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의 선거결과는 14일까지 제주도 외에는 모두 개표가 끝났다. 개표결과를 보도한 5월 15일자 <경향신문>에는 “제주도의 3구역은 아직도 보고가 없다.”며 더 이상의 자세한 사정을 알리지 못했다. 2개 선거구의 선거가 무효가 될 것 같다는 보도는 19일에야 나왔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19일, “북제주 2구는 제외되나? 남제주군엔 오용국 씨 당선”)

 

선거가 무효가 될 정도라면 사태가 심상치 않은 모양인데, 제주 상황에 대한 보도는 원활치 못했다. 이 무렵까지 제주 상황의 기사를 가장 많이 싣고 있던 것은 <동아일보>였다. 5월 7일, 8일, 9일, 18일, 20일 5회에 걸쳐 정선수 특파원의 “제주도폭동 현지답사”가 큼직하게 게재되었다.

 

그런데 이 연재는 경찰 대변지로서 <동아일보>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어서 독자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 같다. 특히 5월 8일자의 제2회 게재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5월 1일자 일기에 설명한 오라리사건 얘기인데, 예상했던 대로 경찰 입장을 잘 대변해주다가 이런 대목까지 나오지 않는가!

 

때마침 이들(경찰토벌대)의 장도를 전송해주려고 나왔던 백전노장 백만원의 현상금이 걸린 문용채 제1구 서장은 트럭 가까이 달려와서 자신의 권총을 기자에게 내주며 “만일을 위하여...”라고 친절을 보여준다. (...) 기자도 “하마터면” 하는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팽!” 기분 나쁜 울림을 내며 총알은 기자의 모자를 스치고 또 양 귀를 깎을 듯 지나가는 총탄 아래서 기자는 들었던 붓대를 동댕이치고 허리에 찼던 권총을 내뽑아 안전장치를 풀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그 날 오라리에서 취재기자가 붓대를 동댕이쳐야 할 만한 상황이 없었다. 정선수 기자는 경찰서장에게 받은 권총 휘두르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고 취재는 현장에서 할 필요 없이 돌아와서 경찰 쪽 얘기를 받아쓰는 역할이었나보다. (4-3취재반은 이 기사의 허구성을 <4-3은 말한다 2> 168-172쪽에 지적해 놓았다.) 5월 20일의 마지막 회는 이렇게 끝난다.

 

그들이 사용하는 민주라는 말은 소련 휘하 공산당독재라는 뜻이다. 이번 평양연석회의는 솔개미의 풀 뜯어먹는 회의요, 거기 몰려갔던 동무들도 좌중에 몇 마리 꿩들이 되었으니 그는 솔개미는 육식하는 새가 아니더라는 결론을 얻어가지고 와서 다른 꿩들에게 솔개미와 같이 놀기를 권하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솔개미는 결코 마른 풀을 뜯어먹는 새가 아니다. 공산주의 정체를 보려거든 평양 모란봉극장에 가지 않아도 제주도의 형편을 보면 알 것이다. 수족 잘린 노인들과 배 갈린 태모(胎母)를 보면 알 것이다. 그들은 ‘인민’ 이외에는 모두 원수로 본다. 원수인지라 윤리가 없고 자비가 없고 오직 전술 전략이 있을 뿐이다. (...)

 

제주의 비극이 남조선 각지에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민족진영의 결속 강화가 필요하거니와 특히 대중에 대한 선전력의 증대가 긴급하다. 신문 기타 민족진영의 무기력이 지금과 같고는 이 소련 계열의 모략을 파쇄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비극을 방지하는 둘째 요건은 국립경찰력의 강화와 국민과 경찰의 협력 증진이다. 이번 제주사건에 경찰관은 은인과 용기를 둘 다 보여준 것은 감격할 일이다. 복부관통 총상을 받고도 무기를 빼앗으려 덤비는 폭도와 응전하여 이를 격퇴한 것이나 참살 당한 가족의 시체를 매장할 틈도 없이 눈물을 뿌리고 다시 출동하는 광경을 목격한 필자는 우리 경찰관에 대하여 눈물겨운 감사와 마음 든든한 신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선수 기자의 취재가 이뤄진 경위는 밝혀져 있지 않은데, 다른 신문에는 주어지지 않은 편의와 허락을 <동아일보>만 얻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현지답사”는 경찰(내지 미군정)의 홍보작전의 일환으로 보인다. 경찰은 자기네가 원하는 고압적 진압작전에 유리한 쪽으로만 제주 사정이 알려지기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과 미군정의 견해와 다른 관점을 가로막는 것 또한 이 홍보작전의 범주에 들어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독자적 시각을 들이대려는 신문의 접근을 막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고, 관리들의 의견 발표에도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김희주 검찰관의 아래 발언은 이 압력에서 벗어난 예외적 사례로 생각된다.

 

“제주도 소요 종식은 아득 - 김 검찰관의 실정조사 담”

 

검찰청장의 명령으로 지난 6일부터 17일까지 제주도소요 실정 조사차 현지에 출장 중이던 광주지검 김희주 검찰관은 귀청 후 현지 실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요사태는 점차 규모가 확대되어 쌍방에 매일같이 희생자를 내고 있다. 발단 원인으로는 5·10선거 반대가 직접 원인이 되고 있으나 간접적으로 관민을 막론하고 도내인 특유의 배척심리가 각 방면에서 발발된 점도 있다고 본다. 즉 일례를 들면 서북 출신 경관들의 과도한 태도에 분개한 인민의 반항도 관계되고 있는 듯하다.

 

한라산에 본거를 두고 주야로 각 부락에 출몰하는 그들은 기관총과 사제 수류탄 죽창 등으로 경관과 우익요인을 살해하려 하고 있는데 본도에서는 상상 못 할 만한 산림이 방해가 되어 그의 토벌은 실로 어려운 상태에 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 쌓여 있는 양민들의 희생은 날로 심각하여 가고 있으며 시장에는 겨우 보리·조 등이 간혹 한 말 정도씩 매매되고 있는 형편으로 도민생활은 극도로 피폐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급속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23일)

 

얼마 후 검찰총수 이인이 경찰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보는 논평을 낸 것도 이런 식의 독자적 정보 수집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을 것이다.

 

“경관보다 유능한 사람을 - 제주사건에 이 검사총장 견해”

 

제주도 폭동사건에 대하여 이인 대검찰총장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다.

 

“1년 전에 제주도 시찰을 할 때 이미 관공리가 부패한 것이 눈에 띄었다. 고름이 곪아서 터지려 할 때 공산당이 찔러 파종된 것이다. 산중에 있는 폭도들은 생명보호만 하여 준다면 하산할 기세가 보이니 백 사람의 경관을 보내기보다 유능한 한 사람을 보낼 것이며 각 부문의 최고책임자에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고 본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16일)

 

일반 언론에 대한 경찰의 발표는 늦고 제한적이며 부정확했다. 이 무렵의 일로 보도된 사건 하나를 검토해 본다.

 

경찰당국 언명에 의하면 지난 20일 북제주군 한림면 저지리에서는 부락민이 일하러 나간 사이에 부락 전체에 방화한 사건이 있어 가옥 식량 및 의류까지 소실당하고 150여 호의 부락은 단지 4호밖에 남지 않았다는바 약 700여 명의 남녀노소 부락민들은 뒷산에서 공포와 굶주림에 떨며 노숙하고 있는 것이 27일에야 경찰에 발견되었다 하는데 그 중 4명의 여자는 한림원에 입원 가료중이라고 한다. (<조선일보> 1948년 6월 3일)

 

5월 20일에 벌어진 사건을 5월 27일에야 경찰이 파악하였고 그 사실을 6월 들어선 뒤에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5월 13일 새벽에 발생했고 경찰이 즉시 파악한 것이다. 사건 이틀 후 40여 명의 경찰 대부대가 응원차 파견되어 주둔하기까지 했다.

 

이 사건은 산사람들이 저지른 것 맞다. 수많은 중산간마을이 4-3사건 때 불타버렸는데, 거의 모두 군-경의 소행이고 산 쪽에서 저지른 큰 사건은 이것 하나였다. 저항세력은 주민과 유대관계가 깊었기 때문에 마을을 파괴하는 일이 없었는데 왜 이곳은 예외였을까?

 

경찰지서가 있었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일제시대에 일본인은 제주도에 일주도로를 뚫고 도로변의 해안마을을 행정 거점으로 삼았다. 모든 관공서와 근대적 시설이 해안마을에 설치되었다. 4-3 당시 제주도의 십여 개 경찰지서 중 중산간마을에 설치되어 있던 것은 성읍리(표선면)와 저지리뿐이었다.

 

제주도의 촌락은 전통적으로 해촌, 양촌, 산촌의 세 가지로 분류되었다. 개항 전에는 해발 50~100미터 위치의 양촌이 지역 질서의 중심 역할을 맡았다. 농업을 기본산업으로 하는 양촌 사람들은 해촌을 깔보는 경향이 있었는데, 일본세력 진출 이후 해촌의 역할이 커지면서 양촌은 더 높은 지대의 산촌과 함께 ‘중산간마을’로 분류되면서 위상이 떨어졌다.

 

일제시대를 지나는 동안 보수적 분위기를 지키는 중산간 사람들과 외부세력과 접촉과 결탁이 많은 해안 사람들 사이에 얼마간의 이질감이 자라났는데, 해방 후 경찰 등 외지인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이 이질감이 더 깊어졌다. 외지인에 대한 대립의식이 제주인 사이에도 점점 더 짙은 그림자를 던지게 된 것이다.

 

이 간극이 경찰지서의 존재로 인해 저지리 큰 마을과 자연부락 사이에서 예리하게 나타났다. 경찰의 확고한 관할을 받는 큰 마을에서는 우익청년단 조직이 진행되고 많은 주민이 경찰보조원 노릇을 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리고 1948년 들어 긴장이 늘어나는 과정에서 2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명이동이란 자연부락에 저항적인 분위기가 강한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저지리 큰 마을과 명이동 주민들 사이의 적대관계의 에스컬레이션 과정이 <4-3은 말한다 3> 28-36쪽에 그려져 있다. 이것은 저지리만이 아니라 제주도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던 상황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찰 및 관리들의 활동공간 안에 들어 있던 사람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조건 때문에 이웃마을 사람들과의 사이에 입장에 갈라지는 일이 수없이 많았다.

 

갈등 초기에는 경찰이라도 그 행실에 따라 선별적으로 응징의 표적이 되었지만, 참혹한 일이 쌓이다 보니 경찰관의 가족이라는 것만으로도 죽일 놈이 되었고, 심지어 경찰에게 방을 빌려주거나 밥을 해준 사실만으로 ‘인민의 적’이 되는 분위기가 자라났다. 폭력의 증폭에 이용되는 폭력의 ‘내면화’는 폭력의 피해 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것이다.

 

연전에 나온 박찬승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돌베개 펴냄)을 보며 참 중요한 영역으로 이제 손이 뻗치기 시작하는구나, 반갑게 생각했다. 한국전쟁의 피해 중에도 숫자로 나타나는 피해보다 사회와 인간관계의 파괴에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 제주도에서는 다른 곳에 앞서서 이 문제가 터져 나온 것이었다.

 

박찬승이 진도의 한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을 살펴본 뒤에 붙인 글 한 대목을 옮겨놓는다.

 

X리 비극의 원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동족마을 내부에서의 각 지파 간의 경쟁의식과 사소한 갈등은 오래된 것이었고, 그것은 어느 동족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방 공간의 정치적 변화는 그러한 경쟁의식과 갈등에 불을 질렀다. 그동안 마을에서 우세한 입장에 서 있었던 중파가 해방 이후 좌익에 참여했다가 몰락하는 가운데, 열세에 놓여 있던 계파는 우익에 적극 참여하여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경찰로 표현되는 국가권력은 계파의 우익 청년들을 이용하여 중파의 좌익 청년들을 억압했다. 이 과정에서 양쪽 청년들 간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즉 사소한 갈등을 증폭시키는 계기를 만든 것은 한반도의 분단, 미군정에 의한 의도적인 좌우 분화, 그리고 경찰로 표현되는 국가권력이었다. 이후 양자 간의 갈등은 내연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그러한 갈등을 엄청난 규모로 증폭시키면서 친족 내부의 학살극으로 이끌었다. (127-128쪽)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