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파주의 거북마을과 진인선원을, 그리고 어제 용인 백암의 용인백암너싱홈과 안성 죽산의 파라밀 요양원을 둘러보았습니다.
거북마을은 시설이 빈약하고 운영 기준도 '복지'보다 '수용'에 더 중점을 두는 것 같아 내키지 않습니다. 한편 진인선원은 1년 전에 봤던 대로 훌륭한 시설에 운영도 원활한 것으로 보여 더 바랄 점이 없었습니다. 위치 빼고는.
진인선원 수준의 요양원에 모시면 지금까지 병원에 모시고있을 때처럼 자주 찾아뵐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직원과 노인들 사이의 관계가 풍성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가족들 사이에 지내는 것 비슷하게 인간관계를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두 주일에 한 번 정도는 보호자가 들여다봐 드리는 것이 장기적으로 필요하겠지요. 진인선원의 위치 문제는 제 둘째 형을 비롯해 잠재적 보호자들(외삼촌, 이모 등)이 찾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부터 처음으로 당뇨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보호자 역할을 형에게 넘길 가능성도 생각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꼭 보호자 책임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도, 그 동안 일기에서 더러 나타난 대로 둘째 형을 많이 본다는 것이 어머니께 대단히 큰 기쁨입니다. 둘째 형이 쉽게 찾아뵐 수 있는위치란 것이 어머니의 행복에 매우 중요한 조건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제 남쪽의 요양원 두 곳을 찾아가 봤습니다.
파라밀 요양원은 위치도 좋고(죽산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로 기본요금 조금 넘을 정도) 시설도 좋습니다. 그런데 저는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복지보다 수용의 분위기랄까요? 종교사업에 흔히 있는 독선적, 권위주의적 분위기랄까요? 안내해 준 복지사는 더할 수 없이 친절했지만, 시설의 구조 자체가 그런 느낌을 주더군요. 건물 앞쪽의 넉넉한 공간을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발라 주차장만 가득 만들어놓은 점이라든가, 뒤쪽의 (시설 규모에 비해 조그만) 정원으로 나가는 문을 평상시에 잠가 놓는 점이라든가...
용인백암은 150인 수용의 파라밀, 200인 수용의 진인선원보다는 작은 70인 규모이고 위치가 조금 외진 느낌이지만 분위기는 진인선원보다 못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건물 한 동인데, 구조와 구성이 합리적으로 되어 있고, 정원, 텃밭 등 외부 시설이 넉넉하고 좋군요. 집중관리실도 있어서 의료 서비스도 어느 수준 보장되는 것 같고요.
지금 제 생각은 둘째 형에게 파라밀과 용인백암 두 곳을 둘러보게 하고 뚜렷한 의견이 있을 경우 그에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옮기시고 다시 옮기실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보살님들 의견을 얻고자 이렇게 지금 상황을 알려드리니, 생각나시는 점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기협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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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10. 1. 3. 11:50

 (제일 처음 썼던 글을 잃었다가 이제 메일 속에서 찾아 올립니다.)

며칠 전부터 정신이 많이 맑아지신 것 같다. 영양상태, 혈액순환 등 건강의 기반조건이 안정되신 덕분인 것 같다. 그러나 큰 회복을 바랄 일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두 달 되었나? MRI 뇌 촬영을 한 후 한 선생도 "뇌가 쪼그라드신다"는 표현으로, 뇌 세포의 신진대사가 거의 막힌 본격적 노쇠현상이니 이제 더 다른 검사를 해 드릴 필요도 없을 것이라고, 체념을 권했었다.

그래도 좋아지신 상태가 1주일 가까이 유지되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서너 달 동안 사람 못 알아보시는 것은 물론, 주변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는 상태를 반 시간도 유지하지 못하시던 분이 눈알을 또록또록 움직이시고, 주변의 배려를 느낄 때는 입술을 오무려 웃음도 띠신다.

간병인 여사분들이 어머니를 진심으로 귀여워들 하는 것 같아 참 다행이다. 내가 곁에 모시고 있을 때는 긴장이 되지 않는지 입을 떼어 말씀하시는 일이 별로 없는데, 틈 나는 여사분이 있으면 곁에 와서 어머니를 얼려 입을 떼시게 만들어드린다. 모시고 지내는 시간이 나보다 길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어머니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재간들이 참 좋다. 내가 없을 때도 저런 식으로 적당한 자극을 드리려고 애써 주리라 생각되어 참 고맙다.

늙으면 애기가 된다더니, 여사님들 앞에서 어머니는 온갖 애기노릇을 다 하신다. 내가 없을 때 재미있는 반응 보이신 것을 여사님들은 녹화방송도 해준다. 요새만큼 회복되시기 전 언젠가, 식사 준비를 해드리면서 "할머니, 지금 식사가 아침이예요, 점심이예요, 저녁이예요?" 말을 걸었더니, 눈을 모처럼 똑바로 뜨시고는 "지금 나를 시험치는 거냐?" 호통을 치시더라고, 몇 번째 리플레이를 해주면서도 하염없이 재미있어들 한다. 역시 박사 할머니가 다르시다고.

정신이 맑아지시니 걱정되는 면도 있다. 모시고 앉았을 때 눈길이 마주치거나 이마에 뽀뽀를 해드리는 등 조그만 자극이 있을 때, 얼굴을 찡그려 울상이 되시고는 눈물까지 흘리시는 일이 자주 있다. 한 번 그런 상황에서 마침 곁에 김 여사가 있어 물어보았다. 내가 없을 때도 저런 표정을 지으시는 일이 자주 있냐고.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면 역시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심리적 고통을 느끼시는 것일 게다. 내 얼굴을 보며 지나간 일의 어떤 대목이 떠올라 회한에 빠지시는 것이겠지.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오신 일생을 마무리하는 자리에 누워서도 마음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시다니...

그러나 이것도 마음을 다잡아 생각한다. 기나긴 고해를 떠나시는 마당에 회한을 반추할 시간을 가지시는 것도 당신의 일생을 더욱 충실하게 만드는 기회가 아니겠는가. 몸의 고통이 적어서 마음의 고통에 몰두하실 수 있는 것이 그분의 복이라 생각하려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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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10년 새해를 맞으며 역사학도의 마음은 무겁습니다. 백년 전 우리 조상들은 나라 잃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35년이 지난 후 "해방"을 맞았습니다만, 식민지 기간의 갑절 가까운 65년이 더 지나 망국 백주년을 맞는 지금까지도 이 사회의 이런저런 모습을 살펴보며 "이 나라가 해방된 나라 맞나?"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년 이 의문이 더욱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1987년 군사독재가 끝나고 뒤이어 공산권이 붕괴되면서 나라 안팎의 군사적 압력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한국이 한국인의 뜻에 따라 진로를 찾아갈 여건이 나아졌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은 주권국가다운 모습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족국가 완성의 길을 외면하는 행태가 정권 차원에서까지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피상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남한 사회 내부의 통합성조차 시간이 갈수록 더 약해지는 상황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에게 주권의식이란 것이 없는 듯하기까지 합니다. 백년 전의 조상들은 총칼의 위협 앞에 피눈물을 삼키며 주권을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인은 총칼의 위협 없이도 통상 주권, 영토 주권을 미국과 일본에게 갖다바치고 있습니다. 정권을 쥔 소수 집단의 행태만이 아닙니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뭐든 포기할 수 있는 많은 국민들이 "7-4-7" 공약에 현혹되어 도덕성이 의심스러운 그 집단에게 정권을 맡긴 것입니다. 더 그럴싸한 미끼가 있다면, 또는 조그마한 위협이라도 있다면, 나라인들 못 팔아먹겠습니까?


연전 <뉴라이트 비판> 작업을 하면서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을 문명의 길로 이끌어주었다"고 평가하는 한국인들이 있다는 것을 신기해 했습니다. 그런 의식이라면 서아프리카에서 붙잡혀 죠지아의 면화밭에서 일하게 된 노예가 문명세계에 살게 해준 것이 고맙다고 백인들에게 "주인님, 주인님," 하고 굽실거릴 수 있을 겁니다. 그 노예는 고향에 있었을 경우보다 굶어죽을 걱정 덜 하며 더 오래 살았기 쉽지요. 자신을 하나의 인간으로 여기지만 않는다면, 이웃과 가족에 대한 아무 애착이 없다면, 충분히 고마워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식민지배를 고마워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사회의 상황이 잘된 것이라고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가장 잘됐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경제적 성공이겠지요. 그런데 이 사회에서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편안히 느끼는 사람의 수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대다수 국민이 다른 어떤 이유보다 경제적 이유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경제적 고통이 이 사회의 문제의 겉으로 드러난 현상일 뿐이라는 데 있습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를 함께 아끼는 자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바닥이 있습니다. 한국이 많은 다른 나라들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데도 많은 한국인들이 경제적 고통을 받는 것은 사회의 통합성이 약한 문제에서 오는 것입니다.

함께 아낄 사회로 민족이 있고 국가가 있습니다. 내 민족, 내 국가만 아끼고 다른 민족, 다른 국가를 까뭉개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 개인을 희생시키자는 것도 아닙니다. 나 자신, 내 가족을 아끼는 마음과 국가, 민족을 아끼는 마음, 그리고 인류를 아끼는 마음이 적절한 균형을 이룬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심하면 사회가 망해버립니다. 그런데 백년 전 나라가 망할 때의 상황을 돌아보면 지금보다는 한국 사회가 건강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 하는 말로 '정체성'이 뚜렷했습니다. 그런데도 외부의 충격이 너무 강해서 주권을 잃었습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그보다 훨씬 약한 자극 앞에서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습니다.


건강한 사회에서는 권리와 책임이 함께 갑니다. 혜택을 많이 누리는 사람들이 사회에 더 많은 공헌을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재산, 수입, 교육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사회의식이 일반인보다도 못하다는 인상을 주는 측면이 많습니다. '지도층'이 전면적 불신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사회의 건강에 큰 위험 요인입니다.

여러 각도에서 살필 수 있는 문제입니다. 역사학도로서 저는 식민지 경험을 문제의 출발점으로 봅니다. 통치국은 자국 이익을 위해 식민지 사회를 불건강한 구조로 이끄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정책이 건전한 '지도층'의 성장을 가로막고 '협력자' 집단에 그 역할을 맡기는 것입니다.

협력자로서 성공하는 조건은 기술적 능력이 있으면서 사회의식이 약한 것입니다. 개인의 영달을 바라는 '향상심'으로 효율적 식민통치에 공헌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일제 하의 '실력자' 계층으로 자라났고, 그중 심한 경우는 향상심의 목표를 자신이 황국 신민이 되는 데 둔 친일파도 있었습니다. 이 집단이 해방 후 대한민국 근대화의 주역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뉴라이트 논객들이 있는데, 일리 있는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의 소위 '지도층'은 일제시대의 친일파가 일본에 의지한 것처럼 미국에 의지하는 행태를 많이 보여 왔습니다. 자기가 속한 이 사회의 안위는 종주국에서 책임질 일로 생각하면서 종주국이 원하는 일을 찾아 열심히 함으로써 개인의 영달을 꾀하고, 스스로 종주국 백성이 되기 바라는 행태를 그대로 물려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대한민국이 독립국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친일파가 대중을 조작한 미끼는 '근대화'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의식 없는 지도층이 대중을 조작한 미끼는 '경제성장'입니다. 두 구호는 서로 닮은꼴입니다. 실제로는 종주국의 이익에 영합하면서 이 사회를 이롭게 하는 일처럼 가장하고 일체의 사회의식을 억압한 것입니다.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는 그 허구성을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뉴라이트 논객들이 "문명의 길"이라 떠받든 것은 결국 "근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지요. 한국에 근대적 공장도 세워지고 교통시설도 만들어지고 교육, 의료 등 근대적 사업이 시작된 것이 일본의 식민통치 덕분이라는 겁니다.

히말라야 오지나 남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것도 아닌 한국이 일본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그런 변화를 겪지 않고 "은둔의 나라"로 남아 있었을 수 있을까요? 20세기 중엽까지 쇄국정책을 지키고 있을 수 있었을까요? 일본 통치 밑에서 겪은 근대화 정도는 어떤 상태에서라도 겪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20세기 초반 한국의 상황이었습니다.

요는 근대화라도 어떤 근대화였냐 하는 질(質)의 문제입니다. 산업화 중심의 유럽식 근대화는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갈라지는 구조 분화의 과정이었습니다. 통치국인 일본은 착취자 입장에서 근대화의 양지에 서고 식민지 한국은 피착취자 입장에서 음지에 서게 된 데 국권 상실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양지쪽 근대화의 무엇보다 부러운 점은 전통의 발전과 근대화 과제를 얼마만큼이라도 융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멀리 볼 것 없이 당장 일본을 보세요. 일본에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 속에서도 전통의 힘이 한국보다 훨씬 더 큰 몫을 맡고 있습니다. 근대화를 겪으면서도 전통의 힘을 살릴 수 있는 만큼 살려두었기 때문에 탈근대 상황의 새로운 변화 앞에서도 그 힘에 의지할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전통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이 식민지 경험의 가장 큰 피해라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전통"이라 하면 흔히 근대성과 대비되는 과거의 물건으로 여기는 경향이 바로 그 결과입니다. 과거에서 현재를 이어주는 정체성의 연속은 미래를 헤쳐가는 데도 지표가 됩니다. 나라 잃은 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보다, 침략자를 미워하는 것보다, 전통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되찾는 것이 진정한 "해방"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유럽식 근대화와 다른 "전통적 근대화"를 생각해 봅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와 정치가들은 폐쇄적 농업사회 체제의 한계를 느끼고 질서의 변화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농부와 직공, 상인들도 상황 변화에 적응하려 여러 모로 애쓰고 있었습니다. 산업화 중심의 유럽식 근대화를 부득이 채택하게 되었더라도, 전통적 근대화의 노력을 어느 만큼이라도 접목시킬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참혹한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쓸 글이 어느 범위를 다루게 될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1910년의 망국의 의미를 "전통의 상실"이라는 관점에서 최대한 밝혀보려 애쓰겠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무거운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미안합니다만, 저는 당분간 무거운 마음에 머물러 있겠습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