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1일)에 꺼냈던 중경 임시정부 이야기를 계속하겠다. 오늘은 김구의 거취에 초점을 두고 해방 전후 임정의 상황을 설명하겠다.


임정이라 하면 누구나 바로 백범 김구를 떠올린다. 김구는 과연 상해 임정 설립 때부터 참여했고, 1923, 1926, 1935년, 임정이 위기에 몰릴 때마다 앞장서서 지킨 인물이었다. 1935년 임정 반대파가 민족혁명당을 결성해 임정의 기반이 무너질 때 국무위원으로 복귀한 후로는 10년간 임정을 이끌었다. 임정의 가장 큰 공로가 ‘대한민국’의 깃발을 26년간 중단 없이 지킨 것인데, 이 연속성을 뒷받침한 가장 중요한 인물이 김구였다.


한 국가를 대표한다는 조직이 긴 기간 동안 한 인물로 상징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조직의 한계성을 말해주는 측면이 있다. 김구의 불요불굴한 의지는 임정의 연속성을 위해 요긴한 조건이었지만, 임정의 포용성 측면에는 장애가 되기도 했다. 특히 좌익에 대한 김구의 반감이 큰 작용을 했다. 김구의 반감이 처음에는 국제주의 성향의 골수 공산주의를 향한 것이었지만, 공산주의에 대해 포용적이거나 타협적인 중도파까지 배척함으로써 스스로를 ‘극우’의 입장에 가둔 장면도 적지 않았다.


서중석은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펴냄)에서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 진영을 좌파와 우파로 구분하고 우파를 다시 합작파와 국수(國粹)파로 나눠 보면서 김구 중심의 국수파 분위기를 이렇게 그렸다. (174-175쪽)


중국 관내에서의 좌우충돌에는 세대 간의 사상적 갭도 작용하고 있었다. 한국독립당의 지도층은, 19세기 후반 또는 19세기 말경에 유년, 청년시기를 보내고 전통적인 지적 성장을 하여, 일면으로는 위정척사파적인 기질도 갖고 있는 원로들로서, 양반계급 출신이 많았으며, 근대교육을 적게 받은 편이었다.

그런데 젊은 사회주의자들은 지나치게 급진적인 경우가 적지 않았고, 독립운동의 선배에 대해 어른 대접을 잘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측의 원로들은 김원봉 등이 나이가 젊고 충동적이며 환상에 차 있고 언행이 너무 편격하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중요시하지 않았고, 젊은이들은 노인들에게 싫증을 내면서, 그들을 ‘봉건영수’, ‘민족 파시스트’, ‘신비적 국수주의자’로 간주하였고, 국수주의를 배척하자고 외쳤다.

한독당의 원로들은 강렬한 충군애국의 관념을 갖고 한국의 고유문화 발양을 크게 중시하였다. 그리고 서양문화에도 반대하였고, 더더욱 공산주의 사회주의에는 반대하였으며, 소련과의 연합도 반대하였고, 반제반전의 일본민중과 연합해야 한다는 주장도 반대하였다. 그들은 친중국적이어서 중국에서 유교문화의 훈도를 받아온 것을 감사해 하고, 중국의 원조를 더욱 많이 받아 임시정부가 영향력을 확대하면, 다른 나라를 배경으로 한 독립적인 기구는 생겨나지 못할 것이라고 장개석 정부에 언명하였다.


김구 일파가 임정을 장악하고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중국 민족주의자들의 지지와 지원에 있었다. 그 사이의 유대감은 전술전략 차원이 아니라 철학 차원의 세계관과 문명관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1932년 이후 장개석 정부의 지원이 확대되면서 김구 일파는 임정 장악력을 유지하고 독립운동 진영 내의 주도권을 노릴 수 있었다.


1935년의 민족혁명당 결성은 중도 우파(합작파)가 좌파에 가담해 김구 일파(국수파)를 고립시킨 일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아직 살펴보지 못했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립하고 있던 당시 중국 상황 속에서 임정이 국민당과 밀착해 극우노선을 취하는 데 대한 반발이었던 것 같다. 그 때 김구는 장개석 지원금의 독점 사용 문제로 임정 국무위원직을 벗어나 있었는데, 7인의 당시 국무위원 중 5인이 민족혁명당에 동조해 사임하자 이동녕, 조완구와 함께 국무위원으로 돌아와 정면돌파의 길을 걸었다.


1936년 말 서안(西安)사건 이후 중국의 제2차 국공합작이 이뤄지면서 우리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정면대결의 조건이 해소되었다. 뒤이어 중일전쟁이 터져 대일 항쟁의 한-중 협력 분위기가 강화되고 일본 제국주의의 한계가 가시화됨에 따라 독립운동 진영도 통합의 기운을 타게 되었다. 1940년 임정이 중경에 자리 잡고 새 출발을 하면서 통합 작업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임정 반대파가 임정을 비판해 온 가장 큰 이유가 ‘허위(虛位)’, 즉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임정과 결별한 뒤 민족혁명당 측은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항일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임정이 1940년 9월에야 광복군을, 그나마 지휘권도 없고 병력도 없는 사령부만을 만든 데 비해 할 일을 열심히 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 상황은 국민당의 지원을 받는 임정의 입장을 뒷받침해 주었다. 민족혁명당 측과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중국공산당 쪽으로 넘어간 뒤 잔류세력은 1942년 말까지 임정에 합류했다. 민족혁명당 측은 1941년 10월에 임정 참여를 결정했으나 한독당으로 조직되어 있던 김구 지지세력이 이를 봉쇄하려 했기 때문에 합류에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1941년 10월 33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일어난 ‘김붕준 탄핵사건’은 국수파가 민족혁명당 측의 진입을 막는 데 거의 파시스트 수준의 배타성을 보인 일이었다. 대한민국 국회의 미개성과 폭력성에 못지않은 행태였다. 결국 국수파가 고집을 꺾고 민족혁명당 측을 받아들인 것은 장개석 정부의 압력에 의해서였고, 그 후 마지막 단계의 임시정부에는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측면이 있었다. 1945년 초 중경에 도착한 탈영 학도병들의 눈에 비친 이 분열의 양상이 지난 주 소개한 장준하 ‘폭탄선언’의 배경이었다.


일본 항복을 앞두고 임정은 중국 정부와 정보를 공유하며 전쟁의 종말을 예견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군 OSS와 합작으로 국내 침투를 준비하다가 실행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다. 해방 소식을 듣고 김구가 독자적 군사행동을 취할 기회 없이 전쟁이 끝난 것을 통탄했다고 하는데, 우리 민족의 능동적 역할이 적었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임정의 능동적 역할이 적은 데 대해서도 아쉬움을 느꼈을 것이다.


김구를 위시한 임정 요인들은 해방 후 백여 일이 지난 뒤에야 환국했다. 미군정의 비협조 때문에 늦어진 것이라고 통상 이해하고 있지만, 임정 측에서 최대한 서둘렀다면 그렇게까지 늦어질 수는 없었을 것 같다. 임정에게는 그때까지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관계가 절대적 중요성을 가진 것이었고, 앞으로의 관계에 대해서도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장개석도 임정을 통한 한국과의 관계에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 김구 측과 장개석 측 사이에 어떤 관계가 펼쳐지는지, 일간 다시 한 번 살펴보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