐 조금씩 전달된 정보가 쌓여 조사위원회 구성의 필요성이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반년의 시간 동안 인도에서 사태가 더 악화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이어로 대표되는 강압통치 제창자들은 가혹행위를 통해 인도인의 과격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그 저항을 갖고 자기네 주장을 정당화하려 했다. “보아라! 인도인들은 저렇게 반역심을 품고 있지 않은가! 힘으로 억누르는 것 외에는 인도에 질서를 유지할 길이 없다!” 폭력사태가 커졌다면 진압에 바빴을 것이고, 헌터위원회의 차분한 조사활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22년간의 남아프리카 생활을 마치고 1915년 인도로 돌아온 간디의 사티아그라하(비폭력 저항) 노선이 지도력을 키우고 있을 때였다. 1918년 중 참파라와 케다의 농민운동에서 거둔 성공 위에서 1919년 3월 롤래트 법에 저항하는 ‘하르탈’(hartal, 정호영은 남부디라파드의 <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 역자주에서 “현재는 파업의 의미로 쓰이고 있으나 당시에는 힌두교 전통에서 세상의 모든 일을 중단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라고 설명했다.) 운동도 간디가 주도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 인도인 중에는 과격투쟁을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간디와 국민회의에 대한 신뢰 위에서 인도 인민이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간디는 진실이 결국 승리한다는 믿음을 갖고 사티아그라하 지도력을 발휘했다. 역사가들 중에는 암리차르 학살이 인도 독립을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헌터위원회가 영국인의 양식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위원회의 충실한 활동이 가능하게 한 인도인의 자제력이 내게는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덧붙임 하나. 암리차르 학살 당시의 펀자브 대리총독 오드와이어가 1940년 3월 13일 런던의 캑스턴홀에서 인도 독립운동가 우담 싱에게 저격 사살당했다. 학살 당시부터 다이어는 하수인일 뿐이고 오드와이어가 몸통이라는 견해가 많이 떠돌았는데, 강제퇴역을 당한 다이어와 달리 오드와이어에게는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우담 싱은 그 해 7월 31일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그 자신이 학살 현장에서 총상을 입은 사람이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그에 대한 여론의 비난은 심하지 않았다. 그는 재판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를 죽인 것은 그에게 원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학살의 진짜 원흉입니다. 그가 우리 사람들의 정신을 짓밟으려 했기 때문에 내가 그를 짓밟은 것입니다. 복수를 위해 21년을 기다려 왔습니다. 해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나는 내 조국을 위해 죽습니다. 조국을 위한 죽음보다 더 큰 어떤 명예를 내가 바라겠습니까?”

 

 

Posted by 문천
2014. 8. 28. 10:29

 

지난 1년간 원자론적 세계관과 유기론적 세계관의 차이와 관계에 생각을 모아 왔다. 19세기 초에 나온 돌턴의 원자론이 환원주의(reductionism) 풍조를 크게 일으켰고, 그 바탕 위에서 개인주의가 득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전개 양상에 큰 작용을 함으로써 '근대성'의 기조가 되었다. 그런 풍조가 이제 한계에 도달해 전환의 방향을 찾는 단계에 와 있는데, 그 동안 짓눌려 있던 유기론적 세계관의 어느 정도 회복이 예상된다는 생각이다.

 

개인주의(individualism)에 대칭되는 유기론적 입장이 근현대사회에서 어떤 형태로 펼쳐져 왔는지도 궁금해졌다. 막상 살펴보니 개인주의의 위세에 맞설 만한 모습을 찾기 어렵다. 근대사회에 대한 개인주의의 지배력이 얼마나 막강한 것이었는지 새삼 실감된다.

 

이런 모색을 통해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개인주의에 버금가는 큰 힘을 일으킨 움직임 아닌가. 그런데 현실 속의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에 맞설 잠재적 가능성을 가진 움직임이지만 (그리고 19세기 전반 태동기에는 그런 경향을 많이 보였지만) 정치현상으로서 사회주의는 꼭 그렇지 않았다. 이것을 현실 사회주의의 '타락'한 모습이라고 우기기도 좀 어색하다.

 

그런 차에 'corporatism' 생각이 떠올랐다. 흔히 '조합주의'라고 번역되는데,(강철구는 '합의주의'를 제시한다.) 썩 끌리지 않는다. 라틴어 'corpus'(신체)에 어원을 둔 말인데, 내 생각에는 '유기체론' 정도가 뜻도 정확하고 어감도 순탄하니, 꼭 다른 번역어를 쓸 필요가 떠오르지 않는 한 여기서는 그렇게 쓰겠다. 원자론에 입각한 개인주의와 의미상으로 딱 대칭이 되는 입장이다.

 

중세의 봉건제는 전형적인 유기체론을 보여줬다. 그러니 봉건제를 까뭉개는 근대에 들어와 유기체론도 고생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이치 자체에 타당성이 많이 있으니(개인주의에 맞설 만큼) 어떤 형태로든 삐져 나온다. 19세기 이래 유기체론이 나타나는 형태가 다양하게 된 것은 강고한 개인주의의 벽을 뚫고 나올 틈새를 여기저기 조금씩 뚫고 나오려 애쓰던 양상으로 보인다. 심지어 파시즘의 형태까지 취했다.

 

<Wikipedia>에서 "Progressive Corporatism" 부분이 재미있다. 19세기 전반까지 반동세력만이 유기체론을 떠받들던 상황에 이어 19세기 후반 유기체론의 업데이팅이 이뤄지는 장면이다.

 

1850년대 이후 고전적 자유주의와 마르크시즘에 대항해 진보적 유기체론이 나타났다. 유기체론자들은 계급간 협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산층과 노동계층의 구성원들에게 집단적 권리를 부여할 것을 제창했다. 마르크시즘의 계급투쟁 관념에 반대한 것이다. 1870~80년대에는 사용자와의 협상을 사명으로 하는 노동조합이 만들어짐에 따라 유기체론이 유럽에서 부흥의 기회를 얻었다.

 

페리드난드 퇴니에스의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1887)를 계기로 유기체론 철학이 크게 되살아났다. 이에 따라 Neo-medievalism[낭만주의?]의 발전과 길드 사회주의의 확산을 보게 되고, 사회학 이론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경제적 계급의 기계적 사회원리가 가문, 지역공동체, 가족, 직능단체 등 유기적 사회조직을 무너트린다고 퇴니에스는 주장했다. [독일의] 국가사회주의자들은 퇴니에스의 이론을 이용해서 '인민게마인샤프트'(Volksgemeinschaft)를 선전했다. 그러나 퇴니에스는 나치즘에 반대하고 1932년 독일 파시즘에 대항하는 사회기독당에 참여했고, 이듬해 히틀러에게 명예교수직을 박탈당했다.

 

퇴니에스의 이론과 함께 에밀 뒤르켕의 '연대주의'(solidarism)도 유기체론의 표현으로서 흥미로운 것이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나온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 유기체론'(liberal corporatism)은 좀 야리꾸리한 느낌이 든다. 개인주의에 대한 투항에 가까운 타협이라는 느낌이다.

 

20세기 전반기에는 파시즘과의 결탁이 유기체론의 가장 강력한 표현이었고, 이로 인해 유기체론의 체면이 크게 추락했다. (웬만한 지식인들이 유기체론을 쳐다보기도 싫어하게 된 것 아닐지.) 이 장면은 책을 구해 좀 세밀하게 살펴볼 생각을 남겨둔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노-사-정 협력을 중시하는 '신유기체론'(neo-corporatism)이 나타나는데, 강철구 교수가 '합의주의'라는 번역어를 생각하는 것은 이것을 주로 염두에 둔 때문일 것 같다.

 

19세기 후반 개인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상황에서 시도된 유기체론의 여러 가지 표현을 살핌으로써 서양근대문명의 전통이 개인주의를 극복할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20세기 전반 파시즘과의 결탁 장면에서도 뭔가 재미있는 생각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 방향일지 확실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Posted by 문천

 

1927년생의 셀리그 해리슨은 워싱턴포스트 도쿄지국장으로 있던 1972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인터뷰하면서 북한 사정에 가장 정통한 서방 언론인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그 후 언론계를 떠나 국제관계 연구에 나서면서 최고급 북한 전문가가 되었다. 1994년 6월 사망 한 달 전의 김일성과의 세 시간에 걸친 면담으로 그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미국 지식인으로서 현실적 존재감을 보여주기도 했다.

 

해리슨의 논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의 역할이 북한의 대변인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북한에 대한 그의 지식과 이해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후자의 의견을 가진 사람이지만, 설령 그가 “북한의 대변인”이라 하더라도 그것 역시 매우 소중한 역할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북한의 대변인’이 너무 적다는 사실 때문에 불필요한 어려움과 위험을 얼마나 많이 겪어 왔는가.

 

해리슨의 논설 중 ‘북한붕괴론’의 반박에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본다. 소련 해체와 동구권 붕괴 이래 북한붕괴론이 끈질기게 떠돌면서 여러 나라의 정책결정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 대결정책에 치우치게 한 영향뿐만 아니라 포용정책에도 많은 편향성을 일으켰다. 근년 들어 미국의 관계, 학계와 언론계에서는 많이 퇴조했지만, 한국의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는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북한붕괴론의 ‘확인사살’이 필요하다고 나는 본다. 미국에서 북한붕괴론이 잦아든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두 차례 지도자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큰 동요가 없다는 사실을 통해 체제의 안정성이 확인된 것이고, 또 하나는 북한 사정에 관한 정보 공급이 (아직도 아주 원활하지는 않지만) 그 동안 크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 정권이 북한붕괴론에 집착하는 것은 정권의 수구성 때문이다. 남한 정책의 수구성이 남북관계의 발전을 가로막고 한반도 평화에 불필요한 위험을 가져오는 것은 전에도 있었던 일이고 요즘도 있는 일이다. 정책의 수구성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과제의 하나가 북한붕괴론의 청산이다.

 

북한붕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출발점으로 해리슨이 2002년 낸 <코리안 엔드게임>(이홍동 외 옮김, 삼인 펴냄)을 살펴본다. 북한붕괴론이 성행하던 1990년대의 여건 속에서 해리슨이 이에 반대한 논거가 어떤 것이었는지 이 책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 논거의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 후의 변화된 여건 속에서 북한붕괴론의 붕괴를 당연한 일로 볼 수 있다.

 

해리슨은 책의 앞머리에서 북한붕괴론의 존재를 지적하고 그에 대한 자기 의견을 요약해서 내놓았다.

 

북한이 붕괴할 것인가-그리고 미국이 그 붕괴를 촉진시켜야 할 것인가-에 관한 논란은 줄곧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 결정을 마비시켜 왔다. 이 논란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평양에서 벌어지는 일을 주시하고 ‘제한된 개입[포용]’ 정책의 가능성을 열어 두면서, 시간만 보내 왔다. 장기적이면서도 일관된 정책 목표가 부재한 가운데 역대 행정부들은 자기 나름의 목적을 추구하는 평양이 조성한 위기에 말려들어 임시변통책을 내놓곤 했다.

 

논란은 점점 단순화되어 경직된 논리를 선택하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한쪽은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북한이 붕괴한다는 쪽으로 나아갔고, 다른 쪽은 김정일 체제가 조금도 바뀌지 않은 채 생존한다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 중간 정도가 가장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이데올로기에 눈멀지 않은 현실적 평가이다. 북한이 생존은 하지만 노동당 체제와 그 지도력의 성격이 크게 바뀐 다음에야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 엔드게임> 43-44쪽)

 

이에 이어 클린턴 행정부에서 북한붕괴론이 득세한 상황을 설명했다.

 

북한 붕괴에 대한 기대감은 클린턴 행정부 8년 동안 지속적으로 높아졌다. 특히 김일성 사망과 이후 밀어닥친 기근과 경제적 침체가 이를 부풀렸다. 1994년 10월 워싱턴이 평양과 제네바 합의를 체결했을 때 공화당이 이에 대해 공격해 오자 백악관과 국무부는 북한이 곧 붕괴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세워 공개적으로 대응했다. 한 관리는 핵동결 대가로 민간 경수로를 지어 주는 것을 반대하는 비판자들에 대해 경수로를 건설하는 데 10년이 걸릴 것인데 “그 동안 북한 정권이 붕괴할 것이 거의 틀림없으며, 그때가 되면 북한은 이미 남한에 흡수돼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

 

1996년 1월 21일 앤서니 레이크 백악관 안보 보좌관은 백악관 상황실에 나를 포함한 6명의 민간 전문가를 초청했다. 레이크는 남한 출장을 계획하고 있었다. 한반도 관련 업무를 다루는 관리 8명이 그 토론에 참석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북한이 독립된 국가로서 계속 생존해 나갈 것이라고 얘기했다. 레이크를 비롯한 관리들은 모두 나의 의견을 무시했다. 그들 대부분은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과 붕괴에 대한 두려움 대문에 스스로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핵동결 합의에 따라 경제 제재를 완화하지 않으면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재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들은 나의 경고에 냉소를 보냈다. (같은 책 44-45쪽)

 

해리슨은 북한이 동구권 국가들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는 기본 이유로 민족주의와 유교적 전통 두 가지를 제시했다.

 

북한의 민족주의적 상징주의의 핵심 주제는 다음과 같다. 미국은 전략적 이유로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부활시키려는 것을 돕고 있으며, 미국의 아첨꾼인 남한은 단기적인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일본의 침략을 번듯이 용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북한이 공유하는 역사 인식은 이런 논리를 강력하게 뒷받침해 준다. 북한뿐 아니라 남한 사람들도 미국이 1905년 필리핀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대신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도록 묵인해 준 것을 비난한다. 그로부터 40년 뒤 미국이 소련과 함께 한반도를 분단시킨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남한이 분단 이후 미국과 일본에 휘둘려 민족적 대의를 배신했다고 본다. 평양은 남한 정부의 초기 지도자 중 많은 사람이 일본에 협력한 적이 있으며, 북한 지도자들이 항일 빨치산 전사로서 결점 없는 민족주의자들인 것과 대비된다고 주장한다. (같은 책 54-55쪽)

 

한민족이 중앙집권적 관료 기구를 갖추고 유교적 가치에 입각한 통일정부를 구성한 것은 1,2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 독일은 1945년 분단될 때 통일된 기간이 1세기도 채 안 되었다. 독일 사람들의 문화적-정치적 기질은 매우 지방분권적이어서 주요 도시들은 모두 최고 상표의 소시지나 최고의 오페라하우스를 가지려고 경쟁했다. 반면 매우 동질적인 조선에서는 피라미드형 행정기구의 정점에 왕이 있었고, 지방 정부는 왕정의 지부에 불과했으며, 문화적 규범은 모두 서울에 의해 결정되었다. (...) 양반 계층이 된 주요 가문들은 왕조 내부의 경쟁에서 쫓겨나지 않는 한 영구적으로 수도에 거주했다. 신성불가침한 사적 소유권이란 개념은 없었다. 왕이 변덕을 부릴 때마다 사람들의 경제생활이 박살나곤 했다. (같은 책 70-71쪽)

 

유교적 윤리관에서 보면, 이상적인 지도자는 모범적인 행동이나 현명한 가르침과 같은 도덕적 영향력을 통해 나라를 다스려야 하지, 야만적인 강요에 의해 나라를 다스려서는 안 된다. 지도자는 현명함을 백성들에게 전수하고, 백성은 그 진리를 기계적으로 암기해 옳은 것을 배운다. 김일성은 조선시대 왕들처럼 백성들에게 야만적으로 강요하는 수단을 조직적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그의 백성들은 고위 당국이 내려 주는 것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김일성은 이를 활용해 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했다. (...) 이들을 결합시킨 사적 유대는 과거 봉건시대의 양반적 전통을 연상시킬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후원자인 소련에게 배운 민주집중제와 과거 전통으로부터 내려온 유교적 가치, 문화적 유산 등을 성공적으로 결합해 전통적인 정치학의 분류법이 통하지 않는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냈다. (같은 책 72-73쪽)

 

민족이나 민족주의를 놓고 “상상의 공동체”니 “발명된 전통”이니 하는 말이 근래 유행하는데, 민족의 실체가 근세까지 불안정한 상태에 있던 지역과 사회에나 적용되는 말이다. 1990년을 전후해 무너진 동유럽 공산권 지역에는 1878년 베를린회담에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루마니아의 독립이 결정될 때까지 완전한 주권국가가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터키, 러시아, 세 제국의 각축장일 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공산정권이 세워진 나라들 중 70년 이상의 ‘민족국가’ 전통을 가진 나라가 없었다. 그런 곳의 민족주의, 예컨대 ‘범슬라브주의’(Pan-Slavism)에는 ‘상상의 공동체’나 ‘발명된 전통’의 측면이 크다.

 

분단 이후 남한 정권이 민족주의를 등지는 일이 많았고 경제와 문화가 외부 영향에 노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강고한 민족의식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외국인이 많다. 한국인 자신에게는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1천년 넘는 민족국가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한국 민족주의에는 분명히 남다른 점이 있다.

 

그런데 지난 70년간 남북 간 상황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북한인의 민족주의가 어떤 것이겠는가. 동유럽 국가들이 투항할 조건이라 해서 북한도 투항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게다가 투항 상대가 누구인가. 동유럽 공산국들은 미국에 대해 북한처럼 직접적인 ‘원한’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때까지 40여 년간 소련과의 관계 중에는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었을 것이다. 가까운 소련보다 먼 미국을 더 싫어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북한은 달랐다. 소련이 공산권 맹주로 버티고 있는 동안에도 소련에 전폭적으로 의지하던 동유럽 국가들과 달리 ‘주체’사상을 세운 것은 북한 체제가 사회주의 못지않게 민족주의에도 의지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측면은 위기상황일수록 부각되기 마련이다. 동유럽과 비슷한 수준의 압력으로는 무너지지 않을 특성을 북한 체제는 갖고 있었다.

 

민족주의와 함께 북한 체제를 버텨준 또 하나의 요소로 해리슨은 유교적 전통을 꼽았다. 유교적 전통 때문에 북한 체제가 조합주의(corporatism) 특성을 갖게 되었다고 그는 본다. 북한의 조합주의 특성은 브루스 커밍스가 “The Corporate State in North Korea”에서(Hagen Koo ed., <State and Society in Contemporary Korea>, 1993) 지적한 것이다.

 

해리슨은 조합주의 특성을 북한 체제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저항력을 확보해준 요소로 제시하면서 군국주의 일본에서도 나타났던 ‘아시아적 조합주의’의 의미에 대해 여운을 남겼다.

 

커밍스는 일본이 유럽의 파시스트 강국에 합류했지만 천황 체제는 대중 정당이나 명확한 이데올로기가 없기 때문에 진짜 파시즘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일본의 유교적 유산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은 아시아적 조합주의 체제였다. 북한 체제 역시 맑스-레닌주의를 과거 정치의 유교적 유산과 뒤섞은 독특하면서도 나름의 마력을 가진 사회주의적 조합주의 체제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합당할 것이다. (<코리안 엔드게임> 73쪽)

 

조합주의 특성의 근거를 ‘유교적’ 전통보다는 ‘봉건적’ 전통으로 설명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개인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세계관에 경쟁하는 것이 조합주의이기 때문이다. 유교적 전통이 그리 강하지 않았던 일본 경우를 설명하는 데도 봉건적 전통으로 이해하는 편이 적합하다. 산업혁명과 계몽사상에서 출발해 19세기 세계를 석권한 ‘근대주의’(modernism)는 유기적 전통질서를 파괴함으로써 하나의 ‘세계체제’를 만들어 왔다. 정치에서는 자유주의, 경제에서는 자본주의가 근대주의의 대표적 표현이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강한 힘을 누린 20세기 세계에서 조합주의는 파시즘 등 전체주의 체제에서 단편적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개인주의가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반발로 조합주의의 표현이 극단화된 사례가 전체주의로 나타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주의 세계관이 자체 모순에 의해 한계에 이른 21세기 상황에서는 조합주의의 다른 가능성이 검토될 필요가 떠오르고 있다. 그 필요를 염두에 둔다면 조합주의 특성이 북한 체제를 지탱한 역할을 더 깊이 검토할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리슨은 북한이 극심한 경제난을 버텨낸 이유로 제4장 “비밀스런 개혁”에서는 북한이 나름대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왔다는 사실을 밝히고, 제5장 “금과 석유, 그러나 무기력한 이미지”에서는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이 가진 잠재적 가치가 장기간에 걸친 유동성의 위기 속에서도 경제를 지탱해준 측면을 지적한다. 이 점은 솔직히 잘 납득되지 않는다. 북한의 버티는 힘을 조금 더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측면이기는 하지만 압력의 엄청난 규모에 대응할 만큼 큰 힘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북한붕괴론을 비판하는 데는 두 가지 논점이 있다. 하나는 그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정당성 문제고, 또 하나는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타당성 문제다. 최근 나온 이재봉의 “북한 붕괴,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9719]에 두 문제가 나란히 다뤄져 있다.

 

두 문제를 나란히 다룰 때, 두 문제의 관련성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재봉의 글에 좋은 논점이 많이 담겨 있지만 이 점에서 아쉬운 감이 있다. 북한붕괴론의 정당성에 대한 그의 비판에는 (그 청산을 바라는) 내 눈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 들어 있다.

 

“북한처럼 폐쇄적인 독재국가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수 없다. 정보가 통제되고 자유가 제한되어 불만 표출이 어렵고, 데모를 하더라도 그에 대한 탄압과 처벌이 너무 가혹할 것이기 때문이다.”

 

폐쇄적 독재가 인민의 저항을 다소 늦출 수는 있지만, 결국 터져 나올 때는 더욱 격렬하게 된다는 것이 남한의 경험으로도 확인된 사실이다. 7년간 유지된 유신체제보다 오래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가혹한 탄압과 처벌 정도로 부족하다.

 

“1980년대 말부터 노동자계층의 탈북이 급증하고, 유학생 및 작가나 교원 등 지식층뿐만 아니라, 외교관이나 당비서를 포함한 지배층의 망명까지 줄을 이었다. 그러나 '지식층의 이반'이든 '지배층의 동요'든 그들 모두 정권이나 체제에 불만을 품고 북한을 탈출한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자신들의 잘못에 따른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소외감으로 탈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황장엽 한 사람을 놓고는 타당한 설명이다. 그러나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탈북’ 사태는 북한 체제의 상당 수준 위기를 보여준 것이다. 그 수준을 냉철히 밝혀 지나친 과장을 피할 필요는 있지만, 그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개인적인 문제로만 돌릴 수는 없다.

 

이재봉의 글에서는 북한 체제의 위기를 지나치게 축소해서 보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그보다는 북한 체제의 붕괴가 바람직하지 않은 사태라는 점의 논증에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정당성 문제를 타당성 문제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 반증하려 하기 때문에 전체 논지의 설득력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북한 붕괴가 관계국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그 가능성이 억제된다는 점에 충분한 비중을 두면 설득력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

 

해리슨은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려 들지 않고 체제와 지도력의 상당한 변화를 겪으면서 생존의 길을 찾을 것이라는 중간적 판단을 제시했다. 그는 북한이 무조건 무너질 것인가, 아니면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을 것인가 하는 식의 흑백론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어떤 변화를 겪어내느냐 하는 조건에 붕괴 여부가 걸려있는 것이라면 주변국의 정책 선택이 그 조건에 작용할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미국과 남한 대결주의자들의 붕괴 ‘촉진’ 주장도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붕괴 촉진 정책을 강하게 꾸준히 쓰면 붕괴를 정말 일으킬 수도 있었으니까.

 

북한 붕괴 촉진을 주장한 것이 미국과 남한의 일개 파벌이었을 뿐, 두 나라의 국익을 제대로 대변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1990년대를 통해 두 나라 정책이 대결주의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으나, 붕괴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제기되는 상황에서는 억제된 것이 그 때문이다. 평시에는 대결주의 성향의 소수 이해집단 외에는 북한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지만, 위기가 제기되자 국가 차원의 득실을 제대로 따지게 된 것이다. 이에 비해 중국의 대 북한 정책이 같은 기간 중 일관성을 유지한 것은 미국이나 남한보다 북한 사정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북한 체제의 지속성은 자체 역량만이 아니라 주요 이해관계국들에게 그 붕괴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는 사실에 의지했던 것이다. 미국은 대외정책에서 ‘오판’을 잘하기로 소문난 나라인데도 북한을 놓고까지 결정적 오판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이라크를 멋대로 집적거려서 일으킬 수 있는 문제에 비해 북한에 대한 정책 실패가 가져올 부담이 엄청나게 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남한과 미국의 정책 결정에서 대결주의자들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정보와 이해의 부족이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그 조건이 크게 바뀌었다. 2002년 1월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은 미국 대결주의의 득세를 보여주고 북한은 연이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실험으로 이에 응수했지만, 1990년대와 같은 불안한 상황이 재현될 위험은 크게 줄어들었다. 북한의 상황이 그때보다 더 잘 알려져 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미국과 남한에서 대결주의가 우세한 동안에는 북한 입장에서 정보 유출을 가로막는 비밀주의에 유리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외부의 위협을 줄이기 위해 “정직이 최선의 정책”인 상황으로 바뀌어 왔다. 북한이 가까운 시일 내에 체제 개방까지 나아가지는 못하더라도 대외 홍보의 수준이라도 발전시킬 것을 기대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