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 중에 에멜린 팽크허스트(1858-1928)가 끼어 있다. “우리 시대 여성의 의미를 빚어낸 인물. 인류사회에 되돌릴 수 없는 형태의 변화를 이끌어냈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팽크허스트는 여성참정권연맹(WFL, 1889)을, 그리고 여성사회정치동맹(WSPU, 1903)을 만들어 영국의 여성참정권운동을 이끌었다. 1918년과 1928년의 선거법 개정을 통해 영국에 여성참정권이 확립되는 데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인물로 기억된다. (1918년의 개정은 21세 이상의 남성과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세계대전 때문에 남성 인구가 적은 상황을 감안해 잠정적으로 남녀간의 차이를 둔 것이다. 1928년의 개정으로 21세 이상의 모든 남녀가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팽크허스트의 그늘에 가려질 듯하면서도 눈에 띄는 또 한 사람이 있다. 팽크허스트의 동생인 메리 제인 클라크(1862-1910). 언니 팽크허스트와 함께 WSPU 활동을 하다가 1910년 11월 상점 유리창을 깨트린 죄로 체포되었다. WSPU는 파괴활동을 장려하는 적극적 투쟁노선을 취했고, 체포된 투사들은 단식투쟁을 벌이는 일이 많았다. 클라크는 단식투쟁에 참여하다가 강제급식을 당했는데, 12월 23일 응급상태에서 석방되고 사흘 후 숨졌다. 무리한 강제급식이 사망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강제급식은 영국 교정당국이 수감자의 단식투쟁에 대응하는 통상적 방식이었는데 클라크의 죽음으로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 때문에 1913년 ‘건강위험수감자 일시석방법’이 만들어졌다. 단식을 강제로 금지하지 않고, 건강이 위험해지면 석방했다가 충분히 회복되었을 때 재수감한다는 정책이었다. 이 법에는 ‘고양이와 쥐 법’이란 별명이 붙었다.

 

영국의 여성참정권운동가들이 시작한 20세기 단식운동의 전통을 넘겨받은 것은 당시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아일랜드와 인도의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인도 하면 얼른 간디가 떠오르는데, 그보다 우리 사회에 덜 알려진 아일랜드 이야기부터 하고 싶다. 20세기 아일랜드 역사에서 단식투쟁이 매우 큰 의미를 차지하기 때문에, 기독교 전래 이전의 고대 아일랜드 문화와 풍속에서 그 뿌리를 찾기도 한다. 불의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항의 대상자의 집 문 앞에서 단식을 행하는 풍속이 널리 존재했다는 것이다.

 

1920년을 전후해 많은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이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벌였고 여러 사람이 죽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이 테렌스 맥스위니(1879-1920)였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맥스위니는 1913년부터 독립운동에 참여, 여러 번 체포당했다. 1918년 아일랜드의회(Dail Eireann) 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 중 1920년 3월 고향인 코크 시장으로 있던 친구 토머스 매커튼(1884-1920)이 변장한 경찰대에게 암살당한 후 후임으로 뽑혔다. 그 해 8월 선동 문건과 암호용 난수표 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잉글랜드의 브릭스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체포 직후부터 단식을 시작한 맥스위니는 69일째인 10월 20일 혼수상태에 빠지고 닷새 후 죽었다. 혼수상태에 빠지기 직전에 있었던 당국의 강제급식 시도가 죽음의 직접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저명한 지식인 맥스위니의 탄압은 영국 정책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전 세계적 항의를 불러 일으켰다. 미국에서는 영국 상품 불매운동이 일어났고, 남아메리카의 4개국 원수가 교황의 개입을 공동으로 청원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항의 시위가 있었다.

 

맥스위니의 영향이 가장 크게 나타난 곳이 인도였다. 그가 죽은 이듬해 나온 책 <자유의 원리들>(Principles of Freedom)은 영어로 읽히는 것으로 모자라 여러 인도 토착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도 깊은 경의를 표했고 좌익 독립운동가로 국민적 영웅인 바가트 싱(1907-1931)도 맥스위니의 숭배자였다. 싱은 1929년 116일간의 옥중 단식을 강행했는데, 아버지가 중단을 권할 때 맥스위니의 말을 인용해 응답했다고 한다. “내 석방보다 내 죽음이 대영제국의 분쇄에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당시 런던에 있던 20세의 베트남 청년 응우옌 아이 쿠옥(호치민)도 이런 말을 남겼다. “저런 시민을 가진 민족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맥스위니를 비롯한 아일랜드 투사들의 단식투쟁이 동양인들에게 특히 큰 반향을 일으킨 까닭이 무엇일까. 단식투쟁에는 ‘자살’의 의미가 부분적으로 들어 있다. 이 의미가 서양보다 동양에서 더 쉽게 받아들여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16세기 말 중국에서 활동한 이탈리아인 선교사 마테오 리치(1552-1610)의 이런 기록이 있다.

 

“더욱더 야만적인 풍습은 자살을 하는 것인데,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거나 큰 불행을 이겨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것보다도 더욱 어리석고 더욱 비겁한 동기는 미워하는 사람을 골탕먹이기 위해 제 목숨을 끊는 일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해마다 몇 천 명의 사람들, 남자들만이 아니라 여자들까지,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공적인 장소나 증오하는 상대의 집 문 앞에서 목을 매다는 것이 가장 흔한 방법이다. 그밖에는 강물에 뛰어들거나 독약을 먹는 것이 많이 쓰이는 방법이며, 이유는 별별 사소한 것들이 다 있다.” (Matthew Ricci(L. Gallgher tr.), <China in the Sixteenth Century> p. 87)

 

기독교에서는 자살을 신의 섭리에 대한 저항이라 하여 일찍부터 죄악시했고, 유럽에서 근세까지 자살을 범죄시한 것도 그 영향으로 보인다. 유태교와 이슬람교 같은 다른 유일신교에도 비슷한 관점이 보인다. 동양의 주요 사상이나 종교에서는 자살을 부정적으로 보지도 않고, 설령 부정적으로 보더라도 죄악으로까지 보지는 않았다. 1960년을 전후한 베트남 승려들의 연이은 분신자살은 동양인보다 서양인들에게 훨씬 더 큰 충격을 줬다.

 

아일랜드 투사들 중에는 확고한 자살 의지를 갖고 단식에 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의 죽음이 대영제국의 분쇄에 더 도움이 되리라고 한 맥스위니의 말도 그런 뜻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살의 방법으로 단식을 택한 것은 가톨릭신자로서 정체성과 함께 항의의 뜻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죽음에 이르는 결정적 책임을 영국 당국에게 맡기는 방법이었다.

 

단식의 첫 며칠은 체내의 글루코스(포도당 등)에서 에너지를 얻기 때문에 몸에 큰 변화가 없다. 며칠 후면 체지방 분해가 시작되면서 케톤체가 혈액 중에 증가하는 케톤증(ketosis)이 일어난다. 여기까지는 건강한 사람의 경우 쉽게 회복할 수 있는 일시적인 문제다. 그런데 약 20일이 지나면 근육과 장기의 세포를 파괴해 에너지를 얻는 ‘기아 상태’로 들어선다. 이 단계의 신체 손상은 회복하기 어렵고 건강한 사람이라도 생명의 위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별한 체질이 아닌 보통사람은 50일에서 70일 사이에 목숨을 잃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가트 싱의 116일 외에는 100일을 넘는 단식이 확인된 예가 없다.

 

항의방법으로 단식투쟁이 널리 채택된 것이 황혼기의 대영제국에서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권운동가도 아일랜드와 인도의 독립운동가도 대영제국 내의 마이너리티를 대표하는 입장이었다. 체제의 전복 대신 여론에 호소함으로써 당국의 각성을 촉구하는 항의방법을 그들이 택한 것은 막강한 물리력을 가졌으면서 여론에 약한 체제의 특성에 맞춘 것이었다.

 

단식투쟁은 ‘투쟁’이란 말이 어색할 정도로 비폭력적인 항의방법이다. 그러면서도 더 없이 결연한 의지를 담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론 환기에 효과적인 방법이다. 여론이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는 20세기 후반의 정치 환경에서 자살, 테러 등 극단적 표현방법이 널리 채택되는 가운데, 단식은 ‘소통’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온건한 표현방법이다.

 

단식투쟁은 ‘투쟁’이란 말이 어색할 정도로 비폭력적인 항의방법이다. 그러면서도 더 없이 결연한 의지를 담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론 환기에 효과적인 방법이다. 여론이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는 20세기 후반의 정치 환경에서 자살, 테러 등 극단적 표현방법이 널리 채택되는 가운데, 단식은 ‘소통’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온건한 표현방법이다.

 

40일째 단식을 이어온 김영오 씨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단식도 중단한다는 말을 함께 들었는데, 이제 보니 병원에 가서도 단식 계속을 고집하고 있다고 한다. 그분의 뜻이 이뤄지기 바라는 마음보다 이제 단식을 빨리 거두기 바라는 마음이 더 바빠진다.

 

그분이 바라는 특별법이 그리 별난 것이 아니라고 보지만, 대한민국 정치권은 그 정도 당연한 일도 제대로 해낼 능력이 없는 것 같다. 그러면 그분이 결국 목숨을 잃어야 하나? 특별법 없이도 단식을 중단시킬 수 있는 길이 없을까?

 

무능한 정치권이 때 맞춰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더라도, 그분의 뜻을 이 사회가 널리 이해하고, 그 실현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는 데 한 가닥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 인사들이 그런 믿음을 등지는 망언을 툭툭 던지고 있지만, 신경 쓸 필요 없다. 원래 그런 동네라고 치부하면 된다. 종교계든 정치계든 모든 사람들이 김 씨 등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믿음을 키워줄 수 있는 표현방법을 열심히 찾아야 한다. 그 몫을 문재인 의원이 열심히 찾고 있는 것이 고맙다.

 

박근혜는 언젠가 어느 대통령을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한 일이 있다. 대통령 역할을 잘못하는 것으로 본다면 “나쁜 대통령”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박근혜를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다. “참 나쁜 인간”일 뿐이다. 대통령 역할을 잘하고 잘못하는 문제가 아니라 아예 외면하고 있다. 근무시간 중에 일곱 시간이나 소재에 의혹을 남기는 사람이 너무 바빠서 유가족을 못 만난다고? 무서워서 못 만나는 건가, 싫어서 안 만나는 건가?

 

황혼기 대영제국의 문제들을 부각시키던 단식투쟁이 영국인의 자존심을 완전히 땅바닥에 떨어트린 사태가 1981년 일어났다. 북아일랜드 분리주의자 10명이 옥중 단식으로 목숨을 잃은 ‘보비 샌즈 사건’이다. 정부의 ‘불통’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태다.

 

황혼기 대영제국의 문제들을 부각시키던 단식투쟁이 영국인의 자존심을 완전히 땅바닥에 떨어트린 사태가 1981년 일어났다. 북아일랜드 분리주의자 10명이 옥중 단식으로 목숨을 잃은 ‘보비 샌즈 사건’이다. 정부의 ‘불통’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태다.

 

1980년 10월 27일 북아일랜드의 메이즈 교도소에서 7명의 죄수가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6명은 아일랜드공화군(IRA) 소속, 한 명은 아일랜드민족해방군(INLA) 소속이었고, 그들의 요구사항은 제네바협약에 의거한 전쟁포로 대우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일랜드가 1922년 이후 독립의 길을 걸을 때 북아일랜드는 분리되어 영국에 남았고, 1960년대 후반 북아일랜드의 마이너리티가 되어 있던 가톨릭계 주민들이 일으킨 인권운동이 부당한 탄압을 받자 그 반발로 북아일랜드를 아일랜드로 돌려보내라는 분리주의 운동이 자라나고 있었다.

 

영국 당국이 1971년 8월 계엄조치의 성격을 가진 ‘수용소 정책’(internment)을 펴면서 죄수의 신분 문제가 일어났다. 1975년 12월까지 시행된 이 정책 아래 1981명이 재판 없이 수용되었는데, 처음에는 그들을 죄수로 취급하려고 했다. 그러나 거센 항의 앞에 1972년 7월부터 수감자를 ‘특수신분’(SCS, Special Category Status)으로 대우하기 시작했다. 전쟁포로에 준한 신분이었다. 이 신분은 판결을 받은 죄수들에게도 적용되었다.

 

1976년 3월 영국 당국은 SCS 제도의 철폐를 발표했다. 수용소 정책을 폐기하면서 롱 케시 수용소의 이름을 메이즈 교도소로 바꾸고, 이제부터 들어오는 수감자는 일반 죄수와 같이 대우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수감자들은 범죄자가 아닌 정치범으로서 특수신분의 계속을 요구했다. 이 직후 수감된 18세의 IRA 전사 키에란 뉴전트는 죄수복을 거부하며 담요만을 걸치고 지냈다. 이후 수백 명 수감자가 뉴전트의 뒤를 따랐다. 이것을 ‘담요투쟁’(blanket protest)이라고 했다.

 

당국은 죄수복을 입지 않고는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로 대응했다. 그러자 수감자들은 감방 안에서 요강을 사용했다. 요강을 화장실에 가져갈 수 없으므로 다른 곳에서 비울 수밖에 없었는데, 요강을 비우다가 폭행을 당하는 일이 이어졌다. 이에 수감자들은 감방 벽에 똥을 바르고 목욕을 거부하며 항의했다. ‘오물투쟁’(dirty protest)이었다.

 

1980년의 단식투쟁은 담요투쟁과 오물투쟁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었다. 브렌던 휴즈가 이끈 이 단식이 40일을 넘기자 영국 정부도 양보할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감자들의 요구에 대한 정부의 답변서가 런던을 떠나 벨파스트에 도착했을 때 휴즈는 답변서를 보지 않은 채 단식 53일째 날인 12월 18일 단식 중지를 선언했다. 동료 한 사람의 생명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5개항으로 요약된 수감자의 요구는 실상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실정법의 테두리 안에서 충분히 취할 수 있는 조치였다. 그 정도 요구를 들어주는 데 인색했다가 이듬해 재개된 단식투쟁으로 열 명의 목숨이 희생되는 상황이 닥치자 영국이 과연 문명국 맞느냐는 비판이 국내외에서 터져 나왔다. 5개항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1. 죄수복을 입지 않을 권리.

2. 강제노역을 하지 않을 권리.

3. 수감자끼리 자유롭게 교류하고 교육과 오락 활동을 조직할 권리.

4. 매주 한 차례 면회를 갖고 편지 하나와 소포 하나를 받을 권리.

5. 투쟁과정에서 박탈당한 혜택의 회복.

 

막상 도착한 정부 답변서의 내용은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죄수복 아닌 복장을 정부가 지급하고, 수감자가 자기 옷을 입는 것은 계속 금지한다는 식이었다. 수감자들은 2월 4일 정부의 조치가 부족하다고 주장하면서 단식투쟁의 재개를 통보했다. 그리고 정부의 응답이 더 없자 제2차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1981년의 제2차 단식투쟁은 참여자들이 시차를 두고 참여하는 방식을 취했다.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3월 1일에 27세의 IRA 지도자인 바비 샌즈가 단식을 시작하고, 한두 주일마다 한두 명씩 추가로 동참했다. 열 명의 수감자가 목숨을 잃은 후 북아일랜드장관(직할통치를 위해 영국 정부 내에 만든 자리)이 온건한 인물로 바뀌고 문제 해결에 성의를 보이자 10월 3일에 투쟁을 끝냈다. 그 사흘 후 신임 장관 제임스 프라이어는 수감자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는 조치를 취했다.

 

목숨을 잃은 10인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이름                소속    시작    사망일    기간    수감이유

바비 샌즈          IRA      3. 1      5. 5        66     총기 소지

프랜시스 휴즈    IRA     3. 15     5. 12       59     군인 살해 등

레이먼드 맥크리시 IRA   3. 22    5. 21       61     살인미수, 총기 소지

팻시 오하라      INLA    3. 22     5. 21        61    수류탄 소지

조 맥도널          IRA      5. 8     7. 8         61      총기 소지

키에란 도허티    IRA      5. 22    8. 2        73       화기와 폭발물 소지, 납치

케빈 린치          INLA    5. 23     8. 1        71      총기 절도 등

마틴 허슨          IRA      5. 28    7. 13       46       살인미수 등

토머스 매켈루이  IRA     6. 8      8. 8        62       살인

마이클 디바인     INLA    6. 22    8. 20      60       절도, 총기 소지

 

1979년 5월에 출범한 대처 정부는 제1차 단식투쟁에 이어 제2차 단식투쟁까지 냉담한 태도를 지켰다. 법령 개정 없이 행정조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까지 외면하며, 조금이라도 양보하면 세상이 뒤집어질 것처럼 엄살을 떨기만 했다. 결국 국제여론을 못 이겨 해결에 나설 때도 북아일랜드장관을 교체해서 해결을 맡기고 중앙정부의 개입을 피했다. 이 모습을 보며 한 소련 기자가 대처 수상에게 ‘철의 여인’(Iron Lady)이란 별명을 붙였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정치적 파장을 검토해 본다. 우선 ‘불통의 여인’ 대처 수상의 업무수행 지지도가 23퍼센트까지 떨어졌다. 영국 수상의 지지도 조사가 시작된 이래 최저 기록이었다. 대처는 1990년까지 수상직을 지켰지만, 이듬해 4월 포클랜드전쟁이 일어나 주지 않았다면(또는 그가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 해를 넘길 수 없었을 것이 확실하다. 가정법에 “확실하다”는 말을 쓴 것은 여기에 이견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북아일랜드 사태의 악화였다. 민권운동에 대한 부당한 탄압 때문에 가톨릭계 주민의 반발이 꾸준히 늘어나 오기는 했지만 영국으로부터의 분리를 확고히 주장하는 사람은 아직 소수였고, 더군다나 무장투쟁에 나서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IRA 등 무장투쟁단체들은 상징적인 존재로 퇴화해 있었다.

 

그런데 수십 명의 수감자들이 ‘북아일랜드 분리’도 아니고 수감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비폭력적 항의방법을 들고 나섰는데, 마땅히 취해야 하고 쉽게 취할 수 있을 것 같은 조치를 거부하며 줄줄이 죽어나가게 하고 있으니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땠겠는가. 좀 못마땅한 일이 있어도 영국 국민으로 살아가려던 온건한 사람들마저 “저게 우리 정부 맞아?”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IRA 등 분리주의 세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투쟁방법도 갈수록 과격해졌다.

 

격화된 분위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선거법을 황급하게 개정하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다. 단식 중이던 투쟁 지도자 바비 샌즈가 4월 9일 북아일랜드 한 선거구의 보궐선거에서 영국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단식 40일째로 접어들어 사망 위험이 긴박해지던 시점에서의 이 당선이 여론에 큰 자극이 되었다. 단식 중단을 권하기 위해 교황까지 특사를 보냈다.

 

5월 5일 샌즈가 죽은 후 분리주의에 대한 동정심이 더욱 고조되었다. 6월 11일 아일랜드 총선거에서까지 몇 명의 북아일랜드 분리주의자들이 옥중 출마로 당선되었고, 그 무렵의 북아일랜드 지방선거에서도 분리주의 세력이 약진했다. 영국 의회는 샌즈가 비운 의석에 다른 수감자가 출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선거법을 개정했다. 복역 중인 수감자의 출마를 금지하는 것이 개정 내용이었다.

 

사태가 악화되는 동안 대처 수상은 “범죄는 범죄일 뿐, 정치가 아니다”라며 수습 노력을 거부했다. 범죄가 왜 정치가 아니라는 걸까? 범죄를 외면하는 정치는 그 자체가 범죄가 되는 것 아닐까? 대처의 ‘지도력’을 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가 정치의 지도자가 아니라 투쟁의 지도자일 뿐이라고 본다. 그는 지지자와 반대자의 패싸움을 통해 권력을 농단했고, 그 과정에서 영국의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격을 형편없이 떨어뜨렸다. 그를 벤치마킹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Posted by 문천

 

셀리그 해리슨(1927~ )은 미국의 가장 뛰어난 한반도 전문가의 한 사람이다. <워싱턴포스트> 도쿄 지국장으로 있던 1972년 미국 언론인으로는 처음 북한을 방문한 이래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하며 변화를 살펴왔다.

 

1994년 6월 카터-김일성의 만남에 관해서는 해리슨의 설명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만남의 바로 며칠 전에 해리슨이 김일성을 만나 비슷한 범위의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기 때문이다.

 

지미 카터의 평양 방문은 클린턴 대통령을 임기 중 아마도 가장 치명적이었을 전쟁 위기로부터 구했다. (...) 그러나 정황을 종합해 보건대 클린턴과 그의 보좌관들은 카터가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의 평양 방문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갈루치와 페리는 두드러진 예외였을 뿐이다. 카터 전 대통령이 일시적인 핵동결에 합의함으로써 유엔의 제재 정책을 중단시키고 협상이 재개되도록 했음에도, 그들은 이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기는커녕 화를 냈다.

 

지금도 보좌관들의 상당수는 핵의 참화로부터 자신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길 거부하고 있다. 앤서니 레이크 전 백악관 안보 보좌관은 2000년 6월 18일 대화를 나눌 때 유엔의 제재 조치라는 위협이 효과적이었다며 옹호하려고 했다. 그는 왜 북한이 당시 핵동결에 동의했는지에 대한 “빗나간 논쟁”이 있었다고 얘기를 꺼냈다. “카터가 한 일인가 아니면 제재가 한 일인가.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논쟁이었습니다. 둘 다였지요.” 그러나 이 장에서 다루겠지만 그 논쟁은 잘못되지 않았다. “카터가 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카터야말로 비생산적인 제재 위협과는 무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는 중국이 유엔 안보리에서 미국의 제재 결의안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는 점에서 제재 위협이 점점 그 실효성을 잃어 가던 상황이었다. (<코리안 엔드게임> 337-338쪽)

 

해리슨은 당시 정부 고위관료 중 페리 국방장관과 갈루치 국무차관보만이 카터의 역할을 환영했다고 보았다. 카터가 클린턴에게 방북의 뜻을 알렸을 때 클린턴은 갈루치를 보내 브리핑을 해주게 했고, 카터는 김일성을 만난 후 평양에서 전화했을 때 다른 사람 아닌 갈루치를 찾아 용건을 말했다. 갈루치는 클린턴과 카터 사이의 비공식 ‘특사’였던 셈이다. 카터의 전화가 왔을 때 클린턴이 “그는 갈루치와 얘기하길 원할 걸세”라고 말한 것을 갈루치가 기억했다고 하는데,(<코리안 엔드게임> 343쪽) 앞서 인용한 <북핵위기의 전말> 278-281쪽에 그려진 장면과는 차이가 있다.

 

카터의 역할에 대한 반대자의 대표로 레이크 안보보좌관을 예시했다. 반대 이유는 유엔 제재를 통해 북한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위에 소개한 대화에서는 (타협이 아니라 협박을 해야 한다는) 원래의 주장을 굽혀 타협과 협박이 합쳐져 효과를 일으켰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자기가 주장했던 협박도 한 몫을 했다는 것이다. “카터가 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반박하는 해리슨의 말에서 레이크를 한심해 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1927~ )은 북미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사람이므로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도록 <시사상식사전>(박문각 펴냄) 내용을 옮겨놓는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미국 국방장관과 대북정책조정관(North Korea Policy Coordinator)을 지낸 인물.

 

윌리엄 페리는 스탠퍼드대에서 수학을 전공한 뒤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수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주로 통신 및 군기술 분야의 경영진으로 있다가 1977년 카터행정부에서 기술담당 국방차관으로 임명된 군수통권자다. 카터 행정부 때 그는 스텔스비행기 개발을 적극 추진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에 ‘스텔스 기술의 아버지’로 불렸다.

 

스탠퍼드대 교수와 국제안보 군축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빌 클린턴의 1차 임기 때인 1993년 국방부 부(副)장관으로 기용됐으나, 전임 애스핀 장관이 소말리아 사태 등으로 중도하차하면서 장관이 됐다. 페리는 클린턴 재선과 함께 장관직을 사임했었으나 1998년 8월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와 금창리 핵의혹시설 문제 등으로 사태가 복잡해지자 클린턴 대통령이 그해 11월 대북정책 전반을 검토할 조정관으로 임명했다.

 

그때까지 페리는 1994년 영변 핵시설을 둘러싼 위기 때 북한 폭격론을 입안했다는 이유로 강경론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의 행보는 '온건한 합리주의자'라는 평을 들었으며 클린턴 정부시절 미국과 북한간의 관계를 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그가 1999년 5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후 이를 바탕으로 같은 해 10월 제출한 ‘페리 보고서’는 이후 미국 대북정책 방향의 지침서가 되었다. 2000년 9월 대북정책조정관직을 사임했으며 이후 스탠퍼드대학의 명예교수로 있다.

 

1994년 북핵위기의 진행과정에서 페리는 북한 폭격 가능성과 그에 따른 전면전의 대책을 강구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대결정책을 선호하는 군부의 입장을 대표하는 ‘강경론자’로 보일 수 있는 역할이다. 그런데 막상 전면전의 전망을 검토하면서 미국 정부가 감당할 수 없는 노선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합리주의자’의 역할을 한 셈이다. ‘유엔 제재’의 강경노선을 주장하면서 그에 따른 전면전의 위험을 외면한 레이크 보좌관 같은 사람들을 주저앉히는 데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해리슨은 페리의 당시 입장에 대해 2000년 5월의 인터뷰에서 이런 설명을 들었다고 한다.

 

“나 역시 그랬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것[카터의 방북]을 활용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정부와는 무관한 독자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크리스토퍼 국무장관과 레이크 안보 보좌관은 둘 다 불안해했습니다. 문제는 그에게 대통령의 특사로서의 권한을 부여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코리안 엔드게임> 340쪽)

 

카터가 김일성과의 회담 직후 전화로 갈루치에게 회담 내용을 ‘통보’만 한 후 바로 가진 CNN과의 회견에는 유엔을 통한 제재 방침에 대한 비판의 뜻이 있는 것이었다.

 

카터의 CNN 인터뷰는 유엔의 제재 전략에 대한 공개적인 비난을 담고 있었다. 국가안보회의에 참석 중인 몇몇 인사들은 이에 자극을 받아 백악관이 김일성과 카터의 합의를 즉각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클린턴과 고어를 포함한 다른 인사들은 수용할 만한 동결 조건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고어는 물었다. “우리가 이 레몬으로부터 레모네이드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카터는 미국이 북한과 협상을 재개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코리안 엔드게임> 344쪽)

 

핵연료 재처리에 대한 사찰 요구를 무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카터가 제재 전략에 반대한 중요한 이유였다. NPT 규정은 재처리에 대한 제한이 없다. 재처리를 규제하려 드는 것은 미국의 정책일 뿐이었고, 북한이 재처리를 하지 않기로 약속한 것은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뿐이었는데, 그것은 남북한 사이의 약속이었다. 미국이나 유엔이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재처리가 NPT에서 금지하는 활동이 아니라면 미국이 어떻게 북한의 재처리를 막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했다. 이 말을 들은 갈루치는 아연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7년 4월 카터 행정부 출범 초기에 새 행정부 비확산정책으로서 바로 재처리를 중단하기로 했었던 것이다. (...) 아시아에서는 모든 국가들로 하여금 재처리를 못하게 하려고 했는데 그에 따라 일본과 갈등을 빚은 후 포기한 적도 있다. (...)

 

“각하 말씀이 옳습니다.”라고 갈루치는 대답했다. NPT는 재처리를 금지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에서 재처리를 하지 않기로 약속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갈루치는 바로 카터 행정부 시절에 미국이 동맹국을 포함한 여러 선진국들에게 재처리를 반대하는 정책을 취했고, 북한을 포함한 핵확산 잠재국들의 재처리를 중지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카터는 이 점을 완전히 납득한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카터 방북기간 중 바로 이 점 때문에 클린턴 행정부에게 커다란 골칫거리를 만들게 된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 246-247쪽)

 

북한은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으로 있던 해리슨에게 초청의 뜻을 5월 중순 전해 왔고, 6월 4일 평양에 도착한 해리슨은 6월 9일에 김일성과 면담했다. 김일성이 해리슨을 불러 만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해리슨은 4월 말 유엔 주재 북한 대표부 김정수 차석 대사를 두 차례 만나 핵문제를 토론하고 재처리시설 가동 중단을 앞당기는 쪽으로 협상해야 한다는 자기 의견을 평양에 전해달라고 했다. 평양 도착 후에도 김일성 면담 전에 북한 관리들과 핵문제를 토론했다. 평양의 협상파(강석주 등)가 북한에 우호적인 미국 전문가인 해리슨의 의견을 김일성에게 추천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과 만났을 때 협상을 위해 재처리에 관한 북한 측의 몇 가지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말하자 김일성이 보인 반응을 해리슨은 이렇게 설명했다.

 

김일성은 놀랐을 뿐만 아니라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강석주를 돌아보며 7분 동안 얘기를 했고 통역은 침묵한 채 앉아 있었다. 마침내 김일성은 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매우 흥미 있군요. 만약 그것이 당신들의 우려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우리가 경수로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확고히 보장하는 데 합의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그렇게 할 수 있소. 그러나 당신 나라가 당신들의 결정을 지킬 수 있을지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소? 당신네들이 관계를 정상화할 것이라고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 나의 동지들은 외교관들이 이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나에게 확신을 줬소.” (<코리아 엔드게임> 351-352쪽)

 

카터의 방문은 미국의 태도에 대해 북한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였다. 해리슨은 귀국 후 <워싱턴포스트>(6월 13일)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북한 문제에 대한 의견을 발표하고 6월 15일에는 국무부의 허바드를 찾아갔다. 한반도 담당 관리들에게 평양 사정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위트-폰먼-갈루치는 이렇게 소감을 적었다.

 

해리슨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짜증나는 이야기였지만 자세히 생각하면 그리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첫째, 김일성은 미국과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 했다. 아마 그런 척 하거나 아니면 잘못 알고 있을 것이었다. 둘째, 김일성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과 새로운 경수로의 맞교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 거래에 대한 약속만 해도 북한 프로그램의 일부, 특히 재처리시설을 포기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었다. 해리슨이 미국에 돌아온 후 북한인들은 그에게 IAEA사찰단이 “제대로 행동한다면” 영변에 남아있을 수 있다고 전했다고 한다. (<북핵위기의 전말> 261쪽)

 

해리슨의 이야기가 국무부 관리들의 마음을 바로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카터가 전해줄 소식을 받아들이고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한 실무진의 마음의 준비는 시켜줬을 것이다.

 

결국 해리슨이 가지고 온 메시지는 미국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북한이 외교적 해결에 끝까지 저항함으로써 협상이 결국 실패로 끝나고, 연료봉 교체까지 감행한 상태에서 북한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급격히 돌아가는 상황에서 해리슨이 접촉한 사람은 백악관 상황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해리슨의 이야기가 백악관에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게다가 해리슨이라는 인물 자체도 문제였다. 그는 북한을 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오래 견지해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신빙성이 떨어졌던 것이다. 수개월 후 위기가 수그러들고 외교적 접촉이 재개되어 합의에 이른 다음에야 북한이 그 때 상당히 진지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핵위기의 전말> 262쪽)

 

카터의 귀국 전인 6월 20일 레이크 안보보좌관이 몇 명의 민간 전문가를 초청해 관리들과 함께 토론을 벌인 자리를 해리슨은 이렇게 그렸다.

 

회의의 분위기는 카터 방북의 결과에 대한 환호보다는 미국이 속아넘어갔다는 우려가 지배적이었다. 갈루치는 나에게 핵동결에 대해 김일성이 정확히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를 상세하게 답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의 답변이 카터와의 통화 내용과 일치한 데 대해 만족해하는 듯 보였다. 그 토론에 참석했던 많은 이들은 북한이 유엔의 제재를 피해 보기 위해 단지 시간을 끌고 있다고 보았다. 카터가 연 돌파구에 따라 곧바로 협상을 재개할 것을 촉구하면서 내가 끼어들기 전까지 토론은 30분 동안 남한에서 미군을 어떻게 증강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도 나와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그때 클린턴이 회의실로 들어와서, 나와 그레그를 쳐다보고는, 6월 14일 PBS의 시사토론 프로그램 ‘맥닐-레러 뉴스 아워’에서 우리들의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신들 견해에 동의합니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코리안 엔드게임> 344-345쪽)

 

위트-폰먼-갈루치는 해리슨이 “북한을 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오래 견지해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 신빙성이 떨어졌다고 했다. 워싱턴 관료들에게 ‘종북주의자’로 찍혔다는 얘기다. 이 점을 의식한 듯 해리슨은 2002년에 낸 <코리안 엔드게임>의 제1부에 “북한은 붕괴할 것인가?”란 제목을 붙여 대북 강경론자들의 ‘북한 붕괴론’을 반박했다.

 

해리슨이 그 책을 낼 때는 북한이 ‘고난의 행군’에서 겨우 벗어나기 시작할 때였고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치도 아직 불안할 때였다. 그 시점에서 해리슨이 어떤 이유로 북한은 소련이나 동구권과 같은 길을 걷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는지, 다음 주에 살펴보겠다.

 

 

Posted by 문천

 

1. 어떤 ‘신민족주의’가 필요한가?

 

이 책을 쓴 목적을 간단히 얘기한다면 ‘신민족주의’를 제안하려는 것이었다. ‘신민족주의’란 말이 지금까지 나온 것 중 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안재홍의 제안이다. 그는 해방 후 한 달 남짓 지난 1945년 9월 22일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란 원고지 약 2백 매 길이의 글을 발표했고, 이 글은 얼마 후 소책자로도 발간되었다.

 

이 글의 구성을 보면 “서언”에 이어 제1장 “국제적 개관과 신민족주의”, 제2장 “조선 정치철학과 신민족주의”, 제3장 “결론으로서의 신민족주의”로 되어 있고, 아주 짧은 제4장만이 “신민주주의의 건국이념”으로 되어 있다. 해방을 맞아 정치적 이념의 기준을 제공하기 위해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함께 제시하면서도 국학 연구에 매진해 온 민족주의자로서는 민주주의보다 민족주의 쪽에 할 말이 많았을 것이 당연한 일이다.

 

황급하게 작성된 글로 보인다. 해방 당시까지 가장 엄격한 사찰 대상의 1인이었고 해방 직후에는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건준) 활동에 바빴던 안재홍이 8월 말 건준 부위원장을 그만둔 후 서둘러 작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다른 글에 비해 체계가 어지럽고, 그가 제시한 논점들(어원 설명 등) 중에는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왜 ‘신’민족주의를 제안하느냐 하는 뜻은 분명하다.

 

“각자의 민족은, 그 자체가 고유한 문화를 가진 까닭에, 어느 민족의 현재의 사태와 및 그 전도와를 형성함에 당하여는, 반드시 그 민족의 과거가 영향되는 것이다. (...) 일 인민에게 적정타당한 사회도덕의 구현으로서의 진정한 입법은, 반드시 당해 인민의 과거 문화의 총화인 역사의 소산이어야 한다. (...) 그러므로, 문화의 전통을 거세한 합리주의적인 인공적인 국제추수주의는, 일편 공식으로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보다도 민족적 개아성을 적정하게 발휘시키는 것은, 전 국제협동의 분야에서 각각 독자의 이채를 발양케 하는 것이니, 그는, 사회주의 실행의 국가에서도 각 개인의 천품과 능률에 따라 그 사회적 임무와 지위를 달리하게 됨과 전연 동일한 이의이다.”

 

해방을 맞아 민족국가 건설의 과제를 앞에 두고 건국의 원리로서 민족주의의 필요성을 말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민족주의’면 됐지, ‘신’ 자를 붙일 필요가 없다. 더 중요한 뜻은 이런 말에 담겨 있다.

 

“근대에 있어 국제적 협동관련성을 무시하는 고립배타적인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는 배격되어야 하겠지만, 민족자존의 생존협동체로서의 주도이념인 민족주의는 거룩하다. 이에 특히 신민족주의가 제창되는 이유이다.”

 

지금까지 보아 온, 일본 민족주의와 같은 ‘고립배타적’ 민족주의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드러내 지적하지는 않지만, 식민지시대 조선인의 민족주의도 그와 같은 범주로 볼 수 있다. 독단적인 군국주의시대 일본 민족주의의 틀을 그대로 본받아 주체만 일본인 대신 조선인으로 바꾼 것이 식민지시대 조선 민족주의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억압에 묶여있던 식민지시대에는 일본인의 침해와 비하에 맞서기 위해 ‘자존’에 치중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독립된 민족국가를 이루어 국제사회에 어울리기 위해서는 균형감각과 책임감을 키울 필요가 있다. 그 필요성을 안재홍이 담은 말이 ‘신민족주의’였다.

 

그가 뜻한바 신민족주의가 한국에서 아직까지 실현되지 못한 사실은 베트남전 참전 방식과 그에 대한 반성의 부족에서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다른 여러 측면에서도 한국의 민족주의 담론이 식민지시대 수준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식민지인의 민족주의와 독립민족의 민족주의

 

21세기로 들어오면서 민족주의 ‘극복’ 담론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를 계기로 ‘세계화’ 구호가 거세진 끝에 1997년 IMF사태를 맞으며 한국 사회의 폐쇄성에 대한 반성이 크게 일어난 결과였다.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국사 해체’ 주장으로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흐름 위에 또 하나의 움직임이 편승했다. 2002년 대선과 2004년 선거에서 패퇴한 수구세력이 권토중래를 위해 이데올로기 수립의 필요성을 느끼고 ‘뉴라이트’ 운동을 일으키면서 ‘반공’을 기본노선으로 산업화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역사 해석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그들은 민족주의를 제물로 삼아 교과서 분란을 일으켰다.

 

나는 2008년 가을 <뉴라이트 비판>을 써서 뉴라이트 역사관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뒷받침하려는 정략적 목적을 위해 무리한 해석을 시도한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뉴라이트의 민족주의 비판에는 한국 사회의 ‘과잉민족주의’hyper-nationalism에 대한 적절한 지적도 많이 들어있다. 과잉민족주의에 대한 일반인의 합리주의적 반감에 영합하려 한 것이다.

 

<뉴라이트 비판>에서 나는 “뉴라이트로부터도 배울 만한 것은 배워야 한다”고 했다. 뉴라이트 담론의 정략성과 허점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이 사회의 민족주의가 겪고 있는 혼란을 수습하기에 부족하다. 식민지시대의 독단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과잉민족주의에 기운 민족주의 담론을 시대 상황에 맞춰 보정하고 확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와 <해방일기>(10권, 2011~2014 완간 예정)를 통해 민족주의 담론 발전의 근거를 확보하는 데 노력해 왔다.

 

이 사회가 처한 상황이 70년 전과 지금 사이에 크게 변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뉴라이트로부터 배울 가장 중요한 점이다. 세계 곳곳의 식민지가 독립의 길을 걷고 있던 70년 전과 달리 지금은 세계화의 시대다. 자본, 상품과 정보의 흐름이 비교가 안 되게 커져서 국경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끼리’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에 만족해서는 지구촌에 어울리기 힘든 상황이 된 것이다.

 

‘세계화’의 추세를 인정하되 그 의미와 한계를 파악하는 것이 민족주의 담론의 발전 방향을 찾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의 세계화가 경제적 세계화에 그쳐 왔고 이제부터 정치적 세계화의 과정에 접어들 것으로 전망한다. 뉴라이트는 개인의 파편화를 요구하는 경제적 세계화를 세계화의 모든 것으로 보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전적으로 배척한다. 그러나 세계화의 본 단계인 정치적 세계화는 인류사회의 유기적 조직을 위해 민족과 민족주의를 기본 요소로 받아들일 것을 나는 기대한다.

 

식민지시대 민족주의가 가진 1차적 한계는 주권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책임 측면을 도외시하고 권리 측면만 주장하는 독단성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바탕에 있는 문제점은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근대서양의 관념을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

 

근대서양의 민족주의는 19세기 유럽을 풍미한 원자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만국공법’을 국제관계의 원리로 내세웠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 밀려온 서세동점의 물결은 종래의 유기론적 ‘천하체제’를 무너뜨렸다. 일본의 조선 침략에서도 조선을 ‘독립국’으로 규정함으로써 천하체제로부터 이탈시키는 것을 첫 번째 과제로 삼았다. 민족과 국가들 사이에 실재하는 강약-대소 관계를 허구의 평등으로 가려놓음으로써 약육강식 현상에 대한 저항을 없애는 것이 제국주의시대 만국공법의 역할이었다. 이에 입각한 민족주의는 ‘만국의 만국에 대한 투쟁’을 조장하는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경향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3. 사회의 파편화와 자연의 타자화

 

홉스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말한 것은 1651년의 일이었다. 인간사회를 경쟁 위주로 보는 관점은 유럽에서 중상주의시대부터 제기된 것이다. 이 관점은 산업혁명의 진행과 자본주의의 확산에 따라 확장되어 오다가 19세기 초 돌턴의 원자론이 나오자 자연계에서 인간사회까지 모든 것을 설명하는 복합적 사상체계로 자리 잡게 된다. 모든 물질이 독립적인 원자로 구성되었다는 원자론이 인간사회를 경쟁의 주체인 독립적 개인의 집합으로 보는 개인주의를 위해 적절한 비유를 제공해준 것이다.

 

자연과학에서 원자론은 19세기가 다 지나기도 전에 무너져버렸다. 물리학 연구가 원자 내부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론에 입각한 인간관은 19세기 말에 더욱 강화되었다. 제국주의시대 분위기 속에서 경쟁 위주의 관점이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물질세계나 인간세계나 원자론적 특성과 유기론적 특성을 아울러 갖고 있다는 사실은 직관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문명의 어느 단계에서나 지배적 사상체계에서는 두 측면이 함께 인식되었다. 19세기 유럽에서 시작해 20세기까지 원자론적 세계관이 지배적 영향력을 누린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무엇이 이런 현상을 가능하게 해준 것일까?

 

원자론적 세계관은 경쟁을 극한으로 몰고 간다. 이런 세계관이 큰 영향력을 가진 사회는 파괴와 낭비의 경향을 일으켜 지속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억제된다. 그런데 문명이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생산력의 폭발적 확대가 일시적으로 일어나고, 이 생산력 확대가 “파괴는 건설의 아버지” 식의 논리로 19~20세기 원자론적 세계관의 유행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수렵-채집 단계에서 농업 단계로 이행할 때도 이와 비슷한 생산력의 폭발적 확대가 여러 곳 고대제국의 성립을 뒷받침한 것으로 보인다.

 

생산력의 폭발적 확대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인간을 파편화하는 원자론적 세계관은 자연 역시 타자화함으로써 무절제한 착취의 대상으로 삼게 해주었다. 인간의 소외와 자연의 소외 사이의 연관성을 생태론자 머레이 북친은 이렇게 말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관념 자체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다.” 그 역도 성립한다.

 

20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환경과 자원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맹목적 자연 착취가 한계에 도달한 결과였다. 이로부터 ‘지속가능성’이 관심을 끌게 되었는데, 기본적 세계관이 바뀌지 않은 채로는 고작 파국을 늦추는 노력에 지나지 못한다. 자연을 타자화해 놓고 환경과 자원의 ‘보전’이나 ‘보존’을 논하는 정도로는 문제의 구조적 해결을 바라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군사력과 자본력을 장악하고 있는 반동세력의 저항을 넘어설 수 없다. ‘근대적’ 가치관의 전면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심지어 ‘인권’도 자연과 인간의 상대적 관계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준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로마클럽보고서(1973)가 나온 지 40년이 지난 이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조정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 위에 새로운 사회조직 원리가 곳곳에서 개발되기 시작하고 있다. 아직은 미약한 움직임이다. 국가 차원의 움직임은 없고, 도시 차원에서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거대하고 강력한 기존 시스템에 사회조직 방법이 묶여 있는 현실 속에서 이런 움직임이 작게라도 나타난다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전체 시스템의 변화가 시작되면 그 변화는 매우 크고 빠른 것이 될 것이다. 그 변화가 ‘세계정부’ 구성을 향한 정치적 세계화가 될 것으로 나는 기대한다.

 

 

4.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세계정부’의 전망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충격을 받은 아인슈타인이 “인류와 문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세계정부의 창설에 달려 있다.”고 했다고 한다. 현실성 없는 발언이란 비판에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세계정부라는 생각이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다면 우리 미래에는 단 하나의 현실적 전망만 있을 뿐이다. 바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전면적 파괴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세계정부’란 지금까지의 국가정부가 국가 내의 질서에 책임을 가졌던 것처럼 세계적 질서에 책임을 가지는 ‘정치적 세계화’를 뜻하는 것이다. 개인주의의 확장을 통해 국가를 약화시키면서 새로운 질서의 구축을 외면해 온 ‘경제적 세계화’와 달리 진정한 ‘세계주의(globalism)’에 입각한 세계 규모의 질서체제를 만든다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래 전 세계적 경제구조의 성립과 교통-통신의 발달에 따라 지역 간 교류가 크게 늘어나면서 민족과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전 세계적 정치질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타난 세계질서의 형태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말한 ‘세계체제’ 정도가 고작이다. 제국주의시대 만국공법이 제창한 ‘무정부상태’가 계속되어 온 것이다.

 

1차 대전 후에 국제연맹, 2차 대전 후에 유엔이 구성된 것은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통해 세계정부의 필요성이 부각된 결과였다. 그러나 이 국제기구들은 만들어진 후 얼마 안 되어 패권국가들의 이용 대상으로 전락하고 세계정부로의 발전을 보지 못했다. 무정부상태를 좋아하는 패권국가들을 견제할 안정 추구세력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미국이 전 세계 군사비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은 유엔의 역할을 제한하고 있는 결정적인 족쇄다.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와 소련 해체에 따라 유일한 패권국가로 남은 미국을 중심으로 ‘1극체제’가 빚어질 때 나온 ‘세계경찰’ 논의도 세계정부의 염원이 비쳐진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경찰의 권력만을 탐하고 책임을 외면하면서 이 논의마저 무색해진 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선 후 중국의 국력과 역할이 자라나면서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다.

 

G2의 위상에 올라선 중국이 종래의 패권국가들과 다른 면모를 보일만한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다른 패권국가들의 대두 단계와 달리 지금의 세계적 상황은 일방적 팽창주의를 용납할 여지가 적은 단계에 처해 있다. 둘째, 세계 인구의 20% 이상을 품고 있는 중국 입장에서는 ‘나’와 ‘남’을 구분해 대립관계를 조장할 여지가 적다. 셋째, 중국은 유기적 천하체제를 포함한 방대한 문명 전통을 가진 나라다.

 

중국이 내세워 온 “화평굴기”나 “소프트파워”를 견제를 회피하는 전술적 구호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위의 조건들이 작용한 결과이며 지속성을 가진 노선이 될 수 있다. 물론 중국인 중에도 중국의 문명배경에 대한 인식 없이 패권국가의 자리를 중국이 차지하기만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영국, 독일, 러시아, 미국 등 20세기 패권국가들과 비교할 수 없는 방대한 문명자산을 활용할 가능성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 자산을 활용해 유기적 세계질서를 구축할 수 있을지 여부는 중국인과 세계인 모두의 노력에 달려있다.

 

농업문명으로 접어드는 단계에서 그리스의 원자론, 중국의 명가 등 원자론적 세계관이 일시적으로 영향력을 키운 일이 있다. 그 단계에서의 급격한 생산력 발전에 힘입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농업문명이 정착된 후로는 어디서나 유기론적 세계관이 주축이 되고 원자론적 세계관의 영향력은 미미하게 되었다.

 

산업문명으로 접어드는 단계에서 원자론의 득세도 문명전환 단계의 특수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산업문명의 정착에 따라 유기론적 세계관의 회복을 예상할 수 있다. 이에는 근대 이전 모든 문명의 유기론적 전통이 참고가 되겠거니와, 가장 풍부한 유기론적 문명 전통의 주인공이 바로 중국이다. 그래서 중국의 ‘굴기’가 특히 주의를 끄는 것이다.

 

 

5. 정체성 회복의 중심 고리로서의 민족주의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에서 나는 망국의 의미를 국가(왕조) 차원, 민족 차원, 문명 차원의 세 개 층위에서 파악할 것을 제안했다. 1945년의 ‘해방’은 국가의 회복을 가능하게 해주었지만 민족의 회복은 충분치 못했고, 문명의 회복은 전혀 가져오지 못했다.

 

1백 년 전의 망국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파괴했다. 이민족 지배와 전쟁, 그리고 분단 대결 등 20세기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핵심 과제가 정체성의 회복이다. 세계화의 시대에 한국인이 민족주의에 집착하는 것도 민족정체성의 회복이라는 과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인이 회복해야 할 정체성에 세 개 층위가 어우러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한 개 층위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다른 층위의 회복을 가로막을 수 있다. 국가에 집착하면 민족문제 해결에 장애를 일으키고, 민족에 집착하면 세계적 변화에 보조를 맞추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세 개 층위를 어우르는 중심 고리가 민족 층위에 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의 역할이 클 것을 나는 기대한다. 단, 민족주의가 중심 고리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다른 층위와의 연결이 확실해야 할 것이다.

 

내가 주력해 온 공부는 민족 층위와 문명 층위 사이의 연결이다. 실효성 있는 민족정체성은 문명전통 속에서만 제대로 확립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만국공법의 원자론적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독립적 존재로서 민족의 공허한 관념에만 매달려서는 20세기의 비극을 극복하는 길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과거의 한민족도 문명권 안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했던 것처럼, 지금의 한민족도 세계문명 안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정체성 회복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10여 년 전 <밖에서 본 한국사>를 처음 구상할 때는 문명정체성 회복의 전망이 매우 불투명했다. 그러나 2007년 집필을 진행할 때는 중국의 부상 덕분에 전망이 밝아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내가 중국조선족의 관점을 모델로 제시한 것은 배타적 민족정체성에만 단선적으로 매달려온 한국 민족주의가 국가정체성과 문명정체성을 시야로 끌어들이는 데 도움이 되고 싶은 뜻에서였다.

 

이 책을 내고 7년째 되는 이제, 조선의 망국을 몰고 온 ‘서세동점’ 현상의 퇴조를 갈수록 뚜렷이 느끼고 있다. 그에 따라 복합적-중층적 민족정체성을 추구하는 ‘신민족주의’ 수립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면서 그 뜻을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는 자리로서 강의를 제안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