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1891-1965)은 경기도 평택 출신으로 일본 유학(1910-1914) 후 조선일보 주필-부사장-사장(1924-1932) 등 언론계에서 활동했다. 일제하에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은 중 마지막 투옥(1942-1944)은 조선어학회사건이었다. 일제 말기에는 국학 연구에 매진했다. 해방 직후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다가 곧 그만두고 중도우익 노선의 국민당을 이끌었다. 1947년 2월부터 정부 수립까지 미군정 민정장관을 지내고 1950년 5월 제2대 국회에 진출했으나 곧 발발한 전쟁 중 납북되었다. 납북 후 북한에서는 두드러진 활동이 알려진 것이 없다.

 

안재홍의 활동을 해방 이전과 이후, 두 시기로 나눠서 볼 수 있다. 민족주의자로서 안재홍의 활동이 일제하에서는 전면적인 제약 아래 놓여 있었던 것에 비해 해방 후에는 가변성과 가능성이 훨씬 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50대 후반의 5년 동안 그는 민족주의자로서 자신을 최대한 표현할 수 있었고, 그의 활동에 대한 해석과 평가도 이 시기에 치중해야 할 것이다. 해방 전의 활동도 물론 그 자체로 해석과 평가의 대상이지만, 또한 해방 후의 활동을 위한 배경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안재홍을 흔히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규정한다. 1919년에서 1945년 사이에 아홉 차례 투옥되어 총 6년간을 옥중에서 지낸 이력에서 바로 떠오르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력한 정치노선을 추구하고 민정장관이라는 미군정기 최고 요직을 지내고도 현실정치에서 패퇴한 사실을 놓고는 ‘이상주의자’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안재홍의 행적을 면밀히 살펴보면서 나는 이런 통념과 오히려 반대되는 모습을 그려보게 되었다. 그가 ‘현실주의자’이면서 무척 ‘타협적’인 인물로 보이는 것이다. (‘타협적’보다는 ‘포용적’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송건호의 “안재홍, 좌우를 아우르고자 했던 신민족주의자”(<역사에 민족의 길을 묻다> 소수)는 짙은 애정과 깊은 경의를 담은 글이다. 그러나 현실주의자로서 안재홍의 면모를 파악하지 못한 까닭으로 이해에 한계를 보이는 것 같은 대목이 있다.

 

“백범 등 임정계가 시종일관 반탁을 주장한 것과는 달리, 한때 반탁투쟁의 선봉에 섰던 그는 반탁운동의 옛 동지들을 구속케 했다. 이것은 민족주의자로서의 민세의 정치적 처신에 한 가닥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 그러나 그는 같은 임정계이며 한때의 반탁동지요 같은 한독당 당원이기도 한 엄항섭-김석황 두 사람을 민정장관 자신의 이름으로 체포케 허용했다. (...) 엄격히 말해서 민세의 정치노선은 백범과는 달리 이랬다저랬다 일관성 없는 노선이었다는 비난도 받을 수 있겠다는 것이다.” (위 책 175-176쪽)

 

1947년 6월 23일의 반탁시위와 관련된 일이다. 안재홍은 1945년 말 반탁운동 시작 때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러나 반탁운동을 촉발했던 <동아일보>의 3상회담 보도가 오보임이 한 달 후 밝혀지자 반탁 대열에서 물러섰다. 그리고 그 후의 활동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 촉진에 집중했다. 두 점령국의 합의를 통한 건국이 현실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미-소 합의 없는 건국에는 분단의 위험이 있다는 그의 판단이 정확한 것이었음이 그 후의 경과에서 확인되었다. 한편 김구는 이승만과 함께 미소공동위원회 실패를 노리는 반탁운동을 계속하다가 1948년 들어서야 분단건국 반대노선으로 돌아섰지만, 이미 분단건국의 흐름이 걷잡을 수 없게 된 뒤의 일이었다.

 

‘현실주의자’라면 현실에 굴복하여 이념과 도덕을 포기하는 부정적 이미지를 흔히 떠올린다. 그것은 사이비 현실주의자다. 진정한 현실주의자는 현실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극복’하려 애쓰는 사람이다. 이념만을 내세우며 현실을 외면하는 ‘이상주의자’는 극복할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단의 위험이 크다. 김구가 ‘반탁’의 명분에 매몰되어 실제로 이승만의 분단건국 획책을 도와준 데서 그런 위험을 볼 수 있다.

 

현실주의자로서 안재홍의 면모는 활동 초기인 1920년대부터 나타난다. 김재명의 “안재홍, 민족애 실천했던 온건파 지식인”(<한국현대사의 비국-중간파의 이상과 좌절> 소수)도 안재홍에 대한 경의를 풍기는 글인데, 안재홍이 1923년 말에서 이듬해 초에 걸쳐 ‘연정회’ 조직에 참여한 일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안재홍도 연정회 조직을 위한 회합에 참석한 바 있다. 그러나 연정회가 참된 민족운동이 아닌, 일제에 타협적인 성격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손을 뗐다. (...) 그가 한때 연정회에 관계한 것은 이런 시기에 일어난 시행착오로 기록된다.” (위 책 232쪽)

 

연정회는 김성수, 송진우 등 동아일보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 자치’ 추진을 목적으로 결성하려 한 모임이다. 그 취지를 밝힌 이광수의 논설 “민족적 경륜”을 1924년 연초 동아일보에 연재하자 참여해 오던 김준연과 안재홍이 반발, 탈퇴하고 민족주의자들의 비판이 쏟아져 더 이상 추진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을 꼭 “시행착오”로 봐야만 할 것인가? 동아일보 사람들의 성향을 안재홍도 알 만큼 알고 있었을 것이다. 3-1운동 후 민족주의의 기세가 드높던 시기에 동아일보도 ‘민족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김성수 같은 자본가와 그 주변의 근대화론자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민족주의에 합류한다면 민족주의운동의 외연을 넓히는 길이 될 것을 기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참여함으로써 연정회가 조금이라도 더 건실한 민족주의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애쓸 여지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광수의 논설로 본색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을 볼 때까지는.

 

안재홍이 어떤 마음으로 연정회에 접근했던 것인지 그것만 놓고는 엄밀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이처럼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나섰다가 오래지 않아 도로 물러서는 일이 여러 차례 거듭된다면 어떤 패턴을 읽을 수 있다. 안재홍의 행적 중 그런 예로,

1.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가 보름 만에 그만둔 일,

2. 이승만 귀국 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설립에 앞장섰다가 흐지부지 손을 뗀 일,

3. 1945년 연말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가 한 달 후부터 멀리한 일,

4. 1946년 3월 국민당을 한독당에 통합시켰다가 1년여 만에 도로 갈라선 일 등을 꼽을 수 있다.

 

어느 경우에나 시작할 때 열성적으로 참여하거나 추진하다가 오래지 않아 포기하고 빠져나왔다. 요즘 표현으로 ‘정치적 판단력’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그는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잃지 않았다. 미군정이 미군정에 대해 비판적인 그를 민정장관으로 초빙한 것도 이 신망 때문이었다.

 

안재홍은 이승만이든 김구든 지도자로서 잠재적인 힘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도자의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러 나섰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대가 나아가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면 물러섰다. 재빠른 판단과 명쾌한 선택은 현대정치에서 ‘승리’를 위해 필요한 것인데, 안재홍은 그 점에 맞지 않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민정장관에 취임할 때 김구는 “헛애만 쓰고 이루는 것이 없을 것이며 결국 말만 많이 들을 것”이라며 말렸다. 안재홍은 그 말이 옳음을 인정하면서도 굳이 취임했고, 결과는 김구의 예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룬 것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꼭 없다고 할 일은 아니다.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이 석권하고 있던 남조선과도정부의 수반 자리를 그가 맡고 있음으로 해서 조선의 민심이 조금이라도 더 고르게 미군정에 반영되어 더 나쁜 길을 피하게 했을 개연성은 있다.

 

친일파 처단에 대해 서둘러 행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처단 범위를 좁히고 처단 수준을 가볍게 하자는 온건한 태도를 보인 것도 현실주의자의 입장이다. 처단 범위를 넓게 하면 재력과 지식과 기술을 가진 ‘실력자’들, 즉 기득권 세력이 건국 대열에서 배제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일찍 퇴진한 이유가 좌익의 전횡에 있다고 하지만, 더 원천적인 문제는 우익의 외면에 있었다. 동아일보 그룹을 비롯해 친일파 범주에 들어갈 수도 있는 기득권 세력의 건국준비위원회 참여를 안재홍은 촉구했지만 그들이 이를 거부하고 한민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좌익의 전횡이 가능했던 것이다.

 

좌익은 친일파의 철저한 처단을 주장했고, 그 주장이 이북에서는 실행되었다. 그로 인해 기득권 세력의 위기의식이 강화되어 한민당의 반동적 노선으로 쏠리게 된다. 기득권 세력 중에서 얼마간의 반성과 양보를 통해 민족국가 건설 대열에 동참하고자 하던 양심적 인사들도 미군정이 뒷받침해 주는 반동적 분위기에 휩쓸려 버림으로써 민족국가 아닌 반공국가를 지향하는 분단건국의 길이 열리게 된다. 미-소 대립에 의해 윤곽이 정해진 길이었지만, 그런 사태를 피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의 하나로 안재홍의 현실주의 노선을 평가할 수 있다.

 

 

 

1. 어떤 나라를 꿈꾸었는가?

 

안재홍은 해방 후 한 달 남짓 된 1945년 9월 22일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란 원고지 약 200매 길이의 글을 탈고했다. 해방 직전에는 신변의 위협 때문에 거처마저 불안정했고 직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일로 침식을 챙기지 못할 정도로 바쁘다가 8월말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물러난 뒤 기력을 쏟아 건국방략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낸 것이다.

 

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새로 세울 국가의 양대 원리로 제시했다. 다만, 지금까지 경험해 온 민족주의나 다른 나라에서 실행되어 온 민주주의 그대로로는 조선의 현실에 적합지 않기 때문에 발전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신’ 자를 붙인 것이다. 세계대전 후의 상황과 조선 고유의 환경에 맞춘 발전을 주장했다.

 

‘신민족주의’의 기본 전제는 요컨대 피지배민족의 입장에서 독립민족의 입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방적 억압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던 피지배민족 입장에서는 자존심을 세우고 저항의 자세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책임 있는 위치에 서는 독립민족 입장에서는 내 민족 못지않게 다른 민족도 존중할 줄 알고, 대립보다는 협력에 힘쓰는 자세를 갖춤으로써 세계평화에 공헌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제목에서는 나란히 제시했지만, 실제 내용은 거의 민족주의로 채워져 있다. 그의 마음이 ‘민족’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민주주의를 논한 짤막한 마지막 장에서는 앞에서 논한 신민족주의 원리 위에 신민주주의의 방향이 간략히 제시되어 있다. 당시 현실에서 중요한 논점은 “우리는 초계급적으로 정복되어 압박 착취되었고 다시 초계급적으로 해방되었으니” 이제 건설할 국가는 초계급적 통합민족국가가 된다고 하며 계급투쟁을 배격한 점이다.

 

그는 이후에도 기회 있는 대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기 위한 논설을 펼쳤다. 1945년 12월 14일 국민당 정책을 알리는 라디오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는 무엇인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둘이 서로 표리일체로 되는 것입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주장하고 있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봉건귀족과 대지주와 대자본가들을 중심으로 그네들의 계급적 이익을 옹호하는 국가기구를 만들어 놓고, 그 힘찬 기구의 위력을 가지고 농민과 노동자와 모든 소시민들의 이익을 사실에 있어 압박 착취하면서 국가와 민족의 이름을 핑계 삼아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조선이 40여 년 동안 일본 식민지가 되고 있는 동안, 지주나 농민이나 자본가나 노동자나 한꺼번에 압박과 착취를 당하였고, 오늘날 해방이 되는 때에 농민과 지주, 노동자와 자본가가 또 한꺼번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지금부터 농민과 지주와 노동자와 자본가가 똑같은 지위에서 정치상에나 경제상에나 온갖 사회적 방면에 평등으로 살 수 있는 새 나라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 계급이 있으되 계급을 지양하여 그 이해관계를 잘 조화시키고, 대중공생의 완전한 새 나라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민세 안재홍 선집>(<선집>) 7권 36-37쪽)

 

이민족 지배에서 벗어나는 마당에 민족국가 건설이 계급투쟁에 앞서는 시급하고 중대한 과제라는 것이다. 일본이 강점하고 있던 이권을 되찾으면 모든 계급이 고르게 이득을 얻을 여유가 있으므로 민족주의 이념에 입각해서 특정 계급의 과욕을 삼가면 민족국가가 순탄하게 세워질 수 있고, 계급 간 이해관계의 조정은 그 뒤에 서서히 진행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희망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극좌와 극우의 편향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을 1946년 8월 해방 1주년 시점에서 발표했다.

 

“오인은 조선의 예지 있고 양심적인 유산층의 사람들이 그 자숙자재로 새 경제균등사회 건설 대업에 순응하여야 할 것을 각오함을 볼 때 심대한 희망을 갖는다. 많은 지주와 자산층의 인물들은 이러한 과감한 각성과 결심 있기를 나는 기대한다. 그러나 모든 좌익적인 지도자들이 성급한 극좌편향의 과오를 떨어버리고 진보적인 민족주의자들과 긴밀 협동함으로 말미암아 극우편향하는 일이 없도록 선발 방지하면서 우리 조국을 점진적인 합법적 수단에 의하여 완전한 사회평권의 국가에로 추진시킬 수 있는 것을 결정 및 실천하여 주기 바란다. 그는 그러한 좌우호응적인 협동의 실천 없이는 극좌편향 있는 곳에 반드시 극우편향도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고, 그 결과는 필경 1차의 심대한 불상사가 부르터나게 될 것인 까닭이다.” (<선집> 7권 71쪽)

 

경제체제에 대해서는 민족주의나 민주주의처럼 명언해서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계급 간 타협을 바란다는 점에서 사회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 듯하다. 당시 일반인은 ‘사회주의’를 소유권을 절대시하는 자본주의와 전면 부정하는 공산주의가 아닌, 제한된 범위에서 소유권을 인정하는 체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1946년 3월 19일 방송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1945년 8월 16일 나의 방송에서 40년 예속의 밑에서 폭압을 당하여온 우리 민족이므로 관공리나 소위 친일파적 처지에 있던 이들도 특별한 죄목이 없고 또 금후 국가-민족에게 충성을 다하는 한 모두 안심하고 낙업을 할 만치 그 안전을 보장한다는 의미의 발표를 한 일이 있지만 이 뒤에 더욱 그 방침을 확대할 것이고 반역자의 죄목을 만들어 함부로 생명-재산을 침해하는 폐단을 엄중 방지할 것이다. 산업경제의 급속한 재건설과 중요 일용품의 생산은 계획경제를 시행하기로 함은 그 필요를 논할 여지 없고, 전 민족이 관념적인 계급분열을 지양 회통하여서 협동 단결함으로써만 그 목적이 달성될 것이다. 민족대중이 스스로 지도자요, 또 근로층의 사람으로 되어 직장에 돌아가고 연장을 손에 쥐고 산업경제 재건설과 국가기구 재운영에 전 심혼을 쏟아 넣어야 한다. 중공업-광산-삼림-수리-어업-은행-철도-통신 및 기타 운수기관과 공익시설 등 주요한 대규모의 것은 국영으로 하고, 부력의 집중 편재로써 재산을 독점하여 대중생활을 농단하는 폐해가 없도록 모든 산업적, 상업적 기업은 국가 감독을 강화하기로 한다.” (<선집> 7권 52쪽)

 

계획경제와 주요산업 국유화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참고로, 1946년 8월 8,453명을 상대로 군정청에서 시행한 여론조사에서 “귀하가 찬성하는 체제는?” 질문에 대해 70%인 6,037명이 “사회주의”로 응답했다. “자본주의”는 14%(1,189명), “공산주의”는 7%(574명), 그리고 “모른다”가 8%(653명)이었다.

 

 

 

2. 어떻게 만들려고 했는가?

 

민족주의자로서 큰 명망을 갖고 있던 안재홍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민당은 공산당(박헌영), 한민당(송진우-김성수), 인민당(여운형)과 함께 4대 정당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순정(純正)’을 중시한 그는 국내에서 일제에 시달리며 온갖 곡절을 겪은 사람들보다 흠 없는 해외 독립운동가의 역할에 더 큰 기대를 걸었다. 그래서 국민당 창당 때부터 자신은 관리자일 뿐이며 훌륭한 지도자가 해외에서 돌아올 때 국민당의 민족주의세력이 그 지도를 받게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실제로 이승만과 김구가 귀국했을 때 안재홍은 그들의 지도력 확립을 위해 진력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이승만의 인품에 실망하고 있다가 1946년 6월 이승만이 남조선 단독건국을 시사한 ‘정읍 발언’ 이후로는 관계를 끊었다. 국민당을 김구의 한독당에 합당시켰으나 미소공동위원회를 거부하는 한독당의 반탁노선 때문에 도로 갈라서게 된다. 합당 당시의 상황을 안재홍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1945년 9월 하순, 동지 제씨의 권유를 받아 국민당을 조직하고 그 위원장이 되었다. 그 본부가 중구 장교동에 있어 청년기자 제군이 자주 드나들 적에, 나를 보고 ‘당수’라고 하면 나는 꼭꼭 그것을 부인하고, ‘나는 당수가 아니니, 해외의 혁명영수들이 들어오시면 어느 분이든지 정말 당수로 추대하고, 일대 정치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재삼 언명하였던 것이다. (...) 한국독립당이 그 역사, 그 구성인물로서 최대한 대표적인 당일 것으로 인정되어 일찍부터 국민당과의 합동을 내의하였던 것이다. (...)

 

그러나 합동선언이 겨우 발표되자, 원 한독당의 간부 제씨, 돌연 너무 고답적으로 나왔던 까닭에, 국민당의 간부와 당원 또는 그 지지자 제씨들은 섯덜하고 들레면서 합동을 도로 무르고 국민당대로 복당하자고 강경 주장하는 편이 퍽은 많았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계획한 바이고, 또 이미 천하에 선포 공약한 바이니, 그새 또 뒤집는 것은 불가하다’고 믿어, 1개월을 끌어 결국 그를 단행하였다.” (<선집> 2권 438-439쪽)

 

머리만 갖고 들어온 한독당에 국민당으로 몸을 만들어준 셈이다. 국민당 당원들은 한독당에게 이용만 당하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안재홍은 그렇게 이용당함으로써 한독당이 민족주의 정당으로 역량을 키우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4대 정당 중 또 하나 우익 정당이던 한민당이 중국에서 돌아온 임시정부가 그대로 조선 인민을 대표하게 한다는 ‘임정 직진론’을 편 반면 안재홍은 임시정부가 과도정부의 중심축 노릇을 하되 여타의 인재를 참여시켜야 한다는 ‘임정 보강론’을 내세웠다. 한민당이 임정 요인들을 정권 독점의 미끼로 유혹했을 뿐, 임정을 진심으로 받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후에 김구가 분단건국 반대에 나섰을 때 극한적으로 공격한 데서 알아볼 수 있다.

 

1946년 여름 이후 김규식,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에 나서서 ‘중간파’를 형성, 분단건국 저지를 위해 노력했다. 안재홍이 가장 꾸준히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일이다. 좌우익 모두 지나친 낙관으로 합작을 외면하는 문제를 지적했다. 민족주의 진영, 특히 임정 세력은 해방 이전의 독립운동기관 중 임정이 가장 긴 역사와 뚜렷한 실체롤 가졌다는 점을 발판으로 대세를 장악하려 했고, 좌익은 국내 항일운동의 주류를 담당해 왔다는 실적을 발판으로 민족 해방을 공산혁명의 기회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의 상황을 살펴보면 ‘해방’으로부터 ‘독립’에 이르는 과정이 만만치 않다는 안재홍의 경고가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개전과 동시에 독일군과 소련군에게 유린당했으나 폴란드인은 연합군의 승리에 큰 공헌을 했다. 종전 시점에서 50만 명의 폴란드인이 소련군, 영국군, 프랑스군 대열에 끼어 있었다. 국내의 무장항쟁도 끈질겼다. 그런데도 폴란드는 소련이 강탈한 영토를 되찾지 못하고 소련의 조종을 받는 공산정권을 받아들여야 했다.

 

오스트리아 경우는 조선과 가장 흡사한 사정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직전 99.7%가 찬성한 국민투표로 독일과 합방했던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의 일원으로서 전쟁에 참여했다. 종전 직전에야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일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종전 후 연합국의 10년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고 좌우합작정부를 10년간 유지하며 미-소를 포함한 점령국들을 만족시킨 결과 1955년에 완전 독립을 성취했다.

 

 

 

3. 구체적 실행계획은 무엇이었는가?

 

안재홍은 계급모순을 비롯한 제반 문제가 ‘민족 독립’의 지상명제 아래 해소되거나, 최소한 잠복함으로써 새 국가가 안정된 자리를 잡을 시간이 확보되기 바랐다. 그래서 인민의 많은 기대를 받는 좌익 노선의 성급한 독주를 막기 위해 우익 민족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신간회의 좌절과 비슷한 상황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거듭 겪으며 좌익에 대한 경계심을 품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건국준비위원회 출범 당시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건준 성립된 8-15 당일, 여운형 씨는 개방되는 출옥 군중에의 순회연설과 외타 정치공작에 분망하여 만나볼 수도 없었고, 정백 씨는 세칭 장안파 공산당 결성 때문에 자리를 비워두고 있어, 나는 홀로 다른 대중과 건준을 지키면서 문자 그대로 고심참담하였었다.

 

16일 미명에 여-정 양씨와 외타 좌방 수씨는 나에게 그 실정을 말하면서 ‘금후 절대 긴밀 협동할 것이니 실망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좌방 제씨에게 ‘신간회 당년 민-공 분열을 계승함이 없이, 좌방은 잘 협동할 것인가’ 하고 질문할 때마다, 그들은 ‘절대 염려 말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신민족주의’를 입속말로 속삭이면서 민-공 협동의 역사적 요청인 것을 역설하였다. 건준에서도 ‘민족주의자를 일선에 당로케 하고 좌방 제군은 제2선에 후퇴하라’고 정면으로 주장하여 퍽은 많은 눈총을 맞았고, 그해 10월 현 대통령 이승만 박사 귀국하신 후, 돈암장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드느라고 열중할 적에, 박헌영 씨에게 ‘지금은 민주주의 민족독립국가의 완성이 요청되는 때이니, 좌우 간의 5대 5 등 비율은 문제가 아니되고, 민족주의자의 영도하는 국가를 성립시킴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제2선으로 후퇴하도록 하라’고 진지하게 발언하였으나, 박씨는 짜증을 더럭더럭 내면서 ‘그것은 다 무슨 말이냐’고 했던 것이다.” (<선집> 2권 472-473쪽)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 그를 중심으로 한 민족진영 결집을 위해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에 앞장섰으나 이승만이 이를 공정하게 주재하지 않고 사조직화함에 따라 거리를 두게 되었다. 연말에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지자 김구 중심의 반탁운동에 앞장섰으나 몇 주일 후 모스크바회담의 실상이 알려지자 온건한 입장으로 돌아섰다. 1947년 6월 ‘한독당 중앙집행위원 유지 일동’ 이름으로 나온 성명서는 안재홍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내용 중 반탁운동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다.

 

“미소공위에의 참가는 곧 찬탁행위인 줄로 규정함은 큰 견해의 착오 아니면 공소(空疎)한 무망(誣罔)이라고도 인정될 바이다. 문자로 나열된 최진보적 또는 급진적인 정강정책만이 그대로 곧 대중의 복리를 옹호하는 성화를 나타낼 수는 없다. 문자와 구두의 표방과는 반대로 반동적이고 비민주적인 일부 세력을 향하여 선망(羨望)추수(追隨)함으로써 그 독자적 노선을 일편 공문(空文)에 타(墮)하게 하고 부동(浮動)미정(未定)하는 심대한 과오를 방지하고 균등사회 공영국가를 목표한 신민주국가 건설의 오당(吾黨) 본연한 형태대로 광정(匡正)용진(勇進)함을 우리는 요청한다. 이것은 결정적인 요구이다.” (선집 7권 93쪽)

 

이승만과 김구의 영도력에 대한 기대가 줄어들면서 김규식, 여운형과 함께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건국을 추진하는 입장에 선 안재홍은 좌우합작을 통해 ‘순정민족주의’ 세력의 형성을 꾀했다. 이승만-한민당 분단건국 추진세력의 군정청과 경찰 장악을 견제하기 위해 군정청의 조선인 최고위직인 민정장관직을 수락한 후로는 군정청과 경찰의 중립화에 노력을 집중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4. 좌절된 이유는 무엇인가?

 

안재홍의 좌절은 민족주의의 좌절이었다. 1945년의 ‘해방’이 ‘독립’을 위한 조건까지 만들어주지 못했다는 데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 망국의 여러 조건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의 패망이 조선 독립을 위한 충분조건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과 소련이 일본과 같은 식민지 방식으로 조선을 지배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어떤 방식으로라도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했다. 조선 민족주의는 두 나라의 영향력 행사에 장애물이었으므로 두 나라는 민족주의를 중시하지 않거나 민족주의를 반대하는 조선 내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한반도에 점령군을 보낸 두 나라를 영수로 하는 두 진영 사이의 냉전체제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자리 잡게 되는데, 실제로는 두 나라 사이에 힘의 격차가 컸다. 세계대전의 피해를 가장 적게 본 미국이 전 세계 공업생산의 60퍼센트를 점할 만큼 압도적인 경제력을 가지고 초강대국의 자리를 차지했다. 원자폭탄의 존재로 군사력도 비대칭 상태에 있었다. 냉전체제 성립 과정을 이끈 것은 미국의 힘이었고 소련은 수동적 입장이었다.

 

한반도의 남북대결에서도 미국이 주도권을 발휘했다. 소련은 점령 초기부터 인민위원회를 통한 주민 자치를 육성하면서 소련에 대한 우호적 태도가 저절로 자라날 것을 유도한 반면 미국은 점령 지역에 대해 일본의 통치권을 그대로 물려받으려 했다. 총독부 체제를 그대로 군정청으로 바꾸면서 과거의 친일세력을 주축으로 친미세력을 키우는 정책을 취했다. 해외의 임시정부도 국내의 건국준비위원회도 무시함으로써 조선인의 민의를 수렴하는 제도적 장치도 만들지 않았다. 점령 1년이 지난 후에야 ‘입법의원’을 만들었지만 대의기관의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

 

미국의 남한 지배에는 무력과 재력 두 가지 수단이 동원되었는데 무력 방면을 대표한 것이 경찰이었다. 점령 1년 동안에 남한의 경찰은 두 배 이상 커졌고, 지휘권을 맡은 조병옥과 장택상은 과거의 어느 친일파가 총독 모신 것 못지않은 열성으로 미군정을 섬겼다.

 

이 경찰을 미군정에서 ‘National Police’라 부른 것은 일반 민주주의국가에서 경찰을 지방행정의 일부로 편성한 것과 달리 전국적인 일원 조직으로 만들었기 때문인데 이것을 ‘국립경찰’이라 번역한 것은 오류다. ‘국가경찰’이었다. 조병옥은 경찰이 주민의 뜻이 아니라 임명권자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경찰은 이 공언대로 주민 억압에 앞장섰고, 1946년 10월의 대구 사태나 1948년 4월의 제주 사태 등 소요사태의 직접 원인이 되었다.

 

무력을 통한 억압에 비해 재력을 통한 억압은 덜 알려져 있다. 일본 항복 직후 총독부는 엄청난 분량의 조선은행권을 발행해서 통화량을 55억 원에서 85억 원으로 늘렸다. 원래 조선은행권은 일본에서 인쇄해 가져오는 것이었는데, 이때는 서울의 민간 인쇄소까지 동원해서 마구 찍어댔다.(공산당이 위폐를 찍었다고 하는 ‘정판사사건’도 이때 반출된 원판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대부분은 인쇄 품질이 떨어져 해방 전 찍은 돈과 맨눈으로도 구별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미군정은 이 돈을 정화로 인정해 줬다.

 

짧은 기간에, 더구나 경제가 침체한 상황에서 이 돈이 정상적 유통으로 풀려나간 분량은 극히 미미했을 것이다. 친일파 집단의 손에 뭉칫돈으로 쌓여 있었을 것이다. 김계조, 박흥식 등이 다른 사건으로 수사를 받을 때 이런 뭉칫돈이 우발적으로 조금씩 드러나곤 했다. 정치계에 흘러들어간 정황도 역시 우발적으로 눈에 띌 뿐이다. 임정 요인들이 귀국했을 때 한민당 측에서 7백만 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했을 때 일부 요인들이 “더러운 돈”이라고 거절을 주장하는 바람에 시비가 일어난 것이 그런 사례다. 이승만을 지원하기 위해 친일파 경제인들이 만든 대한경제보국회에서는 그런 시비가 드러난 일이 없다.

 

이 검은 돈이(당시에는 “빨간 돈”으로 불렸다.) 테러조직에 쓰인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였다. 1945년 11월 20~22일에 열린 전국 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분쇄하기 위해 수백 명을 동원하면서 50원씩의 일당을 지급한 일이 드러났다. 조직테러가 처음 나타날 때의 일이라서 아직 서툴렀기 때문에 일당 지급 사실이 쉽게 드러났을 것이다. 그 후 우익테러가 조직화한 것은 ‘폭력의 상품화’라 할 것이다. 김두한은 조직원을 만날 때 주머니에서 돈을 세어보지도 않고 한 주먹씩 꺼내주는 것으로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다.

 

애초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된 것이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힘의 차이에 있었다. 근대적 방법으로 조직된 일본제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에 저항할 힘이 조선에게 없었기 때문에 독자적 발전의 길을 찾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인의 ‘개화’ 열망을 일본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다가 결국 조선을 식민지에 만들기에 이르렀다. 을사조약 체결 무렵인 1905년 11월 22일자 <대한매일신보> 논설에서 그 상황을 살필 수 있다.

 

일인이 한인을 대하면 언필칭 문명을 개도한다 하며 독립을 부식한다 하며 동양에 평화를 유지한다 하고, 한인도 또한 시국을 관념하여 부득불 동주동종지국과 형제같이 친애하며 순치(脣齒)같이 상엄(相揜)할지라 하더니, 작년 일로 개전할 때 일본 군사가 입경하니 한국 남녀노유가 다투어 환영하고 제반 군수 운송의 일을 모두 어려움을 잊고 응하였는데 (...) 일본이 과연 이때에 시정개선을 실심으로 충고하며 문명진보를 실심 권도하였으면 한인들이 심열성복하기를 큰 가뭄에 단비를 만난 사람처럼 할 터인데 (...) 일본이 그런 일은 하지 않고 급급히 착수하는 것은 전국에 이권을 빼앗으며 일체 권세를 차례로 점취하며 간세한 자들을 이용하고 정직한 자를 쫓아내고 국민의 가옥과 토지를 늑수강취하며 심지어 인명을 참살하는 것도 거리끼지 않으며 재정을 고갈케 하니 생맥이 돈절하고 학무를 감축케 하니 교육이 더욱 쇠퇴라 (...) (권태억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와 문명화> 130쪽에서 재인용)

 

“간세한 자들을 이용하고 정직한 자를 쫓아”낸다는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강한 힘을 이용해서 도덕성이 약한 집단을 친일파로 육성했던 것이다. 해방 후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미국은 조선인의 민심을 등지고 개인의 이권을 추구하는 집단을 친미파로 키워냈다. 안재홍만이 아니라 미국의 이익보다 조선인의 복리를 앞세워 받드는 사람들은 모두 좌절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소련이 장악한 이북에서는 민족모순보다 계급모순을 앞세우는 공산주의자 중심의 통일전선에 민족주의자 일부가 하위파트너로 참여했다. 두 점령국의 물적 지원을 받은 비민족주의 세력의 위세 앞에 민족주의자들은 주변화되고 말았다.

 

 

 

5.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해방 당시 조선인의 염원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로 집약되어 있었다.(여기서 ‘사회주의’란 사적 소유권을 절대시하는 자본주의나 전면 부정하는 공산주의와 달리 제한된 범위에서 사적 소유권을 존중하는 체제를 말한다.) 그 후 70년 동안 민주주의는 남한에서 상당한 발전을 보았지만,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는 정체 내지 퇴보 상태에 빠져 있다.

 

인민이 원하는 것은 시대상황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데 비해 필요로 하는 것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지금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복잡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가장 큰 공통분모로 정리해 본다면 역시 70년 전과 마찬가지로 위의 세 가지 이념을 뼈대로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세 가지 이념은 전통체제가 한계를 드러낸 개항기 이래 150년 동안 사회 발전의 지표로 존재해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긴 기간 동안 이 이념들이 제대로 성취되지 못한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서세동점’이라는 불리한 세계정세에 있었다. 서양 근대문명이 전 세계를 석권하는 제국주의-냉전 상황에서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대다수 사회가 주체적 발전의 길을 찾기 힘든 억압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한국의 경우 개항기에는 동아시아 천하체제의 붕괴 속에서 유교국가 중흥의 길이 막혀 있었고, 그에 이어 식민지시대와 냉전시대를 겪었다.

 

이제 21세기 들어 모처럼 외부의 억압이 크게 줄어든 상황을 맞고 있다. 한반도에서만은 냉전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냉전을 강요하는 외부 압력은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국가들의 국력신장에 따라 망국의 배경이 되었던 ‘서세동점’ 현상이 해소되고 있다. 과연 이 사회의 주체적 발전이 얼마나 이뤄질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내내 겪었던 상황에 비하면 유리한 조건임이 분명하다.

 

지금의 상황을 발전의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혼란스러운 ‘욕망’의 밑바닥에서 이 사회의 절실한 ‘필요’를 찾아내야 한다. 바둑의 고수가 되려면 “큰 곳보다 급한 곳을 알아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집 많은 편이 이기는 놀음이지만, 틀을 일단 제대로 짜놓은 뒤에야 집 차지하러 나설 수 있다는 뜻이다.

 

암울한 시대의 선각자들이 좌절 속에서 고심하던 내용에서 배울 것이 많다. 승승장구하며 권력을 누린 사람들에게서는 욕망을 넘어선 표현을 찾기 힘들다. 반면, 억압체제 앞에서 좌절한 사람들은 바로 이념에 대한 성실성 때문에 좌절한 경우가 많고, 좌절 속의 암중모색을 통해 본질에 더 많이 접근할 수도 있었다.

 

해방 후 분단건국까지 3년간의 ‘해방공간’은 식민지체제에서 냉전체제로 억압체제의 전환기로서 일시적으로 표현이나마 폭넓게 허용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민족사의 암흑기 중간에 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민족의 진로에 대한 합당한 의견을 내고도 불리한 현실조건 때문에 좌절을 겪은 중간파의 논설이 근현대사의 역사 중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많이 담고 있는 것으로 나는 본다. 안재홍은 그중에서도 많은 논설을 남긴 사람이다.

 

특히 민족주의 재검토를 위해 안재홍이 제시한 ‘신민족주의’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나만 잘났다고 우기기보다 남들도 존중할 줄 알고, 대립보다는 협력을 위한 동력이 될 민족주의가 진행 중인 ‘세계화’에 적응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지금까지 ‘경제적 세계화’에 그친 세계화 단계에서 보다 안정된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정치적 세계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주체적’ 참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최측이 "10~15매" 길이 원고를 준비해 달라고 해서 좀 의아했는데, 원고지가 아니라 A4용지 기준이란 사실을 나중에 알고 다시 썼습니다. 앞서 올렸던 글은 지웁니다.

Posted by 문천

 

권태억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와 문명화(1904~1919)>(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

 

 

‘문명화’? 책을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근현대사 연구자 중 유별나게 연구실 밖을 내다보는 기색이 없던 권 교수가 이런 민감한 단어를 제목에 걸고 책을 내다니!

 

10년 전부터 ‘문명화’가 민감한 말이 된 것은 뉴라이트 때문이다. 식민지배와 독재정치를 합리화 내지 미화하는 뉴라이트 ‘역사 뒤집기’의 출발점이 바로 ‘문명화’의 개념에 있다. 아무리 나쁜 정치나 통치라도 문명 발전의 방향에 맞으면 좋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독재정치나 이민족 지배는 야만스러운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고, 20세기 한국인의 경험은 분명히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직관이나 통념과 반대로 식민통치와 독재정치를 문명과 결부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문명’의 의미를 입맛대로 잡으면 된다.

 

예컨대 뉴라이트 핵심 이데올로그 이영훈은 문명의 기초 요소로 “자유, 인권, 법치, 사유재산, 시장, 자기 책임” 등을 꼽는다.(<대한민국 이야기>(기파랑 펴냄) 46쪽) 통념에 비해 아주 좁은 범위의 문명이다. 그 좁은 범위를 찬찬히 따져보면 바로 ‘자본주의 문명’이다. 그는 위의 요소들이 갖춰지지 않았던 개항기 이전의 조선은 야만 상태였고 일본인이 비로소 조선에 문명을 전해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대로라면 애덤 스미스 이전의 인류에게는 문명이란 것이 전혀 없었다는 얘기인데, 우스우면서도 웃기 어려운 주장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얘기임에도 이 사회에서 행세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얘기를 좋아하는 것도 참 희한한 일이다. 얼마 전 총리 후보로 지명됐던 문창극이나 이번에 KBS 이사장으로 선임된 이인호 같은 사람들. 그래도 그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을 보면 일반인의 상식은 건재한 모양이다.

 

말이 안 되는 얘기가 말이 되는 것처럼 들리게 해주는 꼬투리가 더러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개항기의 개화운동 같은 것. 개화운동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한 연구가 많이 쌓여 왔는데도, ‘개화’가 조선의 망국을 막기 위한 절대적 과제였다고 하는 것이 아직 우리 사회에서 일반인의 인식으로 남아 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면서 내세운 ‘문명화’가 바로 ‘개화’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왕조가 풀지 못한 숙제를 일본이 대신 풀어주었다고 하는 주장이 그럴싸하게 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개화’에 대한 환상은 이 사회 역사인식의 큰 허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갑신정변의 성격을 놓고 이 환상이 크게 작용하는데, 나는 이 정변이 주체적 개혁운동보다 일본의 앞잡이 노릇이었다고 본다. 식민지시대 일본 사학자들은 갑신정변을 높이 떠받들면서 그 서술에서 일본 측 개입 흔적을 지우려고 애썼다. 조동걸은 일제의 대표적 관찬 사서인 조선사편수회 간 <조선사대계 최근세사>의 서술 내용을 이렇게 살폈다.

 

갑신정변의 서술을 보면 개화당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대궐을 지켜 달라고 요청하므로 죽첨 공사가 1개 중대를 이끌고 갔다는 것이다. 즉 일본의 사전모의는 언급하지 않았다. (...) 그 때 부산 동본원사 별원에서 조선어를 배우며 훈련한 일인 청년들이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피살당한 내용에 대해서도 역시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남의 나라 궁전에 군대를 진입시키는 사례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로 그러한 일을 범한 갑신정변 때의 일본군이었다. 조선에 대한 통상 침략도 일본에 의해서 비롯되었고, 군대의 궁궐침범도 일본에 의해 비롯되었다. 그것이 역사에서 평론되지 않았던 것은 역사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현대한국사학사>(나남출판 펴냄) 293쪽)

 

갑신정변에 관한 책에서 일본의 개입을 이 정도라도 밝힌 것을 나는 본 일이 없다. 갑신정변의 ‘개화’라는 ‘대의(大義)’를 떠받드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압제에서 풀려나고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 식민사관이 끈질기게 남아있는 대표적 사례다.

 

식민사관의 극복이 미흡하다. 식민사관이 주장한 내용은 배척하면서도 그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개항기의 개화사상에는 좋은 가치를 담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개화’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해서 무작정 받들어서는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개화’는 ‘독립’과 함께 일본이 자기네 조선 ‘진출’을 위해 내세운 구호였다. 독립에는 물론 중요한 가치가 있지만, 독립협회에서 친일파가 맡은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쓴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개화-문명화-근대화는 모두 연속성을 가진 개념이었다. 일본이 아직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지 않은 단계에서 시대 변화에 맞추려는 모든 노력이 ‘개화’로 표현되는데, 그중에는 일본의 진출에 유리한 요소가 많았다. 그리고 식민지시대 일본 학자들은 그런 요소만을 진정한 개화로 추켜세웠다. 예컨대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한 개혁 노력도 시대 변화에 맞추려는 노력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사대당’이라 하여 ‘개화당’과 대비시키기도 했다.

 

러일전쟁을 전후해서 일본의 지속적 지배력이 확립되자 일본이 이끄는 변화 방향에 ‘문명화’란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다. ‘문명화’의 기본 성격을 저자는 이렇게 정리했다.

 

1910년대 ‘문명적’ 제도의 도입은 당연히 일제의 제국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도입된 제도나 변화들이 근대적, 문명적인 것이었으므로 이를 조선인을 위한 문명화, 문명의 도입으로 합리화할 수 있었다. 또한 그러한 문명적 제도들이 한말부터 지식인들이 갈망하고 하루빨리 이룰 것을 주장하던 것들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대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제의 이해를 앞세운 것으로서 한국인들의 이해관계를 배려한 것이 아님은 물론 심지어 그 이해에 반하는 것도 있었으므로 불평과 저항은 필연적이었다. 따라서 일제는 강제적이고 폭력적 수단들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강요에 의한 협조는 한계가 있으므로 자신의 시정을 ‘문명화’로 합리화하는 논리가 필요했다. 문명화론은 이에서 더 나아가 조선인들의 차별대우 시정 요구라든가 정치적 권리 요구를 거부하는 반대논리로서도 기능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일제는 자신들을 문명화의 화신으로서 그려내는 작업도 진행하였다. (96쪽)

 

일본이 조선 지배를 ‘문명화’로 합리화한 것은 독창적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유럽 열강이 정복사업을 문명화의 사명으로 분식한 사실은 ‘백인의 짐’(white man's burden)이란 말로 잘 알려져 있다. 저자는 제1장 “제국주의 침략기 문명화 사명론과 일본”에서 제국주의시대에 유행한 문명화 사명론을 일본이 배워오는 경위를 밝혔다. 문명화와 관련된 일본의 기만성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배워온 모델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보여준다.

 

‘문명(文明)’과 ‘civilization’ 사이의 차이를 저자는 생각하게 해준다. 동양인은 화이(華夷)론의 맥락에서 ‘문명’의 의미를 생각하기 쉽다. 정신문화 수준이 높은 상태로 인식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civilization’이란 말이 쓰인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임을 저자는 밝힌다. 계몽주의 가치관이 투영되어 ‘진보’의 뜻을 내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외 정복사업의 진행에 따라 유럽인과 비 유럽인을 구분하는 기준 개념이 되었다.(3~6쪽) 20세기 후반부터 차츰 보편적 의미로 더 많이 쓰이게 되었지만, 아직도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것, 또는 서양적인 것으로 ‘문명’의 의미를 제한해서 본다.

 

19세기 말 통용되던 ‘문명’의 의미를 저자는 이렇게 정리했다.

 

여기에서 ‘문명’이란 것은 서구 국가들이 근대에 이르러 성취한 모든 것, 즉 과학혁명, 산업혁명을 통해 달성한 높은 생산력과 구체제를 붕괴시키고 성립한 ‘시민사회’ 그리고 그것이 상징하는 여러 가치, 즉 당시 서구가 실현하였다고 자부한 모든 것을 의미하였다. 그 구체적 내용을 들어 보면 문명이란 인간의 육체를 포함한 자연에 대한 지배, 또 ‘사회적 행동’이라 불릴 수 있는 것에 대한 지배이다. (6~7쪽)

 

본론에서는 일본의 한국 지배 초기의 문명화 선전과 그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이 다뤄져 있다. 일본의 ‘악의’를 비난하는 데 쏠리지 않고 문명화의 명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자세와 노력이 돋보인다. (나 같으면 ‘조선’, ‘조선인’으로 쓸 만한 자리에 저자는 ‘한국’, ‘한국인’으로 쓰는 기준을 세웠으므로 이 글에서는 나도 그에 따른다.)

 

당시의 한국은 많은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대한제국은 개혁을 추진할 의지와 능력이 빈약했다. 그래서 통감부-총독부의 강력한 개혁 추진에 인민이 반가워할 만한 것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성신문> 1908년 9월 16일자 논설이 대표적인 예다.

 

각 지방 군수가 민사 및 태형 이하의 범죄사건은 재판권을 가졌더니 사법권 독립 이후로 그 권능이 소멸되어 군수 군리 등이 그 부정재원이 감소한 고로 악감정을 갖는 자가 있고, 일반인민은 재판권이 독립됨을 아는 자가 얼마 없지만 그중에는 구(區) 재판소가 설치되어 군수에게 재판권이 없는 고로 사법권이 독립되었다 칭하고 인민이 문명한 판결을 받아 권리가 보호되겠다고 환영한다더라. (137쪽에서 재인용)

 

이뿐이랴. 위생, 교통과 통신의 발전 등 물질문명의 향상과 부정부패의 축소, 치안의 확립 등 ‘민생’ 방면에서 일본 통치가 가져온 혜택이 많이 있었다. 특히 통감부 시기(1904-1910)에 ‘시정(施政) 개선’이란 이름으로 시행된 문명화 정책은 직전의 대한제국 통치와 대비되어 민심의 지지를 많이 모을 수 있었다.

 

이런 ‘근대화’ 정책의 평가에 있어서 맥락(context)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나는 덧붙이고 싶다. 새로운 제도 도입에 대한 당시의 반응은 옛 제도 자체와의 비교에 앞서 옛 제도가 당시 시행되고 있던 상황과의 비교에 좌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옛 제도가 근본적으로 나쁜 것이어서가 아니라, 대한제국의 시행방법이 워낙 형편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발로 새 제도가 환영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문명화’ 정책에 좋은 점이 많았다면 왜 1919년에 거족적 저항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물론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시행과정에서 방법상의 흠결 때문에 다소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3-1운동과 같은 전면적 저항은 지엽적인 문제 때문에 일어난 것일 수 없다. <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 22일자 논설에 문제의 성격이 나타나 보인다.

 

일인이 한인을 대하면 언필칭 문명을 개도한다 하며 독립을 부식한다 하며 동양에 평화를 유지한다 하고, 한인도 또한 시국을 관념하여 부득불 동주동종지국과 형제같이 친애하며 순치(脣齒)같이 상엄(相揜)할지라 하더니, 작년 일로 개전할 때 일본 군사가 입경하니 한국 남녀노유가 다투어 환영하고 제반 군수 운송의 일을 모두 어려움을 잊고 응하였는데 (...) 일본이 과연 이때에 시정개선을 실심으로 충고하며 문명진보를 실심 권도하였으면 한인들이 심열성복하기를 큰 가뭄에 단비를 만난 사람처럼 할 터인데 (...) 일본이 그런 일은 하지 않고 급급히 착수하는 것은 전국에 이권을 빼앗으며 일체 권세를 차례로 점취하며 간세한 자들을 이용하고 정직한 자를 쫓아내고 국민의 가옥과 토지를 늑수강취하며 심지어 인명을 참살하는 것도 거리끼지 않으며 재정을 고갈케 하니 생맥이 돈절하고 학무를 감축케 하니 교육이 더욱 쇠퇴라 (...) (130쪽에서 재인용)

 

요컨대 표리부동하다는 것이다. 소(小)중화를 자처하는 한국인에게는 일본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임진왜란의 기억도 있었다. 개화의 연장선에서 문명화를 반기는 마음 밑바닥에는 의심이 깔려 있었다. 일본 통치정책의 기만성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문명화 정책이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었는데 몇몇 개인의 일탈과 부분적인 착오 때문에 저항을 맞게 된 것이었을까? 지금의 한국에서도 세월호 사건을 선원과 선주 등 좁은 범위의 책임으로 좁히려 애쓰는 경향을 정권 담당자들이 보이는데, 구조적 문제를 소홀히 하면 문제가 더 악화된다는 것을 식민지시대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다.

 

일본의 모델인 유럽 열강의 문명화 책임론에도 본질적인 기만성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문명화 정책의 한계를 일단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일본 자체가 유럽 열강에 비해 ‘문명화’의 수준이 낮았다. 조선의 문명화를 뒷받침해줄 역량부터 충분치 못했던 것이다. 일본의 조선 통치는 같은 시기 유럽국의 식민지배에 비해 폭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경제정책에서도 종합적 발전을 바라보지 못하고 착취에 집중해야 했다.

 

일본은 한국을 개항한 이후 줄곧 한국의 개화, 문명화를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세력을 심고자 부심했는데, 그러한 시도가 전면화하는 것은 러일전쟁을 전후한 1904년경부터였다. (...) 그리하여 일제가 표면에 내세운 것이 바로 ‘시정개선’이라는 ‘선정’의 약속이었다. 고종을 중심으로 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수호를 위한 개혁 시도가 이어졌지만, 그것이 볼 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한 속에서 정부의 무능과 부패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일제는 바로 이 점을 포착하고, ‘악정’의 개혁을 침략의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1910년 한국을 합병한 일제는 조선을 자신의 영구한 세력권으로 만들고자 했다. 자신의 완전한 영토로 통합하고 이를 대륙진출의 교두보로 삼는다는 것이 일제의 꿈이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조선 식민화 이후 ‘개발’ 사업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사업을 ‘문명화’로 분식하였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한국인들로 하여금 ‘문명화’의 혜택을 실제로 느끼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72-173쪽)

 

저자가 하나의 가설이라며 내놓는 ‘문화적 충격론’이 무척 흥미롭다. 일본 정책의 좋고 나쁘고 이전에, 관습에 어긋나는 변화가 너무 많았다는 문제다. “전통국가가 간여하지 않았던 세밀한 일상생활에까지 국가의 권력과 통제가 확대”되어 “모든 것이 간섭투성이”인 상황이 된 데 반감의 큰 원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이 3-1운동이 “서울과 의주로 연결되는 서북부에서 남부와 동북부로, 그리고 교통이 편리한 철도 연변에서 산간지역으로 파급되어 갔다”는 분석도 뒷받침해 준다고 저자는 본다. 교통이 편리한 곳일수록 문화적 충격이 빨리 강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65-168쪽)

 

조선의 망국을 국가 차원, 민족 차원, 문명 차원의 세 층위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펴냄)에서 제시한 바 있다. 권태억이 말하는 ‘문화적 충격’이란 것이 문명 차원의 갈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종래 일본 식민통치의 문제점을 밝히는 작업에서 별로 중시되지 못한 방향인데, 그 하나의 실마리에 마주친 것이 반갑다.

 

 

Posted by 문천

 

김일성의 사망 소식에 접한 미국 정부는 꽤 명쾌한 반응을 보였다. 조의를 담은 아주 짧은 대통령 성명을 내고 제네바에 가 있던 북미회담 대표단이 북한대표부를 조문차 방문하게 했다. 전 세계의 북한 외교공관에 분향소가 설치되었지만 제네바 외의 다른 곳에서는 미국 외교관이 방문하지 않도록 했다.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것이다. 한 미국 관리는 그 의미를 이렇게 요약했다고 한다.

 

“이 일은 북한 역사에 가장 중요한 순간의 하나였다. 미국에게는 사소한 일이지만 북한에게는 엄청나게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따라서 미국정부는 사소한 것으로 크게 생색을 낼 수 있는 기회였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 315쪽)

 

남한 정부가 생색 낼 기회를 누리지 못한 것은 미국에게처럼 “사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소식이 전해진 직후 김영삼 정부의 결정 두 가지는 정부의 공식 입장을 “아쉽다”는 표현으로 한 것과 군대에 비상경계령을 내린 것이었다. 비상경계령은 명백한 적대적 반응이었다. “아쉽다”는 공식 입장은 그보다 온건한 것이었지만 며칠 후 이부영 의원의 조문 제안에 대한 반응은 비상경계령보다도 더 험악한 것이었다. 남한 정부는 북한에게 생색을 내기는커녕 냉전 이후 최악의 적대적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혈맹’ 관계의 두 나라가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인 것은 북한과의 관계에 대한 전망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의 사망으로 북한붕괴론이 더 힘을 얻은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설령 결국 붕괴하더라도 그 전에 대화를 통해 얻을 것이 많다는 입장이었다. 남한과 미국의 태도 차이를 보여주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한국정부가 대북강경정책으로 선회하면서 취한 일련의 조치는 북핵위기와 관련한 미국의 정책과도 충돌하기 시작했다. 7월말 국가안전기획부는 두 명의 탈북자를 공개했는데 그중 한 명은 북한 총리 강성산의 사위 강명도였다. 강명도는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이미 다섯 개의 핵무기를 제조했다고 주장했다. 외무부는 그의 주장에 놀라기만 했지만 미국정부는 강력히 항의하고 나섰다. 그의 주장은 근거가 없었을 뿐더러 북한과의 대화를 훼방하기 위한 의도를 깔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강명도의 주장은 소문에만 의거한, 근거가 없는 말일 뿐이라고 물러섰다.

 

한미 간의 핫라인을 통해 토니 레이크 안보보좌관은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에게 강명도의 주장을 부인한 것은 고맙지만, 애초에 그런 내용의 기자회견을 한 저의가 뭐냐고 따졌다. 정 수석은 안기부가 무슨 악의를 가지고 한 일은 아니며 강명도는 그 발언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와 같은 기자회견이 사전에 기획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탈북자들이 북한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을 진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었음은 틀림없었다. (같은 책 318쪽)

 

북한이 핵무기를 이미 보유하고 있다는 주장을 근거 없이 내놓는 것은 게이츠 CIA 국장 같은 미국인들에게 배운 것이겠지만, 맥락이 틀렸다. 게이츠는 북한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던 상황에서 세계최강 정보기관 수장의 권위 위에 뻥을 쳤다. 탈북자 개인의 권위와 비교가 안 된다. 그리고 게이츠의 뻥 이후 여러 차례 북미회담을 통해 북한 핵사업의 실체가 많이 밝혀져 왔다. 강명도의 뻥은 북미관계에 종사한 미국 관리들이 모두 등신이라는 주장을 함축한 것이었다. 레이크 보좌관이 발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북미관계에 종사한 미국 관리들은 남한 정부의 갈팡질팡에 시달리다 보니 남한 국내정치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갖게 된 것 같다.

 

3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한국정부의 태도는 “관망”에서 “대북적대” 정책으로 급선회했다. 이번에도 김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취했던 “두드려보고 건너는” 방법을 취했다. 즉 여론이 형성될 때까지 입장표명을 미루다가 가장 주류의 입장에 편승하는 방법이었다. 대통령이 관망하는 사이 보수파들이 그 공백을 비집고 들어와 논쟁을 선점했고, 주사파 학생들이 여론을 악화시킨 결과 정부는 강경한 입장으로 선회하게 된 것이다. 사실 보수주의적 견해가 김 대통령의 성향과도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김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강경”하다는 이유로 지지도가 일시적으로 상승했다. (같은 책 319쪽)

 

이렇게 해서 남한은 이후의 북미회담 진행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다. 그 동안 남북대화가 북미대화에 선행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북미회담 진행을 견제해 왔는데, 8월 5일 북미회담이 속개될 때까지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아낌없이 드러내면서 김일성 대신 김정일과의 정상회담 가능성도 일축해 버렸기 때문에 그 명분을 더 이상 내세울 수 없게 된 것이다.

 

북미회담 속개 시점에서 미국 대표단의 분위기를 퀴노네스는 이렇게 그렸다.

 

김일성 사망 한 달 뒤, 미국과 북한 대표단은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러나 분위기는 전과 달랐다. 카터와 김일성 간의 드라마틱한 만남이 빚어냈던 낙관적 분위기가 완전히 씻겨나가고 없었다. 양국 대표단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김일성 사망 소식이 전해지기 전날인 7월 8일이었는데, 7월 중에 상황은 일대 전환을 겪은 셈이었다. 김일성은 무대에서 사라졌고 그의 아들 김정일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김정일의 권력 승계 여부를 둘러싸고 온갖 억측이 난무한 것도 사실이다. (...)

 

평양의 불투명한 상황은 미국 정부에도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강석주는 계속해서 북한을 대표할 것인가? 그는 김정일의 확고한 신임을 받고 있는가? 김정일은 권력을 완전 장악하고 있는가? 이런 의문은 당시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완전히 정리되기를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우리 대표단의 최우선과제는 북한 핵시설에 대한 전면적 핵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한반도 운명> 288-289쪽)

 

남한 정부는 언론플레이에 너무 열중하다가 미국 대표단의 신뢰를 잃기도 했다.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언론보도였다. 거의 매일같이 한국 관리들이 한국 언론에 북미회담의 진행사항을 흘려주고 있었다. 이 때문에 끊임없이 회담에 대한 헛소문과 비판이 일어 협상작업은 어려워지곤 했다. 한국 관리들은 정보누설을 차단해달라는 미국 측의 거듭된 요청을 전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 대표단은 갈루치와 강석주 사이의 축소회담 내용을 제네바 주재 한국 외교관들에게 브리핑해 주던 일을 중단하고 말았다. (같은 책 302쪽)

 

회담 속개 불과 1주일 후에 양국 합의 성명이 나온 것을 보면 양측 대표단이 합의 도출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성명의 내용과 성격을 퀴노네스가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남한의 부정적 역할을 알아볼 수 있다.

 

8월 12일의 합의성명은 기본적으로 두 달 후에 모습을 드러낼 1994년 10월 21일의 ‘기본합의문’의 준비를 위한 개략적 초안이었다. 이것은 두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들이 서명한 최초의 합의였다. 우리가 합의문의 서명 시에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친 것은 한국의 부정적 반응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서의 큰 중요성은 두 나라가 서로 상대방의 가장 요긴한 요망사항을 들어줄 용의를 서면으로 표시한 최초의 문서라는 사실에 있다. 북한은 2기의 경수로와 함께 궁극적 관계정상화를 위한 약속을 얻어내고, 미국은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과 국제원자력기구에 대한 태도를 바로잡을 뜻을 확인해 줌에 따라 세계적 핵안전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몇 중요 사안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 미국은 특별사찰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계속해서 이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북한 측은 팀스피릿 훈련의 중지와 북미평화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미국은 팀스피릿 훈련 중지는 수용하는 쪽으로 기울었지만 북미평화협정 체결은 전혀 재고하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은 북한의 남북대화 재개 약속을 요구하고 있었다. (<한반도 운명> 309-310쪽)

 

‘특별사찰’이 아직도 문제가 되고 있다.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던 특별사찰 제도를 IAEA가 북한을 상대로 들고 나온 것은 미국이 제기한 연료 재처리 문제 때문이었다. 원래 NPT에는 재처리를 규제하는 내용이 없다. 미국이 하도 요란을 떠는 바람에 IAEA에서 특별사찰을 끄집어낸 것인데, 한 번 끄집어낸 이상 국제기구의 위신 때문에 도로 접어 넣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미국은 국제기구의 요청을 존중한다는 명분으로 이것을 북한에 들이대 왔다.

 

북한 입장에서는 특별사찰 요구가 불공정한 횡포이므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IAEA가 일방적으로 지정하는 장소를 사찰하게 하는 특별사찰 제도는 주권 침해가 심한 것이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경우에 대비하는 제도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 핵무기를 만드는 나라들은 NPT 가입국이 아니라서 손도 못 대는 IAEA가 유독 북한에게만 특별사찰을 요구한다면 NPT에서도 IAEA에서도 탈퇴하겠다는 것이 북한 입장이었다. 카터는 이 요구가 무리한 것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배제하고 김일성과의 회담에 임했다.

 

따라서 특별사찰 문제는 미국에게 북미회담의 자물쇠인 셈이었다. 회담을 파탄내고 싶으면 언제든지 이 문제를 강경하게 요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협상을 원할 때는 옆에 치워놓으면 됐다. 1974년 8월 북미회담의 합의문에서는 “전면적 핵안전조치를 준수”한다는 말로 표현을 바꿈으로써 이 문제를 회피했다. 그 표현이 미국에게는 ‘특별사찰’의 뜻이었고 북한에게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의 소지가 남아있었다.

 

제네바의 회담에서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졌지만 외교적 상황은 여전히 어렵고 복잡했다. 갈루치는 북한이 특별사찰을 수락했다고 말했다. 강석주는 수락은커녕 논의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에 따라 상황이 매우 불확실해졌다. 또 북한은 예의 양다리 걸치는 작전으로 나왔다. 북한이 합의사항을 이행할 지의 여부는 “IAEA의 불공정성이 얼마나 고쳐지는가에 달려있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 강석주는 “특별사찰 문제는 상호신뢰가 회복되면 해결될 것”이라며 보다 전향적인 입장을 보였다. 최소한 카터-김일성 회담 당시의 입장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상과 같은 북한의 태도를 서방의 언론들은 대체로 부정적으로 해석했다. (<북핵위기의 전말> 339-340쪽)

 

1993년 7월 제2차 북미회담 이래 미국정부 내에서는 과거와 현재 중 어느 쪽을 택하느냐 하는 논쟁이 이어졌다. 특별사찰은 북한이 이미 재처리한 연료를 확인하자는 것이므로 과거를 따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문제 때문에 협상이 늦어지는 동안 재처리가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은 현재의 문제, 즉 안전조치(safeguard) 문제였다. 위트-폰먼-애커먼은 1994년 5월 이 문제의 논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들은[미국 고위 관리들은] 곧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했다. 참석자들 중에서 대북제재를 통해 북한으로 하여금 비확산관련 의무를 이행하거나 핵 활동을 중단 또는 공개하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과거 북한이 핵탄두 한두 개 분량의 플루토늄을 생산한 의혹이 있다고 제재에 나섰다가 오히려 북한이 핵탄두 다섯 개 이상을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추가로 추출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분명히 있었다. 또 대북제재, 특히 군사행동을 동반한 무역금지를 전쟁행위로 간주하겠다는 북한의 주장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간 핵확산 금지에 관한 국제레짐과 미국의 오랜 정책의 신뢰도에 큰 손상이 갈 것이 분명했다. (같은 책 228-229쪽)

 

카터와 클린턴 사이에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교감이 있었을 것으로 내가 추측하는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6월의 카터 방북 이후 10월에 제네바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미국은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 태도를 지켰다. 클린턴 행정부는 협상을 원했던 것이다. 협상이 본의가 아니었는데 카터가 사고치는 바람에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보는 것은 너무 억지스럽다. 앞서 부시 행정부 때부터 특별사찰을 내세워 온 것이 협상을 막는 족쇄가 되어 있었고, 그 족쇄를 벗어 던지는 장면을 카터가 얼버무려 준 것으로 봐야겠다.

 

북-미 대화의 고삐는 계속해서 미국이 쥐고 있었다. 공산권 붕괴 이래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체제 유지를 위한 절박한 과제로 여겨 왔다. 1992년 1월 뉴욕에서 열린 최초의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미국은 대화 자체를 거부했다. 북한의 NPT 탈퇴선언 등 강경한 태도는 기실 “날 좀 보소 아리랑”이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은 전쟁까지 검토했다. 검토한 결과 이제 북한과의 협상에 성의를 보이고 있었다. 8월 12일의 합의문은 실제 이뤄진 합의 내용의 일부만을 담은 것이었다.

 

해석을 둘러싼 견해 차이와 상관없이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제네바의 “합의문”은 단지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많은 것들의 윤곽만 그린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미국대표단은 제네바에서 합의된 문건보다 더 자세한 문건, “합의각서”의 초안을 건네주었었다. 다만 시간 제약 때문에 다음에 논의하기로 하고 “합의성명”만 발표하기로 했다. 그 합의의 이행단계를 조목조목 밝힌 그 문서가 후일 최종 합의문의 초석이 된다. (같은 책 340쪽)

 

“벼랑 끝 전술”이란 말이 북한의 대외전략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으로 많이 쓰인다. 이 말이 적절해 보이는 대목도 꽤 있지만 적절하지 않은 장면에까지 쓰이는 일이 많다. 1993년 3월의 NPT 탈퇴선언 이후 북한의 강경한 태도는 명분도 합당하고 현실적으로도 효과적인 정책이었다. 위험이 수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위험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고 결국 북한의 강경한 태도 앞에 스스로 거둬들이게 된다. 소위 제1차 북핵위기에서 북한의 전략은 전체적으로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에 비해 미국의 태도에는 불안한 점이 많았다. 북한과 협상하기로 정책을 돌리기 위해 ‘카터 쇼’를 필요로 한 것부터 그렇다. 그리고 강경파의 돌출행동이 튀어나올 위험이 늘 있다. 제네바합의를 완성하기 위한 제4차 북미회담을 며칠 앞두고 핵항공모함 키티호크 호를 포함한 전투함대가 한반도 근해로 이동한 것도 그런 예다.

 

로널드 슬래포터 태평양지역 미군사령관은 “강한 군사력은 외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한반도 근해로 전투함대를 보낸 이유다. 이것이 강력한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태평양 성조지> 회견에서 공언했다고 한다. 회담 분위기를 악화시킬 수 있는 이 도발적 조치를 사령관의 단독행동으로 본다고 퀴노네스는 적었다.

 

여기서 강석주는 1993년 6월 11일의 공동성명에서 “핵무기를 포함한 군사력의 사용이나 위협을 하지 않겠다는 원칙에 조선과 미국은 합의한다”고 한 대목에 대한 미국의 약속을 믿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두 나라 사이에 쌓인 불신으로 인해 핵회담 시작 때부터 상호간의 신뢰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적어도 평양에서는 그랬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 점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태평양사령관이 보낸 강력한 메시지는 북한에 대해 그 동안 미국이 쌓아 온 신뢰를 뿌리째 흔들 수도 있는 것이었다.

 

북한이 인내심을 가지고 이 상황에 임한 것은 핵회담을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제네바에서 첫날 회담을 끝낸 강석주는 이튿날 일정은 실무진 논의로 하고 그 뒤 이틀은 주말이니까 휴식을 취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 덕분에 미국은 함대를 동해에서 철수시킬 충분한 시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함대는 그 후 일본 요코스카로 철수했다. (<한반도 운명 328쪽)

 

제4차 북미회담에서 마무리되고 있던 협상 내용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미국에도 남한에도 많았다. 미국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함대 이동 정도 조치는 자의적으로 취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남한 국방장관 이병태는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인 9월 28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그 해 팀스피릿 훈련의 취소가 확정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제네바의 두 나라 대표단은 그런 도발에 교란되지 않고 회담을 마무리 지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