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체제의 탄생
에릭 밀란츠의 <자본주의의 기원과 서양의 발흥>(김병순 옮김, 글항아리 펴냄)은 2007년에 나온 책이다.(한국판은 2012년) 21세기 들어 자본주의의 쇠퇴를 전망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자본주의의 기원을 다시 살펴본 이 책은 ‘자본주의’가 과연 무엇인지 더 정밀하게 따져보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1973년생인 밀란츠는 이 책을 낼 때 34세의 나이였다. 페르낭 브로델 센터(이매뉴얼 월러스틴이 1976년부터 1999년까지 일하고 퇴직 후에도 명예소장으로 있음)가 있는 뉴욕 주립대 빙엄튼 캠퍼스에서 학위를 받았다니 세계체제론에 대한 이해가 깊을 텐데, 세계체제론에 부분적으로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그는 세계체제론이 공간과 시간, 두 측면에서 지나치게 좁은 관점을 취한다고 비판한다.
토머스 홀이 말한 것처럼 “세계-체제론은 1500년 이전의 자본주의 이전 단계들에는 전면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학자가 많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런 의문이 생긴다. 16세기 이전에는 자본주의체제가 없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공간적 전제조건, 즉 세계의 어느 한 부분에서 봉건제로부터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기간이 있었고 그 안에서 다양한 체제가 하나의 단일한 세계-체제로 수렴했다는 사실에 동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또는 시간적 전제조건, 즉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1450년과 1650년 사이에 일어났다는 사실에 동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달라진다. (22-23쪽)
이 책의 주제는 제목대로 ‘자본주의의 기원’이다. 카를 마르크스 이래 수많은 연구자들이 탐구해 온 주제다. 종래 연구자들은 자본주의를 문명의 본질처럼 찬양하거나, 또는 비판하는 입장이라도 엄청난 위력을 가진 현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밀란츠의 시각은 훨씬 냉정한 것이다. 자본주의체제를 부정적, 또는 회의적으로 보는, 1970년대 이래 자라 온 학설을 섭렵한 결과일 것이다.
이 책은 결론까지 포함해 5개장으로 구성되었는데, 본론 3개장이 중국, 남아시아, 북아프리카, 3개 지역과 유럽의 상황을 비교하고 그 관계를 따져보는 것이다. 접근방법에서 세계체제론의 성과를 활용하는 것이며, 저자가 세계체제론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결론의 차이도 부분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제1장 “유럽 상업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서 기존 학설을 (1)정통 마르크스주의, (2) 브레너주의, (3) 근대화 이론, (4) 세계-체제론의 네 가지로 소개했는데, 세계체제론에 관한 설명이 다른 세 가지 관점의 설명을 다 합친 것보다 갑절이나 되는 분량이다. 세계체제론에 얽매이지 않은 독자적 관점을 내세우려 애쓰지만, 저자가 인정하는 논평의 가치가 세계체제론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세계체제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자본주의체제 성립의 공간적-시간적 배경을 너무 좁게 잡았다는 데 집중된다. ‘공간적 전제조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월러스틴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유럽 대륙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이행은 내부의 변화에 따른 것인가, 외부의 변화에 따른 것인가?” 월러스틴은 유럽 내부에서 이행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유럽이 다른 지역에 영향력을 끼치고 그에 따라 유럽 전반에 걸쳐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는 사실과 일치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등장을 유럽, 특히 북서유럽의 특정한 변화나 영국과 프랑스의 “내적 모순”에만 초점을 맞춰 설명할 수는 없다. 따라서 16세기 이전에 유럽에 영향을 끼친 외부 요소들을 분석함으로써 세계-체제를 이해하려는 다른 연구들도 나타났다. 예를 들어 아부-루고드는 13세기와 14세기에 존재했던 지역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체제를 구성했다고 주장한다. “이 모든 지역 단위는 서로 교역하고 다른 지역에 무역을 중개하는 일뿐 아니라 세계 시장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국내 경제를 재정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41-42쪽)
‘공간적 전제조건’보다 저자가 더 중시한 것은 ‘시간적 전제조건’이다. 16세기 유럽에서 봉건제가 위기에 빠지면서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새로운 단일 생산양식이 근대 세계체제의 등장과 함께 탄생했다고 하는 월러스틴의 관점을 반박하는 데 저자는 많은 공을 들였다. 세계체제의 복합적 구조(‘중심부’와 ‘주변부’)가 16세기에 빚어졌다고 하는 월러스틴의 주장에 대해 저자는 그런 구조가 그보다 수백 년 전부터 ‘중세 유럽’에서 도시국가를 둘러싸고 나타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도시국가와 식민지 사이의 국제 수지 관계는 도시국가들에 유리했다. (...) 유럽에서 상업자본주의적 주요 도시국가들이 자리를 잡고 “성장을 거듭”하게 된 것은 도시국가들의 산업을 위한 식량과 원재료의 공급처로서뿐 아니라 시장으로서 구실을 하는 식민지 주변부를 끊임없이 (재)생산한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당시 이러한 동지중해 지역의 식민지 형태와 나중에 건설된 대서양 지역의 식민지 형태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다.
이러한 유사점들이 존재한다고 할 때 근대가 1500년경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비판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뿐 아니라 (근대의 시작을 1400년경으로 보는) 아리기에게도 해당된다. 베네치아는 실제로 아리기가 지적한 것처럼, 아마도 최초의 “자본주의 국가의 초기 형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그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만을 보는가? 따라서 상업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서유럽 도시국가 간 체제 전반에 걸쳐서 중세 말에 적용될 수 있으며 그것의 역사적 연속성 또한 부인될 수 없다. (40-41쪽)
‘체계적-지속적 착취’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
세계체제론의 중요한 논점 하나가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밀란츠는 이 논점에 기꺼이 동의한다. 유럽 외부 세계의 침체를 내재적 보수성이나 전제주의로 설명하고 유럽의 발전을 호기심, 모험심, 합리성 등으로 설명하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엽까지 유행하던 관점들을 배격한다. 그런 “목적론적 경향”의 “독특한 예외주의”보다는 훨씬 객관적인 “획일적이지 않고 내적 분화를 허용하는” 분권화 경향의 주장에도 만족하지 않는다. 중국, 남아시아, 북아프리카 등 유럽 외부 지역의 중세 말 경제 발전 상황이 유럽보다 앞서거나 대등한 것이었다고 선선히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본주의체제가 유럽인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양보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럽식 자본주의가 산업혁명의 결과라는 일반적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제5장 “결론: 중세 서유럽 도시국가는 정말 유럽의 기적을 이뤘는가?”에서 그는 자본주의체제가 중세 유럽 도시국가의 특성에서 나온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유럽의 도시국가는 지속적인 교역과 상업 확대의 표현이자 그것을 보증하는 실체였다. 따라서 그것은 종속변수이면서 독립변수로 작용한다. 유목민의 침입이 없었다는 것과 그 지역의 농촌 귀족들이 예외적으로 약했다는 점이 유럽의 도시국가를 종속변수라고 설명할 수 있다면, 반면에 유럽 역사의 경로의존성이 왜 인도와 중국, 수단 지역 국가들과 다른지를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도시국가라는 점에서 독립변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와 시민권으로 상징되는 근대의 기원을 끊임없는 자본 축적의 역동성 속에서 제국주의와 전쟁을 통해 형성된 유럽의 도시국가와 그 뒤를 이은 국민국가 안에서 찾을 수 있다. (...) 18세기 말까지 서유럽의 생활수준, 상업화 정도, 농업생산성, 원시산업화가 세계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더 발전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고 따라서 어느 정도까지는 “다원적 근세”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서서히 유럽 (상인) 엘리트들의 손에 집중된 군사력은 유럽 내부와 궁극적으로 비유럽 세계에서까지 수익 증대와 시장 확장의 길을 열어줬고 나중에는 그것을 보증했다. 군사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자본 축적의 근대적 형태들, 즉 불법적-합법적 독점이나 신식민주의, 노동자 착취는 서유럽에서 최초로 발생한 자본주의적 착취의 장기적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 상인계급은 도시국가에서 권력을 축적하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법적 장치(시민권 개념)를 확립했다. 그리고 그것은 상인계급에게 이익을 주는 식민지화 및 주변부 구축과 병행해서 일어났다. (181-182쪽)
이 주장의 ‘정당성’을 이 책만 읽고는 확인할 수 없다. 번역본의 본문은 170여 쪽인데 각주는 작은 활자로 113쪽에 달하고 참고문헌목록이 74쪽이나 된다. 상당량의 참고문헌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책만 읽고도 ‘타당성’에 관한 생각은 할 수 있다. 저자는 월러스틴 세계체제론의 기본 명제 대부분에 동의하면서 월러스틴이 말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본질인 중심부-주변부 복합구조가 중세 유럽의 도시국가에서 나타난 것임을 밝히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상업 활동을 아리기도 중시한 바 있거니와, 밀란츠는 서유럽 도시국가의 산업 활동까지 고찰의 대상을 넓힌 것이다.
중세 도시국가에서 근대 도시국가까지 자본주의체제를 뒷받침한 중요한 특성으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상인계층의 정치권력이다. 국가정책의 결정이 상인계층의 이해관계에 적합한 쪽으로 이뤄지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세계의 자본주의국가에도 널리 적용될 수 있는 관점이며, 자본주의체제의 위기 국면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날 특징으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도비치에 따르면 “지중해 이슬람 세계의 상인들은 가톨릭 유럽 국가의 상인들과 비견될 수 있는 유기적으로 연결된 정치적 정체성을 지니거나 정치권력을 획득하지 못했다.” 이 주장은 앞서 설명하려 했던 것처럼 유럽의 정치 구조가 유럽 이외 지역의 정치 구조와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럽의 상인 공동체와 동업조합은 정치적으로 독립된 도시국가 안에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했다. 이러한 권력의 획득은 상인 엘리트들의 성공을 위한 필수요소였다. 그들은 국가의 하부구조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마침내(?) 장기적으로 자본 축적의 성공 비결은 가급적이면 과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고 자본을 쉽게 최대화할 수 있게 해서 상인들이 내는 세금을 억제할 뿐 아니라 국가의 자원을 이용해서 거래와 운송, 안전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
중세 말 서유럽의 상업자본주의 체제의 출현이라는 맥락에서 추려내야 할 또 다른 예외적인 변수는 공동체적 정체성의 결과로 나타난 ‘시민권’이라는 개념이다. (...) 도시국가의 시민으로서 부르주아의 정체성은 상징적 의미에서 수세기 뒤 국민국가의 정체성으로 고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당시 유럽 농촌에서 상업화의 증대로 부유해진 농민들은 이웃의 가난한 농민들의 토지를 사들일 수 있었고 “남는 돈으로 다른 사람의 토지의 소작권을 구입하는 데 투자했다. 따라서 그들의 화폐 수입은 더 늘어났다.” 가난한 농민들은 “농촌 노동자 계급”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국가나 때로는 왕에게서 직접 시민권을 살 수 있었던 부유한 농민들은 끊임없이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중세 유럽의 도시국가는 처음에는 귀족들을 견제하고 국가 재정 수입을 늘리고자 하는 군주의 보호를 받았지만 근본적으로는 혼인 관계로 맺어진 상인들과 부유한 직인, 소귀족들의 과두정치가 지배하는 사회경제적, 법적 실체였다. (174-176쪽)
저자는 제2장에서 중국, 제3장에서 남아시아, 제4장에서 북아프리카의 중세 상황을 유럽과 비교하면서 유럽 도시국가의 특성이 “예외적”인 것이었음을 확인한다.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고찰도 흥미로운 것이지만, 나로서는 제일 익숙한 영역인 중국의 경우를 더 세밀히 살펴보게 된다.
국가의 부재, 그것이 유럽의 “예외성”이었다.
제2장은 (1) 송나라 시대의 중국 사회경제 혁명, (2) 중국과 몽골, (3) 명나라 시대의 중국과 유럽: 갈림길, (4) 유럽 자본주의에 대한 결론, 4개 절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절에서 중국의 산업과 경제가 13세기까지 유럽보다 훨씬 더 발달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제3절과 제4절에서 유럽과의 차이를 밝힌 것이다. 여기서 밝혀진 차이가 제3장과 제4장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거듭 확인되는 것이다.
제2절에는 몽골제국의 흥망이 중국사회에 끼친 영향을 논했는데, 몽골제국의 정책과 제도가 기술적인 면에서 산업과 상업의 발달에 유리한 것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몽골이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한 결과는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결론의 근거와 방식은 불만스럽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메시지에만 집중하겠다. 몽골로 대표되는 유목민의 존재가 중국사회에 안보의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안정’ 중심의 통치방식이 중국에서는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황제들은 반복되는 유목민들의 중화 세계 침입을 막고 몽골의 지배에 대항해서 봉기를 일으키다 엄청난 시련을 겪은 수많은 농민을 안정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역점을 기울였다. 따라서 명나라는 다시 중요한 방위 요충지가 된 만리장성 주변 지역을 지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에 해군력 강화에는 그다지 힘을 쏟지 못했다. (70쪽)
따라서 명나라 초 정화(鄭和)의 해상활동은 유럽인의 대항해시대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졌던 것으로 저자는 본다.
15세기 말, 영국의 헨리7세는 존 캐벗에게 그가 바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땅을 “찾고 탐험하고 정복하고 점령해서 마침내는 소유”하라는 임무를 내렸다. 이것은 정화가 명나라의 영락제에게서 받은 임무와는 완전히 달랐다. (...)
놀라운 사실은 “명나라 원정대가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거나 해상교역로를 독점하려고 원정에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쉽게 이룰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정화 원정대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만천하에 중국의 외교와 문화적 위신을 세우는 것이었다. (70-71쪽)
중요한 사실을 정확하게 짚은 것이다. 그러나 정밀성에는 문제가 있다. 중국이 유럽국가들 같은 침략성을 보이지 않은 이유를 정리한 아래 대목을 보자.
또한 중국이 다른 나라들을 사회경제적으로 종속시켜 식민지로 만들고 수탈하는 전략을 치밀하게 전개하고 추구하며 실행할 수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국가 자원을 고갈시키고 중국을 지속적으로 거대한 파멸의 대상으로 만든 끊임없는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중국의 군사 활동은 “정복보다는 방어 중심”이어야 했다. 이렇듯 중국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은 것은 유럽에서는 작동하지 않은 두 가지 중요한 변수 때문이었다. 끊임없는 농민 반란과 변경 주변에 사는 유목민들이 일으킨 파괴와 전쟁이 바로 그것이었다. (84쪽)
“끊임없는 전쟁”이 중국에 있었고 유럽에는 없었다고 하는 이 주장은 옳고 그르고 이전에 적절치가 못한 것이다. 확연한 비교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밀란츠의 이 책은 고찰의 범위를 넓혀준다는 장점을 가진 것이지만, 구체적 명제들에 대한 저자의 판단은 별로 미덥지 못하다. 자기 결론에 끼어 맞추는 느낌이 드는 대목이 많다.
앞서 소개한 자오팅양의 <천하체계>를 본다면 비(非)침략성이 명나라 초기의 상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이래 중화제국의 본질적 속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화제국은 내부적 완결성을 추구하는 체제였다.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제국에 제국의 외부를 끌어들이려는 노력보다는 ‘중화(中華)’와 다른 속성의 ‘이적(夷狄)’으로 놓아두고 ‘천하체계’ 속에서 유기적 관계를 맺는 노력이 주종이었다.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서 활동한 마테오 리치의 기록 중에도 이런 대목이 있었다.
“거의 무한한 영토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구, 그리고 온갖 종류의 물자를 풍성하게 가진 이 나라, 주변의 어느 나라라도 쉽게 정복할 수 있는 육군과 해군을 갖추고 있는 나라임에도, 황제도 국민들도 침략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뿐, 정복의 야욕은 일으키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들은 유럽사람들과 아주 다르다.”
중국에서는 상인계층이 정치적 권력을 갖지 못했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문명사회의 초창기에는 경제활동 중 농업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이 단계의 지배계층, 즉 귀족은 농업생산력을 발판으로 형성된다. 그러나 문명의 발전에 따라 상공업의 비중이 자라나고, 이에 따라 상공업에 발판을 둔 세력이 귀족계급으로부터 지배력을 넘겨받게 된다. 그것이 유럽의 부르주아였다. 그런데 중세 말기의 중국에서는 상공업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것을 발판으로 한 세력이 지배력을 넘겨받지 못했다.
상공업이 유럽 못지않게 발전하는데도 상공업 세력이 유럽 도시국가처럼 권력화하지 못한 것은 중국만이 아니라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곳저곳에서 부르주아 권력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일일이 해명하기보다는 유럽 쪽 “예외적” 현상의 원인을 따지는 것이 더 타당한 질문 아닐까? 유럽에서 나타난 현상을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 유럽중심주의로부터 저자도 충분히 풀려나오지 못한 것은 아닐까?
다른 곳은 몰라도 중국에는 상공업 세력의 권력화를 억제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었다. 士-農-工-商의 서열을 통한 무본억말(務本抑末)은 일찍부터 중국사회의 중요한 원리였다. 자본의 권력화 현상은 중국에서 전국시대부터 나타났다.(초기의 두드러진 예 하나가 진 시황 때의 여불위였다.) 그러나 이 현상의 제도화가 극력 억제되었기 때문에 개별적 사례에 그치고 자본 중심의 체제가 이뤄지지 못한 것이다.
중국에서 자본의 권력화를 억제한 것은 민간의 무력(武力)을 억압한 것과 마찬가지 원리였다. 상공업이 발달했는데도 그것을 발판으로 한 세력이 정치권력을 쥐지 못한 것은 강한 군대가 있는데도 군벌이 정권을 휘두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중앙집권체제였다. 마테오 리치의 기록 중에 이런 대목들도 있다.
“그들은 워낙 무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아무도 집에 무기를 두지 못한다. 여행시 강도에 대항하기 위한 칼 정도 밖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나 폭력이라면 고작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손톱으로 할퀴는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는 일을 들어볼 수 없다. 오히려 싸움을 피하고 물러서는 사람이 점잖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칭송을 받는다.”
“모든 영역을 질서 있게 관리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학인들에게 맡겨져 있다. 병사든 군관이든 군인들은 학인들을 높이 존경하고 아무 여지없이 그들에게 복종하고 따른다. (...) 이러한 정서의 근원은 아마 사람의 마음이 학문의 연마를 통해 고상하게 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제국의 확장에 거의 아무런 야욕도 보이지 않는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먼 옛날부터 군사기술보다 학문연구를 선호하는 경향이 늘 있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리치와 같은 시대의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유럽 상황과 비교하면 얼마나 평화로운가. 리치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힘없는 인민이 국가에 복종하기만 하면 다른 중간세력의 폭력(주먹의 힘이든 돈의 힘이든)에 시달리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체제가 2천년 동안 구축되어 왔던 것이다. 17세기에 유럽에 가서 살았던 한 중국인이 폭력이 난무하는 유럽 상황에 경악하는 모습을 조너선 스펜스가 <The Question of Hu>에 그린 바 있다. 리치가 중국에 와서 놀라는 모습을 뒤집어 그린 것 같다.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날 길은 아직도 멀다.
정치조직의 규모가 점점 커져서 국가의 형태에 이른 것은 문명의 발달에 따른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로마제국 멸망 후 중세 유럽에서 도시국가가 많이 존재한 것은 다른 문명권보다 정치조직의 발전이 뒤진 것이었다. 상공업이 발달하지 않은 농업지역에서는 도시국가조차 나타나지 못하고 수백 명 인구의 장원들이 정치조직의 단위로 존재한 곳이 많았다. 16세기까지도 수백 명 정도의 병력을 거느린 영주들이 독립적 영지를 지키거나 용병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영국에 상비군 제도가 처음 시행된 것이 1685년의 일이었다. (그래서 1689년 ‘권리의 장전’에 군대가 국왕 아닌 의회에 속하는 것이라는 조항이 들어갔던 것이다.)
밀란츠는 중세 후기 여러 지역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유럽 도시국가의 특성이 “예외적”인 것이었음을 확인한다. 다른 지역의 ‘일반적’ 상황은 훨씬 규모가 크고 중앙집권성이 강한 국가들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유럽처럼 소규모 정치조직이 성행한 곳은 고찰한 지역 중 북아프리카뿐인데, 그 지역은 이슬람문명권의 외곽으로서 문명수준이 낮은 곳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고찰은 유럽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아시아 여러 지역에 비해 국가의 발전이 늦었던 것이 낮은 문명수준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중세 후기 유럽의 도시국가들이 “저개발의 과정을 추진하는 권력 용기”의 역할을 맡아 주변부의 식민화로 지속적 착취-지배를 통한 자본 축적의 메커니즘을 만든 과정을 밝히는 데 저자는 노력을 기울였다. 결론을 정리하는 자리에서 그는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날 필요를 역설하는데, 그 자신이 유럽의 ‘예외성’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겪는 혼선을 볼 때, 유럽중심주의 탈피의 필요를 그가 얼마나 절실히 느끼는지 짐작할 수 있다.
유럽 중심주의자들은 여러 세기 동안 지속된 서양의 식민주의가 끼친 영향과 유산을 인정하지 않는다. 근대화 이론에서 경제학과 사회학을 분문하고 자유방임, 경쟁과 기능주의에 집착하면서 역사적 특수성을 부인하는 주장이 학계의 주류를 이루는 거시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서양의 학문적 논의 자체는 본질적으로 “서양의 발흥, 자본주의의 역사, 근대성, 그리고 서양의 국가 제도와 학문 분야, 문화, 착취 기제의 세계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도 학문 연구의 주도권을 잡고 있으며 “식민지 시대 이후의” 대학과 정치계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 따라서 특정한 국민국가들을 책임지고 있는 일부 엘리트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가 오늘날 보호주의 정책의 폐기와 자유방임 정책의 채택이라는 현실과 맞아떨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학계에서 발표하는 대다수 경제학 연구는 이것은 좋은 예다. 그것은 과거 구소련에서 발표한 정통 마르크스주의 연구가 시대와 장소의 구분 없이 과거, 현재, 미래의 조건을 특정한 유럽 중심주의 패러다임에 맞게 주조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182-183쪽)
저자는 월러스틴 세계체제론의 담론 틀을 받아들이면서 자본주의체제의 형성 과정에 관한 독자적 관점을 제시했다. 나는 12~15세기 유럽 상황에 직접 관심이 없기 때문에 “중국보다 유럽의 국가권력 형성이 매우 뒤쳐져 있었다”고 보는 종래의 관점을 확인하는 정도밖에는 이 책의 결론에서 얻은 바가 없다.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노력은 ‘유럽예외주의’에 그친 것 같다. 그러나 남아시아, 북아프리카 등 여러 지역의 중세 후기 상황을 시야에 담게 해준 것은 자본주의체제의 속성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데 큰 도움이었다.
끝으로 번역에 대해 한 마디. “옮긴이의 글”에서 “세계-체제론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도 아니고 세계-체제론에 대한 지식도 미천한 주제”라는 겸손의 말을 했는데, 비전문가의 작업이란 사실을 이 대목에 와서야 확인할 만큼 잘 소화했다. 세계체제론처럼 새로운 담론을 소개하는 데는 다른 관점에 따른 훈련과정을 거친 사회과학자보다 오히려 비전문가에게 기대를 걸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물론 비전문가로서 이 수준 소화를 위해서는 노고가 적지 않았겠지만, 그 성과를 치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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