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38> 중국에서 바라보는 한국 (1)

기사입력 2004-08-06 오후 2:26:34


  노무현 행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한국을 떠난 뒤 1년이 넘었다. 한국을 떠나 지낸 제일 긴 기간이었다. 오래 떠나 지내다 보니 한국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면들이 있다. 새로 떠오르는 큰 의문의 하나가 대한민국이 과연 독립국인가 하는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식민통치가 끝나자 한국의 남반부는 미군의 군정하에 들어갔고 3년 후 미군정의 관리하에 대한민국이 출범하였다. 비슷한 시점에 소련의 지원으로 출범한 북반부의 조선인민공화국군이 1950년 6월 25일 침공하여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군은 미군이 주도하는 유엔군의 지휘를 받게 되고 이로부터 반 세기 이상 한국군의 작전권은 유엔군 사령부를 통해 미군 수뇌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군사면에서 대한민국이 완전한 독립국이 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군사 이외의 측면은 어떠한가. 현재 국내 박사학위 소지자가 총 몇 명이고 그중 국내 기관 취득자가 몇 명이며 해외 기관 취득자 몇 명 중 미국 기관 취득자가 몇 명인지 국외에 있으니 자료를 구해 내놓기 힘들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 한국 학술의 거의 모든 분야가 미국 유학파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그 구조가 아직까지 크게 변하지 않고 있음은 상식이다. 학술면에서 대한민국은 아시아 국가 중 미국의 학술체계에 가장 성공적으로 편입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경제, 대중문화 등 다른 부문들도 대동소이하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자립도 신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다. 미국의 직접적인 원조를 벗어나자마자 신흥 경제대국의 하나로 꼽힐 만큼 폭발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마침 1990년을 전후해 공산권이 붕괴함에 따라 유엔에도 가입하고 거의 전세계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는 등 국제사회의 존중받는 일원이 되었다. 국내의 정치사회 분위기도 발전하여 오랜 군사독재의 질곡을 벗어나면서 ‘햇볕정책’ 등 자주적인 국가노선도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다수 중국인의 눈에는 한국이 아직도 미국에 상당 수준 예속된 나라로 보인다. 중국인들이 미국을 최대의 잠재적 경쟁상대로 보는 대립의식 때문에 한국 인식이 편향된 면도 있겠지만, 한국에게 최대의 교역상대로 떠오르고 있는 가깝고도 큰 나라 사람들의 인식은 설령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참고로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의 관점 속에는 국내에서 관성적으로 놓치기 쉬운 적절한 시각도 상당히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인들이 미국보다 중국을 더 중시해 주기를 중국인들은 바란다. 자존심과 실리가 함께 걸린 일이다. 한국의 태도가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그들은 이것이 한국의 특권층을 구성하는 친미세력이 한국 인민의 염원을 가로막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친미세력을 대표하는 것이 한나라당까지 이어져 온 거대정당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이 거대정당의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을 때 그들은 한중관계의 발전에 큰 기대감을 품었고, 김 대통령 재임기간 중의 변화가 그들의 기대에 상당히 부응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재작년 말 노무현 대통령이 예상을 뒤집으며 다시 거대정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자 그들은 한국사회의 대세가 친미의 관성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으로 판단하고 한중관계의 더욱 급속한 발전을 기대하게 되었다. 노골적인 봉쇄든, 은근한 견제든, 미국의 방해가 중국의 국가발전에 큰 장애가 되어 왔다고 생각하는 중국인들은 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 장애를 넘어서는 것을 가장 큰 열쇠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중국인들에게 한국 정부의 이라크 추가파병 강행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라크 침공의 부당성이 갈수록 명확하게 드러나면서 애초에 이를 지지했던 나라들조차 줄지어 입장을 바꾸고 있는 이 시점에서 현 정권의 대통령만이 아니라 국회의 다수당까지 만들어 준 핵심 지지층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숨어서 가듯 새벽길을 떠나게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한국 정부를 미국 정부에 묶어놓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기는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한 한국인 역사학도도 마찬가지다. 이라크 파병의 명분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여지도 없다. 그러면 실리가 무엇인가? 석유? 아무런 보장도 밝혀진 것이 없고, 무슨 보장을 받을 만한 위치도 아니다. 돈? 우리 돈 쓰면서 하는 짓이다.
  
  명분도 없고 실리도 보이지 않는 일이라면 협박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일일까? 신용평가와 북한 문제가 협박의 빌미로 그럴싸하게 입에 오르내린다. 그러나 한 독립국이 하고 싶지도 않고 여러 모로 손해가 될 일을 억지로 하게 할 만한 협박이 되지 못하는 일이다.
  
  이라크 추가파병을 놓고 볼 때 한국은 중국인들의 눈에 참 이상한 나라다. 미국 추종에 열심인 정당과 맞서 이긴 대통령과 정당이 모처럼 정권을 쥐고 있다. 그런 정권이 어째서 옳은 일도 아니고 이익되는 일도 못된다고 온 세계 나라들이 회피하는 짓, 유독 미국 정부만이 원하는 짓을 국민들, 특히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저질러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다.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를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이 역사학도에게도 그런 생각이 든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37>

기사입력 2004-05-03 오후 2:40:09

  공민왕(1352-1374)은 남긴 서화를 보더라도 당대 특급의 교양인이었다. 그리고 전민변정(田民辨正)과 배원친명(排元親明) 등 시의적절한 정책을 보면 판단력과 추진력이 뛰어난 영명한 군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치세 후기는 추문과 혼란으로 얼룩졌고, 그가 비명에 죽은 후 그의 개혁정책은 모두 좌초하고 말았다.
  
  공민왕을 둘러싼 이런저런 추문은 그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날조한 것으로 보인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으로 그가 의심스러운 추문 속에 몰락한 후 그의 경제개혁과 자주권 확보 정책에 반대하던 기득권층과 부원파(附元派)가 집권한 것을 보면 그의 개혁정책에 대한 저항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민왕의 온갖 추문은 수구파가 자기네 저항을 정당화하기 위해 뒤집어씌운 ‘네거티브 정치’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했어도 개혁의 씨앗은 살아남았다. 그가 한미한 출신의 신돈을 앞장세워 개혁을 추진한 것은 기존의 정치권에서 개혁의 주체로 내세울 세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개혁추진을 위해 과거 출신의 신진관료층을 적극 등용했다. 신돈과 공민왕이 사라진 뒤 수구파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 속에서도 이들은 고려 정계의 중견세력으로 성장하며 개혁의 주체로 다시 나설 길을 모색하게 된다.
  
  공민왕이 죽은 십여 년 후 최영 세력이 이인임 세력을 축출한 것(1388)은 수구정권의 내부 모순이 폭발한 것으로, 정권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인임의 오랜 독재체제가 무너짐으로써 변화의 조짐이 보임에 따라 개혁 성향 관료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게 되었다. 이 때 이들이 주목한 것이 명문세가 출신의 최영과 대비되는 변방 출신의 무장 이성계였다. 국제정세의 불안정으로 무관의 위상이 극히 높던 이 시점에서 고려의 기존 정치권에 얽혀 있지 않은 이성계는 개혁파 관료들이 가장 믿음을 줄 수 있는 실력자였다.
  
  1388년의 위화도 회군은 한낱 쿠데타가 아니라 공민왕의 개혁으로 돌아가는 신호탄이었다. 이색, 조준, 정몽주, 정도전 등 공민왕대에 등용되어 개혁정책에 종사하던 신진관료들이 이성계 등 회군파의 비호와 지원 아래 경제개혁정책의 재수립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곧 강경파와 온건파,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좌파와 우파로 갈라진다. 공민왕대 개혁정책의 부활 수준을 바라보는 온건파는 당시 사유재산의 주종인 사전(私田)을 통제는 하되 유지하려 한 반면, 더 나아가 혁명적 변화를 꾀하는 강경파는 사전을 통째로 없애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는 과전법을 추진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는 경제개혁의 범위를 둘러싼 이 정쟁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온건파는 개혁의 지향성을 저촉하지 않는 한 기존 체제를 최대한 온존하려 하였으므로 개혁에 저항감을 가진 세력도 이에 동조하여 개혁의 속도를 늦추려 하였고, 이들은 왕실에 대한 충성이라는 명분으로 상당한 결속력을 이룰 수 있었다. 한편 강경파는 20여 년 전 신돈의 개혁을 환영하여 신돈을 성인(聖人)이라 칭송하던 민중의 지지를 결집하며 반대파의 구심점이 된 국왕과 대립하게 되었다.
  
  최영 세력을 숙청하며 우왕을 폐한 이듬해에 다시 창왕을 폐한 것은 강경파가 승리한 결과였다.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손으로 몰아붙인 것은 이긴 자의 자기정당화를 위한 책략이었거니와, 왕실의 먼 지손 정창군을 공양왕으로 추대하였으나 공양왕 역시 고려 왕조의 지속을 바라는 입장에서 이성계 일파가 추진하는 변화에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색과 정몽주를 필두로 하는 온건파는 1392년 4월 이후 이성계가 부상으로 조정에 나오지 못하는 동안 강경파 핵심인물들을 체포하고 귀양보내는 등 반격에 나섰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진 뒤였다.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격살된 뒤 7월 17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한 저항은 더 이상 없었다. 1390년부터 시행된 과전법은 이리하여 새 왕조의 기초가 되었다.
  
  차떼기 정국은 한나라당을 위축시키고 탄핵 정국은 민주당을 몰락시켜 열린우리당의 총선 승리를 가져왔다. 총선의 이런 결과를 가져온 민심은 미래에 대한 전망보다 과거에 대한 비판을 더 많이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권을 위한 정권’의 단계를 벗어나 현실에 제대로 대응하는 정치를 연다는 점에서 위화도 회군에 비견할 의미가 있다. 열린우리당의 정체성 문제가 총선에 이기고 난 뒤 제기되는 것은 ‘과거 청산’이라는 기존의 과제를 성공적으로 처리해 낸 결과다.
  
  진짜 정치는 이제부터다. 분배 문제를 제대로 다뤄보지도 못하던 수십년간의 ‘정치 실종’ 상황 속에서 누적된 모순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당면한 과제다. 더 이상의 모순 누적을 막으면서 기왕의 모순을 서서히 해소시켜 나가자는 온건론과 모순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자는 강경론이 진지하게 맞서는 것은 당연하고도 바람직한 대결이다.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 과정에서 경계할 만한 가르침은 정치적 대결에서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이다. 당시의 온건파는 수구파와 제휴함으로써 왕조체제의 전복을 초래했고, 강경파는 폭력을 남용함으로써 명분을 훼손했다. 그 결과 내부적으로는 많은 인재가 개혁의 대열에서 이탈했고, 외부적으로는 명나라에 대한 종속도가 심화되었다. 전지구적 경쟁의 세계 속에서는 더더욱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Posted by 문천

그저께 파주의 거북마을과 진인선원을, 그리고 어제 용인 백암의 용인백암너싱홈과 안성 죽산의 파라밀 요양원을 둘러보았습니다.
거북마을은 시설이 빈약하고 운영 기준도 '복지'보다 '수용'에 더 중점을 두는 것 같아 내키지 않습니다. 한편 진인선원은 1년 전에 봤던 대로 훌륭한 시설에 운영도 원활한 것으로 보여 더 바랄 점이 없었습니다. 위치 빼고는.
진인선원 수준의 요양원에 모시면 지금까지 병원에 모시고있을 때처럼 자주 찾아뵐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직원과 노인들 사이의 관계가 풍성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가족들 사이에 지내는 것 비슷하게 인간관계를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두 주일에 한 번 정도는 보호자가 들여다봐 드리는 것이 장기적으로 필요하겠지요. 진인선원의 위치 문제는 제 둘째 형을 비롯해 잠재적 보호자들(외삼촌, 이모 등)이 찾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부터 처음으로 당뇨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보호자 역할을 형에게 넘길 가능성도 생각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꼭 보호자 책임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도, 그 동안 일기에서 더러 나타난 대로 둘째 형을 많이 본다는 것이 어머니께 대단히 큰 기쁨입니다. 둘째 형이 쉽게 찾아뵐 수 있는위치란 것이 어머니의 행복에 매우 중요한 조건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제 남쪽의 요양원 두 곳을 찾아가 봤습니다.
파라밀 요양원은 위치도 좋고(죽산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로 기본요금 조금 넘을 정도) 시설도 좋습니다. 그런데 저는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복지보다 수용의 분위기랄까요? 종교사업에 흔히 있는 독선적, 권위주의적 분위기랄까요? 안내해 준 복지사는 더할 수 없이 친절했지만, 시설의 구조 자체가 그런 느낌을 주더군요. 건물 앞쪽의 넉넉한 공간을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발라 주차장만 가득 만들어놓은 점이라든가, 뒤쪽의 (시설 규모에 비해 조그만) 정원으로 나가는 문을 평상시에 잠가 놓는 점이라든가...
용인백암은 150인 수용의 파라밀, 200인 수용의 진인선원보다는 작은 70인 규모이고 위치가 조금 외진 느낌이지만 분위기는 진인선원보다 못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건물 한 동인데, 구조와 구성이 합리적으로 되어 있고, 정원, 텃밭 등 외부 시설이 넉넉하고 좋군요. 집중관리실도 있어서 의료 서비스도 어느 수준 보장되는 것 같고요.
지금 제 생각은 둘째 형에게 파라밀과 용인백암 두 곳을 둘러보게 하고 뚜렷한 의견이 있을 경우 그에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옮기시고 다시 옮기실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보살님들 의견을 얻고자 이렇게 지금 상황을 알려드리니, 생각나시는 점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기협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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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