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대륙의 면적은 약 5천5백만 평방킬로미터, 지구 표면의 10퍼센트를 조금 넘고 육지 전체 면적의 3분의 1보다 조금 크다.
항해기술 수준이 낮을 때는 사람의 이동이 거의 육지를 통해서만 이뤄졌기 때문에 인류의 진화와 문명의 초기 발전은 대륙의 범위 안에서 이뤄졌다. 가장 큰 대륙인 유라시아에서는 다양한 요소들이 복잡한 관계를 펼칠 수 있었기 때문에 문명 발전의 주 무대가 되었다.
문명의 가장 강력한 기반은 농업이었다. 그래서 유라시아대륙의 중위도지대를 따라 중요한 문명들이 자라났다. 어느 문명에서나 ‘중세’라 할 수 있는 10세기경까지 기독교권, 이슬람권, 힌두권, 한자권 문명이 띠 모양으로 서쪽에서 동쪽까지 자리 잡는 상황에 이르렀다.
문명권이 통상 특정 종교로 대표되는 까닭은 문명의 발달에 따라 사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질서 유지의 보편적 원리가 필요하게 되고 종교가 그것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문명 초기의 종교는 작은 규모의 부족이나 종족에 귀속되는 것이었는데, 금속기가 보급되어 농업생산력이 크게 발전하는 단계에 이르자 문명권의 대형화에 부응하여 보편종교로 형태를 바꾸게 된다. 기원전 1천년기에 여러 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유독 한자문명권만이 종교를 간판으로 내걸지 않았다. 그것은 문명권 형성기에 이뤄진 제국 체제가 안정성을 지켰기 때문이다. 제국 체제의 중심 이념인 ‘천명’ 사상도 애초에는 종교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중화제국 중심의 ‘천하’ 체제가 오랫동안 유지되면서 그 종교성이 퇴화하고, 보편종교 아닌 보편제국이 이 문명권을 대표하게 되었다.
한자문명권은 종교의 울타리에 묶인 다른 문명권보다 큰 포용력을 보이면서 특이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지금의 중국이 하나의 다민족국가로 파악되고 인구의 80여 퍼센트를 점하는 주류 민족을 ‘한족(漢族)’이라 칭하는데, 이것은 일반적 ‘민족’과 다른 성격의 인구집단이다. 중국은 진 시황의 통일 때부터 다민족국가의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래의 이민족들이 ‘한인(漢人)’ 집단으로 통합되는 일이 반복되어 왔다. 그래서 중국을 민족국가 아닌 ‘문명국가’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포용력은 문명 발전에 유리한 조건이다. 그래서 한자문명권은 일찍부터 높은 정신적-물질적 문명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고, 다른 문명권과의 교섭에 있어서도 안정된 자세를 오랫동안 지킬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 이후의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 앞에서 이 자세가 크게 무너졌으나 21세기 들어 원래의 자세를 회복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중서(中西) 교섭사에 나타난 중국의 특이한 자세를 살펴보는 것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세계정세의 변화를 가늠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다.
동서교역에서 중국문명권의 능동적 역할
장건의 서역 탐험은 제국 체제를 갓 이룩한 한자문명권이 서방의 다른 문명권과 교섭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며, 또한 중국의 이후 서방정책의 틀이 만들어진 계기였다. 장건의 여행 이전에도 중국과 서역 사이에 교역활동은 진행되고 있었으나 중화제국을 공식적으로 대표한 장건의 활동으로 인해 국가가 교역활동에 나서면서 큰 변화를 일으켰다.
장건(?~전114)의 활동은 무제(재위 전141~전87)의 뜻을 받든 것이었다. 16세에 즉위한 무제가 즉위 3년차에 장건을 파견한 데서 그 사업을 매우 중시한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진시황이 전221년 천하를 통일했다고 하지만 중화제국이 그때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백여 년 지난 한 무제 때에야 안정된 중화제국이 자리 잡은 것으로 나는 본다. 밖으로는 흉노의 위협을 없애고 안으로는 황제의 전제권력이 확립된 것이다.
무제 즉위 십여 년 전인 전154년 오초칠국의 난으로 한 제국의 내부 질서가 안정되고 재정이 확충되기 시작했다. 젊은 무제는 이 재력을 발판으로 흉노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북방정책’을 큰 과제로 삼았다. 전198년 고조가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참패를 겪은 ‘평성의 치욕(平城之困)’ 이래 한나라는 흉노에 대해 돈으로 평화를 사는 정책을 취해오고 있었다.
무제가 흉노 공격을 쓰기 시작한 것은 전134년의 일이었는데, 그 5년 전에 장건을 내보낸 것을 보면 즉위 초부터 방침이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장건에게 주어진 사명은 월지(月氏)국을 찾아가 흉노에 대한 동맹을 맺으라는 것이었다.
한나라 조정이 서방 정보에 어두웠다는 사실을 여기서 알아볼 수 있다. 월지국은 지금의 깐수성 지역에서 흉노에 대항하던 큰 세력이었으나 장건이 떠나기 30년 전에 흉노에게 격파당해 서쪽으로 이동,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 당시의 헬레니즘 지역 변방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장건은 흉노에 잡혀 10년간 포로생활을 한 끝에 탈출해서 옮겨간 월지국을 찾아갔다가 전126년, 출발한 지 13년 만에야 장안으로 돌아왔다. 흉노와의 본격적 전쟁은 그 3년 전인 전129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흉노 역시 중국문명권의 일부였다.
한나라 초기 흉노 세력의 성격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것보다 중서 교섭사의 관점에서 더 생각할 점이 있다고 나는 본다.
전국시대에도 ‘흉노’란 이름은 있었다. 그러나 후에 한나라 제국과 정면대결을 벌이는 흉노와는 다른 존재였다. 전국7웅 중 최북방에 있던 조(趙)나라와 티격태격하는 수준의 조그만 세력이었다. 그런데 진나라 통일 후에는 제국 전체에 대한 거대한 위협으로 떠오른다.
전국 말기에서 한나라 초에 이르는 전쟁의 시대에 흉노의 세력이 급속히 팽창한 것이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 패퇴한 세력이 주변부로 많이 망명했다. 고조선을 탈취했다는 위만도 그런 세력의 하나였다. 흉노로 망명한 세력 중에는 한왕 신과 연왕 노관 등 제후 급까지 있었다. 제철 기술, 전쟁 기술, 통치 기술 등 많은 기술이 이 세력들을 통해 흉노에 전해졌고, 흉노는 이를 활용해 북방 여러 세력을 통합할 수 있었다. 한 문제 때 흉노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투항한 환관 중항열에 관한 <사기> “흉노열전”의 기록을 본다.
처음 흉노는 한나라의 비단, 무명, 음식 등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중항열(中行說)은 그 점을 들어 선우에게 진언하였다.
“흉노의 인구는 한나라의 한 군(郡)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흉노가 강한 것은 입고 먹는 것이 한나라와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한나라에 의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우(單于)께서 풍습을 바꾸어 한나라 물자를 좋아하시게 되면 한나라에서 소비하는 물자의 10분의 2를 흉노에서 채 소비시키기도 전에 흉노는 모두 한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한나라의 비단과 무명을 손에 넣으시게 되거든 그것을 입으시고 풀과 가시밭 사이를 헤치고 돌아다니십시오. 옷과 바지가 모두 찢어져 못 쓰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단과 무명이 털로 짠 옷이나 가죽옷만큼 튼튼하고 좋은 점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또 한나라의 음식을 얻게 되시거든 이를 모두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이 젖과 유제품의 편리하고 맛있는 것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또 그는 선우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록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인구와 가축의 통계를 조사하여 기록하도록 시켰다.
흉노가 장악한 영역은 광대했지만 인구 희박 지역이기 때문에 인구는 작았다. 거의 모든 성인 남성이 전투에 참가했기 때문에 중화제국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다들 군인 노릇만 했다면 생산은 누가 했나? 전투원도 평시에는 생산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거대한 정치-군사 조직을 장기간 유지하는 비용을 충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군사력을 이용한 약탈이었다. 한나라에서 받는 세폐(歲幣)도 막대한 액수인 데다가, 중서 교역로를 흉노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한나라의 경제 발전에 따라 서역과의 교역량도 늘어나고 있었는데, 흉노는 약탈이나 통과세 징수를 통해 수입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흉노 세력의 발전은 중국문명권 발전의 한 고리였다. 한나라에서는 흉노를 외부의 오랑캐로 보았지만, 큰 시각에서 본다면 흉노도 같은 문명권의 한 부분이었다. 문명권 발전이 가져오는 이득의 일부를 외곽에 자리 잡고 빨아먹는, 한나라 입장에서 보면 기생충 같은 존재였다. 전120년경에 흉노를 퇴치함으로써 중화제국의 통일이 완성되었다고 내가 보는 것은 그 까닭이다.
사마천이 장건의 이름을 남긴 까닭
장건은 두 번째 사행에서 다녀온 이듬해인 기원전 114년에 죽었다. 사마천은 그의 행적을 <사기> “대원(大宛) 열전”에 적었다. 장건의 신분은 열후(列侯)로서 우리 사회로 보면 국회의원 정도? 신분만으로는 사마천이 열전을 세워 줄 위치가 아니었다.
그런데 사마천은 장건이 죽은 23년 후 완성된 <사기>의 “대원(大宛) 열전”을 실질적인 “장건 열전”으로 꾸몄다. 그 20여 년 동안 장건의 유업이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대원 열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장건이 죽은 후) 1년 남짓 지나자 장건이 대하(大夏) 등지에 보냈던 사신들이 모두 파견된 곳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에 서북의 나라들이 비로소 한나라와 교통하게 되었다. 그런데 장건이 이 길을 연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이 모두 박망후(博望侯, 장건의 열후 호칭)의 이름을 들어 바깥나라의 믿음을 얻으려 했고, 바깥나라 사람들은 그 이름을 통해 믿음을 주었다.
외국을 대상으로 한 6편의 <사기> 열전 중 서역 방면은 “대원 열전” 하나뿐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실질적인 “장건 열전”이었으니, <사기>를 극도로 존숭한 후세 사람들에게 장건의 이름은 곧 ‘서역 개척’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진 시황이 중국을 처음 통일했다고 하지만 진정한 ‘천하제국’은 한 무제의 흉노 격퇴로 완성되었다. 중국문명이 정치적 통일체와 경제적 통합체를 이룩한 것이다. 한 무제와 장건 이후 천여 년간 중화제국이 중서교역의 주도권을 지킨 것은 이 통일성과 통합성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후한 때의 중국 역사지도를 보면 서쪽으로 커다란 혹이 하나 붙어 있는 모양이다. 지금의 칭하이성과 타림분지에 해당되는 이 혹 모양의 지역은 한나라의 정상적 지방행정이 펼쳐진 곳이 아니라 교역로 운영을 위해 주둔군이 배치된 지역이었다. 인구가 희박한 이 지역에는 안정된 조공관계를 맺을 만한 큰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주둔군을 통해 한나라 조정이 직접 관할한 것이었다.
흉노 제국이 무너진 뒤에도 북방 초원지대에는 유목민이 계속 살고 있었다. 천산산맥 북쪽의 ‘초원의 길’은 이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흉노의 통제력이 사라진 후 한나라 입장에서 이 교역로를 이용하려면 분산되어 있는 유목민 세력들을 하나하나 상대해야 했다. ‘사막의 길’은 1-2만의 주둔군만 배치해 놓아도 현지 세력의 도발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편리한 길이었다.
중화제국이 운영한 사막의 길과 유목민이 장악한 초원의 길은 교역로로서 경쟁관계에 있었다. 중화제국의 힘이 강할 때는 사막의 길이 활발하게 이용되어 교역량이 커지고, 약할 때는 동서간 교역량이 줄어들었다. 예외적인 상황은 몽골제국 시절이었다. 유목민이 주도권을 쥔 이 시절에는 초원의 길이 거침없이 활용되어 동서간 교역이 다른 시기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활성화되었다.
중국은 비단을 위시한 가공제품을 실크로드를 통해 수출했다. 수입품은 무엇이었는가? 장건과 무제 당시에는 막대한 수량의 전마가 도입되었다. 그 수요가 줄어든 뒤에는 옥과 귀금속 등 사치품이 수입품의 주종이었다. 실크로드 교역은 중국의 산업 발전에 작용하기보다는 중국 기술의 전파로 서방의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
‘사막의 길’이 ‘실크로드’가 된 까닭
동서교섭사 연구자들 중에는 실크로드 외에도 두 개의 중요한 교통로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위에서 얘기한 ‘초원의 길’이고 또 하나는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잇는 ‘바다의 길’이다. 나는 이 주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 역사 속에서 실크로드가 맡은 역할에 비해 다른 두 길의 역할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중국문명은 지중해, 홍해, 인도양 등 바다 가까이에서 발달한 다른 주요 문명들과 달리 해양활동에 많이 의존하지 않았다. 남중국해 연안(지금의 광둥성과 푸젠성)이 제국의 중심부에 통합된 것은 장건의 시대보다 몇 세기 뒤의 일이었다. 해로보다 대운하 중심의 내륙수로를 활용한 데서 그 철저한 ‘대륙문명’의 성격을 알아볼 수 있다.
연안항해를 벗어난 대양항해가 발전한 것은 어느 문명권에서나 14-15세기의 일이었다. 그 전의 해상교통은 낮 동안 항해하다가 밤이면 육지에 기항해야 했다. 중국에서 서아시아 교역권에 해로로 다니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정치세력들이 관할하는 수십 개 항구를 통과해야 했다. 험준한 산맥과 광대한 사막보다 더 큰 장애였다. 바닷길을 손쉬운 교통로로 보는 것은 당시 상황을 고려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착각이다.
초원의 길 역시 지형과 자연조건은 교통로로 적합해 보인다. 실제로 스키타이인의 청동기 기술 전파는 초원의 길을 통해 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업적 교역활동을 위한 조건에는 맞지 않았다. 융가르 초원의 저쪽, 지금의 카자크스탄 방면은 상인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좋은 시장이 없었다. 그리고 초원지대는 농경지대보다는 인구가 적어도 사막지대보다는 많아서 크고 작은 유목민 세력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상인들에게 위협과 부담을 주었다.
사막의 길은 험한 자연조건 때문에 인구가 희박했고, 중국의 중세제국이 경영하기에 큰 부담이 없었다. 전60년에 안서도호부가 설치되어 감숙회랑(甘肅回廊)과 타림분지를 포괄하는 중국 쪽 절반이 한나라의 일원적 통제 아래 놓이게 되자 상인들의 위험과 부담이 크게 줄어들어 교역이 이 통로로 집중되었다. 이 길은 장건 이전에도 사용되고 있던 길이었다. 장건의 탐사를 계기로 한나라가 교역로로서 제도화했기 때문에 교통량이 크게 늘고 역사상 큰 역할을 맡게 된 것이었다.
2세기에 한나라가 쇠퇴하면서부터 7세기에 당나라가 서쪽으로 다시 손을 뻗칠 때까지 이 지역은 중화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교역로를 따라 발생한 도시 등 기반시설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지역을 장악하는 지방 정치세력도 교역로의 가치를 인식했기 때문에 교역로의 역할이 유지되었다. 13세기 말 마르코 폴로의 여행 때까지도 실크로드의 이용이 활발했던 사실을 그의 기록으로 알아볼 수 있다.
1557년 명나라가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기지 사용을 허가하면서 중서교역의 주축이 바닷길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막의 길이 계속 이용된 사실은 1605년 가톨릭 수사 핀토 데 고에스의 여행으로 확인된다. 고에스가 인도의 고아에서 출발하며 생각한 목적지는 중국이 아니라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 나오는 카타이(Cathay)였다. 긴 여행 끝에 쇠약한 몸으로 돈황에 도착한 고에스를 베이징에 있던 선교사들이 영접하러 가면서 폴로가 여행한 나라가 중국이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분명해졌다.
19세기 들어 산업혁명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한 유럽인이 동서교역을 장악하기 전까지 실크로드는 근 2천 년에 걸쳐 중국이 대외교역에 임하는 능동적 자세를 체현한 제도였다. 서양 중심의 근대 세계체제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속출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은 중화제국이 대외관계의 능동적 자세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강연 계획' 카테고리의 다른 글
5월 14일 대구 국채보상사업 기념관 (4) | 2015.05.10 |
---|---|
문명사의 흐름과 시대의 과제(국회 간담회) (1) | 2015.04.01 |
망국을 앞둔 조선사회, 지도력은 누구에게? (3.25 한은 인재개발원) (7) | 2015.03.19 |
"과거와 현재, 대화가 이뤄지려면" (5월 6일 수원시 미술전시관) (4) | 2015.03.03 |
"名詞의 서재" (교하도서관) (2) | 2014.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