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주둔미국사령관 하지중장은 북위 38도 이남 조선에 설치된 미군정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었다.

조선 국민의 사상적 혼란을 제거하기 위하여 조선주둔군사령관 하지중장은 금일 군정청에 대하여 下記와 같이 정의하였다. 즉 군정청이라는 것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민주주의정부를 건설하기까지의 과도기간에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통치, 지도, 지배하는 연합군최고사령관 지도하에 미국군으로서 설립된 임시정부이다.

군정부는 남부 조선에 있어서 유일한 정부이다. 군정부는 군정청본부 及 도청 군을 통하여 설립된 각 기관을 운영하는 것이며 군정부의 유일한 정부는 조선의 복리와 조선을 위하여 견고한 정부와 건전한 경제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조선국민이 군정의 법령에 순응치 않거나 또는 협력을 게을리 함은 오직 국가의 완전독립의 시일을 지연시키며 따라서 법령에 순응치 않거나 또는 고의로 군정을 훼상하는 원인을 만들 뿐이다. 군정부는 인류의 침략자 압제자를 정복한 연합국의 모든 실력으로 지지되어 있다. 따라서 연합국의 명령을 실시하기 위하여는 언제나 실력 행사를 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실력발동을 필요치 않도록 희망하는 바이다.

정부의 각 계급을 통하여 일본 及 친일관리는 우수한 조선인으로서 가급적 속히 경질되어가는 중이다. 此等 조선인은 미국시민으로 정치와 경제에 대하여 고등교육을 받고 점령지역에 건전한 정부를 설립하기 위하여 자진 조력하는 미군 관리의 지도하에서 활약하고 있다. 유능한 조선인을 그들이 일찍이 취임하여 보지 못하는 정부 각 지위에 등용하는 동시에 미국인은 관리 지위 각 계급에 조선인을 배치할 수 있도록 기타 조선인 관리를 양성 중이다. 그 뿐만 아니라 군정부에서는 經理之才의 조선인을 발견하는 대로 속히 그들을 실업계나 상업계나 높은 지위에 배치하고 기타 조선인으로 여사한 사무의 훈련을 받게 하는 중이다.

이상 제 군정정책은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하는 것이고 결코 강압정책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남조선은 조선의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及 종족 피부의 빛깔이나 신앙에서 기인된 공공적 차별대우에서 자유롭게 되어있다. 통치권을 지배하는 준비가 되면 곧 조선에 독립과 조선인 자신에 자유정치를 줄 것이다. 정치를 비밀로나 공연히 반대하는 단체가 있는 모양인데 자기국가를 우려하는 선량한 조선인이라고 할 수 없다. 현재까지 판명된 이러한 단체는 이익적 사욕적 지도자 밑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단체를 지지하거나 찬성하지 말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하면 즉 그것은 불안정한 과도기를 지연시키며 일국가로서의 조선의 전성을 늦게 하는 것이다. 참으로 조선국가와 국민의 복리를 생각하는 정당이라면 먼저 정부와 건전한 경제건설에 대하여 미군을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런 건설이 된 후 개인단체와 정당 설립에 관하여 표현될 의견의 시기가 올 것이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16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아놀드 군정장관이 물의를 일으킨 10월 10일 담화의 골자를 윗선에서 뒷받침한 것이다. 군정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군정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것은 필요한 일에 틀림없다.


그런데 정병준은 <우남 이승만 연구> 450쪽에서 위 성명서 중 밑줄 친 부분을 지적했다. “실제로 하지는 한국인들에게 독립과 자유정부를 ‘줄’ 위치도 아니었고, 그럴 만한 결정권도 없었다”는 것이다. 지적한 것을 보니 정말 중요한 문제다. 9월 9일 진주 당시 하지의 성명서에도 점령군의 임무는 질서 유지 등 관리 측면으로 밝혀져 있었다.


태평양방면 육군총사령관이요 연합국 총사령관 맥아더 대장을 代하여 余는 오늘 남조선 지역에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다. 駐 朝鮮 美合衆國 司令官으로서 余는 玆에 下記 항복에 관한 諸 조건을 確守케 하노라. 余는 玆에 법률과 질서를 유지하는 동시에 조선의 경제 상태를 앙양시키며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며 기타 국제법에 의하여 점령군에게 과하여진 기타 제 의무를 이행하노니 점령지역에 있는 제군도 또한 의무를 다 하여라. (하략)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독립과 자유정치를 한국인에게 누군가가 줄 것이라면 그것은 여러 연합국의 집합이다. 반탁운동의 도화선이 될 모스크바 3상회의 같은 연합국 회담을 통해 결정될 일이었다. 연합국 중 하나인 미국의 의사를 결정하는 데도 전쟁이 끝난 이제 군부보다 국무성이 앞장서야 할 상황이었다. 주둔군 사령관은 한국의 정치적 진로를 언급할 입장이 아니었다.


단순한 군인을 자임하는 하지가 이런 용감한 발언을 한 배경을 정병준은 그 직전 맥아더와 이승만과의 만남에서 찾는다. 이에 관한 정병준의 관점은 나도 수긍이 갈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므로 오늘은 그 관점을 소개하는 데 집중하겠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미국의 외교노선은 다변주의(multilateralism, 또는 국제주의 internationalism)에서 일방주의(unilateralism, 또는 국가주의 nationalism)로 옮겨졌다. 원래 일방주의는 강대국이, 다변주의는 약소국이 선호하는 노선이다.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일어서면서 다변주의에서 일방주의로 옮겨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그런데 종전 직전까지 미국 정부, 특히 국무성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 다변주의의 기조를 지키고 있었다. 한국 문제를 놓고도 국무성은 다변주의에 입각한 신탁통치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련과의 대립이 다변주의의 관철을 어렵게 만들었다. 소련과의 대결을 주장하는 극우파는 국무성의 다변주의를 이적행위로 몰아붙였다. 국무성을 주 타깃으로 한 매카시선풍은 이런 분위기에서 나왔다.


1945년 4월에서 6월까지 열린 샌프란시스코 회의 때부터 미 국무성에 공산주의자가 많다고 불평한 이승만을 매카시는 선각자로 존경했을 것 같다. 매카시의 ‘폭로’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국무성의 외교노선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컸고, 아마 국민들도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새로운 위상에 대한 기대감에 들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맥아더와 하지가 이승만과 같이 국무성의 신탁통치 구상에 불만을 가졌던 것은 이데올로기 차원의 반공이 아니라 군부가 흔히 가지는 대결주의 성향의 태도로 이해된다. 4개국이 참여하는 신탁통치를 기다리며 질서 유지나 해주는 것은 재미도 없을 뿐 아니라 잘 했네 못 했네 비판을 받는 고된 일이 될 수 있었다. “소련은 나쁜 놈들”이라고 간단히 규정해 버리고 남한만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이 훨씬 쉽고 재미있는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가 곧 미국으로 떠날 정치고문 메럴 베닝호프에게 16일 전해준 비망록에 그 시점에서 하지의 의도를 보여주는 항목이 있다. ‘h 항’에서 “다만 명목상의 최고 지도자를 가진 정부라도 좋으니, 임시적으로나마 한국 정부를 조속히 수립하고, 가급적 빨리 총선거를 시행할 필요”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정병준, 위 책 447쪽에서 재인용)


북한에서 인민위원회를 토대로 자치정부가 형성되어 가고 있던 상황 앞에서 진도가 너무 처질까봐 급한 마음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지의 의도는 북한과 달리 ‘위로부터의 조직’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꼭지점을 어디에 잡을지 복안이 없이는 추진할 수 없는 방침이다. 하지는 맥아더와 함께 이승만을 만나면서 복안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상관인 맥아더가 인정하는 인물을 앞세우는 길이라면 하지가 걱정할 일이 없었다.


미군정 당국은 아놀드의 신랄함을 넘어 저열하기까지 한 표현으로 건준과 인공을 부정했다. 미군정이 남한의 유일한 행정조직이라는 그 논리를 연장하면 임정도 부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1941년 봄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 승인 이후 임시정부의 대표자로 행세해 왔다. 귀국 시점에서 이승만의 과제는 임시정부의 권위를 최대한 빌려 쓰면서 자신의 세력 근거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 목적으로 하지의 도움을 받아 만든 것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였다.


소련군의 존재가 없더라도 한국에 통일국가가 세워진다면 1943년 이래 이승만이 여지없이 주장해 온 극단적 반공은 용납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승만이 사사로운 동기에서 통일국가 수립을 방해했다는 확고한 증거를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동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귀국길 도쿄에서 맥아더와 하지와의 만남은 세 사람이 공유하는 이해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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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현대 한국을 바라보는 눈을 오랫동안 가리고 있던 안대를 벗겨내는 작업이었다. 여기에 수록된 김도현의 “이승만 노선의 재검토”는 이승만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봉쇄되거나 제한되어 있던 상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비판에 치우친 감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외교제일주의’에 대한 설명은 정확하다.


이승만은 이러한 자신의 외교제일주의를 위해서, 미국 내에서 무장 독립군의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며 자기를 하와이에 초청해 준 박용만과 다투고, 실력 양성을 애쓰는 안창호와 불화하고, 침체한 독립운동에 활력을 준 김구의 테러 행위를 비난했으며, 이청천 등의 무장 유격 행동도 비판하였다. (...) 미국의 외교가 한국민에 대한 동정보다 제국주의적 이익에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깨닫지 못한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승만 외교의 일생에 걸친 헛수고를 두고 오늘날까지 ‘외교에는 귀신’이란 말이 그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다.

해방 후만 하더라도 대미 의존 외에는 아무런 국제적 지위를 얻지 못한 것이 그의 외교의 전부였다. 이승만은 또 “세계의 분쟁을 일으키는 조화를 가진 사람으로 알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재미 교포 사회와 독립운동 사이를 분열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승만은 1913년 하와이로 갔는데 그 뒤 25년의 그곳 생활은 분쟁으로 보낸 것이라는 평을 받을 만큼 교포 사회를 분열시켰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1> 363-364쪽)


외교를 중시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외교만을 내세워 다른 방법을 무시하거나 방해하는 ‘제일주의’는 문제다. 어제 얘기한 스티븐스 저격 사건의 재판 통역 거부가 이 ‘제일주의’를 보여주는 사례다. 독립운동은 명분일 뿐이고 개인의 출세가 목적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유리한 ‘외교’만을 고집하고 실제로 ‘독립’을 향한 의지는 없었던 것이다.


정병준은 <우남 이승만 연구>의 제4장 “외교독립노선의 형성과 특징”(97-136쪽)에서 이승만의 활동노선을 개관했는데, 1904년 옥중에서 쓴 <독립졍신>을 그 외교독립노선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외세에 대한 우호적 생각과 현실 순응적 정세관”을 바탕으로 무저항적 적응만을 국권 보존의 방법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이런 노선을 선택한 이유를 정병준은 이렇게 설명했다.


외교 노선은 이승만의 출세 지향적 기질과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이승만은 신분-지위-연령 등 모든 면에서 사회-정치 지도자가 될 수 없었지만, 외교 무대에선 한국을 변론하는 대표성과 명망성을 자임할 수 있었다. 특히 1905년 30세의 나이에 한국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대미 외교를 경험했던 사실은 이후 그가 외교 노선으로 일로매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이승만이 외교의 방식을 선호한 개인적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 생사를 건 투쟁이 아니라 현실주의에 기초해 필요에 따라 시도할 수 있으며 개인적 안전을 보증할 수 있는 방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승만의 외교 노선은 개항기 한반도의 상황 및 국제 정세, 미국-기독교-옥중생활이라는 개인적 경험, 출세 지향성-안전 보증이라는 개인적 특성이 결합되면서 형성된 것이었다. 특히 옥중생활에서 본격화된 미국 선교사-기독교-미국에 대한 그의 신뢰는 유학기간을 통해 신념화되었고, 이를 통해 대미 외교 일변도의 외교 노선이 형성되었다. (98-99쪽)


연구서의 서술로는 좀 아슬아슬한 표현이다. 연구의 엄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연구자는 주제에 대한 직설적 비판을 삼가야 한다. 그래야 나 같은 평론가가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어느 독자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분노에 부들부들 떨었다고 말하는데, 이 정도 표현이면 정말 독자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승만의 행각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객관적 서술만으로도 바닥이 다 드러나 보이는 문제가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미 일변도의 외교로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소득이 있었나? 서중석은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에서 이에 대해서조차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중경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정부의 불신에는 이승만이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1932년 제네바행을 제외하고는 1920년대 중반 이래 거의 활동을 중지하였던 이승만은 중일전쟁 이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여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외교활동’을 재개하였다. (...) 1943년 여름 태평양협의회의 한 모임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송자문 중국 외교부장에게 한국인들의 저항운동을 평가해줄 것을 요구했다. 송자문은 이승만에게 한길수와 제휴하도록 설득했으나 헛수고였고, 그래서 송자문은 한국인들이 너무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지원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루즈벨트에게 성급히 보고하였는데, 이것이 임시정부 승인 또는 지원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181-182쪽)


1904년의 <독립졍신>은 당시의 ‘외세 줄서기’ 행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국권 수호’라는 명분하에 각자 유리한 나라를 붙잡고 매달리는, “외국 공사들을 영수로 하는 당쟁”의 양상이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미국통’이 되었으나 미국의 한국 개입이 약했으므로 일본 쪽에 붙어 독립협회에서 반러시아 활동을 했다. 1904년 여름 하야시 일본 공사가 그의 석방을 주선한 것도 그의 친일 활동을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1898년의 맹렬한 반러시아 활동에서부터 해방 후의 극단적 반공노선까지 이승만은 러시아-소련에 적대적인 태도를 일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920년대 초부터 1933년 모스크바 방문 때까지 그가 소련에 추파를 보낸 시기가 있다. 미국이 한국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시기에 소련의 지원을 기대한 것이다.


1898년 이승만의 독립협회 활동기에 한국에서 부딪치고 있던 외세는 일본과 러시아였다. 이때 그가 일본을 택한 것은 독립협회에 일본 측 돈이 많이 풀렸기 때문일 것이다.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는 대한제국 조정에 대한 영향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일본은 독립협회의 친일파를 통해 이에 도전하는 상황이었다. 이승만이 러시아에 반대한 이유는 러시아가 백인국가라는 것뿐으로, 일본의 ‘아시아인 단결’ 주장에 호응한 것이었다. 미국이 백인국가라는 이유로 배척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의 외교노선은 피부색보다 돈으로 결정되는 것이었다.


1920년 소련이 거액의 지원금을 상해임시정부 쪽으로 보내는 것을 보고 이승만은 소련에 매달릴 생각을 일으켰다. 소련에 접근할 기회를 꾸준히 노리다가 마침내 1933년 7월 모스크바까지 갔으나 이튿날로 추방당했다. 그의 일관된 반공-반소 노선은 그 시점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일본에 대한 그의 태도 역시 상황에 따라 굴곡을 보였다. 1912년 미국으로 떠난 것이 일본의 박해를 피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때도 그는 식민 통치를 찬양하고 있었다. 1912년 11월 18일 <워싱턴포스트>지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합방 후) 불과 3년이 지나기도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 오늘의 서울은 주민의 피부 색깔을 제외한다면 신시내티와 다를 것이 없다. (정병준 위 책 104쪽에서 재인용)


이듬해 하와이로 가서 민족의식이 강한 교민집단에 의탁하게 되면서야 반일적 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민사회 내에서만 항일 얘기를 했을 뿐, 대외적으로는 일본에 적대적인 태도를 표하지 않았다. 심지어 1923년에는 자기가 운영하던 한인기독학원 학생들을 모국방문단으로 보내면서 하와이 일본영사관과 교섭, 일본 여권을 가지고 가게 하기까지 했다. 이 조치에 대한 사례로 일본영사관은 이승만에게 상당액의 학교 건축비를 지원해 줬다. 한인 학생들을 일본 국민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직함을 아직도 가지고 있을 때 한 짓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일본과 평화로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 동안 일본을 적대하지 않았다. 중일전쟁이 터진 후 1939년 워싱턴으로 건너가면서 일본을 적대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그는 친미파 한국인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인이었으며, 직업은 지한파(知韓派) 정치브로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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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13세이던 1887년부터 과거제가 폐지된 1894년까지 거의 해마다 과거에 응시했다. 그리고 1895년에 배재학당 영문부에 입학했다. 3살 때부터 서울에서 살아온 그가 21세가 되어서야 신교육을 향한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 그는 출세할 길을 찾았을 뿐이다.


유소년기에 형성된 이승만의 성격을 정병준은 이렇게 요약했다.


이승만은 어릴 적부터 5대 독자로 자란 데다 아버지가 방랑벽으로 오랫동안 집을 비움에 따라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 어머니와 둘이서 외롭게 생활하면서 ‘수탉형’의 외향적 성격과 유아독존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승만의 독선적 성격이 어머니를 통해 성장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아버지의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성격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유년기의 영향에서 출발한 가부장적 권위주의는 오랜 망명 생활 속에서 다져졌으며, 본능에서 우러나와 제2의 천성이 된 마키아벨리적 성격과 함께 그의 주된 자질이 되었다.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61-62쪽)


배재학당에 다니는 동안 여러 미국인 선교사들과 친분을 쌓은 이승만은 졸업하던 해인 1898년 내내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 참가했다. 특히 11월의 독립협회 탄압 때 치열한 투쟁으로 주목을 받아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곧 박영효 쿠데타 음모에 연루되어 1899년 1월에 투옥되었고, 탈옥 시도에 실패한 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5세 나이까지 그는 자기 현시욕이 강한 일개 출세주의자였다. 그런데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의 감옥생활 동안 특이한 지도력의 기반을 닦아놓았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책을 읽으며 서양 사정을 잘 알게 되었고, 1902년 말 기독교로 개종한 후 많은 동료 죄수들을 개종으로 인도했다. 후일의 중요한 지지자들 여럿이 이 죄수들 중에 있었다.


옥중에서 이승만이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감옥 안에 그를 위해 도서실과 학교를 만들 정도의 특별대우 덕분이었다. 이 특별대우는 선교사들 덕분이었다. 정부는 서양 열강의 일본 견제를 원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을 극히 우대했고, 선교사들은 좋은 목사감으로 배재학당 시절부터 주목해 온 이 젊은이의 보호와 지원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선교사들의 기대에 유감없이 부응했다.


석방 3개월 후인 1904년 11월 이승만은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대한제국 정부의 외교적 사명으로 미국에 갔다는 그의 주장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강화되는 일본의 압력 앞에서 고종이 밀사 외교 추진에 온갖 수단을 다 시도하는 와중에 그에게도 주변적 역할이 조금 떨어졌을 수는 있지만, 유학생으로 건너가는 길에 심부름을 맡은 정도였을 것이다. 그는 고종이 자기를 보자고 부른 것을 거절했다는 주장까지 했다.


그런 신분으로 미국 도착 8개월 만에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재간이다. 절에 가서 새우젓 얻어먹는 정도가 아니라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일 재간이다. 특히 1905년 8월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면담에서 그의 기막힌 수완이 빛을 발했다. 그는 대한제국 정부나 황제의 명령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와이의 한국계 주민 8천 명의 청원 대표 윤병구 목사를 수행해서 미국 대통령을 만난 것이었다. 이 면담 덕분에 많은 미국인들이 그를 대단한 인물로 여기게 되었다.


1905년 2월에서 1910년 7월까지 11 학기 동안 이승만은 학부에서 시작해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워낙 머리가 좋아서인지 ‘외교활동’ 틈틈이 공부를 한 것 같은데도 기록적인 단기간에 학업을 마친 것이다. 선교사들의 도움이 여기에도 큰 작용을 했다. 언더우드, 스크랜턴 등 서울의 선교사 여러 명이 미국 교회 지도자들에게 총 19통의 추천서를 써주었다고 한다. 한국의 교회 지도자로 육성될 인물로 추천된 이승만은 장학금을 얻는 것은 물론, 예외적인 단기 수학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가 목사가 되기를 바란 선교사들의 후원과 추천 덕분에 얻은 학위를 그는 정치활동을 위한 밑천으로 삼았으니 일종의 배신이다. 그러나 그는 배신에도 뛰어난 재간을 가진 사람이었다. 배신한 상대에게 아주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배신의 결과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도록 상대를 설득해 계속해서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유학기간 중 향후 그의 정치노선을 짐작하게 할 만한 일이 하나 있었다. 1904년부터 일본에 고용되어 대한제국 외교고문으로 일하던 미국인 D W 스티븐스가 미국에 돌아가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통감정치를 찬양하고 옹호하여 한국 교민들의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908년 3월 23일 두 명의 교민 장인환과 전명운이 각자 스티븐스를 살해하려고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그를 공격, 살해한 ‘스티븐스 사건’이 일어났다. 교민사회 간부들은 영어를 잘하는 이승만에게 두 사람을 위한 통역을 부탁했는데, 그는 이것을 거부했다.


그는 학생 신분이며, 기독교인으로서 살인범을 도와줄 수 없다는 이유로 통역 일을 거절했다. 정치활동은 열심히 하는 사람이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 다른 일에 나서지 못한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거니와, 기독교인 핑계는 해도 너무했다. 살인범에게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믿음이라면 진정한 기독교인에게는 모욕이다.


핵심 문제는 장인환과 전명운의 행위의 정치적 의미를 주장하는 일을 이승만이 거부했다는 사실에 있다. 평화 노선을 주장하며 폭력 사용을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미 끝난 행위의 동기가 민족적 울분에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폭력 사용에 동참하는 것과 다른 일이다.


목적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방법이 달라도 서로를 인정한다. 방법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민족운동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자기 방법에 대한 집착만 있을 뿐, 목적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다. 이승만 ‘외교독립노선’의 성격은 스티븐스 사건에서 드러났다. 그는 언제나 현시욕이 강한 출세주의자였고, ‘외교독립노선’은 그를 위한 하나의 도구였을 뿐이다.


그렇게 보면 그가 임시정부 ‘대통령’의 직함을 걸고 미국의 신탁통치를 청원한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힘들여 독립운동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적당히 처신해서 직함을 따내고, 그 직함을 이용해 예속상태를 자기에게 유리한 다른 예속상태로 바꾸는 것이 그의 ‘사업’이었다. 해방 후까지도 그는 진정한 독립이 아니라 자기에게 유리한 예속상태를 계속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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