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억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와 문명화(1904~1919)>(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

 

 

‘문명화’? 책을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근현대사 연구자 중 유별나게 연구실 밖을 내다보는 기색이 없던 권 교수가 이런 민감한 단어를 제목에 걸고 책을 내다니!

 

10년 전부터 ‘문명화’가 민감한 말이 된 것은 뉴라이트 때문이다. 식민지배와 독재정치를 합리화 내지 미화하는 뉴라이트 ‘역사 뒤집기’의 출발점이 바로 ‘문명화’의 개념에 있다. 아무리 나쁜 정치나 통치라도 문명 발전의 방향에 맞으면 좋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독재정치나 이민족 지배는 야만스러운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고, 20세기 한국인의 경험은 분명히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직관이나 통념과 반대로 식민통치와 독재정치를 문명과 결부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문명’의 의미를 입맛대로 잡으면 된다.

 

예컨대 뉴라이트 핵심 이데올로그 이영훈은 문명의 기초 요소로 “자유, 인권, 법치, 사유재산, 시장, 자기 책임” 등을 꼽는다.(<대한민국 이야기>(기파랑 펴냄) 46쪽) 통념에 비해 아주 좁은 범위의 문명이다. 그 좁은 범위를 찬찬히 따져보면 바로 ‘자본주의 문명’이다. 그는 위의 요소들이 갖춰지지 않았던 개항기 이전의 조선은 야만 상태였고 일본인이 비로소 조선에 문명을 전해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대로라면 애덤 스미스 이전의 인류에게는 문명이란 것이 전혀 없었다는 얘기인데, 우스우면서도 웃기 어려운 주장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얘기임에도 이 사회에서 행세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얘기를 좋아하는 것도 참 희한한 일이다. 얼마 전 총리 후보로 지명됐던 문창극이나 이번에 KBS 이사장으로 선임된 이인호 같은 사람들. 그래도 그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을 보면 일반인의 상식은 건재한 모양이다.

 

말이 안 되는 얘기가 말이 되는 것처럼 들리게 해주는 꼬투리가 더러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개항기의 개화운동 같은 것. 개화운동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한 연구가 많이 쌓여 왔는데도, ‘개화’가 조선의 망국을 막기 위한 절대적 과제였다고 하는 것이 아직 우리 사회에서 일반인의 인식으로 남아 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면서 내세운 ‘문명화’가 바로 ‘개화’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왕조가 풀지 못한 숙제를 일본이 대신 풀어주었다고 하는 주장이 그럴싸하게 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개화’에 대한 환상은 이 사회 역사인식의 큰 허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갑신정변의 성격을 놓고 이 환상이 크게 작용하는데, 나는 이 정변이 주체적 개혁운동보다 일본의 앞잡이 노릇이었다고 본다. 식민지시대 일본 사학자들은 갑신정변을 높이 떠받들면서 그 서술에서 일본 측 개입 흔적을 지우려고 애썼다. 조동걸은 일제의 대표적 관찬 사서인 조선사편수회 간 <조선사대계 최근세사>의 서술 내용을 이렇게 살폈다.

 

갑신정변의 서술을 보면 개화당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대궐을 지켜 달라고 요청하므로 죽첨 공사가 1개 중대를 이끌고 갔다는 것이다. 즉 일본의 사전모의는 언급하지 않았다. (...) 그 때 부산 동본원사 별원에서 조선어를 배우며 훈련한 일인 청년들이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피살당한 내용에 대해서도 역시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남의 나라 궁전에 군대를 진입시키는 사례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로 그러한 일을 범한 갑신정변 때의 일본군이었다. 조선에 대한 통상 침략도 일본에 의해서 비롯되었고, 군대의 궁궐침범도 일본에 의해 비롯되었다. 그것이 역사에서 평론되지 않았던 것은 역사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현대한국사학사>(나남출판 펴냄) 293쪽)

 

갑신정변에 관한 책에서 일본의 개입을 이 정도라도 밝힌 것을 나는 본 일이 없다. 갑신정변의 ‘개화’라는 ‘대의(大義)’를 떠받드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압제에서 풀려나고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 식민사관이 끈질기게 남아있는 대표적 사례다.

 

식민사관의 극복이 미흡하다. 식민사관이 주장한 내용은 배척하면서도 그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개항기의 개화사상에는 좋은 가치를 담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개화’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해서 무작정 받들어서는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개화’는 ‘독립’과 함께 일본이 자기네 조선 ‘진출’을 위해 내세운 구호였다. 독립에는 물론 중요한 가치가 있지만, 독립협회에서 친일파가 맡은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쓴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개화-문명화-근대화는 모두 연속성을 가진 개념이었다. 일본이 아직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지 않은 단계에서 시대 변화에 맞추려는 모든 노력이 ‘개화’로 표현되는데, 그중에는 일본의 진출에 유리한 요소가 많았다. 그리고 식민지시대 일본 학자들은 그런 요소만을 진정한 개화로 추켜세웠다. 예컨대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한 개혁 노력도 시대 변화에 맞추려는 노력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사대당’이라 하여 ‘개화당’과 대비시키기도 했다.

 

러일전쟁을 전후해서 일본의 지속적 지배력이 확립되자 일본이 이끄는 변화 방향에 ‘문명화’란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다. ‘문명화’의 기본 성격을 저자는 이렇게 정리했다.

 

1910년대 ‘문명적’ 제도의 도입은 당연히 일제의 제국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도입된 제도나 변화들이 근대적, 문명적인 것이었으므로 이를 조선인을 위한 문명화, 문명의 도입으로 합리화할 수 있었다. 또한 그러한 문명적 제도들이 한말부터 지식인들이 갈망하고 하루빨리 이룰 것을 주장하던 것들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대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제의 이해를 앞세운 것으로서 한국인들의 이해관계를 배려한 것이 아님은 물론 심지어 그 이해에 반하는 것도 있었으므로 불평과 저항은 필연적이었다. 따라서 일제는 강제적이고 폭력적 수단들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강요에 의한 협조는 한계가 있으므로 자신의 시정을 ‘문명화’로 합리화하는 논리가 필요했다. 문명화론은 이에서 더 나아가 조선인들의 차별대우 시정 요구라든가 정치적 권리 요구를 거부하는 반대논리로서도 기능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일제는 자신들을 문명화의 화신으로서 그려내는 작업도 진행하였다. (96쪽)

 

일본이 조선 지배를 ‘문명화’로 합리화한 것은 독창적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유럽 열강이 정복사업을 문명화의 사명으로 분식한 사실은 ‘백인의 짐’(white man's burden)이란 말로 잘 알려져 있다. 저자는 제1장 “제국주의 침략기 문명화 사명론과 일본”에서 제국주의시대에 유행한 문명화 사명론을 일본이 배워오는 경위를 밝혔다. 문명화와 관련된 일본의 기만성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배워온 모델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보여준다.

 

‘문명(文明)’과 ‘civilization’ 사이의 차이를 저자는 생각하게 해준다. 동양인은 화이(華夷)론의 맥락에서 ‘문명’의 의미를 생각하기 쉽다. 정신문화 수준이 높은 상태로 인식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civilization’이란 말이 쓰인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임을 저자는 밝힌다. 계몽주의 가치관이 투영되어 ‘진보’의 뜻을 내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외 정복사업의 진행에 따라 유럽인과 비 유럽인을 구분하는 기준 개념이 되었다.(3~6쪽) 20세기 후반부터 차츰 보편적 의미로 더 많이 쓰이게 되었지만, 아직도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것, 또는 서양적인 것으로 ‘문명’의 의미를 제한해서 본다.

 

19세기 말 통용되던 ‘문명’의 의미를 저자는 이렇게 정리했다.

 

여기에서 ‘문명’이란 것은 서구 국가들이 근대에 이르러 성취한 모든 것, 즉 과학혁명, 산업혁명을 통해 달성한 높은 생산력과 구체제를 붕괴시키고 성립한 ‘시민사회’ 그리고 그것이 상징하는 여러 가치, 즉 당시 서구가 실현하였다고 자부한 모든 것을 의미하였다. 그 구체적 내용을 들어 보면 문명이란 인간의 육체를 포함한 자연에 대한 지배, 또 ‘사회적 행동’이라 불릴 수 있는 것에 대한 지배이다. (6~7쪽)

 

본론에서는 일본의 한국 지배 초기의 문명화 선전과 그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이 다뤄져 있다. 일본의 ‘악의’를 비난하는 데 쏠리지 않고 문명화의 명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자세와 노력이 돋보인다. (나 같으면 ‘조선’, ‘조선인’으로 쓸 만한 자리에 저자는 ‘한국’, ‘한국인’으로 쓰는 기준을 세웠으므로 이 글에서는 나도 그에 따른다.)

 

당시의 한국은 많은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대한제국은 개혁을 추진할 의지와 능력이 빈약했다. 그래서 통감부-총독부의 강력한 개혁 추진에 인민이 반가워할 만한 것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성신문> 1908년 9월 16일자 논설이 대표적인 예다.

 

각 지방 군수가 민사 및 태형 이하의 범죄사건은 재판권을 가졌더니 사법권 독립 이후로 그 권능이 소멸되어 군수 군리 등이 그 부정재원이 감소한 고로 악감정을 갖는 자가 있고, 일반인민은 재판권이 독립됨을 아는 자가 얼마 없지만 그중에는 구(區) 재판소가 설치되어 군수에게 재판권이 없는 고로 사법권이 독립되었다 칭하고 인민이 문명한 판결을 받아 권리가 보호되겠다고 환영한다더라. (137쪽에서 재인용)

 

이뿐이랴. 위생, 교통과 통신의 발전 등 물질문명의 향상과 부정부패의 축소, 치안의 확립 등 ‘민생’ 방면에서 일본 통치가 가져온 혜택이 많이 있었다. 특히 통감부 시기(1904-1910)에 ‘시정(施政) 개선’이란 이름으로 시행된 문명화 정책은 직전의 대한제국 통치와 대비되어 민심의 지지를 많이 모을 수 있었다.

 

이런 ‘근대화’ 정책의 평가에 있어서 맥락(context)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나는 덧붙이고 싶다. 새로운 제도 도입에 대한 당시의 반응은 옛 제도 자체와의 비교에 앞서 옛 제도가 당시 시행되고 있던 상황과의 비교에 좌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옛 제도가 근본적으로 나쁜 것이어서가 아니라, 대한제국의 시행방법이 워낙 형편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발로 새 제도가 환영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문명화’ 정책에 좋은 점이 많았다면 왜 1919년에 거족적 저항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물론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시행과정에서 방법상의 흠결 때문에 다소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3-1운동과 같은 전면적 저항은 지엽적인 문제 때문에 일어난 것일 수 없다. <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 22일자 논설에 문제의 성격이 나타나 보인다.

 

일인이 한인을 대하면 언필칭 문명을 개도한다 하며 독립을 부식한다 하며 동양에 평화를 유지한다 하고, 한인도 또한 시국을 관념하여 부득불 동주동종지국과 형제같이 친애하며 순치(脣齒)같이 상엄(相揜)할지라 하더니, 작년 일로 개전할 때 일본 군사가 입경하니 한국 남녀노유가 다투어 환영하고 제반 군수 운송의 일을 모두 어려움을 잊고 응하였는데 (...) 일본이 과연 이때에 시정개선을 실심으로 충고하며 문명진보를 실심 권도하였으면 한인들이 심열성복하기를 큰 가뭄에 단비를 만난 사람처럼 할 터인데 (...) 일본이 그런 일은 하지 않고 급급히 착수하는 것은 전국에 이권을 빼앗으며 일체 권세를 차례로 점취하며 간세한 자들을 이용하고 정직한 자를 쫓아내고 국민의 가옥과 토지를 늑수강취하며 심지어 인명을 참살하는 것도 거리끼지 않으며 재정을 고갈케 하니 생맥이 돈절하고 학무를 감축케 하니 교육이 더욱 쇠퇴라 (...) (130쪽에서 재인용)

 

요컨대 표리부동하다는 것이다. 소(小)중화를 자처하는 한국인에게는 일본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임진왜란의 기억도 있었다. 개화의 연장선에서 문명화를 반기는 마음 밑바닥에는 의심이 깔려 있었다. 일본 통치정책의 기만성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문명화 정책이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었는데 몇몇 개인의 일탈과 부분적인 착오 때문에 저항을 맞게 된 것이었을까? 지금의 한국에서도 세월호 사건을 선원과 선주 등 좁은 범위의 책임으로 좁히려 애쓰는 경향을 정권 담당자들이 보이는데, 구조적 문제를 소홀히 하면 문제가 더 악화된다는 것을 식민지시대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다.

 

일본의 모델인 유럽 열강의 문명화 책임론에도 본질적인 기만성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문명화 정책의 한계를 일단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일본 자체가 유럽 열강에 비해 ‘문명화’의 수준이 낮았다. 조선의 문명화를 뒷받침해줄 역량부터 충분치 못했던 것이다. 일본의 조선 통치는 같은 시기 유럽국의 식민지배에 비해 폭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경제정책에서도 종합적 발전을 바라보지 못하고 착취에 집중해야 했다.

 

일본은 한국을 개항한 이후 줄곧 한국의 개화, 문명화를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세력을 심고자 부심했는데, 그러한 시도가 전면화하는 것은 러일전쟁을 전후한 1904년경부터였다. (...) 그리하여 일제가 표면에 내세운 것이 바로 ‘시정개선’이라는 ‘선정’의 약속이었다. 고종을 중심으로 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수호를 위한 개혁 시도가 이어졌지만, 그것이 볼 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한 속에서 정부의 무능과 부패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일제는 바로 이 점을 포착하고, ‘악정’의 개혁을 침략의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1910년 한국을 합병한 일제는 조선을 자신의 영구한 세력권으로 만들고자 했다. 자신의 완전한 영토로 통합하고 이를 대륙진출의 교두보로 삼는다는 것이 일제의 꿈이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조선 식민화 이후 ‘개발’ 사업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사업을 ‘문명화’로 분식하였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한국인들로 하여금 ‘문명화’의 혜택을 실제로 느끼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72-173쪽)

 

저자가 하나의 가설이라며 내놓는 ‘문화적 충격론’이 무척 흥미롭다. 일본 정책의 좋고 나쁘고 이전에, 관습에 어긋나는 변화가 너무 많았다는 문제다. “전통국가가 간여하지 않았던 세밀한 일상생활에까지 국가의 권력과 통제가 확대”되어 “모든 것이 간섭투성이”인 상황이 된 데 반감의 큰 원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이 3-1운동이 “서울과 의주로 연결되는 서북부에서 남부와 동북부로, 그리고 교통이 편리한 철도 연변에서 산간지역으로 파급되어 갔다”는 분석도 뒷받침해 준다고 저자는 본다. 교통이 편리한 곳일수록 문화적 충격이 빨리 강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65-168쪽)

 

조선의 망국을 국가 차원, 민족 차원, 문명 차원의 세 층위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펴냄)에서 제시한 바 있다. 권태억이 말하는 ‘문화적 충격’이란 것이 문명 차원의 갈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종래 일본 식민통치의 문제점을 밝히는 작업에서 별로 중시되지 못한 방향인데, 그 하나의 실마리에 마주친 것이 반갑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