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를 정치에 처음 도입한 것은 조지 갤럽, 1936년 미국에서였다. 초창기 여론조사 중 재미있는 것 하나가 홉스봄, <The Age of Extremes> 143쪽에 소개되어 있다. 1939년 1월에 실시된 한 조사에서 소련과 독일이 전쟁을 벌일 경우 어느 쪽이 이기기 바라냐는 질문을 받은 미국인 중 83퍼센트가 소련을, 17퍼센트가 독일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안 지나 미국과 소련이 극한적 대립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까지 생각지 않더라도 기묘하게 생각되는 여론이다. 독일은 파시즘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자본주의 국가인데, 미국은 1919-20년에 ‘빨갱이 소동(Red Scare)’을 겪은 나라인데, 소련은 미국이 1933년에야 승인한 나라인데, 어떻게 미국 여론이 압도적으로 소련 편일 수 있었을까? 전 세계에 대한 소련의 ‘적화 야욕’은 냉전의 핵심 요소가 되는 것인데, 오늘은 그 배경을 한 차례 살펴보겠다.
자본주의 세계의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은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소련이 1918-20년간 내전을 겪는 동안 서방국들은 은근히 소련 붕괴를 바라며 반란군(백군파)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이 내전을 극복하고 안정기에 접어들자 유럽국들은 1925년까지 모두 소련을 승인했다. 유독 미국만이 1933년까지 버티다가 루스벨트 집권 뒤에야 소련을 승인했고, 1945년까지 루스벨트가 대통령직에 있는 동안만 소련과 우호적(최소한 비적대적) 관계를 유지했다.
1939년 시점에서는 미국만이 아니라 서유럽에서도 파시즘의 위협이 공산주의의 위협보다 더 심각하게 인식되고 있었다. 1938년 9월 뮌헨협정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의 야욕에 굴복하자 파시즘 반대자들은 유일하게 독일에 맞서고 있던 소련의 역할에 큰 기대를 걸기도 했다. 이듬해 8월의 독-소 협정에 그들은 엄청난 실망을 느꼈다.
서방국들에 대한 공산주의의 위협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경제가 파괴된 배경 위에서 심각하게 느껴진 것이었다. 열악한 경제상황 속에서 공산혁명의 유혹이 대중의 호응을 받을 것을 두려워한 것이었다. 그리고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즘은 혁명의 결과보다 혁명의 과정과 방법에 대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볼셰비즘의 핵심은 전위정당으로서의 공산당이었다. 직업적 혁명가로 구성되는 이 정예조직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강력한 정치조직이었다. 조직의 구속력과 구성원의 헌신도가 종래의 정당과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레닌이 1902년부터 이런 전위정당 조직을 호소한 것은 러시아에 공산혁명을 위한 여건이 미비해서 강력한 지도체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917년 초 수천 명에 불과하던 당원을 몇 달 동안 25만 명까지 늘린 것이 10월혁명의 발판이 되었다. (기초 사실은 다른 표시가 없는 경우 홉스봄의 위 책 54-84쪽 “The World Revolution”과 372-400쪽 “Real Socialism”을 참고한 것임.)
이 전위정당의 정예성이 이후 코민테른이 지도하는 세계 공산주의운동의 표준이 되었다. 러시아처럼 척박한 조건 위에서도 혁명을 관철시킨 이 조직적 운동방법이 보다 산업화된 사회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빨갱이소동은 유럽국들에 비해 사회주의에 대한 대응 기제가 미비해서 이 공포심이 더욱 절실했던 상황을 보여준다.
마르크스(1818-1883)도 말년에 러시아가 사회주의 혁명의 뇌관 역할을 할 가능성을 언급한 일이 있는데, 산업화와 교육 수준이 낮은 러시아가 혁명의 출발점은 될지언정 혁명의 본산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레닌을 위시한 러시아 혁명가들도 공유하고 있었다. 10월혁명 이후에도 그들은 혁명이 러시아에서 완결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세계혁명’ 전략에 노력을 기울였다. 러시아보다 혁명의 여건을 잘 갖춘 사회로 혁명의 물결을 밀어 보내는 것이 혁명의 진정한 성공을 위한 길로 본 것이었다. 1919년 3월 코민테른 결성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1924년 1월 레닌이 죽을 때까지 코민테른은 세계혁명을 위한 혁명 수출 노선을 지켰다. 이 시기의 코민테른은 각국 공산당을 사회주의 확산의 기지가 아니라 소련 공산당과 같은 폐쇄적 투쟁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세계혁명의 진행에 대한 믿음이 뒷받침한 노선이었다.
1924년 이후로는 세계혁명보다 혁명기지 소련의 수호가 코민테른의 우선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 조직의 폐쇄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1924년 7월 제5차 대회의 한 참석자는 이 변화를 이렇게 기록했다.
‘볼셰비키화(化)’라는 새 노선이 채택되어 공산당들을 보다 엄격한 관료적 집중체제로 몰고 갔다. 이에 따라 종래의 다양한 여러 급진론이 배제되어 공인된 단일한 형태의 공산당 조직으로 정리되었다. 이에 따라 지역에 따른 광범위한 협력체제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도 새 정당들이 비로소 범 좌익의 광장을 빠져나와 그들만의 투쟁적 영역으로 옮겨왔다. 볼셰비키 운동에 대한 경의와 러시아 혁명의 수호가 이제 모스크바에 대한 예속과 소비에트의 무류성(無謬性)에 대한 믿음으로 대치되었다. ‘내부 정화’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가운데 지도자 집단들이 꼬리를 물고 규탄과 추방의 대상이 된 끝에 1920년대 말까지 초기 지도자들이 거의 다 모습을 감추기에 이르렀다. 통일성의 가혹한 요구를 통한 이 조정 과정은 1928년의 제6회 대회까지 계속되었다. (<Wikipedia> "Comintern"에서)
이 기간은 스탈린이 세계혁명의 제창자 트로츠키를 밀어내며 ‘1국사회주의’ 노선을 확립시킨 시기였다. 1928년 7-8월의 제6차 대회에서는 온건 좌파의 공격을 최우선 과제로 하는 투쟁적 극좌 노선이 완성되었고, 박헌영 8월테제의 기초가 된 12월테제(1928)도 이 단계에서 나온 것이었다. 코민테른의 극좌 노선은 193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지만, 파시즘의 대두에 따라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늘어났다.
파시스트 세력은 공산주의를 공동의 적으로 삼아 단결을 꾀하면서 ‘반(反) 코민테른 동맹’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 진영을 형성해 나갔다. 독일은 1935년 가을 반 코민테른 동맹 제안을 꺼내면서 영국, 폴란드와 중국(국민당 정부)까지 초대했으나 일본과(1936) 이탈리아만이(1937) 이에 호응했다.
1935년 7-8월의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인민전선’ 노선을 채택한 것은 파시스트 세력의 소련 고립 시도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나치 독일과 소련이 가장 적대적 관계에 서서 서방 국가들의 미움을 서로에게 떠넘기기 위해 경쟁하는 형국이었다. 1935년 시점에서는 독일의 반공 선전이 서방국에 어느 정도 먹혀들고 있었으나 이후 파시스트 국가들의 침략행위가 늘어나면서 ‘공공의 적’ 자리를 확고히 했다. 그 결과 1939년 초에는 미국인들까지도 독일보다 소련을 압도적으로 지지하게 된 것이다.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자본주의 국가들과 연합하여 독일과 싸우는 동안 공산주의 확산 의지를 내세우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43년 5월 코민테른 해체도 연합국과의 신뢰를 얻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면 전쟁이 끝나면서 동유럽에 공산권을 만든 것은 감췄던 발톱을 드러낸 것이었을까?
1949년 8월 소련의 첫 원자폭탄 실험 성공 때까지는 소련이 발톱을 드러내고 싶어도 드러낼 형편이 되지 못했다. 소련의 영향력 확보 노력은 인접국, 특히 유럽의 인접국에 제한되어 있었다. 동유럽 공산권은 방어 목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란, 터키, 그리스, 핀란드 등 분쟁이 일어난 다른 모든 지역도 소련 중심부와 접경한 곳이었고, 미국의 강경한 태도 앞에 모두 물러섰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대결을 극력 피한 것이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의 아시아 관계 요구는 러일전쟁 이전 러시아의 영토와 권리를 회복하는 것, 그리고 외몽고에 중국과 별도의 나라를 만드는 것뿐이었다. 중국의 공산화는 꿈도 꾸지 않았기에 완충지로 몽골인민공화국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일본 항복 시점에 와서는 얄타의 약속이라도 보장받는 데 급급한 마음이었다. 8월 8일 대 일본 선전포고는 “독일 항복 후 3개월 내”에 대 일본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얄타에서의 약속을 칼날같이 지킨 것이었다. 불과 몇 주일 전에야 완성된 원자폭탄이 가공할 모습을 드러내고, 소련이 참전할 때는 전쟁이 실질적으로 끝나 있었다.
소련은 독일과 4년에 걸쳐 3천만 가까운 인명을 잃으며 전쟁을 벌였다. 지금 와서 원자폭탄을 가진 상대와 맞붙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련의 지상과제는 그 때까지 확보해 놓은 권리를 보전하는 것이 되었다. 산토끼를 넘보다가 집토끼까지 잃을 위험을 소련은 절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반도 분할 점령에 미국 제안대로 응했다. 그리고 미국의 신탁통치 제안에도 수동적으로 응했다. 한 번 합의된 신탁통치안이 변경되지 않도록 소련이 안간힘을 쓴 것은 불확실성이 늘어나 분규의 소지가 생기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 안이 자기네에게 특별히 유리해서보다, 적대세력과 국경을 접할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그 안이 실행되지 않을 경우 더 불리한 상황을 맞을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인접국 확보에 몰두한 소련의 공산권 형성 방침은 1920년대 초까지의 세계혁명 노선을 완전히 떠난 것이었고, 일국사회주의 노선의 위축된 형태였다. 전쟁이 끝난 후 적어도 당분간은 소련이 서방과의 분규를 최소화하려 한 자세를 보여준다. 한국에서도 소련군은 미군보다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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