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안 호가 1912년 4월 5일 런던을 떠나 보스턴으로 항해하던 중 4월 14일 항로에 빙산이 너무 많이 떠 있어서 진행이 어려워지자 스탠리 로드 선장은 배를 멈추고 밤을 지낸 다음 날이 밝은 뒤 항해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캘리포니안 호는 약간의 승객도 실을 수 있는 배였지만 그 운항에는 승객을 태우지 않고 있었다.

 

그 무렵 북대서양 항로에는 비정상적으로 얼음과 빙산이 많았다. 로드 선장은 무전사 시릴 에반스에게 인근의 배에게 항로 상황을 알리도록 지시했다. 밤 10시 20분경 타이타닉 호와 교신이 되었다. 에반스가 상황을 설명해 주는데 타이타닉의 무전사 잭 필립스가 말을 잘랐다. “꺼주세요, 꺼주세요! 지금 바빠요. 케이프 레이스와 교신 중이에요!”

 

두 배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 소리를 조절할 수 없던 당시 장비로는 에반스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던 모양이다. 그리고 타이타닉의 무전기가 고장 났다가 얼마 전에 고쳐졌기 때문에 뉴펀들랜드의 케이프 레이스 기지를 통해 전송할 승객들의 전보가 많이 밀려 있었다고 한다. 타이타닉 무전실에서는 그 날 다른 배가 전해준 몇 건 빙산 경보도 승무원들에게 전하지 않은 채 깔아뭉개고 있었다는 사실이 사고 후 조사에서 드러났다.

 

에반스는 잠시 기다리다가 더 이상 타이타닉의 응답이 없자 교신을 끊었다. 10시 30분이었다. 그리고 70분 후 타이타닉 호가 빙산과 충돌했다.

 

양쪽 배 승무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두 배는 불빛을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빙산과 충돌 후 타이타닉 호에서 무전을 발신했지만 캘리포니안 호 무전기는 꺼져 있었다. 모르스 램프를 써서 캘리포니안 호 방향으로 신호를 보냈지만 관측되지 못했다. 사실은 캘리포니안 호 선원들도 타이타닉 호의 불빛이 이상해 보여서 모르스 램프를 써봤지만 그것도 관측되지 못했다.

 

자정이 지난 후 타이타닉 호에서는 몇 차례 신호로켓을 쏘아 올렸다. 이것을 본 캘리포니안 호 승무원들이 로드 선장을 두 차례 깨워 보고했는데, 선장은 로켓의 수와 색깔을 묻고는 조난신호가 아니라 판단하고 묵살했다. 5시 반에 에반스 무전사를 깨워 무전기를 켜고야(이 사건 이후 항해중인 배에서는 무전기를 24시간 켜놓고 있도록 관계법령이 개정되었다.) 사정을 알게 되었고, 8시 반경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앞서 도착한 카르파티아 호가 할 수 있는 구조작업을 모두 끝내고 있을 때였다.

 

캘리포니안 호는 타이타닉 호로부터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배였고, 영국 사고조사위원회는 캘리포니안 호가 신호로켓을 보았을 때 무전기를 켜기만 했다면 “희생자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많은 수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따라 로드 선장은 타이타닉 호의 구조신호를 외면했다는 비난과 함께 참극을 키운 원흉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배와 함께 희생된 타이타닉 호의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과의 대비 때문에 로드 선장에 대한 비난이 더 강했다. 그러나 사실 스미스 선장의 책임이 비교도 안 되게 더 컸다. 62세의 스미스는 해운업계에서 명성 높은 고참 선장으로 타이타닉 호 처녀항해의 지휘봉을 맡았다. 그런데 그 날 배에서 보기에도 빙산이 많기 때문에 항로를 조금 남쪽으로 돌리기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달도 없는 한밤중에 최고속력(24노트)에 가까운 22노트로 질주하게 한 것이 사고의 근본 원인이었다.

 

상업적으로 팽창 중이던 북대서양 항로에서 해운회사들은 속도를 가장 중시했다. 정해진 기일에 맞추지 못하는 것이 빙산에 부딪치는 것보다 더 큰 재앙으로 여겨졌다. 조선술의 발달과 선박의 대형화가 안전불감증을 부추겼다. 1907년 독일 여객선 크론프린츠 빌헬름 호가(총톤수 2만5000톤으로 타이타닉 호의 약 절반이었다.) 빙산에 부딪쳐 선수가 크게 우그러지고도 항해를 무사히 마친 일이 있어서 해운업계의 자만심을 더욱 키워주기도 했다.

 

충돌 직후 승선 중이던 배 설계자를 깨워 상황을 점검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두어 시간 내에 침몰할 것이라는 판단이 나오자 스미스 선장이 일종의 공황상태에 빠진 것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추정한다. 명령을 명확하게 내리지 못해서 혼란을 더했다. 예컨대 여자와 어린이를 먼저 구명보트에 태우라는 명령을 어떤 승무원은 “여자와 어린이만” 태우라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68명 정원의 보트에 20여 명씩만 태우고(주변의 남자 어른들이 타는 것을 가로막고) 바다로 내리기도 했다. 승무원들의 증언을 볼 때 충돌 25분 후 하선 준비 명령을 내린 뒤로는 스미스가 선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침몰이 예측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침몰 순간까지 모르고 있던 승무원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미스 선장이 비난의 표적은커녕 찬양의 대상이 된 것은 자기 목숨을 버렸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해상제국으로서 영국인의 자존심도 스미스의 영웅화에 한 몫 했다. 위기상황에서 그가 선원들에게 했다는 한 마디 말이 그의 동상 밑에 새겨졌다. “영국인답게, 여러분, 영국인답게!”(Be British, boys, be British!)

 

사고 내용이 소상하게 알려진 것은 구조된 사람들을 실은 카르파티아 호가 사흘 후인 4월 18일 저녁 뉴욕에 입항한 뒤의 일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사고라는 사실이 이미 시시각각 밝혀지고 있었다. 4월 17일 미국 상원 본회의에서 윌리엄 스미스 의원이 조사위원회 구성을 발의했고, 그 결과 통상위원회 밑에 7인 소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스미스 의원이 위원장을 맡은 조사위원회는 이튿날 입항한 카르파티아 호에 타고 있던 주요 증인들을 확보하는 데서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4월 19일 아침 심문을 받은 첫 증인은 배에 타고 있다가 구조된 화이트스타 해운(타이타닉 호의 소속사)의 이즈메이 회장이었다.

 

이즈메이 회장에게 비난 여론이 쏟아졌지만 도덕적 비난일 뿐이었다. 이즈메이의 잘못은 살아남았다는 것뿐이었고, 정작 비난을 받을 스미스 선장은 목숨을 잃음으로써 표적이 되는 것을 면했다. 여론이 비난의 표적을 아쉬워하고 있을 때 나타난 것이 캘리포니안 호의 로드 선장이었다.

 

4월 19일 캘리포니안 호가 보스턴에 입항할 때 아무도 그 배와 타이타닉 사고와의 관련성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타이타닉 승무원 중에 배 한 척이 눈으로 보일 만큼 가까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지만 그 배가 캘리포니안 호였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보스턴 지역신문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을 때 로드 선장은 두 배 사이의 거리가 30마일이라고 처음에는 주장하다가 며칠 후에는 20마일로 고쳐 말했다. 그런데 4월 22일 두 개 신문에서 ‘특종’이 나왔다. 불빛이 보이는 위치에 있었고, 타이타닉 호의 신호로켓도 보았다는 캘리포니안 호 승무원들의 진술을 확보한 것이었다. 이 진술을 들이대며 거리를 다시 묻는 기자들에게 로드 선장은 ‘국가기밀’이라며 답변을 거부했다. 신호로켓을 본 적이 없었다고 했던 앞서의 주장을 뒤집어, 로켓을 보기는 했지만 다른 ‘제3의 배’에서 쏜 것이고 조난신호도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제3의 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타이타닉 호와 카르파티아 호 승선자들의 증언으로 밝혀지면서 로드 선장은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해상에서 구난 요청을 회피한 데다 거짓말까지 하다니! 캘리포니안 호의 그 날짜 항해일지 초본(항해일지로 옮겨 적기 전에 수시로 그때그때 적어 놓는 기록)이 사라진 사실이 밝혀지자 증거인멸 혐의까지 겹쳐져 로드 선장은 참극과 관련된 최고의 악한이 되었다.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로드 선장은 사법처리 대상이 되지 않고 ‘증인’ 역할에 그쳤다. 그의 ‘실수’는 충분히 밝혀졌지만, ‘죄상’을 엄밀하게 증명할 만한 증거를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법처리는 면했으나 그 대신 무죄를 주장할 길도 없었고, 당시 35세였던 그는 죽을 때까지 50년간 치욕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1955년 타이타닉 참극을 다룬 책 <A Night to Remember>(월터 로드 지음)가 나오고 뒤이어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될 때 자기 명예를 되찾아달라고 리버풀선원협회에 호소했다. 그의 처지를 동정한 선원협회는 재조사 청원서를 무역위원회에 제출했지만 거듭 기각되었다. 1985년 타이타닉 호 선체 발견 후에도 로드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4월 18일부터 5월 25일까지 활동한 미국 상원 조사위원회도, 5월 2일부터 7월 3일까지 활동한 영국 무역위원회 조사위원회도, 기소권을 갖지 않은 조사기구였지만 사법처리 권고 결정을 할 권한은 갖고 있었다. 미국 위원회는 정치인으로 구성되고 영국 위원회는 법관을 비롯한 전문 관료를 주축으로 구성되었는데, 미국 여론은 영국 위원회가 폐쇄적이며 ‘제 식구 감싸기’에 치우친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미국 위원회마저 영국인 로드 선장의 사법처리 권고를 결정하지 않은 데 대해서는 미국에서도 불만이 많았다.

 

한편 영국 여론은 미국 위원회의 ‘포퓰리즘’과 ‘아마추어리즘’에 비판적이었다. 철도 문제에 관심을 집중해 온 스미스 위원장이 다른 위원들보다는 전문성에 접근한 인물이었지만, 해운 방면에는 경험이 없었다. 전문가들은 증인 자격으로 활동에 참여했는데, 조사활동의 주체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역할에 한계가 있었다. 가장 신랄한 비평을 모은 대목은 스미스가 한 선원을 심문하다가 “빙산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증인은 아시오?” 물은 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그린 풍자만화가 수많은 영국 신문의 지면을 덮었고, 스미스에게는 ‘방수벽(Watertight) 스미스’란 별명이 붙었다. 미국 위원회의 전문성 부족을 꼬집는 논평이 여러 영국 신문에 나왔다.

 

“[스미스는] 영국 선원들의 눈에 우스운 꼴을 보였다. 영국 선원들은 배에 관해 아는 것이 있고, 스미스 상원의원은 아는 것이 없다.” (<데일리 미러>)

 

“결국 일반인의 능력으로는 해상운송과 관계된 문제를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 줬다.” (<데일리 텔리그라프>)

 

“기술적 지식을 가지지 못했고, 그 진행에서는 항해나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데일리 메일>)

 

“해상 사건의 조사에서 시골 법정 수준의 전문성을 보여줬다.” (<이브닝 스탠다드>)

 

영국 정부도 미국 조사위원회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표했다. 구명정의 수량을 너무 적게 규정하는 등 영국의 해운 관계법령의 문제점에 대한 미국 위원회의 지적을 에드워드 그레이 영국 외상은 ‘한심한 짓’이라고 비난했다. 제임스 브라이스 주미대사는 태프트 대통령을 방문해 상원 조사위원회를 해산하고 그 결정사항을 무시할 것을 요청했다.

 

영국 조사위원회가 기술적으로 더 충실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 위원회에 비해 문제를 이해할 능력이 더 뛰어난 위원들로 구성된 데다가, 기본 사실이 밝혀진 뒤에 활동을 시작했고 조사기간도 더 길었다. 하지만 영국인 중에도 영국 조사위원회에 불만을 품고 미국 위원회의 개방성을 평가한 사람들이 있었다. G K 체스터튼(1874-1936)은 말했다. “스미스 상원의원이 사실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진심으로 애쓴다는 점이다.” <리뷰 오브 리뷰스>지 사설에도 이런 말이 나왔다. “우리는 이즈메이 회장의 유식보다 스미스 의원의 무식을 지지한다. 전문가들은 타이타닉 호가 침몰할 수 없는 배라고 말했다. 그런 지식보다는 무지를 원한다.”

 

어느 위원회도 범죄행위를 밝혀낸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과실의 지적에서 미국 위원회가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영국 무역위원회가 승선 정원의 3분의 1도 못 싣는 수준의 구명보트 비치규정을 유지해 온 잘못, 선원과 승객의 대피훈련을 소홀히 한 해운회사, 그리고 스미스 선장의 무리한 운항 등에 대한 엄중한 비판이 미국 위원회의 보고서에 들어있었다.

 

반면 영국 위원회의 보고서는 이 모든 잘못을 관행으로 설명했다. 예컨대 스미스 선장의 위험지역에서의 과속운항도 “다른 어떤 유능한 선장도 같은 상황에서 그대로 했을 것”이라며 그런 관행으로도 지난 10년간 영국 기선들이 350만 명의 승객을 수송하는 동안 10명의 목숨을 잃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지금까지는 ‘실수’로 통하던 것이 앞으로는 ‘과실’로 인정되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시의 영국 언론은 대개 영국 위원회의 활동과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기술적으로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완벽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다”(<데일리 텔리그라프>)든가, “보고서가 모든 사람의 책임을 실제로 배제해 준 것이므로 향후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시도가 어디에서도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데일리 메일>)는 말이 사설로 나왔다.

 

그러나 비판적인 의견도 많았다. 타이타닉 호의 2등항해사 찰스 라이톨러는 사고의 기본조건을 만들어준 무역위원회가 조사위원회를 운영한 데는 이해관계의 상충 문제가 있으며, 따라서 그 조사는 면죄부를 주기 위한 ‘세탁’ 활동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사건의 연구자 도널드 린치는 이렇게 말했다.

 

“무역위원회에게는 자신의 과실을 덮어버릴 필요가 있었을 뿐 아니라 화이트스타 해운회사의 과실을 밝힐 동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해운회사의 평판이나 대차대조표에 손상이 일어날 경우 영국 해운업이 손실을 입게 되는데, 양쪽에 다 손상의 위험이 있었다. 해운회사의 과실이 인정될 경우 손해배상 소송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들어와 화이트스타 회사를 침몰시켰을 것이고, 영국은 수익성 높은 해운시장의 상당 부분을 프랑스와 독일에게 넘겨주어야 했을 것이다.” (<Titanic: An Illustrated History> p 182)

 

더 최근의 연구자 스테파니 바르체프스키 역시 <Titanic: A Night Remembered>에서 영국 보고서의 기술적 우월성을 인정하지만 “정당한 분노”와 “피해를 보상해주려는 열정”을 담은 미국 보고서에서 더 큰 의미를 찾는다고 말했다. 영국 위원회가 체제와 관행의 주체인 ‘인사이더’를 대표했을 뿐인 반면, 미국 위원회는 수동적 입장에 머물러 있던 이용자-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더 근본적 개혁의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1912년. ‘국익’을 하늘같이 떠받들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고 있던 제국주의 시대의 일이었다. 당시의 패권국가 영국은 기술적 차원에서 사건을 처리하여 기존 체제와 관행을 지키려 한 반면 신흥강국 미국에서는 체제와 관행의 전면적 재검토를 위한 노력이 일어났던 것이다. 마침 두 나라 사이에 걸친 사건이라서 두 나라의 태도가 극명하게 차이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세월호 조사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정치세력은 지금의 한국 사정이 백년 전의 영국처럼 탄탄한 것이라고 믿어서 “이대로!”를 외치는 것일까?

 

 

Posted by 문천

 

김정일(1942-2011)은 1970년대 초 김일성 ‘1인 체제’의 후계자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 공식적 제2인자의 위치에 나서고 1990년경부터 통치권을 분담하고 있다가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후 2011년 12월 자신의 사망까지 최고권력자 자리를 지켰다.

 

1인 체제란 1인의 안위에 체제의 안위가 걸려있는 체제다. 김일성 1인 체제는 1950년대 중반부터 40년간이나 계속된 것이기 때문에 그 상관관계가 더욱 강력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체제 계승 준비를 20년간 해왔다 해도 항일투쟁의 후광 위에 반세기 동안 구축되어 온 김일성의 지도력을 후계자가 대신할 수 있을 지는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많은 북한붕괴론자들은 김일성 사망이 붕괴의 결정적 계기가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경제를 비롯한 여러 방면의 위기 속에서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때 북한이 위기를 얼마동안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지 후계자 김정일의 능력에 많이 걸려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김정일은 권력승계 후에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고, 관심에 비해 정보가 적은 그의 신상을 둘러싸고 부정적 소문이 횡행했다.

 

김일성이 1994년 죽은 뒤 6년 동안 김정일은 신비로운 은둔자로 남아있었다. 서방 언론들은 남한이나 미국 정보 당국이 유포한 잘못된 정보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그를 괴짜이고 난봉꾼이며, 멍청하고 위험하고 비이성적인데다 예측 불가능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러다 그는 2000년 6월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때 감자기 모습을 드러내 세계 언론의 각광을 받았다. (셀리그 해리슨 <코리안 엔드게임> 115쪽)

 

2000년 이전 김정일의 부정적 모습에 관한 정보의 중요한 출처로 1978-1986년간 북한에서 살았던 최은희-신상옥과 1997년 망명한 황장엽의 기록을 해리슨은 소개한다. 1980년대 북한 사정을 살펴보기 위해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시대정신 펴냄)를 참고할 때 김정일에 대한 부정적 서술을 많이 보았다. 폄하와 비난의 동기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김정일에 관한 황장엽의 서술에는 참고 가치가 거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독자의 판단을 위해 해리슨이 인용한 부분만은 옮겨놓겠다.

 

“김정일은 똑똑하지만 거만하고 망상에 사로잡힌 음모꾼이고, 완고합니다. 교활하고 속임수를 잘 쓰지요. 자신의 권력을 영속화하는 데만 신경을 쓰고, 개인적 이익과 손해의 차원에서 모든 문제에 접근합니다.”

 

“그(김일성) 역시 독재자였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었고 유연했습니다. 나는 대체로 그를 존경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약점은 가족을 너무나 챙긴 나머지 족벌주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비교적 젊은 아들한테 매일의 국무를 처리할 절대 권력을 주는 바람에 자기 아들을 완전히 망쳐 버렸다는 점입니다. 이제 김정일은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려 합니다. 아버지와 달리 그는 ‘정치적 동물’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같은 책 124쪽)

 

최은희-신상옥의 서술은 직접 찾아보지 않고 해리슨이 인용한 내용만 훑어봤는데, 역시 김정일을 폄하하려는 동기가 꽤 느껴진다. 예컨대 김정일의 별장들에 대해 “사치스럽고 비싼 것들로 치장되어 있지만 어쨌든 좀 촌스러웠어요. 예를 들면 모든 방에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있는데 꼴사납고 어색하게 매달려 있었지요.” 같은 대목. 한 국가지도자를 놓고 실내장식 감각을 흉보는 것은 깎아내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 앞서는 것 같다.

 

편향성이 느껴지는 황장엽과 최은희-신상옥과 달리 공정한 입장에서 흥미로운 증언을 남긴 김정일의 측근 한 사람이 있다. 1966년생의 리남옥은 1979년부터 이모인 성혜림(김정일의 아내)을 따라 김정일의 집에서 살며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의 놀이동무로 지내다가 1992년 제네바 유학 중 망명했다.

 

리남옥은 망명의 동기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라고 밝혔다. “나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그리고 조선 사람으로서의 나의 정체성과, 여성의 지적-전문적 자아실현에 관한 서구적 개념들을 결합하기 위해서, 나는 조국을 떠났다.” 중매결혼을 피하는 것이 망명의 결정적 계기였다고 하며, 망명을 도와준 프랑스 정보기관 요원의 아들과 후에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망명 초기에 언론 노출을 피한 것은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위험 때문이었다. “내가 말하는 것들이 왜곡되어 다른 사람들의 정치적인 목적이나 선전에 사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다. 그러다가 북한의 기근사태 때 북한에 대한 서방세계의 이해를 늘려줄 필요를 느끼면서 발언을 시작하고 자서전 집필에 착수했다. 그가 결국 자서전 출간을 포기한 뒤 집필을 도와주던 작가 이모진 오닐이 그에게 들은 말을 토대로 <Breaking Silence>를 냈다는데, 아마존에서는 이 책을 검색할 수 없었다. (같은 책 118쪽)

 

1998년 미국의 NPR 라디오방송에서 레이 수아레스와 인터뷰할 때 김정일에 대한 리남옥의 발언이 <코리안 엔드게임> 118-119쪽에 인용되어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알려지게 될 김정일의 모습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바깥세상이 만들어낸 김정일의 이미지는] 우스꽝스럽게 희화화된 것입니다. 그는 자유분방하며 현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재기가 번뜩이고, 내가 읽었던 글에서처럼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거처에 있는 사무실에서 밤늦게까지 매우 열심히 일합니다. 그 방은 몇 개의 텔레비전 모니터와 외국의 뉴스 방송을 들을 수 있는 특수 라디오들이 있습니다. 그는 개방적이고 컴퓨터나 음악, 자동차, 좋은 음식 등과 같은 분야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유쾌해요. 그는 일반적인 다른 사람과 같습니다.”

 

대형 초상화를 내거는 일이나 북한 언론의 우상화를 지적하며 수아레스가 이의를 제기하자 리남옥은 이렇게 응답했다고 한다. “그건 그 사람을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그런 일들이 굴러가는 체제 때문이지요.”

 

리남옥의 증언이 강한 신뢰감을 주는 것은 극단적 미화를 삼가기 때문이다. NPR 방송 때 시청자 전화에서 김정일의 알코올 중독, 자동차 속도광 등에 대한 질문이 있자 지체 없이 대답했다고 한다.

 

“맞아요, 그는 자동차를 좋아하죠. 그건 사실이에요. 술도 엄청 잘 마십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이나 아시아 사람들은 누구나 술을 많이 마셔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점에선 별로 독특하지 않습니다.” (같은 책 119쪽)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 <문예춘추(文藝春秋)> 인터뷰(1998년 2월 10일자)에서도 키에 대한 김정일의 자의식을 가볍게 인정했다. “그는 우리들에게 키 크기 위해 운동하라고 거듭거듭 얘기했어요. 그는 아들 김정남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키가 컸기 때문입니다.” (같은 책 120쪽)

 

해리슨은 1972년과 1994년에 김일성을 만나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그러나 김정일과는 2001년 <코리안 엔드게임> 집필 때까지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통해 김정일은 국민에게 (김일성처럼)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라는 인상을 받았으며, 권위 있는 지배 대신 실제적 해결을 요구하는 북한 현실의 변화를 이로부터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같은 책 125쪽) 2001년 시점에서 해리슨은 김정일의 역할을 이렇게 내다보았다.

 

김정일은 그의 아버지처럼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아니며, 아버지의 리더십 모델을 모방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는 헌법을 새로 개정해 군부가 노동당 대신 정치적 권위의 중심이 되도록 하고 이를 자신의 권력 토대로 만들었다. 북한은 이미 무혈 군사 쿠데타를 겪은 셈이다. 김정일 체제는 이런 과정을 거쳐 분파주의가 준동하는 일 없이 또 다른 후계 체제로 안정적으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군부 지도자들이 김정일에게 한 것처럼 새로운 지도층에 대해서도 권력 토대와 정치적 기반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조심스럽게 ‘비밀스런 개혁’을 추구하는 것은, 그가 아버지의 카리스마나 획일적인 통제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1년의 평양은 김정일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려는 압력단체들의 경쟁과 매파와 비둘기파의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정글을 방불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중하게 계획한 개혁안은 통치 기간 동안 탄력을 받을 것이며, 이는 북한의 공식 이데올로기가 실용주의적 경제정책으로 변화하는 토대를 제공할 것이다. 이런 변화는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후계자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같은 책 114-115쪽)

 

해리슨이 북한 옹호에 너무 기울어졌다는 이유로 미국 관리들의 신뢰를 받지 못한 인물이라는 점은 앞에서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코리안 엔드게임>을 읽은 내 판단으로는 편향성이 그리 심하지 않다. 2000년 이전, 북한에 관한 정보가 극히 적을 때 근거 없이 북한을 폄훼하는 대결주의자들이 언론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멀쩡한 사람이 오히려 병신 취급당하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일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그에 관해서도 해리슨의 관점이 정확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2000년 6월 3일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특사로 북한에 가 김정일을 처음 만난 임동원은 귀경 후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 이렇게 말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며 말하기를 즐기는 타입입니다. 식견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며 판단력이 빨랐습니다. 수긍이 되면 즉각 받아들이고 결단하는 성격입니다.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며, 말이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주제의 핵심을 잃지 않는, 좋은 대화상대자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연장자를 깍듯이 예우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피스메이커> 73쪽)

 

남북정상회담 후 김정일에 대한 외부 인식의 변화를 해리슨은 이렇게 설명했다.

 

김대중은 그가 “지성과 분별력, 개혁 마인드를 갖고 있으며 상식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그런 타입의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김정일과 여섯 시간 동안 회담을 한 뒤, “상대방의 얘기를 매우 잘 들으며 훌륭한 대화 상대자이다. 매우 결단력이 있으며 실용주의적이라는 데 강한 인상을 받았다. 또 진지했다.”고 묘사했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가 표현한 것처럼 워싱턴의 일상적인 회의석상에서는 그가 “이성적이고 개방적인 일련의 정책을 지원할 능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 새로운 상식이 되었다. 서울 언론들도 남북 정상회담이나 그 뒤 8월에 김정일이 46명의 남한 언론사 사장을 위해 주최한 오찬을 보도하면서 비슷한 시각을 나타냈다. 남한 언론들은 그의 “실용주의적 태도”, “깍듯한, 전형적인 한국식 예의범절”, “자신 있고, 자유롭고, 여유 있고, 솔직한” 성격, “실수를 기꺼이 인정하는 태도”, “세계 사정을 포함한 많은 분야에 대한 상당한 지식” 등에 대해 보도했다. CNN이나 BBC, 일본 라디오 및 텔레비전을 통해 이런 지식을 얻은 것 같다는 얘기도 보도되었다. 남한에 주재하는 <파이낸셜타임스> 특파원이 보도한 것처럼, “한때 김정일을 경멸의 표적으로 만든 것들, 예를 들어 배불뚝이에다 왜소한 체격, 부풀린 헤어스타일, 뒤굽을 높인 구두 등은 이제 오히려 애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남한의 어린이들은 그의 사진을 “만화로 그려 전자우편으로 부치기도 하고, 그가 배불뚝이인데다 마음을 밝게 해준다면서 텔레토비에 비유하기도 한다.” (<코리안 엔드게임> 115-116쪽)

 

김정일이 “거만하고 망상에 사로잡힌 음모꾼”이라는 황장엽의 말은 한 마디로 황당무계할 뿐이다. 그런 말을 그가 한 것은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말을 함으로써 그가 혜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2000년 이전에는 그런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2000년 6월 이후로는 그런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대결주의자들은 북한붕괴론의 설득력을 늘리기 위해 북한 사정을 나쁜 쪽으로 선전하는 경향이 있었고, 김정일을 정신병자나 인격파탄자의 모습으로 그리는 것은 그중 중요한 일이었다. 북한 사정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적을 때 그들의 선전활동은 절제 없이 펼쳐졌다. 2000년 김정일은 그런 사정을 이용해 반격의 홍보전에 나서서 큰 성공을 거뒀다.

 

이 때문에 북한 사정을 거꾸로 미화해서 상상하는 풍조까지 일어났다. 나 자신 2002년 연변에 처음 가볼 때까지 북한 경제난에 관한 보도가 대결주의자들의 선전에 치우친 것이 아닐까 의심을 품고 있었다. 두만강 너머 헐벗은 북한 강산을 바라보며, 연변 사람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북한의 참상이 사실이라는 것을 비로소 확인하게 되었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그것이 곧 앎이니라.” ‘앎’이 무엇인지 자로(子路)가 물을 때 공자의 대답이다. 적게 아는 것보다 잘못 아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정보가 부족할 때는 억지로 짐작하지 말고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김정일이 예상 밖의 모습을 보였을 때 종래의 잘못된 선전 내용을 벗어던지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에 대한 반동으로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것도 조심할 일이다.

 

2000년 정상회담을 계기로 김정일이 특별한 인격상의 문제가 없고 상당히 유능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북한의 권력 세습이 맹목적 권력승계가 아니라 치밀한 체제 운용방법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권력자의 유고(有故) 여부에 붕괴론이 지나치게 의지했던 것은 반성해야 할 일이다.

 

 

Posted by 문천

 

1993년 7월의 제2차 북미회담 이후 제3차 회담이 기약 없이 늦어지는 가운데 분위기가 회담 재개를 어렵게 만드는 쪽으로 계속 흘러갔다. 10월 4일 IAEA총회에서 북한의 사찰 수용 거부를 ‘우려’하는 결의를 채택했고, 11월 1일 유엔총회에서 IAEA의 노력을 지지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연말에 이르러(12월 29일) 북-미간 뉴욕 접촉에서 협력 방침이 합의되고 이듬해 2월 25일 북-미간 ‘4개항 동시조치 합의문’이 타결되어 수습의 길이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한 채 3월 19일 남-북간 특사교환 회담이 북한 대표의 “불바다” 발언을 남기고 파탄에 이르자 미국도 북한에 대해 강압적 태도로 돌아섰다.

 

이틀 후인 1994년 3월 21일 IAEA 이사회에서 북한 문제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3월 31일에는 IAEA 입장을 지지하는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이 나왔다. 4월 20일에는 11월에 팀스피릿 훈련을 재개할 방침이 발표되었다. 북한은 이에 반발, 영변 원자로의 연료 재장전 의도를 4월 25일 IAEA에 통보하고 5월 17일에 재장전을 시작했다. 재장전 감시를 위해 IAEA 사찰단이 입북했으나 북한당국과의 협조가 잘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6월 13일 북한의 IAEA 탈퇴 선언에 이른다.

 

1994년 2월 윌리엄 페리가 국방장관에 취임한 후 북한 문제의 악화에 따라 군사적 조치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전쟁 가능성 검토를 주도했다는 점을 놓고 페리를 강경파로 볼 수도 있지만, 셀리그 해리슨은 <코리안 엔드게임>에서 김일성-카터 회담 결과를 지지한 고위관료로 갈루치와 함께 페리를 꼽았다. 사실, 페리가 주도한 전쟁 가능성 검토가 대북 강경론을 물리치는 근거를 만들어주었다. 페리는 북한 문제 완화를 위해 애쓰던 레이니 주한대사의 의논 대상이기도 했다.

 

4월 김일성 생일 즈음에 김일성 주석은 넌 상원의원과 군사위원회의 또 다른 민주당 위원인 칼 레빈을 북한으로 초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넌 의원은 5월 10일 워싱턴을 방문한 짐 레이니 주한 미 대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미 행정부가 여전히 북한 지도자들과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없다는 점을 우려한 레이니 대사는 이 아이디어를 페리 장관, 레이크 보좌관, 갈루치 차관보와 논의했으며 이들은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 226쪽)

 

이에 따라 샘 넌은 공화당의 리처드 루가 의원과 함께 5월 25일 평양으로 떠날 계획을 세웠는데, 출발 직전에 평양으로부터 그들의 “방북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미국의 촉박한 통지로 인해 지금으로서는 이들을 맞을 수 없다”며 6월 10일경을 대신 제안하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같은 책 227쪽) 넌과 루가의 정치적 위상으로 보면 미국과의 관계에 돌파구를 찾던 북한에게 반가운 손님이었을 텐데, 그들의 방북을 결과적으로 무산시킨 것이 의아한 일이다. 카터 방북의 물밑교섭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일까?

 

카터 방북의 성과를 클린턴 행정부가 못마땅해 하면서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처럼 알려진 것이 본심을 감춘 연출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앞서 적었다. 미국 정부도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 압박에 IAEA와 남한을 앞세웠는데, 그것이 북미회담 진행에 족쇄가 되었다. IAEA는 애초의 엄격한 사찰 기준을 고집했고, 남한은 남북관계 진전이 북미관계에 앞설 것을 요구했다. 이 족쇄를 풀기 위해 카터 방북의 효과를 드라마틱하게 연출할 필요가 있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전직 대통령이 김일성을 만난 다음 자기 의견을 일방적으로 발표해 버렸다. 공식 사절이 아니라고 그냥 묵살해버릴까, 아니면 최대한 존중할 것인가, 양자택일의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불과 3주 후에 제3차 북미회담이 열리게 되는 것을 보면 미국 정부도 회담 재개를 위한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병력 증강을 논의하고 주한 미국인을 소개시킬 것처럼 들썩거리며 전쟁 가능성을 띄워댄 것도 정책 전환을 앞두고 동맹국에게 체면치레를 한 것일지 모른다. 퀴노네스의 상황 설명이 적절하다.

 

카터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1993년 8월 이래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북미관계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고 위기상황을 잠재웠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카터 전 대통령은 자신의 부인만 배석시킨 가운데 김일성과 단독회담을 가졌다. 카터는 이 회담에서 우리가 1994년 2월 합의결론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을 정확히 달성했다. (...)

 

따져 보면 카터 전 대통령과 노쇠한 김일성 주석 간에 성공적인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무대는 이미 마련된 상태였다. 미국과 북한 정부는 그 한 해 전 그러니까 1993년, 대화 채널을 통해 서로의 차이점을 의논할 공통의 언어와 이 차이를 해결할 공통의 절차를 준비했다. 그러나 양국 관료들은 문제 해결 대신 과거의 인식에만 집착했다. 이런 인식은 한국전쟁과 그 후 30년 이상에 걸친 냉전체제 동안 생긴 상호 불신과 적대감에 기초한 것이었다. (...)

 

카터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은 양국의 관리들이 전에 해놓은 일의 덕을 많이 보았다. 동시에 카터와 김일성 두 사람 모두 과감한 행동을 취하는 데 따르는 위험부담을 떨쳐버릴 수 있는 사회적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었다. (<한반도 운명> 275-276쪽)

 

미국이 북미회담의 재개를 일부러 늦출 만한 조건이 또 하나 있었다. 경수로 지원비용 문제였다. 1993년 7월의 제2차 회담에서 북한의 요구가 경수로 건설 지원으로 집약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수십억 달러로 예상되는 그 비용을 결국 국제컨소시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통해 조달하고 그 대부분을 남한이 맡게 되는데, 그런 부담을 떠안도록 바로 설득할 길이 없었다. 위트-폰먼-갈루치는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모든 게임플랜은 다자적인 접근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트너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일본과 한국은 카터의 방북 이전까지는 북한에 경수로를 지원하는 문제를 경계하는 듯했다. 5월 갈루치는 미국은 내부적 법규제약 때문에 경수로를 직접 제공하지는 못하지만 국제적 노력을 앞장설 수는 있다고 말했었다. “도대체 일본의 납세자들이 일본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해대는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기 위한 돈을 내야 하는 이유가 뭐요?”라고 일본의 한 고위관리는 따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한 이후부터 조금 달라진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북핵위기의 전말> 303-304쪽)

 

1994년 7월 8일 꼭 1년 만에 북미회담이 제네바에서 재개되었다. 그런데 그 날의 김일성 사망 소식이 이튿날 전해졌다. 북한 대표단은 장례 참석을 위해 바로 귀국하고 회담은 연기되었다가 한 달 후 다시 열리게 된다. 미국 대표단은 클린턴 대통령의 애도 성명을 검토한 다음 국무부의 허락을 받고 한국 외무부에 통보하고 나서 북한대표부를 조문차 방문했다. 클린턴의 애도 성명은 짤막한 것이었다.

 

“미국 국민을 대표해 본인은 김일성 주석의 죽음에 대한 심심한 애도의 뜻을 북한 국민들에게 보냅니다. 우리는 두 정부 사이의 회담을 회복시킨 그분의 지도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는 회담이 순탄하게 계속되기를 희망합니다.” (<한반도 운명> 283쪽)

 

이 단계에서 남한 정부의 태도를 살펴보면서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김영삼의 입장이 떳떳치 못했다는 사실은 위트-폰먼-갈루치가 김영삼의 자서전에서 틀린 대목을 정면으로 짚어내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지자 강경책이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 측은 미국이 협의는 하면서도 모든 군사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한 미국 관리의 표현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의 비핵화정책의) 제단에서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김영삼 대통령은 후일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미국은 가장 가까운 한국과도 상의하지 않은 채 자국민을 철수하고 북한과의 전쟁에 막 나설참이었다. 그래서 그가 레이니 대사와 클린턴 대통령에게 연락하여 제때 중단시켰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의 회고는 틀린 부분이 많다. 첫째, 미국대사관 측에서 청와대에 철수계획에 대해서 상세히 알려준 것은 사실이지만, 자국민 철수에 막 나설참은 아니었다.(...) 둘째, 한국정부는 미국이 취한 조치는 물론이고 백악관 회의에서 논의 중인 조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셋째, 백악관에는 문제의 기간 중 김영삼 대통령이 민간인 철수나 임박한 전쟁에 대해 클린턴 대통령과 통화했다는 기록이 없다. (<북핵위기의 전말> 269쪽)

 

북핵위기가 증폭되는 동안 실무자로 일하던 퀴노네스는 남한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를 보며 김영삼에게 거의 증오심을 품게 된 것 같다.

 

워싱턴이 서울과 조심스럽고 철저하게 자문을 하느라 평양과의 회담 진전이 거북이 걸음처럼 느렸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고위층은 뉴욕의 이 과정에 대해 점점 더 언짢게 여겼다. (...) 김영삼 대통령은 이 과정을 깨도록 작심한 것 같았다. 김 대통령과 그의 안보보좌관 정종욱은 평양에 대해 남북대화 재개 문제와 관련, 서울의 요구조건을 무조건 따르라고 워싱턴에 주장함으로써 북미회담을 거듭 복잡하게 만들었다. (...)

 

나는 김영삼 대통령이 북한과 미국 간의 관계 완화를 복잡하게 하고 지연시키는 것을 최우선과제로 삼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것이 핵문제 해결을 방해해도 상관이 없는 듯 보였다. 게다가 김 대통령은 평양이 미국과의 회담에서 조급하고 좌절감을 느끼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작정을 한 것 같았다. 김 대통령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1994년 2월에는 한국보다 북한이 더 모두에게 바람직한 해결책을 찾기에 열심인 것처럼 보였다. (<한반도 운명> 267-268쪽)

 

북핵문제 담당 미국 관리들이 김영삼을 보는 시각이 갈루치가 전해주는 한 장면에 비쳐져 나타나는 것 같다. 한국의 어느 대통령 앞에서나 벌어지는 광경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일련의 사건들이 정점을 향해 치닫는 상황에서 갈루치 차관보는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면담했다. 원목으로 장식되고 천장이 높은 회의실은 웅장함과 풍요로움을 동시에 풍기고 있었다. 크고 편안한 안락의자가 놓여있었는데 의자의 간격이 너무 멀어서 방문객들은 목소리를 높여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노트를 주고받거나 귓속말을 할 수도 없었다.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미국 측의 한 관리가 태평양을 건너는 장거리 비행 때문에 피곤했는지 잠이 들어 코를 크게 골았다. 하지만 다른 참석자들과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를 깨울 방법이 없었다. 자는 동료에게 펜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미국인들이 여럿 있었을 것이다. (<북핵위기의 전말> 177-178쪽)

 

이 면담을 끝낼 무렵 김영삼이 “시간은 우리 편이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없소. 북한의 핵카드는 효력을 잃고 있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북한붕괴론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 면담이 있은 8일 후 판문점에서 북한 대표의 “서울 불바다” 발언이 있자 김영삼은 그 장면의 CCTV 녹화를 KBS에서 방영하게 해서 국민을 불안에 빠트렸다.

 

6월 13일 카터가 방북 길에 서울에 들렀을 때 김영삼은 냉담했다. 그 며칠 전 클린턴에게 전화로 카터 방북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카터 방북이 미국 정부의 뜻이 아니라 하더라도] 김영삼 대통령은 카터의 방북을 반기지 않았다. 한국이 또 다시 뒤로 밀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김영삼 대통령의 정적인 김대중이 바로 직전 카터의 방북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 김 대통령에게 있어 ‘김대중의 아이디어’라는 말은 곧 그것을 반대한다는 것과 같았다.

 

카터의 방북 결정 소식을 듣자말자 김영삼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겉으로는 러시아 방문결과가 안건이라고 했지만 이어서 카터의 방북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그는 제재에 대한 국제적 지지가 증가하고 있는 판국에 카터가 방북하는 것은 실수라고 말했다. (...) 김 대통령은 분을 참지 못하는 듯 했다. “김일성은 카터의 방북을 서방세계에 대한 대화와 미소작전에 활용할 것”이라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같은 책 249쪽)

 

카터가 막상 평양에서 돌아오자 김영삼의 표정이 며칠 전과 천양지판으로 달라졌다.

 

카터는 미국정부로부터는 찬밥대우를 받았지만 한국정부로부터는 대단한 환대를 받았다. 다음 일정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오찬이었는데, 이 자리에서 김일성이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가급적 이른 시간에” 남북정상회담에 응하겠다는 것을 밝힌 것이었다. 불과 몇 일 전 떨떠름한 기분으로 카터를 만났던 김 대통령의 입이 딱 벌어졌다. 뛰어난 정치가라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지론인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갖는 남한의 대통령이 되는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카터의 동의를 구한 뒤 공보수석을 불러 그 사실을 발표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책 287쪽)

 

밥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하고 바로 발표를 지시하다니, “입이 딱 벌어졌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다. 며칠 후 클린턴과의 전화에서 김영삼이 한 말을 보면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에서 남한이 주도권을 쥘 것을 기대한 것 같다.

 

같은 날 북한은 한국의 정상회담 제안을 수락했다. 남북한이 뭔가 합의하려면 수차례 줄다리기가 있었던 전과는 달리 북한총리 강성산이 보낸 메시지는 남한의 제안을 그대로 수용하는 내용이었다.

 

그날 저녁 클린턴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은 전화통화를 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그날 일어난 일들이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해결할 수 있는 기회는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두 사람의 대통령이 계속 밀접하게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카터의 방북에 회의적이었지만 이제는 긍정적인 진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93퍼센트의 국민이 정상회담을 지지하며 60퍼센트가 그것을 통해 핵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같은 책 293-294쪽)

 

이렇게 좋아하던 사람이 몇 주일 후 김일성 사망 소식을 듣자 또 한 차례 표변해서 조문 파동까지 일으켰을까? 너무나 간절하게 바라던 정상회담의 꿈이 사라진 것이 억울해서? 미국 대통령이 애도 성명을 발표하고 북미회담 미국 대표단이 조문을 가는 마당에 국내 조문 주장을 탄압한 것은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바닥을 보여주는 짓이었다.

 

결정적인 문제가 북한붕괴론에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지 않아도 김영삼의 신념이 되어 있던 북한붕괴론이 이제 눈앞의 현실처럼 떠오른 것이 아닐까. 40여 년간 북한을 이끌어온 김일성이 사라졌으니. 정상회담은 북한 붕괴 전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기회로 그에게는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런 기회가 코앞에서 사라진 것이 그에게는 애통했을 것이다.

 

북한은 ‘1인 체제’로 알려져 있었다. 그 한 사람이 사라지면 체제가 무너지는 것일까? 그가 사라질 때를 대비해서 ‘후계자’가 키워져 있었다. 그 후계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소문이 많이 떠돌고 있었다. 혈육이라는 이유 하나로 낙점을 받았을 뿐, 방탕하고 포악한 전형적 ‘폭군’의 모습을 그리는 소문이었다.

 

20년 넘게 후계자 자리에 있으면서도 김정일은 외부세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부터 모습을 거침없이 나타내기 시작했다. 1994년 계승 당시에는 괴이한 소문에만 감싸여 있던 이 ‘1인 체제 후계자’가 어떤 인물인가에 북한의 장래가 크게 걸려있는 것으로 외부에서는 인식하고 있었다.

 

셀리그 해리슨은 2002년 나온 <코리안 엔드게임> 제1부 “북한은 붕괴할 것인가?”의 마지막 장에서 막 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던 이 북한 지도자가 어떤 인물인지, 그때까지 떠돌던 이야기들을 정리해 놓았다. 다음 회에는 그 내용을 살펴보며 김정일의 역할에 대한 계승 당시의 전망을 뒤돌아보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