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동점 현상의 퇴조: 고통과 치욕의 150년 역사를 벗어날 계기가 다가온다.(4월 15일)
19세기 중엽 이후 동아시아 사회들은 압도적 군사력과 생산력을 가진 서양 열강의 정복 대상이 되었다. 그 정복은 물질적 영역에 그치지 않고 정신적 영역까지 번져 동아시아 전통문명의 단절을 가져왔다. 20세기의 동아시아인은 서양인의 부강(富强)을 배우기 위해 자신의 전통을 내버리고 서양인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배우는 데 몰두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문명의 ‘멋진 신세계’에 대한 회의감이 널리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의 일이었다. 자원과 환경의 위기를 통해 근대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고, 일본을 필두로 한 동아시아-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적 도약에 따라 서양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었다. 이 변화가 21세기 들어와 중국의 경이적 성장과 미국 발 금융위기 앞에서 크게 증폭되고 있다.
서세동점 현상은 20세기 내내 한반도의 식민지화와 분단의 배경조건으로 작용했다. 이 현상의 퇴조는 한국인에게 개항기 이후 150년 만에 외세의 질곡에서 벗어날 기회를 떠올려주고 있다. 민족사의 전기(轉機)를 가져올 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지금 이 사회에서 어떤 대비를 하느냐에 따라 한국의 미래가 크게 좌우될 것이다.
새로운 상황을 맞은 이 사회는 어디에서 가르침을 얻을 것인가? 불리한 국제정세 속에서 민족사회의 자세를 바르게 지키려고 애쓴 선인들이 있다. 그 당시에는 달걀로 바위를 치는 어리석음으로 보였을지라도 어지러움을 이겨내려는 큰 뜻을 보여준 이들이다. 닥쳐오는 변화를 큰 것으로 본다면 꾀에 의지하기보다 뜻을 세울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계: 파편화된 인간이 자기 자리를 찾을 때(4월 22일)
유럽 근대문명의 사상적 출발점인 계몽사상은 자연과학의 발전 위에서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표출한 것이었다. 그 가장 집약적 표현이 원자론으로 나타났다.
19세기 초에 나온 원자론은 모든 물질이 더 쪼갤 수 없는(a-tom) 원자로 구성되었다는 믿음이다. 물질을 분석해 원자 차원에 이르면 완벽한 파악이 가능하다는 이 믿음은 인간과 사회도 분석을 통해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물리학계에서 원자론은 19세기 말 원자의 내부 구조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면서 무너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사회에 대한 원자론의 영향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 인간을 파편화된 개인으로 환원시키는 자유주의를 발판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형식적 자유의 약속을 빌미로 자본의 폭력성에 대한 사회적 억지력을 봉쇄함으로써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의 ‘금권통치(plutocracy)’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1990년을 전후한 소련 해체와 동유럽 공산권 붕괴를 계기로 자본주의체계의 세계 지배가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70년대 이래 세계체제론은 자본주의의 겉보기 승리가 사실은 그 말기적 현상임을 밝혀 왔고 21세기 들어와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세계체제론은 자본주의체계의 내적 논리에 따라 그 한계를 미시적으로 규명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외부로부터의 거시적 시각으로도 자본주의체계의 한계와 문제점을 살필 수 있다. 거시적 시각은 정밀성이 떨어지지만 다른 문제들과의 관련성을 떠올리기에 좋다. 미시적 시각과 거시적 시각의 결합을 시도할 때가 되었다.
거시적 시각의 한 갈래로 자본주의와 연결된 원자론적 특성을 생각해 본다. 물질계와 인간계는 원자론적 특성과 유기론적 특성을 아울러 갖고 있다. 모든 고등문명에서는 양쪽 특성을 두루 감안한 원리에 따라 체제를 운용했다. 이 관행을 벗어난 유럽 근대문명이 2백 년간 세계를 지배한 것은 산업혁명이라는 특수조건이 일시적으로 허용해 준 현상이다.
권력주의 국가와 권위주의 국가: 국가다운 국가의 모습을 새로 그린다.(5월 9일)
유럽 근대문명 속에서 태어난 근대국가에는 일체의 권위에 반발하는 계몽주의시대 분위기가 투영되었다. 그래서 국가 운영에 권력만을 사용하고 권위의 역할을 부정하는 기본 경향이 있다. 이성에만 의존하고 감성을 배척하는 근대정신의 한 측면이다.
권위는 도덕성 위에 서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도덕적 권위를 무시하는 권력주의 성격이 극심한 국가다. 고위공직자 청문회 때마다 기막힌 꼴을 보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상적 사회에서는 무력(武力)이든 재력(財力)이든 학력(學力)이든 힘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의 안보를 위해 노력한다. 자기네 우월한 위치를 보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형성되는 엘리트 계층은 지배력보다 지도력의 형태로 힘을 행사한다.
한국사회의 지도력 부재는 일본 식민통치에 의해 구조화된 것이다. 일본에 붙어 자기가 속한 사회를 등지는 친일파에게 재력과 학력이 집중되었다. 이 집단을 발판으로 해방 후에는 미국에 붙어 민족사회를 등지는 세력이 형성되었다.
1990년대에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와 싱가포르의 리콴유가 ‘아시아적 가치’를 말한 일이 있다. 1997년 경제위기로 쑥 들어가 버렸지만, 근년 중국의 부상 앞에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독재의 방편으로 없는 권위를 억지로 휘두르는 권위주의가 아니라 국가의 인민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연계된 권위를 국가 운영에 적극 활용한다는 점을 생각하는 것이다.
세계정부의 가능성 역시 권위주의의 도입과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세계화가 경제적 세계화로서 세계적 무정부상태를 지향했는데, 정치적 세계화의 필요성이 갈수록 절실하다. 그런데 국제조직에 권력만을 매개로 한다면 큰 권력을 가진 나라일수록 세계정부에 얽매이지 않으려 들기 때문에 모순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유엔의 역사에서 알아볼 수 있다. 국제관계에도 도덕적 권위가 작용해야 정치적 세계화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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