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과 미국의 대 북한 강경파가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의 근거로 ‘호전성’을 내세워 왔다. 1950년의 남침을 비롯해 그런 주장의 근거를 북한이 만들어준 것도 많이 있다. 그러나 7-4 공동성명(1972) 이후로는 호전성의 수준이 크게 달라졌다. 그 후의 북한 도발은 아웅산 사건, 민항기 폭파 등 1회성 사건으로 나타나, 그 이전의 무장공비 파견처럼 지속적인 공세와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도 이 변화가 잘 인식되지 못하는 까닭은 북한의 폐쇄성에 있다. 남한, 미국, 일본 등 ‘자유진영’ 사회에는 북한 정보의 공급이 막혀있기 때문에 대북 강경파의 ‘북한 호전성’ 주장이 제대로 검증되기 어렵다. 1990년대 말부터는 ‘선군정치’가 호전성의 증거로 많이 제시되어 왔다. 북한의 식량난에 구호물자를 보내면서도 그 물자가 인민 구호에 쓰이지 않고 군사력 증강을 위해 빼돌려질 것을 의심하며 외부 감시의 강화를 주장, 원조 사업을 어렵게 만든 일이 많이 있었다.

 

북한 호전성의 주장은 지금까지도 대 북한 정책 결정에 작용하고 있다. 그 가장 큰 근거인 ‘선군정치’의 실제 성격을 지난 회에 이어 검토해보겠다.

 

김진환은 <북한위기론>(선인 펴냄) 247-248쪽에서 선군정치의 출발점을 살펴보며 (조선로동당) 당력사연구소에서 펴낸 두 권의 책에 선군정치의 출발점이 서로 다르게 기록된 대목을 옮겨놓았다. (밑줄 친 부분은 김진환의 강조)

 

김정일동지께서는 주체84(1995)년 1월 1일 금수산기념궁전을 찾으시어 위대한 수령님께 경의를 표시하신 후 조선인민군의 한 구분대(다복솔중대)를 찾으시었다. (...) 다박솔중대에 대한 력사적인 현지지도는 선군의 기치를 높이 추켜들고 총대에 의거하여 주체의 사회주의위업을 끝까지 완성하려는 김정일동지의 확고부동한 의지의 표시였으며 위대한 선군정치의 첫시작이었다. (<조선로동당력사>(2004) 533-534쪽)

 

김정일동지께서는 주체84년 1월 1일 (...) 다박솔중대에 대한 력사적인 현지지도는 선군의 기치를 더 높이 추켜들고 총대에 의거하여 주체의 사회주의위업을 끝까지 완성하려는 김정일동지의 확고부동한 의지의 표시였으며 위대한 선군정치를 보다 높은 단계에서 실현해나가는 력사적계기로 되었다. (<우리 당의 선군정치>(2006) 533쪽)

 

2006년의 책은 1995년 정초의 현지지도에 대한 2004년 책 내용을 토씨까지 그대로 옮겨놓다가 “선군정치의 첫 시작”이란 대목만을 바꿔놓은 것이다. 이 차이 때문에 선군정치의 출발점을 1995년으로 보는 관점과 그 이전으로 보는 관점이 갈라지고, 앞당겨 보는 관점 중에는 1960년대 말까지 끌어올리는 관점까지 있다. 김진환은 1990년을 전후한 체제위기를 계기로 1990년대 초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북한위기론> 249-250쪽)

 

김진환의 관점은 1990년 이후 김정일의 권력승계 과정에서 군 통수권 확보를 중심으로 삼은 점에 큰 근거를 둔 것이다.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격상과 함께 제1부위원장에 임명되고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었다가 1993년 4월 국방위원장에 추대되는 과정이 같은 책 250-251쪽에 설명되어 있다. 김일성의 사망을 앞둔 몇 년 동안 김정일의 위치는 군부를 중심으로 확보된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본격적 선군정치가 1990년경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기에는 힘든 점이 있다. 김진환 자신도 같은 책 254쪽에서 “국가예산 중 국방비 비율이 1980년대 후반에 비해 선군정치를 시작한 1990년대 초반에 오히려 떨어졌다는 사실 등을 볼 때 군대의 물질적 토대 강화는 쉽지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물질적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벌인 ‘군민일치’ 운동을 이 시기의 선군정치 내용으로 그는 보는데,(같은 책 254-256쪽) 진정한 ‘선군정치’라면 예산부터 당당히 할당받아야 할 것 아닌가. 선군정치의 뜻은 나타났지만 아직 실행할 여건이 되지 않은 상황으로 보인다.

 

1990년경부터 시작된 북한의 체제 위기는 군사적 위기보다 경제적 위기였다. 경제위기의 초점은 대외교역의 붕괴에 있었다.

 

이미 1980년대 중반 양국 경제관계 변화로 북한의 대소 무역수지는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나아가 소련은 1989년 7월 15일을 기점으로 북한의 물자공급 불이행시 같은 협정으로 연계된 원자재의 대북 수출통제까지 실시했다. 세 달 전 서울에 무역사무소를 연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또한 1990년 4월 ‘조-소 경제 및 과학기술협의회’에서 소련은 1991년부터 양국무역을 완전히 국제가격에 따라 진행하며 결제도 경화로 할 것을 요구했다. 이 결과 1990-1991년 사이 양국 무역액은 22억 달러 이상 줄어들었다. 여기에 동유럽시장 붕괴 충격까지 더해져 북한의 무역총액은 1990년 약 45억 6천만 달러에서 1991년 약 25억 9천만 달러로 떨어졌다. 불과 1년 사이에 무역규모가 ‘반 토막’ 난 셈이었다. (같은 책 187-188쪽)

 

소련에 이어 중국도 1991년 중 조-중 무역에 국제시장가격과 경화결제를 요구해 왔다. 가장 큰 타격이 에너지 분야에서 나타났다.

 

당시 북한이 소련으로부터 전체 코크스원료탄 수입 중 30%, 코크스 수입 중 75% 정도를 의존했으므로, 이러한 우호가격이 금속-화학공업 유지에 중요한 기여를 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1991년부터 결제방식이 바뀌면서 소련으로부터의 코크스원료탄과 코크스 수입은 도합 30만 톤 수준으로 떨어진다. 금속-화학공업의 비정상적 운영은 불가피했다.

 

또한 원유의 대북 공급가격은 중국의 경우 그들의 세계시장 판매가격과 비교할 때 1980년 이전은 17~32%, 1986~1990년은 평균 58% 수준에 불과했다. 소련의 공급가격은 1986~1990년 국제시세 대비 평균 57% 수준이었다. 그러나 1991년 이후 양국 모두 원유를 국제시장가격으로 공급함으로써 공급단가는 1990-1991년 중국은 2.1배, 소련은 2.5배 수준으로 급상승했다. 결국 결제능력을 갖추지 못한 북한의 대소 원유수입은 1990년 44만 톤에서 1991년 4만 톤으로 급감했고, 1992년부터는 원유도입을 아예 포기해야 했다. (같은 책 189-190쪽)

 

경제를 의존해 온 두 나라 중 하나는 해체의 길을 걷고 있었고, 또 하나는 시장경제 도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정책의 우선순위도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를 지탱하는 방향에 놓이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중국과의 관계 약화는 군사적 위기도 가져오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아직 뚜렷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1990년대 초반 북한의 군사비 축소는 경제위기에 대한 의식이 더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1991-1992년에 북한은 남한과 미국에 대해 전례 없이 유화적인 태도로 나왔다. 1991년 중에는 이 태도가 잘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1992년 들어 1월 뉴욕회담에서 미국의 냉담한 태도에 이어 5월부터 IAEA를 통한 강압이 쏟아지고 가을에는 팀스피릿 재개 방침의 때 이른 발표에 이어 훈령 조작 사건으로 남북고위급회담까지 파탄을 맞았다. 이 과정을 통해 군사적 위기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의식이 더 심각해졌다.

 

1990년경 총체적 위기 앞에서 경제위기 극복에 중점을 두면서 군사 부문이 소홀해지는 데 대비하기 위해 ‘군민일치’ 같은 구호로라도 군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군사적 위기의식이 깊어지는 데 따라 ‘선군정치’의 구호가 무게를 더해 가고, ‘북핵위기’ 속에서 압도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이재봉은 “북한 선군정치, 언제까지 지속될까?”[http://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9236]에서 1998년 북한의 대남정책 관계 원로 간부에게 들은 말을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가 군사제일주의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것이지, 군국주의나 무력 통일을 지향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 공화국은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 미제와 일제가 손잡고 공화국을 압박하고 있다. 남조선에서는 주한미군도 모자라 일본군까지 불러들이려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곧 붕괴할 것이라고 떠드는데, 이러한 막중한 위기를 돌파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대를 앞세우지 않을 수 없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죽을 때 북한의 위기는 정상적 방법으로 감당할 수 없는 다각적이고 심중한 상황이었다. 경제위기는 ‘고난의 행군’을 예고하고 있었고, 미국의 위협은 제네바협정으로 해소시킬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김정일이 살을 베이더라도 체제의 뼈대를 지키기로 결심한 것이 ‘선군정치’ 노선으로 보인다. 1996년 12월 김정일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중에는 당의 일꾼보다 군의 일꾼을 더 앞장세워야겠다는 뜻이 보인다.

 

사회의 당조직들이 맥을 추지 못하고 당사업이 잘되지 않고 있는 기본 원인은 당중앙위원회 일군들을 비롯한 당일군들이 일을 혁명적으로 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 지금 사회의 당일군들이 군대 정치일군보다 못합니다. (...) 나는 1960년대부터 수령님의 사업을 보좌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사업을 똑똑히 도와주는 일군이 없습니다. 나는 단신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이 나의 사업을 도와주지 못할 바에는 있으나마나 합니다. (...) 수령님께서 창건하시고 강화 발전시켜오신 우리 당이 오늘에 와서 맥을 추지 못하는 당이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중앙당 일군들이 인민군대의 일군들보다 혁명성이 떨어져서는 안됩니다.(<월간조선> 1997-4, <북한위기론> 357쪽에서 재인용)

 

‘선군(先軍)’은 ‘후로(後勞)’를 함축한 말이다. 김정일은 조선로동당 총비서와 군사위원회 위원장 직책을 함께 갖고 있었다. 그런데 외부에 ‘김정일 위원장’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그 직함을 더 앞세웠기 때문이다. 그는 당의 지도자보다 군의 수장으로서 역할을 앞세우며 노동당도 노동자 인민도 군의 모범을 따르도록 요구한 것이다. 김재봉이 위 글에서 인용한 <로동신문> 1999년 6월 16일자 논설에도 이 뜻이 밝혀져 있다.

 

“우리 시대는 제국주의와 반제 자주 세력이 가장 격렬하게 맞서고 있는 투쟁의 시대이다. 제국주의와의 장기적인 대결 속에서 사회주의 위업을 완성하자면 마땅히 군사가 중시되어야 한다. (...) 제국주의와의 사상적 대결은 힘의 대결에 못지않게 간고한 투쟁이다. 이 첨예한 대결전에서 승리하자면 혁명성이 강하고 사상적 신념이 투철한 전위부대가 있어야 한다. 그 담당자가 바로 혁명군대이다. 군대가 사상적으로 무장 해제되면 사회주의의 지탱점이 허물어지게 된다. 설사 인민들이 정치사상적으로 준비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군대가 견결하면 사회주의가 무너질 수 없다.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와해되던 과정이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바르샤바조약과 코메콘으로 군사-경제적 통합성을 유지해 온 동유럽 공산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세계’의 중심이었다. 소련과 중국 다음으로 북한에게 많은 원조와 협력을 제공해 온 나라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 나라들이 2,3년 사이에 줄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며 북한은 그 전철을 밟지 않는 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선군정치는 당과 군의 관계를 일원적으로 관리한다는 점에서 북한이 희망을 걸 수 있는 노선이었다. 김진환은 북한에서 일원적 당-군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 소련, 중국에서는 당 내 여러 세력이 정치권력을 번갈아 장악하는 바람에 당의 군사노선과 영군제도 역시 권력의 전환점마다 급변했다. 이에 비해 북한에서는 1960년대 들어 항일무장투쟁집단이 당 내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군사노선과 영군제도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둘째, 소련, 중국의 경우 당의 군사노선과 영군제도의 비일관성 탓에 당의 군대영도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됐다. (...) 반면 북한에서는 1962년 12월 확립한 ‘자위적 군사로선’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부대 당위원회 중심의 영군제도가 발전하면서 당의 군대영도력이 갈수록 강화됐다. 특히 항일무장투쟁집단은 당과 군대 안의 반대세력을 모두 제압한 1969년에서야 정치위원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소련, 중국이 겪은 폐해를 피할 수 있었다.

 

셋째, 당 내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세력이 군대 내 파벌과 각각 연결될 때 당군관계 다원화는 심화된다. 중국에서는 지역별로 전개된 혁명전쟁, 군구제도와 야전군체제, 지역주의 등이 인민해방군 내 파벌을 성장시킨 요인들이다. (...) 이에 비해 당 최고지도자가 며칠간의 현지지도로 직할통치할 수 있는 ‘작은 단일민족 국가’ 북한에서 군대파벌이 성장할 여지는 많지 않았다.

 

넷째, 전쟁의 유산이 달랐다. 소련의 경우 격렬한 반혁명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트로츠키의 선택이 이후 당의 군대 지배를 구조적으로 제약했다. (...) 반면, 항일무장투쟁집단은 한국전쟁을 치르며 당 내 권력경쟁세력의 영향력을 약화시켰고, 이는 전후에 일원화된 당군관계로 손쉽게 나아가는 기반이 됐다. (<북한위기론> 360-362쪽)

 

와다 하루키가 설명하는 ‘유격대국가’로서 북한의 국가 성격도 일원적 당-군 관계와 깊은 연관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1974년 3월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 식으로”라는 새로운 구호가 김정일에 의해 만들어졌다. 김일성은 1년 뒤 “최근 당중앙이 내건 구호는 대단히 훌륭하다”고 하여 김정일을 지지했다. 최종적으로 이 구호는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이루어진 김일성 보고에서 제출되어 정식으로 승인되었는데 이로써 유격대국가의 영속적인 기본구호로 자리잡았다.

 

유격대국가는 국가 이데올로기이자 국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북조선의 지도자는 유격대국가의 창출을 기대하면서 인민에게 이러한 국가상을 주입, 교화시켰다. 그런데 그 결과 인민은 물론 지도자 자신도 실제로 이러한 국가에 살고 있는 것처럼 사고하며 행동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유격대국가는 부분적인 또는 절반의 현실이 되었다. (<북조선-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서동만-남기정 옮김, 돌베개 펴냄) 298쪽)

 

대개의 공산국가에서는 건국과정에서 컸던 군의 역할이 차츰 줄어들면서 체제의 구성요소로서 중요성도 흐려지는데, 북한에서는 군의 중요성이 유지되었다. 공산권의 변경에 자리 잡고 미국과의 대결 상태가 계속된 것이 그 일차적 이유일 것이다. 와다는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 국가 성격을 바꿨다고 보는데, 일원적 당-군 관계를 가일층 강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부친의 사후 후계체제 마련에 부심하던 때 김정일은 자신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었다. (...) 1997년 9월 그를 로동당 총비서로 추대한 인민군 당원대표회의 보고에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조명록은 “무려 16만 6,000여 리의 머나먼 로정을 이어가시며 2,150여 개의 인민군 부대들과 최전선 초소들을 찾으시었다”고 밝혔다. (...) 방문지가 2,150여 개에 이른다는 것은 육군으로 치면 16개의 군단 사령부, 26개의 사단 사령부, 41개의 여단 사령부는 물론 모든 연대 사령부를 방문하고 대대 수준의 주둔지까지 방문했다는 것이다. 이는 믿기 힘든, 가히 놀랄 만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

 

물론 이 과정에서 김정일은 선물을 가지고 가서 장병들을 물질적으로도 즐겁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최고사령관이 몸소 찾아와서 장병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 자체는 틀림없이 장병들을 감격시켰을 것이다. (...) 최고사령관과 함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바로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선서를 의미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김정일은 군대를 장악하는 데에 상당 정도 성공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 (같은 책 304-305쪽)

 

미국-남한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 북한군이 몇 주일 이상 저항을 계속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북한 밖에는) 없다. 그러나 궤멸되기 전에 남한과 일본, 특히 서울에 상당한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사실이 1994년 6월의 위기를 막아주었고, 지금까지도 억지력을 발휘하고 있다.

 

대북 강경론 중에는 북한이 남한-미국의 도발 없이도 자기네 군사력이 더 쇠퇴하기 전에 이판사판으로 달려들 위험을 지적하며 그런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 주장은 1994년의 경험을 무시하는 것이다. 북한에게 경제위기와 군사위기가 겹쳐진 최악의 체제위기였다. 그런 위기에도 이판사판으로 나가지 않고 그 취약한 군사력을 억지력으로 활용해서 동유럽과 이라크의 운명을 피했다. 그런 경험을 가진 북한이 왜 자멸의 길을 택하겠는가?

 

 

Posted by 문천

 

독재정치가 정책 결정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경제개발에 유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1990년대에 한국과 함께 “아시아의 용”으로 꼽힌 타이완, 말레이시아 등 신흥산업국(NICs)의 1960~1990년간 경제발전 실적은 한국과 놀랄 만큼 비슷했다. 독재와 경제통제가 심하지 않은 나라에서는 호황기의 성장률이 한국만큼 높지 않더라도 1972년, 1980년 등 불황의 충격이 덜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비슷한 수준의 성장을 이룬 것이다.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의 발전 조건이 함께 작용한 것이다.

 

근대국가의 첫 번째 특징은 국가 기능이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한편으로는 경제활동의 양상이 복잡해지고, 또 한편으로는 국가가 모든 국민을 일일이 직접 상대하게 된 결과다. 권력 분립은 민주주의 원리 이전에, ‘만기친람’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노골적 독재가 아니라도 지나친 대통령중심제가 재난구조 같은 국가기능에 장애를 일으킨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권력 분립이 없으면 국제관계에서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일본이 고종에게 을사조약을 강요할 때 고종은 신민의 의견을 알아봐야 한다고 사태 진행을 늦추려 했지만 모든 권한을 가진 황제에게 신민의 의견을 물을 필요가 어디 있냐는 반박을 받았다. 대한제국을 황제독재체제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때 헐값으로 배상청구권을 팔아넘긴 것도 독재정권이기 때문이었다. 독재정권에서는 정권의 이익을 위해 국익을 내다버린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1993년 6월 이후 북미회담 진행에 따라 ‘유일지도체제’로만 알았던 북한 내부에도 어떤 형태의 권력 분립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관찰자들에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 정도를 상정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군부의 존재가 갈수록 분명히 부각되어 갔다.

 

미국 정부에서도 국방부의 강경론이 국무부의 온건론과 맞서는 일이 많다. “망치를 쥔 자의 눈에는 모든 것이 못대가리로 보인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말처럼 군대를 관장하는 국방부가 군대 쓸 일 많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북한의 군부는 미국의 국방부와 차원이 다른 존재다. 원래 공산국가에서 군의 정치적 의미가 엄청나게 크다. 당과 함께 인민의 의지를 직접 받드는 기구로서 정부의 일부가 아니라 정부 전체와 대칭을 이루는 존재다. 해방 후 한반도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했을 때 소련군 지도부의 정치적 역량은 ‘전투 기술자’에 불과한 미군정 지도자들과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었다. 전역 후에도 정치가와 행정가로 역량을 발휘할 소련 장군들과 달리 미군 장군 대다수는 연금 타먹는 것 외에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10여 년 전 중국에 처음 갔을 때 들은 우스개가 하나 있다. 여러 사람 보는 앞에서 물에 빠진 사람이 있을 때 누가 구하러 뛰어들까? 인민해방군 병사라는 대답이다. 공산당원은 눈치만 보고 있지만 병사는 군복을 입고 있어서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당도 군도 믿지 못하게 된 세태를 냉소하고 있지만 그 바닥에는 인민의 신뢰를 받아야 할 당과 군의 위상에 대한 인식이 깔려있다.

 

공산국가에서 군의 비중이 큰 한 가지 이유는 건국과정에서 군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건국 후 안정 상태가 오래 가면 군의 역할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북한의 경우 공산권의 붕괴에 따라 국가의 존립 위기가 닥치면서 군의 역할이 다시 커졌다.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이 제2인자로 나설 때는 중앙위원회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 군사위원회 위원 등 여러 부문으로 동시에 진출했다. 그러나 실제 권력계승 단계에서는 인민군 최고사령관(1991)과 국방위원장(1993)으로 군 장악에 치중했고, 1998년 개헌으로 국방위원장 직을 국가 최고위직으로 만들어 죽을 때까지 지키며 ‘선군정치’를 표방했다.

 

1993-1994년 ‘북핵위기’ 속에서 북한은 “전쟁 불사”의 태도를 견지했다. 미국이 볼 때 가소로운 태도였다. 막상 터지기만 하면 며칠 만에 초토화될 나라가! ‘당랑거철(螳螂拒轍)’이 바로 그런 경우를 위해 만들어진 말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군사력이 북한과 큰 차이 없는 이라크를 가볍게 쳐부순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1991년 1-2월간 40여 일에 걸친 미국 주도의 공격으로 2만 명 이상의 이라크군과 10만 명 이상의 이라크 민간인이 목숨을 잃는 동안 이라크군 공격에 의한 연합군 전사자는 190명(미군 113명)에 불과했다. 미국 의회는 걸프전쟁의 비용을 약 611억 달러로 추산했는데, 그중 미국의 부담은 100억 달러 미만에 그쳤다. 이라크인에게는 끔찍한 ‘전쟁’이 미국인에게는 한 판의 가벼운 ‘게임’이었다.

 

1992년 1월 김용순과 캔터의 뉴욕회담에서 미국의 무성의는 상식 이하였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고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공동성명도 거부하고 추후의 회담 약속도 거부했다. 미국의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것 이상 아무 의미도 북한과의 만남에 두지 않은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오만은 냉전 승리에 이은 걸프전쟁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미국이 계속 무시할 것이고, 미국에게 무시당하는 정권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며, 설령 무너지지 않더라도 가볍게 쳐부술 수 있다는 속셈이었다.

 

1992년 내내 IAEA를 통한 북한 압박은 뉴욕회담에서 보인 태도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쳤다. 1993년 3월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하자 IAEA의 불공정한 조치가 드러나게 되었다. 핵연료의 재처리는 NPT의 금지사항이 아니었다. 이것을 이유로 역사상 유례없는 특별사찰을 요구한 것은 명백히 무리한 조치였고, 북한의 NPT 탈퇴가 현실화한다면 미국과 IAEA가 핵확산금지 체제를 약화시킨 결과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NPT 탈퇴를 막기 위해 1993년 6월부터 북미회담을 열게 된 것이었다.

 

미국이 IAEA를 조종한다는 북한의 주장을 미국과 IAEA 모두 부인했다. 그러나 IAEA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제기구로서 IAEA의 독립성을 미국도 존중하는 시늉은 했지만, 미국에게 꼭 필요한 일이 있을 경우 IAEA가 미국의 뜻을 벗어나 움직일 가능성은 생각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미국이 국제기구를 이용한 노골적 사례로 걸프전쟁 이후 이라크 무기사찰을 위해 만들어진 유엔특별위원단(UNSCOM, United Nations Special Commission)을 들 수 있다.

 

UNSCOM은 1991년 4월 안보리 결의로 만들어졌다. 사전 예고 없이 이라크 내의 어느 곳이든지 찾아가 조사할 수 있고, 어떤 시설이든지 마음대로 사찰할 수 있고,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어떤 자료라도 제출받을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요컨대 이라크 주권을 깔아뭉개는 권한을 가진 기구였다.

 

UNSCOM이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기구라는 사실은 첫 3년간 예산을 유엔 아닌 미국에게 타 쓴 사실에서 분명하다. 1994년부터 유엔 예산을 받게 되었지만 장비, 인력 등을 미국에 의지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예컨대 위원단이 수행하는 도청작업에서도 해독을 미국 정보기관에 맡겨 위원단이 필요로 하는 내용만을 미국 측에서 뽑아 넘겨주는 식이었다. 1998년 12월의 이라크 공습 때 미군이 이 도청자료를 활용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라크의 반발만이 아니라 국제적 비난을 모으고 이듬해 해체되었다.

 

그 때 리처드 버틀러 UNSCOM 단장이 이라크가 사찰에 협조하지 않는다며 위원단을 철수시켜 미국의 공습을 위한 핑계를 만들어준 반면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은 이라크의 사찰 협조가 충분하다는 보고서를 냈다. IAEA가 그래도 UNSCOM 같은 날라리는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미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유엔기구는 없었다. 북한에 대한 IAEA의 지나치게 엄격한 태도는 미국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이라크를 짓밟고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계속하는 가운데 북한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미국 정부, 특히 군부 내에는 많이 있었을 것이다. 이라크의 경제난을 외면하는 저유가정책의 결과 후세인이 참지 못하고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그것을 빌미로 이라크를 장악한 것처럼, 북한을 곤경으로 몰아넣으면 뭔가 빌미가 될 사건을 저지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1993년 6월 이래 북미회담을 진행하는 배후에서도 그런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고, 1994년 봄 ‘북핵위기’의 다른 해법이 보이지 않게 되자 북한 공격의 분위기가 미국 정부 내에 짙어졌다. 1994년 5월 18일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과 존 샬리카쉬빌리 합참의장은 해외주둔군 사령관 일부를 포함한 모든 4성 장군을 국방부 회의실에 모았다. 제2의 한국전쟁을 위한 병력, 병참, 물자 등의 동원계획을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 날 페리-샬리카쉬빌리-럭[주한미군사령관]은 군 최고통수권자인 클린턴에게 회의 결과를 전달하기 위해 백악관으로 향했다. 그것은 아시아에서 점증돼 가고 있는 무력 충돌 가능성이 몰고 올 심각하고 중대한 결과에 대한 공식적인 보고였다. 이 보고 내용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최초 3개월간 미군 사상자 5만2천 명, 한국군 사상자 49만 명은 물론이며 여기에 더해 엄청난 숫자의 북한군과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추산했고, 군비는 6백1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보이지만 그중 극히 일부만을 동맹국들의 지원금으로 충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또한 이와 같은 끔찍한 비극은 취임 16개월째인 클린턴 행정부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것이며 국내외적으로 클린턴이 품고 있던 다른 계획과 야망들은 뒷전으로 밀려나야 할 판이었다.

 

사태의 중대성을 실감한 클린턴은 이튿날인 5월 20일 한반도에서의 위기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외교-안보 담당 보좌관 회의를 소집했다. 한반도 위기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대다수 언론인들과 전문가들은 이 회의 후 미 정부가 오랫동안 미뤄 온 제3차 북-미 고위급 회담을 재개하자는 이야기를 꺼내는 등 외교적 해결 쪽으로 방향을 틀자 적잖이 놀랐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463-464쪽)

 

북한군의 전투력이 미국의 공격을 막은 것이었다! 병력과 무기 수준에서 북한군은 걸프전 개전 당시의 이라크군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미군 수뇌부는 북한군이 이라크군처럼 쉽게 패주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미군과 한국군 사상자를 50만 명 이상으로 예상한다면 북한군 사상자는 1백만 명, 거의 ‘전멸’에 이르도록 항전할 것을 예상한 것이다.

 

그리고 걸프전쟁처럼 전쟁비용을 분담해줄 상대가 없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는 전쟁을 지지했고, 전쟁비용의 3분의 2를 지불했다. 그런데 남한과 일본은 전쟁을 지지할 리가 만무했다. 이라크의 스커드미사일이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에 가한 위협과 전혀 다른 차원의 피해를 두 나라가 입을 것이 분명했다. 김영삼 정권이 ‘북핵위기’의 외교적 해결을 방해하고는 있었지만, 전쟁을 감당할 용의는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북한을 전쟁 위험에서 구해낸 것은 그 군대의 힘이었다. 북한이 GDP의 4분의 1을 군사비로 쓴다 해도 그 절대액수는 남한 군사비의 몇 분의 1에 불과하다. 북한군의 힘은 전멸을 불사하고 상대방에게 최대의 타격을 가하려는 임전태세에 있는 것이었다. 이런 임전태세는 국가나 지도자에 대한 추상적인 ‘충성’만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군 스스로를 국가의 ‘주체’로 여기는 주체의식이 필요하다. 그런 의식은 평상시에도 모든 정책결정에서 군의 입장을 배려하고 군의 의사를 존중하는 관행을 통해서만 키워지는 것이다. ‘선군정치’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미국에서나 남한에서나 북한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은 북한 지도자를 미치광이로 여기고 북한을 예측 불가능한 나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봐야만 그쪽 태도에 상관없이 적대적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북한의 입장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미국과 남한의 주류 언론이 그 동안 그려준 북한의 모습에 비하면 그런 노력의 여지가 많이 있다.

 

 

Posted by 문천

 

김영삼 정권 대북정책의 배경으로 많이 거론된 것이 ‘북한 붕괴론’이다. 북한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북한에 관한 정책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남북대화에는 치명적인 주장이었다. 상대가 곧 쓰러질 것이라는 가정 하에 대화를 제대로 할 수 있는가? 또 그런 속셈을 감추지 않으면서 북한을 대하는데, 북한 쪽이 신뢰를 갖고 대화에 임할 수 있겠는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기 직전 고위급회담을 파탄으로 몰고 간 ‘훈령 조작’ 사건 같은 것을 저지를 수 있게 해준 것이 북한 붕괴론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북한 붕괴론을 김연철은 이렇게 정리, 설명했다.

 

북한 붕괴론은 예나 지금이나 ‘보수적 기대’의 이데올로기다. 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과 만나서 생긴 일종의 관변 논리이기도 하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김일성 사후 노골적으로 흡수 통일 의지를 밝히곤 했다. 1994년 8월 15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통일은 갑자기 올지도 모른다”며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때부터 급변 사태 대비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모든 국책 연구기관들은 통합 대비 연구에 매진했다. (...)

 

북한 내부 권력 투쟁 가능성이 근거도 없이 난무했다. 이럴 때에는 정보 수집과 판단 기능을 갖고 있는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정부가 오히려 북한 붕괴론을 조장했다. (...)

 

권력 투쟁설 혹은 붕괴론은 김영삼 정부 입장에서 남북 관계 악화의 책임을 북쪽에 떠넘기는 핑계 거리이기도 했다. 1994년 8월 17일 이홍구 당시 통일 부총리는 기자 간담회에서 “남북 관계가 풀리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핵 문제가 아니라 북한 체제의 불투명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내부 사정 때문에 남북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된 진단이며, 이런 진단은 어리석은 처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처방이란 ‘기다리는 전략’이다. 김영삼 정부는 그렇게 이제나 저제나 북한이 붕괴하기를 기다렸다. 클린턴 행정부가 핵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과 외교를 하고 있을 때, 김영삼 정부는 관중석으로 비껴 앉아 하염없이 기다렸다. (<냉전의 추억>(후마니타스 펴냄) 114-116쪽)

 

후에 햇볕정책의 기수로 나설 임동원은 노태우 정부의 통일부 차관으로 있었는데, 그때도 그는 남북관계 발전에 적극적인 입장이었다. 1992년 1월 김용순-캔터의 뉴욕회담 직후 미국 국무성의 로버트 칼린이 상황을 설명하러 통일부를 방문했을 때 임동원은 자기 견해를 이렇게 밝혔다고 회고했다.

 

“내가 북한 대표들과의 대화를 통해 감지한 바에 의하면, 북한은 체제위기에 처하여 ‘생존전략’을 추구하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외교적 목표를 미국과의 적대관계 해소와 외교관계 수립에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북한이 국제핵사찰 수용을 지연시키는 것은 미국과의 직접협상을 유도하여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핵 위협을 가하지 않겠다’는 법적인 안전보장을 받아내려는 것이다. 북한은 끝까지 핵문제를 대미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카드로 사용하려 할 것이다. (...)” (<피스메이커> 240쪽)

 

북한의 NPT 탈퇴선언 1년 전의 시점인데 마치 그 후 북한의 태도를 미리 예견한 듯한 내용이다. 임동원은 과거 사실의 회고에 매우 엄정한 태도를 지키는데, 그 엄정성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사후의 생각을 끼워 넣은 것이 아닌지 의심도 들 만큼 정확한 통찰이다.

 

임동원도 북한의 “체제위기”, 즉 붕괴 가능성은 인정하고 있었다. 동구권 붕괴에 이어 소련 해체가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중국도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의 타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북한의 양대 동맹국이 혼란과 침체에 빠진 상태에서 동유럽 공산국들과 달리 북한만이 버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유일 지도체제의 지도자 김일성은 80세의 고령이었다. 그 시점에서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가능성일 뿐이었지, 필연성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 동안 확인되었다. 북한의 외부세력 중에는 북한의 붕괴를 앞당기려고 애쓴 세력도 있고 막으려고 애쓴 세력도 있었다. 붕괴를 원하는 쪽에서는 앞당기려고 애쓰고 원하지 않는 쪽에서는 막으려고 애쓴 것이다.

 

임동원은 북한 붕괴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는 전제 하에 그 위험을 피하는 길을 모색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햇볕정책을 시도한 한완상도 그랬다. 반면 김영삼을 비롯한 붕괴론자들은 북한의 붕괴를 촉진하려고 애썼다. 미국 정부 일각, 특히 군사-정보 분야에는 북한의 붕괴를 원하는 일군의 관료집단이 있었다. 북한의 붕괴를 막으려는 정책노선이 국무부를 중심으로 미국 정부 내에서 나타나는 것은 1993년 6월 북미회담이 시작된 뒤의 일이었다.

 

미국 군사-정보 분야의 대결주의 경향은 ‘네오콘’의 흐름이다. 냉전 승리의 여세를 몰아 미국의 1극 패권체제를 세우겠다는 이 흐름은 아이젠하워가 지적했던 ‘군산복합체’의 의지를 대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냉전이 종식된 세계에 새로운 긴장의 씨앗을 뿌리려는 세력이 미국 내에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반면 북한 붕괴론을 앞세운 남한 일각의 대결주의 추세는 그리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북한을 둘러싼 긴장의 완화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남한의 집권세력이 집요한 대결주의 추세를 보인 이유가 무엇일까?

 

1948년 무렵 분단건국 추진세력이 남한에서 득세하던 상황과 비교해 본다. 통일건국은 민족의 염원이었고 분단건국은 전쟁의 위험을 가져오는 일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분단건국 추진세력이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특권구조 때문이었다. 기존의 특권층인 친일파는 통일건국이 이뤄질 경우 특권을 빼앗기거나 심지어 박해를 받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미국에 의존하는 분단건국을 통해 미래의 특권층이 되고자 하는 친미파가 과거의 특권층과 손잡음으로써 막강한 재력과 폭력을 갖춘 세력을 이뤘던 것이다.

 

1987년 군사독재 종식을 계기로 남한 사회에서 민주화의 상당한 진척이 이뤄졌지만, 독재시대의 특권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른바 ‘1987체제’의 한계였다. 남북관계의 발전에는 민족국가의 완성을 통해 체제 변화를 이끌어낼 소지가 있었고, 그 변화는 특권구조의 약화를 향할 공산이 컸다. 군사세력을 대신해 특권구조의 보루가 된 자본세력이 거대언론과 정부를 앞세워 남북관계 발전을 가로막는 일에 나섰다. 분단구조의 모순이 특권구조의 모순을 지탱해 주는 역할 때문에 ‘수구’세력이 지키는 대상이 된 것이다.

 

남한의 수구세력은 북한의 국제사회 진입을 어렵게 만드는 대결주의 노선의 목적으로 ‘흡수통일’을 흔히 내세웠다. 대결주의 노선의 반민족성에 대한 비판과 반감을 무마하기 위해 ‘통일’이란 말을 앞세운 것이다. 북한은 어차피 무너지게 되어 있으니 그것을 떠안는 준비에 모든 자원과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쇠약한 상태로 오래 있으면 병원비가 많이 나올 것이므로 목을 졸라 숨을 끊어주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흡수통일의 예로 독일을 많이 거론한다. 눈부신 경제발전을 구가하고 올림픽까지 당당히 치러낸 1990년대 초의 상황에서는 남북한 관계를 동서독 관계에 비교한 것은 그럴듯한 발상이었다. 독일의 통일이 얼마나 큰 부담을 가져왔는지는 당시까지 깊이 인식되지 않고 있었고 한국경제의 바탕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도 IMF사태가 닥치고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1993-94년의 세계가 ‘자본주의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남한 위정자들이 강압적 대 북한 정책이 몰고 올 실제적 위험에 눈감은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남한 특권세력의 미국에 대한 의존적 자세가 국가와 사회의 명백한 위험도 묵살할 만큼 심화된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언론인과 학자로 다년간 한국 사정을 연구해 온 셀리그 해리슨은 1971년에 윌리엄 포터 당시 주한 미국대사에게 들은 노골적인 표현을 기억한다.

 

“그들(한국인들)은 ‘엉클 샘’의 젖통에 착 달라붙어 있어요. 당연히 우리를 놔주고 싶지 않은 거지요.”(<코리안 엔드게임>(이흥동 외 옮김, 삼인 펴냄) 280쪽)

 

그리고 20여 년 후 제임스 레이니 대사에게 들은 말을 함께 내놓는다.

 

“당신이 샴쌍둥이처럼 얽히게 됐을 때,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아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샴쌍둥이가 건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관계가 아니지요. 우리는 어리석게도 서로 계속 의존하게 만들면서 긴장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어요.”(<코리안 엔드게임> 282쪽)

 

붕괴는 폭력적 현상이다. 붕괴 당사자만이 아니라 주변에도 피해가 일어날 수 있다. 남한 수구세력이 북한 붕괴론에 쏠리는 것은 위험한 상황에서도 미국에 의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믿음의 중심에 작계(작전계획) 5027이 있다. 이에 대한 해리슨의 설명을 옮겨놓는다.

 

전쟁이 ‘오해와 부주의’로 빚어질 수 있는 위험성은 작전계획 5027의 근본적인 변화로 증폭되어 왔다. 작전계획(이하 ‘작계’) 5027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분쟁 발생 시 미 국방부가 공식적으로 취하게 될 행동 시나리오이다.

 

작계 5027은 1953년 휴전 이후 10년 동안 한국전쟁의 재발 상황을 가정했다. (...) 미군과 남한군은 수도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까지 단계적으로 후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3년 미국은 새로운 ‘전진 방어’ 개념을 도입했다. 이 개념에 다르면 미군은 B-52폭격기를 동원한 24시간 폭격을 통해 북한의 서울 북부 진출을 막고 (...) 9일 만에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전략에 따라 비무장지대 남쪽에 미군과 남한군 포병부대가 전진 배치됐고 이에 대응해 북한도 포병부대를 전진 배치했다. 이 포진은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북한의 1개 주요 도시[개성] 점령을 상정한 1973년의 전략 변경은 한층 더 극적인 1992년의 전략 변경으로 길을 열어 주었다. 이 작계 5027-92는 미 제3 해병사단과 남한군 제1 해병사단이 북한 동해안의 원산에 상륙한 뒤 서쪽으로 진격해 평양을 점령하고 이와 동시에 미군과 남한군 보병부대들이 비무장지대를 넘어 북진해 이들을 지원하도록 되어 있다. (...) 작계 5027-92에서 중요한 사항은 북한군이 남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첩보가 있을 경우 이에 대응해 실제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인 ‘교전 발생 전 단계’에서부터 전투태세를 갖춘 미군과 남한군을 전방 진지에 투입한다는 것이다. (<한반도 엔드게임> 205쪽)

 

이름은 ‘전진 방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공격’ 계획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이 계획 자체가 북한을 위협하는 데도 쓰였다. 1993년 3월 남한의 이병태 국방장관이 국회 답변에서 미국과의 협의 없이 이 계획의 내용을 폭로했는데, 이병태는 북한의 도발적인 성명에 대응하는 ‘억제책’으로 계획 내용을 밝혔다고 주장했다.

 

1998년 10월에는 주한미군사령부 기획참모부장 에이어즈 중장이 기자들에게 이 계획 내용을 알려주면서(취재원을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북한에 대해 더욱 위협적인 내용을 두 가지 덧붙였다. 하나는 남한이 점령정부 수립의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이 공격해 올 “모호한 징후”만 발견되어도 선제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해리슨은 에이어즈가 작계 5027-98 수정본 내용을 밝힌 것으로 설명한다.

 

미군과 남한군이 실제 교전 발생에 대비해 예비적으로 이동하는 ‘교전 발생 전 단계’에 대해 언급한 작계 5027-92와 같이 에이어즈 중장이 제시한 작계 5027-98의 수정 계획은 “북한군의 남침 전 단계, 초기 침공의 저지, 역공을 위한 재편 그리고 대규모 북한 침공”이라는 미군과 남한군의 4단계 작전을 추가로 담고 있다. “최종 단계에서는 미 해병군단의 모든 전력이 투입될 것이다. 북한의 저항이 분쇄된 이후 미군과 남한군은 북한의 국가 기능을 폐지하고 남한의 통제 아래 북한을 재편하게 된다. 이 모든 일이 종료되었을 때 북한은 어떤 종류의 군사 행동도 저지르지 못하게 되고, 우리는 그들 모두를 궤멸시킬 것이다.” (<한반도 엔드게임> 205-207쪽)

 

1990년대 중후반 북한이 겪은 ‘고난의 행군’을 생각한다면 붕괴론이 아주 허망한 것은 아니었다. 동유럽 공산국 중에는 더 건강한 모습을 보이다가 무너진 나라들도 있었다. 그리고 미국과 남한은 북한의 붕괴를 촉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도 북한이 끝내 무너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의 도움이다. 이 무렵에는 중국의 힘이 아직 약했고 인권문제 등으로 국제사회에서 수세에 몰려 있었다. 1994년 6월의 긴장 상황 속에서 중국은 북한 옹호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기도 했다. 대 북한 제재 결의에 거부권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뜻을 북한에 전함으로써 북한이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다. 미국과 남한의 권유에 따른 제스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북한의 붕괴를 막으려는 중국의 의지는 굳건했고, 북한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제공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의 국력은 크게 늘어나 있고 국제적 위상도 당당해졌다. 그리고 북한의 붕괴를 막으려는 의지는 변함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 대박론’이니 뭐니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풍기는 자들은 뭐를 알고 하는 얘기일까, 아니면 그저 습관일 뿐일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