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위원단의 도착 이래 남조선 단독선거 추진세력은 이승만, 김성수의 면담을 비롯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네 주장을 위원단에 알리려 애썼다. 그 내용은 1946년 6월 이승만의 ‘정읍 발언’ 이래 발전시켜 온 분단건국 논리를 종합 정리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1948년 2월 1, 3, 5일 세 차례에 걸쳐 한민당이 유엔위원단으로 보낸 의견서를 게재했는데, 이것을 그 시점에서 분단건국 주장의 ‘집대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요점을 소개한다.

 

의견서 모두에서 한민당은 조선 민족이 “권력과 물질을 위해서 더러운 투쟁을 하지 않고 도덕과 예의를 숭상하는 극히 청렴하고 겸양한 백성”이며 “외국의 침략군을 격파하는 데 극히 강하였을 뿐이요 한 번도 남의 세력을 침략한 적이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전제한 다음,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렇게 변명했다.

 

어느 국가인들 전연 경찰이 필요 없을 만큼 범죄자가 없는 나라가 있겠으며 어느 민족인들 반사회적인 분자가 하나도 없는 민족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 다소의 암살 폭행 등 무질서가 있는 것은 일본민족의 살벌성에 물든 극소수분자의 정치적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 불안과 고통을 감내하지 못해서 하는 행동이거나 소련의 무자비한 공산주의 잔인성을 배운 전 세계적 파괴음모의 일단인 것입니다. (...)

 

평화를 사랑하고 도덕을 숭상하며 빈궁과 고난을 잘 참는 한민족이기에 이 정도의 혼란으로 그치고 이만한 질서라도 유지한다고 하여도 결코 턱없는 자만이 아닐 줄 압니다. 그러므로 모든 불안, 공포, 무질서, 혼란은 국가적 민족적 안정 세력인 민족 스스로의 정부가 섬으로써 해결될 것이며 따라서 그 정부를 세우기 위한 총선거를 하루빨리 시급히 실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치르는 데 사회의 혼란, 경찰의 폭력성, (좌익에 대한) 정치 탄압 등이 심각한 장애물로 위원단 내에서 지적되고 있었다. 한민당은 혼란의 책임을 좌익에게 돌리며 혼란 극복을 위해 총선거의 빠른 실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여건에 관해서는 아무런 의견도 없었다.

 

이어 한민당은 “북한의 소군 당국과 교섭하더라도 그 결정을 기다리기 위해서 총선거를 지연시키는 일이 없기”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도의적 평화적 해결의 길은 없는 듯하니 유엔 결의대로 3월 31일에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선거를 단행하는 것”이 타당한 방책이라고 주장했다. “가능한 지역”을 넓히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북 지역의 대표까지 뽑을 길이 있다고 주장했다.

 

특별선거구 문제도 또한 38도선으로 인한 특수 부득이한 일입니다. 이번 총선거는 전국을 통한 총선거이니 한국 국민이면 남에 있거나 북에 있거나 다 10만 명에 1인씩 (...) 자기의 이익과 의견을 충실히 대표할 인물을 택할 권리가 있는데 북한에서 부득이 월남하여 온 북한에 원적을 둔 국민들은 이재민으로서의 특수한 사정과 독특한 이해관계가 있으니 그들이 잘 아는 인물로서 그들과 같은 환경에 처해 있고 같은 이익관계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그들을 잘 대표할 그들의 고향의 인사를 선출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적 선거정신에 가장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들에게 이 특별선거구를 허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실에 있어서 내용에 있어서 그들에게 선거권의 행사를 불가능케 또는 무의미하게 하는 것이니 결과가 그들에게는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북한의 공산독재를 반대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하는 국민을 대표할 만한 유식하고 유능한 인사는 거의 전부가 남한으로 왔다는 것도 오늘의 현실입니다.

 

한민당을 비롯한 반공세력은 이북 주민 4백만 명이 이남으로 넘어왔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해방 당시 이남 주민은 2천만이 조금 안 되고 이북 주민은 1천만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는데, 이제 이북에는 6백만 인구밖에 남아있지 않으니 인구의 75퍼센트 이상이 살고 있는 이남에서 총선거를 실시해도 남북 총선거와 큰 차이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1948년 1월 25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안호상의 논설 “독립아관(獨立我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전일까지 인구가 38 이남엔 2천만 이북엔 1천만이던 것이 현재엔 이북에서 약 350만이 남하하였다. 그러므로 전 인구의 4분의 3은 이남, 4분의 1이 이북이요, 또 이북 인구 전체와 남하한 인구 비례로 본다면 이북엔 3분의 2가 이남엔 3분의 1이 있다. 그러면 만일 인구의 4분의 1이 총선거에 참가 못한다는 의견을 존중하여서 총선거가 타당치 않다면 이 논법에 따라서 북조선 인구 3분의 1이 총선거를 절대 지지하는 의견을 존중해서 3분지2의 총선거 반대 의견을 도리어 반대라고 무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논리적으로나 법리적으로나 38 이남의 총선거로써 세운 정부가 통일중앙정부가 될 수 있다.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해 왔다는 사람의 ‘논리’ 구사가 이러했다. 이승만이 그를 초대 문교장관으로 발탁한 자격도 이런 난폭한 추리력에 있었을 것 같다. 논리고 나발이고, 근거 사실부터 엉터리라는 것을 두 달 전 군정청의 인구동태 발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북인의 월남 비율은 5퍼센트 전후에 불과했고, 그 사실은 당시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과도정부 외무처에서는 남조선에 있어 오늘까지 팽창일로를 더듬어 온 인구이동 상황과 이에 따르는 행정문제의 중요성을 설명 발표하였다.

 

그에 의하면 만주 등지로부터 38선을 넘어온 이동상황으로서 52만 9,301명이 해방과 동시에 제1차로 귀환했고 작년에는 52만 1,541명, 금년도에는 오늘까지 12만 4,216명이 이주하여 도합 83만 9,816명이 문제의 38선을 넘어 소련 점령지대로부터 이동했다.

 

그러나 아직 만주 등지에는 100만여 명, 태평양지역에 50만 명이 남아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어 이들이 귀환하면 남조선은 필경 인구과잉을 초래할 것으로, 따라서 이들의 수용문제를 위시해서 안녕질서 보건 취직 교육 치안 식량공급 기타 정치운동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어 남조선의 중대한 당면문제의 하나로 주목되고 있다. (<조선일보> 1947년 11월 19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뽑아온 이 기사에는 숫자도 맞지 않고 이동한 인구 중 해외귀환자의 비율도 분명히 표시되어 있지 않다. 같은 자료를 보도한 것으로 보이는 <경향신문> 1947년 11월 21일자 기사에서 더 많은 것을 더 확실히 알아볼 수 있다.

 

“대부분 북조선 제도의 불만으로 - 외무처 발표”

 

중국, 만주, 북조선으로부터 남조선으로 넘어오는 인구동태에 관하여 외무처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해방되던 해 중국에 있던 동포는 (...) 고국을 향하여 조수와 같이 물결치게 되었다. 이들의 대다수는 소련 점령 북조선 지대를 통과하여 미군 점령지대인 남조선에 들어올 것을 선택하였고 그들 대부분은 원래 북조선에 살던 사람이다. 약간은 북조선에 재류하였으나 대부분은 소군이 조직한 인민위원회의 지배에 불만을 느끼고 남하한 것이다.

 

1946년도에 넘어온 사람들은 본래 만주에서 살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 해 38선을 넘어온 사람들 중에 50퍼센트는 적어도 북조선 공산주의 사회제도 아래에서 생활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온 사람들이고 그들 중에 대부분은 많은 유능한 사람과 최고 교육을 받은 문화인이다. 그 대부분은 지주 상인뿐만 아니라 의사 법률가 기술자 교육가 정부관리가 더 많았다.

 

1946년도 이주는 그 수에 있어서 1945년에 비할 것은 못되나 그 대부분이 계획적 이주라는 것은 유의할 점이다. 이들의 이주는 서리 나리는 엄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최고조에 달하였고 여름을 거쳐 장마가 그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북조선과 만주의 신 사회제도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생활의 편의를 찾아 이동되는 것이고 이동자들은 그 사회제도를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947년도 즉 금년에는 남조선으로의 이동은 정상적 현상을 나타내었다. (...) 이러한 이민은 현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계획적 조정에 의한 국민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일종의 피난민들이라고 한다. 그들의 대부분은 농토와 농작물을 버리고 추수도 아니하고 도망하여 온 것이다.

 

1947년도 이민은 일본 패퇴 후의 변화로 인한 것이 아니고 북조선의 소련화의 진전의 결[한 줄 빠짐]로부터의 이민은 소수에 불과한데 이것은 소련당국이 조선에 입국하는 북조선의 국경지대를 봉쇄한 사실에 의하여 명백한 것이라고 한다. 금년도의 이민은 작년도의 50퍼센트 미만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소련의 지시에 의하여 북조선 당국자가 38선을 넘어서 조선에 들어오는 이민을 방지하고 있는 데 기인한 것으로 명기할 사실이라고 한다.”

 

총선거를 최대한 빨리 실시하기 위해 ‘가능한 지역’을 더 넓히려 애쓰지 않아도 그 선거를 통해 세워지는 정부는 이남의 단독정부가 아니라 전 조선인의 정부가 될 것이라고 한민당은 주장했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강변했다.

 

세계평화 수립의 책임을 진 유엔의 실행력과 위신을 보이기 위해서나 한국의 초미의 급박한 사정으로 보아 남한만이라도 소정의 기일 안에 선거를 실시하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국회는 당연히 한국 전체를 대표한 국회가 되어야 할 것이며 그 국회에 의해서 수립된 정부는 당연히 한국 전체를 대표한 통일적 중앙정부로 유엔에서 승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금번 총선거 자체가 유엔의 결의로써 전국을 통한 통일선거이니 외국 군대의 불법 방해나 천재지변 등으로 인해서 일부 의원의 선출 혹은 출석이 불가능하게 된다고 그것으로써 전국을 대표한 국회가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과에 있어서 한국 독립에 대한 결정권을 유엔 결의의 실행을 보이콧한 일개국에 맡기는 것이 될 것입니다.

 

“초미의 급박한 사정”이 무엇이기에 “소정의 기일” 안에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인가? 유엔총회에서 1948년 3월 말 이전에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한다는 결의를 하기는 했지만, 선거를 제대로 실시하기 위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조선위원단이 판단하면 날짜야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날짜는 5월 10일로 조정되지 않았는가. 해방 후 30개월째 되는 시점이었다. 두 달 내에 꼭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남북 총선거와 엄정한 선거관리가 불가능하게 되기를 바란 것이라고밖에 이해할 길이 없는 주장이다. 남북 총선거가 실행된다면 5-10선거보다 엄격한 선거관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48년 초 시점의 이남 상황 그대로 선거가 실시되어야 한민당이 가장 유리한 결과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유엔위원단에서 엘살바도르대표와 중국대표가 벌써 ‘가능한 지역’만의 선거 실시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유엔정신’에 어긋난다는 점이 지적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우회하기 위해 우선 이남만의 선거를 실시하되 이북 몫의 의석을 비워두었다가 형편이 될 때 채우도록 한다는 절충안이 제기되고 있었다. 한민당은 이것에까지 반대했다.

 

풍문에 의하면 남북에 동시 선거가 불가능한 때에는 남한만 선거해서 국회를 성립시키되 북한에 해당한 의원 수의 의석을 비워두었다가 언제든지 북한에서 응하면 참가시키도록 하자는 의견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것은 사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크게 위험한 일이니 남한의 선거 결과가 또는 남한의 의원에 대해서 부단히 암살, 위하, 매수 등 모략을 써서 남한의 공산주의에 가담할 의원 수와 북한의 공산당 의원 수와 합해서 승산이 있을 때는 북한에 해당한 수의 의원을 보내서 정부 수립에 협력해 가지고 장차 헝가리처럼 공산화할 것이요, 그렇지 못할 때는 38선의 철막을 그대로 언제든지 딱 닫아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북한의 소련으로 하여금 한국의 전체를 가지느냐 우선 반분만 가지느냐의 자유선택을 하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문장이 통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취지는 대개 알아볼 수 있다. 이남에서 선출되는 의원 중에는 좌익도 상당수 있을 텐데(한민당 눈에는 중간파는 물론, 이제 한독당도 좌익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북에서는 전원 빨갱이들이 몰려올 테니(아무리 민족주의자라도 이북에서 지금까지 숨 쉬고 살아왔다면 한민당 기준으로는 빨갱이다.) 공산화를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한민당이 득세하지 못하는 상황은 무조건 공산화로 보였을 것이다.)

 

선거를 서두르려니 선거법 준비에 시간이 많이 드는 것부터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입법의원에서 제정한 보통선거법을 쓰라고 주문하는데, 선거권 연령 제한을 23세 이상으로 해놓은 것까지 그대로 받아들여달라고 졸라대고 있다.

 

우리 한국은 여태껏 현대적 정치훈련을 받지 못했고 정부도 서기 전에 이번에 처음으로 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인 만큼 단번에 선거연령을 낮추기 어려울 뿐 아니라 종래의 가족제도가 늦도록 부모에게 생활을 의뢰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에 대한 자각이 생기고 실생활 문제와 현실에 대한 정확하고 책임감 있는 판단을 하게 되는 데는 상당한 연령을 오하는 특수한 사정이 있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문제점들에 비하면 작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민당의 노는 방식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치훈련’이라고? 기본적 참정권을 행사하는 데 훈련이 필요하단다. 조선의 가족제도에 대한 왜곡은 또 어떤가. “늦도록 부모에게 생활을 의뢰하는 습관”? 친일파 유산계층에게는 그런 습관이 있었는지 몰라도 조선의 일반 민중에게는 자식을 23세까지 돌봐줄 여유가 없었다. 열 살만 넘어도 경제활동에 나서야 하는 것이 조선 민중의 실정이었다. 외국인인 위원단 대표들이 실정을 알 리 없으리라고 생각해선지 마음 놓고 작문을 하고 있다. “실생활 문제와 현실에 대한 정확하고 책임감 있는 판단”이 없어서 한민당을 지지해주지 않는 청년층을 배제하려는 속셈이면서.

 

한민당은 빠른 총선거 실시를 원했다. 선거가 ‘가능한 지역’을 넓히는 데는 아무 관심 없었다. 이남만의 총선거로 전 조선인의 정부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북 지역의 선거도 월남민들만으로 실시해야 한다고까지 우겼다. 이 모두가 이승만과 같은 입장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