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을 계기로 식민 지배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산-심화되면서 ‘독립’의 의미에 대한 생각도 발전했다. 그 전에는 대한제국의 복벽을 바라는 생각이 독립사상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으나 이제 대한민국을 내걸며 ‘민국’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일단 보수적 성향과 진보적 성향이 갈라진다. 왕정 한 가지는 철폐하더라도 그 밖의 측면에서는 망국 이전의 질서 체제를 최대한 복원하려는 것이 보수주의였고, 망국 이전과 전혀 다른 질서 체제를 도입하려는 것이 진보주의였다.


보수주의는 안전을 중시하지만 개항기 이후의 제반 조건 변화를 수용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었고, 진보주의는 의욕적이지만 안전한 항로를 확보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이런 전환기에는 양자 간의 절충을 통해 점진적, 단계적으로 진로를 모색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진행방법이다.


사회주의가 당시 진보주의자들에게 유력한 선택 대상이었다. 사회 현실을 면밀히 살피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민족 통치의 문제점 외에 자본주의 모순이 식민 통치 아래 뚜렷해지고 있었다. 산업노동자 인구가 크지 않은 상태에서 계급 분화가 아직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농업 분야에서 그에 접근하는 문제가 나타나고 있었다. 자본주의 원리를 따라가는 농장 경영 형태, 특히 일본인 지주의 농업 경영이 전통시대의 소작제도에 그런 대로 남아 있던 공동체 의식을 완전히 깨뜨렸기 때문이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는 독립 국가를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빚어낸다는, 도식화해서 말하자면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을 함께 해결한다는 목적의식이 진보적 민족주의의 주류로 떠올랐다. 이것은 역사적 관점에서도 합리적인 입장이었다. 조선의 망국 원인이 일본의 야욕과 조선 자체의 약점 양쪽에 있다면 조선의 구체제를 그대로 복원하기보다 조선의 약점을 고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식민지 상황이 길어지면서 구체제 복원의 꿈이 흐려져 가는 반면 사회주의 혁명의 희망은 더욱 짙어졌다. 보수주의자들 중에는 식민 통치를 현실로 인정하는 추세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난 반면 사회경제적 현실의 변화는 체제 변화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해외 독립운동에서도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사회주의를 추구한다는 의미의 ‘사회민주주의’가 유력한 표준으로 세워졌다.


이런 상황을 서중석은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펴냄)에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사회운동은 농민-노동자의 계급 각성운동이자 일제의 착취와 억압에 대항하는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민족해방운동은 사회운동에 의해 폭넓은 민중적 기반을 갖게 되었다. 한 논자는 독립운동에서 내세운 독립 이유가, 한국의 유구한 독립 역사를 들고 그 때문에 한국은 독립할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소극적 감정적 방면에서 일보 나아가, 최대 다수의 민중의 행복을 향수하여야 한다는 보편적 이성적 논리로 전환되어 경제적 방면으로부터 관찰[철?]해나가게 되었다고 인식하였는데, 사회운동은 국내 독립운동의 중요한 방향전환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 (89쪽)


그런데 1920년대를 통해 사회주의 운동이 자라남과 함께 그 안에서 ‘공산주의’라는 하나의 큰 변수가 두드러지게 된다. (192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한국 상황에서 ‘공산주의’를 소련이나 코민테른의 지침에 매인 활동 양상을 가리키는 좁은 뜻으로 나는 쓰겠다.) 사회주의는 당시 한국에서 이상주의적 성격의 사상 조류였고 행동 양식이었다. 그런데 소련의 성공을 구체적 모델로 하고 그 지원과 지침에 따라 현실적 힘을 키우려는 공산주의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의 일반적인 이상주의적 성격과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일전에(10월 5일) 소개한 아버지 일기에 나오는 “(좌익의) 공식주의적인 관념론”이 이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소련의 성공에서 ‘입증’된 ‘공식’에 얽매여 현실을 고압적으로 재단하는 추세다. 이 공식의 실행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도 없고, 인민의 희생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궁극적 정당성에 대한 신앙 차원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주에(9월 29일) 분단이 정치‘꾼’들에게 유리한 조건이 된 측면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정치‘꾼’이란 현실정치의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올 동기는 오른쪽에도 있고 왼쪽에도 있다. 오른쪽에는 자기네 이익을 키우고 지키기 위해 광분하는 사람들이 있고, 왼쪽에는 혁명의 확신 앞에 다른 모든 가치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대 정치 상황을 고찰함에 있어서 좌익과 우익을 먼저 구분해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게 보면 내가 말하는 정치‘꾼’들은 극좌나 극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1920년대 이후의 한국 상황에 대해서는 좌우의 구분보다 ‘꾼’들의 집단을 따로 떼어놓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극좌와 극우의 행태에는 공통점이 너무 많다. 그 모습은 21세기의 대한민국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각자의 신념이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꾼’들의 이기적 행동을 현실사회의 과제를 모색하는 의미 있는 정치활동과 구분해서 보는 관점을 <해방일기> 작업을 통해 세워보고자 한다.


‘사이비(似而非)’가 ‘비(非)’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한 공자 말씀이 딱 들어맞는 대목 같다. 극우는 우익에게 독(毒)이었고 극좌는 좌익에게 독이었다. 좌익과 우익은 상호간의 긴장관계를 통해 정치의 발전을 기할 수 있는 것인데, 극좌와 극우는 폭력적 수단을 통해 생산적 긴장관계를 교란, 또는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오늘 사회주의 얘기를 꺼낸 것은 박헌영과 김일성의 첫 대면이 65년 전 오늘 개성에서였기 때문이니, 우익 얘기는 미뤄두고 좌익 쪽 얘기부터 하겠다. 국내 공산주의 운동의 최강의 실력자 박헌영과 해방 후 새로운 상황에서 떠오르는 별이던 김일성 사이의 관계는 향후 10년간 한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하나의 큰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김일성이 소련의 ‘괴뢰’라는 교육과 선전 속에 한국인들은 살아 왔지만, 1945년 당시의 김일성은 박헌영 같은 교조주의자가 아니었다. 박헌영이 좌익 내의 지도력을 세우기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데 몰두하는 동안 김일성은 백 명 안팎의 유격대를 이끌고 상황에 적응하는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온 현실 속의 지도자였다. 박헌영이 뛰어난 이론가로서, 순수한 혁명투쟁가로서, 정통 공산주의 지도력을 소련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한 반면 김일성은 항일투쟁가로서의 명망을 배경으로 주민들의 신뢰를 모았다.


개성 회담 이후 박헌영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운동의 전개는 앞으로 진행 단계에 따라 살펴볼 것이다. 다만 이 시점에서 박헌영 중심의 국내 공산주의 운동 체제를 파악하기 위해 소위 ‘8월 테제’를 한 차례 검토할 필요가 있다. 8월 19일 또는 20일에 박헌영이 작성하여 공산당 재건준비위에 제출했다가 9월 20일 조선공산당에서 정식으로 채택된 이 테제가 해방 후 공산주의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 준거가 되었다. 일간 8월 테제를 중심으로 해방 후 공산당의 움직임을 살펴보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