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는 1990년대 초에 ‘세계화’란 말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의미가 아직 명확하지 못할 때 'globalization'의 적절한 번역에 자신이 없어서 'segyehwa'라는 기발한 역 번역도 나왔었다.

 

1980년대 영-미 주도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추구한 것이 세계화였고,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를 계기로 세계 변화의 대세처럼 되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 그런 대세론의 대표적 표현이었다. 서방진영 자본주의의 승리로 이제 이념의 대결 과정으로서의 역사는 마무리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유일패권을 배경으로 거침없이 진행될 것 같던 세계화가 21세기 들어서서 주춤거리다가 2008년 금융공황으로 그 모순을 크게 드러냈다. 이제 세계화의 필연성을 믿는 사람들도 순탄한 진행을 전에 믿던 것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세계화의 반대자도 지지자도 그 문제점들을 검토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나는 미시적인 검토에 앞서 ‘세계화’의 개념 자체를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본다. 세계가 하나의 체제로 묶인다는 것이 세계화인데, 지금까지 세계화의 틀로 거론된 것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뿐이다. 하나의 국가는 경제체제만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의 제 측면이 함께 어울려 구성되는 것이다. 경제체제 하나만으로 안정성 있는 ‘지구촌’을 구성한다는 것이 애초에 무리한 일 아닌가?

 

근년의 세계화 논의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는 ‘세계정부’(또는 ‘세계연합’) 이념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 이념을 제창한 사람의 하나인 아인슈타인은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에 충격을 받고, 인류가 멸망을 피하기 위해서는 세계정부의 수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가가 구성원의 책임과 권리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것처럼 세계 차원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주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전 지구적 확장을 추구하는 경제적 세계화는 실제에 있어서 전 지구적 질서의 확립을 추구하는 세계정부 이념에 역행하는 것이다. 질서란 약자에 대한 강자의 침탈을 억제하는 데 본질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강자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방임 원리는 세계를 무정부 상태로 몰고 왔다.

 

19세기 이래 자본주의의 풍미는 생산력의 급속한 증가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경쟁에서 자본주의는 강한 힘을 가졌고, 공산권 붕괴까지 몰고 왔다. 그러나 풍요의 꿈에 잠겨 잊고 있던 자연과의 관계가 20세기 후반 들어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반성을 요구하는 위기였다. 이 위기에 대한 반동적 대응이 자유방임 원리를 더욱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다.

 

21세기 들어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한계와 모순점이 드러나고 있다. 이 상황을 타개하는 데 개별 국가의 대응으로 충분치 못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세계화의 결과다. 자유방임 원리를 억제하고 세계 차원의 질서를 강화하려는 노력이 신자유주의의 저항을 물리치고 차츰 세계적 변화의 주축이 될 것을 기대한다.

 

 

얼마 전 어느 국회의원에게 제안을 받았습니다. 자기 의원실 행사로 몇 차례 강의를 해달라는 제안이었죠. 그래서 그 동안 정리한 생각 가운데 국회의원과 국회 직원들에게 해줄 만한 이야기를 틈 나는 대로 뽑아보고 있습니다. 강의 내용에 대한 구상을 간단히 적어서 [구상]이란 표시를 붙여 올립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