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7월의 제2차 북미회담 이후 제3차 회담이 기약 없이 늦어지는 가운데 분위기가 회담 재개를 어렵게 만드는 쪽으로 계속 흘러갔다. 10월 4일 IAEA총회에서 북한의 사찰 수용 거부를 ‘우려’하는 결의를 채택했고, 11월 1일 유엔총회에서 IAEA의 노력을 지지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연말에 이르러(12월 29일) 북-미간 뉴욕 접촉에서 협력 방침이 합의되고 이듬해 2월 25일 북-미간 ‘4개항 동시조치 합의문’이 타결되어 수습의 길이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한 채 3월 19일 남-북간 특사교환 회담이 북한 대표의 “불바다” 발언을 남기고 파탄에 이르자 미국도 북한에 대해 강압적 태도로 돌아섰다.

 

이틀 후인 1994년 3월 21일 IAEA 이사회에서 북한 문제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3월 31일에는 IAEA 입장을 지지하는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이 나왔다. 4월 20일에는 11월에 팀스피릿 훈련을 재개할 방침이 발표되었다. 북한은 이에 반발, 영변 원자로의 연료 재장전 의도를 4월 25일 IAEA에 통보하고 5월 17일에 재장전을 시작했다. 재장전 감시를 위해 IAEA 사찰단이 입북했으나 북한당국과의 협조가 잘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6월 13일 북한의 IAEA 탈퇴 선언에 이른다.

 

1994년 2월 윌리엄 페리가 국방장관에 취임한 후 북한 문제의 악화에 따라 군사적 조치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전쟁 가능성 검토를 주도했다는 점을 놓고 페리를 강경파로 볼 수도 있지만, 셀리그 해리슨은 <코리안 엔드게임>에서 김일성-카터 회담 결과를 지지한 고위관료로 갈루치와 함께 페리를 꼽았다. 사실, 페리가 주도한 전쟁 가능성 검토가 대북 강경론을 물리치는 근거를 만들어주었다. 페리는 북한 문제 완화를 위해 애쓰던 레이니 주한대사의 의논 대상이기도 했다.

 

4월 김일성 생일 즈음에 김일성 주석은 넌 상원의원과 군사위원회의 또 다른 민주당 위원인 칼 레빈을 북한으로 초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넌 의원은 5월 10일 워싱턴을 방문한 짐 레이니 주한 미 대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미 행정부가 여전히 북한 지도자들과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없다는 점을 우려한 레이니 대사는 이 아이디어를 페리 장관, 레이크 보좌관, 갈루치 차관보와 논의했으며 이들은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 226쪽)

 

이에 따라 샘 넌은 공화당의 리처드 루가 의원과 함께 5월 25일 평양으로 떠날 계획을 세웠는데, 출발 직전에 평양으로부터 그들의 “방북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미국의 촉박한 통지로 인해 지금으로서는 이들을 맞을 수 없다”며 6월 10일경을 대신 제안하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같은 책 227쪽) 넌과 루가의 정치적 위상으로 보면 미국과의 관계에 돌파구를 찾던 북한에게 반가운 손님이었을 텐데, 그들의 방북을 결과적으로 무산시킨 것이 의아한 일이다. 카터 방북의 물밑교섭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일까?

 

카터 방북의 성과를 클린턴 행정부가 못마땅해 하면서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처럼 알려진 것이 본심을 감춘 연출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앞서 적었다. 미국 정부도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 압박에 IAEA와 남한을 앞세웠는데, 그것이 북미회담 진행에 족쇄가 되었다. IAEA는 애초의 엄격한 사찰 기준을 고집했고, 남한은 남북관계 진전이 북미관계에 앞설 것을 요구했다. 이 족쇄를 풀기 위해 카터 방북의 효과를 드라마틱하게 연출할 필요가 있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전직 대통령이 김일성을 만난 다음 자기 의견을 일방적으로 발표해 버렸다. 공식 사절이 아니라고 그냥 묵살해버릴까, 아니면 최대한 존중할 것인가, 양자택일의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불과 3주 후에 제3차 북미회담이 열리게 되는 것을 보면 미국 정부도 회담 재개를 위한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병력 증강을 논의하고 주한 미국인을 소개시킬 것처럼 들썩거리며 전쟁 가능성을 띄워댄 것도 정책 전환을 앞두고 동맹국에게 체면치레를 한 것일지 모른다. 퀴노네스의 상황 설명이 적절하다.

 

카터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1993년 8월 이래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북미관계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고 위기상황을 잠재웠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카터 전 대통령은 자신의 부인만 배석시킨 가운데 김일성과 단독회담을 가졌다. 카터는 이 회담에서 우리가 1994년 2월 합의결론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을 정확히 달성했다. (...)

 

따져 보면 카터 전 대통령과 노쇠한 김일성 주석 간에 성공적인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무대는 이미 마련된 상태였다. 미국과 북한 정부는 그 한 해 전 그러니까 1993년, 대화 채널을 통해 서로의 차이점을 의논할 공통의 언어와 이 차이를 해결할 공통의 절차를 준비했다. 그러나 양국 관료들은 문제 해결 대신 과거의 인식에만 집착했다. 이런 인식은 한국전쟁과 그 후 30년 이상에 걸친 냉전체제 동안 생긴 상호 불신과 적대감에 기초한 것이었다. (...)

 

카터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은 양국의 관리들이 전에 해놓은 일의 덕을 많이 보았다. 동시에 카터와 김일성 두 사람 모두 과감한 행동을 취하는 데 따르는 위험부담을 떨쳐버릴 수 있는 사회적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었다. (<한반도 운명> 275-276쪽)

 

미국이 북미회담의 재개를 일부러 늦출 만한 조건이 또 하나 있었다. 경수로 지원비용 문제였다. 1993년 7월의 제2차 회담에서 북한의 요구가 경수로 건설 지원으로 집약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수십억 달러로 예상되는 그 비용을 결국 국제컨소시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통해 조달하고 그 대부분을 남한이 맡게 되는데, 그런 부담을 떠안도록 바로 설득할 길이 없었다. 위트-폰먼-갈루치는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모든 게임플랜은 다자적인 접근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트너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일본과 한국은 카터의 방북 이전까지는 북한에 경수로를 지원하는 문제를 경계하는 듯했다. 5월 갈루치는 미국은 내부적 법규제약 때문에 경수로를 직접 제공하지는 못하지만 국제적 노력을 앞장설 수는 있다고 말했었다. “도대체 일본의 납세자들이 일본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해대는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기 위한 돈을 내야 하는 이유가 뭐요?”라고 일본의 한 고위관리는 따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한 이후부터 조금 달라진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북핵위기의 전말> 303-304쪽)

 

1994년 7월 8일 꼭 1년 만에 북미회담이 제네바에서 재개되었다. 그런데 그 날의 김일성 사망 소식이 이튿날 전해졌다. 북한 대표단은 장례 참석을 위해 바로 귀국하고 회담은 연기되었다가 한 달 후 다시 열리게 된다. 미국 대표단은 클린턴 대통령의 애도 성명을 검토한 다음 국무부의 허락을 받고 한국 외무부에 통보하고 나서 북한대표부를 조문차 방문했다. 클린턴의 애도 성명은 짤막한 것이었다.

 

“미국 국민을 대표해 본인은 김일성 주석의 죽음에 대한 심심한 애도의 뜻을 북한 국민들에게 보냅니다. 우리는 두 정부 사이의 회담을 회복시킨 그분의 지도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는 회담이 순탄하게 계속되기를 희망합니다.” (<한반도 운명> 283쪽)

 

이 단계에서 남한 정부의 태도를 살펴보면서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김영삼의 입장이 떳떳치 못했다는 사실은 위트-폰먼-갈루치가 김영삼의 자서전에서 틀린 대목을 정면으로 짚어내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지자 강경책이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 측은 미국이 협의는 하면서도 모든 군사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한 미국 관리의 표현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의 비핵화정책의) 제단에서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김영삼 대통령은 후일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미국은 가장 가까운 한국과도 상의하지 않은 채 자국민을 철수하고 북한과의 전쟁에 막 나설참이었다. 그래서 그가 레이니 대사와 클린턴 대통령에게 연락하여 제때 중단시켰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의 회고는 틀린 부분이 많다. 첫째, 미국대사관 측에서 청와대에 철수계획에 대해서 상세히 알려준 것은 사실이지만, 자국민 철수에 막 나설참은 아니었다.(...) 둘째, 한국정부는 미국이 취한 조치는 물론이고 백악관 회의에서 논의 중인 조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셋째, 백악관에는 문제의 기간 중 김영삼 대통령이 민간인 철수나 임박한 전쟁에 대해 클린턴 대통령과 통화했다는 기록이 없다. (<북핵위기의 전말> 269쪽)

 

북핵위기가 증폭되는 동안 실무자로 일하던 퀴노네스는 남한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를 보며 김영삼에게 거의 증오심을 품게 된 것 같다.

 

워싱턴이 서울과 조심스럽고 철저하게 자문을 하느라 평양과의 회담 진전이 거북이 걸음처럼 느렸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고위층은 뉴욕의 이 과정에 대해 점점 더 언짢게 여겼다. (...) 김영삼 대통령은 이 과정을 깨도록 작심한 것 같았다. 김 대통령과 그의 안보보좌관 정종욱은 평양에 대해 남북대화 재개 문제와 관련, 서울의 요구조건을 무조건 따르라고 워싱턴에 주장함으로써 북미회담을 거듭 복잡하게 만들었다. (...)

 

나는 김영삼 대통령이 북한과 미국 간의 관계 완화를 복잡하게 하고 지연시키는 것을 최우선과제로 삼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것이 핵문제 해결을 방해해도 상관이 없는 듯 보였다. 게다가 김 대통령은 평양이 미국과의 회담에서 조급하고 좌절감을 느끼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작정을 한 것 같았다. 김 대통령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1994년 2월에는 한국보다 북한이 더 모두에게 바람직한 해결책을 찾기에 열심인 것처럼 보였다. (<한반도 운명> 267-268쪽)

 

북핵문제 담당 미국 관리들이 김영삼을 보는 시각이 갈루치가 전해주는 한 장면에 비쳐져 나타나는 것 같다. 한국의 어느 대통령 앞에서나 벌어지는 광경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일련의 사건들이 정점을 향해 치닫는 상황에서 갈루치 차관보는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면담했다. 원목으로 장식되고 천장이 높은 회의실은 웅장함과 풍요로움을 동시에 풍기고 있었다. 크고 편안한 안락의자가 놓여있었는데 의자의 간격이 너무 멀어서 방문객들은 목소리를 높여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노트를 주고받거나 귓속말을 할 수도 없었다.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미국 측의 한 관리가 태평양을 건너는 장거리 비행 때문에 피곤했는지 잠이 들어 코를 크게 골았다. 하지만 다른 참석자들과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를 깨울 방법이 없었다. 자는 동료에게 펜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미국인들이 여럿 있었을 것이다. (<북핵위기의 전말> 177-178쪽)

 

이 면담을 끝낼 무렵 김영삼이 “시간은 우리 편이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없소. 북한의 핵카드는 효력을 잃고 있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북한붕괴론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 면담이 있은 8일 후 판문점에서 북한 대표의 “서울 불바다” 발언이 있자 김영삼은 그 장면의 CCTV 녹화를 KBS에서 방영하게 해서 국민을 불안에 빠트렸다.

 

6월 13일 카터가 방북 길에 서울에 들렀을 때 김영삼은 냉담했다. 그 며칠 전 클린턴에게 전화로 카터 방북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카터 방북이 미국 정부의 뜻이 아니라 하더라도] 김영삼 대통령은 카터의 방북을 반기지 않았다. 한국이 또 다시 뒤로 밀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김영삼 대통령의 정적인 김대중이 바로 직전 카터의 방북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 김 대통령에게 있어 ‘김대중의 아이디어’라는 말은 곧 그것을 반대한다는 것과 같았다.

 

카터의 방북 결정 소식을 듣자말자 김영삼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겉으로는 러시아 방문결과가 안건이라고 했지만 이어서 카터의 방북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그는 제재에 대한 국제적 지지가 증가하고 있는 판국에 카터가 방북하는 것은 실수라고 말했다. (...) 김 대통령은 분을 참지 못하는 듯 했다. “김일성은 카터의 방북을 서방세계에 대한 대화와 미소작전에 활용할 것”이라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같은 책 249쪽)

 

카터가 막상 평양에서 돌아오자 김영삼의 표정이 며칠 전과 천양지판으로 달라졌다.

 

카터는 미국정부로부터는 찬밥대우를 받았지만 한국정부로부터는 대단한 환대를 받았다. 다음 일정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오찬이었는데, 이 자리에서 김일성이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가급적 이른 시간에” 남북정상회담에 응하겠다는 것을 밝힌 것이었다. 불과 몇 일 전 떨떠름한 기분으로 카터를 만났던 김 대통령의 입이 딱 벌어졌다. 뛰어난 정치가라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지론인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갖는 남한의 대통령이 되는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카터의 동의를 구한 뒤 공보수석을 불러 그 사실을 발표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책 287쪽)

 

밥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하고 바로 발표를 지시하다니, “입이 딱 벌어졌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다. 며칠 후 클린턴과의 전화에서 김영삼이 한 말을 보면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에서 남한이 주도권을 쥘 것을 기대한 것 같다.

 

같은 날 북한은 한국의 정상회담 제안을 수락했다. 남북한이 뭔가 합의하려면 수차례 줄다리기가 있었던 전과는 달리 북한총리 강성산이 보낸 메시지는 남한의 제안을 그대로 수용하는 내용이었다.

 

그날 저녁 클린턴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은 전화통화를 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그날 일어난 일들이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해결할 수 있는 기회는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두 사람의 대통령이 계속 밀접하게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카터의 방북에 회의적이었지만 이제는 긍정적인 진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93퍼센트의 국민이 정상회담을 지지하며 60퍼센트가 그것을 통해 핵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같은 책 293-294쪽)

 

이렇게 좋아하던 사람이 몇 주일 후 김일성 사망 소식을 듣자 또 한 차례 표변해서 조문 파동까지 일으켰을까? 너무나 간절하게 바라던 정상회담의 꿈이 사라진 것이 억울해서? 미국 대통령이 애도 성명을 발표하고 북미회담 미국 대표단이 조문을 가는 마당에 국내 조문 주장을 탄압한 것은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바닥을 보여주는 짓이었다.

 

결정적인 문제가 북한붕괴론에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지 않아도 김영삼의 신념이 되어 있던 북한붕괴론이 이제 눈앞의 현실처럼 떠오른 것이 아닐까. 40여 년간 북한을 이끌어온 김일성이 사라졌으니. 정상회담은 북한 붕괴 전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기회로 그에게는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런 기회가 코앞에서 사라진 것이 그에게는 애통했을 것이다.

 

북한은 ‘1인 체제’로 알려져 있었다. 그 한 사람이 사라지면 체제가 무너지는 것일까? 그가 사라질 때를 대비해서 ‘후계자’가 키워져 있었다. 그 후계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소문이 많이 떠돌고 있었다. 혈육이라는 이유 하나로 낙점을 받았을 뿐, 방탕하고 포악한 전형적 ‘폭군’의 모습을 그리는 소문이었다.

 

20년 넘게 후계자 자리에 있으면서도 김정일은 외부세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부터 모습을 거침없이 나타내기 시작했다. 1994년 계승 당시에는 괴이한 소문에만 감싸여 있던 이 ‘1인 체제 후계자’가 어떤 인물인가에 북한의 장래가 크게 걸려있는 것으로 외부에서는 인식하고 있었다.

 

셀리그 해리슨은 2002년 나온 <코리안 엔드게임> 제1부 “북한은 붕괴할 것인가?”의 마지막 장에서 막 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던 이 북한 지도자가 어떤 인물인지, 그때까지 떠돌던 이야기들을 정리해 놓았다. 다음 회에는 그 내용을 살펴보며 김정일의 역할에 대한 계승 당시의 전망을 뒤돌아보겠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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