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이상 55세 이하의 모든 남성을 의무적으로 가입시키는 ‘향보단(鄕保團)’ 이야기가 난데없이 튀어나왔다.
“향토방위의 목적으로 ‘향보단’을 조직 - 군정의 지령으로 경무부에서”
향토를 방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향보단 조직이 방금 진행 중에 있다 하는데 탐문한 바에 의하면 이 조직은 군정장관의 지시로 경무부 각 관구 경찰청이 주동이 되어 각 행정관청의 협조를 얻어 주직에 착수하였다 하는바 서울시에서는 각 구청에 지시하여 조직을 촉진시키고 있다 한다. 복잡미묘한 정세에 미루어볼 때 향보단의 출현은 일반의 커다란 관심사의 하나라 아니할 수 없으며 그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직: 경찰지서를 단위로 본단을 조직하고 행정구역 즉 동-리-가-로를 단위로 분단을 조직한다.
목적: (1) 향토정신의 고취.
(2) 민족 공동 책임 관념의 앙양.
(3) 향토방위를 견고히 함으로써 외래 불순분자의 침입 내지 모략 선동 공작의 여지를 봉쇄함.
(4) 강도 절도 살인 방화 등 악질범죄의 미연 방지.
의무: (1) 각 지역의 주민으로서 만 15세 이상 65세 이하의 남녀는 공동책임을 부하함.
(2) 주민으로서 만 18세 이상 55세 이하의 남자는 단원이 될 의무가 있음. (경찰관, 경비대원, 소방관, 학생은 제외할 수 있음)
(3) 각 지역 내의 특정 청년단체로 하여금 단의 직능을 대행케 함을 금지함.
(4) 경찰서장은 항상 단을 정리 파악하는 동시에 단원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정기적으로 사열과 필요한 교육 훈련을 실시함
(5) 단원의 복무규율에 관한 규정은 각 관구 경찰청장이 이를 정함.
경비: 단원의 정원 급여 기타 단에 필요한 자재는 각 지역 주민의 의연금으로 충당함. (<경향신문> 1948년 4월 16일)
전 주민에게 책임을 지우고 전 남성을(별도 조직을 가진 소방관, 학생 등을 제외하고) 경찰의 지휘 아래 조직-동원하겠다는 어마어마한 발상이다. 이 기사에서는 “군정장관의 지시”라 했는데, 4월 16일 조병옥 경무부장이 일반의 오해를 불식하겠다며 한 말을 보면 실제는 그가 꾸민 일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조직은 경찰이 직접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각 동리에서 자치적으로 하는 것이다. 결코 강제적인 것이 아니고 자기 동리를 방위하기 위하여 만드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앞서 열린 각도지사회의에서 결정된 것으로 총선거를 앞둔 남조선사태는 곤란한 처지에 있는데 3만5천여 명의 경관만으로서는 도저히 13,800개소의 투표소를 지켜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투표소의 자유분위기를 확보하기 위하여 실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조선에서는 선거사무소 습격사건이 80건이나 발생하였었다.” (<동아일보> 1946년 4월 17일)
조병옥은 향보단 조직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회고록에서도 자기 공적으로 열심히 내놓았을 것이다.
(‘CIC 수집 정보에 의하면 총선거 실시를 위한 치안 확보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는 하지 사령관에게 대답하며) 또 둘째 이유에 대해서는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현재의 남한 치안문제에 대하여는 2만5천 명의 국립경찰만으로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 역시 긍정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선거를 치르기 위하여 100만 명의 보조경찰 제도를 설비하여 선거 준비에 만반 태세를 갖출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더니 하지 중장은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그러한 제도를 용인한다고 하더라도 미 국무성이 승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군정은 경찰국가라는 용인을 받기 쉬운 까닭에 그러한 제도를 설치하기는 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 나의 건의에 대해서 난색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그 자리를 물러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보조경찰 제도에 대하여 단념을 하지 않고 계속 연구한 결과 정다산의 목민심서와 이율곡 문헌을 참고로 하여 (...) 이 향청 또는 유향소 등을 참작하여 이것을 ‘향보단’이라고 명칭하고 5-10총선거를 대비하기 위하여 조직에 착수하였다. (...)
이러한 폭도들의 만행을 대비하기 위하여 나는 미리 향보단을 조직케 하고 경찰지서 단위의 각 지역에 55세 이하 청장년의 지원자로서 경찰과의 협력 하에 자발적인 자위조직을 구성케 하였다. 이 향보단은 선거가 끝난 후 선거 실시에 많은 공적을 남기고 그해 5월 22일 역사적인 해단식을 하였다. (<나의 회고록> 186-194쪽)
마지막 문단에서 향보단이 ‘자발적’ 조직이었다고 강변하고 선거가 끝난 후 ‘자발적’으로 해단한 것처럼 적었다. 실제로는 해체할 생각이 없었는데 너무나 물의를 많이 일으켜 어쩔 수 없이 폐지하게 된 사정을 잠시 후 살펴보겠다.
4월 18일자 <조선일보>의 아래 기사를 보면 경무부에서는 적어도 4월 3일부터 향보단 조직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그 동안 비밀에 부쳐져 있었던 것이다. 언론에 보도되자마자 원안 수정 방침이 나온 것을 보면 여론의 비난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향보단의 원안이 일부 수정될 것이라 한다. 경무부에서는 17일 각 관구경찰청장에게 통첩을 발하여 4월 3일부로서 향보단의 지방자치적 창설을 제시한 원안은 이를 해소하고 수정안이 완료되는 대로 즉시 교부할 것이니 이 사유를 각 지방장관에게도 통지할 것을 제시하였다. 탐문한 바에 의하면 향보단 조직은 군정장관이 경무부장에게 비공식으로 최촉한 것이라 하는데 법령으로 제정된 것은 아니고 또는 전국적 조직체도 아니라 한다. 또한 이는 경찰의 직속기관이 아니며 그 간부는 선거제로 하여 경찰부장은 단원의 훈련의 필요시와 비상사태 이외에는 지휘명령권이 없고 특정 청년단체가 대표할 수도 없다는 것이 명시되고 있다. 한편 경무부에서는 민간의 오해를 일소하기 위하여 그 원안을 수정하게 된 것인데 총선거 완수를 위하여 일반의 자발적 조직을 당국자는 요망하고 있다.
법령의 뒷받침도 없이 ‘비공식으로’ 진행되는 일이다. 이 기사에서도 조병옥이 군정장관 지시에 따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후에 회고록에서 자랑스럽게 자기 공적으로(<목민심서>와 율곡 문헌까지 연구한) 내놓는 것과 대조해 보면 당시 이 일이 얼마나 욕을 많이 먹는 짓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5월 20일 딘 군정장관이 향보단에 관한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5월 10일 선거일까지의 기간 중 법률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시장, 군수, 면장, 구, 동 및 가의 책임자는 평화유지에 경찰을 원조하고 협박, 폭동, 살인, 방화 및 기타 각종의 파업으로 선거를 방해하고자 기도하는 분자에 대하여 각기 지역을 방위함에 필요한 각기 지역의 남자시민을 대표함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방경찰당국과 긴밀히 협력할 각 지방관청의 관할 하에 둘 것”이며 “시민으로부터 여하한 기부도 갹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각 신문 1948년 5월 21일자)
“승인”이라고 했다. ‘지시’가 아닌 것이다. 향토방위를 위한 ‘자발적’ 조직을 군정장관으로서 ‘승인’한다니, 법치의 개념을 가진 군정장관인가? 연변 말 ‘행방 없음’이 생각나며 웃음이 난다. 요새 말 ‘개념 없음’과 비슷한 뜻이다. 주제를 모르고 나서서 엉뚱한 짓 하는 것을 ‘행방 없다’고 한다. 전쟁 발발 직후 딘 소장이 포로로 잡힌 것이 행방 없어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는 것이다.
이렇게 조직된 향보단의 기본 장비는 완장과 곤봉이었다. 선거기간 내내 향보단이 질서유지에 공헌하는 모습이 선거 관계 기사에 한 줄씩 들어갔는데, 투표일의 서울 풍경을 그린 5월 11일자 <경향신문> 기사 “대 장안 선거 일색 - 열성적인 참가로 투표 90%를 돌파?”에서 한 대목을 뽑아 본다.
수도 서울이며 또한 이번 총선거의 중심지인 서울의 이날 광경을 그려보기로 한다. 어떠한 선거방해 행위라도 이를 막아내고자 수도청 젊은 7천 경관을 비롯하여 향보단원, 각 애국청년단체원들이 투표소 부근은 물론 거리의 요소요소마다 물샐 틈 없는 경계를 하고 있는 가운데 투표 시작시간인 아침 7시가 되기 전부터 유권자들은 투표소에 운집하여 투표시간만 고대하고 있었다.
이목이 번다한 서울 풍경이 이랬으니 시골에서 향보단의 역할은 더 컸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완장 찬 사람들이 투표소 주변에 모여 있는 것이 선거의 ‘자유분위기’를 해칠 수 있다는 생각은 누구에게도 들지 않았던 것일까? 투표 후 유엔조선위원단에서 감시 결과를 발표한 공보 제59호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금번 선거 진행 중 몇몇 대표는 선거법 위반과 본 위원회의 건의사항 위반 등을 지적한 바 있다. 예거하면 우리들은 투표소 내와 그 주위에서 향보단원을 발견한 일이 있다. 향보단은 경찰에 의하여 조직된 것이며 안녕질서를 유지함에 있어 경찰을 방조하는 것이다. 향보단은 투표자의 자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제한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투표소에서는 투표장 안에 경관이 들어와 있은 적도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청년단원(혹자는 제복까지 착용)이 투표소 내와 그 주위를 빙돌고 있었다. 우리들 중의 혹자는 몇 개 투표소에 있어 비밀투표가 여행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14일)
향보단 조직이 자발적인 것이라 하여 그 대대적 동원이 관권선거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이다. 그 동안 테러단체의 ‘자발적 조직’에 따른 혼란으로 모자라 이제 전 국민의 ‘자발적 조직’을 조장하겠다니 그 결과가 어떤 무법천지를 만들지 아무런 상상도 되지 않았다는 말인가?
조병옥은 회고록에서 향보단이 5월 22일 “역사적인 해단식”을 거행했다고 하는데, 역사적이고 개뿔이고 해단식 같은 것은 없었다. 5월 22일 군정장관의 해단 명령이 떨어졌고 수도청 관하의 경우 5월 25일 해체가(완장과 곤봉 등의 반납) 행해졌는데(<동아일보> 1948년 5월 26일), 군정장관 명령 직전까지도 경찰은 향보단 해산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경관과 같이 배치 - 수도청서도 대책 고려”
지난 총선거 때의 경계를 비롯하여 금후 각종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탄생한 향보단은 경찰의 보조 역할을 하여 그 동안 다대한 성과를 거두고 있어 건국도상에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거니와 동 단원 중에는 일부 난폭한 행동을 보이고 있는 자가 간혹 보이고 있어 향보단 전체에 사회적 악영향을 미치게 하는 관계로 최근 수도청에서는 이를 시정하고 참다운 향보단을 구성하기 위하여 연일 회의를 거듭하고 있다 하는데 앞으로는 야간통행금지 시간에 향보단 배치 장소마다 경관 수 명씩 배치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22일)
5월 10일 투표일까지는 향보단의 횡포에 대한 불만이 있어도 ‘질서유지’라는 명분으로 얼버무릴 수 있었다. 그러나 투표일이 지나자 향보단을 낀 폭력 사례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5월 22일자 <경향신문> “향보단원의 구타사건 속출”기사에는 5월 6일과 14일 원서동에서 대동청년단원 한 명씩이 향보단원들에게 끌려가 구타당한 일과 20일 돈암동에서 미24군단 수위감독인 39세의 사내가 향보단원들에게 구타당한 일이 보도되었다. 모두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일이었다. 대동청년단원이나 미군속 같은 신분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당한 폭행은 검찰 조사 받기도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5월 11일 밤에 한 통신사 기자가 납치, 구타당해 중상을 입은 일이 가장 눈길을 끈 향보단 폭행사건이었던 것 같다.
“상공통신 기자, 아들도 역(亦) 중태”
기보한 바와 같이 상공통신 기자 이영섭(48) 씨는 지난 11일 밤 성북동 자택에서 향보단원에게 납치당하여 성북동1동회사무소(향보단 사무실)에서 밤새도록 무수 구타를 당하여 중태에 빠진 후 성북경찰서를 거쳐 이튿날 아침 여의전병원에 입원하여 방금 가료 중에 있는데 동 씨의 장남 이문규(27)와 이 씨가 들어 있는 집주인 임무창 양 씨도 같은 날 밤에 같은 장소에서 구타를 당하고 중태에 빠져 있다. 담당의사 이주걸 씨의 말을 들으면 이 씨는 양쪽 팔이 부러지고 머리와 얼굴에 심한 타박상과 양쪽 다리가 상하였다 하며 이 씨의 장남 문규 씨는 팔이 부러지고 머리가 많이 상하였다 한다. 생명은 건질 수 있을 것이나 완치되기까지에는 장구한 시일이 필요하다고 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19일)
이 참혹한 테러가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고 더러 과장된 오보도 유포되었던 모양이다. 이 보도가 나간 날 조병옥이 담화를 내놓았는데, 해명이랍시고 내놓은 담화 중에서까지 피해자를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태도가 눈길을 끈다.
“향보단 비난 말라 - 통신기자 절명은 허설(虛說) - 조 경무부장 담”
최근 시내에서 발행하는 모모 신문지면의 보도에 의하면 총선거를 반대하는 것이 전 인민의 일치된 부르짖음과 같이 떠들어대고 향보단원들의 비행과 횡포가 누누이 보도되어 세인의 이목을 현혹케 하는바 심한바 있어 경무부에서는 신경을 날카롭게 하여 진상을 조사 중이거니와 그 중에서도 수일 전 상공통신기자 이모가 향보단원의 폭력으로 말미암아 입원가료 중 사망하였다는 보도가 유포된 진상을 19일 조 경무부장은 다음과 같이 담화를 발표하였다.
“성북동 제1향보단원에게 얻어맞은 청년 세 사람은 여자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에 입원가료 중으로 불일 중에 퇴원할 것으로 보이며 그 중에도 이학준 씨는 군정을 비방하고 총선거를 반대하는 삐라 등 두 가마니나 가지고 있었고 그 동판까지도 보관하였던 것으로 보아 그들이 빚어낸 허황한 풍설과 교묘한 선전술법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 밤을 낮 삼아 애국적 봉공을 하고 있는 향보단이 그들 음흉한 활동을 봉쇄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이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20일)
조병옥이 앞장서서 만든 향보단이 우익테러에 이용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제도적 근거 없이 민간의 ‘자발적’ 조직을 조장했다가는 어떤 무법천지가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려는 뜻에서였을까, 좌익테러에 향보단을 이용한 사건까지 벌어졌다.
“영등포중계소 방화 살인범, 24일 일당 5명 체포”
서울중앙전화국 영등포전화중계소 방화 살인 사건은 기보하였거니와 그 후 경찰은 불면불휴의 활동을 계속하여 범인 전부를 체포하였다. 즉 범인은 시내 신길동 270번지 남로당 경기도유격대 백골대 제5중대장 이장수(25)와 정춘수(29) 이경래(23) 최용준(22) 이창근(20) 등 5명을 24일 밤까지 전부 검거하는 동시에 범인들이 빼앗아 갔던 카빈총 두 자루와 4식 장총 한 자루도 관악산 산정에 묻은 것과 시내 모처에 은닉하였던 것을 전부 회수하였다. 그런데 이 범인들은 소학교도 나오지 못한 무지한 청년들로서 경관을 살해 방화할 것을 약속하여 현금 8만 원씩을 받고 거사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또 범인들은 영등포 신길동의 향보단원들로 이장수는 전 대동청년단원이었으며 현 향보단 부단장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26일)
5월 23일 새벽 2시 반에 범인 다섯 명이 신길동의 중계소를 습격해 직원 2명과 경찰관 3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출신과 배경에 관계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완장과 곤봉을 얻고 야간통행금지에도 구애받지 않을 수 있었으니, 일 저지르기에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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