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42> 중국에서 바라보는 한국 (5)

기사입력 2004-09-13 오후 1:26:16

  백두산 천지의 북쪽 귀퉁이의 달문으로 흘러나오는 물은 장백폭포로 떨어져 송화강 지류인 이도백하를 이룬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천지에서 직접 흘러나오지 않지만 백두산 주봉 밑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백두산에 원류를 둔 강으로 이 셋을 꼽는다.
  
  압록강은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백여 리 흘러내려 오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서쪽 내지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며, 두만강은 동쪽으로 백여 리 흐르다가 동북쪽으로 방향을 꺾어 동해 부근에 이른다는 것이 우리 머리 속에 그려져 있는 대강의 지도다. 그러나 막상 백두산에 올라가 보면 두만강의 발원지는 압록강 발원지의 바로 옆 골짜기로, 주봉의 동쪽이 아니라 남쪽에 있다. 주봉의 동쪽은 물의 흐름도 뚜렷하지 않은 밋밋한 고원지대가 수십 리 펼쳐지다가 북쪽으로 꺾어져 송화강 지류로 내려간다.
  
  1712년 목극등(穆克登)은 두만강 발원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송화강 유역인 주봉 동쪽에 정계비를 세웠다. 비문에 “西로는 鴨綠, 東으로는 土門”이라 한 것처럼 동쪽으로 흐르는 강을 찾은 것인데, 주봉 동쪽의 흐름이 수십 리 밖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꺾는다는 사실을 탐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토문강’의 원류로 착각한 것이다.
  
  조선과 명나라의 건국 초기부터 압록강과 두만강을 두 나라 국경으로 보는 것은 상식이었다. 이 경계선은 고려시대보다 북쪽으로 확장된 것이었다. 몽고 정복 때까지 고려의 판도는 두만강에 미치지 못했고, 지금의 함경도 지역 대부분은 여진족의 영역이었다. 몽고가 이 지역을 쌍성총관부로 지배하는 동안 고려인이 많이 이주했고, 원나라가 무너질 때 고려가 점령한 것이었다. 명나라는 원나라의 강토를 물려받는다는 원칙 아래 이곳에 철령위 설치를 검토하여 위화도 회군으로 끝난 고려의 출병을 유발하기도 했으나, 이 지역 출신을 왕실로 하는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만 것이다.
  
  과거의 여진족을 주축으로 한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하게 된 후 동부 만주 일대를 황실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封禁)으로 묶어놓고 이주와 개발을 금지했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으로는 수십 리 폭의 무인지대를 설정하고 책문(柵門)을 만들어 통제했다. 당시 청나라의 국토 측량과 지도 작성에 종사한 서양인 선교사들이 그린 지도에 더러 두 강의 북쪽으로 나란히 그려진 경계선은 청나라가 관리한 ‘민통선(民統線)’을 나타낸 것이다. 조선에서도 개마고원과 백두산 일대에 넓은 통제지역을 두고 있다가 정계비 설치 이후 민간에 개방했는데, 이를 빌미로 이 지역이 원래 청나라 영토였다고 주장한 중국인들도 있다.
  
  청나라에서 목극등을 파견해 정계비를 세운 것은 영토 확장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 봉금정책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 천하국가의 자리를 잡은 청나라에게는 직접적인 지배의 영역을 넓히는 것보다 천하체제를 원만하게 구축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되었고, 특히 봉금지역은 황실의 발상지로서 상징적 의미 때문에 개발보다 보존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자원에 비해 인구가 적은 상태가 오래 되다 보니 범월(犯越), 특히 조선인의 범월이 늘어나고 있었으므로 정계비를 세우게 된 것이었다.
  
  청나라의 목적이 확장이 아닌 안정에 있었으므로 조선측에 범월의 동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배려하였고, 조선 조정에서 사은사(謝恩使)를 북경에 보낸 데는 진정으로 감사하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계비 설치 이전에는 조선인의 범월이 늘 문제가 되었으나 이후에는 중국인의 범월이 압도적으로 늘어나는 데서도 사정의 변화를 살필 수 있다.
  
  조선 조정에서 1712년 감계(勘界)의 결과에 만족한 데 반해 민간, 특히 일부 실학자들 사이에서는 많은 불만이 토로되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이규경이 “한 마디도 다투어 밝히지 못하고 수백 리 강토를 앉아서 잃고 말았다”고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것은 당시까지 실제 다스리던 영토를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고구려는 물론 발해까지도 민족사의 범주에 넣으려는 당시 일부 실학자들의 의식에 입각하여 민족의 고토(故土) 상실을 기정사실화했다는 비판이었다. 여기에는 만주족을 열등한 오랑캐로 보는 편견도 작용한 것이었다.
  
  청나라의 성세가 유지되는 동안 두 나라 사이에는 국경에 관한 아무런 갈등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 청나라가 서양 세력에게 거듭 굴욕을 겪고 러시아의 진출에 대비해 1870년대 이후 봉금을 철폐하면서 문제가 일어났다. 1869-70년의 연속된 흉년 이래 상당수의 조선 유민이 청나라의 통제가 약화된 틈을 타 두만강 북쪽에 정착하였는데, 청나라가 이 지역의 개발과 자국민 이주를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기존 조선 이주민을 배려하지 않는 관리 방침을 세운 데서 비롯된 문제였다.
  
  1882년 청나라는 “간도에 정착한 조선인으로부터 조세를 징수하고 청나라 국적에 편입시키겠다”고 조선 정부에 통보했다. 이듬해 청나라 지방 관헌은 간도에 정착한 조선인을 조선 경내로 돌려보내겠다고 종성과 회령 두 읍에 고시했다. 이에 위협을 받은 현지 조선인들은 자신의 거주권을 지키기 위해 두 나라 관헌에 호소하였는데, 그 근거로 ‘土門’이 두만강이 아니라는 이강설(二江說)을 제기한 것이다.
  
  토문강이 두만강과 다른 강이라는 이강설 역시 일부 실학자들이 주장해 온 것이었다. 예를 들어 신경준은 “독류하집”에서 “모두들 토문과 두만을 하나의 강으로 여기지만 ‘용비어천가’에 의하면 두만강 북쪽, 회령에서 하룻길 떨어진 곳에 토문강이 있어 역시 백두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른 뒤 두만강에 들어간다”고 하여 해란강(海蘭江)을 가리킨 듯하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해란강 발원지가 백두산 주봉에서 직선거리로도 150 리나 떨어진 곳이라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이익은 이강설에 반대하여 “성호사설”에 “토문은 곧 두만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북방으로 땅을 넓히고 싶어하지만, 옛날에는 북쪽 지방이 모두 말갈의 땅이었고 지금은 강역이 정해졌는데, 왜 꼭 필요하지 않은 땅을 다투어 말썽을 일으키려 하는가?” 한 대목이 있다. 이강설이 척지(拓地)의 욕심에서 나온 억지로 본 것이다.
  
  1883년 서북경략사 어윤중은 사람을 시켜 백두산을 탐사케 하고 종성 부사로 하여금 중국 지방관헌에 조회문을 보내게 하였는데, 정계비 위치에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꺾어져 송화강 상류 오도백하가 되는 물줄기가 토문강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에 주재하던 위엔스카이(袁世凱)는 이에 대해 “그러면 길림성을 통째로 내놓으라는 말인가?” 하고 어이없어 했다고 한다.
  
  1885년과 1887년 두 차례 감계회담이 열린 결과 조선은 토문강이 두만강임을 인정하였고, 청나라 측은 강 북쪽에 정착한 조선인들에게 땅을 빌려주는 등 포용정책을 펴기로 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래 청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측이 어느 정도 이상 강경한 자세를 취하기도 어려웠고, 원래 현지인의 생활권 때문에 제기된 문제이므로 청나라의 개간정책이 포용적인 방향으로 조정됨에 따라 분쟁을 계속할 동기도 완화된 것으로 보인다.
  
  청일전쟁(1894-1895)과 의화단사건(1900)으로 청나라의 위세가 무너짐에 따라 몇 해 동안 잠잠하던 간도 국경문제를 조선-대한제국이 다시 들고 나오게 되었다. 1897년 함북관찰사를 시켜 현황을 다시 조사하게 하였고, 1903년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로 파견, 조세를 징수하고 병력을 양성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청나라의 행정력이 약화되고 러시아가 1900년 이후 간도에 진출하는 등 상황 변화에 응해 이주민을 보호하려는 조치였지만, 청나라의 쇠퇴를 틈타 일본과 러시아를 업고 국세를 확장하려는 뜻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5년 러일전쟁 후 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탈취한 일본은 민주 진출을 위해 청나라를 도발하고 압박하는 데 대한제국을 앞세워 간도 문제를 이용했다. 1909년의 이른바 ‘간도협약’은 일본이 만주의 철로부설권과 광산채굴권을 획득하면서 두만강을 국경으로 인정한 것이었으니, 일본은 실리를, 청나라는 명분을 건진 타협이라 할 수 있다.
  
  며칠 전 김원웅 의원이 보낸 뉴스레터에는 ‘간도협약의 원천적 무효 확인에 관한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고 자랑스럽게 써 놓았다. 과연 대한민국 국회의 결의안이 1909년의 ‘도문강중한계무조관(圖們江中韓界務條款)’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되찾아야 할 우리 땅, 간도”라는 말에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신라 통일 이래 한민족의 국가가 두만강 건너 간도지방에 지속적인 행정을 펼친 일이 없다. 두만강까지 국경을 넓힌 것도 조선왕조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그리고 조선인이 간도지방에 대규모로 이주해 조선문화를 지키는 사회를 이룬 것은 1870년대 이후의 일이다. 1880년대 이후 청나라 세력이 약화되는 상황 속에서 이 조선족사회 때문에 간도분쟁이 일어났으나 한일합방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간도협약으로 일단락되었다.
  
  강압하에 이루어진 을사보호조약의 원천적 무효를 주장하고, 그 조약을 근거로 행해진 일본의 수탈에 배상을 청구하는 일이라면 성패는 차치하고 의미가 있는 일이다. 을사보호조약에서 파생된 일체의 대외조약을 무효로 하자는 주장이라도 인정할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간도협약 하나를 문제삼으면서 그 이유로 “되찾아야 할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간도가 되찾아야 할 우리 땅인 이유가 무엇인가? 1880년대 이후의 간도분쟁에서는 토문강이 두만강보다 북쪽에 있는 다른 강이라는 ‘이강설(二江說)’이 조선측 주장의 주축이었다. 이것은 현지 이주민들의 답답한 사정을 풀 다른 마땅한 길이 없기 때문에 일부 실학자들의 치우친 견해에 의탁한 것일 뿐이다.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라면 어느 강이란 말인가?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강은 셋 뿐인데, 만주 복판을 북쪽으로 흘러가는 송화강이 토문강이고 그 동쪽이 모두 조선땅이라고 목극등이 인정했다는 말인가?
  
  또 하나의 이유라면 이곳이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라는 것을 이야기들 한다. 이것이 필자의 마음을 참으로 착잡하게 만드는 일이다. 고구려를 민족사의 원류로 숭앙한다면 그 문화와 정신을 물려받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족하다. 우리가 받드는 조상이 한 때 점령했던 땅이라는 이유로 “우리 땅”임을 주장한다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내세워 조선 침략을 정당화한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일본 천황가가 백제에서 흘러나왔으니 백제의 옛 땅을 내놓으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개혁 성향을 자임하는 의원들이 이번 결의안 발의에 많이 참여한 것이 더욱 마음에 걸린다. 개혁이란 오늘보다 더 좋은 내일이 오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좋다는 것이 자기에게만 좋고 남에게 나쁜 것이라면 사리사욕을 위해 개혁을 팔아먹는 짓일 뿐이다. 너와 나 구별 없이 세상이 모두 좋아지도록 애쓰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조소를 받는 자칭 개혁파의 사고방식이 “간도는 우리 땅” 주장에도 보인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41> 중국에서 바라보는 한국 (4)

기사입력 2004-09-09 오후 2:56:28

  중국‘동북공정’의 ‘고구려사 왜곡’ 사태의 진상을 살피기 위해 마다쩡(馬大正)이 주도해 온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 등 관계분야의 성과물을 검토해 보니 마다쩡이 총주편(總主編)을 맡은 “중국변강통사총서(中國邊疆通史叢書)”로 여러 권의 책이 나온 가운데 “동북통사(東北通史)”가 있었다. 작년 초에 나온 이 책이 이른바 동북공정 중 역사분야의 출발점으로서 기본지침을 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책을 몇 장 들춰보지 않아도 두 가지 문제점이 바로 드러난다. 하나는 동북공정의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널리 일으켜 온 바 패권주의 성향의 중국중심주의다. 그만큼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문제는 학술적인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서술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 서술을 일일이 예거할 필요도 없다.
  
  집필자 20여 명 중 3분의 1이 넘는 숫자가 내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하던 B대학 소속이어서 조선족 작가 류연산 선생에게 물어보니, “그런 학교가 있기는 있습니다” 하면서 웃는다. 연변대학 사학계의 김성호 교수는 동북공정이 물의를 빚은 뒤에야 관계회의에 초청받아 최근 참석한 일이 있다며, 동북사의 진짜 연구자들인 연변대의 역사학자 등은 배제된 채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연줄로 연구비를 딴 예가 많다고 한다.
  
  ‘공정(工程)’이란 우리가 쓰는 말로 ‘프로젝트’다. 중국에서는 지금 두 가지 ‘동북공정’이 진행중이다. 그 하나는 만주지역의 산업-경제 분야를 재편, 진흥하는 프로젝트로서, 엄청난 규모의 국가적 사업이다. ‘3조원’ 운운 하는 사업비는 이와 관련된 것이다. 또 하나가 고구려사 왜곡 등과 관련하여 국내에서 회자되는 연구 프로젝트인데,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주관하는 변강지역 연구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역사를 포함한 여러 분야의 5년간 연구에 인민폐 1천5백만 위엔(한화 약 22억원)을 투입하는 것이다.
  
  1천5백만 위엔도 여기서는 적은 돈이 아니다. 3분의 1만 역사 분야에 땡겨온다 하더라도 1년에 1백만 위엔을 쓸 수 있는데, 이곳 연구자의 연봉이 대개 5만원을 넘지 않으니 수십 명을 전업으로 쓸 수 있는 자금이다. 이 돈을 바라고 몰려든 연구자들 중에는 모자라는 실력을 넘치는 충성으로 때우려고 ‘민족모순’을 일부러 자극하려는 경향이 있었던 모양이다.
  
  동북공정과 관련, 가장 논란이 된 것이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보는 ‘고구려사 왜곡’이다. 근대역사학이 들어온 뒤 중국 학자들에게는 중국의 역사를 부풀려 보려는 경향이 있어 왔고, 고구려사에 대해서는 金毓黻의 “東北通史”(1941)에서 그 관점을 정리해 놓았는데, 지금의 동북공정에서는 그 관점을 답습하는 수준일 뿐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계급모순을 민족모순에 앞세우는 정책 아래 ‘대중화주의(大中華主義)’ 성향이 억제되어 있다가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다시 불거져 나오는 것이다.
  
  대중화주의를 들고 나온 동북공정의 역사부문 담당자들은 거센 역풍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방향과 서술방향은 대폭 조정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한국측의 강력한 항의와 반발이 이 역풍을 촉진하기도 했지만, 이런 류의 대중화주의는 중국의 학계와 사회 내에서도 원래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다.
  
  동북공정의 대중화주의가 의탁한 것은 ‘통일다민족국가’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이념이다. 중국 정치학자들은 이 이념을 과거로 소급 적용하는 것이 명백한 시대착오이며, 그런 방향의 무리한 시도는 이념 자체를 위험에 빠뜨릴 뿐이라고 지적한다. 설령 비슷한 이념이 과거에 작용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당시의 현실상황 속에서 의미를 가진 것이었지, 통시대적인 불변의 원리로 파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동북공정의 대중화주의는 중국 민족정책의 기조에 배치된다는 비판도 받는다. 중국의 민족정책은 각 민족의 전통이 서로 다른 현실을 인정하고 그 개별성을 존중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현실 속에서 민족간의 모순이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해소되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의 중국에 속해 있다 하여 역사 속에서도 중국에 속해 있었던 것처럼 억지로 꾸미는 것은 소수민족의 개별성을 말살하여 실질적으로 탄압의 효과를 가져온다는 지적이다.
  
  동북공정이 일으킨 역사왜곡 문제는 어느 사회에서나 한 모퉁이에서 일으킬 수 있는 것이고, 지금의 중국에서는 그 안에서 충분히 수습될 수 있는 문제로 보인다. 일본의 극우파처럼 역사왜곡을 꾸준히 추진할 뚜렷한 주체도 없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사회, 특히 언론과 정치계의 반응은 매우 과잉된 것으로 보인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우려를 전달한 애초 정부의 대응이 더 적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계야 정파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경향을 감안할 수밖에 없지만, 공익을 위해 움직여야 할 언론의 태도가 참으로 문제다. 우리 언론의 과잉반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연구비 3조원”의 전설이다. 애초에 산업-경제 분야의 동북공정과 혼동되어 와전된 액수인데, 1천5백만 위엔이라는 정확한 연구비 액수가 밝혀진 뒤에도 ‘3조원’을 근거로 한 논설이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이를 시정할 노력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3조원이라면 대학교수 10여만 명에게 5년간 봉급을 줄 수 있는 액수다. 이런 황당한 주장을 걸러내려는 노력이 얼마나 있었는가 한국 언론계는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일전에는 장성민 전 의원의 주장이라 하여 대통령이 조남기 상장을 만났을 때 조선족 문제로 중국을 자극한 것이 역사왜곡 가속화의 원인이 되었다고 대서특필한 언론도 있다. 양측이 모두 부인할 뿐 아니라 상식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을 완전히 소설로 써 놓았다. 정치인의 정략적 술수와 언론의 선정주의 성향이 절묘하게 결합한 작품이라 할 것이다.
  
  편집인 몇 사람에게 관계기사 편집의 편향성을 지적한 일이 있다. 대개의 반응은 “중국측에 그런 (역사침략의) 의도가 있는 것은 사실 아닌가?”, 또는 “이쪽에서 시끄럽게 해야 저쪽에서도 이쪽 뜻을 받아들을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역사침략의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중국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그들이 일부 몰지각한 기회주의자들인지, 중국 사회의 주류인지에 따라 우리 사회의 대응은 달라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대부분 언론은 중국 사회 주류의 움직임으로 서둘러 단정하고 싶어 한다. 2000년 국가부주석 시절의 후진타오가 동북공정을 “批示”했다는 기사에 접하면 사전도 찾아보지 않고 이것을 “지시사항”이라고 우긴다. ‘批示’는 민간 또는 하급의 기획을 중앙 또는 상급에서 인준한다는 뜻으로, 상급에서 기획하여 하급에 지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한국 정계와 언론계의 뜨거운 반응 덕분에 동북공정의 잘못된 방향 시정이 더 재촉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잘된 일이라고 좋아만 할 수 있을까?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당장은 맞을 수 있지만, 울 일도 없이 뻑하면 우는 아이가 가족과 이웃의 믿음을 받을 수 있는가? 수교한 지 10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서로 내부사정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일어난 하나의 해프닝이 이번 동북공정 논란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오해를 부채질하는 데 몰두한 우리 언론의 역할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40> 중국에서 바라보는 한국 (3)

기사입력 2004-08-16 오후 3:40:34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을 말한 것은 공산권의 붕괴로 이념의 갈등이 끝났으니 갈등으로 엮어지는 역사가 더 이상 엮어질 여지가 없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미국의 일방주의를 뒷받침하기도 한 이 단정의 근거가 박약하다는 것은 그 후 드러난 ‘문명의 충돌’로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쿠야마의 단정에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이념의 갈등은 세계사의 한 시대를 지배한 명제였다. 이 갈등의 종말이 비록 ‘역사의 종말’은 아니더라도 ‘근대사의 종말’로 의미를 가질 수는 있다. 그리고 이것을 ‘역사학의 종말’로 음미해 볼 여지도 있다.
  
  역사서술은 인류문명의 초창기부터 있어 온 지적 활동이다.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에도 역사서술은 주술사의 푸닥거리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부족이 공유하는 과거의 기억은 푸닥거리를 통해 부족의 정체성을 제공했으며, 주술사는 그 구연을 통해 영도력을 발휘했다.
  
  문자 발생 후 역사서술은 지배계층의 교양이 되었다. 문자 덕분에 정보의 거의 무제한 축적이 가능하게 된 상황에서 이전의 구연 단계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사회가 역사의 공유를 통해 정체성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서술은 영토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문자를 향유하던 지배계층은 그 위상과 소명을 확인하는 데 역사의 거울을 애용했다.
  
  근대역사학의 발생은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은 것이었다. 정보의 축적만이 아니라 유통까지 대형화함에 따라 피지배층까지 문자를 향유하게 된 상황에서 국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국민교육이 개발되었고, 역사교육은 그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역사교육의 내용을 확보하고 담당자를 양성하기 위해 직업적 역사학자들이 대학에 자리잡음으로써 역사학은 종래 교양으로서의 역사와는 다른, 분과학문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죠지 이거스는 “20세기 사학사”에서 ‘이야기 역사’와 ‘역사과학’을 대비시킨다. 교양으로서의 역사는 선사시대 이래 이야기 역사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자기 사회의 역사를 그 사회 안에서만 서술하고 열람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술적 고증이 있을 뿐, 이념적 해석의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국가들의 경쟁이 치열해진 근대의 상황 속에서는 서로 다른 국가들이 자기네 역사서술이 옳다고 다투는 ‘역사의 경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수단으로 역사의 ‘과학화’가 촉발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세계화의 물결 속에 국가의 기능은 약화되고 있다. 그리고 컴퓨터를 이용한 정보혁명으로 인해 과거의 일을 되살피는 작업이 인류의 지적 활동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역사학의 수요는 사회에서도 대학에서도 줄어들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를 가장 첨예하게 겪고 있는 것이 바로 역사학 분야인 것이다.
  
  한국인이 단군을 숭상하고 광개토왕을 그리워하는 것은 이야기 역사의 흐름 속에서다. 중국인이 3황5제를 숭상하고 자기네 성현들을 그리워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학적으로 따진다 해도 따질 기록 자체가 이야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단군의 실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했다고 나서는 북한 당국의 주장에 실소를 금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유전자 감식을 할 수 없는 대상인 바에야 우리의 이야기 역사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 분들이 우리 조상임을 입증할 다른 방법이 없다.
  
  고구려사 관계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동북공정의 방향은 “중국변강통사총서(中國邊疆通史叢書)”의 일환으로 작년에 나온 “동북통사(東北通史)”(李治亨 주편)에서 알아볼 수 있다. 일부 참여자들의 주장에는 참으로 한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집에서 제사도 지내 오고 벌초도 해 온 우리 조상을 놓고 어느 날 옆집에서 “이 분은 우리 외가 조상이니 이제 우리가 제사를 모시겠다”고 나서는 형국이다.
  
  중국의 이런 일부 학자들에게는 분노가 아니라 연민을 느낀다. 오랫동안 그곳 역사학을 묶어 놓고 있던 유물사관이 힘을 잃자 서방에서는 한 물 가다 못해 타기받고 있는 국가주의 사관에 좋다고 매달리는 꼴이다. 우리만 잘나고 이웃은 못났다는 주장에 목청을 높이는 것 외에는 학자로서 사회에 공헌할 길을 찾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딱한가.
  
  동북공정의 일부 독선적인 성향에 대해서는 정치학 등 사회과학 분야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중국 내에서도 들리기 시작하고 있다. ‘통일다민족국가’의 의미를 현상의 규정에 그치지 않고 통시적인 개념으로 확립하려 든다면 자가당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원래 동북공정은 변강사지(邊疆史地) 연구의 일환으로서 역사 연구는 그 일부에 불과한 것인데, 앞으로는 역사 연구의 비중이 줄어들고 독선적인 성향도 억제될 것이 예상된다.
  
  철 지난 국가주의 성향은 한국의 반응에서도 적지않게 느껴진다. 동북공정의 연구비가 5년간 총 1500만 위엔(한화 약 21억원)이라는 것은 진작부터 밝혀져 있다. 이 사실이 국내에도 충분히 알려져 있다는 것은 “창작과비평” 지난 여름호에 실린 이영호 씨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중국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논설에 “3조원”의 신화가 생생하게 살아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일인가.
  
  중국 일부 학자들의 미숙하고 무책임한 자세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을 놓고 중국 주류의 추세를 억측하는 것은 조심할 일이다. 프레시안만 하더라도 일전 “동북공정은 후진타오가 지시한 사업”이라고 호들갑을 떨었거니와, 비준한다는 뜻의 “批示”를 “지시”로 곡해한 것이다. 중국의 행정과 지방자치 관행을 감안한다면 지방 또는 민간의 사업에 대한 중앙의 비준이나 승인이라는 것에 그리 큰 의미를 둘 수 없다. 한 조선족 학자는 한국 언론의 과열된 반응을 지적하며 “왜 그들은 미국과 일본만 좋아할 짓을 하는가?” 하고 묻는다.
  
  이거스는 “20세기 사학사”의 말미에서 과학적 역사가 퇴조하고 이야기 역사로 돌아갈 추세를 전망했다. 역사가 투쟁의 무기에서 교양의 수단으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근대역사학의 경력이 일천한 한국, 그보다도 더욱 경험이 빈약한 중국에는 아직도 역사를 투쟁의 무기로 휘두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역사가 교양의 도구로서 인접국 사이의 갈등보다 신뢰에 공헌하는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역사전쟁’의 와중 “일사양용(一史兩用)”의 목소리가 자라나고 있는 중국에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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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