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보다 빠른 일본 항복 소식에 김구는 가슴을 치며 통탄했다고 한다. <백범일지>(배경식 풀고 보탬, 너머북스 펴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605-606쪽)


그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 차라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일이었다. 몇 년 동안 고생하면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다. 서안과 부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무기와 무전기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국내에 침투시켜 주요 지점에서 각종 공작을 전개하여 인심을 선동하고, 무전으로 연락하여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해 두었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계획을 한번 실행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했으니, 진실로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앞으로 닥칠 일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대목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들 기뻐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걱정할 일을 잊지 않는 김구의 지도자다운 냉철함에 탄복하게 된다. 일본의 항복에 우리 민족이 공헌한 바 없이 ‘주어진 해방’이었기에 자주독립의 길을 잘 찾지 못한 결과에 비추어보면 김구의 통탄에서 깊은 통찰력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 항복 시점에서 “기쁜 소식이라기보다 차라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일”이라는 표현은 좀 너무했다. 자연스럽지 못하다. 몇 달 아니라 몇 해의 시간이 더 있다 해서 우리가 일본 패퇴의 주역이 될 수 있었겠는가? 보조적이고 부수적인 역할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광복군이 그렇게 항쟁의 시간을 더 가진다면 그 동안 인민의 고통이 더 늘어나는 것은 아무래도 괜찮은 일이란 말인가?


일본의 항복은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민족의 역할이 충분치 못해 아쉽다면 그 시점부터라도 역할을 늘리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일이었다. 해방 시점에서 그때까지의 성적에 따라 상장 받을 사람들 상장 받고 끝나 버리는 일이 아니었다. 지도자도 민중도 이제부터 할 일이 얼마든지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하다니, 일본인들이나 할 소리였다. 과장을 넘어 본질을 뒤집을 정도로 이상한 표현이다.


해방을 맞이하는 김구의 자세에서 파당적 입장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족의 역할이 작았음보다 임정의 역할, 한독당의 역할, 자신의 역할이 작았음을 아쉬워한 말로 보는 것이다. 민족을 위해서라면 일단 기뻐해 놓고 나서 할 일을 생각해야 할 텐데, 그 동안 준비해 온 광복군 제2지대의 작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만 아쉬워하는 것이다.


물론 더 큰 눈으로 본다면 임정과 한독당, 그리고 자기 자신의 입장이 든든할수록 민족에 대한 공헌을 더 잘할 수 있다는 공변된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민족을 앞세우는 입장이라면 일본의 항복에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느낌을 받을 수는 없다.


광복군의 작전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임정은 보다 당당하게 귀국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 내의 일본군 무장해제 권한까지 바라보았을지 모른다. 김구 자신이 생각해도 임정은 개선장군 행세를 할 실적이 모자랐다. 그래서 일본 항복 후의 상황에서도 임정의 실력을 키우는 방법을 백방으로 모색했다. 그 하나가 일본군 포로 중 조선인 장병을 편입시키는 광복군 확대 시도였다.


8월 11일에 소개한 일반명령 1호의 한 조항에 “(만주를 제외한)중국, 대만과 북위 16도 이북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모든 일본군 선임 지휘관은 장개석 장군에게 항복한다.”고 되어 있다. 장개석이 항복받은 백여만 일본군 중 조선인은 10만 정도로 추정되었다.


임정 수뇌부는 장개석 정부의 협조로 이 10만 병력을 넘겨받아 광복군으로 편성, 보무당당하게 귀국하고 싶었다. 그런 조직력만 과시할 수 있다면 미군과 소련군도 무시할 수 없고 국내의 어떤 반대세력도 감히 도전하지 못할 위세를 갖추게 될 것이었다.


이 시도는 몽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정병준은 <사학연구> 제55-56합집호에 게재된 논문 “1945~48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중국내 조직과 활동”에 그 결말을 이렇게 적었다.


광복군의 일본군 내 한적사병 인수를 통한 확군과 잠편지대(暫編支隊) 설치 구상은 실패했다. 가장 큰 이유는 연합국의 전후 한반도 처리방침에 따라 임시정부가 승인되지 않았고, 이 연장선에서 광복군 역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 국민당 측도 자국 영토 내에서 타국의 군사 활동 내지 군대 육성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중국 측의 이러한 광복군 처리 방침은 이미 1945년 말에 확정된 것이었다. 종전 직후 중국 측은 한인교포와 한적사병 처리 문제에 관한 법률(韓僑韓俘處理辦法)을 제정했다. (...)

즉 이 판법의 핵심은 첫째 일본 패망 이전 중국의 승인을 받은 광복군만을 승인한다. 둘째 한국교포와 한적사병은 모두 집중관리해 본국으로 송환한다. 셋째 한적사병의 편입 등을 통한 광복군의 확군 등은 금지한다는 점이었다. 중국 측이 이러한 조치를 내리게 된 주된 이유는 일본군 무장해제와 본국송환이라는 연합국의 일반적 전쟁포로 처리방침과 임정-광복군 불승인 정책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부분적으로 중국 내 한인들에 대한 적대의식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881-882쪽)


1932년 4월의 윤봉길 의거 이후 장개석은 김구를 내내 호의적으로 대했다. 김구가 귀국할 때도 20만 달러의 거액을 제공했다. 그 규모로 볼 때, 그리고 3명의 무전사 및 무전기와 함께 이 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로 볼 때, 이것은 개인적 전별금이 아니라 정치자금이었다. 장개석은 김구와 임정이 고맙고 좋아서보다 이용가치가 있어서 우대한 것이다. 일본이 패퇴한 아시아에서 중국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기를 장개석은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장개석이 김구와 임정의 힘을 키워주고 싶어도 한계가 있었다. 포로를 빼돌린다는 것은 미-영-소 등 연합국들에게 용납될 수 없는 짓이었고, 항복 직전까지 (일부는 심지어 그 이후까지) 중국인을 괴롭혀 온 일본군 장병들을 그 혈통만을 이유로 풀어주는 것을 중국인들이 용납할 수 없었다. 광복군은 만주군 장교 박정희를 포함해 수천 명의 포로를 편입시키는 형식까지 취했지만 결국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조선인 포로 인수를 통한 광복군 확군 다음으로 임시정부가 시도한 것은 만주 거주 조선인 집단에 영향력을 키우려는 ‘만주계획’이었다. 김구는 8월 18일 임정 화북대표부를 통해 동북특파공작원 파견을 결정했고, 파견된 공작원 최태산은 9월 12일 심양에 임정 동북대표부를 설치했다. 동북대표부는 국민당 정부의 동북행영과 연명으로 이런 위압적인 성명을 발표했다고 한다. (정병준 위 논문 884쪽에서 재인용)


一. 동북지구에 있는 모든 한국민족은 현재의 각 결사 및 정치조직 등을 완전 해산한다. 동북 한교가 필요로 하는 결사 혹은 조직 및 기타 정치기구는 때에 따라 반드시 한국임시정부 동북대표부를 거쳐 중앙정부 당국의 공인을 얻은 후 그를 조직한다.

一. 민주적으로 조직된 동북 각 지구 한교민회를 위해선 한국임시정부 동북대표부를 경유해 중앙정부 당국의 인정을 얻은 후 조직하도록 준허한다.

一. 한국임시정부 동북대표부를 제외한 결사 혹은 기타 단체조직은 동북한교민의 행위를 대표하지 못한다.


국민당 정부와의 밀착관계를 이용해 만주의 조선인 집단을 임정 세력기반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소련군 점령 지역이었기 때문에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가지고도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장개석에게 받은 20만 달러를 국내에 반입하지 않은 것이 미군정의 제약 때문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중국에서 계속 시도할 사업을 위해 남겨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국내에 들어가서는 충분한 정치자금을 제공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귀국 무렵까지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임정 요인들의 귀국이 11월 하순까지 늦춰진 경위를 세밀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개인 자격의 귀국을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모양이다. 이재명, <한국현대사의 비극: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 28쪽에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중경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이 늦어진 것은 잘 알려진 바대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고집하는 임정 측과 개인자격으로서의 입국을 주장하는 미군정 측과의 갈등 탓이었다. 임정요인들 가운데 특히 ‘법통’을 내세우던 이들은 김구-조완구-엄항섭 등 한국독립당 계열이었다. 학병 출신으로 8-15 뒤 상해에서 같은 고향 사람인 약산 김원봉을 만나 그의 비서를 지냈던 황용주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규식-김원봉-장건상 같은 이들은 국무회의 석상에서의 발언을 통해 대체로 “38선 이남에서 미군정이 실시되는 현실에서 더구나 국내외 각 정파가 서로 자기 목소리를 외치는 현실 아래 중경임시정부가 전민족적 의사를 집약-대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어느 정도 합리적인 논리를 폈다.

(오늘 이야기에 집중적으로 이용한 논문을 보내준 정병준 교수에게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