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에서 끝나는 현대세계의 질서

 

2005년에 원서가 나오고 2010년에 번역판이 나온 책인데 나는 최근에야 읽고 깜짝 놀랐다. 현대세계를 본질적으로 무정부상태로 보는 나와 똑같은 관점을 철학의 방향에서 제시하기 때문이다.

핵심 명제는 간단하다. 현대세계의 사람들이 세계라고 말하는 대상에 관한 철학적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또는 극히 빈약하다는) 것이다.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인식은 있으면서도 자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체계적 성찰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내지 동아시아 옛사람들이 근대 이전에 생각해 온 천하관념을 이에 대비시킨다. 서양의 정치철학이 국가에 중점을 둔 것과 달리 중국의 전통 정치철학은 천하에 관한 생각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정치철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정치적 세계관, 즉 내가 말한 천하체계의 이론을 창조하려고 했다. 이것의 이론의 틀과 방법론은 서양의 정치철학과 매우 다르다. 먼저 이론의 틀에서 살펴보면 중국의 정치철학은 천하를 가장 높은 단계에 위치한 정치 분석의 단위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딴 것에 앞서는 분석의 단위로 간주했다. 이것은 국가의 정치 문제를 천하의 정치 문제에 종속시켜 이해하려고 한 것이자 천하의 정치 문제는 국가의 정치 문제가 근거하는 것임을 의미했다. (29-30)

 

천하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한 뒤에, 국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그에 비추어 생각하는 것이 중국인의 표준적 태도였던 것이다. 반면 근대 서양의 정치학은 국가 내의 정치현상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국가 간의 현상에 대해서는 국제이론을 적용했지만, 국제관계의 정치적 가치는 종속적인 위치에 그친다. 예컨대 기후, 환경 같은 세계적 문제에 대한 각국의 태도는 국내 문제에 저촉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

 

철학의 이념이 없는 곳은 반드시 혼란스럽고 무질서하다. 서양의 정치철학이 주도하는 세계는 반드시 혼란스러운 세계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오늘날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제도가 있고 관리가 있고 질서가 있는 세계는 아직도 존재하지 않지만,[?] 지리나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세계는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황무지가 되거나 멋대로 약탈하고 쟁탈할 수 있는 공공 자원이 되거나 정복을 일삼는 전쟁터가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난제이다. 즉 전체적으로 무질서한 세계이자 정치적 의미도 없는 세계는 단지 폭력이 주도하는 세계일 뿐이다. (...) 한 마디로 말해서 세계는 세계가 되지 못한다. 마치 국가는 국가 제도 때문에 국가가 되는 것처럼 세계는 세계 제도 때문에 세계가 되는 것이다. (31-32)

 

현존하는 국가들 중에는 국내 질서가 비교적 잘 잡혀 있는 나라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나라들도 세계의 전체적 무질서에 영향 받지 않을 수 없다. 20여 년 전 파리에 체류할 때 그곳 분위기의 조화와 질서를 흠모하는 마음을 품었는데, 최근 샤를리 엡도 사태 앞에서 착잡한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전체주의는 왜 나쁜 것일까?

 

홍세화가 똘레랑스를 말한 것도 파리와 서유럽의 정치적-사회적 분위기를 나와 같은 마음으로 아낀 뜻으로 보는데, 자오팅양의 관용의미 해석이 흥미롭다.

 

관용은 서양의 논조이다. 오로지 자신의 가치관에 근거하여 어떤 일에 매우 반감을 가지면서도 어떤 신념에서 출발하여 그런 일을 참고 용서하려고 결심할 때가 비로소 이른바 관용이거나, 자크 데리다의 논조에 근거하여 관용할 수 없는 것을 관용하는 것이야말로 관용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중국에는 결코 관용의 이러한 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관용은 중국의 사유 방식도 아니고 중국의 방법론도 아니다. 중국에 관용의 마음이 있을 수 있겠지만 관용의 사유는 없다. 중국의 사유 방식은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 것’[大度]이지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寬容]이 아니다.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은 타자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고 너그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타자를 혐오하지만 참는 것이다. (...) 중국의 기본 정신은 변화’[]에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타자를 변화시키고 타자를 나로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은 당연히 다양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다양화는 오히려 통일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다양성은 반드시 어떤 전체적인 틀이 규제하는 가운데에서의 다양성이다. 그렇지 않다면 규제를 잃어버린 다양성은 단지 혼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25)

 

현대인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질서의 가치와 자유의 가치가 충돌하는 것 아닌가? 자유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오팅양이 말하는 중국의 사유 방식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체주의의 위험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와의 직접 충돌을 피하게 해주는 것은 변화의 가능성이다. 현상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만 공유하는 본질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천하체계가 제공한다는 질서가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겠다. 국가제도가 제공하는 질서도 공짜가 아니라는 점은 마찬가지 아닌가? 인류 차원의 질서체계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인지 잘 따져볼 일이다.

현대인은 재물이라는 가치 앞에서는 자신의 한계를 쉽게 인정하고 절약을 미덕으로 여길 줄 안다. 그런데 자유라는 가치를 놓고는 일체의 양보와 타협을 거부한다. 현실 속에서 자유를 그렇게 많이 누리는 것도 아닌데, 관념 속에서는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왜일까?

국가를 비롯한 현대사회의 제도에서 재물의 가치가 다른 가치들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리며 인간관계의 일차적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국가의 책임만 하더라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는 것이 상식처럼 통하지 않는가. 재산 이외의 가치들은 재물로 환산되는 한도 내에서 제도적 존중을 받게 된다. 명예 훼손도 스트레스도 자유의 억압도 재물로만 보상받는 제도에 사람들은 길들여져 왔다.

그래서 여러 인간적 가치들이 현실감을 잃고 관념의 영역에 묶이게 되었다. 근대 이전의 봉건관계에서는 다양한 가치들이 거래의 대상이었다. ‘충성이나 자유같은 가치를 제공하고 폭력으로부터의 보호나 경제적 이득을 얻는 관계가 일반적이었다. 자유와 평등의 절대적 관념을 가진 현대인은 봉건 관계를 미개한 것으로 깔보며, 그런 관계를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을 이뤘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문명 발생 이래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인간 이하의 상태에 있다가 계몽주의시대 이후에야 참다운 인간이 되었다는 생각은 역사학도의 눈에 하나의 환상으로만 보인다. 약한 위치의 사람들이 자기가 지닌 가치를 제대로 흥정도 못하고 쉽게 착취당하도록 만드는 환상.

봉건 관계가 근대적 제도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 서둘러 단정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닥쳐 있는 세계적 변화가 수백 년 만의 큰 전환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려서부터 주입받아 온 계몽주의 가치관을 잠깐이라도 접어놓고 큰 그림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자오팅양은 세계관 자체에 중국과 서양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중국의 사유 체계를 제대로 살펴보려면 서양사상의 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외부 세계에 대한 태도에서 서양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중국에는 서양과 전혀 다른 세계관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모순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서양 사상이지만 조화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중국 사상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미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설적인 근거가 될 수도 있는 전혀 다른 사상인 세계관-가치론-방법론과 정치학-경제학-사회사상이 논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중국 사상에는 그런 것과 전혀 다른 세계관-가치관-방법론과 정치학-경제학 사회 이론이 숨어 있다. 그것은 서양 사상의 틀 안에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틀 안에서 표현해야 하고 아울러 새로운 이론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28)

 

 

대립보다 통합을 지향한 천하 이념

 

자오팅양이 생각하는 천하체계의 첫 번째 특징은 밖이 없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세계의 차원에서 현실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아 인식과 실현의 자연스러운 방향의 하나다. 그런데 현대의 서양 패권세력은 국가 차원에 관점이 묶여 나머지 세계를 타자화한 데 문제가 있었다.

 

세계를 책임지는 것은 단지 자신의 국가에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론에서 중국 철학의 관점이고 실천에서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이다. 즉 무엇보다도 먼저 천하를 정치/경제적 이익에 관한 분석 단위로 삼아서 천하로부터 세계를 이해하는 것, 세계를 사유의 단위로 삼아 문제를 분석하여 서양의 민족/국가의 사유 방식을 뛰어넘는 것이며, 세계를 책임지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새로운 세계 이념과 세계 제도를 창조하는 것이다. 세계 이념과 세계 제도는 역사적으로 줄곧 결여되었던 이 세계의 가치관이자 질서였다. 일찍이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과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에는 지금까지 모두 국가 이념만 존재했다. (...) 따라서 영국과 미국의 세계 사유는 단지 특수한 자신의 가치관을 널리 보급하여 보편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왜 타자는 생각할 만한 가치도 없는지를 증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근본적으로 합법성을 상실했다. (12-13)

 

21세기 상황에서 천하체계를 실현하려 한다면 서양 사상을 거부하기보다 극복해야 한다고 보는 것도 천하체계의 포용성 때문이다.

 

중국은 서양에 반대하지 말고 중국을 근거로 서양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점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서양 사상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중국의 정신적 풍격이 아니다. 약간 불합리하게 들리지만 이것이 바로 중국적 사유의 특색이다. 원칙적으로 중국 사상은 어떤 타자도 거부하려고 하지 않는다. ‘타자를 거부하지 않는 것이 중국의 전통 정신이고 민족주의의 형태야 말로 서양의 사유이다. ‘타산지석(他山之石)’과 같은 부류의 논조가 바로 중국의 사유를 비교적 간단하게 묘사한 것이다. (24)

 

1960년대까지 미국의 중국사 연구를 이끌던 존 페어뱅크는 중국에 ‘nationalism’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근대 민족주의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종족의식이 없고, 중국인의 자기정체성은 문명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다.

근대 민족주의와 가장 비슷한 자기정체성 인식방법이 중국에 나타났던 것은 춘추-전국시대의 일이다. 그 당시 서로 다른 민족으로 인식되던 집단의 후예가 모두 중화인(中華人), 즉 한족(漢族)으로 합쳐졌다. 그 후에 이적(夷狄)으로 인식되던 많은 집단이 또한 한족에 합류했다. 지금 중국에 한족 외에 55개 소수민족이 있다고 하는데, 근세에 나타났거나 오지에 살기 때문에 아직한족에 융화되지 않은 집단들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은 천하제국을 세운 후 오랫동안 다민족국가를 운영해 왔고, 어느 시점의 소수민족들이 상당 기간을 지내는 동안 한족으로 편입되어 들어가는 과정이 계속되어 왔다. 이 현상이 긴 기간 동안 꾸준히 진행된 사상적 발판이 천하체계의 이념에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중국에는 내셔널리즘 성격의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가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그 위세는 일시적인 것이라고 나는 본다. 오랜 고난과 치욕의 역사 끝에 겨우 자존감을 일으키면서 그 동안 부러워하며 미워하던 대상들의 입장에 서 보고 싶은 마음이 대한족주의의 바탕이다. 자존감이 충분히 채워지면 그 대상들과의 차별성을 찾을 것이고, 중국의 역사에서 차별성의 근거를 발견할 것이다. 어느 시점에서건 패권주의 성향의 대한족주의가 완전히 사라지리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국인의 징고이즘(jingoism)보다는 강력한 내부 견제가 따를 것이고, 그만큼 그 표현이 절제될 것은 분명한 일이다.

 

 

천하 이념이 실제로 작동하는 모습

 

중국의 실제 역사에서 천하 이념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상황이 많다는 사실을 저자도 인정한다. 화이(華夷) 통합성이 무시되고 구분-적대의 태도가 우세했던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천자의 역할도 원래의 정치철학을 벗어나 전제군주의 모습이 된다.

 

천자는 천하와 하나의 유기체로 만들어진 개념이고 천하와 천자는 천하/제국의 이론적 기초를 공동으로 구성했으므로 천하는 주로 세계 제도의 개념이고 천자는 주로 세계 정부의 개념이다. 제도는 정부의 합법성을 보증할 수 있지만 반대로 정부는 결코 제도의 합법성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천하가 천자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고 더욱더 근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 단편적이거나 불완전한 이런 실천이 천하 이론의 형상을 손상시켰고 또한 심각한 반성을 수없이 초래했다. 예컨대 황종희는 삼대(三代)의 법은 천하를 천하 속에 넣어 두었고 후대의 법은 천하를 광주리 속에 넣어두었다고 말했다. 천하의 사회 제도는 실천되지도 않았고 단지 단순한 측면에서 천자의 정부만 실행되었다면 분명히 천자에게는 겨우 이름만 있었지 실질은 없었다. 춘추시대는 난세였을 뿐만 아니라 천하 제도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지금에서 보면 예악이 붕괴된 춘추시대에 대한 공자의 뼈저린 아픔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지만 실제로 춘추시대 이후로는 다시 천하 제도에 다가서려는 노력이 없었다. (73)

 

마지막 문장은 불만스럽다. 나는 정치철학으로 천하체계를 세운 것이 공자가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전에 체계적 사유 없이 자연스럽게 펼쳐져 온 현상을 공자가 체계화하면서 당시 진행되고 있던 정치적 변화를 천하위공(天下爲公)’의 이념에서 일탈하는 것이라고 비판함으로써 정치의 표준을 세운 것이 유가사상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이다. 공자 이후 유가사상의 역할이 바로 천하 제도에 다가서려는 노력이었다. 천하 제도의 완벽한 실현이 없었다고 해서 그런 노력의 존재조차 부정하는 것은 정치사상이 현실 속에서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말 같다.

예컨대 공자는 주공(周公)을 숭상했는데, 주공이 섭정으로 천하를 주재하면서도 신하의 위치를 지키며 천자의 권위를 받든 것이 현실적 득실에 따라 자연스럽게 선택한 행동이지, 공자가 내세운 것 같은 엄격한 이념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주나라 앞의 상나라에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많았다. 작은 규모의 사회에서는 지도자의 위치를 나이어린 아들보다 장성한 동생이 물려받는 것이 효율적이었으나 사회의 규모가 커지면 현실적 권력보다 정통성의 권위에 더 치중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세다. 실제로 주공의 섭정 기간 중 최대의 위협은 주공의 형제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주공이 부자상속의 원칙을 세움으로써 향후 그런 종류의 위협을 봉쇄한 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지만, 공자가 찬양한 것 같은 어마어마한 이념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본다.

천자에게 이름만 있었지 실질은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실세계에서는 현실정치(realpolitik)의 원리가 힘을 발휘한다. 정치철학은 이 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작용에 절제를 가하는 것이다. 당 태종은 중국의 역대 황제 중 현실정치의 원리에 가장 투철한 사람의 하나였다. <정관정요>는 그가 현실정치의 원리에 정치철학의 이념을 가미함으로써 정치 효과의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다.

옛 심복 한 사람의 독직사건에 임하는 태종의 태도가 좋은 예다. 사형 판결이 떨어질 때까지 개입하지 않고 있다가 판결이 내리자 이렇게 말했다. “법이란 하늘이 임금에게 내려준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나는 사사로운 정으로 당인홍(黨仁弘)을 풀어주고자 하니, 이는 법을 어지럽히고 하늘의 뜻을 저버리는 짓이다. 남교(南郊)에 멍석을 깔아 하늘에 죄를 고하고 거친 밥을 먹으며 사흘 동안 근신하여 이 죄를 풀고자 한다.” 근신의 자세로 천하위공의 원리를 지킴으로써 사적 의리와 공적 이념 사이의 긴장을 풀어낸 것이다. 공자가 이상화한 삼대보다 바로 이런 장면에서 이런 식으로 천하 이념이 정치에 작용했던 것이다. 황제가 영명하지 못한 때라도 천하이념은 하나의 압력으로 언제나 작용하고 있었다.

 

 

중국을 다시 생각하는 자세

 

중국에서는 제2차 중영전쟁(1856~1860)으로 베이징이 유린당한 후 서양의 선진기술을 도입하는 양무(洋務)운동이 일어났다. 청일전쟁(1894~1895)에 패하고는 기술만으로 안 되겠다 하여 제도를 바꾸려는 변법(變法)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도 1900년 의화단사건으로 북경의 55을 치르고는 공화제를 바라보는 혁명운동이 일어났는데, 1910년 공화혁명을 이루고도 장래의 전망이 열리지 않자 전통 학술-사상을 총체적으로 반성-비판하는 신문화운동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백년이 지난 이제 중국의 급속한 발전으로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게 됨에 따라 시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생각의 내용만이 아니라 생각의 방법을 바꿀 필요를 자오팅양은 제창한다.

 

100년 동안 중국인이 소극적인 관점에서 엄중하게 자아를 비판한 것은 중국을 비판한’[檢討中國] 운동이라고 한다면 중국에 대한 긍정적인 반성은 중국을 다시 생각한’[重思中國] 운동으로 간주할 수 있는 동시에 중국을 다시 세우는’[重構中國] 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의 가장 중요한 사상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을 다시 생각하기는 사상의 문제에서 동시대의 갖가지 문화 운동보다 더 신중해야 했고 학문의 이론도 더 깊이가 있어야만 했다. 그밖의 운동으로는 주로 신좌파와 자유주의의 논쟁’ ‘현대화와 탈현대화의 토론, 그리고 나중에 매체에서 공공 지식인운동으로 일컬어진 사회 비판 운동 등이 있다. (...) 대중 매체에서 한층 더 사람들의 주목을 끈 이러한 문화 운동은 최소한 이론이나 관념이 결코 중국 땅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배에 실려 들어온 신식 물품이자 서양에서 유행하는 관념을 복제한 것이다. (...) 땅의 기운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상은 널리 퍼지지 않는다. 이제 더는 서양의 갖가지 관념이 모자라지 않지만 자신의 대국적인 사유와 총체적인 이념은 빠져 있다. 제 힘으로 사유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중국의 끝없는 후환의 문제이다. ‘중국을 다시 생각하는 것의 역사적 의미는 중국이 스스로의 사유 능력을 회복해서 다시 새롭게 자신의 생각의 틀과 기본 관념을 수립하며, 다시 새롭게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방법론을 창조하고, 다시 새롭게 자신과 세계를 생각하도록 하는 것, 즉 중국의 전망과 미래의 이념 그리고 세계에서의 작용과 책임을 숙고하도록 하는 데 있다. 이것은 이미 근본적인 사상의 문제이면서 또한 거시적인 전략의 문제이다. (15-17)

 

20세기의 중국을 비판하는운동은 열쇠를 밖에서 찾는 노력이었다. 21세기의 중국을 다시 생각하는운동은 안에서 찾는 노력이 될 것이다. 그 차이를 자오팅양은 철학자의 입장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철학적으로 중국을 다시 생각하는운동은 미래, 즉 미래의 각 방면에 관한 가능성을 사유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점이 중국을 비판하는 이전의 운동과 전혀 다른 그것의 기질과 지향을 결정지었다. 중국을 비판하는 운동은 과거를 사유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역사 비판과 사회 비판의 기질을 갖추고 있었지만 중국을 다시 생각하는운동은 더욱더 많은 철학적 분석의 기질을 띠고 있었다. (...) 과거를 비판하는 것과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똑같이 중요한 두 가지 연구라고 할 수 있지만, 결코 서로 대체할 수 있는 연구는 아니다. 중국이 세계에서 반드시 말해야 하는 대국으로, 반드시 일을 처리해야 하는 대국으로, 반드시 세계를 책임져야 하는 대국으로 발전했을 때에는 사상의 측면에서 창조한 것이 있어야 하고, 할 말은 해야 하며, 처리해야 할 일은 처리해야 하고, 남의 장단에 춤출 수는 없다. 이것은 동의하느냐 동의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놓여 있는 위치와 형세가 절박한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22-23)

 

중국의 급속한 부상은 광범위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강대국의 위상을 직접 위협받는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조그만 나라들도 또 하나 패권국가의 등장이 아닌가 걱정하는 기색을 보인다. 이런 경계심을 피하기 위해 중국 지도부가 내세우는 구호 하나가 책임대국(責任大國)’이다. 자오팅양은 이 말을 단순한 구호에 그치지 않는 실제적 지표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중국이 과거의 무책임대국과 다른 책임대국이 되는 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위치와 형세에 따른 일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를 외칠 때 한국인은 책임을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인처럼 잘 사는 데, 미국과 같은 에너지 소비수준에 이르는 데 어떤 문제가 따르는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중국의 위치와 형세는 다르다. “실컷 먹고 배 터져 죽자!” 하는 소수의 정신병자 외에는 13억 중국인의 에너지 소비수준 향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주체성 회복을 주장하면서도 자오팅양은 이 운동이 싸구려 한풀이로 빠지는 것을 경계한다. 진정한 주체적 성찰 없이 중국의 국력 성장을 편의적 태도로 받아들이면 과거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을 다시 생각하는 것20세기 초 이래로 중국을 철저하게 검토하거나 비판한 운동에 대한 발란반정’(撥亂反正)인 것 같지만, 신중하고 엄정한 사유를 형성할 수도 없고 심각한 이론 분석에 진입할 수도 없으면서 오로지 다른 종류의 서사(敍事)를 쓰는 것에만 만족한다면 아주 쉽게 천박한 발언으로 변할 것이다. (...)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서사적인 학술은 이를테면 급진주의/민족주의적인 발언, 탈식민/문화비판적인 발언과 같은 책임지지 않는 발언을 낳았다. 급진주의적인 중국의 발언은 한 측면에서 새롭게 일어난 민족주의의 정서를 표현했지만 또한 (No)라고 말하다에서 우뚝 솟아나다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러한 위험한 논리를 볼 수 있는 서양의 다윈주의의 강경한 논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본래 비판해야 할 관념과 발언의 함정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러한 발언이 세계나 중국을 모두 온당하게 이끄는 것은 아니다. (...) 따라서 이렇게 중국을 타자로 간주하거나 서양의 상투적인 논리로 중국 사회와 중국 역사를 다시 쓰는 척하는 것은 중국의 새로운 서사를 말한다기보다는 차라리 중국에 관한 서양의 중국학자의 서사와 매우 비슷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 표면적으로는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든 본질적으로는 주로 여전히 서양에 비추어 중국을 이해하고 있는 오늘날의 중국을 다시 생각하는사상운동은 여전히 시작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몇 십 년 동안 이미 중국의 보편 의식으로 바뀐 서양은 중국을 서양으로 바꾸고자 한 어떤 욕망이었다. (23-24)

 

 

경제적 세계화를 넘어 정치적 세계화로

 

인간사회의 어떤 층위에서나 하나의 집단은 내부의 질서를 지키면서 외부와의 관계를 풀어 나가는 두 가지 과제를 끊임없이 수행한다. 가족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위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두 가지 과제에 성공하는 집단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실패하는 집단은 패망을 맞는다. 그런데 인류의 층위에서는 두 가지 과제를 위한 노력이 매우 빈약하다. 전통시대에 비해 근대에 들어와 더 심각해진 문제다.

심각해진 까닭은 무엇보다 인류사회의 존재가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문명 간 접촉이 적던 시절에는 여러 문명권을 포괄하는 사회의 존재를 인식하기 어려웠다. 자기 문명권 밖의 사람들을 인간과 다른 괴물로 흔히 상상하고,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접촉이 늘어나도 이교도란 이름의 준 괴물로 간주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 지리적 장벽이 약해진 끝에 이제 지구촌을 이야기하고 보편적 인권을 말하게 되었다.

고대국가가 성장하던 시절을 되돌아보면, 정복 사업에 원주민의 절멸이나 노예화가 흔히 뒤따랐고 정복지에 식민 활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통합을 이룬 국가들이 성장에 성공했다. 지역의 확장과 국민의 확대가 병행해야 국가의 효과적 성장이 가능했던 것이다. 주민의 지나치게 큰 비율을 노예나 노예에 준한 신분에 묶어놓으면 국가의 안정성이 보장될 수 없었다.

고려 후기의 일천즉천(一賤則賤)’ 문제에서도 이 문제가 나타났다. 부모 중 한쪽이 천민이면 천민으로 한다는 이 기준은 천민 비율의 증가로 사회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것이었지만 기득권층의 단기적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유지되고 있었다. 정동행성의 몽골인 관리가 이 기준을 없애려 애썼는데, 고려 귀족들은 원나라 조정에 탄원해서 이 관리를 소환시켰다. ‘闊里吉思란 이름이 전해지는 이 몽골 관리가 근대적 의미의 인권증진을 위해 천민 비율을 낮추려 했을 리는 없다. 많은 정복 사업을 해온 몽골인들이 피정복사회의 안정된 운영을 위한 노하우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귀족은 이 개혁을 거부했고, 결국 사회경제적 붕괴로 왕조의 멸망에 이르게 된다.

세계화란 말이 근년에 유행을 시작했지만, 사실 근대 초기부터 문명 간 장벽의 약화 과정을 통해 진행되어 온 현상이다. 그런데 지금도 경제적 세계화만 이뤄질 뿐, ‘정치적 세계화는 별로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정치조직으로 인류사회를 묶어 내부 질서를 구축하고 그 외부, 즉 자연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풀어 나가기 위한 정치적 세계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지금의 상태는 정복만 행해졌을 뿐, 피정복사회를 통합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근대세계에서 정복의 주체가 된 유럽인에 비해 중국인은 역사를 통해 더 많은 정복 사업의 경험이 있고, 또 피정복사회를 효과적으로 통합한 경험이 있다. ‘천하이념은 이 경험으로 얻은 지혜를 품은 정치철학이다. 서양인의 정복, 즉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이 한계에 이른 21세기 상황에서 참고의 가치가 큰 문명의 유산 중 하나다.

끝으로 번역에 대해 한 마디. 대체로 좋은 번역인데 욕교반졸(欲巧反拙)’의 느낌이 드는 곳이 더러 있다. 예컨대 옹골진 개념이란 말을 여러 번 쓰는데, 지은이의 표현을 가장 정확하게 옮긴 말이라는 자신감이 느껴지지만 독자로서는 이해가 어렵다. 책을 다 읽은 뒤 철학을 전공하는 친구에게 그런 말이 그 분야에서 많이 쓰이는 것인지 물어보기까지 했다.(그렇지 않다는 대답) 그리고 이 글에 인용한 내용 중 맥락이 석연치 않은 곳에 “[?]” 표시를 몇 번 붙였는데, 지나친 자신감 때문에 정밀성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옥의 티란 말이 적확하게 느껴지는데, 옮긴이가 조금 더 노력해서 개정해 주었으면 한다.

 

Posted by 문천

 

중국은 신자유주의에 함몰하지 않았다.”

 

조반니 아리기(1937-2009)1970년대부터 이매뉴얼 월러스틴 등과 함께 세계체제론을 발전시켜 온 비교사회학자다. 1994년 펴낸 <장기 20세기>20세기 미국의 헤게모니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개 과정을 정리하고 미국 헤게모니의 말기 증상을 살펴본 그는 그 무렵부터 중국의 급격한 발전에 관심을 집중해서 그 특징적 현상으로부터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다음 단계를 내다보는 열쇠를 찾은 것이 이 책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이 책의 목적과 성격을 강진아는 옮긴이 해제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이 책은 (...) 애덤 스미스의 이론을 오늘날에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작업, 그리고 중국과 동아시아 부상의 역사적-현재적 의미를 묻는 작업, 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그런 만큼 매우 이론적인 서술과 구체적인 서술이 착종되어 있고, 양자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는 이따금 정신을 다시 가다듬지 않으면 놓치기 일쑤이다. 이미 발표한 논문을 기초로 집필하다 보니 중언부언도 적지 않다. 장과 장 사이의 연관관계는 통독 후에 곰씹어야 겨우 소화할 수 있다. 나의 전공이 중국 근현대 경제사이므로 굳이 따지자면 후자의 과제와 관련이 깊다고 하겠다. 따라서 책을 읽으면서 이론적 부분에서 헤맨 것은 여느 독자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조반니 아리기의 치밀하지만 복잡한 논리 전개 방식도 한 원인이다. (537)

 

우리 사회 독자들에게는 아리기보다 월러스틴의 글이 더 많이 읽혔는데, 월러스틴의 글보다 읽기가 훨씬 더 힘들다. 그런데 자본주의체제의 한계점과 중국 급부상의 의미를 연결한 이 책은 내가 책 소개의 주제로 세운 자본주의 이후에 가장 중요한 참고가 되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의 소개는 한 차례로 끝낼 수 없다. 오늘은 진행 중인 중국의 변화에 대한 아리기의 관점부터 검토해 보고, 세계체제론의 적용에 관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룬다.

 

 

무엇이 중국의 마이 웨이를 가능하게 하는가?

 

앞서 소개한 훙호펑의 책 <중국 자본주의를 바꾸다>에서 앨빈 소는 중국이 개혁-개방 초기에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따르다가 2000년을 전후해서 국가발전주의로 방향을 돌렸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아리기는 중국이 신자유주의 노선에 따른 일이 없었다고 본다. 시장 개방, 무역 자유화, 외자 유치 등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워싱턴 컨센서스의 방향으로 움직이기는 했지만 맹목적으로 따라간 것이 아니라 자국 이익에 부합하는 범위에서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고 있었던 것이며, 1997년 동아시아(동남아시아 포함)를 휩쓴 경제위기에 큰 타격을 받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두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한국의 경험으로 볼 때 1990년대의 국제자본은 칼자루를 쥔 입장이었다. 워싱턴 컨센서스를 서둘러 따르지 않고 있던 한국은 국제자본의 철수로 디폴트 상황에 몰려 IMF의 칼질을 당해야 했다. 자본을 계속 유치하려면 신자유주의 노선을 충실하게 따라야 했다. 중국이 자기 필요대로 완급을 조절하면서도 자본을 유치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 첫 번째 의문이다.

이 의문에 대한 아리기의 대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화교 자본의 역할이고 하나는 중국 시장의 엄청난 덩치다.

동남아 각지 화교 상인들에게는 언제나 중국 시장과의 접촉이 활동의 중요한 영역이었다. 그런데 중국에 큰 변화가 일어날 때는 평소보다 더 큰 사업 기회를 더 많이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역할이 커지곤 했다. 20세기 초에 많은 해외 화상들이 신해혁명과 국민당을 지지함으로써 역할을 키우려 했으나 일본의 침략과 뒤이은 공산당의 승리로 좌절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동남아시아 화교 자본은 중국의 고립과 각지 내셔널리즘 확산으로 인해 불리한 입장에 놓였지만 경제계에서 그 역량을 꾸준히 키웠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큰 활로를 얻게 된 상황을 아리기는 이렇게 그렸다.

 

화교 자본은 따라서 일본의 다층적 하청 체계의 국경을 넘는 팽창과 이 지역에서 비즈니스 동업자를 찾는 미국 기업의 수요 증가에서 특히나 수익을 얻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동아시아의 싸고 양질의 인적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더 치열해질수록, 화교는 더욱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자본가 중 하나로 많은 면에서 미국과 일본 다국적 기업 네트워크를 압도하면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부와 힘에서 최대의 기회는 1980년대 지역 시장과 세계 시장에 중국 본토가 재통합되면서 찾아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결정적인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대외무역과 투자에 문호를 연 것이다. 그 성공으로 동아시아 부흥의 완전히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으니, 바로 중국이 다시 지역 경제의 중심이 되는 단계이다. (481)

 

개혁-개방 초기에 서방 자본가들은 중국의 정책과 투자환경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화교 자본가들은 다른 기준으로 대 중국 투자에 임했다. 그리고 중국 정부 역시 화교 자본가에게 좋은 조건을 제공했다. 그래서 천안문사태(1989) 같은 악재가 터지더라도 최소한의 자본 유치가 가능했고, 서방 자본도 중국을 끝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외국 자본, 중국 노동자, 기업가, 정부 관료의 만남을 주선한 중매쟁이는 화교 자본이었다. 이 중매쟁이 역할은 덩샤오핑 치하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대외무역과 투자에 개방하고,k 홍콩-마카오, 궁극적으로 타이완을 “1국가 2체제모델에 맞추어 회복하려는 노력에서 화교들의 조력을 구한다는 결정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이 동맹은 중국 정부에게 미국-유럽-일본 기업들에 대한 문호 개방 정책보다 훨씬 믿을 만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노동자의 고용과 해고, 상품의 구매와 판매, 이윤의 해외 송금에 대한 자유를 제한하는 규제들에 시달리자, 이들 외국 기업들은 투자를 중화인민공화국에 발판을 유지할 만큼 최소한의 수준으로 묶어두는 경향이 있었다. 이와 반대로 화교들은 대부분의 규제를 회피할 수 있었다. 현지 관습-습관-언에에 대한 친숙성, 지역 기관들에 후한 기부를 함으로써 강화한 친족 관계와 공동체 연대의 이용, 중국 공산당 관료들로부터 받는 특혜적 대우 덕분이었다. 그러므로 외국 기업들이 계속해서 투자 환경에 대해 불평을 하는 동안 화교 기업들은 거의 40년 전에 상하이에서 홍콩으로 옮겨 간 것만큼이나 빨리 홍콩에서 광둥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483-484)

 

1990년까지 중국에 투자된 외국 자본 160억 달러 중 75퍼센트인 120억 달러가 타이완과 홍콩을 통해 들어온 화교 자본이었다. 이로써 중국이 자력 성장의 추동력을 일단 확보하자 외국인 투자가 급증하기 시작해서 총 투자액이 2000년까지 2000억 달러로 치솟았다. 아리기는 외국인들이 투자하고 있다면 (...) 그것은 오로지 화교들이 더 많이 투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 클라이드 프레스토위츠의 말을 인용한다. (485) 화교 자본은 중국 외자 도입의 마중물 노릇을 톡톡히 한 것이다.

외국 자본가들이 중국을 외면할 수 없었던 또 하나 이유는 중국 시장의 덩치였다. 개혁-개방의 초기 단계부터 중국의 방대한 노동력은 외국 자본에게 매력적인 정복 대상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성장과 유지에는 미개발 자원의 개발이 필요하다. 인적 자원의 경우, 미개발 상태에서는 싼 값으로 확보할 수 있지만, 일단 개발되어 정규 노동력으로 조직되고 나면 임금 수준이 높아져 더 이상 높은 이윤율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노선의 중요한 목적 하나가 저개발 노동력을 자본주의 체제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 목적을 갖고 있는 한 질이 높으면서 저개발 상태의 노동력을 거의 무한정 가진 중국을 외면할 수 없었다.

 

널리 퍼진 인식과 달리, 중화인민공화국이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주요한 흡인력은 중국의 거대하고 저렴한 [노동]예비군 같은 것이 아니었다. 세계에 이런 예비군은 많이 있지만, 중국처럼 자본을 끌어들인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우리는 그 주요한 흡인력이 이 예비군의 높은 질에 있다고 주장하려 한다. 보건, 교육과 자기관리 능력이라는 면에서 그러하며, 중국 자체 내에 이러한 예비군의 생산적 동원을 위한 수요 조건과 공급 조건의 급속한 팽창이 결합된 결과이다. (483)

 

중국은 방대한 노동력을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동집약적 생산방식을 개발함으로써 이득을 늘렸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개발된 자본집약적 생산방식인 포디즘(Fordism)의 대안을 만들어낸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상하이 근교의 원펑 자동차공장을 소개한다. 한 대의 로봇도 쓰지 않는 이 공장에서 청년 노동자들이 기본적 공구만으로 만들어내는 수제(手製) 지프 트리뷰츠가 한 대 10만 달러 가까운 가격으로 수출되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홍호펑의 <중국, 자본주의를 바꾸다> 4장 리처드 애플봄의 대중화권의 거대 하청업체도 중국 시장의 덩치가 일으키는 힘을 예시해 주었다. 중국을 생산기지로서만 활용하면서 부가가치의 작은 부분만을 떼어주려던 거대자본의 의도가 너무나 커진 생산기지의 힘에 밀려 소비시장으로의 접근로를 내어주는 추세를 보여준 것이다.

개혁-개방 초기에는 방대하고 저렴한 노동력이 매력의 포인트였지만, 경제개발의 진행에 따라 중국 시장의 생산력과 구매력이 점점 더 부각되어 왔다. 중국의 발전을 억제하고 싶어 하는 세력은 분명히 존재해 왔다. 그러나 그런 세력의 노력이 효과를 일으키지 못하는 쪽으로 상황이 움직여 온 것은 중국의 부상이 대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개별 자본가에게는 기존의 체제를 지키려는 동기보다 계속 자라나고 있는 거대한 시장과의 접속을 잃어버릴 위험이 더 크게 느껴지도록 된 것이다.

 

 

중국의 독자적 발전노선을 구성하는 것들

 

중국이 독자적인 노선을 견지할 수 있었던 데 대한 또 하나의 의문은 과연 어떤 이념에 입각해서 그 노선을 형성했는가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원리를 지킨다고 공식적으로 표방해 왔지만, 종래 사회주의국가에서 허용되지 않던 정책이 대거 채택되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항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중국, 자본주의를 바꾸다>의 제3중국의 경제 기적과 그 궤적에서 앨빈 소는 중국이 1990년대까지 신자유주의 노선을 충실히 따른 증거로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 시장 확대, 중앙정부의 약화, 지역 격차 심화, 사유화-법인화 정책, 사회서비스의 상품화, 시장 자유화의 심화 등 1980년대에서 90년대의 현상을 들었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국가발전주의로 방향을 돌렸다고 보았다.

아리기는 위와 같은 현상들이 나타나는 동안에도 중국정부의 정책은 강탈 없는 축적의 원리를 지켰다고 본다. 불평등이 확대되는 상황 속에서도 생산수단의 집중과 독점을 억제했다는 것이다. 이 원리를 실현한 매체로 1980년대 후반에 보급된 향진(鄕鎭)기업(TVEs)을 그는 중시한다.

 

향진 기업이 개혁의 성공에 기여한 점은 여러 가지이다. 첫째로 향진 기업의 노동 집약적 방침은 도시 지역으로 대규모 이주 증가 없이 농촌의 잉여 노동을 흡수하고 농촌 소득을 올릴 수 있게 하였다. 게다가 1980년대 노동 이동은 대부분 농민들이 농경에서 벗어나 농촌 집체 기업에 일하러 가는 이동이었다. 둘째로 향진 기업은 상대적으로 규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수많은 시장으로 진입하자 경쟁 압력이 전면적으로 증가하여, 국영 기업뿐 아니라 모든 도시의 기업들이 업무를 향상시켜야만 했다. 셋째로 향진 기업은 농천 조세 수입의 주요 원천이 되어, 농민들의 재정 부담을 덜어주었다. 세금과 각종 부과금이 농민 불만의 최대 원천이었으므로, 향진 기업은 이렇게 해서 사회 안정에도 기여했다. 게다가 예전에 농민에게 부과되었던 세금과 각종 비용을 향진 기업이 떠맡으면서, 농민들을 약탈적인 지방 정부로부터 보호해주었다. 넷째로, 가장 중요한 핵심적 측면에서 이윤과 임대 수익을 현지에 재투자함으로써 향진 기업은 국내 시장의 크기를 확대했고, 새로운 단계의 투자, 일자리 창출, 분업의 순환을 위한 조건을 창출했다. (499-500)

 

민간기업의 확장에서는 신자유주의노선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민간기업과 나란히 향진기업을 육성해서 비중이 점차 줄어드는 국영기업과 함께 3개 섹터로 기업 활동의 증가에 임했던 것이다. 주민 소유로 지방 정부가 관리하는 향진기업은 이윤 극대화라는 목적에 앞서 지방의 권익을 지키는 속성을 가졌기 때문에 불평등의 심화를 억제하고 지방 간 계층 간의 균형을 어느 수준에서 유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1997년 동아시아 경제위기의 충격이 중국에게 심각하지 않았던 중요한 이유도 향진기업의 역할에 있었던 것으로 아리기는 본다.

향진기업의 육성이 큰 효과를 가져온 조건은 개혁-개방 이전의 사회주의 정책으로 형성된 것으로 본다. 개혁-개방 시대와 사회주의 시대 사이의 연속성을 아리기는 강조하는데, 그 연속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고리 하나를 향진기업의 성공이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왕후이(汪暉)의 관점을 지지하며 그 말을 인용한다.

 

첫째, 사회주의 전통은 국가 개혁에 대한 내부 억제력으로 어느 정도 기능했다. 국가-당 체계가 주요 정책을 변경할 때마다 이 전통과 대화하면서 실행해야만 했다. (...) 둘째, 사회주의 전통은 노동자, 농민과 다른 사회 집단들에게 국가의 부패나 불평등한 시장화 조치에 항의하거나 타협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정당성 있는 수단을 주었다. 이리하여 문화혁명의 부정이라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중국의 유산을 다시 활성화한 것은 미래의 정치 발전을 위한 통로를 열어주었다.” (505-506)

 

마오쩌둥 시대의 유산보다 아리기가 더 중시해 온 것은 전통시대의 유산이다. 중국의 사회경제적 발전이 19세기에 이르러 유럽과 다른 발전경로를 걷게 되었다는 견해는 아리기 외에도 안드레 군더 프랑크(<리오리엔트>(이희재 옮김, 이산 펴냄, 2003, 원서는 1998)와 케네스 포머런츠(<The Great Divergence>, 2000) 등이 세계체제론의 중요한 내용으로 펼쳐 온 것인데, 다른 기회에 상세하게 다루겠지만, 이 책에서 아리기가 강조한 특징을 우선 짚어두겠다.

책 제목에서 애덤 스미스를 내세운 것은 자본주의 이론의 원조로 알려진 스미스가 사실은 자본주의 발전경로를 유일한 길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뜻이다. <국부론>이 나온 1776년 시점에서 스미스가 중국 경제수준을 높이 평가했을 뿐 아니라 중국의 경제발전 방식을 자연스러운 경로라 하여 바람직한 방향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에 대한 통념을 넘어선 이해를 통해 중국의 경제현상에 대한 더 적절한 시각을 얻을 수 있다는 아리기의 주장을 이남주는 이렇게 요약했다.

 

중국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관계에 대해 가장 도적적인 주장을 한 아리기로부터 논의를 시작해보자. 그의 핵심주장은 첫째, 중국경제가 역사적으로는 물론이고 최근까지 비자본주의적 발전노선을 따르고 있으며, 둘째, 비자본주의적 발전노선을 걷는 중국의 부상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기 및 기존 헤게모니 국가의 쇠퇴와 겹치면서 세계체제를 더 평화롭고 평등한 질서로 변화시킬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두 가지로 집약된다. 이 중에서도 아리기는 전자의 주장을 입증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두 번째 주장이 성립하기 위한 전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리기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론에 이론적 영감을 주었다고 간주되는 애덤 스미스를 호출해 비자본주의적 시장경제론을 구성한다. 즉 스미스는 흔히 알려진 바와는 달리 (1)분업과 시장을 경제발전 및 국부의 주요 원천으로 보기는 했지만 이와 동시에 시장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재생산하는 정부의 역할과, 정부가 시장을 사회적이거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통치도구로 삼는 행위를 지지했다. (2) 무역과 생산에서 투자에 따르는 위험을 겨우 보상할 수 있는 최저 수준까지 이윤이 하락하도록 자본가들끼리 경쟁시키는 것을 정부의 중요한 역할로 간주했다. (3) 독립적인 생산단위 사이의 분업을 지지했을 뿐이지 하나의 생산단위 내의 노동분업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이상의 세 가지 점을 근거로 아리기는 스미스가 논의한 시장경제와, 자본이 무제한적인 축적요구(M-C-M')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구조를 파괴하고 재조직해 가는 자본주의 논리를 구별한다. (“지본주의 세계체제 속의 중국 사회주의’, 수사인가 가능성인가” <창작과비평> 2015 , 18-19)

 

나는 <국부론>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아리기가 이 책의 제1장과 제2장에 인용한 부분을 봐서는 그 주장에 충분히 수긍이 간다. 그렇다면 스미스에 대한 광범위한 오해가 오랫동안 계속된 이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세계에서 자본주의 원리가 득세하고 있는 상황 때문에 그 발전경로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 온 것이다. 그런 오해가 상식으로 통하는 상황은 경제학을 비롯한 제 학문분야의 연구방법에도 편향적인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을 여기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리기가 기왕의 통념을 넘어서는 데, 그리고 새로운 관념을 도입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제1장의 뒷부분(58-67)에서 스기하라 가오루의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 개념을 소개하면서 각주에 이 절에서 스기하라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은 내가 알기로 대부분의 기원, 진화와 한계에 대한 포괄적인 모델을 구축하려고 시도한 사람은 그가 유일하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근면혁명이란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동아시아 국가들이 노동집약적 생산기술의 발전을 통해 자원 부족의 상황에 대응하면서 생활수준을 완만하게 향상시킨 경제 발전경로를 말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발전경로가 유일한 길이 아니라고 보는 아리기의 관점에서 다른 발전경로의 사례로 내놓기에 적절한 개념이다. 자연자원보다 인적 자원의 개발에 중점을 두는 이 발전경로는 유럽의 자본주의 발전경로와 같은 급속한 팽창성을 보이지 않으면서 장기간의 지속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길이었다. 19세기 후반의 서세동점 현상은 경제체제의 우월성보다 군사력의 발전을 동반하는 자본주의체제의 특징에 기인한 것으로 아리기는 본다.

근면혁명의 효과가 서세동점의 상황 속에서도 계속된 점을 아리기는 중시한다.

 

스기하라에 따르면, 경제적 향상을 추구하면서 비인적 자원보다 인적 자원을 동원하는 이 같은 성향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자국 경제 내에서 서구 기술을 통합하려고 하던 때에조차도, 계속해서 동아시아 발전 경로의 특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1880년대까지 일본 정부는, 일본이 토지와 자본 모두 부족하지만 노동은 풍부하고 상대적으로 질이 높다는 인식에 입각하여 산업화 전략을 채택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전략은 전통적인 노동 집약적 기술의 적극적 이용, 전통 산업의 근대화, 그리고 요소 부존량의 상이한 조건을 감안하여 서구 기술을 신중하게 적용하도록장려하였다. 스기하라는 이 이종 교배의 발전 경로를, “서구 경로보다 노동을 더 전면적으로 흡수하고 이용하면서 기계와 자본으로 노동을 대체하는 것에는 덜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노동 집약적 산업화라고 불렀다. (61)

 

이런 효과는 1950년대 이후 일본경제의 발전에서도 특징적인(서양과 다른) 요소로 확인될 수 있을 것이며, 최근 중국경제의 발전에서도 중요한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근면혁명이란 제한된 자연자원에 노동력 투입을 늘림으로써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데 요체가 있는 것이므로 노동의 가치를 확립하고 노동 윤리를 강화해주기 때문에 동아시아 지역 노동력의 높은 질을 설명해주는 적절한 조건으로 보인다. 이런 유력한 관점이 최근에 와서야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도 종래의 경제학이 인적 자원보다 물적 자원을 중시해 온 추세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1974년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김명환 등 옮김, 까치글방 펴냄)로 세계체제론이 출범할 때는 환경과 자원 문제 등 현대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부각되고 있을 때였다. 그 전에 자본주의체제의 구조적 문제를 밝히려는 종속 이론같은 시도에서 더 넓은 문제의식으로 나아가기 위한 조건이었다. 그 후 세계체제론이 계속 확장되어 온 것은 새로 나타나거나 새로 인식되는 문제들을 포괄하기 위해서였고, 냉전 종식 후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계에 대한 고찰이 정밀해지면서 중국 등 동아시아의 변화로부터 자본주의 이후의 실마리를 찾는 노력이 중요한 한 갈래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아리기의 이 책은 2007년 시점에서 이 새로운 탐구방향의 성과를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스기하라나 왕후이처럼 세계체제론에 얽매이지 않은 동아시아 학자들의 관점을 중요한 참고 대상으로 제시하는 점이 눈에 띈다. 2008년 미국의 금융공황 이후 대안 모색의 노력이 부쩍 늘어난 점을 생각하면 세계체제론의 명제들을 다른 각도에서 뒷받침하는 연구가 지금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 소개 작업의 앞부분에서는 세계체제론의 중요한 내용을 소개하는 데 치중하겠지만, 뒷부분에 가서는 최근에 새로 나타나고 있는 시각들, 특히 중국에서 제기되는 시각들을 소개하는 데로 비중을 옮기게 될 것이다.

 

 

Posted by 문천

 

서세동점 현상의 퇴조: 고통과 치욕의 150년 역사를 벗어날 계기가 다가온다.(4월 15일)

 

19세기 중엽 이후 동아시아 사회들은 압도적 군사력과 생산력을 가진 서양 열강의 정복 대상이 되었다. 그 정복은 물질적 영역에 그치지 않고 정신적 영역까지 번져 동아시아 전통문명의 단절을 가져왔다. 20세기의 동아시아인은 서양인의 부강(富强)을 배우기 위해 자신의 전통을 내버리고 서양인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배우는 데 몰두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문명의 멋진 신세계에 대한 회의감이 널리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의 일이었다. 자원과 환경의 위기를 통해 근대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고, 일본을 필두로 한 동아시아-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적 도약에 따라 서양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었다. 이 변화가 21세기 들어와 중국의 경이적 성장과 미국 발 금융위기 앞에서 크게 증폭되고 있다.

서세동점 현상은 20세기 내내 한반도의 식민지화와 분단의 배경조건으로 작용했다. 이 현상의 퇴조는 한국인에게 개항기 이후 150년 만에 외세의 질곡에서 벗어날 기회를 떠올려주고 있다. 민족사의 전기(轉機)를 가져올 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지금 이 사회에서 어떤 대비를 하느냐에 따라 한국의 미래가 크게 좌우될 것이다.

새로운 상황을 맞은 이 사회는 어디에서 가르침을 얻을 것인가? 불리한 국제정세 속에서 민족사회의 자세를 바르게 지키려고 애쓴 선인들이 있다. 그 당시에는 달걀로 바위를 치는 어리석음으로 보였을지라도 어지러움을 이겨내려는 큰 뜻을 보여준 이들이다. 닥쳐오는 변화를 큰 것으로 본다면 꾀에 의지하기보다 뜻을 세울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계: 파편화된 인간이 자기 자리를 찾을 때(4월 22일)

 

유럽 근대문명의 사상적 출발점인 계몽사상은 자연과학의 발전 위에서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표출한 것이었다. 그 가장 집약적 표현이 원자론으로 나타났다.

19세기 초에 나온 원자론은 모든 물질이 더 쪼갤 수 없는(a-tom) 원자로 구성되었다는 믿음이다. 물질을 분석해 원자 차원에 이르면 완벽한 파악이 가능하다는 이 믿음은 인간과 사회도 분석을 통해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물리학계에서 원자론은 19세기 말 원자의 내부 구조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면서 무너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사회에 대한 원자론의 영향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 인간을 파편화된 개인으로 환원시키는 자유주의를 발판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형식적 자유의 약속을 빌미로 자본의 폭력성에 대한 사회적 억지력을 봉쇄함으로써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의 금권통치(plutocracy)’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1990년을 전후한 소련 해체와 동유럽 공산권 붕괴를 계기로 자본주의체계의 세계 지배가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70년대 이래 세계체제론은 자본주의의 겉보기 승리가 사실은 그 말기적 현상임을 밝혀 왔고 21세기 들어와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세계체제론은 자본주의체계의 내적 논리에 따라 그 한계를 미시적으로 규명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외부로부터의 거시적 시각으로도 자본주의체계의 한계와 문제점을 살필 수 있다. 거시적 시각은 정밀성이 떨어지지만 다른 문제들과의 관련성을 떠올리기에 좋다. 미시적 시각과 거시적 시각의 결합을 시도할 때가 되었다.

거시적 시각의 한 갈래로 자본주의와 연결된 원자론적 특성을 생각해 본다. 물질계와 인간계는 원자론적 특성과 유기론적 특성을 아울러 갖고 있다. 모든 고등문명에서는 양쪽 특성을 두루 감안한 원리에 따라 체제를 운용했다. 이 관행을 벗어난 유럽 근대문명이 2백 년간 세계를 지배한 것은 산업혁명이라는 특수조건이 일시적으로 허용해 준 현상이다.

 

 

권력주의 국가와 권위주의 국가: 국가다운 국가의 모습을 새로 그린다.(5월 9일)

 

유럽 근대문명 속에서 태어난 근대국가에는 일체의 권위에 반발하는 계몽주의시대 분위기가 투영되었다. 그래서 국가 운영에 권력만을 사용하고 권위의 역할을 부정하는 기본 경향이 있다. 이성에만 의존하고 감성을 배척하는 근대정신의 한 측면이다.

권위는 도덕성 위에 서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도덕적 권위를 무시하는 권력주의 성격이 극심한 국가다. 고위공직자 청문회 때마다 기막힌 꼴을 보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상적 사회에서는 무력(武力)이든 재력(財力)이든 학력(學力)이든 힘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의 안보를 위해 노력한다. 자기네 우월한 위치를 보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형성되는 엘리트 계층은 지배력보다 지도력의 형태로 힘을 행사한다.

한국사회의 지도력 부재는 일본 식민통치에 의해 구조화된 것이다. 일본에 붙어 자기가 속한 사회를 등지는 친일파에게 재력과 학력이 집중되었다. 이 집단을 발판으로 해방 후에는 미국에 붙어 민족사회를 등지는 세력이 형성되었다.

1990년대에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와 싱가포르의 리콴유가 아시아적 가치를 말한 일이 있다. 1997년 경제위기로 쑥 들어가 버렸지만, 근년 중국의 부상 앞에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독재의 방편으로 없는 권위를 억지로 휘두르는 권위주의가 아니라 국가의 인민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연계된 권위를 국가 운영에 적극 활용한다는 점을 생각하는 것이다.

세계정부의 가능성 역시 권위주의의 도입과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세계화가 경제적 세계화로서 세계적 무정부상태를 지향했는데, 정치적 세계화의 필요성이 갈수록 절실하다. 그런데 국제조직에 권력만을 매개로 한다면 큰 권력을 가진 나라일수록 세계정부에 얽매이지 않으려 들기 때문에 모순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유엔의 역사에서 알아볼 수 있다. 국제관계에도 도덕적 권위가 작용해야 정치적 세계화가 가능할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