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5월 1일 한낮에 제주읍내에서 남쪽으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오라리 연미마을로 30명가량의 청년들이 들어와 십여 채 민가를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피해만으로는 4-3사태 중 일어난 수많은 참혹한 사건 가운데 두드러질 것 없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제민일보 4-3취재반은 이 사건을 매우 중시하고 세밀히 취재해서 <4-3은 말한다 2>(전예원 펴냄) 제5장 “오라리사건의 진상”(147-176쪽)에 상세히 서술했다. 경찰 측의 소행인 이 사건을 ‘산사람’들 짓으로 선전함으로써 무차별 진압작전의 출발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건의 배경부터 살펴본다. 주민 3천여 명의 큰 마을인 오라리에는 운동가들도 여럿 있어서 해방 후 건준 운동이 활발했으나 마을 분위기를 크게 바꾼 것은 1947년 3-1사건이었다. 발포사건 희생자 6명 중 2명이 이 마을 사람이었는데, 하나는 초등학생이었고 하나는 신체장애자(곱사등이)였다. 시위대도 아닌 희생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항의가 거셌고, 그 결과 많은 마을 청년들이 검거되면서 미군정과 경찰에 대한 반감이 짙어졌다.

 

4-3사건 발발 후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인명피해사건은 제주에서 첫 경찰관 가족 살해사건이기도 했다. 4월 11일 새벽에 산사람들이 쳐들어와 58세의 경찰관 부친을 죽이고 집을 불 지른 사건이다.

 

두 번째 인명피해는 그 열흘 후였다. 30대 마을청년 두 사람이 들판에 나갔다가 경찰대에 붙잡혔는데, 경찰은 이들을 ‘폭도 연락병’으로 간주하고 이튿날까지 끌고 다니다가 어느 굴속에 들어가게 하고 쏘아죽인 다음 돌아갔다. 확인사살이 없었던 덕분에 한 사람이 살아서 마을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알렸다.

 

이틀 후인 23일 좌익 활동을 하던 28세 청년 김태중이 집에서 경찰에 붙잡혀 연행되었는데, 사흘 후 인근 들판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4월 29-30일의 다음 사건은 김태중의 피살에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29일에는 마을 대한청년단(대청) 단장과 부단장이 산으로 납치당했고 30일에는 대청단원 두 사람의 아내들이 납치당했다. 김태중의 체포 후 대청단원들의 밀고설이 나돌았다고 한다.

 

아낙네 두 사람이 납치되어 가는 중 경찰이 출동했는데 산사람들의 혼란을 틈타 한 사람이 탈출했고, 남은 한 사람은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 죽은 강 여인의 장례가 이튿날 아침 행해졌고 장례가 끝난 후 오라리 방화사건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인 이날 오전 9시께 오라리마을 근처인 ‘동산물’에서는 조촐한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었다. 그 전날 ‘민오름’에서 살해된 대청단원 부인인 강공부 여인의 장례식이었다. 그 시신은 경찰트럭에 실린 채 하룻밤을 보낸 뒤 장례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 경찰트럭 편으로 경비차 나온 경찰관 3~4명 이외에도 서청-대청단원 30명가량이 함께 올라왔다. 마을사람들은 이 장례 현장을 외면, 얼씬거리지 않았다. 다만 평소 고인 가족과 친분이 있었던 한 집안에서 4명의 식구가 나와 매장 일을 도왔을 뿐이다.

 

매장은 두 시간여 만에 끝났다. 장례가 끝나자 올라올 때와는 달리 트럭은 경찰관들만 태운 채 현장을 떠났고 30명가량의 서청-대청단원들은 그대로 남겨졌다. 어느 새 그 청년들은 손에 몽둥이 등을 쥐고 있었다. 이들 청년단이 오라리마을에 진입하면서 민가들이 하나둘 불타기 시작했다. 처음 불질러진 민가는 유격대에 가담한 연미마을 ‘서동네’ 허두경(당시 40세)의 집이었다. (...)

 

당시 방화사건이 서청-대청 등 우익청년단원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주장은 비단 ‘반도’들에 의해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 사건을 중시한 9연대에서는 협상당사자였던 김익렬 연대장과 이윤락 정보주임 등이 직접 현장조사, 그 방화가 서청-대청 단원에 의해 자행됐다는 결론을 내리고 미군정에 보고했지만 미군정은 이를 묵살하고 “폭도들이 했다”는 경찰 측의 보고를 수용하였다. 그 후의 흐름을 보면 미군정은 이 사건을 계기로 김 연대장이 추구해온 ‘화평’정책을 불신하고 ‘토벌’정책으로 선회하는 한 단서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4-3은 말한다 2> 155-156쪽)

 

4-3사건은 기본적으로 제주인과 외부와의 충돌이었다. 김익렬은 제주 주둔 제9연대장으로서 외부세력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외부세력의 문제점을 지적한 그의 증언이 특히 큰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그의 경력부터 살펴본다.

 

1921년생의 김익렬은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에서 일본군 소위로 임관했다가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마치고 1946년 1월 조선경비대 소위로 임관했다. 1947년 9월 소령으로 9연대 부연대장에 부임했다가 1948년 2월 중령으로 승진, 연대장을 맡았다. 4-3 발생 후 무력진압에 반대하고 선무작전을 주장하다가 5월 6일 해임되었다. 그 후 군인 경력을 계속해서 국방대학원장을 끝으로 1969년 중장 예편했다. 4-3사건 회고록 “4-3의 진실”을 써놓고 사망(1988년) 후 공개하게 하여 1994년 출간된 <4-3은 말한다 2>에 수록되었다.

 

4-3사건이나 반년 후의 여순사건의 실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군대(경비대)의 위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경찰보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서 군대의 통념이 당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안진은 “미군정기 국가기구의 형성과 성격”에서 군정기의 경찰과 경비대를 이렇게 비교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3> 194-195쪽)

 

경비대의 무장상태와 교육 및 훈련은 군정경찰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듯이 낮은 수준이었다. 경비대는 구 일본군이 사용하던 99식, 38식 소총을 기본장비로 하였으며 훈련도 총검술과 폭동진압법 정도에 그쳤다. 군정시기의 경비대는 군정경찰에 비해 병력규모가 현저히 작았으며 장비수준 또한 빈약하였는데 그것은 미군정이 진주 직후부터 남한의 핵심적인 억압기구로서 군정경찰을 육성한 데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김득중은 경찰과 경비대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군경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경비대는 무기지급, 계급장, 복장, 급식문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경찰에 비해 열악한 처지에 있었고, 무엇보다도 경찰예비대라는 위상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경비대 간부 대부분은 일본군이나 관동군 출신이어서 군 우위라는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오히려 경찰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이유가 겹쳐져 장교와 사병들은 경찰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반면에 경찰 측에서는 경비대를 경찰 조직의 하부 기관쯤으로 보아 무시했고, 사상적으로는 불순하고 향토적 색채를 띠는 오합지졸로 인식했다. 한편 조선경비대 사병들은 과거 ‘일제의 주구’로서 활동했던 경찰들이 자신들보다 높은 대우를 받으며 자신들을 멸시하는 데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 경찰은 수뇌부나 말단이나 거의 대부분이 친일 경력자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일제시기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고, 친일잔재 청산에 저항해야만 하는 공동의 이해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 같은 공동의 기반 하에 경찰은 미군정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조직의 내적인 동질성과 응집력을 더욱 높여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조선경비대는 좌익 인물들이 쉽게 입대할 수 있었다. 입대한 뒤에도 일사불란한 조직을 만들기 위한 사상적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경비대 장교들 많은 수는 친일 경력자나 반공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남로당의 좌익 세포로 활동하는 인물도 상당히 포진되어 있었다.

 

조선경비대 일부 ‘장교’들은 군이 경찰에 압도적 지위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군국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과 갈등을 빚었다면, 좌익 장교들과 하층 농촌 출신인 사병들은 경찰의 친일적 행각과 미군정 정책의 하수인과 반공 전선의 선봉으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빨갱이의 탄생>(선인 펴냄) 113-115쪽)

 

김익렬이 회고하는 제9연대의 상황도 이런 틀 안에 있었다. 경비대는 각도에 1개 연대 편성을 목표로 하고 있어서 제주도의 도(道) 승격에 따라 만들어진 제9연대가 막내였다.

 

연대 군사고문관은 군정장관 맨스필드 중령이 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민정에 바쁘다보니, 1-2개월에 1회씩 소위 혹은 중위를 연대에 보내어 연대장과 상의할 정도였으므로 제9연대는 미군정 고문관도 없는 형편이었다.

 

연대 장비는 총기는 구 일본군의 99소총과 대검뿐, 그나마 탄환은 1발도 보유하지 못했다. 물론 기관총이나 미군무기인 M-1이나 카빈총은 1정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반면 당시 경찰은 경비대보다 월등하게 우월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전원이 카빈소총과 구 일본군의 92식 중기관총, 미군 수송 장비에다 각종 미군 신식 무전기와 기타 통신장비 등 상당한 기동력과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미군정은 국내치안을 전적으로 경찰에 맡겼으며 일체의 전투장비 보급도 경찰에 우선하였고 미군정에 대한 충성심에서도 경비대보다 경찰을 신인(信認)하였다. 경비대는 비상시에 경찰의 보조역할을 하다가 장차 독립되면 국군의 모체가 될, 그러니까 평시에는 놀고먹는 말하자면 미군정의 천덕꾸러기며 객원 노릇을 하였다. 그러고 보니 자연 경비대의 미군정 하의 존재 위치는 빛을 못 보았으며 따라서 보급지원도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제9연대의 기타 장비를 보더라도 99식 소총과 대검 이외에 수송 장비는 1과 1/2톤 차량 1대, 3/4톤 1대, 지프 1대가 전 부대의 보급과 연락용 전부였다. 무전기는 물론 없었고 대내(隊內) 행정용으로 몇 대의 구식 전화기가 있을 뿐이었다. 연대와 상부와의 연락은 전근대적인 장교전령과 일반전령이 맡아 비밀명령과 문서를 전달하였고, 일반 행정문서는 민간우편과 전화 전보로 연락되었다. 긴급을 요하는 연락은 연대의 1과 1/2톤, 3/4톤 차량, 지프 등 3대가 보급 전령 일체를 행하는데, 이 3대의 차량마저 노후와 부속품 부족으로 1주일간 수리해서 가동하면 2-3일 쓰고 고장이었다. 부속품도 부산, 서울 등지에 가서 구입하는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부대가 별다른 고통을 느끼는 일도 없었다. 그 이유는 수개월이 가도 급한 연락사항이나 중요한 문제도 없었고, 하등의 긴급을 요하는 일이 없으므로 순조롭고 평온하기만 하였다. (<4-3은 말한다 2> 276-277쪽)

 

이런 상황에서 터진 4-3사건 초기에 경비대는 무풍지대로 남아있었다. 무력을 갖추지 못한 경비대 자체도 나설 엄두를 못 냈고, 군정당국도 경찰에만 의존했으며, 제주 주민들은 경비대를 불필요하게 자극하려 하지 않았다. 연대에서 긴급전령을 경비대 총사령부로 보냈는데, 총사령부에서도 이 사건은 경찰 책임의 치안상황이니 경비대가 명령 없이 나서지 말라는 지시를 보냈다고 한다. 연대에서는 제주 출신 사병들을 휴가 형식으로 내보내 정보를 수집하며 상황 판단에 주력했다고 한다. (같은 책 297-300쪽)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황이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확대-악화를 거듭하자 군정당국은 극한적 진압방법인 ‘초토작전’으로 기울어지며 경비대를 작전의 주체로 끌어들인다. 김익렬은 그 동안의 관찰로 사태 악화의 이유가 경찰의 잔인한 진압방법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적대적 진압작전보다 적극적 선무(宣撫)작전을 주장했다. 새로 부임한 연대 군사고문관 드루스 대위와 민정장관 맨스필드 중령의 승인을 받아 김익렬은 화평공작을 펼 기회를 얻었다.

 

김익렬은 제주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문안을 작성, 전단을 작성해 경비행기로 각지의 중산간마을에 뿌렸다. 경비대는 제주민과 적대할 뜻이 없으며, 귀순하면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유격대 지도자와 회담을 갖고 싶다는 뜻도 담았는데, 이에 대한 응답이 부대 근처의 벽보로 나타났다. 연대장이 직접 나와야 하고, 수행인이 2인 이상이면 안 되며, 장소는 유격대 지역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벽보를 실마리로 하여 경비대 가까운 중산간마을에 있는 구억국민학교에서 4월 28일에 회담이 열렸다. 27세의 연대장이 마주한 상대는 25세의 김달삼이었다. 본명이 이승진인 김달삼은 도쿄 주오대학을 다니다가 학병으로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왔고, 대정중학 교사로 있다가 남로당 제주도당책과 군사부 책임자를 맡고 있던 인물이었다.

 

김익렬은 김달삼의 요구가 무리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연설 내용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나 표현은 거의 없고 제주도에서 민족반역자와 일제경찰, 서북청년단을 축출하고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선량한 관리와 경찰관으로 행정을 하여 주면 순종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나는 폭도들의 요구조건이 대단히 단순하고 까다로운 조건이 없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십중팔구 폭도들이 내놓으리라고 예측하였던, 경찰이나 서북청년들 중 살인-고문-강간-약탈한 자를 인도하거나 처형하라는 요구조건은 한 마디도 없었다. 나는 이 요구조건이 상당히 정당하고, 폭동을 신속하게 진압하기 위한 대가치고는 과히 비싸지 않은 요구라고 생각하였다. (같은 책 324쪽)

 

김익렬의 평화 노력을 깎아내리려는 입장에서 김달삼의 온건한 요구가 진압세력을 혼란시키기 위한 전술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고 진심을 담은 것이 아니라는 의심이 있다. 사람 뱃속을 들어가 보지 않고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김달삼 등 유격대 지도부가 투쟁 확대를 위해 인민의 희생을 더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제주도의 좌익 활동이 비교적 활발했던 것은 사상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우익 조직이 약했기 때문이다. 다른 지방과 달리 제주에서는 현지인과 외지인의 차이가 크게 인식되었다. 제주의 좌익 인사들은 투쟁 확대를 위해 현지인을 희생시키는 전술-전략에는 동의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김익렬은 김달삼의 요구조건을 대체로 받아들이고, 폭도의 면책 요구만을 거부했다. 대신 일본 등지로의 피신에 최대한 협력한다는 약속으로 상대방을 만족시켜 합의를 이뤘다. 연락과 토론을 위해 전투 완전 중지까지 72시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5일 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간주한다는 조건의 휴전협정이었다.

 

김익렬의 협상은 맨스필드 군정장관의 승인을 받아 실시에 들어갔다. 전 경찰은 지서만 지키고 외부에서의 행동을 일체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유격대 활동도 차츰 잦아들었으며, 귀순자 캠프가 설치되어 귀순도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김익렬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귀순이 시작되자 여러 가지 유언비어가 유포되고 있었다. 군정장관 맨스필드에게 들어간 악선전 중의 하나는 연대장이 폭도들에게 기만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폭도들이 귀순을 가장하고 시간적 여유를 얻어서 전열을 재정비한 후 대대적인 기습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정식보고서로 작성해 군정청에 제출했다. 반면에 제주읍과 각 부락에는 “연대장이 폭도를 기만하여 폭도 전원을 귀순시켜 놓고 일시에 몰살하려 한다”는 낭설이 돌고 있었다.

 

맨스필드 대령은 이 모든 것들을 경찰들에 의한 귀순 방해공작으로 판단하고 나에게 “경찰의 방해공작이 시작되었으니 주의하라.”고 지시하고 특히 나의 신변안전에 유념하라는 주의를 주었다. 나는 깜짝 놀라 경찰의 방해공작이라니 도대체 무슨 의미이며 이유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맨스필드 대령은 자기도 확실히 모른다며 대략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내용의 요점은 수일 내에 귀순작업이 종료되어 폭도진압이 끝나게 되면 경찰과 경무부장 조병옥 씨와 그 추종자들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약 1개월 전 호언장담하고 제주도폭동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공안국장 김정호 씨가 진두지휘하여 토벌을 시작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폭도진압은 고사하고 경찰은 막대한 피해만 입었다.

 

(...) 사정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수삼 일에 전도에 걸쳐 전투가 종식되고 평온을 되찾았으니 폭동은 사실상 진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자잘한 뒤처리만 남았으니 조병옥 씨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제주도 현지 경찰의 허위보고만 듣다가 대세의 판단을 그르쳤고 그 진상을 정확히 파악하였을 적엔 때는 이미 늦어 버렸던 것이다. 폭동이 신속하게 진압되어 뒤처리 문제로 들어가 폭동발생의 원인이 밝혀지고 초토작전의 진상이 탄로되면 그 자신이 죄인의 입장에 처하여지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조병옥 씨 일파는 자기들의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서는 화평-귀순공작을 방해하고 폭동을 재연시켜 자기들이 주장해 온 공산폭동으로 조작하는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방해공작을 극비리에 제주도 현지 경찰에 내렸던 것이 아닌가 한다. (같은 책 333-334쪽)

 

당사자 한 사람의 진술에 집중해서 의존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김익렬의 증언은 상식적으로 추정되는 당시 제주도 상황과 부합한다. 그리고 그가 20년 후 중장으로 예편할 때까지의 군 경력이나, 다시 20년 후 죽은 뒤 자기 증언이 공개되도록 한 조치를 보면 신뢰도가 높은 자료에 틀림없다. 5월 1일의 오라리 방화사건 후 사태의 전환 과정을 다음 일기에서 살펴보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