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머시 브루크가 <대국: 중국과 세계의 관계>(2019)에서 내놓은 참신한 관점 하나를 소개한 일이 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76444] 중화제국의 의미가 원나라 이후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제국의 판도가 중화문명권에 한정되어 있던 종래 왕조들과 달리 원나라 이후 중화제국은 세계제국을 지향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나는 이 주장에 찬성하지 않는다. 진 시황 이래 중화제국이 늘 갖고 있던 천하제국이념은 원래 세계제국이념과 통하는 것이었다. 원나라의 세계제국이념이 그 전 왕조들보다 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복왕조였던 몽골제국만의 특성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한족 왕조인 명나라에서는 세계제국이념이 도로 약해졌다.

 

결론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제시된 논점 중에는 수긍되는 것이 많다. 우리가 공부를 시작한 50년 전과 달라진 중국사의 틀을 새로 세우는 데 적절한 논점이 많다는 사실이 특히 반갑다.

 

 

송나라에서 바뀐 중화제국의 성격

 

중국의 왕조명은 진 시황 이래 송나라까지 왕조의 출신 지역 이름으로 하는 것이 상례였다. 뜻이 좋은 글자를 골라 국호로 삼은 것은 원나라부터였다. 원나라 이후 천하제국의 의미가 바뀌었다는 브루크의 관점을 뒷받침해 주는 변화다.

 

왕조 발상지 이름을 국호로 삼은 것은 발상지를 왕조의 보루로 여겼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이래의 정치사상은 지역 차별 없는 고른 통치[齊民]’를 지향했지만, 이론일 뿐이었다. 현실에서는 왕조와 이름을 함께하는 발상지가 특별한 존대를 받았고 조정에 큰 세력을 가진 명문세가의 출신지는 그에 버금가는 위치를 누렸다.

 

통일된 천하제국이라도 통치력이 구석구석까지 파고들기는 어려웠다. 현지 질서를 장악한 호족(豪族)과 중앙조정 사이의 협력과 견제를 통해 통치가 이뤄졌다. 큰 반란이 일어난 지방의 행정등급을 낮추는 제도에는 그 지방 호족 집단에 대한 처벌의 의미가 있었다.

 

지방행정에서 고른 통치의 원리는 송나라에서 크게 강화되었다. 독립적 군사세력을 억제한 군사적 통일정책과 나란히 지방에 대한 조정 통제를 강화하는 행정적 통일정책이 추진되었다. 과거제의 발전과 확장은 더 많은 관리를 지방에 파견해 호족의 역할을 넘겨받을 인력을 확보하는 과정이었다.

 

브루크가 중화제국 성격 변화의 결정적 계기를 송-원 사이에서 찾는 것은 대외관계 측면을 중시하는 관점이다. 내면적으로 나타나는 제국의 성격은 송나라 때 결정된 것이 많다. 송나라 때 바뀐 국가 성격이 원나라 때 대외관계에까지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호전>이 보여주는 송나라의 약점

 

고른 통치의 원칙은 송나라에서 크게 발전했으나 원칙의 발전을 현실은 따라가지 못했다. <수호전>의 양산박은 산동성 한 모퉁이의 그리 크지 않은 소택지였다. 휘종(1100-26)의 치세는 혼란이 극심한 시기도 아니었다. 그런 시기 그런 장소에 산적들의 해방구가 자리 잡은 상황을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군사적 통일이 군사력의 약화를 가져온 것처럼 행정적 통일이 행정력의 약화를 가져온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양산박 호걸 중에는 지방관들과 다투고 밝은 세상을 등진 인물이 많다. 그 지방관 중에는 진짜 나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조정 정책과 현지 질서의 충돌에 끼어 억울한 미움을 받는 일도 많았을 것이다.

 

천하 통일 후의 진나라가 군현제(郡縣制)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한나라는 봉건제(封建制)를 병행하면서 서서히 군현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한나라 군현제는 지방 권력이 조정에 맞설 위험을 없앨 수준이었을 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지방 질서는 각지 호족세력이 맡고 있었고, 조정의 힘이 약해질 때는 군벌로 자라나기도 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중국이 서양의 영향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서양이 중국 영향을 받은 측면도 크다는 주장이 있다. 과거제를 포함한 보편적 행정체제가 대표적 내용이다. 19세기 유럽에서 나타날 근대국가의 특성이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 이뤄진 것이다. 재정국가로의 전환도 보편적 행정체제를 통한 조세 수취율 확대 덕분에 이뤄진 것이다.

 

휘종이 천하를 잃어버린 까닭은 요-금 교체 단계의 정세 오판에 있었고 오판의 바닥에는 방대한 금군(禁軍)의 규모에 대한 과신이 있었다. 군사적 통일이 군사력의 저하를 가져오고 행정적 통일이 행정력의 약화를 불러온 역설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무리한 강경정책으로 없던 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국가-인민 관계의 변화

 

<수호전>14세기 중엽 시내암(施耐庵)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견도 있다. 이 작품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1524년에야 처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불온한작품을 16세기 초에 쓴 사람이 탄압을 피하기 위해 옛날 작가의 이름을 붙였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실제로 <수호전>은 숭정제(1627-1644) 때 금서가 되었다.

 

금서가 된 까닭은 제국의 권위에 대한 풍자 때문이다. 이 작품의 탄생이 14세기 중엽이든 16세기 초든 질서가 어지러울 때였기 때문에 시대의 혼란을 풍자하기 위해 양산박을 그린 것이란 해석이 따른다.

 

시대의 혼란이란 어떤 것인가? 공자는 이름이 바르지 못한(名不正)” 문제가 여러 층위를 거쳐 백성이 손발 놀릴 길이 없는(民無所措手足)” 지경에 이른다고 했다. 이름이 바르기 위해서는 임금이 임금 노릇 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해야(君君臣臣)” 한다. 임금-신하의 관계는 곧 국가-인민의 관계다.

 

송나라의 중앙집권 강화는 국가의 권한과 함께 책임도 늘린 것이다. 국가-인민의 관계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어느 쪽도 새로운 관계에 익숙하지 못했다. 그 중간에 있던 사람들, 지방 실력자들과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 사이에 끊임없이 마찰이 일어났다. 이 마찰이 <수호전>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지방의 실력자들이 국가-사회의 구조에서 중간계층이다. 당 이전의 중간계층은 무력을 앞세운 호족이 대표적 형태였는데 송 이후에는 재력을 앞세운 진신(縉紳)’이 되었다. 역할의 중요성에 비해 전통적 역사서술에서 조명을 덜 받은 이 중간계층의 실제 모습을 밝히는 것이 중국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중요한 과제가 되어 있다.

 

 

조선 선비가 경탄한 남중국의 번영

 

이 과제를 위해 문학작품 등 종래에 사료로 인식되지 않던 많은 자료들이 검토되고 있다. 그런 중에 눈에 띄는 하나가 최부(崔溥, 1454-1504)<표해록(漂海錄)>이다. 최부는 1488년 초 부친상 때문에 출장 가 있던 제주에서 서둘러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43명 일행과 함께 중국으로 표류했다. 태주(台州) 부근에 상륙한 일행은 곡절 끝에 항주(杭州)와 북경을 거쳐 5개월 만에 귀국했고, 최부는 성종의 어명으로 <표해록>을 지었다.

 

<표해록>은 단기간의 견문을 적은 글이지만 당시 중국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로 중시된다.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고 1965년 영문판도 나왔다. <표해록>의 가치는 무엇보다 선입견 없는 공정한 시각에 있다. 압록강에서 북경까지 사신들이 다니던 지역 사정은 조선 사대부들에게 꽤 알려져 있었지만, 남중국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최부는 경이로운 현상들을 보이는 그대로 일기에 적었고, 그 내용을 정리해 <표해록>을 작성했다.

 

최부가 적은 현상 중 두 가지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는 남중국의 경제적-문화적 번영이다. 항주와 소주(蘇州) 같은 도시의 풍경에는 풍요가 넘쳐난다. 저자의 눈에 남중국과 북중국은 서로 다른 세상처럼 보인 듯하다.

 

또 하나는 지방 ()질서의 현실을 보여주는 틈새다. 최부 일행은 태주 관헌에 이르기 전에 두 차례 해적의 위협을 받았다. 이들이 진짜 해적이었을까? 육지에 오를 때 마주쳤다가 겨우 피해낸 두 번째 집단은 정황으로 보아 지방 수군 같다. 관헌의 보호를 받게 된 후 진술에서 편의상 해적으로 지칭한 것일 수도 있겠다.

 

특별한 난세가 아니라도 제국의 질서는 일사불란한 것이 아니었다. 명나라는 오랜 기간 해금(海禁) 정책을 시행했으나 밀무역이 성행했고, 강남의 풍요가 여기서 나왔다. 강남의 지방세력은 조정의 고른 통치를 넘어 성장했고, 이후 역사의 진행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Song_Jiang#/media/File:Northern_Song_Uprisings.png 송 휘종 때 양산박과 방랍(方臘)의 반란 지역. 당시 중국의 중심부에 가까운 곳이었다. 귀순한 양산박 세력이 방랍 토벌에 동원된(1121) 상황은 몇 해 후의 항금(抗金) 의병들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Water_Margin#/media/File:%E5%9D%90%E6%A5%BC%E6%9D%80%E6%83%9C142326.jpg

https://en.wikipedia.org/wiki/Song_Jiang#/media/File:Yan_Poxi's_Murder_Peking_Opera_3.jpg 송강(宋江)과 배은망덕한 염파석(閻婆惜). 경극(京劇)의 인기 소재가 되었다. 양산박의 주요 인물 중에는 송강, 임충(林沖) 같은 서리와 군관 출신이 많아서 중간계층의 향배가 예민한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송강의 지도력이 무예나 지략보다 인품과 행실에 바탕을 두었다는 사실에도 당시의 가치관이 엿보인다.

 

https://baike.baidu.com/pic/%E6%BC%82%E6%B5%B7%E5%BD%95/3273355/1/b03533fa828ba61ee49799744034970a304e596b?fr=lemma&fromModule=lemma_top-image&ct=single#aid=1&pic=b03533fa828ba61ee49799744034970a304e596b <표해록> 표지. 1488년 당시 중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https://en.wikipedia.org/wiki/Suzhou#/media/File:The_Tonggui_bridge_at_Shentang_Street,_Suzhou.tif 소주 풍경. 항주에서 여러 날 지낸 뒤 북경으로 가는 길에 소주에서 하루 지낸 최부는 소주가 항주보다도 더 크고 화려한 곳이라고 찬탄해 마지않았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39607

 

[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송나라 중앙·호족 갈등, 산적소굴 ‘양산박’ 낳다 | 중앙일보

제국의 판도가 중화문명권에 한정되어 있던 종래 왕조들과 달리 원나라 이후 중화제국은 ‘세계제국’을 지향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송나라에서 바뀐 중화제국의 성격 중국의 왕조명은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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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사회 작동의 중요한 힘으로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무력, 사람의 몸에 작용한다. 둘째 재력, 사람의 재산에 작용한다. 셋째 사상, 사람의 마음에 작용한다.

 

세 가지 힘은 문명 발생 초기부터 나란히 존재했지만, 전통적 역사기록에는 무력의 작용이 가장 잘 보이는 힘이었다. 근대역사학에서 경제사와 사상사 분야에는 전통적 역사학의 약점을 보완하는 역할이 있다.

 

정사(正史) 등 관찬 사서의 비중이 큰 중국의 역사기록에는 군사적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다. 고대사 자료에 재력-경제 방면의 내용이 극히 적은 중에 하나의 집중토론 내용이 이례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있다. 기원전 81년 많은 학자와 관료들이 모여 경제정책을 토론한 내용을 정리한 <염철론(鹽鐵論)>이다.

 

 

진정한 천하 통일은 진 시황보다 한 무제

 

염철회의가 열린 것은 한 무제(재위 -141~-87)가 죽은 6년 후의 일이다. 진 시황의 통일은 무제 즉위보다 80여 년 전이었지만 진정한 천하제국은 무제가 완성한 것이었다.

 

흉노 격퇴와 조선-남월 정벌 등 무제의 대외정책은 잘 알려져 있거니와, 중앙집권 강화를 지향한 내부 정책들도 있었다. 동중서(董仲舒)를 앞세워 사상계의 표준을 세웠고, 경제 통제를 강화한 정책들이 있었다. ‘평준(平準)’균수(均輸)’ 원리에 따라 국가가 유통에 개입함으로써 상인의 역할과 이익을 줄이는 대신 서민의 생활을 안정시키면서 국고를 늘리는 방향이었다. 이 적극적 경제정책의 목적이 대외정벌의 비용 확보에 있었고 무리한 추진으로 천하가 피폐해졌다는 비판이 염철회의에서 제기되었다.

 

왕조시대를 벗어난 후세사람의 눈에는 관념적인 비판으로 보인다. 무제의 통일정책은 중간세력의 억제에 의미가 있었다. <사기> “유협열전의 곽해(郭解) 이야기에 그 정책의 몇 가지 특징이 비쳐 보인다.

 

무제는 즉위 직후부터 50년에 걸쳐 무릉(茂陵)을 축조했는데, 단순한 무덤 만들기가 아니었다. 각지의 부호 1만 호()를 옮겨와 무릉을 옹위할 도시를 만드는 것이 정말 큰 사업이었고, 민간의 재력가들을 통제하는 사민(徙民) 정책의 목적이 있었다.

 

사민 대상을 선정하는 재산규모의 기준이 있었다. 곽해의 재산은 이 기준에 미달했으나 임협(任俠)의 명성으로 민간의 영향력이 큰 사람이어서 사민 대상에 들어갔다. 조정의 논의 중 곽해는 대상이 아니라는 의견을 대장군 위청(衛靑)이 내자 무제는 그대가 나서서 두둔해줄 정도라면 그 사람의 힘이 어느 부호보다도 크군.” 하고 곽해를 빼지 못하게 했다.

 

얼마 후 곽해를 비방하던 사람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일이 있었다. 누구 짓인지 곽해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사람을 눈 흘겨서 죽이는 것이 칼로 죽이는 것보다 더 무서운 죄라는 주장에 따라 곽해가 처형당했다. ‘애자살인(睚眦殺人)’이란 말의 출처다.

 

 

군사력 약화를 무릅쓴 중앙집권 정책

 

무제가 죽자 그의 중앙집권 강화정책에 대한 반발이 터져나왔다. 강력한 정책을 이어갈 영도력이 후계자에게 없었기 때문에 염철회의가 열린 것이다. 민간의 명사와 학자 60여 명이 초청받아 조정 관리들과 토론을 벌였다. 명확한 결론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그 후의 정세는 민간과 지방 세력에 유리한 쪽으로 펼쳐졌다. 한나라의 중앙집권력이 약해진 것이다.

 

왕망(王莽, 재위 9-23)의 신() 건국은 무제 이후 약화된 중앙집권력의 회복에 뜻을 둔 것이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수백 년간 중화제국의 통일성은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당나라 초기의 위세도 지방세력의 연합에 기초를 둔 것이었고, 중기 이후 조정의 통제력 약화에 따라 절도사란 이름의 군벌들이 각지를 할거하기에 이른다.

 

송 태조(재위 960-976)가 즉위 초에 연회석상에서 동료였던 장군들에게 조기 은퇴를 권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술 한 잔에 군대 내놓기(盃酒釋兵權)” 일화는 태조의 군사적 통일 정책을 보여준다. 태조는 중요한 군대를 모두 조정 직할의 금군(禁軍)으로 편성했다.

 

군사적 통일에 따라 내부의 위협이 줄어든 대신 외부의 위협이 커졌다. 종래 장군들이 자기 몸처럼 아끼며 키우던 군대에 비해 지휘관을 조정에서 임명한 금군은 전투력이 약했다. , , 서하에 대한 송나라의 군사적 열세는 여기에 기본 원인이 있었다.

 

 

국가 질서에 위협이 된 애국 장군

 

12세기 초 북방의 요-금 교체 정세에 잘못 대응하면서 송나라는 최악의 군사적 위기에 빠졌다. 1127년 개봉 함락으로 온 조정이 금나라에 포획된 후 잔여세력이 고종(재위 1127-62)을 옹위해 송나라 명맥을 이었다. 1138년 남송의 행재(行在)가 항주에 자리 잡고 1142년 소흥화의(紹興和議)로 두 나라 관계가 안정될 때까지 총체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금나라는 개봉 함락 이후에도 남방을 향한 야욕이 없어서 점령 지역에 괴뢰 왕조만 세워놓고 방치했다. 악비(岳飛, 1103-41), 한세충(韓世忠, 1089-1151) 등 여러 하급 무장들이 이 공간 속에서 큰 군사력을 키워냈다. ‘악가군(岳家軍)’, ‘한가군(韓家軍)’으로 불린 이들의 군대는 송나라의 정규군대 밖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악비의 비극은 이 혼란 속에서 빚어졌다. 금나라와 전투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의병(義兵) 성격의 항금(抗金) 무장들이 중요했지만, 화의로 돌아서는 데는 걸림돌이 되었다. 금나라는 애초에 정복의 야욕이 없었고 송 고종도 적당한 선에서 사태를 수습하고 싶었다. 여진족의 완전한 퇴치를 주장하는 항금 무장들이 곤란한 존재가 되었다.

 

신흥 무장들을 통제하기 힘든 문제도 많았다. 군부 내 알력으로 인한 쿠데타로 황제가 일시 퇴위한 묘유병변(苗劉兵變, 1129)이 있었고, 금나라 쪽에 붙은 장수들도 있었다. 조정의 병권 정비 시도에 반발한 장수가 휘하병력 4만 명을 이끌고 넘어간 회서병변(淮西兵變, 1137)이 특히 충격적이었다. 악비를 회군시킬 때는 금자패(金字牌: 신속 전달과 즉각 이행을 강조하기 위해 금색 글자로 적은 어명)를 열두 차례나 내려보내야 했다.

 

고종은 180년 전 태조의 딜레마에 다시 마주쳤다. 군사력 강화를 위해 이질적 요소들을 안고 갈 것인가. 외세와 타협하면서 내부 불안 요소를 척결할 것인가? 선택은 후자였고 악비가 희생되었다.

 

 

돈으로 평화를 사는것이 백성에게 편안

 

남송을 안정시킨 소흥화의(1142)는 정통론 관점에서 굴욕적 사건으로 지탄받아 왔다. 금나라에 막대한 세폐(歲幣)를 바치며 상국(上國)으로 받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소흥화의는 송나라의 성공이었다. 세폐를 바치고 상국으로 받들던 것은 요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휘종(재위 1100-26)의 오판으로 빚어진 난국을 수습해 송나라 체제를 되살려낸 계기가 소흥화의였다.

 

돈으로 평화를 사는것은 건국 이래 송나라 대외정책의 기조였다. 서하(西夏)와의 관계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서하는 서북방 감숙-섬서 방면에 있던 지방세력으로 1030년대에 칭제(稱帝)를 했으나 천하 형세를 좌우할 큰 세력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송나라가 쉽게 대등한 황제국으로 인정하며 막대한 세폐를 보낸 것은 요나라와의 관계에 지렛대로 삼기 위한 목적으로 해석된다.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1901-1995)는 중화제국의 성격이 당나라의 무력국가에서 송나라의 재정국가로 넘어간 사실을 일찍이 설파했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되새길 의미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탁월한 관점이다.

 

13세기 몽골제국의 정복 과정에서 금나라 멸망(1234) 40여 년간 송나라가 버틴 이유도 국가 성격에 있었다. 무력국가 금나라는 무력 대결의 패배로 간단히 끝났다. 반면 재정국가 송나라는 파괴 대상이 아니라 접수 대상이었다. 송나라에서 발행한 교자(交子: 지폐)의 가치를 왕조 멸망 후에도 원나라에서 보장한 사실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송나라 왕조는 끝났어도 송나라가 빚어낸 국가 성격은 원나라를 비롯한 후세 왕조들로 이어졌다.

 

소흥화의를 주도하여 천추의 간신으로 오명을 남긴 진회(秦檜, 1090-1155)에 대한 재평가가 20세기 들어 늘어난 것은 정통론이 힘을 잃고 송나라의 국가 성격에 대한 이해가 발전한 결과다. 후스(胡適)는 진회가 큰 공을 세우고도 오늘까지 욕을 먹어 온 것은 억울한 일이라 했고, 마오저둥(毛澤東)은 주화(主和)의 책임이 진회 아닌 고종에 있으며 내부 안정을 앞세웠기 때문에 금나라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https://baike.baidu.com/pic/%E5%B2%B3%E7%8E%8B%E5%BA%99/10472/1/6a600c338744ebf80c217ccdd1f9d72a6159a7eb?fr=lemma&fromModule=lemma_top-image&ct=single#aid=1896426036&pic=8718367adab44aed0ab356bebd1c8701a08bfbef 악비의 사당 악왕묘 앞에 진회 부부의 철상(鐵像)이 무릎 꿇고 있다. 원래 동상으로 만들었는데 참배객들의 침과 오줌, 폭행으로 망가져 다시 만든 것이라 한다.

 

https://baike.baidu.com/pic/%E5%B2%B3%E7%8E%8B%E5%BA%99/10472/1/6a600c338744ebf80c217ccdd1f9d72a6159a7eb?fr=lemma&fromModule=lemma_top-image&ct=single#aid=1896426036&pic=8718367adab44aed0ab356bebd1c8701a08bfbef 진회의 글씨. 모택동은 진회의 예술적 경지를 역사상 손꼽히는 장원(壯元)’으로 격찬했다.

 

 

 
Posted by 문천

 

주어진 세상보다 더 좋은 세상을 바라는 꿈은 문명발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종교는 이 꿈을 많은 사람이 공유한 현상이다. 기독교의 낙원, 불교의 극락세계를 비롯해서 종교마다 초월의 세계를 향한 꿈이 있다.

 

이미 낙원의 꿈을 갖고 있던 기독교세계에 유토피아라는 또 하나의 꿈이 나타난 것은 특이한 일이다. 토머스 모어(1478-1535)1516년 책 제목에서 나온 이름이다.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있던 유럽에서 종교에 의지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꿈이 자라난 것이다.

 

<국가의 최선의 형태와 새 섬 유토피아에 관하여>(De optimo rei publicae statu deque nova insula Utopia)는 제목 그대로 정치적 이상을 그린 책이다. 정치형태의 선택이 매우 중요한 일이 된 근대유럽에서 오래된 낙원대신 유토피아가 새로운 꿈의 이름이 되었다.

 

 

없는 곳에서 좋은 곳을 찾아

 

모어의 유토피아는 대륙에(브라질의 어느 곳으로 설정되어 있다.) 거의 붙어있는 직경 200마일가량의 섬으로 6천 가구의 도시 54개가 있다. 30가구에서 하나씩 뽑힌 대표 2백 명이 비밀투표로 도시의 통치자를 선출한다.

 

사유재산도 없고 직업의 구분도 없다. 농사가 모두에게 주업이고, 직조, 석공, 목수 등 부업을 각자 하나씩 가진다. 생활방식이 소박해서 부업에 높은 수준 기술이 필요 없고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만 일하면 된다. 단 하나 특별한 직업은 종교와 행정을 담당하는 학자들로, 어린 나이에 소질에 따라 선발된다.

 

모어는 유토피아를 내부완결성을 가진 사회로 그리려 했으나 그 성립과 유지를 위해 최소한의 외부타자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부로서 대륙이 있었다. 섬 인구의 안정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인구가 늘어날 때는 대륙의 식민지로 내보내고 줄어들 때는 식민지 주민을 불러들인다고 했다.

 

타자로서는 노예가 있었다. 한 가구에 두 명씩 배당되는 노예는 전쟁포로 등 외부에서 획득하기도 하고 내부의 범죄자로 충당하기도 한다. 전쟁을 하되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포획하는 데 목적을 둔다. 유혈을 통한 승리를 부끄럽게 여긴다.

 

후세사람들은 유토피아이상향(理想鄕)”의 뜻으로 대개 받아들이지만 모어 자신은 라틴어로 쓴 이 책에서 희랍어 ουτόπία”(없는 곳)을 어원으로 내놓았다. “Ευτόπία”(좋은 곳)이 아니다. 실제 내용은 좋은 곳에 관한 상상을 담고 있는데, 굳이 없는 곳이라고 이름붙인 까닭이 무엇일까?

 

 

두 교회의 성인(聖人)이 된 토머스 모어

 

오늘날 휴머니즘은 별 고민 없이 쓰이는 말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 속의 휴머니즘에는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그 자체로 인정한다면, 교회와 신앙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따른다. 휴머니즘의 역사는 종교와의 갈등을 통해 진행되었다.

 

14~16세기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인간 이성을 중시한 그리스철학의 재발견으로 시작되었다. 신학 중심의 스콜라철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었지만, 아직 종교와 대립하는 단계는 아니었다.

 

토머스 모어는 목숨으로 신앙을 지킨 사람이다. 헨리 8세가 이혼과 재혼을 위해 잉글랜드 국교회를 만들고 그 수장을 맡는 데 동의하지 않다가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1935년에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선포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맞섰던 국교회의 후신 성공회에도 1980년에 순교자로 등록되었다. 그의 죽음이 양쪽 교회에서 모두 순교로 인정받는 것은 교리에 앞서는 양심의 권리에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모어는 시대 변화의 중간에 서 있던 사람이다. 휴머니즘과 종교신앙 사이를 연결한 사람이었다. 영국 역사학자 휴 트레버-로퍼의 논평이 이 연결성을 잘 보여준다. “(모어는) 휴머니스트 가운데 가장 거룩한 사람이며 성인 중에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신대륙 식민지의 유토피아 실험

 

유토피아없는 곳이란 이름을 붙인 것도 중간 위치에서 나온 입장이다. 초월자의 도움 없이 인간의 능력과 노력으로 좋은 곳을 만드는 길을 바라보았지만,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지 않았다. “없는 곳에 대한 상상일 뿐이라고 했다.

 

모어 시대 이후 학문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늘어나면서 유토피아“(인간의 힘으로 만드는) 좋은 곳의 뜻이 되었다. 유토피아의 실현을 위한 노력은 신대륙의 식민지에서 종종 나타났다. 모어가 상상한 이상사회에도 식민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다. 대항해시대를 통한 공간의 확장이 유토피아의 무대를 만들어주었다.

 

1730년대 제임스 오글소프의 조지아 실험은 극단적 도덕주의로 눈길을 끈 사례였거니와, 그에 앞서 1660년대 캐롤라이나 식민지 설치 과정의 그랜드 모델(Grand Model)’에도 유토피아의 꿈이 나타났다. 이 모델의 작성에 존 로크(1632-1704)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더욱 눈길을 끈다.

 

캐롤라이나 모델에는 정치조직의 합리성을 강조한 진보적 측면이 있었으나 귀족제와 노예제를 옹호하는 등 봉건적측면도 지적된다. 사회계약론으로 정치사상의 새 지평을 연 로크가 이 모델의 작성에서 맡은 역할에 대해 많은 논란이 일어난 것은 그 때문이다. 젊은 나이였던 로크의 역할이 실무자에 그쳤던 점도 있었겠지만, 국왕의 처형(1649)과 공화정 시도(1649-60)라는 정치실험 실패의 배경 위에서 이해할 일이기도 하다.

 

식민지 획득은 착취의 공간과 함께 실험의 공간도 만들어주었다. “없는 곳에 만들어질 좋은 곳을 향한 모어의 꿈은 다음 시대의 이상주의자들에게 이어졌다. 유럽인의 식민활동은 인간사회의 모순을 여러 측면에서 심화시켰지만, 한편으로는 모순 극복의 새로운 길을 찾는 실험실이 되기도 했다.

 

 

유토피아의 귀착점이 된 사회주의

 

유토피아 사상은 19세기에 활짝 꽃을 피웠다. 알퐁스 드 라마르틴(1790-1869)유토피아란 때를 아직 만나지 못한 진실이라고 했고, 오스카 와일드(1854-1900)진보란 유토피아의 실현을 위한 과정이라고 했다. 자연과학과 정치사상의 발전에 힘입어 모어의 꿈이 이제 현실에 가까이 느껴지게 된 것이다.

 

유토피아 사상의 유행은 거꾸로 유토피아의 의미를 희화화하는 결과도 가져왔다.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말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utopian socialism)’란 말이 그렇다. 이 말이 공상적 사회주의로 번역되는 것은 자기네 과학적 사회주의와 대비하여 종래의 사회주의를 깎아내렸다는 뜻이다.

 

두 사람은 <공산당선언>(1848)에 이렇게 썼다. “계급투쟁이 발전하지 못한 상황과 그들 자신이 처한 환경 때문에 (...) 그들은 사회 전체의 변화를 제창하면서 계급의 차이를 무시하려 든다. 아니, 지배계급을 오히려 두둔한다. (...) 그래서 모든 정치적 행동, 특히 혁명적 행동을 거부한다.”

 

엥겔스와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는 어떤 것이었나. 앙리 드 생시몽(1760-1825), 샤를 푸리에(1772-1837), 로버트 오언(1771-1858) 등이 알려져 있다. 그들의 주장 사이에도 상당한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공산당선언>의 지적대로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부정한 것이 그들의 공통점이다. 그래서 과학적이지 못하고 공상적이라는 것이다.

 

아메리카 독립과 프랑스대혁명 등 18세기 말의 정치적 격변이 새로운 조직원리를 통한 유토피아의 꿈을 키워주었다. 사유재산권의 토대인 개인주의(individualism)’의 극복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그 꿈은 사회주의(socialism)’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같은 취지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다만 그들은 사유재산권의 결과물인 자본계급과의 투쟁에 집중하는 노선을 과학적 사회주의로 내걸면서 자기네 꿈은 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인류에 대한 위협을 특정 계급의 악역보다 더 넓은 의미의 문명의 성격에서 찾게 된 21세기 상황에서, 표적을 좁히려 들던 과학적사회주의보다 밑바닥 원리를 탐구하던 공상적사회주의의 유산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한 꿈, 유토피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개인주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다시 떠올려본다.

 

 

https://en.wikipedia.org/wiki/Utopia_(book)#/media/File:Utopia_Woodcut_(Holbein,_1518).jpg 1518년간 <유토피아>에 실린 암브로시우스 홀바인의 목판화.

 

https://en.wikipedia.org/wiki/Thomas_More#/media/File:History_of_the_great_reformation_in_Europe_in_the_times_of_Luther_and_Calvin.._(1870)_(14785678593).jpg 토머스 모어의 처형 장면.

 

https://en.wikipedia.org/wiki/John_Locke#/media/File:John_Locke.jpg 존 로크 초상. ‘정체성자아의 개념 확립으로 근대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초기 계몽주의자였다.

 

https://en.wikipedia.org/wiki/John_Locke#/media/File:John_Locke.jpg 찰스 1세의 처형(1649) 장면을 그린 작가 미상의 홀랜드 그림. 찰스 2세의 왕정복고(1660) 후 설치된 캐롤라이나 식민지는 찰스 1세의 이름을 딴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