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과 미국의 대 북한 강경파가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의 근거로 ‘호전성’을 내세워 왔다. 1950년의 남침을 비롯해 그런 주장의 근거를 북한이 만들어준 것도 많이 있다. 그러나 7-4 공동성명(1972) 이후로는 호전성의 수준이 크게 달라졌다. 그 후의 북한 도발은 아웅산 사건, 민항기 폭파 등 1회성 사건으로 나타나, 그 이전의 무장공비 파견처럼 지속적인 공세와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도 이 변화가 잘 인식되지 못하는 까닭은 북한의 폐쇄성에 있다. 남한, 미국, 일본 등 ‘자유진영’ 사회에는 북한 정보의 공급이 막혀있기 때문에 대북 강경파의 ‘북한 호전성’ 주장이 제대로 검증되기 어렵다. 1990년대 말부터는 ‘선군정치’가 호전성의 증거로 많이 제시되어 왔다. 북한의 식량난에 구호물자를 보내면서도 그 물자가 인민 구호에 쓰이지 않고 군사력 증강을 위해 빼돌려질 것을 의심하며 외부 감시의 강화를 주장, 원조 사업을 어렵게 만든 일이 많이 있었다.

 

북한 호전성의 주장은 지금까지도 대 북한 정책 결정에 작용하고 있다. 그 가장 큰 근거인 ‘선군정치’의 실제 성격을 지난 회에 이어 검토해보겠다.

 

김진환은 <북한위기론>(선인 펴냄) 247-248쪽에서 선군정치의 출발점을 살펴보며 (조선로동당) 당력사연구소에서 펴낸 두 권의 책에 선군정치의 출발점이 서로 다르게 기록된 대목을 옮겨놓았다. (밑줄 친 부분은 김진환의 강조)

 

김정일동지께서는 주체84(1995)년 1월 1일 금수산기념궁전을 찾으시어 위대한 수령님께 경의를 표시하신 후 조선인민군의 한 구분대(다복솔중대)를 찾으시었다. (...) 다박솔중대에 대한 력사적인 현지지도는 선군의 기치를 높이 추켜들고 총대에 의거하여 주체의 사회주의위업을 끝까지 완성하려는 김정일동지의 확고부동한 의지의 표시였으며 위대한 선군정치의 첫시작이었다. (<조선로동당력사>(2004) 533-534쪽)

 

김정일동지께서는 주체84년 1월 1일 (...) 다박솔중대에 대한 력사적인 현지지도는 선군의 기치를 더 높이 추켜들고 총대에 의거하여 주체의 사회주의위업을 끝까지 완성하려는 김정일동지의 확고부동한 의지의 표시였으며 위대한 선군정치를 보다 높은 단계에서 실현해나가는 력사적계기로 되었다. (<우리 당의 선군정치>(2006) 533쪽)

 

2006년의 책은 1995년 정초의 현지지도에 대한 2004년 책 내용을 토씨까지 그대로 옮겨놓다가 “선군정치의 첫 시작”이란 대목만을 바꿔놓은 것이다. 이 차이 때문에 선군정치의 출발점을 1995년으로 보는 관점과 그 이전으로 보는 관점이 갈라지고, 앞당겨 보는 관점 중에는 1960년대 말까지 끌어올리는 관점까지 있다. 김진환은 1990년을 전후한 체제위기를 계기로 1990년대 초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북한위기론> 249-250쪽)

 

김진환의 관점은 1990년 이후 김정일의 권력승계 과정에서 군 통수권 확보를 중심으로 삼은 점에 큰 근거를 둔 것이다.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격상과 함께 제1부위원장에 임명되고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었다가 1993년 4월 국방위원장에 추대되는 과정이 같은 책 250-251쪽에 설명되어 있다. 김일성의 사망을 앞둔 몇 년 동안 김정일의 위치는 군부를 중심으로 확보된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본격적 선군정치가 1990년경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기에는 힘든 점이 있다. 김진환 자신도 같은 책 254쪽에서 “국가예산 중 국방비 비율이 1980년대 후반에 비해 선군정치를 시작한 1990년대 초반에 오히려 떨어졌다는 사실 등을 볼 때 군대의 물질적 토대 강화는 쉽지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물질적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벌인 ‘군민일치’ 운동을 이 시기의 선군정치 내용으로 그는 보는데,(같은 책 254-256쪽) 진정한 ‘선군정치’라면 예산부터 당당히 할당받아야 할 것 아닌가. 선군정치의 뜻은 나타났지만 아직 실행할 여건이 되지 않은 상황으로 보인다.

 

1990년경부터 시작된 북한의 체제 위기는 군사적 위기보다 경제적 위기였다. 경제위기의 초점은 대외교역의 붕괴에 있었다.

 

이미 1980년대 중반 양국 경제관계 변화로 북한의 대소 무역수지는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나아가 소련은 1989년 7월 15일을 기점으로 북한의 물자공급 불이행시 같은 협정으로 연계된 원자재의 대북 수출통제까지 실시했다. 세 달 전 서울에 무역사무소를 연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또한 1990년 4월 ‘조-소 경제 및 과학기술협의회’에서 소련은 1991년부터 양국무역을 완전히 국제가격에 따라 진행하며 결제도 경화로 할 것을 요구했다. 이 결과 1990-1991년 사이 양국 무역액은 22억 달러 이상 줄어들었다. 여기에 동유럽시장 붕괴 충격까지 더해져 북한의 무역총액은 1990년 약 45억 6천만 달러에서 1991년 약 25억 9천만 달러로 떨어졌다. 불과 1년 사이에 무역규모가 ‘반 토막’ 난 셈이었다. (같은 책 187-188쪽)

 

소련에 이어 중국도 1991년 중 조-중 무역에 국제시장가격과 경화결제를 요구해 왔다. 가장 큰 타격이 에너지 분야에서 나타났다.

 

당시 북한이 소련으로부터 전체 코크스원료탄 수입 중 30%, 코크스 수입 중 75% 정도를 의존했으므로, 이러한 우호가격이 금속-화학공업 유지에 중요한 기여를 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1991년부터 결제방식이 바뀌면서 소련으로부터의 코크스원료탄과 코크스 수입은 도합 30만 톤 수준으로 떨어진다. 금속-화학공업의 비정상적 운영은 불가피했다.

 

또한 원유의 대북 공급가격은 중국의 경우 그들의 세계시장 판매가격과 비교할 때 1980년 이전은 17~32%, 1986~1990년은 평균 58% 수준에 불과했다. 소련의 공급가격은 1986~1990년 국제시세 대비 평균 57% 수준이었다. 그러나 1991년 이후 양국 모두 원유를 국제시장가격으로 공급함으로써 공급단가는 1990-1991년 중국은 2.1배, 소련은 2.5배 수준으로 급상승했다. 결국 결제능력을 갖추지 못한 북한의 대소 원유수입은 1990년 44만 톤에서 1991년 4만 톤으로 급감했고, 1992년부터는 원유도입을 아예 포기해야 했다. (같은 책 189-190쪽)

 

경제를 의존해 온 두 나라 중 하나는 해체의 길을 걷고 있었고, 또 하나는 시장경제 도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정책의 우선순위도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를 지탱하는 방향에 놓이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중국과의 관계 약화는 군사적 위기도 가져오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아직 뚜렷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1990년대 초반 북한의 군사비 축소는 경제위기에 대한 의식이 더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1991-1992년에 북한은 남한과 미국에 대해 전례 없이 유화적인 태도로 나왔다. 1991년 중에는 이 태도가 잘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1992년 들어 1월 뉴욕회담에서 미국의 냉담한 태도에 이어 5월부터 IAEA를 통한 강압이 쏟아지고 가을에는 팀스피릿 재개 방침의 때 이른 발표에 이어 훈령 조작 사건으로 남북고위급회담까지 파탄을 맞았다. 이 과정을 통해 군사적 위기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의식이 더 심각해졌다.

 

1990년경 총체적 위기 앞에서 경제위기 극복에 중점을 두면서 군사 부문이 소홀해지는 데 대비하기 위해 ‘군민일치’ 같은 구호로라도 군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군사적 위기의식이 깊어지는 데 따라 ‘선군정치’의 구호가 무게를 더해 가고, ‘북핵위기’ 속에서 압도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이재봉은 “북한 선군정치, 언제까지 지속될까?”[http://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9236]에서 1998년 북한의 대남정책 관계 원로 간부에게 들은 말을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가 군사제일주의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것이지, 군국주의나 무력 통일을 지향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 공화국은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 미제와 일제가 손잡고 공화국을 압박하고 있다. 남조선에서는 주한미군도 모자라 일본군까지 불러들이려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곧 붕괴할 것이라고 떠드는데, 이러한 막중한 위기를 돌파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대를 앞세우지 않을 수 없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죽을 때 북한의 위기는 정상적 방법으로 감당할 수 없는 다각적이고 심중한 상황이었다. 경제위기는 ‘고난의 행군’을 예고하고 있었고, 미국의 위협은 제네바협정으로 해소시킬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김정일이 살을 베이더라도 체제의 뼈대를 지키기로 결심한 것이 ‘선군정치’ 노선으로 보인다. 1996년 12월 김정일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중에는 당의 일꾼보다 군의 일꾼을 더 앞장세워야겠다는 뜻이 보인다.

 

사회의 당조직들이 맥을 추지 못하고 당사업이 잘되지 않고 있는 기본 원인은 당중앙위원회 일군들을 비롯한 당일군들이 일을 혁명적으로 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 지금 사회의 당일군들이 군대 정치일군보다 못합니다. (...) 나는 1960년대부터 수령님의 사업을 보좌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사업을 똑똑히 도와주는 일군이 없습니다. 나는 단신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이 나의 사업을 도와주지 못할 바에는 있으나마나 합니다. (...) 수령님께서 창건하시고 강화 발전시켜오신 우리 당이 오늘에 와서 맥을 추지 못하는 당이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중앙당 일군들이 인민군대의 일군들보다 혁명성이 떨어져서는 안됩니다.(<월간조선> 1997-4, <북한위기론> 357쪽에서 재인용)

 

‘선군(先軍)’은 ‘후로(後勞)’를 함축한 말이다. 김정일은 조선로동당 총비서와 군사위원회 위원장 직책을 함께 갖고 있었다. 그런데 외부에 ‘김정일 위원장’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그 직함을 더 앞세웠기 때문이다. 그는 당의 지도자보다 군의 수장으로서 역할을 앞세우며 노동당도 노동자 인민도 군의 모범을 따르도록 요구한 것이다. 김재봉이 위 글에서 인용한 <로동신문> 1999년 6월 16일자 논설에도 이 뜻이 밝혀져 있다.

 

“우리 시대는 제국주의와 반제 자주 세력이 가장 격렬하게 맞서고 있는 투쟁의 시대이다. 제국주의와의 장기적인 대결 속에서 사회주의 위업을 완성하자면 마땅히 군사가 중시되어야 한다. (...) 제국주의와의 사상적 대결은 힘의 대결에 못지않게 간고한 투쟁이다. 이 첨예한 대결전에서 승리하자면 혁명성이 강하고 사상적 신념이 투철한 전위부대가 있어야 한다. 그 담당자가 바로 혁명군대이다. 군대가 사상적으로 무장 해제되면 사회주의의 지탱점이 허물어지게 된다. 설사 인민들이 정치사상적으로 준비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군대가 견결하면 사회주의가 무너질 수 없다.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와해되던 과정이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바르샤바조약과 코메콘으로 군사-경제적 통합성을 유지해 온 동유럽 공산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세계’의 중심이었다. 소련과 중국 다음으로 북한에게 많은 원조와 협력을 제공해 온 나라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 나라들이 2,3년 사이에 줄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며 북한은 그 전철을 밟지 않는 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선군정치는 당과 군의 관계를 일원적으로 관리한다는 점에서 북한이 희망을 걸 수 있는 노선이었다. 김진환은 북한에서 일원적 당-군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 소련, 중국에서는 당 내 여러 세력이 정치권력을 번갈아 장악하는 바람에 당의 군사노선과 영군제도 역시 권력의 전환점마다 급변했다. 이에 비해 북한에서는 1960년대 들어 항일무장투쟁집단이 당 내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군사노선과 영군제도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둘째, 소련, 중국의 경우 당의 군사노선과 영군제도의 비일관성 탓에 당의 군대영도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됐다. (...) 반면 북한에서는 1962년 12월 확립한 ‘자위적 군사로선’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부대 당위원회 중심의 영군제도가 발전하면서 당의 군대영도력이 갈수록 강화됐다. 특히 항일무장투쟁집단은 당과 군대 안의 반대세력을 모두 제압한 1969년에서야 정치위원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소련, 중국이 겪은 폐해를 피할 수 있었다.

 

셋째, 당 내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세력이 군대 내 파벌과 각각 연결될 때 당군관계 다원화는 심화된다. 중국에서는 지역별로 전개된 혁명전쟁, 군구제도와 야전군체제, 지역주의 등이 인민해방군 내 파벌을 성장시킨 요인들이다. (...) 이에 비해 당 최고지도자가 며칠간의 현지지도로 직할통치할 수 있는 ‘작은 단일민족 국가’ 북한에서 군대파벌이 성장할 여지는 많지 않았다.

 

넷째, 전쟁의 유산이 달랐다. 소련의 경우 격렬한 반혁명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트로츠키의 선택이 이후 당의 군대 지배를 구조적으로 제약했다. (...) 반면, 항일무장투쟁집단은 한국전쟁을 치르며 당 내 권력경쟁세력의 영향력을 약화시켰고, 이는 전후에 일원화된 당군관계로 손쉽게 나아가는 기반이 됐다. (<북한위기론> 360-362쪽)

 

와다 하루키가 설명하는 ‘유격대국가’로서 북한의 국가 성격도 일원적 당-군 관계와 깊은 연관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1974년 3월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 식으로”라는 새로운 구호가 김정일에 의해 만들어졌다. 김일성은 1년 뒤 “최근 당중앙이 내건 구호는 대단히 훌륭하다”고 하여 김정일을 지지했다. 최종적으로 이 구호는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이루어진 김일성 보고에서 제출되어 정식으로 승인되었는데 이로써 유격대국가의 영속적인 기본구호로 자리잡았다.

 

유격대국가는 국가 이데올로기이자 국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북조선의 지도자는 유격대국가의 창출을 기대하면서 인민에게 이러한 국가상을 주입, 교화시켰다. 그런데 그 결과 인민은 물론 지도자 자신도 실제로 이러한 국가에 살고 있는 것처럼 사고하며 행동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유격대국가는 부분적인 또는 절반의 현실이 되었다. (<북조선-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서동만-남기정 옮김, 돌베개 펴냄) 298쪽)

 

대개의 공산국가에서는 건국과정에서 컸던 군의 역할이 차츰 줄어들면서 체제의 구성요소로서 중요성도 흐려지는데, 북한에서는 군의 중요성이 유지되었다. 공산권의 변경에 자리 잡고 미국과의 대결 상태가 계속된 것이 그 일차적 이유일 것이다. 와다는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 국가 성격을 바꿨다고 보는데, 일원적 당-군 관계를 가일층 강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부친의 사후 후계체제 마련에 부심하던 때 김정일은 자신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었다. (...) 1997년 9월 그를 로동당 총비서로 추대한 인민군 당원대표회의 보고에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조명록은 “무려 16만 6,000여 리의 머나먼 로정을 이어가시며 2,150여 개의 인민군 부대들과 최전선 초소들을 찾으시었다”고 밝혔다. (...) 방문지가 2,150여 개에 이른다는 것은 육군으로 치면 16개의 군단 사령부, 26개의 사단 사령부, 41개의 여단 사령부는 물론 모든 연대 사령부를 방문하고 대대 수준의 주둔지까지 방문했다는 것이다. 이는 믿기 힘든, 가히 놀랄 만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

 

물론 이 과정에서 김정일은 선물을 가지고 가서 장병들을 물질적으로도 즐겁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최고사령관이 몸소 찾아와서 장병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 자체는 틀림없이 장병들을 감격시켰을 것이다. (...) 최고사령관과 함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바로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선서를 의미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김정일은 군대를 장악하는 데에 상당 정도 성공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 (같은 책 304-305쪽)

 

미국-남한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 북한군이 몇 주일 이상 저항을 계속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북한 밖에는) 없다. 그러나 궤멸되기 전에 남한과 일본, 특히 서울에 상당한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사실이 1994년 6월의 위기를 막아주었고, 지금까지도 억지력을 발휘하고 있다.

 

대북 강경론 중에는 북한이 남한-미국의 도발 없이도 자기네 군사력이 더 쇠퇴하기 전에 이판사판으로 달려들 위험을 지적하며 그런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 주장은 1994년의 경험을 무시하는 것이다. 북한에게 경제위기와 군사위기가 겹쳐진 최악의 체제위기였다. 그런 위기에도 이판사판으로 나가지 않고 그 취약한 군사력을 억지력으로 활용해서 동유럽과 이라크의 운명을 피했다. 그런 경험을 가진 북한이 왜 자멸의 길을 택하겠는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