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7. 16:30

68년 전인가? 이윤재 선생님, 이혜숙 선생님과 어머니가 함께 이화여전 입학하셨던 것이. 이화대학에서 함께 근무하시다가 80년대 후반에들 퇴직하실 때까지 참 오랫동안 많은 것을 함께 하신 분들이다. 요즘 기억과 기억력을 많이 회복하고 계신 참에 두 분 방문을 받고 정말 벼라별 옛일이 다 떠오르시는 것 같다.

두 선생님도 참 기뻐하신다. 쓰러지시기 한 달 전이니까 벌써 2년 반이 되었구나. 어머니가 우리 집 다니러 오셨을 때 두 분이 일산으로 찾아와 점심 함께 하셨던 것이. 그때도 사람을 잘 못 알아보실 때였지만 두 분 알아보시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워낙 오랜 친구들이시니까. 그런데 오늘은 알아보시는 것도 그때보다 더 명쾌하신 것 같고, 옛일도 더 잘 기억하시는 것 같다. 보름 전 기억력 회복되신 것을 보고 놀랐는데, 오늘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김호순 선생님 역시 알아보지 못하실 수가 없는 분이다. 국문과 동료로, 열두 살 차이지만 어머니와는 꼭 자매간처럼 지내신 분. 지난 3월 일산의 병원으로 찾아오시고, 요양원 옮긴 뒤로는 처음이시다. 시병일기를 메일로 보내드리기 때문에 어머니 상태가 좋아지신 것을 알고 무척 벼르시다가, 막상 와뵙고는 너무너무 좋아하신다. 꼭 소녀 같으시다. 78세 노인이신데, 연상의 세 분과 함께 있으니 진짜 소녀 기분이 드신 것도 같고.

세 분과 한 분 한 분 반갑게 인사를 나누신 뒤에 뒷전에 있던 내가 눈에 띄니까 순간적으로 얼굴이 확 풀어지신다. 애기 얼굴이 되신다. 내가 반가운 건 다른 분들 반가운 것과 차원이 다르게 나타나서 민망할 정도다. 고개를 쭉 빼어 나를 쳐다보며 벙긋벙긋하시다가, 순간 실태를 깨달으신 듯 얼렁뚱땅하신다. "어? 너도 왔냐? (사람들을 둘러보며) 저 녀석이 내 아들 같은데요?" 그러고 노래가락으로 넘어가신다. "내 아들이면 어떻고 내 아들 아니면 어떠냐? 와줘서 고맙다~"

원장님도 와서 수인사가 대충 끝난 뒤 나는 차에 돌아와 선생님들 가져오신 귤을 부엌에 넣고, 잠시 기다려 남지심 선생님과 <불광> 남동화 보살님을 마중했다. 남 선생님은 그 사이 요양원에도 두어 번 다녀가셨고 남 보살님은 나랑은 초면이지만 어머니랑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온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두 분을 모시고 올라가니 역시 바로 알아보고 반가워하신다. 다섯 분 손님과 나, 원장님, 일곱 사람에게 둘러싸여 어머니 말씀, "아니 이게 웬 일이야? 오늘이 또 내 생일이야?"

신종플루 때문에 위생보안이 삼엄한 때이기도 해서, 이렇게 여러분이 오시면 3층에 앉기로 양해가 되어 있었다. 올라가서는 <불광> 쪽 볼일이 있으면 보시라고 세 분 선생님께서 잠시 자리를 비켜 주셨지만 <불광> 쪽도 크게 볼일은 없었다. 그래도 불교도들끼리 앉은 틈을 이용해 반야심경을 한 차례 외웠다. 어머니가 기운차게 외우시는 모습을 보며 남 보살님도 놀란 기색이었지만, 기력이 없으실 때도 종종 찾아와 쭉 봐 오신 남 선생님은 정말 감동이 크신 것 같았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선생님들이 가져온 과자를 먹으며 꼬박 두 시간 동안 잡담이 이어졌다. 학창시절까지 공유하는 두 분 이 선생님, 그리고 어머니 퇴임 전후 이십여 년간 학교 일만이 아니라 생활의 거의 모든 면에서 밀착되어 있던 김 선생님에게 둘러싸여 앉았으니 정말 벼라별 얘기가 다 나왔다. 내가 새로 듣는 얘기도 꽤 있었다. 돌아가신 분들 말씀도 많이 나왔다. 살아남은 분들이 먼저 가신 분들 얘기를 하려면 뭔가 처연한 기분이 들기 쉬울 텐데, 오늘 그 자리에선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어머니가 기억 저쪽으로 사라졌다가 돌아오신 것 같은 느낌이 생사의 경계를 가볍게 느끼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가 옛날 일을 기억하며 부끄러움 같은 것도 느끼시는 감이 있었다. 특히 김 선생님이 꺼낸 "연애대장" 대목에서. 돌아가신 김초열 여사님, 이숙훈 여사님과 어머니가 그 방면에서 "삼총사"로 통했다고. 좋은 얘기 들을 만한 분이 눈에 띄었다 하면 세 분이 몰려가 "녹여버리려" 드는데, 두 분 여사님은 물적 자원(음식 등)에 주로 의존하시는데 어머니는 지적 자원으로 두 분과의 경쟁에서 늘 우위에 서셨다고. 김 선생님은 어머니 찬양하는 뜻에서 꺼낸 이야기겠지만, "구도"에 대한 어머니의 열성이 좀 지나치시다고 나도 느껴오던 일에 "연애" 이름까지 붙여 내놓으니 좀 열쩍으셨을 거다.

그 얘기만이 아니라 세 분 선생님과 함께 떠올리는 이런저런 옛 일들이 이제 막 되살아나고 있는 어머니의 감성에 자극이 강한 것이 많았을 것 같다. 오늘 말씀을 거의 노래가락으로 일관하신 것도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서적 완충 효과가 있으니까. 노래가락 화법에 두 분 이 선생님도 많이 즐거워하셨지만, 특히 김 선생님은 좋아서 정말 어쩔 줄 모르신다. 처음 앉아서부터 흉내를 시도하다가, 후반부 들어서는 중창 가닥이 제법 어울리기에 이르렀다. 원래 연극 전공으로 표현력이 뛰어나신 분이니까 그렇기도 하고, 어머니와 다년간 교감의 폭과 깊이가 크기 때문일 것도 같다.

어머니 생활 환경이 훌륭한 것에 대해서도 세 분 선생님이 기뻐하셨다. 시설이 좋은 데 우선 놀라시고, 직원들과 간병인 여사님들 친절한 태도에 다시 놀라신다. 평생 사회활동을 해온 분들이기 때문에 꾸민 친절과 진짜 친절을 잘 구별하시는 분들이다. 이사장님이 오랫동안 장애인 사업에 뜻을 지켜오신 배경을 설명해 드리니 끄덕끄덕하신다. 사업주가 수익성에 연연하지 않고 봉사의 목적을 분명히 한다는 것은 직원들이 건전한 자세로 일할 수 있는 충분조건은 아니라도 필요조건은 될 것이다. 연규 형과 연호, 아들 형제가 다 미국에 자리 잡고 있는 이혜숙 선생님은 여기 들어와 살 생각도 나시는 모양이다. 장기요양보험을 알아보겠다고 하신다.

남 선생님과 남 보살님이 먼저 떠나고, 2층에 내려와 세 분 선생님과 잠깐 앉았다. 한 달 전만 해도 두 시간 넘게 앉아 계시면 힘들어 하시던 생각이 나서 스테이션에 앉아 있는 간호사에게 슬며시 물어봤다. 친구들 때문에 흥이 겨워 평소보다 활동량이 많으신 것 아니냐고. 요새는 평소에도 저 정도 활동은 하신다는 대답이다.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금강경을 몇 꼭지 읽었다. 그런데 늘 하시던 독경식 낭송이 아니라 특이한 방식이라서 잠깐 어리둥절했는데, 생각해 보니 노래가락 화법을 낭송에도 적용시키고 계신 것이다. 노래가락 화법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앞으로도 더 생각할 것이 많은 것 같다.

오랜 친구들과 모처럼 몇 시간 흥겹게 지내신 뒤에 떠나 보내기가 좀 힘들지 않으실까 걱정했는데, 근래 언제나처럼 선선하시다. 욕심이 없으신 거다. 먹을것도, 사람도, 있으면 즐기신다. 그렇다 해서 없다고 박탈감을 느끼지는 않으시는 것이다. 뒤에 처져 있던 내게 "넌 안 가도 되는 거지?" 하시기에 "제가 모셔다 드려야죠." 했더니, "어, 그래, 잘 모셔드려라." 하신다. 미안한 마음에 "어~머~니~ 가기 전에 뽀뽀 해드리고 싶어요~ 허락해 주세요~" 엉구럭을 떠니 속을 뻔히 알지만 싫지 않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쑥 내밀어주신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세 분 선생님이 기쁜 마음을 거듭거듭 표하신다. 어머니 건강도 여러 해 전부터 안 좋으신 데다 자식들도 안정된 위치에 있지 못해서 늘 마음에 걸리셨을 것이다. 그러다가 저렇게 기운을 차리시고, 게다가 즐겁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시는 것을 보니 너무나 기쁘신 것이다. 인연이 깊으신 분들과 이런 좋은 자리 만들어드렸다는 것이 내 스스로도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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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27. 16:23

양구에서 일찍 출발해 이천 가는 길에 여주 들러 오랫만에 이모님을 모셔다가 자매상봉 시켜드릴 생각을 했었다. 두 시간 반 가량 더 쓰면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아침결에 눈이 펑펑 쏟아져 출발이 늦어지는 바람에 포기하고, 대신 돌아오는 길에 군포의 대규 형님에게 들르기로 했다. 형수님이 아내를 무척 좋아하고 미더워하시는 위에, 지금 마침 새 간병인이 필요한 참이라 아내와 의논하고 싶어 한다. 하기야, 이모님은 이 형수님보다 연세도 아래고 거동도 아직 자유로우니 형수님부터 챙겨드리는 편이 옳기도 하다.

이포 와서 점심 먹고 1시 반쯤 요양원에 도착했다. 마침 기저귀를 갈고 계시는데 문으로 누워계시는 얼굴만 보였다. 아내가 들어가니 해맑은 표정으로 좋아하신다. 잠시 후 휠체어를 타고 나와서 나를 보시더니 놀란 표정으로 "어? 너도 왔냐?" 하신다. 아내 얼굴은 나와의 관계와 별도로 "좋은 사람"으로 입력되어 있는 것이다. 아내는 어머니가 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하신다고 서운해 하곤 했었는데, 이제 체념이 된 셈일까? 따로따로 반가워하시는 것이 싫지 않은 기색이다.

날씨가 추워져 옥외에는 모시지 못하고 병실 앞 복도 건너편의 테이블에 두 시간 남짓 모시고 앉아 있었다. 시설이 좋아 옥내 공기도 깨끗하게 유지하고, 벽면 전체의 유리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도 좋아서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 그리 아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햇빛을 마주보고 앉아 가끔 실눈을 뜨고 볕을 즐기시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막 도착한 에스터 엄마의 선물부터 구경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원장님이 "선물부터 보세요." 하는데 여사님이 벌써 선물보따리를 가져오고 있다. 여사님들 순환근무 간격을 한두 주일로 하다가 근래 한 달로 고정시켰다고 하는데, 간격이 긴 편이 여사님들이 노인분들의 필요를 파악하는 데는 확실히 더 낫다.

벌써 두 번째 도착한 에스터 엄마의 선물에 요양원의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고 있다. 원장님 이하 직원들에서 아직 정신 있는 노인분들까지. 내가 봐도 놀랍다. 김 여사는 정말 "선물"의 의미를 잘 아는 사람이다. 받는 사람에게 "생각지 못했던 기쁨"을 주는 의미. 제자로서 대하기 시작했던 사람이지만, 근년 연락이 이어진 이후 정말 괄목상대하게 되었다. 하기야 그도 이제 50을 바라보는 원숙한 나이가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한 일이지만, 신앙을 통해 그만한 원숙에 이르는 것이 교인 아닌 나로서는 신기한 일이다.

우리 내외가 그 동안 그만하면 알뜰하게 어머니를 챙겨드린 셈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김 여사의 정성을 보며 더욱 분발할 생각이 든다. 병원에 계시는 동안에는 necessity를 충족시켜 드리는 것이 우리 역할이었지만, 이제 enjoyment에 중점을 둘 상황이다. 매일 가 뵙던 것이 격주로 뜸해진 만큼, 이 노인네를 이번 가는 길엔 뭘로 좀 놀라게 해드릴까, 궁리 좀 하는 게 좋겠다.

이번 선물의 백미는 에스터가 짜준 자주색 털실모자다. 전번에 보내준 빨강 스카프를 두르고 그 모자를 쓰고 흐뭇한 표정으로 앉아 계신 어머니를 보니, 어머니의 행복한 만년이 더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아마추어 악단의 양로원 방문 연주를 담았다는 CD는 요양원에서 쓰시라고 드렸다. 그리고 또 하나 별난 물건이 있는 것은 대규 형님을 위해서 챙겨 넣었다. 두통이나 피로에 좋다는 눈 쿠션인데, 어머니껜 필요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 마음가짐이 이제 두통 같은 건 완전히 작별하신 것으로 보인다.

노래가락 화법을 전보다는 절제해서 쓰신다. 평상 화법과 노래가락 화법 사이를 수시로 오락가락하시는데, 아무래도 우리에겐 통상 화법을 더 많이 쓰신다. 메시지 내용의 집중도가 떨어지면 노래가락으로 넘어가셨다가, 다시 집중하실 때는 통상화법으로 돌아오시는 것이다.

지난 목요일쯤 작은형이 다녀간 모양이다. 형이 다녀갔냐고 여쭈니, 뜻밖에도 기억하고 계시는 것 같다. 아내가 형에게 전화를 돌려 바꿔드리니까 바로 대화에 들어가신다. "뭐? 토요일날 온다고?" 하시는 걸 보니 형이 방문 약속을 들이댄 모양이다. "그래, 알았다." 하고 조금 후에 어머니가 눈을 장난스럽게 부릅뜨며 전화기에 대고 큰소리를 치신다. "너 토요일날 꼭 와야 한다. ...... 그 날 안 오면 넌 내 자식도 아니다!"

그 때만 해도 긴가민가 했다. 그냥 신나는 김에 큰소리 한 번 치신 건지, 아니면 작은형을 어떻게 대해야겠다는 목적의식이 있으셨던 건지. 그런데 얘기가 몇 마디 진행되면서 어머니가 형 걱정을 어떻게 해주시고, 그 걱정이 얼마나 자상한 것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불쑥 나를 돌아보며 물으시는 것이었다. "기목이 그 녀석... 풀어놓을 게 있을 때 어디 가서 풀어놓냐?"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가지만 뾰족한 수도 없는 일이라 나는 건성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는데, 어머니는 집요하게 파고드신다. 결론인즉, 기협이 네놈한테 풀어놓지 못하면 그 녀석이 어디 가서 풀어놓겠냐는 말씀이시다. 요컨대 날 보고 작은형 보호자까지 맡으라시는 것이다. "형한테 잘 대해줘야지, 네 형인데." 결론을 내리신다.

지난 5월 하순에 이곳으로 옮기신 뒤로는 상황 판단 능력만이 아니라 기억력까지도 많이 회복되신 것 같다. 한 자리에 앉아 계신 지 두 시간이 넘어 좀 답답하시지 않을까 생각되어 복도를 한 차례 돌아보시게 하는데, 처음 들어오셨던 방 앞의 복도 끝에서 산과 정원을 한 차례 내다보다가 말씀하신다. "전에 내가 요 방에 있었지." 조금 놀라서 "어머니, 그 때 생각이 나세요?" 했더니 "여기 처음 왔을 때 이 방에 있었잖아?" 하시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억하시는 기간을 석 달이나 지낸 후에 작은형이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함께 크던 시절 작은형은 내가 결단력이 없다고 걱정을 해주곤 했었다. "위기결핍증"이란 말을 만들어 진단까지 해주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형의 그 잘난 결단력은 어디 갔는지. 형이 착한 사람인 줄 나는 잘 안다. 어머니께 와 뵐 때는 어머니 즐겁고 편안하게 해드리려고 애를 쓰겠지. 그런데 어머니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생각하고 판단하실 만큼 정신력이 회복되셨다. 형이 와서 들려드리는 좋은 말씀, 보여드리는 좋은 낯빛을 아마 흔쾌한 태도로 받아들여 주셨겠지. 그러면서 들려드리고 보여드리는 것들의 뒤쪽을 걱정하고 계시다가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려면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 확고한 생각을 깔아놓은 위에서 찾아온 아들들의 노는 꼴을 바라보시는 것이다.

앉아 계시는 동안 여러 번 "믿을 놈은 너 하나다.", "너에 대해선 내가 걱정을 않지.", "진작부터 네 걱정은 내가 하지도 않았다." 같은 말씀을 불쑥불쑥 하셨다. 이렇게 내게 아첨하실 필요가 없는데, 하고 좀 이상하게 생각했다. 내가 쓴 책을 보여드리면 "네가 뭘 안다고 책을 써?" 호통을 치시고, 나를 석학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씀드리면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분이, 내가 좀 믿음직해 보인다 해서 저렇게까지 공치사를 하실 리가 없는데, 이상했다. 알고 보니 둘째 아드님에게도 보호자가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상황 판단을 하셔서 내게 '작업'을 거신 것 아닌가! 시병일기를 시작한 후 작은형에게는 보이지 않아 왔는데(이메일로 보내도 내가 보낸 메일은 스팸 처리를 받아 왔다.), 이 글은 프린트해서 일반우편으로 보내서라도 각성을 좀 촉구해야겠다.

복도를 한 바퀴 도신 다음 어머니가 "야! 응뎅이가 빠개지는 것 같다." 하셔서 방에 모셔다 눕혀 드리고 잠시 후에 떠났다. "어머니, 가기 전에 뽀뽀를 해드리고 싶어요." 하니까 흘깃 며느리 눈치를 보시는 듯하더니 "안 해도 괜찮다." 생각이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넘어서시는 것이 분명하다! 아내에게도 와줘서 고맙다, 또 오너라, 자상하게 챙기신다.

특기사항 한 가지. 불경을 늘 침대에 누워계실 때 읽어드렸었는데, 어제는 테이블에 펼쳐놓고 나란히 앉아서 읽었다. 그런데, 금강경을 어머니께서 읽으시라고 권했을 때 읽으시면서 경문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경치를 구경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금강경도 다시 외우시는 것이다. 천수경 중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권해 보니 이것도 거의 걸리는 데 없이 외우고 계셨다. 정신 건강이 몇 해 전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회복되신 것을 보면 손발 놀리는 힘이 줄어들었을 뿐, 건강의 기본이 안정되신 것 같다. 봄 되면 걸음마도 새로 가르쳐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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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27. 16:16

 

예정했던 10시보다 5분 늦게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접선, 이정희 선생님과 강인숙 선생님을 모시고 요양원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차가 잘 빠져 11시 반도 안 되어 이천에 도착했다. 요양원에 바로 가면 식사시간일 것이므로 길목에 있는 정1품에서 이른 점심을 했다.

가는 중에도 이 선생님이 MB정부 욕 하고 싶은 기색을 내내 보이시는 것을 나는 운전에 집중하느라 응대해 드리지 못하고, 강 선생님은 좋은 경치 구경 좀 하시라고 살살 빼셨는데, 식당에 가서 앉으니 봇물이 터졌다. 제일 먼저 이 장관이(강 선생님 부군 이어녕 교수) 어느 자리에선가 "건국 60주년" 운운 하셨다며 '건국'이 당키나 한 소리냐며 핏대 올리신다. <뉴라이트 비판> 작업 하면서 나도 씹었던 거지만, 이 선생님 앞에선 나는 온건파다. "건국의 의미가 아주 없는 일은 아니죠. 너무 과장하는 건 문제지만." 하는 정도로 누그러뜨려 드리기 바쁘다. 늘 같이 다니시는 김호순 선생님이 감기 때문에 오늘 같이 못 오셨다는데, 이 선생님의 고담준론을 피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연세가 이제 엎어지면 아흔이신데, 이제 세상 걱정은 좀 젊은 사람들한테 맡겨놓으시면 안 되나?

밥값은 내 몫이라고 떠날 때부터 이 선생님이 다짐을 놓으셨었다. 아무리 계산의 달인이라도 이 선생님 고집 앞에선 꼼짝 못할 거다. 계산 잘하는 어느 분이 진짜 고집 센 분 계산 대신 해드리려다가 카드가 방 구석까지 날라가는 봉변을 당했다는데, 이 선생님 앞에서 카드 함부로 꺼내면 찢어버리실 것 같다. 다 잡수신 다음 얼마냐 물으시기에 3만원이라고 말씀드리니까 "한 사람에?" 하시기에 "세 사람에요." 했더니 왜 그렇게 싸냐고 투덜거리신다. 나도 돈 많이 안 만지고 사는 사람이지만, 이 선생님은 나보다도 덜 만지는 분 같은데, 정말 돈 하고 친한 체를 너무 안 하신다.

1시에 요양원에 도착, 강 선생님 가져오신 고구마 상자를 부엌에 들여놓은 다음 두 분을 모시고 2층으로 올라갔다. 먼저 나타난 강 선생님이 "저 아시겠어요?" 하니 "알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리시다가 이 선생님이 나서며 "나는?" 하니까 "당신이야 알지." 이 선생님과는 신변잡사에서부터 세상 돌아가는 이치까지 논쟁을 워낙 많이 해 온 사이이고, 그 논쟁의 분위기도 아무 예절이나 규칙 없는 적나라한 때가 많았기 때문인지, 이 선생님을 알아보는 순간 장난스럽고 도발적이면서도 편안한 쪽으로 표정과 말투까지 바뀌신다. 그러면서 강 선생님이 누구인가도 바로 생각나시는 것 같다.

얼마동안 뒷전에서 보고 있는데, 이 선생님이 "기협이가 데려다 줘서..." 하시니까 "기협이도 왔어?" 하고 고개를 돌려 나를 찾으시는데, 기쁘고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시다. 꼭 대상이 내가 아니더라도, 뭐에 대해서라도 저렇게 기뻐하고 반가워하시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싫어하시는 게 꽤 많던 분인데, 이렇게 좋아하시는 게 많은, 행복한 분이 되셨다는 게 내 마음에도 정말 기쁘고 반가운 일이다.

복도의 테이블에 한 시간 가까이 앉아 있었다. 어머니의 마음 편하신 모습이 두 분 선생님께 기대 이상이었던 모양이다. 얘기는 어머니와 이 선생님을 중심으로 오갔는데, 다른 날에 비해 어머니가 노래가락 아닌 평상 화법으로 많이 말씀을 하셨다. 이 선생님께 받는 자극이 크신 때문인 것 같다. 2~30분 지나면서 노래가락이 살아나기 시작하셨다.

자식들 얘기를 선생님들이 많이 꺼내셨는데, 그런 얘기에서 어머니 마음이 아주 깊은 데서부터 편안하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영아 얘기에서. 큰형이 영아 얘기 꺼냈을 때 "밥 잘 먹으면 됐지~ 무얼 더 바라겠어요~" 노래 부르시던 의미를 더 깊이 알 수 있었다. 영아가 보통사람처럼 식사를 하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셨었다. 지금은 식사를 어떻게 하느냐를 따지지 않으신다. "잘 먹데요." 하는 아들들의 보고로 만족하신다. 시비를 벗어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신 것이라 할까?

두 시쯤 되어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도 그늘과 볕 사이에 고르시라 하니 당연하다는 듯 볕을 택하신다. 세 분을 남겨두고 사무실에 가서 볼일 본 다음 올라가 보니 노래들을 부르고 계셨다. 이 선생님이 나를 보고, 다음에는 와서 며칠 묵어 가겠다고 하신다. 큰형이 지내던 경우에 비춰 지내실 수 있는 조건을 말씀드렸다. 두 분 다 이곳의 시설과 서비스에 큰 감명을 받으셨다. 특히 혼자 지내 오신 이 선생님은 이런 데서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바짝 드신 모양이다.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 시 가까이 되었을 때 강 선생님이 일어서야겠다고 하신다. 영인문학관에 볼일이 있으시다고. 순간적으로 좀 화가 났다. 일정이 그렇게 빡빡하시면 댁의 차로 오실 일이지, 오랫만에 뵈러 여기까지 왔다가 두 시간도 안 되어 이러실 수가 있나? 그런 사정을 미리 말씀하셨으면 모시고 올지 말지 나도 생각을 해봤을텐데. 그래도 어른들 앞에서 화를 낼 수야 있나? 최대한 좋은 낯으로 말씀드렸다. 저도 모처럼 뵈러 온 것이니 선생님 형편이 허락하는 최대한의 시간을 말씀해 달라고. 세시 반을 말씀하신다.

방에 모셔 눕혀드린 다음 선생님들 먼저 나가 정원에서 기다리시게 하고 금강경을 읽어드렸다. 먼저 반야심경을 외우니 낭랑하신 것이 근년 뵌 중 최상의 컨디션이시다. 금강경 여섯 꼭지를 읽어드리는데, 눈으로 다 따라 읽으신다.

그만 가겠다고 하니 "벌써?" 눈을 둥그렇게 뜨시고, "기~협~아~ 너 가면 난 어떡하니?" 옛 가락이 모처럼 나오신다. 그 정도 모시고 있다가 일어서기가 나도 서운한데, 어머니야 더하시겠지. 그래도 예전과는 다르시다. "어머니, 저도 더 있고 싶은데 오늘은 친구분들 모셔드려야 해요. 친구분들도 노인이신데 제가 잘해 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하니까 "그 친구들이 널 기다리고 있냐?" 하신다. "네, 밑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하니까 "그러면 모셔드리고 도로 올래?" 하신다. "물론 도로 오죠. 오늘은 못 와도 곧 도로 올 거예요." 하니까 마음 놓으셨다는 듯이 "그래라, 와줘서 고맙다."

"뽀뽀를 어디다 해드릴까요?" 하니까 "아무 데나 하렴." "이마랑 뺨이랑 양쪽 다 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하렴." 이마와 양쪽 뺨에 뽀뽀해 드리는 동안 수줍은 듯한 미소를 띠우고 "고맙다."를 몇 차례 거듭하신다.

두 분 선생님 모두 어머니의 편안한 모습에 크게 기뻐하신다. 다른 무엇보다 자식들에 대해 편안하게 생각하시는 마음에. 어찌 보면 다들 예순을 넘어서거나 바라보는 나이에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면 결코 마음 놓을 처지들이 못 된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만족스럽고 편안하게 받아들이시고, 그중의 하나가 자연스럽게 어머니 도와드리는 모습이 옆에서 보기에도 편안하신 모양이다.

강 선생님께서 자기는 아무 데나 택시 탈 수 있는 곳에 내려놓고 이 선생님 모셔다 드리라고 하시지만 굳이 댁까지 먼저 모셔드렸다. 마음속으로라도 화를 낸 일이 미안해서 그랬고, 생각해 보니 강 선생님도 여든을 바라보시는 분인데, 너무 노인 대접을 안해 드린 것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주변사람들 위해주는 일에 애쓰며 살아오신 분인데, 이 연세에까지 일에 쫓기시는 것이 안 됐고, 조금이라도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나라도 마다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다.

그래도 원장님과 얘기 나눌 시간이 없었던 건 아쉽다. 추석 후에 작은형이 한 번 더 다녀간 모양이고, 남지심 선생님과 대덕화 보살님이 다녀가신 모양인데, 그분들 왔을 때, 그리고 큰형 있을 때 어머니 반응이 어떠셨는지는 얘기를 좀 들어 둘 수 있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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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