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 ⑤

기사입력 2008-08-22 오전 10:24:18

  뉴라이트 역사관에서는 '문명사'의 관점을 제창한다. 한국의 역사도 '문명화'의 시각에서 다시 보자고 한다. 그들이 말하는 '문명'이란 어떤 것인가?

  이영훈은 <대한민국 이야기> 46쪽에서 "자유, 인권, 법치, 사유재산, 시장, 자기책임 등"을 문명의 기초 요소로 정의한다. 이런 요소들을 제대로 갖춘 문명사회가 이 지구상에 출현한 것이 언제의 일이었을까?

  모든 구성원들이 이 요소들을 두루 누리는 사회를 바라는 것이 무리한 일이라 하더라도, 구성원의 상당수가 누리는 사회라야 문명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상당수'를 구체적으로 어느 비율로 보느냐 따지는 것은 난감한 일이지만, 이영훈의 뜻은 짐작할 만하다.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근대 시민사회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여섯 가지 요소가 대개 근대에 발달한 자유주의를 전제로 하는 개념들이니까. 그리고 사유재산과 시장, 두 가지 요소는 자본주의의 핵심으로 중시되는 것들이니까.

  앞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자본주의를 곧 문명으로 보는 관점은 참 황당하다고밖에 말할 길이 없다. 근세에 나타난 부르주아 사회 이외의 모든 인류 역사를 야만으로 보는 것이 역사관으로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런 관점은 문명의 의미에 대한 몰이해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의미에 대한 무지도 함께 드러내는 것이다.

  연재의 앞머리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간성을 선험적으로, 그것도 매우 편협하게 규정하는 데 문제의 실마리가 있는 것 같다. 이영훈은 같은 책 21쪽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이고 도덕적 이기심이고 협동 능력입니다." 모든 인간이 그렇다는 말인가? 인간의 본성이 그것들밖에 다른 것은 없단 말인가? 이런 말도 한다. "인간을 계급적이며 공동체적인 존재로 규정한 사회주의자들의 인간 이해는 잘못이었습니다."(같은 책 15쪽) 공산권 붕괴만을 보고 이런 판단을 할 수 있는가?

  이영훈의 눈을 가리는 것은 공산권의 붕괴로 나타난 자본주의의 승리인 것 같다. 그의 역사 공부는 자본주의의 승리를 이해하는 목적을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인간 이해는 공산권 붕괴에 비쳐 보이는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것 같다. 인류의 긴 역사를 통해 이런저런 기술 여건 아래 활용되어 온 여러 제도 가운데 하나가 자본주의라는 사실도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자본주의를 역사적 현상으로 본 마르크스"

  자본주의 출범을 16세기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16~18세기에 유행한 중상주의를 자본주의 초기 단계인 '상업 자본주의'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진면목을 드러낸 것은 18세기 말에 시작된 '산업 자본주의'였다. 상업 자본주의가 상업 분야에 한정된 현상이었음에 반해 산업 자본주의는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에 전면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초판을 내놓은 1867년 무렵에는 산업 자본주의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금융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추세가 나타날 때였다. 산업과 경제에서 시작해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변화의 흐름이 하나의 역사적 현상임을 마르크스는 인식하고 '자본주의'란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이 흐름이 장차 어느 단계에서는 파탄을 일으키고 공산주의로 대치될 것을 예언했다.

  자본주의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해서는 마르크스 이래 많은 탐구가 있어 왔다. 사회의 조직원리로서 자본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천착하는 것이 주류다. 그런데 근래 와서는 환경론의 관점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자유의 생태학(The Ecology of Freedom)>에서 머레이 북친이 한 말이 많은 주목을 끌고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관념 자체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다."

"환상적 콤비,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뉴라이트는 자본주의를 문명 그 자체로 볼 만큼 찬양하는데, 자본주의가 그토록 좋은 것이라면 왜 근세에 들어와서야 세상에 나타난 것일까? 적어도 농업 문명 발생 이후의 인간 세계에는 시장이 어디에나 만들어져 인간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이 시장을 자본주의 원리로 운용하는 발전이 근세 이전에는 어째서 나타나지 않았던 것일까?

  자본주의의 화려한 등장은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경제사가들은 로마제국에서도, 9~12세기의 칼리프국에서도, 송대 이후의 중국에서도 자본주의 '맹아'를 찾아낸다. 그러나 그 맹아들은 꽃 피우고 열매 맺지 못했다. 유독 19세기 유럽에서만 자본주의가 진면목을 드러내고 유럽인의 세계 정복을 위한 탈것이 되었다. 아니, 유럽인이 자본주의의 세계 정복을 위한 탈것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자본주의 원리가 현실 속에서 작동하려면 '성장'의 동력을 필요로 한다. 통제 경제는 정치의 동력이 시장의 움직임을 결정해 주니까 따로 동력이 필요 없다. 반면 외부의 개입 없이 움직이는 자본주의 시장은 내부 동력을 필요로 한다. 중상주의 시대에는 대항해 시대 이후의 해외 교역과 약탈이 동력 노릇을 해줬다. 이 동력이 어느 수준에 이르자 시장의 범위를 넘어 다른 부문에까지 힘을 뻗치게 된 것이 18세기 말 산업 자본주의의 탄생이었다.

  이 때부터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은 환상적인 콤비플레이를 시작했다. 하드웨어를 맡은 산업혁명이 상품 공급을 늘려주면 소프트웨어를 맡은 자본주의가 사회조직을 바꿔 가면서 더 큰 수요를 일으켜주는 것이었다. 1만 년 전의 농업혁명 이후 인류 역사상 최대의 기술적 도약인 산업혁명이 자본주의 대두의 배경인 것이다.

"지구의 피부병에서 심복지환으로 자라난 인류"

  농업혁명이 당시의 인류사회에 어떤 체제 변화를 가져왔는지는 분명히 밝히기 힘들다. 농업혁명은 산업혁명에 비해 여러 곳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산만하고 완만하게 진행된 과정이었기 때문에 때와 장소에 따라 서로 다른 많은 체제들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곳에서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회 조직이 계속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이다.

  산업혁명의 진행 과정에서는 자본주의가 사회 조직 원리로서 가장 강력한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농업혁명 후의 농업사회 안에서 사회 조직 원리가 변화를 겪은 것처럼 산업혁명 후의 산업사회에서도 사회 조직 원리는 바뀔 것이다. 자본주의는 급속한 기술발전의 배경 없이는 지속되기 어려운 문제를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농업혁명도 산업혁명도 인류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였다. 자연에 아무런 조작도 가하지 않고 다른 동물들과 별 차이 없는 방식으로 살아간 것이 수렵-채집 단계였다. 그러다가 지구의 표면을 체계적으로 관리해 곡물과 가축을 키우게 된 것이 농업혁명이었다. 자연이 던져주는 것을 '얻어먹는' 단계에서 자연의 식량 창고에 들어가 '찾아먹는' 단계로 넘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산업혁명은 인류가 자연을 쥐어짜서 '뺏어먹는' 단계로 넘어온 것이다. 지구의 표면에만 손대는 것이 아니다. 근육이고 뼈대고 내장이고 가만두는 것이 없다. 농업문명 단계의 인류가 지구의 피부병이었다면 이제 심복지환이 되었다. 아예 숙환(宿患)이 될지도 모른다.

  지구의 위기에 대해서는 환경과 생태 분야에서 많은 심각한 지적이 쌓여오고 있다. 이 글에 인용해 오고 싶은 것이 많지만, 설명을 간단히 하기 위해 인구와 에너지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좁혀 보겠다.

▲ 화석연료 고갈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상태에서 대안 에너지 전망은 쉽사리 풀리지 않고 있다. 핵 에너지는 부존량이 화석연료의 10배 이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폐기물 문제를 포함해 안전한 사용 방법이 아직도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 '청정 에너지'란 선전을 반대자들은 '청정한 독약'이라고 비웃는다. ⓒ뉴시스

"에너지 위기는 지구의 경고"

  산업혁명 출발점인 18세기 말의 세계 인구는 약 10억으로 추산된다. 그 이전의 인구 증가율은 연 0.04~0.05%로 추정되니, 인구가 갑절로 늘어나는 데 100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구가 10억에서 20억으로 늘어나는 데는 약 120년이 걸렸다. 그로부터 다시 갑절로 늘어나는 데는 겨우 50년의 시간이 걸렸다. 폭발적인 팽창이다.

  200년 전보다 개체수가 6배로 늘어난 인류의 에너지 소비량은 얼마나 늘어났을까? <위키피디아>의 "World Energy Resources and Consumption"조에 따르면 지금 인류의 에너지 소비량은 1인당 평균 약 2.1㎾다. 가장 큰 나라는 단연 미국, 11.4㎾이고, 그 밑으로 일본, 독일 등 선진국들이 6㎾ 수준이다. 가장 작은 나라는 방글라데시, 1인당 평균 0.2㎾. 산업혁명 초기의 세계 평균은 지금의 방글라데시보다도 훨씬 낮았을 것이다.

  문제는 평균 에너지 소비량이 인구 팽창보다 계속 더 빨리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13억 인구의 중국은 개혁 개방 시작 후 2.5배 늘어나 1.6㎾까지 올라와 있다.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을 이루겠다는 2030년까지 두 배 이상 더 늘릴 것이다. 1인당 0.7㎾에 머물고 있는 11억 인구의 인도는 또 가만히 있겠는가?

  산업화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진 상황에서 에너지는 '자원 중의 자원'이 되었다. 농산, 광산, 공산의 모든 생산 분야에서 에너지가 핵심 원료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 최대의 에너지원이던 화석연료가 고갈을 목전에 두고 있다. 대안 에너지의 개발 필요가 오래 전부터 부각되어 있지만, 아직도 돌파구는 보이지 않고 있다.

  수요는 계속 늘어나는데 자원이 고갈되어 간다면 희소성에 의해 가격이 올라가는 것이 시장의 기본 법칙이다. 그런데 세계는 오랫동안 에너지 저가(低價) 체제에 길들어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 자원 약탈을 위해 만들어진 저가체제가 냉전시대까지 계속된 것은 기름값 인상이 체제 경쟁에 불리하기 때문이었다. 1973년 석유파동 이후 유가 상승이 시작되었지만, 최근 기록한 배럴당 150달러도 시장 법칙에 충분히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냉전이 끝난 후에도 기름값이 완전한 자유방임에 맡겨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 존속을 위한 성장의 열쇠가 거기 걸려 있기 때문이다. 시장 법칙에 맞는 수준까지 기름값이 올라갈 경우, 전 세계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에 빠질 것이 예상된다. 고전적 자본주의 원리로는 그런 상황을 견뎌낼 수 없다. 플러스 성장 상황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가 체제 안정에 공헌하는 태도를 가질 수 있었지만 마이너스 성장 상황에서는 양쪽 다 태도가 바뀔 수밖에 없다.

"새로운 계급사회를 바라보는 신자유주의"

  인위적 에너지 저가체제는 1973년 이후 한계를 보이고 있다. 유가 현실화가 서서히 진행되는 가운데 고유가 시대에 대한 적응 방법이 모색되어 왔다. 현 정부가 "7-4-7" 공약을 내걸 때는 임기 동안 유가 상승이 없기를 기도하는 마음이었을지 모르겠으나, 기도가 현실에 꼭 통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출범하자마자 깨닫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신자유주의는 보다 현실성 있는 대응책을 내놓고 있다. 전 세계를 계급사회로 재편하자는 것이다. 인구의 대다수를 만족시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힘 있는 자들을 최대한 만족시키고 나머지는 힘으로 누르면 된다는 것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식으로 자유와 인권의 의미를 좁혀서 해석하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언론 통제, 경찰력 강화 등 억압체제 구축에 활용할 기술발전도 쌓여 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노선이 민족주의, 민주주의 등 기존 가치체계를 뒤집는다는 데 있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문제는 신자유주의 인간관이 편협하고, 따라서 불안정하다는 데 있다. 지난 30년간 미국의 민주주의 가치가 크게 훼손되었음에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위협이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신자유주의자들은 고무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처럼 문명 전통의 힘이 이례적으로 약한 사회가 아니라면 반응이 다를 것이다.

  우리나라 뉴라이트가 기존 가치체계를 뒤집는 데 힘을 쏟는 것도 신자유주의 노선 실행을 위한 노력이다. 민족주의가 드러난 타도 대상이고 민주주의가 숨겨진 과녁이다. 자본주의화 이외의 역사에서 모든 의미를 지워버리려는 것이 뉴라이트 역사관이다. 한국인의 인간성이 그들이 규정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빈약한 것일까? 한국 사회의 문명 전통이 한 때의 상황을 틈탄 계급 사회 편성 시도에 짓밟힐 만큼 허약한 것일까? 앞으로 밝혀질 일이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 ④

기사입력 2008-08-20 오전 8:11:46

  얼마 전 <미래를 말하다>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폴 크루그먼 최신 화제작의 원제는 "자유주의자의 양심(The Conscience of a Liberal)"이다. 여기에서 양심이란 말은 근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펼쳐져 온 미국 경제 정책을 비판하는 뜻을 담은 것이다. 상위 1%의 이익을 위한 이 비양심적인 정책이 미국 중산층을 무너뜨려 미국을 불안하고 위험한 사회로 만들어왔다고 크루그먼은 지적한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자유주의'를 내세운다. 뉴라이트 비판자들이 흔히 '신자유주의'로 지목하는 것을 비껴가는 주장이다. 레이건 이래 미국이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정책이 널리 비판의 대상이 되어있는 상황이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사실 신자유주의자로 지목되는 사람 중에 신자유주의라는 간판을 스스로 내세우는 사람은 어느 나라에도 없다. 다들 자유주의를 표방한다. 그런데 이들이 일반 자유주의 진영과 구별되는 특색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기에 '신'자유주의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과연 한국 뉴라이트의 자유주의는 '신'자를 붙일 자격이 있을까, 없을까?
  
  "신자유주의도 자유주의는 자유주의다"
  
  한국 정치계에서 민정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언론계에서 조선-중앙-동아로 대표되어 온 보수 우파는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수구' 세력으로 지탄받는 일이 많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대표되는 진보 세력은 보수 우파의 이 부정적 이미지에서 반사 이익을 많이 얻어 왔다.
  
  뉴라이트 대두의 배경은 수구 이미지를 벗어나려는 "합리적 보수" 표방 분위기에 있다. 보수 우파에게도 양심이 있을 수 있으며, 그 정책 노선도 단순한 이기주의에 그치지 않고 국가 사회를 위한 건전한 기준에 따라 세워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불가결한 요소의 하나가 철학, 즉 세계관이다. 건전하고 양심적 자세라는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사안을 고려함에도 일관된 기준에 따라 태도를 정한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어느 정권 때는 광우병 위험을 극도로 과장하다가 정권이 바뀌었다고 180도 뒤집는 식으로는 이런 믿음을 못 준다.
  
  그래서 'xx주의'란 이름이 필요하다. 'xx'에 뭔가 좋은 말을 넣어야 한다. 안보? 잘 팔릴 것 같지 않다. 평등? 사람들이 너무 웃을 것 같다. 민주? 특색이 없다. 자본? 속 보인다. 민족? 그건 싫다. 결국 택할 말이 '자유'밖에 없다. 어차피 비판자들도 '신자유주의'로 지목하고 있으니 글자 하나만 빼면 될 일 아닌가?
  
  실제로 뉴라이트 핵심 인물들의 주요 주장이 자유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문제는 자유주의가 포괄하는 범위가 너무 넓어서, 그 이름만으로는 현대 세계에서 하나의 정책 방향을 규정하는 의미가 약하다는 데 있다. 신자유주의 자체도 자유주의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자유주의의 성공"
  
  그저 억압보다 자유를 좋아한다는 뜻으로도 '자유주의'라는 말이 쓰이지만, 이것은 하나의 관용어일 뿐이다. 자유주의자(liberal)란 말이 분명한 실체를 가리켜 처음 쓰인 것은 1801년, 영국의 토리당이 휘그당 진보파를 비난하는 말로 쓴 때였다. 이 비난의 말을 진보파가 자랑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실체 있는 자유주의가 나타났다.
  
  자유주의는 19세기 유럽 사상계를 풍미했다. 왕권, 귀족, 교회가 대표하던 구질서에 맞서는 자유주의가 시대의 흐름을 탔다. 미국 독립(1776)과 프랑스 대혁명(1789)의 진보 정신도 자유주의란 이름으로 정리되었다.
  
  19세기 유럽에서 자유주의가 정치적 강세를 띤 데는 경제 자유주의의 공로가 컸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1776)으로 체계화된 경제 자유주의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제한하려는 입장이다.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고, 따라서 그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간섭을 억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자유주의 원리를 경제정책에 적용시킨 것이다.
  
  국가의 역할에 대한 <국부론>의 관점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국가의 적극적 경제 개입을 주창하는 중상주의(mercantilism)가 유행했다. 스미스는 국가의 중상주의 차원 개입을 반대했지, 국가의 기본 역할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근래 신자유주의자들은 스미스가 국가의 역할을 극히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주장하며 자기네 자유방임 경제 정책의 근거처럼 내세우는 경향이 있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경제 자유주의의 성공은 산업혁명의 진행과 이에 따른 자본주의 발달에 힘입은 것이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달에 가장 앞선 영국에서 자유주의 흐름이 발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산업 경제 분야의 경쟁에서 터져 나온 자유경쟁시장의 힘이 정치면에까지 영향을 끼친 것이 19세기의 전반적 추세였다.
  
  "경제 자유주의와 사회 자유주의"
  
  19세기 말까지 자유주의는 모든 선진국의 지배 담론이 되었다. 중요한 정책 논의가 모두 자유주의 틀 안에서 이뤄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유주의의 내재적 모순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모순은 자유주의의 경제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 사이에 있었다. 먼저 나타난 경제 자유주의는 국가의 간섭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인권의 소극적 의미만을 주장했다. 19세기 후반에 형성된 사회 자유주의는 이와 달리, 사회의 기본인 개인이 교육, 의료, 취업 등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적극적 의미의 인권을 주장했다. 확장된 인권의 의미를 보장하는 제도로서 국가의 역할을 크게 보는 입장이었다.
  
  초기 자유주의의 도전 상대는 전제국가와 교회 등 구체제였다. 19세기를 통해 구체제가 약화되고 자유주의 원리가 현실을 지배하게 되면서 그 타당성에 대한 의문이 일어났다. 인간이 정말로 자기 득실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인가? 자유방임(laissez-faire)이 구체제 대신 새로운 억압 체제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
  
  19세기 말 유럽에서 산업 경제 부문은 국가와 맞서거나 국가를 이끌 만큼 자라나 있었다. 제국주의가 무한 경쟁의 양상으로 흐른 것도 산업 경제 부문의 압박 때문이었다. 개인의 자유도 정치적 억압보다 경제적 억압에 더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다. 이 변화를 중시하는 사회 자유주의가 당시로서 진보적 대안을 찾는 노력이었다면, 자유방임 원리를 고수하는 경제 자유주의는 현상유지를 꾀하는 보수적 입장이 되었다.
  

▲ 촛불 집회 중단을 촉구하는 보수단체의 맞불 집회. 하이데거와 포퍼 등 많은 철학자들이 자유의 불가분성을 이야기했다. 사회의 한 부문에 자유가 있고 다른 부문에 자유가 없는 상황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맞불 집회의 자유가 있었더라도 촛불 집회의 자유가 없었다면 집회의 자유는 없었던 것이다. ⓒ뉴시스

  "자본주의의 모순을 완화한 착근 자유주의"
  
  진보적 대안을 찾는 노력은 헨리 조지(<진보와 빈곤>), 소스타인 베블런(<유한계급론>) 등의 제도학파(institutionalism)로 하나의 새 흐름을 만들었지만 자유방임의 큰 흐름을 뒤집지 못했다. 20세기 들어 두 차례 세계 대전과 소련 공산 혁명으로 나타난 파국은 그 결과였다. 두 차례 대전 사이에 터진 대공황을 계기로 정부의 역할을 늘리는 변화가 미국의 뉴딜정책 등으로 나타났지만, 누적된 모순을 해소시키지 못한 채 제2차 세계 대전을 맞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사회주의 진영과 체제 경쟁에 돌입한 자본주의 진영은 자유주의 원리를 지키면서도 사회적 모순의 완화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복지국가 이념도 노동조합의 정치 세력화도 이 시기의 유화적 분위기 속에서 큰 발전을 이뤘다. 자본 계급의 독주로는 사회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불리하기 때문이었다. 이 단계 자유주의를 '착근 자유주의(embedded liberalism)'라 부른다.
  
  착근 자유주의가 널리 성공을 거둔 이유는 전 세계 경제의 빠른 성장에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대공황-제2차 세계 대전의 혼란과 파괴를 넘긴 시점에서 그 동안 축적된 기술 발전의 활용이 넓혀짐에 따라 각지의 경제 개발과 재건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파이가 급속하게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분배 문제에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착근 자유주의의 성공은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남아메리카 농업 생산에 큰 타격을 준 1972년 페루 연안의 앤초비 흉어와 1973년 OPEC의 석유 감산조치로 촉발된 스태그플레이션은 자원의 한계가 드러나는 데 따른 것이었다. 자원 공급은 기술 발전에 따라 무제한 확대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것이 착각으로 확인되고 환경 문제도 심각해지면서 그때까지의 방만한 운영이 이제 불가능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효율성과 위험성"
  
  1970년대 경제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나타난 것이 신자유주의 경제 전략이었다. 요컨대 이제 파이를 전처럼 키우지 못하게 되었으니, 더 이상 너그럽게 나눠줄 수 없다는 것이다. 노동의 가치보다 자본의 가치에 중점을 두는 이 전략은 빈부 격차를 늘림으로써 노동 비용을 줄이고 경제 활동 전반에 대한 자본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착근 자유주의에서 계급 간 타협의 통로 노릇을 한 것이 국가였다. 신자유주의 진영에서 주장하는 "작은 정부"는 바로 이 통로 기능을 없애고 줄이는 것이다. 자본 계급에 대한 과세와 함께 국가의 복지 지출을 줄이는 것이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다.
  
  <위키피디아>에는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위세를 떨친 결과 나타난 현상으로 1)국제 무역과 자본 이동의 확대, 2)관세 장벽의 제거, 3)공공 부문 고용의 축소, 4)공기업의 민영화, 5)부의 집중 등을 꼽았다. 착근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모순을 완화하기 위해 기울여 온 노력을 외면하고 19세기의 자유방임적 경제 자유주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에 대한 비판은 1)국가주권의 손상, 2)착취의 심화, 3)환경의 악화, 4)기업 권력의 확대 등에 집중된다고 한다.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것은 뛰어난 효율성 때문이다. 효율성의 원천은 빈부 격차에 있다. 수력발전에서도 댐의 낙차가 커야 발전이 효율적으로 되는 것처럼, 계급 간 격차가 큰 사회가 더 큰 생산력을 일으킨다. 공산권 붕괴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공로가 컸고, 그 여세를 몰아 그 후의 세계화 과정을 주도하고 있다.
  
  크고 높은 댐은 재료가 강인하고 구조가 정밀하지 못하면 붕괴의 위험이 크다. 근대 이전의 불평등 사회는 오랜 기간에 걸쳐 전통과 관습으로 구축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내구력을 가지고 있었다. 신자유주의는 재산에 따른 계급 구조로 세계를 재편성하고 있다. 급속히 만들어지고 있는 이 구조물이 어느 정도의 내구력을 가질지, 낙관하기 힘들다. 신자유주의 비판자들은 이 구조물이 조그만 지진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역사 속의 승자와 현실 속의 강자를 받드는 뉴라이트"
  
  이영훈은 <대한민국 이야기> 98~100쪽에서 일제 협력자 집단의 역할을 중시했다. 실무와 정보에 밝으면서 양반 관료에게 차별을 받던 중인 출신을 중심으로 개항기와 식민지기의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신흥 지주층을 내세운다. "그들의 사회적 성공을 가져다 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협력적"이었던 그들이 "한국의 근대화를 주도한 계층"이었다는 것이다. 이 전형적 친일파의 후손들이 해방 당시 고등교육과 재산을 갖춘 실력자 집단으로 이승만의 대한민국에 포용됨으로써 대한민국 발전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뉴라이트는 개항 이후의 한국사를 '문명화'의 역사라고 규정하는데, 그들이 제시하는 문명의 요건이란 사유재산권과 계약의 자유 등 바로 자본주의의 요건이다. 따라서 한국의 자본주의화에 잘 적응한 자들이 한국의 문명화를 이끈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지금의 '강부자' 집단이 해방 당시 이승만에게 포용받은 '실력자' 집단과 얼마만큼 구체적으로 연결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자본주의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다는 점에서 이영훈의 눈에는 같은 성격의 집단일 것이다. 이 집단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항일투사든 성실한 노동자든 모두 역사의 낙오자로서 대한민국에 가치 있는 공헌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그는 보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의 실력자 집단 역시 자기네에게 성공의 기회를 줄 어느 지배에 대해서도 협력적이 될 것을 기대한다.
  
  뉴라이트는 역사 속에서도 승자의 입장을 떠받들고, 현실 속에서도 강자의 입장을 내세운다.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더 따져보겠지만, 뉴라이트는 '가진 자의 자유'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의 모범생이다. 대한민국을 '가진 자의 낙원'으로 만들려는 그들의 꿈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이 질문에 자본가와 투기꾼의 대답이 다를 것이다. 자본가는 경제 안정과 공정 거래가 이룩된 진짜 '가진 자의 낙원'을 바란다. 그들의 꿈에는 진정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투기꾼은 요동치는 경제와 허점투성이 시장을 원한다.
  
  그들이 낙원의 꿈을 내세우는 것은 그 꿈이 정말 이뤄지기를 바라서도 아니고 이뤄질 것 같아서도 아니다. 투기의 기회가 넘쳐나는 파탄 국면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자본가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자본가라 하더라도 투기꾼의 유혹에 홀려 다녀서는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 ③

기사입력 2008-08-18 오전 9:35:50

  지금까지 뉴라이트 측 역사서술에서 가장 두드러진 문제의 하나가 일제 통치기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는 주제 자체가 중요한 것일 뿐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고 서술하는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히 검토의 가치가 있다.
  
  뉴라이트의 이른바 '근대화론'은 한국 사학계의 지배 담론인 '수탈론'에 맞서는 것이다. 수탈론은 매우 넓은 범위에서 표출되어 왔고, 또 피해망상적인 정서의 뒷받침도 받아왔기 때문에 그 담론 중에는 더러 불합리하고 편향적인 내용도 섞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일제 통치기를 더 합리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자는 제안은 바람직한 것에 틀림없다. 더욱이 국가들 사이의 접촉면이 갈수록 넓어지고 두터워지는 21세기 상황에서, 이웃 나라들끼리 서로의 역사를 함께 돌아보는 길을 닦는다는 점에서 절실히 필요한 노력이기도 하다. '역사 전쟁'으로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그런 노력의 부족 때문이다.
  
  그러나 바람직한 방향, 필요한 방향이라 해서 손바닥 뒤집듯 내 입장을 내던져버릴 수는 없다. 우리 학계의 입장에도 상당한 범위의 스펙트럼이 있고, 일본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범위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길을 찾아 상대방의 합리적인 길과 어울리면서 그 시너지 효과를 통해 양쪽 사회의 분위기가 접근되기를 바랄 일이다.
  
  우리 쪽의 극단을 비판한다 하여 저쪽 입장 가운데 극단적인 노선을 지지하고 나선다면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증폭시키는 길이다. 우리의 뉴라이트가 일본 사회의 여러 역사관 가운데 가장 극우파의 관점을 따르는 것이 문제다.
  
  "연 평균 3.6%가 높은 성장률이었다고?"
  
  여러 가지 주제를 놓고 뉴라이트 측이 많이 활용하는 수법 하나를 미리 지적하고 싶다. 통념을 벗어나는 새로운 관점을 통계 수치로 포장하는 수법이다. 안병직 씨와 이영훈 씨가 경제사 분야를 연구했기 때문에 주류 역사학자들에 비해 통계 수치를 많이 활용하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숫자를 들이대면 뭔가 '과학적'인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숫자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엄정한 태도가 아쉽게 느껴진다.
  
  1910년대에서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3.6%를 기록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30년간 그만한 성장률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내세우는 것은 한국경제가 그 기간에 꽤 활기찬 발전을 이뤘다는 인상을 주려고 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이 성장의 출발점이 어디인가? 거의 아무런 산업화도 이뤄지지 않고 있던 1910년도다. 오늘날처럼 산업화가 이뤄질 만큼 이뤄진 상황에서도 연 5% 이하로 성장률 목표 낮추는 것을 놓고 온 국민이 서운해 하는 판인데, 아무것 없던 출발점에서 연 3.6%가 높은 성장률이라고?
  
  1960년대 이후 20여 년간 한국경제가 이룩하던 연평균 7~8%보다도 높은 성장률이 근대화 출범 시점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일본인의 손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근대 기술은 어떻게든 들어오게 되어있었고 근대화는 진행되게 되어있었다. 맨바닥에서 시작하는 산업화가 수십 년간 연 4% 미만의 성장률에 머물렀다는 것은 일제 통치가 도와준 결과라고 볼 수 없다. 억누르고 가로막은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낙성대경연구소 연구원들이 계량적 자료에 중점을 두고 한국경제사 분야에서 쌓아온 연구업적 중에는 높이 평가할 것이 많다. 그러나 안병직 전 소장과 이영훈 소장이 학계 외부를 상대로 이 업적을 포장해 보여주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 연 3.6% 성장률을 밝혀낸 것은 훌륭한 연구 업적이지만, 이것이 마치 높은 성장률이었던 것처럼 들이대는 데 정략적 의도가 엿보인다는 말이다.
  
  안병직·이영훈 대담집 <대한민국 기로에 서다> 144쪽에 이영훈의 말로 "결론을 말씀드리면 연간 2.3%의 실질 성장률에 따라 식민지기에 1910~1940년간 한반도의 총소득이 2.7배나 커졌습니다"라 하였다. 그러나 연간 2.3% 성장률로는 30년간 170%의 성장을 이룰 수 없다. 총소득이 170% 성장했다고 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구' 조에 따르면 그 기간 중 한반도 인구는 1313만 명에서 2439만 명으로 86% 증가했으므로 실질 성장률은 30년간 총 45%로 연평균 1.3%에 미치지 못한다. 현금 지출이 늘어나는 '근대화' 과정 속에서 총체적으로 비참한 상황에 틀림없다.
  
  이영훈은 같은 책 142쪽에서 "1910~1940년간 연간 평균 3.6% 정도의 성장이 있었습니다. 동기간 인구 증가율은 연간 1.3%였습니다. 이를 빼면 1인당 실질소득은 연간 2.3%의 수준으로 증가하였습니다"라 하였다. 이영훈의 <대한민국 이야기> 88~89쪽에도 거의 같은 내용을 적었다. 총생산이나 총소득의 근거 자료는 필자가 확인하지 못했으나 같은 기간의 인구증가율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타난 연평균 2.3%가 틀림없다고 본다. 이영훈이 인구 증가율과 실질소득 증가율을 뒤바꾼 것으로 보인다.

  
  "달걀을 수탈하려면 닭에게 모이를 준다"
  

▲ 순간을 포착한 사진만 보고 마음 불편해 하는 것은 그 인물의 마음가짐을 지나치게 예단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좀 너무 많이 굽히는 것 같다. ⓒ한국방송

  뉴라이트 측은 수탈론에 반대하면서 일본 식민 통치는 16~17세기에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 있었던 것처럼 악랄한 착취 체제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다수 수탈론자들도 그런 맹목적 착취 체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 성장의 수준과 방향을 결정하는 데 수탈 의도가 중점적으로 작용한, '합리적' 수탈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달걀을 수탈하기 위해 닭에게 모이를 줄줄은 아는 체제.
  
  허수열 씨가 근대화론 비판서를 "개발 없는 개발"이라는 제목으로 냈지만, 식민지 경제체제와 관련해 더 널리 쓰이는 말은 "발전 없는 성장(growth without development)"이다. 식민지 경제가 성장한다고는 해도 덩치가 클 뿐이지, 발전의 주체로 자라날 길이 열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본국 경제체제의 부속품으로 식민지의 역할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합병 이전부터 대량의 한국 쌀을 수입하고 있었다. 일본의 산업화 과정에서 쌀 공급은 극히 예민한 과제였다. 일본의 한국 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이 쌀 증산이었다. 해방 무렵까지 논의 70% 이상을 소수 지주소유하게 된 기형적 토지 소유 구조도 이 정책 목표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농지 소유를 집중하고 농업 노동을 저임금에 묶어놓는 것이 쌀의 대량 반출에 편리했기 때문에 조세를 비롯한 모든 정책을 꾸준히 지주층에 유리하게 펼친 결과였다.
  
  쌀의 생산도 수출도 늘어났다. 그러나 그 이익을 거둔 것은 상당수 일본인을 포함하는 소수 지주층이었고 그들은 일본제 공산품을 수입해서 썼다. 민중의 소비 수준은 별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내의 공업 생산에 큰 자극을 주지 못했다.
  
  1930년대 들어 북한 지역에 중공업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일본이 괴뢰 만주국을 세우고 '대동아' 건설에 나서면서 세운 입체적 개발 전략의 일환이었다.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 주요 시설을 중국과의 분쟁 소지가 있고 통치 전망이 아직 불안정한 만주 땅보다 식민지 체제를 확립해 놓은 한국 땅에 배치한 것이다.
  
  여러 개 대형 공장이 세워지고 이에 따라 한국의 공업 인구와 공업 생산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제국의 산업 구조 안에서 부속적 역할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내적 재생산 구조를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한국인의 소득 증대는 하급 인력노임에 그쳤고, 연관 산업의 발전 여지도 극히 적었다.
  
  "식민통치는 한국을 종속적 위치에 묶어두었다"
  
  식민지 시대 한국에 근대화 현상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고, 일본의 통치가 이 근대화에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일본이 꾸준히 노력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그 시기에 근대화가 진행되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다. 수탈론이라 해서 근대화의 사실을 일체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을 수탈 대상으로 만드는 방향의, 건전하지 못한 근대화였다고 하는 것이다.
  
  뉴라이트는 일본의 한국 지배가 기본적으로 선의에 입각한 것이었다고 주장함으로써 한국에서 실제로 진행된 근대화가 당시 상황에서 최선의 길이었다는 인상을 주려 한다. 식민 통치자를 '악마'에 가깝게 그리는 극단적 수탈론과 반대로 근대화론자들이 '천사'의 모습으로 보려고 애쓰는 것이 그 까닭이다. 이런 대목에서는 '실증'이 실종되어버린다.
  
  예컨대 일본의 한국 병합 의도가 '영구 병합', 즉 일본의 완전한 일부로 만드는 데 있었기 때문에 한국을 무책임하게 수탈하지 않고 잘 키우려 노력했다고 말한다. 창씨개명을 해주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한 '내선일체' 정책을 그 증거로 내세운다.
  
  근대 세계에 갑자기 내던져진 한국은 독립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적응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직면한 세계 각지 거의 모든 국가와 사회가 함께 한 문제였다. 이 문제를 넘어서는 데 10여 년이 걸린 나라도, 100여 년이 걸린 나라도 있었고, 아직까지 넘어서지 못한 나라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갑자기 주어진 근대적 상황으로 인한 일시적 문제였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일본의 한국 통치는 이 일시적 문제를 스스로 넘어서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었다. 그래야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으면서 일본의 이용 대상으로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당시 일본의 '합리적' 선택이었다.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는 뉴라이트에서 일본 식민 통치자들만을 예외로 볼 까닭이 없지 않은가?
  
  "식민 통치자도 합리적 인간이었다. 천사가 아니었다"
  
  일부 수탈론자들이 보여 온 지나친 편향성에 대한 뉴라이트의 지적에는 나도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도 식민 통치자를 짐승이나 악마보다 가능한 한 합리적 인간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본의 '선의'에 너무 매달리는 것은 편향성의 보정이 아니라 더 심한 편향성이 될 수 있다. 정부가 일본을 합리적으로 대하려 하지 않고 일본 우파에게 "우리가 남이가?" 식 추파를 던지다가 독도 문제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이 그런 사고방식의 문제점이다.
  
  수탈론의 지엽적 문제들을 지적할 때는 그토록 떠받드는 '합리성'이 근대화에 대한 일본의 공헌, 그리고 그 공헌을 뒷받침한 일본의 선의를 강조할 때는 어디로 가버리는 것일까. 식민 통치자를 가능한 한 합리적 인간으로 보자는 당부가 일부 수탈론자들보다 뉴라이트 근대화론자들에게 더 절실한 것 같다.
  
  열강들이 식민지를 확보하려 애쓴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제국주의의 속성에 관해서는 상식 차원에서 확립되어 있는 인식이 있다. 뉴라이트는 이 상식을 무시한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가 야욕 때문이 아니라 자기방어를 위한 것이었다는 말까지 한다. 대동아전쟁 당시 "민족의 활동 공간을 확보한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선전을 아직도 곧이듣고 있는 자칭 '역사학자'들을 21세기 한국에서 보는 것이 놀랍다.
  
  일본은 1854년 미국의 함포외교에 굴복해 개항했다. 메이지유신으로 능동적인 근대화의 길을 연 것은 1868년의 일이었다. 그 사이의 14년 동안 혼란에 빠져 있던 일본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달려든 열강이 없었던 것은 일본의 행운이다. 개항 후의 한국에게는 그런 행운이 없었다. 활동 공간을 넓히고 싶어하는 열강, 일본이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흥 열강 일본은 유럽의 고참 열강들에 비해 구조적 문제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 부담으로 인해 일본 자체 국민들에게까지 억압적인 군국주의 체제로 흘러가게 되었다. 식민지 되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하필 그런 일본에게 침략을 당했다는 것은 한국인에게 겹쳐진 불운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