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의 오라리 방화사건이 경찰의 소행이라는 김익렬 9연대장의 증언을 넘어 4-3취재반이 큰 의혹을 느낀 사실은 이 사건 현장을 미군이 촬영한 ‘작품’이 있다는 것이다.
기이한 일은 이 예민한 오라리 방화사건 현장이 미군 촬영반에 의해 입체적으로 촬영됐다는 점이다. 그것도 미군 헬기에 의해 불타는 오라리가 공중에서 찍혔는가 하면 지상에서는 오라리 마을로 진입하는 경찰기동대의 출동 모습이 동시에 촬영되었다. 이 무성기록영화 필름은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데 4-3의 초기 상황을 촬영한 유일한 영화기록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존 메릴의 논문 “제주도 반란”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존 메릴의 글을 보면 이 영화의 제목이 놀랍게도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로 명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불타는 오라리 현장이 4-3 기록영화의 주무대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영화에서도 오라리 방화가 ‘폭도에 의해 자행된 것’처럼 조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4-3은 말한다 2> 156쪽)
이 사건이 폭도 측에서 불시에 일으킨 일이라면 그처럼 치밀한 촬영 준비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4-3취재반은 4월 28일 김익렬-김달삼 회동 직후 경찰의 협상 방해공작이 몹시 극렬해지는 점을 중시하고, 그 변화가 현지 경찰의 자체 결정으로 이뤄질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4월 29일에 딘 군정장관이 비밀리에 제주에 왔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까지 한다.
이 추측의 근거는 위에 얘기한 기록영화에 딘 소장의 모습이 보인 사실과 5월 6일 정례기자회견에서 “지난 목요일과 이번 수요일에 다녀왔다.”고 한 말이 5월 7일자 <서울신문>에 보도된 사실이다. 5월 6일이 목요일이었으므로 “이번 수요일”이라 한 것은 5월 5일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과 함께 다녀온 일을 말하는 것인데, “지난 목요일”이라 한 것은 4월 29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4-3취재반은 해석한 것이다.
이 추측의 사실 여부는 더 엄밀하게 따져보지 못했으나 정황에 맞는 추측임은 분명하다. 4월 28일 유격대와의 회담에서 김익렬은 군정장관의 위임을 받은 것으로 대표 자격을 주장했다. 이 회담으로 사태의 전격적 해결 전망이 떠올랐을 때, 보고를 받은 딘 군정장관이 상황 확인을 위해 비밀리에 제주를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사태 발생 직후 응원경찰과 함께 경찰토벌대장으로 파견되었던 김정호 경무부 공안국장이 김익렬-김달삼 회담 직후 서울로 돌아왔는데, 그가 이튿날 기자들에게 한 말에는 분명히 음미할 점이 있다.
“일병(日兵)이 남긴 작전시설 2천 반도가 이용 - 김 공안국장 제주도 시찰담”
무지몽매한 도민을 폭력으로 선동하여 경찰을 습격케 하고 살인 방화 약탈 등 가진 잔악한 행동을 하고 있는 반민족적 도배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지난 5일 제주도로 파견되었던 경찰방위사령 김정호 공안국장은 28일 공로로 귀임하였는데 29일 왕방한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해방 전 일본군의 병참기지로 20만의 군인이 주둔하고 있던 제주도의 작전시설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어 한라산을 중심으로 약 2천 명으로 추정되는 반도들이 그 시설을 이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약 3개월을 지탱할 식량과 우수한 군비를 가지고 용의주도한 전략과 전법을 지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지도자는 상당히 병법의 훈련을 받고 실전의 경험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반도를 체포해 문초하여 보면 대개 백정들로, 좌익 계열에서는 일부러 잔악한 살인을 감행하기 위하여 남조선 각지로부터 백정을 모집해 제1선에서 경찰관과 그 가족 선거위원 등을 살해하는 도구로 쓰고 있는 형편이며 또 라디오나 신문으로서 세계의 움직임과 국내 사정을 알 수 없는 지역이므로 더구나 주민들이 순박 우매하여 좌익의 모략과 선전과 위협에 협력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사실 반도들 자체를 소탕하고자 하면 강력한 무장을 하고 1주일 동안이면 전면적으로 결말을 지을 수 있을 것이지만 그중에는 순박한 양민들이 섞여 있으므로 될 수 있는 대로 양민의 살상을 덜기 위하여 선무공작도 진행하고 있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30일)
“백정을 모집”했다는 황당한 이야기는 ‘반도(叛徒)’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유치한 언사로 이해되는데, 1주일이면 “결말을 지을 수 있”다는 마지막 문단에 ‘경찰의 진심’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찰에게 맡겨주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사태는 몇 주일 동안 경찰에게 맡겨져 있었다. 그런데 경찰이 주민을 지나치게 적대시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키기만 했기 때문에 경비대가 나서게 된 것이고, 경비대는 대화를 통한 해결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4월 3일 새벽에 움직인 ‘반도’ 수는 3백 명 전후로 추정된다. 몇 주일 동안 입산자 수가 몇 천 명으로 늘어난 것이 누구 때문인가? 오라리 상황에서 단적으로 나타난 것처럼,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위협 때문에 많은 주민들이 ‘항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신’을 위해 집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엊그제 소개한 김익렬의 회고 중 맨스필드 제주도 군정장관의 말을 인용한 “경찰의 방해공작” 운운은 사태를 대결 국면으로 몰고 가야만 하는 경찰 입장을 가리킨 것이다. 1946년 10월의 소요사태에서도 그랬다. 미군정 경찰이 식민지 경찰보다 더 큰 권력을 키우게 된 것은 미군정의 행정력이 총독부보다 못해서 치안유지 책임을 행정력보다 경찰력에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요사태가 커지는 것이 경찰집단의 이익에 부합했다. 하나의 조직이 만들어지면 조직의 원래 목적보다 조직 자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생긴다는 경영학 이론도 본 것 같다.
미군정 수뇌부의 입장에도 경찰과 겹치는 측면이 있었다. 2년 반 동안 남조선에 군정을 실시하면서 민심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이 미군정의 최대 약점이었다. 미군정 수뇌부의 ‘반공주의’는 그 책임을 ‘공산주의자의 책동’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희생자를 줄이면서 사태의 진정한 원인이 드러나게 하기보다 희생을 늘리더라도 ‘공산주의자의 책동’ 주장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을 경찰도 미군정 수뇌부도 바라고 있었다.
그래도 1946년 10월 사태에서는 미군정과 경찰의 입장에 차이가 있었다. 경찰이 사태 악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달려든 데 비해 미군정 수뇌부는 상황을 소극적으로 이용하는 태도에 그쳤다. 그래도 명색이 ‘정부’ 아닌가? 경찰이 저지른 짓을 덮어주는 ‘종범(從犯)’의 역할은 맡아도 함께 저지르는 ‘공범(共犯)’ 입장에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1948년 5월초 제주도에서 벌어진 상황을 보면 미군정이 경찰의 공범으로 나서는 정도가 아니라 주범의 위치에 선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든다. 5월 3일 미군과 경비대가 호송하던 ‘귀순 폭도’ 대열에 대한 경찰대의 습격이 단적인 예다. 이 사건에 대한 김익렬의 증언을 살펴본다.
이렇게 긴장을 하고 있던 차에 예기하던 불길한 사태가 드디어 5월 3일 발생하고야 만 것이다. 그날 오후 3시경 귀순 폭도 200~300명이 오라리 부락 부근을 거쳐 제주비행장에 설치된 수용소로 귀순한다는 연락이 왔다. 연대고문 드루스 대위와 미군병사 2명, 9연대 병사 7명이 하산하는 귀순 폭도들을 호송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완전무장한 경찰 약 50명이 92식 일본군 중기관총과 카빈총으로 귀순폭도들과 미군들을 기습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폭도들은 총에 맞아 죽고 생존한 나머지는 산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경찰은 계속 미군과 9연대 병사들을 향하여 집중사격하였다. 그들은 중기관총 엄호 하에 드루스 대위 일행에게 공격을 가해 왔다. 경찰은 숫자가 훨씬 많았으나 드루스 대위는 2차대전의 역전의 용사였다. 2명의 미군병사를 시켜 M-1총으로 중기관총 사수를 사살하고 일제히 경찰지휘관을 집중사격하여 그를 쓰러뜨렸다. 경찰은 5명의 시체를 버리고 제주읍 방면으로 도주했다. 쓰러진 자는 제주경찰서에 근무하는 경위였으며 양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중상은 아니었다.
구사일생한 드루스 대위 일행은 격분했다. 부상한 경위를 미군정 본부로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하여 주고 나서 드루스 대위 일행을 기습한 이유를 심문하였다. 그자는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 진행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하였다.
(...) 다음날 미 군정장관은 김정호 경찰토벌대장을 소환하여 어제 발생하였던 사건의 경과를 따졌다. 김정호 씨는 뻔뻔스럽게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이 사건은 공산주의 폭도들이 경찰을 중상하기 위해 저지른 짓이라고 잡아떼었다. 경찰을 미군정과 군대와 이간시키려고 폭도들이 경찰로 위장해 기습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또 드루스 대위에게 총격을 가한 경찰들도 사실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제주도 출신 경찰이며, 이 자들은 폭동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의 중기관총 등 무기를 가지고 공산폭도들에 가담하여 현재까지도 경찰복장과 무기를 가지고 민가를 습격하고 선량한 양민을 학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드루스 대위를 습격했다가 부상을 당하고 생포된 경위도 사건발생 전에는 제주도 경찰서 본부에 근무하던 자였으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로서 폭동사건이 발생하자 부하들을 데리고 산으로 도망간 사람이라고 하였다. 더욱 가공스러운 것은 그자가 어젯밤 경찰에서 조사를 받던 중 감시 소홀을 틈타서 자살하였으므로 사체를 검증하여 보라는 것이었다. (<4-3은 말한다 2> 335-336쪽)
김익렬은 무엇 때문에 4-3 회고문을 남겼는가? 두 가지 동기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 하나는 반공주의에 억눌려 있던 사태의 진상을 밝히려는 책임감이고 또 하나는 조병옥 등 당시 경찰 지도부에 대한 분노다. 분노는 정의감에 입각한 것이지만 역시 사적인 감정이다. 그 감정이 증언의 진실성을 손상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위의 증언 중 밑줄 친 부분은 과연 사실 그대로일지 의혹을 느낀다. 경찰대가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나온 것이었을까? 폭도와 경비대 장병의 사살은 몰라도, 미군 장교 죽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딘 군정장관도 책임지기 힘든 일이다. 미군 장병 사살하라는 명령은 당시 경찰 계통 어디서도 절대 나올 수 없었다. 미군 장병이 제주도에서 사살당한다면 온 미국이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공산 폭도의 소행인 것처럼 얼버무릴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정말 죽이러 나왔다면 중기관총까지 갖춘 약 50명의 경찰대가 개인화기만을 가진 미군과 경비대원 열 명을 섬멸하지 못할 리가 없다. 경찰은 월등한 화력과 인원으로 미군을 놀라게 하고 귀순 사업을 방해하려고 나왔을 것이다. 미군을 바보 만들고 ‘귀순 폭도’를 쫓아버리는 데 성공한다면 뒷수습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보장을 받고 나왔을 것이다. 단, 미군을 절대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드루스 대위가 뜻밖에 강경하게 대응하자 대책이 없어서 쩔쩔 매다가 몇 명이 죽고 지휘자가 생포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생포된 지휘자의 자백을 김익렬이 좀 과장해서 전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부분적 과장 외에 날조된 내용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미군이 공격을 받아 응전한 상황이라면 기록에 정확히 남아있을 것이 분명한데, 김익렬이 진술의 신뢰도를 쉽게 훼손당할 날조를 행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위에 제기한 정도의 ‘합리적 의심’ 외에는 그의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귀순 폭도’들이 오라리 방면에서 내려오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이틀 전 방화사건으로 도망했던 그 지역 주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많은 주민들이 경찰이 무서워 앞뒤 안 가리고 산속으로 도망하고 있었다. 그 많은 인원이 산속에서 머무르는 것은 유격대에게도 도움보다 짐이 되었다. 김달삼-김익렬 회담에서 합의한 ‘귀순’은 일차적으로 비전투인원을 정상적 생활조건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피난민을 모두 폭도로 보는 경찰 측 주장과의 정면충돌을 피해 ‘귀순’이란 말을 썼지만, 당시 ‘귀순 폭도’란 실제로 ‘귀환 피난민’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된다. 피난민 귀환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본 연후에 전투인원의 진짜 ‘귀순’도 고려될 수 있는 상황에서 경찰은 귀순을 가로막으러 나선 것이다.
5월 1일의 오라리 방화사건에 미군 측의 치밀한 촬영이 있었다는 점에서 제민일보 4-3취재반은 그 사건 기획에 미군정이 관여했을 개연성을 지적했다. 5월 3일 경찰대의 귀순 대열 습격사건에는 미군정이 끼어들지 않았을까?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고 나는 본다. 미군 장병을 겁줘서 바보 만드는 ‘작전’이라면 아무리 조병옥이라도 감히 벌이지 못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미군정 측이 양해 정도가 아니라 주도했던 일이었을 것 같다.
5월 5일 딘 군정장관이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과 함께 제주로 날아와 유해진 제주지사, 맨스필드 제주도 군정장관, 최천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김익렬 제9연대장과 함께 가진 최고수뇌회의 경위를 보면 경찰과 미군정의 자세를 알아볼 수 있다. 이 회의에 대한 김익렬의 회고가 볼 만한 것인데, 며칠 후에 따로 올리겠다.
5월 5일 이후의 일을 잠깐 살펴본다. 김익렬은 5월 6일에 해임되고 박진경 중령이 후임 연대장으로 부임했다. 박진경이 취임식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려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김익렬은 회고하며 박진경이 초토작전 비밀명령을 딘 군정장관에게 받은 것으로 짐작했다.
박진경은 9연대를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내몰았고, 그 공로로 곧 대령으로 진급했다. 이에 대한 경비대원의 반발이 두 차례 사건으로 터져 나왔다. 5월 20일 밤 11명의 하사관을 포함한 41명의 제주 출신 사병이 탈영, 대정지서를 습격한 뒤 입산했다. 그 후 제9연대는 제11연대로 재편되어 본부를 제주읍내로 옮겼는데, 6월 18일 새벽에 연대장 박진경이 부대 내 숙소에서 취침 중 부하에게 사살당했다. 제주에 부임한 지 44일 만이었다.
장교 1명과 하사관 3명이 체포되어 8월 14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9월 23일 문상길 중위와 신상우 일등중사가 처형되고 두 명은 특사로 감형을 받았다. (<경향신문> 1948년 9월 25일) 문상길의 진술 내용은 이렇게 보도되었다.
4월 3일 제주도소요가 봉기한 이후 전 연대장 김 중령 재임시에는 경찰의 폭도와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에 대하여 경비대는 도민을 선무하기에 노력하여 그들의 신뢰를 받았으나 박 중령 부임 후로는 경찰과 협력하여 소요부대에 무조건 공격명령을 내렸으며, 도민도 탄압하기 시작했으므로 도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고 경비대 내부 공기도 동요하였다. 나는 김 중령의 동족상잔을 피하는 해결방침에 찬동하였으며 처음으로 김달삼과 만난 이유는 김 중령과 회견시키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박 대령 부임 후였는데 그때 김은 30만 도민을 위하여 박 대령을 살해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였을 뿐 아무런 지령도 받지 않았고 김과 두 번이나 만난 것은 30만 도민을 동족상잔으로부터 건지기 위하여 경비대의 근본이념 국가지상 민족지상의 정신으로 원만해결책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서울신문> 1948년 8월 13일, <4-3은 말한다 3> 212쪽에서 재인용)
박진경 암살사건에 김익렬도 휘말려들었는데 이것이 그야말로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제9연대장에서 해임된 후 여수 주둔 제14연대장으로 부임해 있다가 서울로 연행되어 한 달간 조사를 받고나서 온양 주둔 제13연대장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여순사건이 일어났고, 김익렬의 후임 제14연대장 오동기 중령은 사건 발생을 막지 못했다는 죄로 군법회의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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