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surrender of Japan, the prospect of a nation state looked obvious and natural to Koreans. The nation had been constituting a unified state for a full millennium until her annexation to the Japanese Empire in 1910, and now with the Japanese gone, they could see no reason the nation state should not be restored. Allied Powers too had promised Korea's independence in the Cairo Declaration of 1943. Rebuilding a nation state was the national cause for the Koreans.

Yet there was a group of Koreans who were not wholly committed to the cause. It was a group of wealthy landlords and ex-collaborators to the Japanese regime, who were worried about being persecuted or losing their advantages once a nation state is put in place. To avoid such a situation, some of them even would rather have an 'incomplete' nation state, which would spare them from the persecution and keep them in privileged positions.

People in general wanted to have the "pro-Japs" punished, but opinions varied as to the range and degree of the punishment. Communists usually demanded a more strict punishment to a wider range than most nationalists wanted. The nationalists took into consideration the need to utilize various assets of the wealthy, educated, and widely experienced group for the foundation of a new state.

On the part of the "pro-Japs", most were ready to adapt themselves to the new regime by giving up some of their advantages, if the nationalists should have their way. But there were also a small number of hardliners who thought they had too much to lose under a nationalist regime.

In the USSR-occupied North, the communists took harsh measures against a wide range of wealthy people, including those without conspicuous pro-Jap records. A good part of them fled to the South, many of them turning into hardliners in the course.

In the South, US Army leaders did not allow as much self-rule to Koreans as the Russians did in the North, taking over the ruling role of the Japanese. Thus they needed even more help of disloyal Koreans than the Japanese had needed. And "pro-Japs" were the most suitable material for "pro-Sams". The Americans' military government employed Koreans with pro-Jap records for its administration and police, and took measures not only to protect their wealth but even to increase it.

This situation gradually affected those well-off people who had at first supported the nationalists with a readiness to concede some of their advantages. They turned to KDP(Korean Democratic Party), which paved the way to the division of the country. Armed with money and policeforce, KDP had the power to silence nationalist oppositions and lead its followers into a collaboration with the Americans in much the same way they had had with the Japa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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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워싱턴 28日發 合同]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문이 28일 3국 수도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극동자문위원회를 폐지하고 11개국의 극동위원회를 설치하여 4개국 일본 관리 이사회를 설치한다.

 

2. 美, 英, 蘇 3국은 美, 英 양국 군대가 그 임무와 책임이 완료하는 대로 가급적 속히 중국으로부터 철퇴할 것이다.

 

3. 3국 외상은 중국이 통일된 민주주의적 국가로 되어 국내 항쟁을 정지한다는 필요성에 관하여 동의되었다.

 

4. 原子 에네르기는 평화산업 이외에 이용되지 않을 것을 보장하는 목적으로 원자력관리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다. 美, 英 양국이 루마니아, 불가리아 양국을 승인하는 평화조약 체결조건이 발표되었고 원자력관리위원회의 설립에 관해서는 1월의 국제연합총회에서 안전보장이사회의 각 성원국가와 이 이사회를 加한 관리위원회를 창립할 결의가 제의되었다.

 

5. 극동위원회는 蘇·英·美·華·和蘭·캐나다·濠洲·뉴질랜드·印度·필리핀의 11개국으로 구성된다. 동 위원회 성원국가의 요구가 있을 경우에는 맥아더 대장이 발한 지령을 검토한다. 또 위원회의 결정사항을 맥아더 대장에게 전달하는 것은 미국정부의 책임으로 되었다. 또 긴급을 요하는 경우는 미국은 잠정적 지령을 발할 수 있다.

 

6. 조선에 주재한 미소 양국군사령관은 2주간 이내에 회담을 개최, 양국의 공동위원회를 설치 조선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원조한다. 또 美, 英, 蘇, 華 4국에 의한 신탁통치제를 실시하는 동시에 조선임시정부를 수립케 하여 조선의 장래 독립에 備할 터인바 신탁통치 기간은 최고 5년으로 한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와 조선 각종 민주적 단체와 협력하여 동국의 정치적 경제적 발달을 촉진하고 독립에 기여하는 수단을 강구한다. 이 신탁통치제에 관한 외상이사회의 제안을 검토키 위하여 美, 蘇, 英, 華 각국정부에 회부된다.

 

7. 美, 蘇, 英 3국은 伊太利,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핀란드로 더불어 1946년 5월 1일까지 평화조약을 체결하기를 준비한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9일 )


모스크바 외상회담에서 한국 신탁통치안이 결정된다는 사실 자체는 군정청과 한국 사회 일각에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결정된 내용이 알려진 것은 12월 29일의 일이었다.

 


탁치 반대 운동은 28일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27일 저녁때 엄항섭이 대신한 김구의 방송 연설에는 신탁통치를 의식한 내용이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그 연설문이 미리 준비된 것이기는 했겠지만, 27일 중에 신탁통치 문제를 예민하게 의식할 만한 상황이 발생했다면 방송 내용을 조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26일 밤 이승만의 “신탁통치 반대” 방송 연설에 호응하는 움직임은 27일 중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래 기사를 보면 지방에서 28일 아침에 “국제적 보도”에 접하고 바로 반탁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대구 사람들이 접한 “국제적 보도”가 어떤 것이었을까? 27일자 <동아일보>에 “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란 바이라인을 달고 게재된 허위 기사였을 것 같다.


신탁통치라는 국제적 보도가 대구에 전하여진 것은 28일 아침이었다. 가로를 왕래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결단코 배척한다는 굳은 결의가 떠돌고 있다. 소란 중 경북인민위원회와 경북독립촉진회에서는 28일 긴급회의를 열고 연합국 측의 이 배신적 행위는 묵인할 수 없다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우리 민족의 자유획득을 위하여 싸우기로 결정하였다. (
<서울신문> 1945년 12월 31일)


당시의 신문 기사 중에는 위 기사처럼 뜻밖의 소식에 놀라 자연스러운 반응이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주요 정당들은 모스크바 회담 결정 내용이 금명간 확정적으로 전해질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인 단체도 있었다.

 


28일 오후 6시 기독교청년회관 강당에서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연맹이 주최가 된 약 42 단체 대표자 130여 명이 참석하여 신탁통치반대대회가 열리었다. 먼저 좌장으로 徐廷禧를 선출하여 곧 별항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一. 연합국에 임시정부 즉시 승인을 요함

一. 신탁통치 절대반대

一. 전국 군정청 관공리는 총 사직하라

一. 특히 38선 이북에서는 행정 사법 담당자 총 이탈하라

一. 전 국민 총파업. 단 신탄 미곡만 제외함(필요한 기간)

一. 극동 약소민족 해방운동 전개

一. 신탁통치 배격 국민대회 개최

一. 언론기관에서 우리의 운동에 협력치 않는 자는 우리 손으로 정간케 함

一. 신탁 배격 운동에 참가치 않는 자는 민족반역자로 규정함

一. 군정청에 운동방침을 통고함

一. 라디오 유흥방송 폐지의 건

단 우리 운동보고는 라디오를 통하여 방송을 요구함

 

◊ 하지중장에 드리는 성명서

각하와 및 각하와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의 조선독립을 위하여 바치신 성의와 열에 대하여서는 우리들은 충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그러나 조선의 전 민족이 희구하여 마지않는 그리고 각하 역시 바라고 애쓰신 크신 노력도 이제 수포로 돌아가려는 위기에 직면하였으니 우리는 愛敬하는 각하에게 피눈물을 뿌려 애통하는 바이다. 세계 약소민족 해방도 강국의 자의에 의하여 이처럼 농락되는 것임을 묵과할 것인가. 우리는 이제 각하가 조선 즉시 독립을 1월 이내에 실시하지 않으면 본직을 사퇴한다는 본국에의 通電을 알고 민족적인 감사를 올리며 동시에 우리가 생명과 피를 뿌려 가면서 신탁통치 배격의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결의를 피력하오니 각하도 최후의 노력을 다하여 대한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보다 더 정열을 不惜하시기를 삼가 바라는 바이다.

大韓民國 27년 12월 28일 大韓獨立促成全國靑年總聯盟 外 全國 各 團體 代表者 一同 (<서울신문> 1945년 12월 30일)


결의 사항 중 ‘협력치 않는 자’와 ‘참가치 않는 자’에 대한 적개심에서 극우 냄새가 난다. 그리고 성명서에서는 하지에게 “각하 역시 바라고 애쓰신 크신 노력” 이야기를 한다. 미 국무성의 신탁통치안을 격퇴하기 위해 이승만에게 독촉을 빨리 만들라고 독촉하던 군정청의 획책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조선 즉시 독립을 1월 이내에 실시하지 않으면 본직을 사퇴한다는 본국에의 通電”까지 알고 있다. 실제로 하지는 이듬해 1월 28일 사의를 표명했다. 1월 24일 타스통신이 모스크바 회담의 실제 진행 과정을 밝혀 12월 27일의 <동아일보> 기사의 거짓을 밝힌 상황에 당황한 결과로 이해되는 일이지만, 12월 28일 이전에 사퇴 의지를 표명한 적이 있다는 얘기는 이 기사에서 처음 봤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모스크바 회담을 대하는 하지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될 일이다.


아무튼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을 앞세운 이 움직임은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성명서에 담긴 정보 수준으로 보거나, 결의 사항에 담긴 폭력성과(협조하지 않는 언론기관은 자기네 손으로 정간시키겠다고 했다.) 정략성으로(동조하지 않는 자는 민족반역자로 규정한다고 했다.) 보거나, 남들보다 앞서서 “신탁통치 반대”를 외치던 이승만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임정은 28일 오후 4시에 긴급 국무회의를 열었다. 누군가가 모스크바 회담의 확실한 결정 내용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긴급회의를 열었을 텐데, 결의 내용은 대개 원론적인 수준으로, 임정 자체의 적극적 대응 방침은 보이지 않는다.


임시정부에서는 지난 28일 오후에 경교동 숙사에서 긴급히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金九 주석, 金奎植 부주석 이하 전원이 참집하여 신탁제에 대하여 우리 민족이 대처하는 태도와 방침을 토의하였는데 긴급 안건으로써 안건 4항을 결의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본 정부는 각층 각파 급 교회 전 국민으로 하여금 신탁제에 대하여 철저히 반대하고 불합작 운동을 단행할 것

 

2. 즉시로 재경 각 정치단체를 소집하여 본정부의 태도를 표명하고 前途 政策에 대하여 절실히 동의 합작을 요하며 각 신문기자도 열석케 할 것

 

3. 신탁제도에 대하여 中, 美, 蘇, 英 4국에 대하여 반대하는 전문을 급전으로 발송할 것

 

4. 즉시로 미소 군정당국에 향하여 질문하고 우리의 태도를 표명할 것

 

大韓民國 27년 12월 28일 大韓民國臨時政府國務委員會 主席 金九 外務部長 趙素昻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그런데 위 결의 내용 중 (2)항이 즉각 시행되어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반탁운동의 큰 틀이 결정되었다. “각 정당(2인), 각 종교단체(2인), 각 언론기관 대표자를 초청하여 비상대책회의를 동일 하오 8시 반부터 개최, 深更에 이르기까지 백척간두에 서있는 국운을 구출하고자 白熱的 논의를 거듭한 결과” 극한투쟁 노선을 결정한 것이다. ‘비상대책회의’의 결정 내용은 이렇게 보도되었다.

 


◊ 聲明書

우리는 피로써 건립한 독립국과 정부가 이미 존재하였음을 다시 선언한다. 5천년의 주권과 3천만의 자유를 전취하기 위하여는 자기의 정치활동을 옹호하고 외래의 탁치세력을 배격함에 있다. 우리의 혁혁한 혁명을 완성하자면 민족이 일치로써 최후까지 분투할 뿐이다. 일어나자 동포여!

 

◊ 결의문

1. 신탁통치를 반대하기 위하여 기구를 창립하되 명칭은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라 칭함

2.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는 각 정당 각 종교 각 사회단체 기타 유지인사로 조직함

3.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의 기관은 中央 郡面에 從으로 分設할 것

4.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는 국무위원회의 지도를 受할 것

5.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에는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지도하는 위원 7인을 선출하여 해외에 대한 지도위원회를 설치함

6. 재정은 지원자의 희망과 정부의 보조로써 충용할 것

7. 탁치반대총동원위원회의 章程委員 9인을 金九, 趙素昻, 金若山, 趙擎韓, 柳林, 金奎植, 申翼熙, 金朋濬, 嚴恒燮, 崔東旿 제씨로 선출하여 기초를 제출케 할 것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김구를 중심으로 한 반탁운동이 군정청에 대항한 측면이 많이 부각되어 왔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보며 실제로는 인공에 대항한 측면이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반탁운동을 명분으로 만들어지는 총동원위원회가 지역 차원에서 인민위원회를 대치하는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맨 위에 인용한 대구 지역 기사처럼 인민의 탁치 반대 의사는 인민위원회를 통해 표출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반탁이 정녕 최고의 목적이라면 28일 밤 임정 중심의 비상대책회의에서 인공과 협력해 인민위원회를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없었을까? 그 동안 임정과 인공 사이에 불편한 관계가 있기는 했지만, 민족운동 고양이라는 거대한 과제가 관계 재정립의 기회를 던져주고 있었다. 임정이 군정청과 맞설 요량이라면 인공과의 협력이 전략적으로도 절대 바람직한 길이었다.


인공 쪽에서는 모스크바 회담 결정에 대한 반응이 29일에 처음으로 나왔다. 역시 원론적이고 수동적인 범위에 머물러 있는 반응이다. 인공 담화문을 보면 임정이 손을 내밀 경우 적극 호응했으리라는 인상을 받는다.

 

“조선 신탁통치가 3국외상회의에서 결정되었다는 보도를 이제 막 읽고 너무나 의외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의 진위는 아직 공식 발표를 기다려 보아야 할 것이고 또 공식 발표가 있은 후에 우리 위원회로도 긴급대책을 세울 터이다. 그러므로 나는 개인적 입장에서 말하겠다. 조선의 완전자주독립이라는 것은 우리 인민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이다. 따라서 어떠한 의미에서라도 조선의 자주독립이 침해를 받는다면 우리는 과거 일본제국주의에 항쟁하던 이상으로 단호히 싸워야 할 것이다. 또 우리 조선은 어떠한 이유로도 신탁통치를 실시할 근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당한 노선에서 더욱 시급히 민족의 총력을 결집하여 진보적 민주주의의 자주국가 달성에 단호 매진할 뿐이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


임정을 민족의 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인공을 민족의 육체를 대표하는 존재로 볼 수 있다. 두 존재의 원만한 협력과 결합이 민족의 장래를 가장 잘 풀어가는 길이었다. 1945년 12월 28일, 해방 후 처음으로 민족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할 기회가 왔을 때 임정은 인공과 인민위원회를 무시했을 뿐 아니라 반탁운동의 에너지를 이용해 지역 차원에서 인민위원회를 대치할 조직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Posted by 문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 독립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 가고 있다. 즉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삼국 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 (<동아일보> 1945. 12. 27일자)


< 동아일보>가 아직도 살아있는 신문이라면 해마다 12월 27일에는 1945년 12월 27일에 내보낸 이 기사에 대한 사과문과 반성문을 실어야 한다. 언론이 사회에 해악을 끼친 사례로 한국 언론사에서 가장 극악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용욱의 조사에 의하면 이 기사는 조작된 것이었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53-68쪽) 모스크바 회담 결정 내용이 공식 발표된 것은 한국 시간으로 28일 오후 6시였고, 정확한 결정문은 그 이튿날 군정청에 도착했다. 그보다 이틀 앞서 나온 이 기사에는 신탁통치에 관한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뒤집어져 있다. 카이로선언 이래 모스크바 회담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한국에 대해 긴 기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해 왔고, 소련은 가급적 신탁통치 기간을 짧게 하고 방법에 있어서도 한국인의 자결권을 최대한 보장할 것을 주장해 왔다.


기사를 조작한 목적은 분명하다. 독립을 간절히 원하는 한국 인민은 신탁통치라는 말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1905~1910년의 보호조약 체제를 신탁통치의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신탁통치를 소련이 주장했다는 거짓말은 신탁통치에 대한 반감을 소련에 대한 반감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기사를 조작한 자는 누구였나? “워싱턴 25일발 합동”이라는 바이라인 내용이 사실이라면 합동통신사로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봐야 할 텐데, 워싱턴의 어느 매체에 누가 쓴 글인지도 밝혀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한민당 대표 송진우가 사장으로 있던 동아일보의 조작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가 주범이란 사실은 증거가 분명한데, 범죄의 성격으로 보아 단독범행은 아니다. 공범 내지 공모자를 밝히는 것은 명확한 증거가 없으므로 쉽지 않은 일이다. 정용욱은 <태평양성조기>지 12월 27일자에 같은 기사가 실린 것으로 보아 맥아더 사령부 개입의 개연성을 제시했고, 이 허위 기사의 유포가 방치된 사실로 보아 군정청의 작용을 시사했다. 완벽한 실증적 증거가 없는 한도 내에서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개연성으로 보인다.


국제관리 형태의 신탁통치를 추구하는 미 국무성 정책을 뒤집기 위해 맥아더 사령부, 군정청, 이승만, 한민당의 제 세력이 협력해 온 사실이 정병준의 연구로 밝혀졌다. (<우남 이승만 연구> 427-508쪽) 정용욱의 연구를 통해 이 허위 기사에도 같은 맥락에서 맥아더 사령부와 군정청, 그리고 한민당 세력이 작용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승만 역시 이 음모에 빠지지 않은 사실이 그 전날 밤의 방송 내용에 나타난다.


26일夜 李承晩의 방송 요지는 다음과 같다. “워싱턴에서 오는 통신에 의하면 아직도 조선의 신탁통치안을 주창하는 사람이 있다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우리 조선은 이 안을 거부하고 완전독립 이외에는 아무것도 용인할 수 없음을 알리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당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즉 트루먼 대통령, 번즈 국무장관, 연합국사령관 맥아더 대장, 하지 중장은 다 조선 독립을 찬동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결심을 무시하고 신탁관리를 강요하는 정부가 있다면 우리 3천만민족은 차라리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을지언정 이를 용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적의 교묘한 선전으로 우리 한민족은 외국세력이 강요하는 것에는 무엇이나 복종하는 민족이라는 선입관념을 타민족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릇된 선입관으로 말미암아 워싱턴과 모스크바에서는 민족으로서의 우리의 명예를 대단히 손상하는 정책을 시행하자는 사람들이 있다 합니다. (...)” (<동아일보> 1945년 12월 28일자)


소련 뒤집어씌우기는 아직 하지 않고 있지만, 트루먼 대통령과 번즈 장관이 “조선 독립을 찬동”한다는 것은 이튿날 허위 기사에서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을 지어낸 것과 같은 맥락이다. 27일자 기사의 허구성은 몇 주일이 지난 뒤 타스통신의 해명 보도로 밝혀지게 되는데, 결국 밝혀지지 않을 수 없는 거짓말은 얼굴 없는 허위 기사에서나 할 수 있지, 이승만이 이름 밝히고 하는 방송에서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 편이고 소련은 우리의 적”이라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는 상통하는 것이다.

 

이 허위 기사로 촉발된 극한적 반탁운동이 올바른 독립, 민족국가 수립의 길을 망친 가장 결정적 계기였다. 매우 중요한 문제이므로 최대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검토할 중요한 사항의 하나가 반탁운동에서 김구의 역할이다. 김구가 반탁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맡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반탁운동을 반공-반소 운동으로 돌리려는 음모에서는 김구의 역할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위 기사가 나간 그 날 저녁 김구는 엄항섭을 통해 “3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란 제목의 방송 연설을 내보냈다. 귀국 후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시국에 임하는 자세를 모처럼 명확히 밝힌 것이다.


나의 친애하는 3천만 父老姉妹兄弟여러분 내가 입국한지 벌써 1朔이 넘었습니다. 나는 서울에 있어서는 직접 간접으로 나의 의사를 표시한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방에 계신 여러분에게 말씀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녁 방송은 전혀 지방에 계신 여러분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

 

1. 완전히 독립자주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합시다. 우리는 완전히 독립자주하는 또는 남북이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自利的 입장을 버리고 오직 국가지상 민족지상 독립제일의 길로 매진합시다. 네 黨 내 黨도 국가가 있은 뒤에야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존재할 여지도 있는 것입니다.

 

2.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을 건설합시다. 국민 각개의 균등한 생활을 확보하지 못하면 신민주국을 건설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 그 다음에는 不少한 협잡정객과 또 친일분자 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하여야겠습니다. 그것은 대의명분상으로만 그럴 것이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 그들이 통일을 방해하고 있는 사실이 다대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도라도 죄악이 만만하여 용서할 수 없는 불량분자만은 엄징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3. 세계적 대 가정을 건립합시다.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고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려면 단결한 세계의 대 가정을 조속히 건립해야 합니다. (...) 우리는 우리나라에 대한 우방의 투자를 환영합니다. 각 방면에 있어서 기술적으로 원조하여 주는 것을 간망합니다. 또 우리 조국의 신 건설을 위하여 우리에게 차관하여 주기를 고대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로 우방 단독적이나 공동적으로 우리를 통치하는 것을 환영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한인은 마땅히 한인의 정부가 통치하여야 할 것입니다.

 

4. 강고한 국방군을 건립합시다. 우리는 강고한 국방군을 요합니다. 우리 국가의 질서와 세계의 평화를 지지하기 위하여 강고한 국방군을 요합니다. 이것은 과거의 망국사와 또는 세계 제2차 대전에서 우리에게 주는 바 큰 교훈이니 多言을 贅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자)


연설 끝에 붙인 4개항 제안에서 눈에 띄는 점이 몇 가지 있다. (1)항에서 건국을 우선 이룰 때까지 당파적 입장을 유보하자는 것은 중도파의 일반적 논점이다. 그리고 (2)항에서는 삼균주의 수준의 사회주의 원리 적용을 제안했다. 이 두 가지 제안은 삼균주의의 창시자 조소앙도 참여한 특별정치회의 주장의 핵심인데, 임정 ‘비주류’가 주도한 특별정치회의를 적어도 원론적 차원에서는 김구가 지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2)항 뒷부분의 ‘협잡정객-친일분자-민족반역자’ 숙청 제안이다. 이 시점에서 김구는 “실제에 있어서 통일을 방해하는” 자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일파의 실제적 위협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반공-반소’에 극단적으로 매달릴 수 없는 조건이다.


이 연설에서 김구는 중도적 입장의 꾸준한 노력을 내다보고 있었다. 바로 며칠 후 ‘반탁’을 명분으로 임정의 통치권을 주장하고 나설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반공-반소를 주장하고 나설 기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그 날 <동아일보>의 허위 기사를 만들어낸 사람이 아니라 그 기사에 속은 사람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