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가-자”?


이번 월드컵 최종예선은 많은 국민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몇 주일 전만 해도 일본과 아랍에미리트를 어떻게 제치고 본선티켓을 따낼까 마음 졸이던 축구팬들이 지금은 두 나라의 2위 다툼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다. 한국 팀의 훌륭한 경기내용과 통쾌한 골 장면은 국민들에게 계속 기쁨을 줬다.

지난 주 일본과 2차전에서 무기력한 경기 끝에 첫 패점을 기록했지만 팬들은 그리 분노하지 않는다. 이미 티켓을 확보해 놨으니 절박한 마음도 들지 않고, 여러 게임 잘 싸운 우리 팀이 한 게임 놓쳤다고 각박한 생각도 들지 않는 모양이다. 앞으로 더 잘하기만을 당부하는 성숙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본과 아랍에미리트가 한 게임씩 남겨놓은 상황에서 일본은 승점에서도 앞서 있고 마지막 상대팀도 만만한 편이다. 일본이 조 2위를 차지해 본선진출의 희망을 이어갈 공산이 크다. 한국 팀이 ‘져준’ 데 일본 팬들이 고마워하며 한국 팀의 마지막 게임 통쾌한 승리를 염원하는 마음은 비록 이기심에서 출발한 것이라 하더라도 진정 곡진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팬들의 마음은 어떤가. 아랍에미리트보다는 일본이 잘되기를 대개 바라는 것 같다. “일본에게만은 질 수 없다”는 해묵은 적대감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기야 우리 진출은 확정돼 있으니 우리 축구가 일본축구보다 나음을 본선무대에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왕이면 영판 먼 남보다 가까운 이웃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지 않겠는가.

가까운 이웃일수록 관계는 복잡하고 예민할 수밖에 없다. 일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피해의식과 적대감은 과거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맞붙어 있는 만큼 이런 경험은 앞으로도 되풀이될 개연성이 있다. 독도의 선착장이 완공되어 내일 준공식이 있겠지만 일부 일본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아직도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울트라니폰 응원석에서 본 한글 피켓 “같-이-가-자”는 앞으로 두 나라 관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하게 해 준다. 세계화의 시대가 가져올 경쟁의 다원화는 이웃 간의 대립보다 협력을 더 중요하게 만들 것이다. 근교원공(近交遠攻)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우리 실력에 자신이 있으면 이웃을 대하는 자세에도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이번 ‘축구대결’의 가르침이 아주 요긴하게 느껴진다. (1997년 10월)


우리가 ‘운동’이라 부르는 신체활동이 서양에서는 스포츠와 레크리에이션의 두 영역으로 구분해서 인식된다. 스포츠에는 승패를 가르는 경쟁이 있고, 등산, 낚시 같은 레크리에이션은 본인의 만족만을 위한 것이다. 레크리에이션에도 경쟁의 요소를 도입할 수 있지만 부수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신체활동을 통한 경쟁이라는 점에서 스포츠는 전쟁과 통하는 것이다. 스포츠의 뿌리가 전쟁 및 그를 위한 훈련에 있을 것으로 사람들은 추정한다. 그러나 스포츠가 전쟁과 다른 점은 예술성을 중시하는 데 있다. 전쟁에서도 예술성을 찾을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승리라는 절대적 목적 뒤에 있는 것이다. 반면 스포츠는 승패보다 예술성을 앞세우려는 경향을 가지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스포츠에서도 승패에 대한 집착을 많이 본다. 축구가 가장 인기 높은 스포츠인 가장 큰 까닭의 하나가 전쟁과 제일 비슷한 스포츠이고 따라서 승패에 대한 집착을 가장 강렬하게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1969년 7월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사이의 전쟁을 ‘축구 전쟁’이라 부르는 것은 월드컵 예선전을 둘러싼 충돌이 개전의 단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의 이유는 따로 충분히 있었다.) 다른 스포츠 종목은 ‘탁구 전쟁’이니 ‘체조 전쟁’이니 하는 영예(또는 불명예)를 누린 일이 없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배워 온 그리스의 뛰어난 민주주의가 지나친 유럽중심주의 선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오랫동안 품어 왔지만, 올림픽 경기라는 스포츠의 제도화에 대해서는 경탄해 마지않는다. 오랫동안 고정된 상대들 사이에 전쟁을 거듭해 오다 보니 힘들고 위험한 측면을 가급적 줄이고 아름답고 재미있는 측면을 가능한 한 늘리는 방법에 합의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신체활동의 폭력성보다 예술성을 부각시킨 그런 노력이 참으로 가치 있는 문명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전투기술로부터 예술성을 가진 스포츠를 도출하는 일은 여러 문명에서 여러 형태로 이뤄졌지만,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은 여러 종목 스포츠를 종합한다는 점에서 탁월한 차원에 이른 것이었다. 각 종목의 예술성이 서로 비교됨으로써 예술성이 행사의 중심 가치로 부각되는 시너지 효과를 이룬 것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여러 종목 스포츠의 규칙이 정해져 보편적 형태가 갖춰진 것은 스포츠가 국제 활동으로 비중을 키우는 데 따른 일이었다. 유럽국들 사이에 자주 전쟁을 벌이고 서로에 대해 상당히 잘 알게 되면서 전쟁 아닌 대결 방법을 찾게 되었으니, 그리스에서 올림픽 경기가 만들어진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근대올림픽과 월드컵 등 세계적 스포츠 행사가 만들어진 것은 초보적 수준에서나마 ‘지구촌’이 성립된 상황을 보여준다. 전쟁과 투쟁의 주된 양상은 예전처럼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인 ‘이교도’나 ‘야만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양식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경쟁자’를 상대로 하는 것이 되었다. 스포츠를 통한 경쟁이 보다 폭력적 형태의 경쟁을 얼마만큼이라도 대신해 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떠올랐다.


스포츠의 폭력성이 지탄의 대상이 되는 일이 많지만, 폭력성이 스포츠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사회에는 대립과 갈등이 있게 마련인데, 스포츠는 원래 대립을 처리하는 역할의 활동이므로 폭력성을 근본적으로 피할 수 없다. 사람은 더러운 볼일을 보면서 살아가는 존재인데, 볼일을 아무 데서나 보느냐, 깨끗한 화장실을 이용하느냐 하는 차이가 전쟁과 스포츠의 차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1969년의 ‘축구 전쟁’을 돌아봐도 그렇다. 인구가 조밀한 엘살바도르와 영토가 넓은 온두라스 사이에는 이주민 문제를 둘러싸고 전쟁의 조건이 충분히 쌓여 있었다. 축구장의 폭력 사태는 도화선 노릇을 했을 뿐이다. 이 전쟁을 ‘이민 전쟁’이 아니라 ‘축구 전쟁’이라고 부르는 데는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의지가 작용한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도 대립을 완화하고 갈등을 순화시키는 스포츠의 기능이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3년 전 위 칼럼을 쓸 때까지 나는 한국 대표팀의 축구 경기 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승부에만 집착하느라고 예술성을 지향하는 노력이 너무 빈약해 보였다. 국민의 엄청난 성원에 그저 ‘승리’로밖에 보답할 생각을 못하는(또는 안하는) 축구인들이 너무나 게을러 보였다. 축구를 즐길 생각을 전혀 못하고 승리만을 위해 억압받는 선수들이 불쌍해 보였다. 하는 사람들이 즐겁지 않은 짓이 보는 사람들에게 어찌 즐거울 수 있는가?


그런데 지금은 K-리그에서도 대표팀 경기에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뛰는 선수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대다수 팬들은 승리에 대한 집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축구인들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 떠날 생각을 하는 것도 이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허 감독이 그런 소리 하는 것만 해도 10여 년 전보다 크게 좋아진 사정을 비춰 보여준다. 그만큼 성적 올린 감독이 제멋대로 그만둬? 이번에 16강 갔으면 4년 후에 4강 올라가는 데 신명을 바쳐야지! 애국심이 어디 갔기에 멋대로 그만두겠다는 거야!


북한팀을 바라보는 우리 축구팬들의 시각에도 음미할 점이 많거니와, 일본팀을 보는 시선에서 금석지감을 많이 느낀다. 1920년대에 축구가 한국 사회에 자리 잡은 이래 일본을 대하는 한국인의 태도가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난 통로가 한-일 축구 대결이었다. “일본에게만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아직 남아있기는 하지만 전과 같은 독이 빠져 있다. 수비를 중시하는 일본 축구와 공격력이 뛰어난 한국 축구의 특징을 차분히 비교하며 양국 축구 발전의 길을 토론하는 축구팬들은 분명히 폭력성보다 예술성을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심판의 오심에 대한 증오심도 크게 줄어들었다. 오심 심판의 처단 주장보다 기술 발전에 관한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다. 승부에 대한 집착이 완화되는 것은 승부 외의 다른 가치를 경기 내용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더라도 “잘 싸우고 멋있게 졌다”는 칭찬을 해줄 만큼 많은 축구팬들이 성숙해지게 되었다.


어느 스포츠나 경쟁을 요건으로 하는 만큼 폭력성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특히 축구의 높은 인기는 스포츠 중에서도 폭력성이 강하다는 특징과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선진국도 축구팬의 훌리거니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인의 축구 응원에서 폭력적 태도가 아주 없어질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이만하면 어디 가서도 부끄럽지 않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 축구 자체의 발전보다 축구팬들의 진화가 더 자랑스럽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