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5월 5일 제주에서 열린 ‘최고수뇌회의’ 경위에 대한 김익렬 제9연대장의 진술을 그의 유고 “4-3의 진실”(<4-3은 말한다 2> 338-344쪽)에서 옮겨놓는다.

 

귀순공작의 성공으로 제주도 전역에 전투가 종식되고 완전 진압이 눈앞에 보이던 중 경찰의 방해공작과 귀순폭도들의 잇단 피살로 폭동이 재연되는 상황으로 급변하고 만다. 당황한 미 군정청장관 딘 장군은 직접 제주도로 내려와 현지에서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제주읍에 비래(飛來)하겠다고 연락해 왔다.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는 사전에 나에게 자기들의 난처한 입장을 설명하고(딘 장군이 자기들의 건의를 들어주지 않고 강압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고 차후 대책과 작전을 건의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3인은 회의에 내놓을 일체의 증거물과 사진첩을 준비하였다. (당시 9연대는 사진자료와 그런 자료를 만들 시설이 없었으나 미군정에서 수집 작성한 앨범이 있었다.)

 

회의는 5월 5일 12시에 개최되었다. 장소는 제주중학교의 미 군정청 회의실이었다. 참가자는 미 군정장관 딘 장군, 민정장관 안재홍,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 딘 장군 전용통역관 김 씨(목사 출신) 등이었다. 이상 9명이 참가한 회의는 극비에 부쳐졌다. 회의는 맨스필드 대령 사회로 개최되었다. 회의의 첫머리에 맨스필드 대령은 이 회의는 딘 장군의 명에 의하여 참석자 누구든지 자유로이 의견을 말할 수 있으며, 이 회의의 내용은 극비이며 누설자는 군정재판에 회부한다고 선언하고 먼저 경찰에서 설명하라고 하였다.

 

경찰을 대표하여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 씨가 상황 설명과 건의를 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이 폭동은 국제공산주의자에 의한 사전에 조직 훈련 계획된 폭동이며 군-경 대병(大兵)을 투입하여 합동작전으로 철저하게 토벌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송호성 장군에게 의견을 말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송 장군은 제주도 실정은 연대장이 자기보다 잘 아니 연대장이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송 장군의 지시에 따라 군의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그 내용과 건의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 사건은 제주도민의 전통적인 배타성을 이용해 공산주의자-불평분자-밀무역자 등 각종 성분의 무리가 일으킨 도민폭동으로 본다. 직접적인 도화선은 밀무역자와 경찰 간의 마찰이다. 폭동자 수가 수만으로 증가된 것은 경찰이 초동의 대책과 작전에 실패한 데서 기인된 것이다. 실제 무장한 인원은 300명 이내로 보며 나머지는 여러 가지 불가항력으로 인한 동조자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는 (1) 적의를 가진 폭도와 일반 민중동조자를 분리시켜, 폭도를 제주도민으로부터 고립시켜야 된다. (2) 그러기 위해서는 무력위압과 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하는 작전을 전개하여야 된다. 일방으로 회유와 선무를 하여 응하지 않는 자는 토벌하는 것이다. (3) 이 작전의 방해요소는 경찰의 기강문란이며 이것이 폭도 증가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전 제주도경찰을 나의 지휘 하에 달라. 작전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서도 이것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보고와 건의가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물을 제시하겠다 하면서 준비하였던 물적 자료와 사진첩을 제시하였다. 사진첩을 보자(사진첩에는 맨스필드 대령이 영문으로 상세한 설명을 기입해 놓았다.) 딘 장군은 흥분하여 안색이 붉어지며 즉석에서 나의 건의를 채택하는 동시에 경찰을 나에게 배속시키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진첩을 조병옥 씨에게 던져주면서 불쾌한 어조로 “닥터 조, 이것 어떻게 된 일이오. 당신의 보고 내용과 전연 다르지 않소.” 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장내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조병옥 씨는 사진첩을 두루 살피면서 당황한 기색이더니 갑자기 단상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는 우리말로 자기가 설명하겠노라고 인사를 하고는 그 다음은 유창한 영어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조병옥 씨는 처음에는 영어로 한 말을 자신이 통역하는 식으로 설명하다가 열을 띠자 우리말을 치워버리고 영어로만 떠들었다. 영어를 모르는 안재홍 씨, 송호성 장군, 유해진 도지사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조 씨는 연대장의 설명과 사진첩 등 증거물이 전부 허위조작된 것이며(사실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가 작성한 것인데)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이라고 극구 부인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나에게 손가락질하면서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 있소. 나는 오늘 처음으로 국제공산주의가 무서운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소. 헝가리-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그랬듯이 처음에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각지에서 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나중에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상투수단이오.”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닥쳐라!” 하고 고함을 질렀다. 딘 장군은 나를 제지하며 연설 방해를 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조병옥 씨는 계속해서 나를 가리키며 “민족주의의 가면을 쓴 청년들이 먼 외국에서만 있는 줄 알았더니 현재 우리나라에도 있소. 바로 저 연대장이 그런 청년이요. 우리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저 청년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이며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현재 이북에서 공산당 간부로 열렬히 활약하고 있소. 저자는 자기 부친의 교화를 받고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자기 부친의 지령에 의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이오.” 하면서 나를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더구나 나의 부친은 내가 다섯 살 때 이미 작고한 분이었다.)

 

딘 장군은 조병옥 씨가 나의 부친이 공산주의자라고 그럴싸하게 설명하자 깜짝 놀라며 의심에 찬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그냥 두었다가는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낙인을 찍힐 판이었다. 나는 격분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상에 뛰어올라 조병옥 씨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흥분한 나머지 주먹으로 조병옥의 복부를 친 후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치려고 하였다(나는 유도 3단이었다). 그러나 조 박사는 의외로 힘이 장사였다. 당시 50세가 넘었는데도 쉽게 넘어지지 않아 단상에서 격투가 벌어졌다. 내가 손에 잡히는 대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당기니까 그는 목을 졸리게 되었다. 조 박사는 숨을 못 쉬고 비명을 지른다. 최천 씨가 말리러 올라왔으나 나의 발길질에 급소를 차여서 그도 비명을 지르며 나뒹군다. 딘 장군이 송호성 장군에게 싸움을 말리라고 고함을 질렀다. 나도 고함을 지르며 조병옥 씨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였다기에 애국자인 줄 알았더니 자기의 죄상이 드러나니까 무고한 나를 하필이면 공산주의자로 모느냐. 취소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하며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

 

송 장군은 일어서지도 않고 앉은 채로 “이놈 연대장! 누구에게 폭행을 하느냐. 네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손을 놓고 말로 하라.” 하며 고함을 친다. 그러나 말릴 뜻은 없는 듯 입으로만 호령호령했다. 돌아가는 내용의 대강을 눈치챈 안재홍 민정장관은 “연대장! 손을 놓으시오. 폭행을 멈추시오. 외국사람들이 우리를 야만인이라고 흉을 보니 어서 손을 놓고 말로 하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역시 소리만 지를 뿐 단상에 올라와 말릴 뜻은 없었다. 유해진 지사가 단상에 올라와 나의 손을 떼어 놓으려고 하였으나 노령이라 역부족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덤볐다. 순식간에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딘 장군을 싸움은 말리지 않고 떠들고만 있는 안재홍 씨와 송호성 장군이 지금 무어라 말하고 있냐고 통역관 김 씨를 옆으로 불러 물었다. 그런데 이자의 통역이 또 괴변이다. 그 경황 중에도 내가 단상에서 듣자니 이자는 딘 장군에게 안재홍 씨와 송 장군이 연대장에게 “너는 공산주의자이며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고 있다고 터무니없는 통역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화가 치밀 대로 치밀어서 두 손으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붙잡은 채 단하로 끌어내리면서, 김 통역관에게 발길질을 했다. 입을 걷어찬다는 것이 빗나가서 그만 그자의 음부 급소를 걷어찼다. 김 통역관은 비명을 지르면서 마루 위에 나뒹군다. 놀란 딘 장군은 급히 회의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가더니 대기 경호 중이던 미군헌병을 불러들여 장내 질서를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수 명의 MP가 달려들더니 그중 2명의 MP가 양쪽에서 나의 팔을 붙잡아 조 박사에게서 떼어놓고는 나를 어린아이처럼 번쩍 들어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두 팔을 잡고 꼼짝 못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장내의 소란은 끝났다.

 

모두가 대단히 흥분하고 있었으므로 딘 장군은 “콰이엇, 콰이엇!” 하면서 진정하라고 명령하였다. 2~3분간의 침묵이 있은 후 딘 장군은 조병옥 씨에게 단상에 올라가 설명을 계속하라고 하였다. 조 박사는 이번에도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몰아붙였다. 나도 고함을 지르며 욕설로 맞섰다. 딘 장군은 다시 “콰이엇!”을 연발한다. 안재홍 씨도 “연대장! 조용히 하시오.” 하고 말렸다. 송호성 장군도 고함 고함을 지르며 “이놈! 이놈!” 호령했는데 그 대상이 연대장인지 조병옥 씨인지 분명치 않았다. 나는 그것이 조병옥 씨를 향한 욕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난데없이 안재홍 씨가 탁자를 두드리며 “아이고 분하다, 분해! 연대장 참으시오! 이것이 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이 된 것이 아니고 남의 힘을 빌려서 해방이 된 때문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오. 연대장! 참으시오!” 하면서 방성통곡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울음을 한참 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장내는 순식간에 숙연해지고 안재홍 씨의 통곡소리만 들렸다. 조병옥 씨도 연설을 중지하고 나도 욕설을 멈췄다. 딘 장군은 안재홍 씨와 조병옥 씨의 안색을 번갈아 보면서 어떤 영문인지를 살핀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서서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해산이오.” 하고 고함을 지르듯 선언하고는 문을 열고 총총히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한참 있다가 조병옥 씨가 그 뒤를 쫓아나갔다. 회의장에는 안재홍 씨와 송호성 장군 그리고 나 3인만 남게 되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안재홍 씨는 눈물을 흘리며 “민족의 비극이오.” 하는 말만 되풀이할 뿐 다른 말이 없었다. 비행장으로 직행한 딘 장군이 두 사람에게 속히 오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일행은 제주에서 1박할 당초의 예정을 바꿔 딘 장군을 따라서 상경하고 말았다. 회의는 결국 아무런 결론도 못 내린 채 난장판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미군정 최고수뇌회의가 아무런 결론 없이 유회된 다음날 오전 11시경 제주읍 소재 연대임시본부 겸 연락소에 난데없이 경비대 총사령부 고급부관인 박진경 중령이 도착하였다. 나는 최고참모의 방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의 후임 연대장으로 오늘 아침에 명령을 받고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어떤 밀명, 그것도 내가 염려하고 그토록 싫어했던 그런 밀명을 받고 왔구나 하는 섬뜩한 예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출세와 보신을 위해 양심에 가책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딘이 자신의 주장에 거의 설복되었다가 조병옥 한 사람의 말도 안 되는 주장에 넘어간 것처럼 진술한 것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억지 주장과 또 한 사람의 지나친 흥분 때문에 중요한 회의를 포기하고 일정을 앞당겨 서울로 돌아갔다? 미군정에게는 책임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이 작용한 것 같다. 딘은 강경 진압책을 심중에 정해놓고 왔던 것이 틀림없다. 김익렬이 내놓은 자료를 보고 그가 조병옥에게 화를 냈다면 이런 뜻이었을 것 같다. “일을 어떻게 처리하기에 이렇게 들통 나게 만든 거요!”

 

20년 전, 4-3에 관해 아무것도 모를 때 김익렬의 회고문을 보면서 그 회고의 정확성에 대한 아무런 의문도 떠올릴 수 없었다. 1948년 조선의 상황을 폭넓게 살펴본 이제는 그의 기록에도 나름대로 편향된 점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4월 28일 김달삼과의 회담이 사태의 확실한 해결책을 마련한 것이었다고 김익렬은 적었다. 최소한의 조건을 마련해주면 유격대가 투항할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합리적 근거를 가진 믿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유격대 입장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는 피난민 귀환이었다. 전투력도 없는 농민들이 도망해 왔으니 당장은 보호해주고 있지만 모두 다 산에 들어와 있으면 식량은 어디서 나나? 농민이 마을에서 농사짓고 있으면 유격대에게도 의지가 되지만 산에 들어와 있으면 짐이 될 뿐이었다. 물론 마을로 돌아가면 경찰의 닦달을 받겠지만, 그 닦달을 최소화하기 위해 ‘귀순 폭도’란 이름으로 돌아갈 길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그 단계에서 유격대 자체의 귀순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유격대의 본체는 4월 3일 새벽에 조직적으로 움직인 약 3백 명이었다. 한 달 동안 합류가 더 있었어도 아직 1천 명 선에는 이르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활동력을 가진 수백 명 유격대 중 남로당원은 일부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경찰과 우익단체의 횡포에 맞서려는 일반주민들이었다.

 

‘귀순 폭도’의 귀환이 순조로웠다면, 그래서 경찰과 우익단체의 횡포가 억제될 수 있다는 믿음을 얻을 수 있었다면, 남로당원 외의 일반주민들은 하산을 원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된다면 골수분자들만이 유격대로 남든지 섬 밖으로 탈출하든지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4월 28일 구억초교 회담 때 그런 전망이 확실히 세워져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익렬은 유격대에게 속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어린애도 아닌 그가 사태를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억초교 회담을 ‘신뢰 프로세스’의 출발점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전투 중지와 귀순 접수가 순조롭게 진행되면 평화 정착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그는 희망했을 것이다. 아마 활동력 있는 진짜 유격대의 귀순을 위해 일층 더 관용적인 정책을 관 쪽에서 끌어내려 했을 것이다.

 

회고록에 그가 구억초교 회담을 완전한 해결책이었던 것처럼 적은 것은 자신의 희망을 과장해서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평화를 바라보는 자기 입장과 대결을 바라보는 조병옥의 입장을 대비시키고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딘의 입장을 곁들이는 것은 바로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의 산뜻한 구도다. 김익렬의 회고는 표현에서 치우친 점이 더러 있지만 기본적인 문제 제기는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본다. 세부사항에서 더러 사실의 전달이 정확하지 못한 점도 의도적 조작이 아니라 극심한 분노로 인해 오래된 기억이 약간의 굴절을 겪은 정도로 이해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