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귀국하는 길에 10월 10일에서 16일까지 도쿄에 머무르며 맥아더의 극히 이례적인 환대를 받았다. 도쿄에서 ‘가이진(外人) 쇼군’으로 군림하던 맥아더에게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은 사람은 따로 없었을 것 같다. 한국에서 ‘미국인 총독’으로 군림하던 하지가 이 기간 중에 도쿄에 다녀갔는데, 이승만과 만나도록 맥아더가 불렀던 것 같다. 16일 오후에는 이승만을 자기 전용기에 태워 보냈다.


서울에 온 이승만을 하지가 떠받드는 모습에서 맥아더의 입김의 입김이 얼마나 셌는지 알아볼 수 있다.


하지는 이승만이 귀국한 다음 날인 10월 17일에 신문기자들을 배석시킨 가운데, 이승만을 조선의 진정한 애국자로 묘사하며 찬사를 보냈다. 하지는 이승만을 앞세운 채 수행하듯 뒤따라 들어왔고, 이승만을 기자회견장 헤드테이블 중앙에 앉히고, 자신은 그 왼쪽 자리에 앉았다. 군정장관 아놀드가 헤드테이블의 말석을 차지했고, 하지의 개인 통역 이묘묵이 이승만의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10월 20일 개최된 연합군 환영회는 더욱 극적이었다. 5만 명의 인파가 참석한 가운데 중앙청 앞에서 개최된 이 환영회에서, 하지는 짧은 답사 직후 이렇게 이승만을 소개했다. “이 가운데 조선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가 있으니 소개하겠습니다. 조선의 해방을 위해 싸웠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큰 세력을 가진 분입니다. 개인의 야심은 추호도 없고 다만 국제 관계에 일생을 바치고 노력하신 분이며 따라서 군정부 정당에도 아무런 관련이 없고 단지 개인 자격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하지는 이승만이 연설하는 내내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457쪽)


이승만은 해방 당시 국내에서는 ‘잊어진 인물’이었다. 정병준은 위 책 399-400쪽에서 종전을 앞두고 미군 정보당국이 몇 가지 경로를 통해 한국의 잠재적 지도자들을 조사한 내용을 소개하는데, 어느 경로에서도 이승만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 그의 독립운동 경력에서 정점이었고, 미국에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이유로 1925년 탄핵당한 후 독립운동가로서의 위신이 추락했다.


재미동포 사회에서 지지 기반을 얼마간 지키고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많은 ‘안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반대자를 설득하려 애쓰기보다는 더욱 배척해서 그 반작용으로 자신에 대한 지지가 결속되도록 유도하는 사람이었다. 정치공학의 달인이었다.


그가 40대 중반의 나이에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된 것이 무엇 덕분이었을까? 후에 ‘국부(國父)’의 위상을 세울 근거가 여기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유를 나는 아직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독립운동가들이 국제적 압력, 특히 미국의 영향력에 의한 독립에 희망을 가지고 미국통인 그를 선택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아무리 임시정부라도 국가 원수를 그런 편의적 기준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해방 당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로서 권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지도층 인사들 사이에서 미국통으로서의 성망은 매우 높았다. ‘단파방송 사건’에서 그 성망이 부풀려지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전쟁 중 엄격한 보도관제를 뚫고 외부 소식을 얻는 길이 단파방송에 있었는데, 1942년 말 경성방송국과 개성방송국의 단파방송 청취 적발로 불거진 이 사건에 여운형, 허헌, 백관수, 함상훈 등 해방 후 건준과 한민당의 주역이 될 인물들이 폭넓게 연루되었다. 사건의 핵심 당사자였던 송남헌은 이렇게 회고했다.


1942년 6월경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승만 박사가 흥분한 목소리로 “2천5백만 동포들이여 조국광복의 날이 멀지 않았으니 동포는 일심협력하여 일제에 대한 일체의 전쟁 협력을 거부하고 때를 기다리라”고 한 연설을 나는 직접 들었다. 이 방송을 들은 나는 가슴이 마구 뛰었고, 흥분해서 변호사사무실로 달려가 그대로 전했다. 내가 전하는 말을 듣고서 모두가 금방 독립이라도 되는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이 말은 곧 시내로 퍼져나갔다. (심지연, <송남헌 회고록>(한울 펴냄) 40쪽)


이승만은 1942년 6월에서 7월에 걸쳐 몇 차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행했고, 독립을 간절히 바라던 국내 사람들의 귀에 그의 목소리가 독립의 희망과 겹쳐져 울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 편승해 이승만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키려 애쓴 추종자들이 있었다.


단파방송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옥사한 홍익범(1897~1943)의 역할이 주목된다. 홍익범은 와세다대학을 나온 뒤 1926-32년간 미국 유학을 하고 귀국 후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있었다. 단파방송 청취 내용을 지도층 인사들에게 유포시키는 데 앞장선 사람인데, 청취 내용에 이승만 선전을 교묘하게 끼워서 전달한 모양이다.


경찰 조서 등 자료를 보면 여운형, 허헌, 송진우, 함상훈 등 홍익범에게 정보를 제공받은 사람들이 이승만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미국에 이승만이 이끄는 임시정부가 세워져 있고 미국 정부의 큰 지지와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병준 위 책 399-424쪽) 홍익범은 미국 유학 기간에 이승만의 사조직 동지회에서 열심히 활동한 사람이었다. 정보를 제공받는 사람들은 반가운 정보에 묻어 들어온 허위 선전을 그대로 믿었다.


이승만은 7월 27일부터 시작해 맥아더에게 여러 차례 편지와 전보를 보냈다. 그는 맥아더를 만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미국에 있던 한국인이 귀국하기 위해서는 주한미군사령부, 태평양지구 미육군사령부와 미 국무부의 승인이 필요했다. 그는 애초에 마닐라를 경유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허가를 받았다가 도쿄 경유로 바꿨다. 맥아더가 마닐라에서 도쿄로 옮겨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맥아더를 만나고 싶어 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맥아더가 이승만을 환대한 까닭은 무엇일까? 미국 정부, 특히 군부와 소통이 잘될 만한 인물로 보아 밀어주고 싶어 했다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막연한 기대감으로 서울에서 하지까지 불러오며 그렇게 환대를 할 수 있었을까? 그보다 더 구체적이고 강한 동기가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추측과 관련해 눈에 띄는 사실이 하나 있다. 하지가 도쿄에서 이승만을 만난 사실을 숨기려 애썼다는 것이다. 11월 2일 24군단 참모회의 석상에서까지 “이승만의 서울 도착에 깜짝 놀랐다.”고 거짓말을 했다. (정병준 위 책 442-443쪽) 만난 사실을 이렇게 감추려고 애쓴 것은 도쿄에서의 만남에 큰 비밀이 숨어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한국인이나 소련 측만이 아니라 자기 휘하의 참모들에게서도 숨겨야 했던 비밀이 무엇이었을까.


짐작이 가는 것은 맥아더, 하지, 이승만이 공유한 반공-반소 자세다. 맥아더는 루스벨트의 국제주의를 이어받은 국무부의 방침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불만을 꿰뚫어본 이승만이 어떤 묘수를 제공해서 맥아더의 환심을 산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 묘수의 실행을 도와주라고 맥아더가 하지를 부른 것 아닐까? 나는 이승만에 대해 여러 모로 비판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가 맥아더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Posted by 문천


평양에서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김일성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소련군 2인자인 레베데프 정치사령관, 조만식에 이어 세 번째 연사로 나선 김일성은 “모든 힘을 새 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인민대중의 이익을 철저히 옹호하며 나라와 민족의 부강발전을 확고히 담보할 수 있는 참다운 인민정권” 건설을 제창했다. 그 방법으로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인민대중을 망라하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애국적 민주역량을 민족통일전선에 튼튼히 묶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영태, <북한 50년사 1>(들녘 펴냄) 46쪽)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타베이스>에서 이 행사에 관한 신문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당시의 미군정이 보도를 통제한 것이라면 그 자체로 중요한 사안인데 확인하지 못했다.


9월 19일 입국한 김일성이 한 달 가까운 기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활동노선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귀국 전에 스탈린을 만나 한국 통치자로 낙점을 받았다는 설이 있었는데, 근거가 아직도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의 ‘괴뢰성’을 선전하는 의도에서 나왔던 것 같다. 귀국 전 몇 해 동안 소련극동군 산하의 88여단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북한 주둔군 간부들과 우호적 관계를 가졌지만, 당시 소련군은 조만식의 역할을 더 중시하고 있었다.


찰스 암스트롱은 <북조선 탄생>(김연철-이정우 옮김, 서해문집 펴냄)에서 해방 당시 소련에게 북한 또는 한국을 공산국가로 만들 의지가 별로 없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당시 미국 국무성이 주장한 것처럼 소련의 북한점령이 ‘접수를 위해 이미 짜여진 공식’이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는 것이다. (75쪽) 베트남과 중국의 공산당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미온적인 것이었다는 사실과 연결해 보더라도 수긍이 가는 의견이다.


북한에서는 지방의 자치-보안 조직이 자발적으로 많이 이뤄졌고 소련군은 일본인의 행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바로 넘겨주는 등 자발적 조직을 대체로 지원했다. 8월 말까지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산하에 145개 지방 지부가 결성되었다고 하는데, 건준 중앙부의 역량 한계로 보아 하향식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 지방조직이 스스로 건준과 연락을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 상당수는 물론 북한 지역에 있었을 것이고, 9월 들어서도 더 생겼을 것이다. 미군의 남한 진주에 따라 건준 중앙부와의 연락이 막히자 지방 조직들은 각도의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정비되었다가 10월 8일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열리고 10월 28일 북조선 5도 행정국이 설치됨으로써 북한 지역의 지방행정 체계가 일단 완성되었다.


자발적 지방조직을 구성한 제일 큰 세력은 민족주의자들이었고(우익) 사회주의자들이(좌익) 그 다음이었다. 소련군은 좌익을 다소 북돋워줌으로써 양측 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꾀하되 우익의 주도권을 용인했다. 우익의 조만식에게 최고의 권위를 인정한 것이 그런 방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 동지들은 좌익의 주도권을 확보함으로써 우익과의 연합체제에 주니어파트너로 참여하는 길을 찾았다. 9월 중순 조선공산당이 서울에서 ‘재건’되었지만 북한 지역 당원들은 중앙당과 연락이 잘 되지 않는 문제도 있고 박헌영 노선에 대한 불만도 있었기 때문에 북한 내 지도력의 별도 수립을 바라고 있었고, 김일성 중심의 빨치산 집단은 그 요구에 잘 부응할 수 있었다.


소련군 점령 하의 북한에서 김일성은 여러 가지 리더십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항일 투쟁 경력으로 민족주의자들의 존중을 받을 수 있었던 점. 소련 극동군에 4년간 편성되어 있던 경력으로 점령군 간부들의 신뢰를 받은 점. 국내 무장투쟁이 없던 시절 보천보사건 등으로 큰 명성을 쌓아놓은 점. 그의 손발과 두뇌가 되어줄 정예집단을 보유한 점.


평양 시민대회에서 그의 연설은 스탈린 식 교조주의와 거리가 먼 것이었는데, 그런 유연한 노선으로 당당히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리더십의 조건이 든든하기 때문이었다. ‘국내파’ 일부는 김일성이 대표한 ‘빨치산파’의 ‘민족통일전선’ 노선이 “소부르주아적 우경투항주의”라고 공격했지만, 그들의 ‘인민전선’ 노선이 조선의 실정을 무시한 좌경적인 것이라는 빨치산파의 비판이 더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임영태 앞의 책 65쪽)


김일성과 박헌영이 10월 8일에서 9일에 걸쳐 개성 인근 소련군 38경비사령부 회의실에서 만났을 때 핵심 의제는 북한의 독자적 공산당 조직을 세우는 문제였다. 박헌영은 코민테른이 세웠던 1국1당 원칙에 입각해 이를 반대했으나 김일성이 제기하는 현실적 필요를 묵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세우는 절충안으로 마무리되었다.


바로 이튿날(10월 10일) ‘조선공산당 이북5도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의 이름으로 북조선분국 창건을 위한 예비회의가 열렸고, 13일에 분국 설치 결정과 함께 집행위원이 선출되었다. 예비회의에서 김일성은 박헌영의 8월테제와 다른 별도의 노선을 제출했으나 채택되지 않았고, 집행위원회에 빨치산파가 많이 참여하지 못했다. 당시 2천여 명 수준의 북한 지역 공산당원 속에서 빨치산파의 세력은 아직 미약했다. 그러나 독자적 조직인 북조선분국 설치는 김일성의 활동무대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이 단계에서 큰 승리였다. 북조선노동당을 남조선노동당과 대등하게 따로 세울 발판이 마련된 것이었다.


10월 8일 개성에서 만날 때 박헌영은 조직력의 대표였고 김일성은 대중성의 대표였다. 조직력은 억압상태 하의 공산주의운동이 보인 특징이었다. 식민지시대의 불법 투쟁에서 비롯된 조직력 위주 운동이 미군정 하의 남한에서도 계속되었기 때문에 박헌영의 지도력이 확고했던 것이다. 반면 소련군 점령 하의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개방적 노선이 유리한 조건을 누리고 있었다.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 ‘재건’ 과정에서 가장 큰 고비가 소위 ‘장안파’의 경쟁을 따돌린 것이었다. 바로 해방의 날인 8월 15일 밤에 여러 계열 공산주의자들이 장안빌딩에 모여 공산당을 결성하고 당 간판을 내걸었다. 이것을 ‘장안당’ 또는 ‘장안파’라 한다.


장안파 핵심인물들과 그 소속 계열들이 1930년대 말 이후 공산주의운동을 쉬고 있는 동안 박헌영이 속한 경성콤그룹만이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박헌영은 콤그룹을 끌고 공산주의운동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8월테제를 작성했다. 1928년 12월테제에 의해 해체된 조선공산당의 법통을 잇는다는 노선이었다. 김남식과 심지연은 <박헌영 노선비판>(세계 펴냄)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이처럼 재건위가 발족되고 8월테제가 나오자 각 계보의 공산주의자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장안파의 충격은 컸다. 일제하에서의 공산주의운동에서 기본적인 결함으로 지적된 당의 분열과 파벌싸움이 해방 후에 또다시 재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재건위 중심으로 당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그를 반대할 만한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1945년 8월 24일 장안당은 중앙집행위를 개최하여 당의 진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 후 9월 8일에는 장안파의 중심인물들이 주체가 되어 재건파를 대표한 박헌영과 함께 열성자대회를 개최하고 박헌영 계의 재건준비위에 합세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박헌영은 9월 15일 조선공산당 재건을 선포하게 되었다.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는 원래 개방성과 포용성을 추구하는 이념이다. 그런데 그 이념을 가장 투철하게 추구하는 공산주의운동이 역설적으로 정통성을 중시하고 폐쇄적인 성향을 많이 띠게 된 데는 소련 볼셰비키혁명의 경험이 큰 작용을 한 것 같다. 혁명의 승리자들이 자기네 헤게모니투쟁의 경험을 혁명의 표준적 과정으로 인식하고 소련과 코민테른의 정책노선에 이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이후 식민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를 환영한 것은 식민지 상태에서 심화되고 있던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는 길로 보았기 때문이다. 해방 당시의 지식층 가운데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개 사회주의의 역할에 기대감을 가지는 정도 좌익의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운동의 폐쇄성과 극단성은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재건’ 시점의 공산당원 수가 수천 명에 불과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8월테제는 12월테제의 뒤를 이어 계급투쟁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남한에서 공산주의운동은 지식층 좌익 속에 확산되기보다 현장을 중시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반면 북한에서는 잠재적 좌익이 공산주의운동에 흡수되었다. 미군정의 박해라는 악조건도 물론 작용한 결과이지만, 박헌영 일파의 편협한 극좌노선도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 날 도쿄에서는 이승만과 맥아더가 서울에서 불려온 하지와 만나고 있었다. 내일부터 며칠간은 이승만 얘기를 해야겠다.


Posted by 문천


근래 미군 통역생에 대한 항간의 물의가 분분한 것 같다. 조선사정을 바르게 이야기하지 않고 그릇된 說問으로 한다느니 또는 어느 당파에 이용되어 그 당파에 관한 것은 좋게 이야기하고 다른 당파에 관한 것은 좋지 않게 이야기한다느니 □□□□□한다느니 하고 갖은 아름답지 않은 풍설이 떠돌아다니는 것 같다.

이것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단순한 항간의 풍설이니 만치 우리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적어도 통역을 담당할 만한 사람이면 고등교육을 받았을 것이요 이런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오늘날 조선에 있어서 각 방향의 지도자가 될 인물이며 식견과 인격이 결코 이 같은 좋지 못한 행동을 하기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런 풍설이 들리는 것은 쓸 데 없이 말하기를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의 풍설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지금 항간의 주목의 초점이 이를 미군 통역생에게 집중되어 있고 또 사실로 이들 통역생이 바른 통역으로 조선에 대한 정당한 해설을 갖게 하여야 모든 일이 순조롭게 또는 타당하게 운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역생들은 어떠한 태도로 이에 대하여야 할 것인가 첫째로 통역생은 한국에 협력하는 가장 중대한 임무를 가진 것을 자각하여 일거일동을 한국□□의 □□로 하여야 할 것이다. 즉 불편불당의 어느 정당이나 당파에 가담함이 없이 공명정대한 입장에서 지금 조선과 조선민중이 직면하고 있는 생활현실과 사회현실 및 조선민중의 희망 이상 등을 바르게 정확하게 소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조선민중은 4천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수한 문화민족이다. 불행히 일본식민지가 되어 그 학정 밑에서 고난을 겪어 왔음으로 昔日의 면목이 없어졌지만 그 근본을 캔다면 어느 문화민족에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민족이다. 이 긍지를 굳게 갖고 엄연한 대국민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태도로써 조선을 소개하는 통역의 任에 當하여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위에 말한 항간의 풍설에 다소라도 혐의를 받을 만한 행동을 한다면 이는 중대한 문제다. 통역생 제씨는 학식과 인격이 겸비된 지도적 인물이니 만치 우리가 이 같은 충고를 줄 필요가 없지만 다만 노파심에서 이같은 충고를 주는 것이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13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미군정은 남한에서 영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삼았다. 미군정의 점령통치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이다. 미군 중에 아무리 한국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더라도, 한국인을 다스리는 정치라면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공용어로 지정하고 통역제도를 공식화해야 했다. 영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했기 때문에 통역제도는 공식화되지 못하고 개인의 필요와 취향에 따라 채용되는 부수적 요소가 되었다.


해방 당시 영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 중에는 두 개의 큰 부류가 있었다. 하나는 기독교인으로서 미국에 유학한 사람들이었고, 또 하나는 사회주의자들이었다.(공산주의자 포함)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한민당 당원이나 지지자였다. 사회주의자들 중에 미국에 유학한 사람들과 영어를 통해 사상을 학습한 사람이 많았다. 어제 얘기한 박헌영도 러시아어를 못해서, 국제레닌대학에서도 주로 영어반에서 공부했다.


미군정 담당자들이 두 그룹 중 한 쪽을 배척하는 태도는 9월 8일 상륙을 앞두고 인천 앞바다의 함상에서 시작되었다. 건준에서 파견한 여운홍, 백상규와 조한용은 사흘이나 쪽배를 타고 기다렸다가 미군 함대가 도착하자 기함 카톡틴 호에 올랐다. 하지 사령관은 그들의 접견을 거절했는데, 이듬해 4월의 한 기자회견에서 이 일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들이 “일본인들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건준이 일본인들의 괴뢰라는 주장은 한민당에서만 나온 것이니, 9월 8일 당시에 하지가 그런 생각을 했을 수가 없는 일이고, 서울 도착 후 한민당 인사들에게 세뇌당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민당 인사들이 10월 5일 구성된 군정장관 고문단을 채우면서 통역도 같은 성향의 사람들이 많이 채용되었다. 서울 주재 미 국무성 고문관 윌리엄 랭던은 군정청 한국인 접촉의 편향성에 대한 문제 제기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군정에서 부유층을 편애하고 인기있는 좌파를 제외시킴으로써, 우리는 시초부터 비율에 맞지 않는 정도로 부유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중에 어떠한 인물이 있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실용적인 목적 때문에 우리는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채용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과 그들의 친우들은 주로 돈 있는 계급 출신이며 그것은 영어가 한인들 사이에선 사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벌써부터 이것이 한국 사회구조를 대표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이 구조의 사회적 기초를 신속히 확장시키고 있었다. (1945년 11월 26일 국무성에 보낸 서신.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옮김, 일월서각 펴냄) 205쪽에서 재인용)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희귀한 미군 장교로서 하지의 보좌관으로 특채된 죠지 윌리엄스는 선교사의 아들로 충남 공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었다. 조병옥 등 한민당 인사들을 군정청 요직에 임명하는 데 윌리엄스가 큰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10월 17일 한민당 당사를 방문했을 때 윌리엄스가 송진우와 조병옥 등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들이 다 알고 있듯이, 북한에서는 공산군이 조직됐습니다. 비록 공산주의 이론은 자명하고 반공사상이 (한국에서) 철저히 확립되었다 하더라도, 만약 이것(반공)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정세에 대처할 애국자가 한국에 없다면, 이를 철저히 다루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하지 장군이 한국을 위하여 군정과 협조할 그런 애국자의 천거를 요청했으니, 여러분이 이에 대하여 심사숙고하여 나에게 추천해 주기를 바랍니다. (커밍스 위 책 212쪽에서 재인용. 이 책 557쪽의 참고문헌 일부가 누락되어 있어서 원전은 파악하지 못했음.)


통역정치의 상황을 강준만은 이렇게 개관했다.


미군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해방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생존 무기는 단연코 영어였다. 영어를 할 수 있는 통역관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일제 시대 때 해외유학을 했거나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영어를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대주주 집안 출신으로 해방 전엔 친일파, 해방 후엔 친미파 노선을 걷는 사람들이었다. 정당으로 보자면 바로 한민당이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정당이었는데, 하민당은 사실상 해방정국을 지배한 이른바 ‘통역정치’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하지의 보좌관이자 군정 인사문제조정위원인 조지 윌리암스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극소수의 미국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한민당의 득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윌리암스는 일제 시대에 조선에서 전도사업을 한 선교사의 아들로 한민당 간부들과 친했다. 하지의 통역관인 이묘묵을 비롯해 군정청에 근무한 400여 명의 통역관들도 거의 대부분 한민당 세력이거나 한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한국현대사산책 1>(인물과사상사 펴냄) 88-89쪽)


당시 검사로 근무하던 선우종원도 통역관들의 행태에 관한 증언을 남겼다.


게다가 통역관들이 거짓 통역을 해서 죄가 되게끔 만들어버렸어요. ‘예스’라고 해야 되는 걸 ‘노’라 하고 말이야. 그런 식으로 유죄를 만들어서 형무소로 보내는 걸 우리가 봤어요. 그런데 검찰 입장에서는 도저히 묵인할 수 없는 일이거든. 우리 같은 젊은 검사들이 정의감에 불타 통역관을 잡아넣었어요. (...)

그렇게 하니까 구속된 놈들이 형무소에 가서 자기를 잡아놓은 검사가 공산주의자니 뭐니 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다녔어요. 아마 그때 내가 실언을 좀 했을 거예요. 나도 26살밖에 안 됐을 테니까, 이를테면 이런 얘기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이 자식아, 우리가 일본 놈한테 억눌려 산 것만 해도 분한데, 상전이 바뀌었다고 해서 이제 미국 놈한테 붙어서 한국 사람을 괴롭히냐?” 그러니까 그걸 꼬투리 잡아서 ‘검사가 반미주의자다’ 떠들고 다니는 거죠. 재판 끝나면 선우 아무개 검사 구속한다, 몇 년 징역을 보내겠다, 그런 이야기까지 돌았어요. (<8-15의 기억: 해방공간의 풍경, 40인의 역사체험>(한길사 펴냄) 116-117쪽)


권력을 끼고 도니 부패 또한 없을 수 없다.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동용하는 이런 증언을 남겼다.


나무를 실어 나르는 허씨라는 업자가 있었어요. 내가 미군 중위하고 나무를 싣고 차를 열 대씩 가지고 왔다 갔다 하니까 하루는 이 미군 중위를 초대했어요. 어디에 초대를 했는가 하면 지금의 명동인데 그곳에 장춘각이라는 기생집이 있었어요. 거기로 데려가더라고요. 난 기생집이라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장가도 안 간 총각이었으니까 아무것도 몰랐죠. 허씨는 가방에 돈을 가득 넣어 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 순 장사꾼이죠. 미국사람을 통해 어떻게 들여온 나무를 차를 통해 다른 곳으로 실어 나르고, 자세한 건 모르지만 수완이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위 책 113쪽)


일개 중위를 모시고 다니는 나이어린 통역관도 뜻하지 않은 돈벼락을 맞을 지경이니 영관급 장교들은 그야말로 황제가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전숙희의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에 베어드 대령이 ‘여간첩’ 이수임과 함께 살던 ‘옥인동 19번지’의 대궐 같은 집 얘기가 나오는데, <프레시안> 주소가 옥인동 19-29번지로 되어 있어서 물어보니 그 빌딩 터를 포함하는 넓은 대지 위의 엄청난 저택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식민지 체제로부터 많은 달갑지 않은 유산을 물려받았는데, ‘부패’에 관해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역할이 미군정만큼 크지 않았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