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8. 28. 10:29

 

지난 1년간 원자론적 세계관과 유기론적 세계관의 차이와 관계에 생각을 모아 왔다. 19세기 초에 나온 돌턴의 원자론이 환원주의(reductionism) 풍조를 크게 일으켰고, 그 바탕 위에서 개인주의가 득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전개 양상에 큰 작용을 함으로써 '근대성'의 기조가 되었다. 그런 풍조가 이제 한계에 도달해 전환의 방향을 찾는 단계에 와 있는데, 그 동안 짓눌려 있던 유기론적 세계관의 어느 정도 회복이 예상된다는 생각이다.

 

개인주의(individualism)에 대칭되는 유기론적 입장이 근현대사회에서 어떤 형태로 펼쳐져 왔는지도 궁금해졌다. 막상 살펴보니 개인주의의 위세에 맞설 만한 모습을 찾기 어렵다. 근대사회에 대한 개인주의의 지배력이 얼마나 막강한 것이었는지 새삼 실감된다.

 

이런 모색을 통해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개인주의에 버금가는 큰 힘을 일으킨 움직임 아닌가. 그런데 현실 속의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에 맞설 잠재적 가능성을 가진 움직임이지만 (그리고 19세기 전반 태동기에는 그런 경향을 많이 보였지만) 정치현상으로서 사회주의는 꼭 그렇지 않았다. 이것을 현실 사회주의의 '타락'한 모습이라고 우기기도 좀 어색하다.

 

그런 차에 'corporatism' 생각이 떠올랐다. 흔히 '조합주의'라고 번역되는데,(강철구는 '합의주의'를 제시한다.) 썩 끌리지 않는다. 라틴어 'corpus'(신체)에 어원을 둔 말인데, 내 생각에는 '유기체론' 정도가 뜻도 정확하고 어감도 순탄하니, 꼭 다른 번역어를 쓸 필요가 떠오르지 않는 한 여기서는 그렇게 쓰겠다. 원자론에 입각한 개인주의와 의미상으로 딱 대칭이 되는 입장이다.

 

중세의 봉건제는 전형적인 유기체론을 보여줬다. 그러니 봉건제를 까뭉개는 근대에 들어와 유기체론도 고생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이치 자체에 타당성이 많이 있으니(개인주의에 맞설 만큼) 어떤 형태로든 삐져 나온다. 19세기 이래 유기체론이 나타나는 형태가 다양하게 된 것은 강고한 개인주의의 벽을 뚫고 나올 틈새를 여기저기 조금씩 뚫고 나오려 애쓰던 양상으로 보인다. 심지어 파시즘의 형태까지 취했다.

 

<Wikipedia>에서 "Progressive Corporatism" 부분이 재미있다. 19세기 전반까지 반동세력만이 유기체론을 떠받들던 상황에 이어 19세기 후반 유기체론의 업데이팅이 이뤄지는 장면이다.

 

1850년대 이후 고전적 자유주의와 마르크시즘에 대항해 진보적 유기체론이 나타났다. 유기체론자들은 계급간 협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산층과 노동계층의 구성원들에게 집단적 권리를 부여할 것을 제창했다. 마르크시즘의 계급투쟁 관념에 반대한 것이다. 1870~80년대에는 사용자와의 협상을 사명으로 하는 노동조합이 만들어짐에 따라 유기체론이 유럽에서 부흥의 기회를 얻었다.

 

페리드난드 퇴니에스의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1887)를 계기로 유기체론 철학이 크게 되살아났다. 이에 따라 Neo-medievalism[낭만주의?]의 발전과 길드 사회주의의 확산을 보게 되고, 사회학 이론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경제적 계급의 기계적 사회원리가 가문, 지역공동체, 가족, 직능단체 등 유기적 사회조직을 무너트린다고 퇴니에스는 주장했다. [독일의] 국가사회주의자들은 퇴니에스의 이론을 이용해서 '인민게마인샤프트'(Volksgemeinschaft)를 선전했다. 그러나 퇴니에스는 나치즘에 반대하고 1932년 독일 파시즘에 대항하는 사회기독당에 참여했고, 이듬해 히틀러에게 명예교수직을 박탈당했다.

 

퇴니에스의 이론과 함께 에밀 뒤르켕의 '연대주의'(solidarism)도 유기체론의 표현으로서 흥미로운 것이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나온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 유기체론'(liberal corporatism)은 좀 야리꾸리한 느낌이 든다. 개인주의에 대한 투항에 가까운 타협이라는 느낌이다.

 

20세기 전반기에는 파시즘과의 결탁이 유기체론의 가장 강력한 표현이었고, 이로 인해 유기체론의 체면이 크게 추락했다. (웬만한 지식인들이 유기체론을 쳐다보기도 싫어하게 된 것 아닐지.) 이 장면은 책을 구해 좀 세밀하게 살펴볼 생각을 남겨둔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노-사-정 협력을 중시하는 '신유기체론'(neo-corporatism)이 나타나는데, 강철구 교수가 '합의주의'라는 번역어를 생각하는 것은 이것을 주로 염두에 둔 때문일 것 같다.

 

19세기 후반 개인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상황에서 시도된 유기체론의 여러 가지 표현을 살핌으로써 서양근대문명의 전통이 개인주의를 극복할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20세기 전반 파시즘과의 결탁 장면에서도 뭔가 재미있는 생각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 방향일지 확실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