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8일부로 카터(1924~ ) 전 미국 대통령이 한 가지 기록을 깨뜨린 것이 있다. 퇴임 미국 대통령으로서 31년 7개월 16일을 채움으로써 1964년 10월 20일 사망한 허버트 후버(1874~1964)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긴 퇴임 기간의 내용이 충실하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닮았다. 재임 중 인기가 폭락했다가 퇴임 후 되살아난 카터를 “미국 최고의 전임 대통령”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후버도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대공황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쫓겨나듯 백악관을 떠난 그가 트루먼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걸쳐 행정개혁위원회(후버위원회)를 이끈 업적이 높은 평가를 받고 그가 쓴 윌슨 대통령의 전기 <The Ordeal of Woodrow Wilson>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카터의 퇴임 후 활동을 상징하는 것이 2002년의 노벨평화상이다. 오바마가 2009년 받으면서 “미국 대통령이면 아무나 받는 건가?” 권위가 떨어져 버렸지만, 카터에 앞서 이 상을 받은 미국 대통령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우드로 윌슨 둘뿐이었다. 카터의 수상이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퇴임 후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받았다는 사실이다. 나머지 세 사람은 재임 중에 받았다. 카터의 수상은 역대 평화상 중 가장 충실한 내용을 갖춘 것의 하나로, 그의 수상이 노벨평화상의 권위를 높여주었다는 말까지 듣는다.

 

주 상원의원과 주지사 경력밖에 없던 지방정치인 카터가 1976년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워터게이트사건에 따른 미국민의 ‘새 정치’ 열망 덕분이었다. 그런 배경 위에서 대통령 재임 중 카터는 교육과 에너지정책의 전면 개혁과 파나마운하 반환, 주한미군 철수 등 ‘미국의 숙제’를 푸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엄청난 역풍을 맞았다. 1979년이 카터에게는(미국에게도) 끔찍한 해였다. 1월의 이란 무슬림혁명으로 인한 에너지위기 속에서 3월에 스리마일 핵발전소 사고가 터졌다. 이란혁명이 11월 대사관 인질사태로 번져 나간 데 이어 12월에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시작되었다. 참신성에 대한 기대감이 관리능력에 대한 실망으로 돌아서면서 ‘레이건 시대’의 문이 열리게 된다.

 

퇴임 후 카터센터를 통한 카터의 인권-평화 노력은 네오콘과 신자유주의가 미국을 지배하는 동안 미국의 ‘양심의 횃불’ 노릇을 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탄압과 가자 공격을 앞장서서 비판하고 있다. 질병 퇴치와 주거환경 개선에서 국제분쟁 조정에 이르는 카터의 광범위한 활동의 중요한 성과 한 가지가 1994년의 ‘북핵위기’ 해결이었다.

 

두 가지 인연이 1994년 카터의 북한문제 개입을 도와주었다. 6월 15일 평양 도착 후 제일 먼저 만난 김영남 외교부장이 “우린 그때부터 각하가 좋았더랬습니다.” 하며 호감을 표했다고 한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 271쪽) 카터가 대통령 재임시 추진한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가리킨 말이다. 미국 정치인 중 북한 지도부의 가장 큰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이 카터였다. 김일성은 여러 해 전부터 카터의 평양 방문을 청하고 있었고, 카터도 1993년부터 평양 방문의 뜻을 표명하고 있었다.

 

그보다 더 공교로운 또 하나의 인연은 당시 주한대사 레이니를 통한 것이었다. 신학자로서 에모리대학 총장을 오래 지낸 레이니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한국과 깊고 넓은 인연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레이니는 총장 시절인 1982년 카터센터를 에모리대학에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카터와 개인적 친분을 맺고 있었다. 카터가 평양으로 향하게 된 경위를 위트-폰먼-갈루치는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는 한반도, 핵무기, 그리고 개인차원의 외교 등에 모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대통령 재임 시에 거의 독단적으로 주한미군의 철수에 나섰다가 결국은 포기해야만 했다. 또 1978년 개인외교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화해에 성공한 캠프데이비드 정상회의 이후에는 김일성과 박정희와의 3자회담을 비무장지대에서 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그 제안으로 인해 정부에서는 그야말로 거의 난리가 났었다. 그러나 핵기술에 관한 한 그는 거의 전문가였다. 그 스스로 원자력공학을 전공했었고 미국 해군의 원자력화에 성공한 신화적인 하이먼 릭오버 제독 휘하에서 잠수함병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핵이라면 치를 떨었다.

 

카터 대통령이 임기 중과 퇴임 후에 한 여러 가지 활동은 북한과 코드가 맞았다. 김일성은 그를 ‘의인’이라고 부르며 카터 행정부 초기 여러 경로를 통해 그와 접촉하려고 노력했었다. 1981년 초 카터 대통령이 퇴임하고 국제분쟁의 해결사로 나서자 이후 북한은 해마다 카터센터에 초청장을 보냈다. 첫 번째 초청장이 왔을 때 부시 행정부는 그를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 그 다음 해에는 그의 보좌관만 갔다. 1993년 2월 카터는 또 다시 초청장을 받았지만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핵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그 이후에도 북한은 세 번씩이나 초청을 거듭했지만 매번 거절당했다.

 

1994년 봄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는 카터 전 대통령으로 하여금 뭔가 해야만 한다는 확신을 주었다. 그 해 5월 짐 레이니 주한 미대사가 샘 넌 의원과 리처드 루가 의원의 방북을 주선한 후 아틀란타로 날아왔다. 카터센터가 위치한 에모리대학교의 총장을 지내기도 한 레이니 대사는 카터 전 대통령의 오랜 친구였다. 그는 카터 전 대통령을 만나 일역을 맡으라고 촉구했다. (...) 카터의 주목을 특히 끈 것은 “이 위기를 진정시켜 제2의 한국전쟁을 막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김일성과 직접 통신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레이니 대사의 회동 후 6월 1일 카터 전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하여 우려를 표명했다. 곧 갈루치가 전 대통령에게 브리핑을 하러 날아갔다. (<북핵위기의 전말> 246쪽)

 

카터의 평양 방문은 ‘개인 자격’이었다. 미국 정부로부터 아무런 공식 위임을 받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입장이 클린턴 행정부와 다른 것인지 여부가 언론의 관심을 모았다. 카터는 김일성과의 회담이 끝난 후 정부를 대표해 그에게 브리핑을 해줬던 갈루치에게 전화해서 회담 내용을 간략하게 얘기해준 다음 바로 CNN과 인터뷰할 것이라고 알렸다. 정부 입장을 듣지 않고 바로 방송으로 자기 생각을 발표한 것이었다.

 

[주한미군 증강 방침을 의논하는 외교-국방 장관급] 회의는 이미 한 시간 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때 대통령의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 평양에서 카터 전 대통령이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의자를 뒤로 밀 때 비서가 얼른 카터가 통화를 원하는 것은 갈루치라고 말했다. 갈루치는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으로 갔다. 수화기를 드는 순간 갈루치는 카터의 독특한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카터는 김일성이 사찰단의 잔류를 허용할 의향이 있다고 하면서 대신 대화를 재개하고 제재를 철회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옆방에 모여 있다고 전하면서 갈루치는 대답했다. “저의 생각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카터는 대통령이 결정을 내리면 자신에게 전화해서 알려달라고 했다. 갈루치는 워싱턴에서 평양으로 전화를 할 방법이 없으므로 다시 전화를 해달라고 했다. 근 20분에 달한 통화가 끝날 무렵 카터는 갑자기 생각난 것과 같은 말투로 곧 CNN에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통화가 끝난 후 갈루치는 회의실로 돌아와 통화내용을 애써 정확히 전달했다. 가장 먼저 나온 질문은 그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안보보좌관 토니 레이크가 먼저 물었다. “자네, CNN에 나가지 말라고 말했겠지, 아닌가?” 아니라고 갈루치가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렇게 말했어도 들을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변명하듯 말했다. 갈루치 옆에 앉아 있던 크리스토퍼가 다시 물었다. “좌우간 하지 말라고 말이나 했나?” 갈루치는 다시 아니라고 대답했다. 싸늘한 침묵이 흘렀고 갈루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

 

[잠시 후 연 기자회견 말미에] 대통령이 자리를 뜬 후 갈루치가 세부사항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갈루치는 극도로 말조심을 했다. “카터 대통령이 받은, 북한이 북한과 국제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에 대해 건설적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는 조짐”을 환영한다고 했다. 첫 질문은 뒤쪽 멀찌감치에서 나왔다. “당신은 카터 대통령이 CNN에 나가 자신이 한 거래를 설명하는 것을 말리려고 하지 않았나요?” 잠시 망설인 끝에 갈루치는 그러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 간단한, 그러나 사실인 대답에 따라 카터와 클린턴 사이에 불화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잠시나마 진정되었다. 갈루치의 실수가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북핵위기의 전말> 278-281쪽)

 

카터가 평양에 있는 동안 미국 행정부와 전직 대통령 사이는 불편한 것으로 보였다.

 

한국 측을 어느 정도 안심시킨 후 백악관이 할 일은 카터를 통제하는 일이었다. 구체적으로 카터의 기자회견에 대한 백악관의 반응을 설명하고 카터로 하여금 더 이상 미국정부의 정책과 어긋나는 행동을 취하지 못하도록 했다. 전직 대통령에게 그 정도의 말을 하려면 갈루치 정도로는 부족했다. 안보보좌관인 토니 레이크가 적격이었다.

 

평양에 미처 새벽이 오기 전에 카터와의 전화가 연결되었다. 카터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미국정부의 입장에 대한 레이크의 설명을 듣고 나서 강하게 반발했다. 북한에게 연료봉의 재장전과 사용 후 연료봉의 재처리를 하지 말라는 것은 씨도 먹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게다가 김일성과 강석주에게 재처리는 NPT체제에서 허용된다고 벌써 말했는데 그것을 어떻게 취소하느냐고 했다. 그리고 제재를 계속 추진하는 것도 반대했다. 북한이 도청하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는 이 통화는 매우 냉랭하게 진행됐다. 통화가 끝난 후 카터는 크게 낙담한 표정이었다. (<북핵위기의 전말> 283쪽)

 

카터의 전화가 왔을 때의 회의장 모습을 오버도퍼도 적대적인 분위기로 그렸다.

 

갈루치의 전갈이 전해지자 각료실은 폭탄을 맞은 듯 발칵 뒤집혔다. 사찰단의 체류 허용을 빼면 사실 카터가 거둔 성과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카터 전 대통령의 CNN 즉석 회견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자아냈다. 1년 이상을 끌어온 문제에 관해 중대한 결정을 내리려는 와중 그런 소식은 행정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중 한 참석자는 카터의 처신을 ‘매국행위’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제재와 병력 증강의 ‘방아쇠를 막 당기려는 순간’ 북한이 들고 나온 지연전술일지도 모른다고 우려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클린턴과 고어 부통령은 덮어놓고 카터를 비난하기보다는 실질적 대응책을 모색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두 개의 한국> 483쪽)

 

이 문제에 계속 관여해 온 퀴노네스도 비슷한 분위기로 파악했다.

 

처음에 워싱턴 관리들은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과 성공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전에 그랬던 그대로 외교정책을 담당하는 중요한 관리들(국가안보회의의 토니 레이크, 샌디 버거, 댄 폰먼, 국무부의 보브타노프 차관, 보브 갈루치 차관보)은 떨떠름해하며 회의감을 표했고, 세부사항을 놓고 왈가왈부했다. 1993년 8월 이후 그들이 추구해 온 것(핵동결, 남북회담)이 달성됐는데도 관리들은 이를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한반도 운명> ?쪽)

 

인용한 세 권의 책 모두 당시 미국 관리들의 반응을 면밀하게 관찰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카터의 방북에 기대를 걸기보다 불안한 마음으로 마지못해 허용했다는 점, 미국 정부와 카터 사이의 연결을 갈루치 한 사람만이 맡았다는 점, 김일성과의 회담 후 카터가 전화로 알려준 내용을 정부 관리들이 반가워하지 않았다는 점, 카터의 일방적인 CNN 회견에 관리들이 분노하거나 당황했다는 점 등이 공통된 내용이다.

 

정황으로 볼 때 이런 모습이 모든 사실을 담은 것인지 의심이 든다. 카터와 클린턴 사이에 국무부 차관보 갈루치 외의 다른 교감 통로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카터의 역할로 인해 미국의 대북정책에 획기적 전환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럴 가능성을 정부 수뇌부가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다가 카터의 일방적 발표에 떠밀려 그런 정책 전환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김일성의 태도에 따라 그런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다는 ‘예비 시나리오’ 정도는 마련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추측일 것이다. 감정을 억제하고 현실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클린턴 대통령과 고어 부통령의 의견에 따라 카터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시늉이라도 하게 되었다는 오버도퍼의 설명이 이 추측에 부합한다.

 

이런 예비 시나리오가 있었을 경우 있는 그대로 밝히기 어려운 사정이 여러 가지 있었다. 첫째, 남한의 김영삼 정권이 순순히 받아들였겠는가. 북한과의 ‘포괄적 협상’에 반대하기 위해 1993년 11월 정상회담에서 외교 관행을 벗어나는 ‘행패’를 벌인 김영삼이 북한을 이렇게 쉽게 풀어주는 것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카터가 ‘남북정상회담’이라는 큼직한 선물을 만들어줬기 때문에 김영삼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런 선물을 확보해 놓기 전에 북한과의 협상 가능성을 알려줬다면 김영삼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상상해 보라.

 

둘째, 대북정책의 전환은 일관성 결여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제1차 ‘북핵위기’는 북한이 피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는데도 미국이 마구잡이로 몰아붙여 조성한 것인데, 막상 파국이 시야에 들어오자 전쟁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더구나 중간선거가 닥쳐 있었다. 선거를 앞두고 유화책으로 돌아선다는 것은 미국에서 엄청난 정치적 손해다. 카터를 앞세워 어쩔 수 없이 정책을 바꾸는 것처럼 눈가림이라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클린턴의 민주당은 중간선거에서 참패를 겪게 되는데, 나약한 대외정책이 주요 패인의 하나로 꼽혔다.

 

카터와 클린턴 사이에 모종의 ‘짬짬이’가 있었다는 추측을 확인할 만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그러나 향후 진행을 살핌에 있어서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Posted by 문천

 

고등학생 독자들과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밖에서 본 한국사>(2008)와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를 쓸 때 내가 생각한 표준적 독자는 중등학교 역사 선생님들입니다. 고등학생에게는 어려운 책이죠. 그런데도 여러분이 읽어주었다는 것이 고맙고 반가운 일인데, 혹시라도 소화에 어려움이 있다면 오늘 같은 기회에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예컨대 ‘합리주의’ 같은 것이 소화에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두 책에서 나는 합리적 해석의 확장에 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은 세상을 보는 것도, 역사를 보는 것도 합리적 이성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이성과 감정이 함께 작용하죠. 어느 한 쪽에 지나치게 의존하려 들면 안정된 자세를 취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나는 동아시아의 전통을 해석하는 데 감정적 측면, 즉 주관적 정체성에 비중을 더 두려고 노력합니다. 서구식 학문방법이 합리성에 너무 치우치면서 동아시아 전통의 주관적 정체성을 경시하는 폐단이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전통의 가치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서구식 학문방법에서 인정되지 않는 독자적 기준을 적용할 필요가 있고, 그런 기준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주관적 입장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역사를 서술하는 데서는 합리성을 강조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주관적 기준이 너무 지배적으로 적용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독도는 우리 땅!” 외치며 일본 욕하는 한편으로 “만주도 우리 땅!” 외치는 독단적-배타적 민족주의가 횡행하는 바탕에는 국사 서술의 합리성 부족이라는 문제가 깔려 있습니다.

 

한국사 서술의 비합리성에 대한 책임을 ‘민족주의’에 지워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민족주의를 극복 대상으로 보는 ‘국사 해체’ 주장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비합리성을 이유로 민족주의를 등진다는 것은 공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식을 버리겠다는 것과 같은 무책임한 태도라고 나는 봅니다. 공부 잘하도록 도와줄 여지가 있는데도 말이죠.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민족주의에는 합리성을 늘릴 여지가 너무나 많이 있다고 나는 보았기 때문에 역사 서술의 합리성 확장에 노력을 기울인 것입니다.

 

‘세계화’의 시대에는 어차피 민족주의를 ‘졸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150년 전 대원군이 척화비를 열심히 세울 때와 비교하면 국경이란 것이 거의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그렇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중요성이 그 동안 크게 줄어들었고, 앞으로도 계속 줄어들 것이 예상됩니다.

 

하지만 세월만 보냈다고 졸업이 됩니까? 학점을 따야죠. 민족국가를 제대로 회복한 다음에는 세계 변화에 맞춰 (유럽국들처럼) 민족국가의 중요성을 줄여나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참혹한 분단 상태를 그대로 둔 채 민족주의를 내다버린다는 것은 팔다리가 부러져 있는 채로 요가를 따라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애물단지”라는 말을 노인들이 많이 하죠. 애정 때문에, 책임 때문에 고통을 감수해야 할 대상이란 말입니다. 나는 민족주의를 우리 사회의 애물단지로 생각합니다. 많은 고통을 주지만, 잘 키워내기만 하면 다른 데서 얻을 수 없는 보람을 가져다 줄, 운명으로 주어진 우리 자식과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Posted by 문천

 

임 병장 사건, 윤 일병 사건으로 심란하다 보니 근 40년 전에 마주쳤던 한 사람이 생각난다.

 

X사단 의무대에서 서O삼은 내 넉 달 위 고참이었는데, 나이는 몇 살 아래였다. 석사까지 마치고 늦게 군대를 가니 왕고참 중에도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는 묘하게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공고 졸업하고 직장 다니다가 왔다는데, 어찌 보면 무척 순진한데 또 어찌 보면 매우 노숙한 인상이었다. 졸병에게 손찌검을 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당시 군대에서는 희귀종이었다. 그 대신 말로 갈구는 솜씨는 여간 아니었다.

 

제대를 몇 달 남겨놓고 뜻밖에 같은 부서에서 일하게 됐다. 취사반. 다루기 힘든 사병을 취사반으로 보내는 풍속이 있었다. 서 병장은 일찍부터 수송부에서 튕겨져 취사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나도 부당한 ‘전원 얼차려’에 항의하다가 행정실에서 쫓겨나 뒤늦게 취사반 보직을 받았다. 서 병장, 기가 막혔을 거다. 콩나물 씻을 줄도 모르는 책상물림을 데리고 일하라니.

 

그래도 금세 상대방의 유머감각에 익숙해지면서 편하게 어울려 지냈다. 한 달쯤 지났을까, 어느 날 한가하고 조용한 시간에 서 병장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한다. “나이 많고 배운 것 많은 김 병장이 내 졸병이라는 사실이 나는 무척 기분 좋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서 병장이 정색하고 장난을 걸 때는 훈련소 식으로 응대해야 한다. 발딱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했다. “넷, 병장 김기협! 저도 나이 적고 배운 것 적은 서 병장님이 제 고참님이라는 사실이 무척 기분 좋습니다!” (서O삼의 정식 계급은 상병이었고 소위 '마에가리' 병장이었다. 당시 현역병의 절반가량은 병장으로, 절반가량은 상병으로 전역했다. 하지만 짬밥 적은 병장이 고참 상병에게 정식 계급 따지는 것은 확실한 자살행위였다. 정식 계급보다 짬밥 수를 존중하는 것은 훌륭한 미풍양속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내가 명령을 하면 뭐든지 들을 거지?”

 

“넷, 거시기로 밤송이를 까라면 까겠습니다!” 주변에 밤송이가 없어서 거침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내가 명령이 아니라 부탁을 해도 들어줄 건가?”

 

“넷, 들어 드릴지 말지 열심히 생각하겠습니다!” 흠~ 그냥 장난이 아니로구나.

 

뭘 부탁하겠다는 걸까? 연애편지를 대필시킬 사람도 아닌데.(내 글쓰기는 군대에서 처음으로 연마의 기회를 얻었다.) 결국 서 병장이 꺼낸 부탁이 대필은 대필인데, 나도 처음 써보는 종류의 글이었다. ‘소원수리(訴願受理)’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너덜너덜한 수첩 하나를 꺼내서 보여주는데, 깨알 같은 글씨로 온갖 ‘비리’가 가득 적혀 있었다. 간부들이 취사장에서 식품재료 빼간 것이 대부분인데, 라면 하나 끓여먹은 것 같은 소소한 일까지 적어놓았다. 그중 심각한 것이라도(쌀가마 실어낸 것 같은) 당시 군대에서는 모두 ‘관행’의 범위에 들어가는 것이라서, 설령 ‘재수 없게’ 걸리더라도 감봉 처분 정도나 될까?

 

말 길게 하는 것을 싫어하는 서 병장이 그날은 설명을 길게 했다. 별 것 아닌 일들 같지만, 이런 관행 때문에 졸병들이 먹는 것까지 부실하게 된다, 김 병장처럼 집이 넉넉한 사람에겐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가난한 졸병들에겐 절박한 문제라는 것이었다. 잘못된 관행을 고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을 적어놓는 것뿐이었는데, 이제 제대를 코앞에 두고 보니 소원수리 작성하는 일이 자기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라며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끝으로 오금을 박았다. “이건 명령이 아니니까 도와주기 싫으면 안 도와줘도 돼. 김 병장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수첩은 버릴 거야. 그리고 김 병장을 영원히 미워할 거야.”

 

그 부탁을 안 들어줬다가는 미움만이 아니라 경멸까지 받을 것 같았다. 1주일에 걸쳐 A4용지 10여 장을 빽빽이 채우는 동안 우리 두 사람은 많은 토론을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돕는 입장을 지키되 그가 이 집념을 버리도록 설득하려 애썼다. 헛된 노력이었다. 설득당할 사람이라면 수첩을 그렇게 채워놓았을 리가 없지. (나는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었다. 그의 성실성이 존경스러웠고, 그런 일을 내게 털어놓는 내 사람됨에 대한 믿음이 고마웠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게 큰 믿음을 받아본 일이 많지 않다.)

 

‘인간적’인 기준에서 이해할 만한 일까지 다 집어넣을 필요가 있겠냐는 내 문제 제기에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자기는 심판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규정’에서 벗어난 일이라면 크기 여하, 동기 여하에 관계없이 아는 대로 다 적어놓고, 심판은 심판할 사람들에게 맡긴다는 것이었다. 적혀 있는 사람들 중에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데, 자기 호오에 관계없이 눈에 띈 문제는 모두 적었다고 했다.

 

서 병장이 마지못해 받아들인 내 주장 단 한 가지는 너무 작은 일들을 뺀 것이다. 라면 한 주머니(5개) 가치를 기준으로 했다. 소소한 것까지 다 넣으면 너무 길어져서 서 병장님 제대 전에 다 못 쓰겠다고 버텼는데, 실인즉 읽는 사람이 쓴 사람을 정신병자로 여기면 기분 나쁠 것 같아서였다.

 

서 병장 제대 며칠 전에 마지막 정기휴가를 나왔다. 그가 보충대에서 나오는 날 용산역에서 약속했던 대로 만났다. 내가 써준 소원수리서를 꺼내 들더니 씩 웃고 말한다. 스스럼없이 경어를 쓴다. “지금이라도 나한테 미움 받고 싶으면 이것 버리라고 말하세요. 버릴게요.” 나는 씩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원수리함에 넣은 다음 악수하며 그가 말했다. “김 병장님 덕분에 군대생활을 제대로 마쳤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헤어지고 37년, 다시 보지 못했다.

 

그와 헤어지고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행정관이 헐레벌떡 취사장으로 달려와 내 손을 붙잡고 행정실로 끌고 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보안부대원 같아 보이는(사병은 사병인데 머리가 길고 영양상태가 좋고 눈매가 날카롭고 사복 입은) 청년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오자 달랑 지프차에 태워 헌병대로 향했다. 헌병대에 가자 대장실로 끌고 들어갔다. 헌병참모는 방에 없고 비슷한 행색의 조금 더 나이들어 보이는 청년 하나가 있었다.

 

내게 겁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말도 경어를 썼다. 자리에 앉자 서 병장의 소원수리서를 꺼내 보여주며 본 적 있는 물건이냐고 물었다. 내 손으로 쓴 것이라고 하니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한 후 진술서를 써달라고 했다. 한 시간도 안 돼 일이 다 끝나자 그들은 일을 쉽게 해준 내게 고마워하는 기색까지 보였다.

 

부대에 돌아오니 간부들이 내게 말을 걸지 않으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병들도 덩달아 나랑 마주치는 것을 조심했다. 가까운 졸병 하나가 눈길은 다른 곳으로 둔 채 조용히 한 마디 해준다. “CID였대요.” 우와~ 전설처럼 듣기만 하던 그 무시무시한 CID?

 

당직사관에게 더플백 싸라는 말을 들었다. 이튿날 아침 사단 예하 Y연대 의무중대로 전출되어 갔다. 앰뷸런스에서 내리는데 최 병장이 행정실에서 나오다가 나를 보고 묻는다. “사단에서 전입병이 있다고 들었는데 김 병장님이 인솔해서 왔어요?” 바로 내가 전입병이라고 하니까 기절할 듯 놀란다. 사단 의무대에 들를 때 박절하게 굴지 않았기를 천만다행이다. 그 날 내무반에서 신고식 대신 환영파티가 있었다. 사단에 볼일 보러 다니던 고참 행정병들이 부랴부랴 돈을 모아 마련해준 자리였다. 나는 하룻밤 동안 Y연대 의무중대 최고참병 노릇을 했다. (상-하급 부대 사이에는 갑을관계가 있어서 상급부대에 볼일 보러 다니는 것이 하급부대원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 내가 특별히 해준 게 없어도 일부러 괴롭히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는 보살님이었다. 게다가 CID까지 등장하는 파란만장한 활극의 여파로 말년 전출을 당했으니, 그들은 나를 보호해 주는 데서 큰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중대장은 군의관 중에 드문 터프가이였다. 다음날 나를 불러놓고 간단명료하게 얘기한다. “나는 네 말년 생활을 최대한 편안하지 못하게 하라는 부탁을 받고 있다. 그래서 너를 내 눈에 안 보이는 곳에 보내려 한다. 불만 있나?” “없습니다!” 민통선 안에 배치되어 있던 Z대대의 의무지대로 그 날로 파견나갔다.

 

지대장인 군의관은 히죽히죽 웃으며 신고를 받고는 “김 병장 여기서 보니 반갑구먼. 사고만 치지 말고, 소원수리만 쓰지 말고, 우리 아이들이랑 잘 지내게. 아 참! 자네에게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완전군장 구보를 시켜주라는 누군가의 부탁이 있는데, 내가 직접 살펴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게.” 하는 것이었다.(군의관들이 같은 연배였다. 고교 동창인 차O용 중위가 이웃 대대에 지대장으로 있었다.) 군대생활 33.5개월 중 가장 평화로운 두 달 가까이를 그곳에서 보내고 제대를 맞았다. (윤 일병 근무처도 그런 종류의 의무지대였던 모양이다. 붙어 있는 부대의 통제를 받지 않고 본대는 멀리 떨어져있다는 조건이 내게는 평화를 보장해 줬는데, 자칫 잘못 돌아가면 조그만 '지옥'을 만들 수도 있는 조건이다.)

 

알고 지내던 사단본부 행정병 하나가 몇 달 후 전화를 걸어 뒷일을 얘기해 줬다. 의무대 간부 몇 사람이 징계처분을 받았다는 얘기에 이어 ‘지휘서신’ 얘기를 했다. 참모총장이 육군 전 부대장 앞으로 보내는 지휘서신에서 서 병장의 소원수리에 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그런 불미한 일이 없도록 주의를 촉구했다는 것이었다. 비리가 없도록 하라는 뜻인지 소원수리가 없도록 하라는 뜻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서 병장이 군복무를 제대로 해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977년, 유신시대의 일이다. 군대만이 아니라 온 나라가 감옥일 때였다. 군대에서 미움 받을 짓을 할 경우 제대한 후라 해서 불이익의 염려가 없다는 보장이 없을 때였다. 분노할 일이 있어도 “군대는 그때뿐이야.” 하면서, 당할 때는 참고 당한 후에는 잊어버리는 군대 상식에서 벗어난 서 병장, 이제 생각하니 뭔가 불이익을 당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참모총장 각하께서 신경 쓸 짓을 저지르다니, 그 시절에.

 

그때에 비하면 군대가 “많이 좋아진” 것을 안다. 복무기간도 크게 줄었고 시설과 보급이 좋아졌을 뿐 아니라 야만적인 관행도 많이 사라진 것으로 안다. 언론보도만이 아니라 주변의 자제들 경험을 들어도 확실히 변했다. 봉급이 몇 십 배 늘어나는 동안 억울한 일은 몇 십 분의 1로 줄어들었으리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도 연이어 터지는 사건들을 보면 군대의 본질에는 변화가 없는 것 같으니 어찌된 일일까. 극한상황에 몰리는 사병의 숫자는 40년 전에 비해 몇 십 분의 1로 줄어들었으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줄어들어서 되는 일인가? 없어져야지.

 

얼마 전 징병제에 관한 생각을 적은 일이 있다. (“보이는 피도 아깝지만 보이지 않는 땀도 아깝다”) 징병제 군대의 야만적 체질은 구성원들의 ‘노예’ 상태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생활과 생명을 강제로 군대에 맡겨놓은 청년들에게는 자기가 속한 사회에 대해 책임지려는 마음이 있어도 그럴 길이 없다. 군대를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희생정신을 발휘하는 서O삼 병장 같은 ‘의인’은 도와준 내 눈으로 보기에도 ‘미친 놈’이다.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민주국가가 되려면 징병제가 폐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줄줄이 터져 나오는 사건들을 보면 징병제 폐지 전이라도 뭔가 시급한 조치가 필요하다. 억지로 끌려온 병사들이더라도 자기가 속한 사회를 바로잡고 잘 운영하도록 애쓸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겉보기 개혁에도 불구하고 군대의 야만적 본질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 개혁이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위에서 주어진 시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적 방법은? 어떤 문제든 당사자들이 자유롭고 편안하게 지적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면 된다. 폐쇄성이 지적되고 있는(“또 다른 윤 일병 사건도 '원님 재판' 할 건가”) 군 사법제도를 비롯해서 권위주의 시대에 굳어진 제도와 관습을 전면적으로 바꿔야 한다.

 

37년 전 서O삼 병장이 이용한 ‘소원수리’만 해도, 활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면피를 위해 운용하는 제도다. 군대 간 사람은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정확한 뜻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검색해 보니 <군사용어사전>(일월서각 펴냄)에 “불법 부당한 행위로 인한 피해에 대한 구제요구 및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한 시정요구를 건설적인 부대운용을 위해 검찰관이 받아서 처리하는 행위”로 나와 있다고 한다. 검찰관에게 제출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도 이제 알았다.

 

활발한 이용을 위해 운용되는 제도라면 ‘소원수리’라는 암호 같은 이름을 지금까지 쓰고 있을 리가 없다. ‘신문고’라든지 ‘고발장’이라든지 '청원서'라든지 뜻을 알아보기 쉬운 이름을 얼마든지 찾아 쓸 수 있지 않은가. 자기정화 기능을 갖췄다는 구색을 위해 ‘petition hearing’ 제도를 베껴오면서, 정말로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는 노력이 너무나 없었다. 박사과정에 등록해 놓고 군대에 갔던, 사병으로서 최고학력자라 할 수 있는, 그리고 서 병장과의 인연으로 ‘소원수리’ 제도에 접해 봤던 나도 그것을 누가 받아보는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건드렸다가는 득을 보기보다 다치기가 훨씬 더 쉬운 제도라고 지금까지도 알고 있다. (얽혀든 나까지 제대 두 달 남겨놓고 '말년 전출'을 당하지 않았는가. 말년 전출은 사병에게 악몽이다. 전입부대의 고참병과 군의관들이 감싸주지 않았다면... 임 병장 일이 남의 일 같지 않다.)

 

군대가 정말 이대로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면 군 당국에게 제안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다. 서O삼 병장을 찾아내 국가유공자로 보훈처에 추천하라. 그 외에도 공익을 위해 소원수리서를 제출한 것으로 인정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포상하라.(대필한 사람도 포상하라.) ‘소원수리’를 이용하더라도 아무런 불이익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합리적으로 처리되리라는 믿음을 군대에 끌려가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라. 장교-하사관의 태반이 ‘인간적으로 이해가 가는’ 정도의 잘못으로 징계를 당할 만큼 이 제도가 활발하게 이용되어야 군대의 체질에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 “뼈를 깎는 반성”을 말하지 말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