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 ③

기사입력 2008-08-18 오전 9:35:50

  지금까지 뉴라이트 측 역사서술에서 가장 두드러진 문제의 하나가 일제 통치기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는 주제 자체가 중요한 것일 뿐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고 서술하는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히 검토의 가치가 있다.
  
  뉴라이트의 이른바 '근대화론'은 한국 사학계의 지배 담론인 '수탈론'에 맞서는 것이다. 수탈론은 매우 넓은 범위에서 표출되어 왔고, 또 피해망상적인 정서의 뒷받침도 받아왔기 때문에 그 담론 중에는 더러 불합리하고 편향적인 내용도 섞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일제 통치기를 더 합리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자는 제안은 바람직한 것에 틀림없다. 더욱이 국가들 사이의 접촉면이 갈수록 넓어지고 두터워지는 21세기 상황에서, 이웃 나라들끼리 서로의 역사를 함께 돌아보는 길을 닦는다는 점에서 절실히 필요한 노력이기도 하다. '역사 전쟁'으로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그런 노력의 부족 때문이다.
  
  그러나 바람직한 방향, 필요한 방향이라 해서 손바닥 뒤집듯 내 입장을 내던져버릴 수는 없다. 우리 학계의 입장에도 상당한 범위의 스펙트럼이 있고, 일본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범위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길을 찾아 상대방의 합리적인 길과 어울리면서 그 시너지 효과를 통해 양쪽 사회의 분위기가 접근되기를 바랄 일이다.
  
  우리 쪽의 극단을 비판한다 하여 저쪽 입장 가운데 극단적인 노선을 지지하고 나선다면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증폭시키는 길이다. 우리의 뉴라이트가 일본 사회의 여러 역사관 가운데 가장 극우파의 관점을 따르는 것이 문제다.
  
  "연 평균 3.6%가 높은 성장률이었다고?"
  
  여러 가지 주제를 놓고 뉴라이트 측이 많이 활용하는 수법 하나를 미리 지적하고 싶다. 통념을 벗어나는 새로운 관점을 통계 수치로 포장하는 수법이다. 안병직 씨와 이영훈 씨가 경제사 분야를 연구했기 때문에 주류 역사학자들에 비해 통계 수치를 많이 활용하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숫자를 들이대면 뭔가 '과학적'인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숫자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엄정한 태도가 아쉽게 느껴진다.
  
  1910년대에서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3.6%를 기록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30년간 그만한 성장률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내세우는 것은 한국경제가 그 기간에 꽤 활기찬 발전을 이뤘다는 인상을 주려고 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이 성장의 출발점이 어디인가? 거의 아무런 산업화도 이뤄지지 않고 있던 1910년도다. 오늘날처럼 산업화가 이뤄질 만큼 이뤄진 상황에서도 연 5% 이하로 성장률 목표 낮추는 것을 놓고 온 국민이 서운해 하는 판인데, 아무것 없던 출발점에서 연 3.6%가 높은 성장률이라고?
  
  1960년대 이후 20여 년간 한국경제가 이룩하던 연평균 7~8%보다도 높은 성장률이 근대화 출범 시점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일본인의 손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근대 기술은 어떻게든 들어오게 되어있었고 근대화는 진행되게 되어있었다. 맨바닥에서 시작하는 산업화가 수십 년간 연 4% 미만의 성장률에 머물렀다는 것은 일제 통치가 도와준 결과라고 볼 수 없다. 억누르고 가로막은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낙성대경연구소 연구원들이 계량적 자료에 중점을 두고 한국경제사 분야에서 쌓아온 연구업적 중에는 높이 평가할 것이 많다. 그러나 안병직 전 소장과 이영훈 소장이 학계 외부를 상대로 이 업적을 포장해 보여주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 연 3.6% 성장률을 밝혀낸 것은 훌륭한 연구 업적이지만, 이것이 마치 높은 성장률이었던 것처럼 들이대는 데 정략적 의도가 엿보인다는 말이다.
  
  안병직·이영훈 대담집 <대한민국 기로에 서다> 144쪽에 이영훈의 말로 "결론을 말씀드리면 연간 2.3%의 실질 성장률에 따라 식민지기에 1910~1940년간 한반도의 총소득이 2.7배나 커졌습니다"라 하였다. 그러나 연간 2.3% 성장률로는 30년간 170%의 성장을 이룰 수 없다. 총소득이 170% 성장했다고 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구' 조에 따르면 그 기간 중 한반도 인구는 1313만 명에서 2439만 명으로 86% 증가했으므로 실질 성장률은 30년간 총 45%로 연평균 1.3%에 미치지 못한다. 현금 지출이 늘어나는 '근대화' 과정 속에서 총체적으로 비참한 상황에 틀림없다.
  
  이영훈은 같은 책 142쪽에서 "1910~1940년간 연간 평균 3.6% 정도의 성장이 있었습니다. 동기간 인구 증가율은 연간 1.3%였습니다. 이를 빼면 1인당 실질소득은 연간 2.3%의 수준으로 증가하였습니다"라 하였다. 이영훈의 <대한민국 이야기> 88~89쪽에도 거의 같은 내용을 적었다. 총생산이나 총소득의 근거 자료는 필자가 확인하지 못했으나 같은 기간의 인구증가율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타난 연평균 2.3%가 틀림없다고 본다. 이영훈이 인구 증가율과 실질소득 증가율을 뒤바꾼 것으로 보인다.

  
  "달걀을 수탈하려면 닭에게 모이를 준다"
  

▲ 순간을 포착한 사진만 보고 마음 불편해 하는 것은 그 인물의 마음가짐을 지나치게 예단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좀 너무 많이 굽히는 것 같다. ⓒ한국방송

  뉴라이트 측은 수탈론에 반대하면서 일본 식민 통치는 16~17세기에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 있었던 것처럼 악랄한 착취 체제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다수 수탈론자들도 그런 맹목적 착취 체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 성장의 수준과 방향을 결정하는 데 수탈 의도가 중점적으로 작용한, '합리적' 수탈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달걀을 수탈하기 위해 닭에게 모이를 줄줄은 아는 체제.
  
  허수열 씨가 근대화론 비판서를 "개발 없는 개발"이라는 제목으로 냈지만, 식민지 경제체제와 관련해 더 널리 쓰이는 말은 "발전 없는 성장(growth without development)"이다. 식민지 경제가 성장한다고는 해도 덩치가 클 뿐이지, 발전의 주체로 자라날 길이 열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본국 경제체제의 부속품으로 식민지의 역할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합병 이전부터 대량의 한국 쌀을 수입하고 있었다. 일본의 산업화 과정에서 쌀 공급은 극히 예민한 과제였다. 일본의 한국 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이 쌀 증산이었다. 해방 무렵까지 논의 70% 이상을 소수 지주소유하게 된 기형적 토지 소유 구조도 이 정책 목표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농지 소유를 집중하고 농업 노동을 저임금에 묶어놓는 것이 쌀의 대량 반출에 편리했기 때문에 조세를 비롯한 모든 정책을 꾸준히 지주층에 유리하게 펼친 결과였다.
  
  쌀의 생산도 수출도 늘어났다. 그러나 그 이익을 거둔 것은 상당수 일본인을 포함하는 소수 지주층이었고 그들은 일본제 공산품을 수입해서 썼다. 민중의 소비 수준은 별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내의 공업 생산에 큰 자극을 주지 못했다.
  
  1930년대 들어 북한 지역에 중공업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일본이 괴뢰 만주국을 세우고 '대동아' 건설에 나서면서 세운 입체적 개발 전략의 일환이었다.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 주요 시설을 중국과의 분쟁 소지가 있고 통치 전망이 아직 불안정한 만주 땅보다 식민지 체제를 확립해 놓은 한국 땅에 배치한 것이다.
  
  여러 개 대형 공장이 세워지고 이에 따라 한국의 공업 인구와 공업 생산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제국의 산업 구조 안에서 부속적 역할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내적 재생산 구조를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한국인의 소득 증대는 하급 인력노임에 그쳤고, 연관 산업의 발전 여지도 극히 적었다.
  
  "식민통치는 한국을 종속적 위치에 묶어두었다"
  
  식민지 시대 한국에 근대화 현상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고, 일본의 통치가 이 근대화에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일본이 꾸준히 노력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그 시기에 근대화가 진행되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다. 수탈론이라 해서 근대화의 사실을 일체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을 수탈 대상으로 만드는 방향의, 건전하지 못한 근대화였다고 하는 것이다.
  
  뉴라이트는 일본의 한국 지배가 기본적으로 선의에 입각한 것이었다고 주장함으로써 한국에서 실제로 진행된 근대화가 당시 상황에서 최선의 길이었다는 인상을 주려 한다. 식민 통치자를 '악마'에 가깝게 그리는 극단적 수탈론과 반대로 근대화론자들이 '천사'의 모습으로 보려고 애쓰는 것이 그 까닭이다. 이런 대목에서는 '실증'이 실종되어버린다.
  
  예컨대 일본의 한국 병합 의도가 '영구 병합', 즉 일본의 완전한 일부로 만드는 데 있었기 때문에 한국을 무책임하게 수탈하지 않고 잘 키우려 노력했다고 말한다. 창씨개명을 해주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한 '내선일체' 정책을 그 증거로 내세운다.
  
  근대 세계에 갑자기 내던져진 한국은 독립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적응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직면한 세계 각지 거의 모든 국가와 사회가 함께 한 문제였다. 이 문제를 넘어서는 데 10여 년이 걸린 나라도, 100여 년이 걸린 나라도 있었고, 아직까지 넘어서지 못한 나라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갑자기 주어진 근대적 상황으로 인한 일시적 문제였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일본의 한국 통치는 이 일시적 문제를 스스로 넘어서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었다. 그래야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으면서 일본의 이용 대상으로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당시 일본의 '합리적' 선택이었다.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는 뉴라이트에서 일본 식민 통치자들만을 예외로 볼 까닭이 없지 않은가?
  
  "식민 통치자도 합리적 인간이었다. 천사가 아니었다"
  
  일부 수탈론자들이 보여 온 지나친 편향성에 대한 뉴라이트의 지적에는 나도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도 식민 통치자를 짐승이나 악마보다 가능한 한 합리적 인간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본의 '선의'에 너무 매달리는 것은 편향성의 보정이 아니라 더 심한 편향성이 될 수 있다. 정부가 일본을 합리적으로 대하려 하지 않고 일본 우파에게 "우리가 남이가?" 식 추파를 던지다가 독도 문제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이 그런 사고방식의 문제점이다.
  
  수탈론의 지엽적 문제들을 지적할 때는 그토록 떠받드는 '합리성'이 근대화에 대한 일본의 공헌, 그리고 그 공헌을 뒷받침한 일본의 선의를 강조할 때는 어디로 가버리는 것일까. 식민 통치자를 가능한 한 합리적 인간으로 보자는 당부가 일부 수탈론자들보다 뉴라이트 근대화론자들에게 더 절실한 것 같다.
  
  열강들이 식민지를 확보하려 애쓴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제국주의의 속성에 관해서는 상식 차원에서 확립되어 있는 인식이 있다. 뉴라이트는 이 상식을 무시한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가 야욕 때문이 아니라 자기방어를 위한 것이었다는 말까지 한다. 대동아전쟁 당시 "민족의 활동 공간을 확보한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선전을 아직도 곧이듣고 있는 자칭 '역사학자'들을 21세기 한국에서 보는 것이 놀랍다.
  
  일본은 1854년 미국의 함포외교에 굴복해 개항했다. 메이지유신으로 능동적인 근대화의 길을 연 것은 1868년의 일이었다. 그 사이의 14년 동안 혼란에 빠져 있던 일본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달려든 열강이 없었던 것은 일본의 행운이다. 개항 후의 한국에게는 그런 행운이 없었다. 활동 공간을 넓히고 싶어하는 열강, 일본이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흥 열강 일본은 유럽의 고참 열강들에 비해 구조적 문제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 부담으로 인해 일본 자체 국민들에게까지 억압적인 군국주의 체제로 흘러가게 되었다. 식민지 되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하필 그런 일본에게 침략을 당했다는 것은 한국인에게 겹쳐진 불운이었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 ②

기사입력 2008-08-14 오전 9:27:40

  뉴라이트 진영에서 8·15를 광복절 아닌 '건국절'로 기념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아 눈길을 끌고 있다. 한국의 역사에서 1945년 8월 15일보다 1948년 8월 15일이 더 중요한 날이었다는 주장이다.

  일본 식민 통치를 근대화의 은혜로 받아들이는 뉴라이트에게는 일본의 패전으로 이뤄진 민족의 광복이 반가운 일이 아니라 안타까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광복 당시에 일본의 패전을 슬퍼한 한국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제국에 속한 채 수십 년을 지낸 시점에서 더러 그런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몰라도, 대한민국에 속한 채 수십 년을 지낸 시점에서 그런 사람들을 떼로 보게 되는 것은 참 뜻밖의 일이다. 대한민국의 나라 노릇에 결함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정도로 부실했던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떠받들고 나서는 것이 또한 해괴한 일이다. 식민 통치로부터의 해방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민족분단을 굳힌 대한민국 건국을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찬양할 수 있다니…. 도대체 민족에 대해 어떤 의식을 가진 사람들인가?

  이런저런 계제에 여러 형태로 펼쳐져 온 그들의 논설을 보면 민족에 대해 별 의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통치가 정당한 통치였고, 모든 국가가 정당한 국가였던 것 같다. 적어도 1910년 이후로는.

  "어느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 건국의 정당성에 의문을 가지는가?" 대한민국 건국에 관한 문제 제기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그들이 하는 말이다. 근세 이후 유럽 여러 나라에서 현실 체제에 대한 비판이 국가와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해 온 사실이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모든 체제 비판을 '히고쿠민(非國民)'으로 몰아붙인 일본 군국주의만이 그들에게는 올바른 국가관으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대한민국에는 자랑스러운 면도 있고 부끄러운 면도 있다"

  이 시점 한국의 상황에서 뉴라이트처럼 정치 지향성을 가진 집단이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점은 사상의 자유에 맡겨놓고, 그들이 내세우는 국가관부터 따져봐야겠다. 민족은 도외시하면서 대한민국은 떠받든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이 과연 진정성을 가진 것인가? 예수 사랑을 내세워 이익 챙기기 바쁜 사이비 종교인들처럼, 뭔가 다른 속셈을 가지고 대한민국을 팔아먹는 것은 아닌가?

  내게는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하는 면도 있고 부끄러워하는 면도 있다. 다만 내 나라이기 때문에 아낀다. 자랑스러운 면이 많고 부끄러운 면이 적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조금이라도 그렇게 되는 데 내 힘이 쓰일 기회를 찾는다.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이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일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이 18개월 되었을 때 태어나 60년 가까이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왔다. 그 동안 대한민국이 내 나라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냐 하는 실제 내용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인구만 해도 세 배 가까이 늘어났고, 가난하던 나라가 제법 잘 살게 되었고, 폭력이 판치던 나라에 민주질서가 꽤 자리 잡았다.

  정말 큰 변화다. 그 변화 속에서 '내 나라'에 대한 내 생각도 변해 왔다. 4·19가 있던 열 살때까지는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만 생각했다. 5·16 후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으로 자라는 동안 부끄러움이 생겨났다. 졸업 후 유신을 겪으면서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서른 살 무렵 사회활동을 시작하면서 사회에 대한 내 책임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후 10·26, 5·18, 6·10을 차례로 겪었다.

  1960년대 이후 내 생각의 전체적 변화는 부끄러움이 자랑으로 바뀐 것이다. 우선 빈곤과 독재를 벗어난 덕분이다. 그러나 더 밑바닥에 깔려 있던 불안감을 걷어내고 내 나라를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2000년의 '6·15 공동 선언'이었다. 평생 불안하게 바라봐 온 민족과 국가의 괴리상태를 극복하려는 '지속적' 노력의 출발점이 바로 6·15였다.

  민족이라는 것이 하나의 공허한 관념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 시점 이 사회의 상황에서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주장이다. 현실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 힘을 어찌 "공허"하다 할 것인가.

▲ 거꾸로든 바로든 태극기는 태극기라고 하는 것이 실용주의일까? 이명박 씨가 애국자라는 이유로 표를 준 유권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 후 그의 행보에 나타나는(또는 나타나지 않는) 국가관에 당혹감을 느끼는 국민이 많다. ⓒ연합뉴스

"분단 상태 아래서도 사회 발전이 가능하다는 믿음"

  '지속적' 노력이라 함은 그 이전에 대한민국이 민족 분단 문제를 대해 온 태도와 대비하는 것이다. 1948년 건국 이래 '통일'의 당위성을 부정한 대한민국 위정자는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북진 통일에서 박정희의 유신용 통일을 거쳐 김영삼의 흡수 통일 주장에 이르기까지, 정략을 위한 일시적 방편으로 이용당해 온 것이 통일이었다. 그런 주장을 내놓은 사람들에게는 통일보다 더 요긴한 목적이 따로 있었다.

  나는 통일지상주의자가 아니다. 학생 때, 한국의 경제도 민주주의도 시원찮게 보이던 시절에는 통일지상주의 비슷한 심정에 빠지기도 했다. 미국의 힘에 묶이고, 독재가 지탱되고, 경제가 종속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문제가 민족 분단에 걸려있는 것 같았다. 통일 하나만이 우리 사회의 질곡을 풀어줄 열쇠처럼 보였다.

  분단 상태 아래서도 사회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6·10 이후 키우게 되었다. 아직도 통일을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희생시켜서라도 시급히 이뤄야 할 유일의 절대과제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경제와 민주주의의 건전한 발전을 바탕으로, 천천히 착실하게 이뤄 나갈 과제로 생각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대해 나는 여러 가지 불만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을 '내 나라'로 여겨 아끼는 마음 때문이다. 나의 노력, 우리의 노력으로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우리 조국에 아무 불만도 가져서는 안 된다느니, 절대 충성을 바쳐야 한다느니 떠들어온 자들이 있다. 조국을 아끼는 마음이 없는 자들, 조국을 이용할 생각만 가진 자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소리다.

  대한민국에 대한 내 가장 큰 불만은 민족과 국가의 관계를 제대로 풀지 못해 온 것이다. 민족에 절대적 가치를 두고 국가가 거기에 종속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민족도 국가도 우리 정체성의 바탕으로 모두 중요한 존재다. 두 존재가 원만하게 어울리기 바란다. 그 길을 국가 차원에서 비로소 열어낸 6·15를 계기로 나는 대한민국에 대해 애정만이 아니라 믿음도 가지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곧 문명인가?"

  뉴라이트 논객들은 학계 주류의 대한민국관을 좌파로 몰아붙이며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을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을 주장한다. 이승만 정권에 비해 박정희 정권의 평가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개재되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시각만을 검토하겠다. 당장 '건국절' 주장도 이승만 정권의 평가와 관련된 것이다.

  이승만에 대한 내 생각을 단도직입으로 말하겠다. 그는 해방 후 한국 땅에 세워질 국가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못한 짓이 없는 사람이다. 분단과 전쟁이 그가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해방 후 한민족에게 최악의 위험으로 닥쳐온 그 일들을 그는 막기는커녕 더 악화시키기만 했다. 그리고 내정에 있어서는 부패와 독재로 경제발전을 가로막고 민주주의를 억눌렀다.

  뉴라이트에서는 나와 다른 눈으로 이승만을 본다. 사실 인식에 있어서는 그들과 나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평가의 기준, 가치관이 서로 다른 데서 시각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그들은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문명'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 크나큰 공로 앞에서는 민족분단도 부패와 독재도 별 흠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뉴라이트가 말하는 '문명'이란 자본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일본 식민통치를 옹호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문명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이유다.

  "자본주의가 곧 문명"이란 황당한 개념정의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자본주의를 거의 신앙 차원으로 높이 받들다 보니 가장 고귀하고 가장 강력한 표현을 찾다가 문명이란 말을 욕보이게 된 모양이다. 사실, 이승만을 찬양한답시고 "한국을 자본주의로 이끈" 공로를 내세워서야 별로 그럴싸하게 들리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자본주의를 받든다 해도 일본 식민통치와 이승만 정권에게 한국 자본주의화의 공로를 돌리는 데는 문제가 있다. 두 정권은 한국을 자본주의의 주체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희생자로 만들었다. 한국이 지금까지 이만큼이라도 경제발전을 이룩한 것은 두 정권이 빠트려놓은 구덩이에서 어렵사리 헤어 나와 온 국민의 힘으로 쌓아온 업적이다.

  "이승만 시대의 대한민국을 부끄러워할 줄 알자."

  뉴라이트는 대한민국을 소중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 건국이 민족 해방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대한민국은 구성원들의 노력에 의해 진화, 발전해 나가는 유기적 공동체가 아니다. 사회적 가치를 가진 살아있는 국가가 아니다. 자본주의를 시행하는 도구일 뿐이다.

  뉴라이트는 자본주의를 받든다고 한다. 그래서 반도 남쪽의 우리가 사회주의라는 대륙의 야만에 빠지지 않고 해양의 문명,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것을 축복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세계화 속에서 우리 사회가 어떤 위치를 가진다는 것인지가 석연치 않다. '캐치업'이니 뭐니 장미빛 그림을 띄우지만, 앞선 나라들이 따라잡으라고 기다려 준단 말인가? 이명박 정부 몇 달 만에 '7-4-7' 공약이 증발하는 꼴을 벌써 보고 있지 않은가?

  뉴라이트 멤버들은 자기네가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우기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딱이다. 세계대전을 겪고 공산혁명을 목격한 자본주의 진영은 그런 위험이 되풀이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2차대전 후 자본주의 모순을 완화하는 정교한 제도를 발전시켜 세계경제를 부흥했다. 이 부흥이 1970년대 들어 한계에 접근할 때 반동적 움직임으로 나타난 것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다. 모순 완화의 노력을 포기하고 정글 자본주의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뉴라이트는 민족을 부정하며 국가를 내세우지만, 사실 그들은 민족만이 아니라 국가에도 소속감을 가지지 않은 자들이다. 자본계급, 투기세력에게만 소속감을 가진 자들이다. '건국절' 주장을 비롯한 그들의 대한민국 찬양은 민족과 국가 사이의 이간질일 뿐이다. 사람들의 민족 사랑과 나라 사랑을 헷갈리게 해놓고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온 나라를 투기판으로 만들 기회를 얻으려는 교란작전일 뿐이다.

  광복절은 우리 민족이 현대세계에서 제 발로 첫 걸음마를 뗀 계기였다. 서툴 때 고생도 많았지만, 피땀 흘려가며 여기까지 왔다. 오죽잖은 국가로 출발한 대한민국도 그 동안 국민들이 잘 키운 덕에 이제 국가 노릇을 제법 하게 됐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고 해서 건국 당시의 대한민국이 저절로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승만 시대의 대한민국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아는 것,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에 불만을 느낄 줄 아는 것이 대한민국을 더욱더 자랑스럽게 키워나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 ①

기사입력 2008-08-12 오전 8:51:58

  <프레시안>은 역사학자 김기협 박사의 연재 '김기협의 페리스코프'를 재개한다. '페리스코프(잠망경)'는 지난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동서 문명을 꿰뚫는 깊고 넓은 안목으로 많은 독자에게 사랑을 받았다.

재개되는 '페리스코프'는 약 10회에 걸친 '뉴라이트 역사관의 점검'으로 시작한다.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물 만난 듯 목소리를 높이는 뉴라이트 진영에서 학술적 근거 내지 사상의 준거로 내세우는 소위 '뉴라이트 역사관'의 허실을 따져보는 작업이다.


강단에 서본 지 15년에 연구비 지원을 받아본 지 10년, 김 박사는 한국의 주류 역사학계와 거리를 두고 지내왔다. 그런 그가 주류 역사학계를 좌파로 비판하는 뉴라이트 역사관을 비판하고 나선다. 공정하고 활달한 그의 비판이 독자 여러분의 시각을 넓혀줄 것을 기대한다. <편집자>


뉴라이트에게 인간은 이기적 존재일 뿐인가?

  얼마 전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펴냄)라는 제목으로 한국사를 개관하는 에세이집을 낸 데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하나는 민족주의에 과도하게 얽매여 온 편협한 관점을 보완하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국사를 국외사와의 관련에서 바라보며 시각을 넓히도록 제안한 것이다.

  책을 본 후 "뉴라이트 역사관과 통하는 것 아니냐?" 하는 반응을 보인 독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뉴라이트 역사서들을 찾아보니 얼핏 볼 때, 과연 내가 중시한 두 가지 의미를 뉴라이트 저자들도 표방하고 있고, 그 의미를 살리기 위해 합리성을 중시한 점도 같다.

  그런 테크니컬한 기준에서 본다면 나도 뉴라이트에 서고 싶다. 그러나 뉴라이트의 합리성에는 뭔가 석연찮은 것이 있다. 더 세밀히 살펴보니 뉴라이트 저자들이 합리성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

  "인간의 문명이 도그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는 것, 도그마를 순화시켜나가는 과정이 바로 문명의 발달 과정이며, 순화된 도그마의 조화로운 균형이 바람직한 문명 상태라는 생각 위에 나는 역사를 바라본다. (<밖에서 본 한국사>, 15쪽)

  그런데 뉴라이트 저자들은 합리성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합리적 근거가 없는, 자기들이 선택한 전제들 위에서 역사를 논한다. 어떤 궤변과 망설이라도 짜낼 수 있는 담론구조다. 합리성의 한계를 무시하면 상식도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현란한 논설 안쪽을 차분히 들여다보면 역사와 학문, 인간과 사회, 정치와 경제의 의미에 대한 몰상식한 재단이 널려 있다. 그들은 어째서 이토록 상식을 등지는 담론 구조에 몰두하게 된 것일까? 순수한 학문적 동기만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들의 참된 동기가 정치적인 것일까, 아니면 정략적인 것일까?

  나는 한국 주류 역사학계의 '비정치적' 경향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역사학 본연의 정치적 성격을 외면함으로써 소위 재야 사학계의 '과(過)정치적' 성향에 균형을 잡아주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뉴라이트가 정치적 목적 의식을 가지고 역사학에 접근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다만 그 정치 의식이 건전한 수준에 이르지 못해 정략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안병직·이영훈 지음, 기파랑 펴냄). ⓒ프레시안

  제일 먼저 검토한 것이 안병직 씨와 이영훈 씨의 대담집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다. '뉴라이트 사관'의 대표 두 사람의 담론 범위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두 사람을 '역사학자'로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이 책을 몇 장 넘기기도 전의 일이었다.

  역사란 인간을 공부하는 학문이다. 인간이란 대단히 복잡하고 심오한 존재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인간이란 존재의 한 모퉁이라도 파악하려는 노력에서 만들어진 여러 분야의 학문 가운데 하나가 역사학이다. 역사학자는 인간성을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해온 일들을 살펴 그로부터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키워나가려 노력한다.

  그런데 안병직 씨와 이영훈 씨는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해 놓고 그 위에서 역사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이 씨는 "Homo Economicus"라는 기발한 용어까지 스스럼없이 내놓는다. 이 자의적 규정이 우리 사회의 과거, 현재와 미래에 대한 그들의 논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이다.

  홉스가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고 사회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설명한 것은 1651년의 일이다. 이기심은 인간성의 엄연한 한 부분인데, 그때까지 통상 인식되어온 것보다 중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홉스의 지적이었다. 당시의 시대 변화 속에서 의미 있는 지적이었다. 이 지적을 절대적 진리처럼 받드는 21세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홉스 자신이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홉스에 맞서는 지적으로 눈에 띄는 것이 인류학자들의 미개사회 연구다. 아직도 금속과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수렵-채집 단계에 머물러 있는 미개사회를 관찰함으로써 문명 '오염' 이전의 인간 본성을 파악하려는 노력이다. 인류 발생부터 농업혁명에 이르기까지 수십만 년의 긴 세월 동안 인간이 살아온 모습을 미개사회의 거울에 비춰보려는 것이다.

  '부시맨'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남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 주변의 쿵족은 1963년 이래 인류학자, 고고학자, 언어학자, 영양학자들이 참여하는 연구팀의 체계적 연구대상이 되었다. 이 연구의 결과는 미개를 곧 야만으로 보던 통념을 깨뜨렸다.

  쿵족의 먹을거리 중에는 쥐, 뱀, 벌레 등 '몬도가네' 수준이 많다. 그러나 관습의 색안경을 벗고 보면 영양학적으로 훌륭한 것이다. 먹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생존을 위한 먹을거리 확보에 큰 노력이 들지도 않아서 서로 어울려 노는 등 여가시간을 충분히 가진다. 그리고 먹을거리의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기후 변화에도 큰 위협을 받지 않는다.

  쿵족 사회의 관찰에서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구성원들의 연대감이다. 식량을 오래 보관할 수 없으니 사유재산의 관념이 약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남보다 '뛰어난 존재'가 되는 길조차도 이 사회에서는 막혀있었던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몇 차례 사냥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듭 올리자 동료들이 슬그머니 왕따를 놓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그 사람은 사냥에서 빠지고 지내다가 며칠 후 다시 나서자 거리낌 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다른 곳의 미개사회에서도 일반 문명인들을 놀라게 할 만한 평화와 평등의 모습이 많이 보고되었다. 투쟁적인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농업문명을 겪지 않은 인간의 모습에서 평화와 평등이 일반적 양상이고 이기심과 투쟁은 더러 특별한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정도다.

  미개인들이 그런 정도로 평화와 평등의 모습을 보인다면 인간의 본성에 '짐승'과 근본적 차이가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인류가 지구상에서 특출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과정에 비추어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인류는 농업문명 이전에도 이미 '성공'한 종이었다. 농업문명 발생 당시 인류는 남극대륙을 제외한 모든 육지에 서식하고 있었다. 포유류 가운데 가장 적응력 높은 종의 자리를 벌써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적응력은 인간의 사회성기초를 둔 것이었다. 초기 인류의 유리한 점이 도구와 언어였다고 하는데, 나는 언어를 더 중요하게 본다. 초기 인류와 비슷한 수준으로 도구를 구사하는 동물은 여럿 있다. 그러나 인류와 비교할 만한 차원의 언어를 가진 동물은 없다.

  초기 인류의 언어는 대립보다 유대를 강화하는 데 역할이 있었다. 대립의 표현은 언어까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언어가 있음으로 해서 "주먹으로 해결할 일을 말로 해결"하는 일이 부단히 있었을 것이니, 언어가 통하는 사회는 내부갈등을 최소화함으로써 외부에 대한 경쟁력을 키울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을 통해 다른 동물들과, 그리고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집단들 사이에 경쟁을 계속하는 동안, 언어를 잘 발달시키고 튼튼한 유대감을 키워낸 사회들이 더 뛰어난 적응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발생 당시 인류의 속성은 다른 짐승들과 그리 큰 차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십만 년에 걸친 문화적 진화를 통해 인류만의 특성을 키워냈다.

  농업이 발달하고 금속과 문자를 쓰게 되면서 인류는 본격적 문명단계에 접어들었다. 도시와 국가가 나타나면서 계급과 직업이 갈라져 나왔다. 그러나 농업사회의 밑바탕에는 채집-수렵 단계에 형성된 공동체의식이 깔려있었다. 자본주의가 유행할 즈음에 와서야 이런 의식을 깨뜨릴 필요가 제기되었고, 그 필요 위에서 홉스의 지적이 나온 것이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이기심을 더 절제하는 사람들이 있고 덜 절제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선시대까지 한국사회는 이기심의 절제를 권장하는 편의 사회체제를 지켜왔다. 그 속에서는 "개인의 발전을 억압하는 분위기"라며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체제 덕분에 민족공동체가 살아남고 우수한 문화를 빚어왔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일제 통치가 이 체제를 깨뜨렸다. 근대화를 위해 불가피한 변화라는 측면도 있지만, 이민족의 지배라서 더 난폭한 측면이 있었다. 협조자에게 혜택을 주고 반대자에게 불이익을 줌에 있어서 일본 내부에서만큼도 예의와 염치를 지켜주려는 노력이 없었다. 일본 지도층에 전통의 배경을 가진 명문의 비중이 상당한 데 비해 식민지 한국에서는 도덕적 권위 없이 친일에만 의존한 벼락출세 집단의 비중이 크게 된 것이 그 결과다.

  친일 자체는 범죄가 아니다. 오늘날의 친중이나 친미와 마찬가지로 대외관계에 대한 합리적 판단에 따른 정치적 태도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친일이든 친미든 친중이든 정치적 태도를 빙자하여 개인의 이익을 위해 자기가 속한 사회를 배신하는 것은 죄악이다.

  뉴라이트에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옹호하는 이야기로, 일본의 의도는 착취가 아니라 '영구병합'에 있었다는 말이 있다. '내선일체'의 사탕발림에 당시 넘어간 사람들도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그것을 좋은 뜻으로 받드는 사람들이 있다니….

  설령 내선일체, 영구병합이 일본의 진심이었다 치고, 또 좋은 뜻이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들은 싸구려 친일파를 그토록 마구잡이로 키워주지 말아야 했다. 일본 자체가 전통의 무게 위에 발전의 길을 찾아나가는 것과 비교라도 될 만한 수준에서 조선사회의 발전조건을 마련해줘야 했다.

  일제 식민통치자들은 일본문화를 이해하고 좋아하는 친일파를 바란 것이 아니라 이기심에 몰려 자기 사회를 배신하는 친일파를 원했다. 그래서 균형도 조화도 아랑곳없이 통치의 능률성에 매몰되어 이기심 하나가 식민지 사회를 휩쓸도록 이끌고 몰아붙였다.

  21세기에 들어온 지금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는 전제 아래 일제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논설은 진지한 역사담론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논설이 나올 수 있는 정치적 상황과 배경이 흥미로울 뿐이다.

  인간에게서 인간다운 특성을 제거하고 싶어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뉴라이트 진영이 규제 완화, 민영화, 부유층과 고소득층의 과세 축소 등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구한다는 사실로 이해된다. 정글 자본주의에 방해되는 인간적-사회적 가치를 배척하는 신자유주의, 그에 복무하는 뉴라이트 멤버들에게서 인간이 살아온 실제 모습을 찾는 진지한 역사담론을 바란다는 것이 무리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