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5. 28. 20:32

 

집에서 고속터미널까지 전철로 왕복 3시간, 거기서 거제까지 승용차로 왕복 8시간 반, 모두 11시간 반을 길 위에서 보냈다. 거제까지 당일에 다녀온다는 게 나로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윤 선생님 사정이 그러시다는데 그분과 모처럼 긴 시간 이야기 나눌 기회가 소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란히 앉아 8시간 반은 너무 길었다. 너무나 재미있고 매력적인 분인데도 밤이 깊어지면서 살짝 싫증이 나려 했다. 그분도 그랬겠지.

 

고딩 시절 가까이 지냈으나 졸업 후 몇 차례 못 본 여익 군이 내 글을 좋아해 근년 볼 기회를 드물드문 만들더니 1년쯤 전부터는 백씨인 윤 선생님까지 더러 함께 뵙게 되었다. 그분은 근년 평화재단에 관여하고 있는 터에 내 글을 두루 살펴보고는 내 의견이 평화재단 사업에도 많이 반영되었으면 좋겠다며 힘써 주셨다. 6월 8일부터 5회에 걸친 현대사 대담 시리즈를 기획하면서도 내 의견을 열심히 청해 많이 반영해 주셨다.

 

어제 거제행은 몇 달 전 얘기가 나온 것이다. <해방일기> 완간 기념 대담강연회에 형제분이 와줬는데 뒷풀이 자리에서 이병한 선생이 화제에 올랐을 때 내가 이 선생 부모님을 한 번 '구경'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내 연배 분들 같은데 자식이 저런 길로 나서도록 뒷받침해 주는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궁금하다고. 그랬더니 윤 선생님이 자기도 무척 궁금하니 한 번 같이 가보자고 나섰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말씀은 그렇게 했어도 바쁜 분인데 정말 함께 가게 되리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 계씨가 전화해 일정을 잡고, 결국 어제 다녀오게 된 것이다. 그분으로서는 6월의 대담 시리즈를 앞두고 내 의견을 한 차례 폭넓게 청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무리한 일정을 강행하게 된 것 같다.

 

1시 반 넘어 '거제 3대 함흥냉면'집에 도착했다. 이제 조용한 시간일 테니 타이밍 좋다, 하면서 들어가 보니 예상 외로 북적댄다. 나중에 사장님에게 들으니 12시에서 한 시까지는 직장인들과 예약손님이 몰리기 때문에 사정 아는 일반 손님은 1시 이후에 온다고 한다. 반갑게 맞이해주는 사장님, 잠깐 수작을 나누며 보니 '치세의 한량, 난세의 호걸' 인상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엄청 반가우시겠지, 별난 길 걸어가는 아들 신통하다고 전직 장관님 일행이 그 먼 길을 찾아왔으니. 몇 마디 얘기 나누다가 "사실은..." 하면서 고충을 털어놓았다. 누가 "병한이 걔는 뭐해요?" 물을 때 난처할 때가 많다고.

 

식사 후 사모님이 와서 함께 담소를 나누는데, 아버님도 참 든든한 어버이지만 어머님의 뒷받침이 정말 보통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선생에게도 어머님과 이야기 많이 나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는데, 어머님께 들으니 더 실감 난다. 마침 어머님이 파평 윤씨에다가 손님 형제와 고향도 가까우니 굳이 따지려면 촌수도 따질 만한 사이일 것 같다. 항렬이 손님들보다 하나 위다. 그런 조건까지 겹친 덕분에 스스럼없이 벼라별 얘기를 다해 주신다. 이 선생이 여기 들어와 볼 염려가 있으므로 그 내용은 적지 않는다. 아무튼 내가 지금까지 보고 들은 모자간 가운데 가장 이해가 깊고 공감이 넓은 모자간이다.

 

부모보다 더 연장인 이들이 아들 생각해서 찾아왔다는 데 내외분 모두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면서도 몇 차례씩 "너무 황송하다"는 말씀들을 하신다. 내가 눙치려고 한 마디 했는데, 해 놓고 보니 좀 지나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세상이 바뀌었으니 그렇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예전에는 훌륭한 스승이 있으면 좋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요즘은 훌륭한 제자가 있으면 좋은 스승들이 몰려든답니다." 다들 재미있게 들어주기는 했지만, 아첨이 좀 심하지 않았나 반성이 되었다. 여익 군에게 나중에 물었다. "야, 내가 이렇게 아첨 잘하는 놈이 될 줄 학교 다닐 땐 몰랐지?" 상상도 못했다는 대답이었다.

 

사장님이 어느 한적한 마을로 안내해 가서 길가의 '있는지 마는지 한' 집으로 몰고 들어갔다. 그런 집에서 얼마나 만족스러운 횟상을 받을 수 있을지 관광객들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밖에서 봐서는 라면 하나라도 제대로 얻어먹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집꼬라지다. 다섯 시도 안 되었는데 작지 않은 방이 꽉 차 있다. (우리까지 모두 20여 명?) 사장님과 나 둘이서 소주 두 병을 깠는데, 나는 아들보다 아버지랑 친구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방문 계획을 전화로 알릴 때 "아드님 친구"라고 나 자신을 소개했다. 아드님도 나를 자기 친구라고 말씀드려 뒀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는 길에 윤 선생님이 탄식을 흘리는지, 탄성을 발하는지, 몇 차례 되뇌신다. "내가 별 일을 다 해 보네." 마음에 드는 필자나 연구자가 있을 때 연락해서 만나는 일이야 종종 있겠지만, 본인을 만나보기도 전에 그 집부터(더구나 그 먼 곳까지) 찾아가 부모를 만나는 일은 물론 처음이시겠지. 그 댁 내외분께 우리가 어떻게 보였을까? 가정방문 온 선생님들? 아니면 동방박사?

 

Posted by 문천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체제의 탄생

 

에릭 밀란츠의 <자본주의의 기원과 서양의 발흥>(김병순 옮김, 글항아리 펴냄)2007년에 나온 책이다.(한국판은 2012) 21세기 들어 자본주의의 쇠퇴를 전망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자본주의의 기원을 다시 살펴본 이 책은 자본주의가 과연 무엇인지 더 정밀하게 따져보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1973년생인 밀란츠는 이 책을 낼 때 34세의 나이였다. 페르낭 브로델 센터(이매뉴얼 월러스틴이 1976년부터 1999년까지 일하고 퇴직 후에도 명예소장으로 있음)가 있는 뉴욕 주립대 빙엄튼 캠퍼스에서 학위를 받았다니 세계체제론에 대한 이해가 깊을 텐데, 세계체제론에 부분적으로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그는 세계체제론이 공간과 시간, 두 측면에서 지나치게 좁은 관점을 취한다고 비판한다.

 

토머스 홀이 말한 것처럼 세계-체제론은 1500년 이전의 자본주의 이전 단계들에는 전면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학자가 많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런 의문이 생긴다. 16세기 이전에는 자본주의체제가 없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공간적 전제조건, 즉 세계의 어느 한 부분에서 봉건제로부터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기간이 있었고 그 안에서 다양한 체제가 하나의 단일한 세계-체제로 수렴했다는 사실에 동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또는 시간적 전제조건, 즉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1450년과 1650년 사이에 일어났다는 사실에 동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달라진다. (22-23)

 

이 책의 주제는 제목대로 자본주의의 기원이다. 카를 마르크스 이래 수많은 연구자들이 탐구해 온 주제다. 종래 연구자들은 자본주의를 문명의 본질처럼 찬양하거나, 또는 비판하는 입장이라도 엄청난 위력을 가진 현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밀란츠의 시각은 훨씬 냉정한 것이다. 자본주의체제를 부정적, 또는 회의적으로 보는, 1970년대 이래 자라 온 학설을 섭렵한 결과일 것이다.

이 책은 결론까지 포함해 5개장으로 구성되었는데, 본론 3개장이 중국, 남아시아, 북아프리카, 3개 지역과 유럽의 상황을 비교하고 그 관계를 따져보는 것이다. 접근방법에서 세계체제론의 성과를 활용하는 것이며, 저자가 세계체제론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결론의 차이도 부분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1유럽 상업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서 기존 학설을 (1)정통 마르크스주의, (2) 브레너주의, (3) 근대화 이론, (4) 세계-체제론의 네 가지로 소개했는데, 세계체제론에 관한 설명이 다른 세 가지 관점의 설명을 다 합친 것보다 갑절이나 되는 분량이다. 세계체제론에 얽매이지 않은 독자적 관점을 내세우려 애쓰지만, 저자가 인정하는 논평의 가치가 세계체제론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세계체제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자본주의체제 성립의 공간적-시간적 배경을 너무 좁게 잡았다는 데 집중된다. ‘공간적 전제조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월러스틴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유럽 대륙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이행은 내부의 변화에 따른 것인가, 외부의 변화에 따른 것인가?” 월러스틴은 유럽 내부에서 이행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유럽이 다른 지역에 영향력을 끼치고 그에 따라 유럽 전반에 걸쳐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는 사실과 일치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등장을 유럽, 특히 북서유럽의 특정한 변화나 영국과 프랑스의 내적 모순에만 초점을 맞춰 설명할 수는 없다. 따라서 16세기 이전에 유럽에 영향을 끼친 외부 요소들을 분석함으로써 세계-체제를 이해하려는 다른 연구들도 나타났다. 예를 들어 아부-루고드는 13세기와 14세기에 존재했던 지역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체제를 구성했다고 주장한다. “이 모든 지역 단위는 서로 교역하고 다른 지역에 무역을 중개하는 일뿐 아니라 세계 시장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국내 경제를 재정비하기 시작했기때문이다. (41-42)

 

공간적 전제조건보다 저자가 더 중시한 것은 시간적 전제조건이다. 16세기 유럽에서 봉건제가 위기에 빠지면서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새로운 단일 생산양식이 근대 세계체제의 등장과 함께 탄생했다고 하는 월러스틴의 관점을 반박하는 데 저자는 많은 공을 들였다. 세계체제의 복합적 구조(‘중심부주변부’)16세기에 빚어졌다고 하는 월러스틴의 주장에 대해 저자는 그런 구조가 그보다 수백 년 전부터 중세 유럽에서 도시국가를 둘러싸고 나타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도시국가와 식민지 사이의 국제 수지 관계는 도시국가들에 유리했다. (...) 유럽에서 상업자본주의적 주요 도시국가들이 자리를 잡고 성장을 거듭하게 된 것은 도시국가들의 산업을 위한 식량과 원재료의 공급처로서뿐 아니라 시장으로서 구실을 하는 식민지 주변부를 끊임없이 ()생산한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당시 이러한 동지중해 지역의 식민지 형태와 나중에 건설된 대서양 지역의 식민지 형태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다.

이러한 유사점들이 존재한다고 할 때 근대가 1500년경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비판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뿐 아니라 (근대의 시작을 1400년경으로 보는) 아리기에게도 해당된다. 베네치아는 실제로 아리기가 지적한 것처럼, 아마도 최초의 자본주의 국가의 초기 형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그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만을 보는가? 따라서 상업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서유럽 도시국가 간 체제 전반에 걸쳐서 중세 말에 적용될 수 있으며 그것의 역사적 연속성 또한 부인될 수 없다. (40-41)

 

체계적-지속적 착취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

 

세계체제론의 중요한 논점 하나가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밀란츠는 이 논점에 기꺼이 동의한다. 유럽 외부 세계의 침체를 내재적 보수성이나 전제주의로 설명하고 유럽의 발전을 호기심, 모험심, 합리성 등으로 설명하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엽까지 유행하던 관점들을 배격한다. 그런 목적론적 경향독특한 예외주의보다는 훨씬 객관적인 획일적이지 않고 내적 분화를 허용하는분권화 경향의 주장에도 만족하지 않는다. 중국, 남아시아, 북아프리카 등 유럽 외부 지역의 중세 말 경제 발전 상황이 유럽보다 앞서거나 대등한 것이었다고 선선히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본주의체제가 유럽인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양보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럽식 자본주의가 산업혁명의 결과라는 일반적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5결론: 중세 서유럽 도시국가는 정말 유럽의 기적을 이뤘는가?”에서 그는 자본주의체제가 중세 유럽 도시국가의 특성에서 나온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유럽의 도시국가는 지속적인 교역과 상업 확대의 표현이자 그것을 보증하는 실체였다. 따라서 그것은 종속변수이면서 독립변수로 작용한다. 유목민의 침입이 없었다는 것과 그 지역의 농촌 귀족들이 예외적으로 약했다는 점이 유럽의 도시국가를 종속변수라고 설명할 수 있다면, 반면에 유럽 역사의 경로의존성이 왜 인도와 중국, 수단 지역 국가들과 다른지를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도시국가라는 점에서 독립변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와 시민권으로 상징되는 근대의 기원을 끊임없는 자본 축적의 역동성 속에서 제국주의와 전쟁을 통해 형성된 유럽의 도시국가와 그 뒤를 이은 국민국가 안에서 찾을 수 있다. (...) 18세기 말까지 서유럽의 생활수준, 상업화 정도, 농업생산성, 원시산업화가 세계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더 발전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고 따라서 어느 정도까지는 다원적 근세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서서히 유럽 (상인) 엘리트들의 손에 집중된 군사력은 유럽 내부와 궁극적으로 비유럽 세계에서까지 수익 증대와 시장 확장의 길을 열어줬고 나중에는 그것을 보증했다. 군사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자본 축적의 근대적 형태들, 즉 불법적-합법적 독점이나 신식민주의, 노동자 착취는 서유럽에서 최초로 발생한 자본주의적 착취의 장기적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 상인계급은 도시국가에서 권력을 축적하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법적 장치(시민권 개념)를 확립했다. 그리고 그것은 상인계급에게 이익을 주는 식민지화 및 주변부 구축과 병행해서 일어났다. (181-182)

 

이 주장의 정당성을 이 책만 읽고는 확인할 수 없다. 번역본의 본문은 170여 쪽인데 각주는 작은 활자로 113쪽에 달하고 참고문헌목록이 74쪽이나 된다. 상당량의 참고문헌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책만 읽고도 타당성에 관한 생각은 할 수 있다. 저자는 월러스틴 세계체제론의 기본 명제 대부분에 동의하면서 월러스틴이 말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본질인 중심부-주변부 복합구조가 중세 유럽의 도시국가에서 나타난 것임을 밝히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상업 활동을 아리기도 중시한 바 있거니와, 밀란츠는 서유럽 도시국가의 산업 활동까지 고찰의 대상을 넓힌 것이다.

중세 도시국가에서 근대 도시국가까지 자본주의체제를 뒷받침한 중요한 특성으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상인계층의 정치권력이다. 국가정책의 결정이 상인계층의 이해관계에 적합한 쪽으로 이뤄지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세계의 자본주의국가에도 널리 적용될 수 있는 관점이며, 자본주의체제의 위기 국면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날 특징으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도비치에 따르면 지중해 이슬람 세계의 상인들은 가톨릭 유럽 국가의 상인들과 비견될 수 있는 유기적으로 연결된 정치적 정체성을 지니거나 정치권력을 획득하지 못했다.” 이 주장은 앞서 설명하려 했던 것처럼 유럽의 정치 구조가 유럽 이외 지역의 정치 구조와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럽의 상인 공동체와 동업조합은 정치적으로 독립된 도시국가 안에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했다. 이러한 권력의 획득은 상인 엘리트들의 성공을 위한 필수요소였다. 그들은 국가의 하부구조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마침내(?) 장기적으로 자본 축적의 성공 비결은 가급적이면 과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고 자본을 쉽게 최대화할 수 있게 해서 상인들이 내는 세금을 억제할 뿐 아니라 국가의 자원을 이용해서 거래와 운송, 안전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

중세 말 서유럽의 상업자본주의 체제의 출현이라는 맥락에서 추려내야 할 또 다른 예외적인 변수는 공동체적 정체성의 결과로 나타난 시민권이라는 개념이다. (...) 도시국가의 시민으로서 부르주아의 정체성은 상징적 의미에서 수세기 뒤 국민국가의 정체성으로 고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당시 유럽 농촌에서 상업화의 증대로 부유해진 농민들은 이웃의 가난한 농민들의 토지를 사들일 수 있었고 남는 돈으로 다른 사람의 토지의 소작권을 구입하는 데 투자했다. 따라서 그들의 화폐 수입은 더 늘어났다.” 가난한 농민들은 농촌 노동자 계급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국가나 때로는 왕에게서 직접 시민권을 살 수 있었던 부유한 농민들은 끊임없이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중세 유럽의 도시국가는 처음에는 귀족들을 견제하고 국가 재정 수입을 늘리고자 하는 군주의 보호를 받았지만 근본적으로는 혼인 관계로 맺어진 상인들과 부유한 직인, 소귀족들의 과두정치가 지배하는 사회경제적, 법적 실체였다. (174-176)

 

저자는 제2장에서 중국, 3장에서 남아시아, 4장에서 북아프리카의 중세 상황을 유럽과 비교하면서 유럽 도시국가의 특성이 예외적인 것이었음을 확인한다.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고찰도 흥미로운 것이지만, 나로서는 제일 익숙한 영역인 중국의 경우를 더 세밀히 살펴보게 된다.

 

국가의 부재, 그것이 유럽의 예외성이었다.

 

2장은 (1) 송나라 시대의 중국 사회경제 혁명, (2) 중국과 몽골, (3) 명나라 시대의 중국과 유럽: 갈림길, (4) 유럽 자본주의에 대한 결론, 4개 절로 구성되어 있다. 1절에서 중국의 산업과 경제가 13세기까지 유럽보다 훨씬 더 발달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제3절과 제4절에서 유럽과의 차이를 밝힌 것이다. 여기서 밝혀진 차이가 제3장과 제4장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거듭 확인되는 것이다.

2절에는 몽골제국의 흥망이 중국사회에 끼친 영향을 논했는데, 몽골제국의 정책과 제도가 기술적인 면에서 산업과 상업의 발달에 유리한 것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몽골이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한 결과는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결론의 근거와 방식은 불만스럽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메시지에만 집중하겠다. 몽골로 대표되는 유목민의 존재가 중국사회에 안보의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안정중심의 통치방식이 중국에서는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황제들은 반복되는 유목민들의 중화 세계 침입을 막고 몽골의 지배에 대항해서 봉기를 일으키다 엄청난 시련을 겪은 수많은 농민을 안정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역점을 기울였다. 따라서 명나라는 다시 중요한 방위 요충지가 된 만리장성 주변 지역을 지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에 해군력 강화에는 그다지 힘을 쏟지 못했다. (70)

 

따라서 명나라 초 정화(鄭和)의 해상활동은 유럽인의 대항해시대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졌던 것으로 저자는 본다.

 

15세기 말, 영국의 헨리7세는 존 캐벗에게 그가 바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땅을 찾고 탐험하고 정복하고 점령해서 마침내는 소유하라는 임무를 내렸다. 이것은 정화가 명나라의 영락제에게서 받은 임무와는 완전히 달랐다. (...)

놀라운 사실은 명나라 원정대가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거나 해상교역로를 독점하려고 원정에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쉽게 이룰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정화 원정대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만천하에 중국의 외교와 문화적 위신을 세우는 것이었다. (70-71)

 

중요한 사실을 정확하게 짚은 것이다. 그러나 정밀성에는 문제가 있다. 중국이 유럽국가들 같은 침략성을 보이지 않은 이유를 정리한 아래 대목을 보자.

 

또한 중국이 다른 나라들을 사회경제적으로 종속시켜 식민지로 만들고 수탈하는 전략을 치밀하게 전개하고 추구하며 실행할 수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국가 자원을 고갈시키고 중국을 지속적으로 거대한 파멸의 대상으로 만든 끊임없는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중국의 군사 활동은 정복보다는 방어 중심이어야 했다. 이렇듯 중국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은 것은 유럽에서는 작동하지 않은 두 가지 중요한 변수 때문이었다. 끊임없는 농민 반란과 변경 주변에 사는 유목민들이 일으킨 파괴와 전쟁이 바로 그것이었다. (84)

 

끊임없는 전쟁이 중국에 있었고 유럽에는 없었다고 하는 이 주장은 옳고 그르고 이전에 적절치가 못한 것이다. 확연한 비교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밀란츠의 이 책은 고찰의 범위를 넓혀준다는 장점을 가진 것이지만, 구체적 명제들에 대한 저자의 판단은 별로 미덥지 못하다. 자기 결론에 끼어 맞추는 느낌이 드는 대목이 많다.

앞서 소개한 자오팅양의 <천하체계>를 본다면 비()침략성이 명나라 초기의 상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이래 중화제국의 본질적 속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화제국은 내부적 완결성을 추구하는 체제였다.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제국에 제국의 외부를 끌어들이려는 노력보다는 중화(中華)’와 다른 속성의 이적(夷狄)’으로 놓아두고 천하체계속에서 유기적 관계를 맺는 노력이 주종이었다.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서 활동한 마테오 리치의 기록 중에도 이런 대목이 있었다.

 

거의 무한한 영토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구, 그리고 온갖 종류의 물자를 풍성하게 가진 이 나라, 주변의 어느 나라라도 쉽게 정복할 수 있는 육군과 해군을 갖추고 있는 나라임에도, 황제도 국민들도 침략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뿐, 정복의 야욕은 일으키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들은 유럽사람들과 아주 다르다.”

 

중국에서는 상인계층이 정치적 권력을 갖지 못했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문명사회의 초창기에는 경제활동 중 농업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이 단계의 지배계층, 즉 귀족은 농업생산력을 발판으로 형성된다. 그러나 문명의 발전에 따라 상공업의 비중이 자라나고, 이에 따라 상공업에 발판을 둔 세력이 귀족계급으로부터 지배력을 넘겨받게 된다. 그것이 유럽의 부르주아였다. 그런데 중세 말기의 중국에서는 상공업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것을 발판으로 한 세력이 지배력을 넘겨받지 못했다.

상공업이 유럽 못지않게 발전하는데도 상공업 세력이 유럽 도시국가처럼 권력화하지 못한 것은 중국만이 아니라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곳저곳에서 부르주아 권력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일일이 해명하기보다는 유럽 쪽 예외적현상의 원인을 따지는 것이 더 타당한 질문 아닐까? 유럽에서 나타난 현상을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 유럽중심주의로부터 저자도 충분히 풀려나오지 못한 것은 아닐까?

다른 곳은 몰라도 중국에는 상공업 세력의 권력화를 억제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었다. ---의 서열을 통한 무본억말(務本抑末)은 일찍부터 중국사회의 중요한 원리였다. 자본의 권력화 현상은 중국에서 전국시대부터 나타났다.(초기의 두드러진 예 하나가 진 시황 때의 여불위였다.) 그러나 이 현상의 제도화가 극력 억제되었기 때문에 개별적 사례에 그치고 자본 중심의 체제가 이뤄지지 못한 것이다.

중국에서 자본의 권력화를 억제한 것은 민간의 무력(武力)을 억압한 것과 마찬가지 원리였다. 상공업이 발달했는데도 그것을 발판으로 한 세력이 정치권력을 쥐지 못한 것은 강한 군대가 있는데도 군벌이 정권을 휘두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중앙집권체제였다. 마테오 리치의 기록 중에 이런 대목들도 있다.

 

그들은 워낙 무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아무도 집에 무기를 두지 못한다. 여행시 강도에 대항하기 위한 칼 정도 밖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나 폭력이라면 고작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손톱으로 할퀴는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는 일을 들어볼 수 없다. 오히려 싸움을 피하고 물러서는 사람이 점잖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칭송을 받는다.”

 

모든 영역을 질서 있게 관리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학인들에게 맡겨져 있다. 병사든 군관이든 군인들은 학인들을 높이 존경하고 아무 여지없이 그들에게 복종하고 따른다. (...) 이러한 정서의 근원은 아마 사람의 마음이 학문의 연마를 통해 고상하게 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제국의 확장에 거의 아무런 야욕도 보이지 않는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먼 옛날부터 군사기술보다 학문연구를 선호하는 경향이 늘 있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리치와 같은 시대의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유럽 상황과 비교하면 얼마나 평화로운가. 리치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힘없는 인민이 국가에 복종하기만 하면 다른 중간세력의 폭력(주먹의 힘이든 돈의 힘이든)에 시달리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체제가 2천년 동안 구축되어 왔던 것이다. 17세기에 유럽에 가서 살았던 한 중국인이 폭력이 난무하는 유럽 상황에 경악하는 모습을 조너선 스펜스가 <The Question of Hu>에 그린 바 있다. 리치가 중국에 와서 놀라는 모습을 뒤집어 그린 것 같다.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날 길은 아직도 멀다.

 

정치조직의 규모가 점점 커져서 국가의 형태에 이른 것은 문명의 발달에 따른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로마제국 멸망 후 중세 유럽에서 도시국가가 많이 존재한 것은 다른 문명권보다 정치조직의 발전이 뒤진 것이었다. 상공업이 발달하지 않은 농업지역에서는 도시국가조차 나타나지 못하고 수백 명 인구의 장원들이 정치조직의 단위로 존재한 곳이 많았다. 16세기까지도 수백 명 정도의 병력을 거느린 영주들이 독립적 영지를 지키거나 용병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영국에 상비군 제도가 처음 시행된 것이 1685년의 일이었다. (그래서 1689권리의 장전에 군대가 국왕 아닌 의회에 속하는 것이라는 조항이 들어갔던 것이다.)

밀란츠는 중세 후기 여러 지역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유럽 도시국가의 특성이 예외적인 것이었음을 확인한다. 다른 지역의 일반적상황은 훨씬 규모가 크고 중앙집권성이 강한 국가들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유럽처럼 소규모 정치조직이 성행한 곳은 고찰한 지역 중 북아프리카뿐인데, 그 지역은 이슬람문명권의 외곽으로서 문명수준이 낮은 곳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고찰은 유럽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아시아 여러 지역에 비해 국가의 발전이 늦었던 것이 낮은 문명수준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중세 후기 유럽의 도시국가들이 저개발의 과정을 추진하는 권력 용기의 역할을 맡아 주변부의 식민화로 지속적 착취-지배를 통한 자본 축적의 메커니즘을 만든 과정을 밝히는 데 저자는 노력을 기울였다. 결론을 정리하는 자리에서 그는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날 필요를 역설하는데, 그 자신이 유럽의 예외성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겪는 혼선을 볼 때, 유럽중심주의 탈피의 필요를 그가 얼마나 절실히 느끼는지 짐작할 수 있다.

 

유럽 중심주의자들은 여러 세기 동안 지속된 서양의 식민주의가 끼친 영향과 유산을 인정하지 않는다. 근대화 이론에서 경제학과 사회학을 분문하고 자유방임, 경쟁과 기능주의에 집착하면서 역사적 특수성을 부인하는 주장이 학계의 주류를 이루는 거시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서양의 학문적 논의 자체는 본질적으로 서양의 발흥, 자본주의의 역사, 근대성, 그리고 서양의 국가 제도와 학문 분야, 문화, 착취 기제의 세계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도 학문 연구의 주도권을 잡고 있으며 식민지 시대 이후의대학과 정치계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 따라서 특정한 국민국가들을 책임지고 있는 일부 엘리트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가 오늘날 보호주의 정책의 폐기와 자유방임 정책의 채택이라는 현실과 맞아떨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학계에서 발표하는 대다수 경제학 연구는 이것은 좋은 예다. 그것은 과거 구소련에서 발표한 정통 마르크스주의 연구가 시대와 장소의 구분 없이 과거, 현재, 미래의 조건을 특정한 유럽 중심주의 패러다임에 맞게 주조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182-183)

 

저자는 월러스틴 세계체제론의 담론 틀을 받아들이면서 자본주의체제의 형성 과정에 관한 독자적 관점을 제시했다. 나는 12~15세기 유럽 상황에 직접 관심이 없기 때문에 중국보다 유럽의 국가권력 형성이 매우 뒤쳐져 있었다고 보는 종래의 관점을 확인하는 정도밖에는 이 책의 결론에서 얻은 바가 없다.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노력은 유럽예외주의에 그친 것 같다. 그러나 남아시아, 북아프리카 등 여러 지역의 중세 후기 상황을 시야에 담게 해준 것은 자본주의체제의 속성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데 큰 도움이었다.

끝으로 번역에 대해 한 마디. “옮긴이의 글에서 세계-체제론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도 아니고 세계-체제론에 대한 지식도 미천한 주제라는 겸손의 말을 했는데, 비전문가의 작업이란 사실을 이 대목에 와서야 확인할 만큼 잘 소화했다. 세계체제론처럼 새로운 담론을 소개하는 데는 다른 관점에 따른 훈련과정을 거친 사회과학자보다 오히려 비전문가에게 기대를 걸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물론 비전문가로서 이 수준 소화를 위해서는 노고가 적지 않았겠지만, 그 성과를 치하한다.

 

Posted by 문천

 

레이 황은 <1587>의 제7장에서 이지(李䞇, 卓吾)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이탁오를 공부하는 데 출발점으로 삼을 만하다. 몇 대목을 <중국소설연구회보> 제31호(1997. 9)에 실린 김혜경의 학술번역 "이지 - 자기모순과 갈등의 철학자"에서 옮겨놓는다.

 

 

   1602년 이지는 옥중에서 면도하는 칼로 목을 따 자살했는데, 사후에는 그가 자아를 희생한 것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평론은 의심스러운 바가 자못 적지 않다. 이지의 저작은 당시에는 용납되지 않아 여러 번 관방에 의해 금서조치 되었지만, 그를 흠모하던 사람들은 금지령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중판을 찍어냈다. 이러한 저작들은 비록 그 편폭이 굉장하긴 했지만 역사상에 어떤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낸 것은 아니었다. 이지는 결코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와 같은 유형의 작가들이 모종의 숭고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길 원하게 되고, 따라서 문장 안에는 자아를 불사르는 데 대한 만족과 쾌감을 표현하기 마련이다. 이런 특징을 이지의 저작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어떤 평자들은 이지가 하층 민중의 입장에서 농민을 착취하는 지주 계급을 비판하였다고까지 말하지만, 이런 논조야말로 정말로 근거 없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그는 1580년 요안지부(姚安知府)의 직무를 떠난 이후로 지주이며 신사(紳士)인 친구들의 도움으로 생활을 지탱해 나갔다. 하지만 이지 자신은 이러한 경제적 도움에 대해 전혀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다. 명대 사회는 그가 땀흘리지 않고도 살 수 있도록 허용하였지만, 그는 결코 체제에 대해서 아무러한 의혹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만약 어떤 면에서 그가 지주이거나 관료인 친구를 비판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 개인의 성격이나 품행 때문이지 경제적 입장에 관해 거론한 것은 아니었으며, 동시에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에게도 똑같은 비판이 적용될 수 있다고 명확한 어조로 지적했다.

 

이지는 유교의 신도였다. 1587년 이전에 그는 유교의 윤리대로 응당 가정에 바쳐야할 일체의 의무를 완성했다. 그 다음해 그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는데, 그 해 나이 61세였다. 삭발의 원인은 그가 답답하고 구속감만 느껴지는 생활을 박차고 나와서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희구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환경이 진즉에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둔세(遁世)와는 전혀 달랐다. 이성적인 면으로 보거나 사회적 관계로 보거나 출가 후 그의 행동은 사실상 온 나라 문인들의 양심을 대표했기 때문이다.

 

퇴직 이후 십여 년 동안 이지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저술이었다. 그의 저작 대부분은 생전에 판각되어 간행되었는데, 지불원에는 간행된 목판을 쌓아두는 방이 따로 있었다. 저작의 내용은 대단히 방대했다. 유가경전의 해석, 역사적 자료에 대한 고찰, 문학작품에 대한 평론 및 윤리철학에 대한 내용이 모두 망라되었으며, 그 형식은 논문, 잡설, 시가, 서신 등으로 다양했다. 그러나 광범위한 섭렵이 반드시 다방면으로 조예를 갖추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닌 것이다. 그가 서술한 역사는 사실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결핍되어 있었고, 또한 체계가 형성된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문장이 사서를 보고 옮겨 적은 것인데,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의 견해에 따라 장과 절을 바꾸고 차례를 엮고 배치하여 거기에 약간의 평론을 가한 것뿐이었다. 소설을 접할 때도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작품의 예술적 가치나 창작방식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이지는 작품의 주제의식이나 이야기의 구조, 인물묘사, 서술방법 등의 기교에는 전혀 주의하지 않았다. 그는 문학창작의 특질에 대한 탐구를 떠나서 오로지 소설속의 인물이 도덕적으로 고상한가의 여부와 행위의 정당성만을 따지면서, 마치 실존 인물이나 사실을 다루듯이 평론했다. 또 설령 철학적 이론을 천명하는 경우라도 대체로 매우 편면적인 부분만 손을 대서 소품문 비슷한 문장이나 썼을 뿐 계통적인 퇴고를 거친 결구가 근엄한 장편대작을 써내지는 못했다.

 

그의 각양각색의 저작은 결론이 모두 한 군데로 귀결되는데, 그것은 독서인의 개인적 이익과 공중에 대한 도덕감은 서로 융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출발한 그의 저작은 마치 각종 악기가 함께 울려 한 곡의 교향악을 연주하는 듯하다. 공과 사가 충돌할 때 어떤 방법으로 조화를 이뤄낼 수 있을까? 그가 설사 적절한 답안을 찾아내지는 못했을지 모르나 적어도 문제만큼은 일찌감치 제기해 놓은 상태였다. 독서인들에게 이 문제는 그들의 양심이나 지성의 완정성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아주 절박한 것이었다. 이지 자신의 경력은 그로 하여금 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인식하도록 만들었고, 표현도 더 신랄해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은 독자들의 호응을 불러낼 수가 있었다.

 

이지의 역사관은 대부분 전통적인 관점과 부합하고 있다. 예컨대 왕망(王莽)왕위를 찬탈한 도적이라고 확신한다거나, 장각(張角)요망한 도적이라고 질책한 경우가 그러하다. 그가 보기에 역사의 치란(治亂)은 거듭해서 순환할 뿐만 아니라 또 ()’()’이 서로 연관된 것이었다. 일대의 어진 임금이 에 치중해 문화를 극치의 상태로 끌어 올렸다면 그것은 벌써 동란의 기초를 열은 것이고, 반대로 난리를 평정하고 창업한 임금은 에만 관심을 두게 되므로 그저 백성들의 질고를 해결할 방법이나 추구할 뿐 문화적 수준은 돌아보지 않게 된다. 이렇게 문화적 생활수준과 국가의 안전은 서로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인식하는 관점은 중국역사의 전통적인 산물이면서 관료정치의 특징이기도 하다.

중앙집권적 통치 아래서는 많은 관료가 억만의 농민을 다스리면서 그들을 획일화시키고 단위별로 나누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사람이나 특수한 성분이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거나 새로운 법칙을 창조하는 일이 장려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문관 집단은 기술을 발전시킬 가능성을 이미 상실했으며 새로운 역사적 문제에 대처할 능력도 없었다. 사회의 물질문명(곧 이지가 말한 ’)은 앞을 향해 발전해 나가는데 국가의 법률이나 조직기구가 그에 따라 개편되지 않았으므로 혼동이 발생하는 것도 필연이랄 수밖에 없었다. 시대적 한계로 말미암아 이지는, 역사의 순환은 피할 수가 없으며 정해진 운명이란 어떤 신비한 역량조차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힘들여서 어떤 새로운 해결방안을 찾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보면 이지의 유심론은 결코 철저하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흥망치란은 결코 사람의 주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객관적 진실성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인심이 따라주지 않았다고 해서 치란조차 치란이 아니라고 우기는 그런 이론은 더욱 인정하지 않았다.

군왕이 일생동안 벌인 사업의 성패는 역사적 순환의 결과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지는 역대 군주를 평론할 때에도 그들에게 시대에 적응할만한 식견과 기백이 있었는가를 살피는 데 치중했다. 이지는 천하라는 큰 책임은 재상이나 대신이 짊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대신들에게서 기대한 것은 그들의 정치적 치적이었지 도덕적인 언사가 아니었다. 뛰어난 재주와 식견을 가진 사람이 백성의 복리를 위한 공헌을 만드는 과정 중에 있다면 명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앞뒤를 돌아보고 손익을 재다 보면 자신의 행동이 구속당하기 때문이다. 그는 욕됨을 참고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하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라도 사업상의 성공을 이뤄낼 수가 있어야 한다. 작은 절개를 버리고 대국을 바라보는 이런 행동이 정당한 것으로 인식되려면, 그 전제조건으로서 백성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를 논리적으로 해석하면 공중도덕은 개인의 도덕과 같을 수 없으므로 목적이 좋으면 수단이 불순해도 상관없다는 맥락으로 연결된다. 이지의 이러한 관점은 유럽의 철학자 마키아벨리(Machiavelli)와 매우 흡사하다.

이지는 역사상에서 재정경제문제에 대해 창조적 의지를 가진 집정자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전국 시대의 이리(李悝), 한대의 상홍양(桑弘羊), 당대의 양염(楊炎) 같은 인물은 존경했지만, 송대의 왕안석(王安石) 만큼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는 물론 왕안석이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의 재주가 포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부강하게 하는 방법은 알지도 못하면서 기필코 부강해지려 한다는 평론과 위에서 말한 논점을 서로 연계시킴으로써 이지는 한 명의 탐관오리가 미치는 해악은 작지만 청렴한 관리가 끼치는 해악은 매우 지대할 수 있다는 대담한 결론을 내렸다. 이지는 해서(海瑞)를 존중했지만 그가 전통적인 도덕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에 영원한 푸른 풀일 뿐이며, “찬 서리를 이겨낼 수는 있으되 동량이 될 수는 없는 자라고 말했다. 유대유(兪大猷)와 척계광(戚繼光)에 대해서는 극도로 경도되어, “이 두 원로는 정말로 가경, 건륭 간에 혁혁한 업적을 남기셨으니, 천백세에 길이 전할 인물이시다라고 찬양했다. 동시대의 인물 중에서는 장거정(張居正)을 가장 숭배하여, “재상 중의 재상이라거나 담력이 하늘만큼 큰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이지가 어떤 체계적인 이론을 창조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그의 단편적인 언론들은 자주 앞뒤가 모순되므로 독자들은 그가 반대하는 사물은 쉽게 식별해낼 수 있어도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알아내기가 그다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앞뒤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지의 가장 큰 결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창조적 능력이 있는 사상가가 과감한 자세로 입론하는 경우라도 그 언론에서는 종종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당시 이지의 불행은 오늘날 연구자의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가 남긴 상세한 기록 덕분에 우리는 당시 사상계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런 저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의 고민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측정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공맹사상의 영향이나 주희, 왕양명의 시비장단이 이지의 분석과 논변으로 더욱 명확해졌다. 만력황제나 장거정, 신시행(申時行), 해서와 척계광(戚繼光)의 생활과 이상조차도 이지의 저작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또다른 각도에서 관찰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거대한 인구를 가진 국가에서 개인의 행동이 오로지 유가의 간단하고도 엉성하며 또 일정치 않은 원칙에 의해 제한되면서 거기다 또 법률까지도 창조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사회가 발전해 나가는 정도는 반드시 제한당하기 마련이다. 취지가 아무리 선량하더라도 기술적으로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만력 15년인 1587, 간지상으로 정해(丁亥)년인 이 해는 겉으로는 사방이 태평하여 아무런 특기할 일이 없었지만, 실제로 우리의 대명 제국은 이미 발전의 끝머리에 다달아 있었다. 이 시기에 황제는 정신을 가다듬어 나라를 잘 다스릴 방법을 강구하기도 했고 안일과 탐락에 취하기도 했으며, 재상은 독재를 하거나 조화를 추구했고, 고급장성은 풍부한 창조력도 있었고 일시적인 안일을 탐하기도 했다. 문관은 청렴하게 멸사봉공하거나 탐욕으로 부패하기도 했고, 사상가는 극단적으로 진보했거나 절대적으로 보수화하기도 했는데, 최후의 결과는 선악을 가릴 것도 없는 실패였을 뿐 아무도 자기의 사업에서 의의 있는 발전을 이뤄내지 못했다. 어떤 이는 몸을 망쳤고, 어떤 이는 이름을 더럽혔으며, 또 어떤 사람은 패가망신과 오욕을 겸해서 감내해야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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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