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0월부터 1996년 2월까지 주한 미국대사로 근무한 제임스 레이니(1927~ )는 특이한 배경의 인물이었다. 예일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중 육군에 입대해 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에 한국에서 복무했는데 이때의 경험으로 신학-성직의 진로를 결심했다고 한다. 학부를 마친 후 예일 신학대에서 공부하고 감리교 목사가 된 후 1959년에서 1964년까지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1964년 한국을 떠나면서 목회직보다 연구직으로 진로를 다시 정하고 예일대 대학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학위를 받은 후 1966년 반더빌트 신학원 교수로 부임했다가 1969년 애틀랜타에 있는 에모리대학의 캔들러 신학대학 학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1977년부터 1993년까지 총장을 지냈다. 그리고 총장을 그만둔 뒤 주한대사로 온 것이었다.

 

한국과의 인연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 레이니는 총장 재임 시절에도 한국과 관계된 일에 많은 성의를 보여주었다. 1993년 7월 그가 주한대사로 임명되어 상원 인준을 기다리고 있을 때 워싱턴 간 길에 그를 만난 자리를 한완상 통일부장관은 이렇게 회고했다.

 

(...) 그는 17년간 총장으로서 대학의 연구 기능을 크게 높여 3,000여 개 미국 대학 중에 20위 안에 드는 명문대로 키웠다. 그는 그러는 와중에도 늘 한국을 잊지 않았다. 특히 한국의 민주화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한 까닭에 정계나 기독교계 지도자들 중에 친구가 많다.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김관석-문익환-문동환-박형규-강원용 목사가 모두 그의 친구들이다. (...)

 

그 역시 주한대사인 자신에게 미국 정부가 전적인 권한을 줄지 염려하는 듯했다. 그에게는 이른바 ‘애틀랜타 인맥’이 있었다. 마틴 루서 킹 목사 계열의 흑인 지도자인 앤드루 잭슨 목사 등이 그의 친구요 동지였다. 에모리 대학교 인맥도 그에게는 큰 자산이었다. 상원 국방위원장 샘 넌 의원과 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그의 지기다. 에모리 대학교 총장 시절 그는 카터를 국제정치학 교수로 초빙하고 부설로 카터 센터를 설립해 세계평화 중재자로 뛸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기도 했다. (<한반도는 아프다> 127-129쪽)

 

카터야 워낙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샘 넌(1938~ )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을 붙이고 싶다. 에모리대학 출신으로 1972년부터 1996년까지 상원의원을 지낸 넌은 1987년부터 8년간 상원 국방위원장을 맡았고, 클린턴 행정부 내내 유력한 국방장관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2000년 대선 때도 고어가 승리할 경우 그의 입각이 널리 예상되고 있었다. 중도보수 입장이지만 걸프전쟁 반대 등 합리적 태도를 널리 인정받은 인물이다. 상세한 곡절을 모르는 채로 얼른 생각할 때, 레이니의 주한대사 등용에도 넌 의원의 역할이 컸을 것 같다.

 

드러난 경력만 보더라도 그의 대사 부임을 한완상이 얼마나 반가워했을지 짐작이 간다. 한국의 진보진영 및 기독교계와 좋은 관계를 갖고 있고 평화 지향 의지가 강한 레이니가 한국 사정을 미국 정부에(적어도 국무부에) 알리는 위치에 있다면 자신이 추구하는 ‘햇볕정책’을 위한 한-미 공조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나아가 DJ-YS로 갈라져온 한국의 진보진영에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키우는 데도 기대감을 가졌을 것 같다.

 

그런데 10월에 레이니가 부임할 때는 김영삼 정부 내에서 한완상의 위치가 이상하게 되어 있었다.

 

1993년 10월 하순 마침내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가 부임했다. (...) 나를 포함해 지인 몇몇이 초청인으로 나서 11월 5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환영연을 준비했다. (...)

 

그런데 얄궂은 일이 생겼다. 청와대의 주돈식 정치담당 수석이 전화로 레이니 대사 환영연에 가느냐고 물었다. 뜻밖의 질문이었다. 간다고 대답했더니 우물쭈물하면서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것이 김영삼 대통령의 뜻이라고 했다. (...) 한 나라의 부총리가 차관급인 미 대사의 환영연에 가는 것은 격이 맞지 않는다고 대통령이 얘기했단다.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나는 부총리가 아니라 레이니 대사의 친구로서 초청인을 맡았다고 분명히 말했다. 중간에서 말을 전하는 주 수석도 꽤나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나로서는 대통령의 속내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대통령이 야당 총재로 외롭게 투쟁할 때 레이니는 에모리 대학교 총장으로서 그를 미국에 초청해 강연을 맡기기도 했다. 그때도 내가 강연 원고를 작성해주었다. 김 대통령도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미국 정계외 민간에 알릴 수 있게 해준 레이니를 내내 고마워했다. (...) 최근 미국의 대북정책에 불만이 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대통령의 뜻을 존중해 행사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

 

나는 초청인들에게 공무로 바빠 환영연에 참석할 수 없다고 통보하고 씁쓸히 뉴스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순간 문득 두 가지 일이 머리를 스쳤다.

 

하나는 레이니 대사 부임 직전 주간지 <뉴스 피플>에서 레이니 박사와 한국의 깊은 인연을 소개한 기사였다. “한반도 통일 문제에 뚜렷한 입장을 표시하고 있는 김대중 전 총재, 한완상 부총리와 교감을 나눠 두 사람에 대한 통일 정책을 뒷받침할 것으로 보인다. 레이니 대사가 김대중 전 민주당 대표와 한 부총리와의 특수한 관계로 인해 두 사람이 추진하고 있는 통일 문제에 상당히 진솔한 대화와 의견교환이 오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 새삼 기억에 떠오른 또 하나는 레이니 대사가 에모리 대학교 총장 시절 김 전 총재에게만 명예박사 학위를 주고 김 대통령에게는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혹시 이 일로 김 대통령의 자존심이 상했다면, 레이니 대사 환영연을 성대하게 준비하는 것이 못마땅했을 것이고 거기에 내가 초청인이 된 것도 불편했을 듯했다. 하여튼 씁쓸한 일이었다. (<한반도는 아프다> 174-177쪽)

 

명예박사 안 준 게 서운해서 성대한 환영연이 못마땅했다니, 이건 김영삼을 너무 치사한 인간으로 보는 것 같다. 아무튼 김영삼을 오랫동안 가까이서 보좌해 온 사람이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그에 비하면 김대중의 정책적 입장이 너무 부각되는 것을 꺼렸다는 것은 현직 대통령으로서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몇 주일 후 한-미 정상회담(11월 23일)에서 파열음을 일으킬 김영삼의 불만이었을 것이다. 김영삼은 당시 대북 강경론자들 사이에 유행하던 북한붕괴론에 휩쓸려 있어서 북한을 쉽게 곤경에서 풀어주려는 포괄적 타결안에 반대였고, 나아가 그런 방향의 결정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내리고 한국에게는 따라올 것을 강요하는 현실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결함이 많은 사람이라도 김영삼은 자기 나름의 자주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레이니의 기용은 미국 정부에서 포괄적 타결안이 진지하게 검토되기 전에 이뤄진 결정이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으로서 클린턴 행정부는 주먹보다는 가급적 말로 하겠다는 기본노선을 갖고 있었고, 그 노선에 따른 레이니의 기용은 대북 유화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클린턴과의 대면에서 한 판 ‘뒤집기’를 벼르고 있던 김영삼은 클린턴의 대리인 레이니에게도 자신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경고를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외교관으로서 대사의 역할에는 본인의 능력과 의지에 따라 큰 편차가 있다. 레이니의 전임자로 1993년 2월에 3년여의 한국 근무를 끝내고 서울을 떠난 도널드 그레그도 역할이 큰 미국대사의 하나였다. CIA 출신으로 군사-정보 분야 전문가이기도 한 그레그는 팀스피릿 재개 방침이 제대로 된 논의를 거치지 않고 군부 쪽에서 나와 버렸다며 자신의 재임기간 중 미국의 정책 중 “가장 큰 실수 중의 하나”라고 했다.(셀리그 해리슨, <코리안 엔드게임> 326쪽) 후임자도 결정되기 전에 그레그가 그만둔 이유가 이 문제에 대한 반발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레그는 그 후 여러 차례(최근에는 지난 2월) 북한을 방문하며 북한의 순조로운 국제사회 진입을 돕는 일에 애쓰고 있다. (<중앙일보> 2014년 4월 18일 “6번째 북한 다녀온 전 주한미국대사 도널드 그레그”)

 

미국의 주한대사는 다른 곳 대사와 달리 주재국과의 관계를 주둔군사령관과 나눠 맡고 있다. 그래서 리스카시 사령관이 (국무부가 참여한) 본국 정부의 결정 없이 팀스피릿 재개 가능성을 표명한 데 그레그 대사가 불만을 품은 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혼선을 빚을 수 있었다. 샘 넌 상원국방위원장을 배경에 둔 레이니 대사는 이런 혼선을 피하면서 북핵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한 자신의 관점을 본국 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을 것이다. 부임 몇 달 후 그의 활동의 일각이 위트-폰먼-갈루치의 <북핵위기의 전말> 202-203쪽에 그려져 있다.

 

짐 레이니 주한 미 대사는 미국정부가 위기관리 능력을 높이지 못하면 북핵 해결이라는 새로운 목표와 한반도의 평화와 억지유지라는 종래의 목표 사이에 사로잡혀 헤어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두 가지 다 중요했다. 그러나 레이니 대사가 보기에 클린턴 행정부는 전자에만 지나치게 집중하여 후자에는 충분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

 

레이니 대사는 미 행정부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가지 조치를 단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첫째, 북한과의 신중한 접촉을 위해 갈루치보다 눈에 덜 띄는 새로운 인물을 임명해야 한다. (...) 슈퍼 화요일 합의가 무산된 후 그의 아이디어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지만 행정부 내에서 많은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위기관리를 위한 정책을 전담하는 총책임자를 임명해야 한다는 레이니 대사의 두 번째 권고가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다른 부처들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이와 별도로 레이니 대사는 국무부 관리들에게 한반도 정책 총책임자를 임명하자는 주장을 계속 했다. 그의 제안에 호응이 없자 그는 오랜 친구이자 외교안보문제에 관심과 활동이 큰 샘 넌 상원의원을 찾았다. 조지아 주 동쪽, 고속도로에서 약간 벗어난 간이식당에서 넌 의원을 만난 레이니 대사는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조지아 주 출신 민주당 의원인 넌은 레이니 대사를 백악관 비서실장 맥 맥라티에게 연결해주었다. 맥라티를 만난 레이니 대사는 “제발 한반도 정책을 총괄할 사람을 임명해주시오. 내리막길은 정말 위험하단 말이오”라고 말했다. 마침내 레이니 대사의 말이 통했다. 백악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갈루치 차관보를 불렀다. 그리고 미국정책의 일관성과 효과적인 정책조정을 위한 방법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상원 국방위원장과의 친분을 이용해 백악관을 설득,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하게 만들다니, 직업외교관이나 직업관료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짓이다. 레이니는 신념과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1994년에 그가 주한대사로 있었던 것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크게 다행한 일이었다. 그의 공헌은 카터 전 대통령을 평양으로 보내는 장면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Posted by 문천

 

<나의 한국현대사> 잘 받아서 잘 읽었습니다. 대한민국 역사를 알기 쉽게 정리하는 일은 나도 해보고 싶은 일인데 당신은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분이라 생각해서 당신이 이 일에 나선 것이 반가웠죠. 이제 그 성과가 나온 것을 보며 “아, 유 선생이 이렇게 잘 해냈으니 나는 할 일이 줄었구나!” 안도감이 들면서도 한 구석으로는 “유 선생이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부터 어떻게 나아가야 하나?” 욕심도 나고 걱정도 듭니다.

 

당신 글 읽다가 늘 그러듯 무릎을 친 대목이 많습니다. 제목에서부터 주관성을 스스럼없이 표방한 점, 도입부에서 시점과 종점을 대비하여 시야를 안정시킨 점, 산업화와 민주화의 두 축을 교차시켜 입체적 시각을 빚어낸 점, 등등. 무엇보다도 산업화와 민주화의 가치에 대해 공정한 관점을 세우려는 노력이 돋보였습니다. 억지로 지키는 중립적 입장보다 양쪽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상관관계를 밝히는 관점에서 의미 있는 설명이 잘 풀려나왔습니다.

 

좋게 본 점들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아쉬운 점이나 석연치 않은 점에 생각을 모아야 여기서부터 나아갈 길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겠죠. 당신이든, 나든.

 

구상 단계부터 유 선생은 ‘욕망’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바라보겠다는 뜻을 밝혔죠. 욕망을 채워온 과정으로서, 그리고 욕망을 발전시키는 과정으로서 변화의 흐름을 해석하겠다고. 좋은 시도가 되겠다고 나도 부추겨드렸습니다.

 

나온 책을 보니 역시 ‘욕망’이라는 개념이 독자에게 좋은 ‘안경’ 노릇을 해주는군요. 그 안경 덕분에 변화의 수많은 굴곡이 가진 의미를 서로 연결해 볼 수 있고, 전체적인 그림도 무엇을 그린 것인지 잘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야를 밝혀주는 편리한 도구에는 밝혀주는 범위의 바깥을 보기 어렵게 만드는 문제가 있기 쉽죠. 극단적인 예로,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는 뉴라이트 논객들이 있죠. 이기적 성향이 발동하는 영역은 아주 잘 밝혀줍니다. 그러나 한 귀퉁이에 조명을 집중하니까 인간과 사회의 전체 모습을 보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그 문제를 당신도 잘 알기 때문에 ‘욕망’의 의미가 인간의 모습을 크게 담을 수 있도록 넓게 설정한 거겠죠. 당신은 ‘욕망(慾望)’을 내세웠는데, 엄밀하게 보면 ‘욕망(欲望)’의 뜻으로 쓴 것 같아요. 한자를 안 쓰다 보니 차이를 무시하게 되는데, 원래는 전자를 육체적 욕망(greed, lust, craving), 후자를 정신적 욕망(aspiration, ambition)을 가리키는 말로 썼죠. 영어에서 ‘desire’는 양쪽에 걸치는 말인데 철학-사회과학 분야에서 이 개념을 중시한 것이 ‘욕망(慾望)’과 ‘욕망(欲望)’의 차이가 뭉개지는 하나의 조건이 된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도 ‘욕망’을 한자와 관계없이 ‘desire’를 기준으로 쓰겠습니다.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이 ‘욕망’을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는 창문으로 써 왔습니다. 근대 사회과학에서 이 개념을 중시한 출발점이 토머스 홉스(1588-1679)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행위의 근본적 동기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욕망에 있다.”고 했다죠.(‘pleasure’를 ‘쾌락’보다 ‘즐거움’으로 옮기는 것이 ‘욕망’의 의미를 넓게 해석하는 데 맞을 것 같습니다.)

 

나는 요즘 사회계약설의 한계와 문제점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홉스의 욕망관도 사회계약설과 연결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능동적인 측면만 바라본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인간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라는 측면도 함께 봐야 전체 모습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사회계약설에 입각한 국가관으로는 예를 들어 세월호 사태에서 국가의 책임을 생각할 범위가 좁게 됩니다.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책임은 인정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하지만 국민의 행복 정도가 아니라 생명까지 국가의 행위에 의해 위협받을 수 있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능동적 계약 의지에 묶이지 않고 국가의 책임을 생각해야만 사회의 유지가 가능합니다.

 

이 책에서도 당신의 ‘욕망사관’은 독재정치의 문제점을 희석시키는 효과를 일으킵니다. 가해자나 피해자나 모두 욕망에 따라 움직인 측면에 시야를 제한한다면 그 사이의 책임관계가 상대화되니까요.

 

이 시각을 제기한 것은 좋은 일입니다. 종래의 독재정치 비판이 엄격한 관점에만 집착해서 반대쪽으로 시야가 제한되어 온 문제를 극복하는 데 좋은 공헌이 됩니다. 더구나 당신처럼 반독재투쟁을 실천하고 그에 따른 불이익을 감수해 온 입장에서 개인적 이해관계를 벗어나 사회의 자기성찰 기반을 넓히려고 애쓰는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욕망의 관점을 시야에 넣는다면 이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 사이의 소통이 훨씬 더 원활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욕망의 인간관이 인간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는 데 가진 한계가 사회를 바라보는 데도 똑같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하나의 풍경을 촬영하는 데도 어떤 대역의 광선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사진이 나올 수 있죠. 욕망이라는 안경도 좋은 안경이지만, 다른 안경도 두루 써 봐야 풍경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가을 <백년의 급진> 저자 원톄쥔 교수 이야기를 나누다가 원 교수가 여러 학파의 분석도구를 임의롭게 병용한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당신이 말했죠. 나는 경제학에서 분석도구의 역할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원 교수의 연구방법은 이해가 갈 것 같데요. 각 학파 이론의 ‘정상적’ 발전을 위해서는 그 학파의 기본 원리를 충실하게 지켜야 하는데, 지금의 현실은 ‘패러다임 전환’ 차원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죠.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은 기존 패러다임의 지배력 약화에 따라 일어나는 거죠. 경제학이나 역사학이나 함께 그런 상황을 맞고 있다고 나는 봅니다. 패러다임 전환기 동안에는 많은 사람들의 암중모색이 진행되겠지만, 시야를 넓히고 균형을 찾는 것이 암중모색 중에서는 효과적인 모색이 되겠지요.

 

“당근과 채찍”이란 말을 흔히 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행동이 욕망과 두려움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이죠. 나는 ‘욕망’만을 쳐다보는 홉스의 관점을 넘어서기 위해 ‘두려움’(또는 ‘걱정’)을 함께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운명에 의해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입장에서 ‘두려움’도 인간 본질의 한 측면이라고 봅니다. 이것을 ‘욕망’과 짝지을 때 균형 잡힌 관점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요. 최근 신경과학계에서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위키피디아>에서 봤습니다. ("Changing stress levels can make brain flip from 'desire' to 'dread'". Mar. 19, 2008 http://www.ns.umich.edu/htdocs/releases/story.php?id=6419) 욕망과 두려움이 인간 두뇌의 같은 회로에 작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하네요.

 

‘두려움’을 시야에 넣는다면 ‘욕망’ 측면에 비해 독재정치의 범죄성이 더 잘 부각되겠지요. 인간을 짓눌러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든 범죄성을. 욕망과 두려움은 나란히 독재정치의 도구로 이용되었습니다. 이 사회의 더 나은 장래를 구상하기 위해서도 욕망의 진화만이 아니라 두려움의 진화가 함께 필요합니다. 환경과 자원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욕망의 순화만으로 바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필요합니다. 전통사회가 신(또는 하늘)에 대한 두려움으로 틀을 오래 지킬 수 있었던 것처럼.

 

서문에서 “현재사”를 언급했죠. 책 말미, 마지막 문단에서 그 의미를 밝힌 것 같습니다. (책 뒷면에 서문에서 발췌했다는 글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는데 정작 서문에는 없더군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미래는 우리들 각자의 머리와 가슴에 이미 들어와 있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각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시간의 물결을 타고 나와 대한민국의 미래가 된다. 역사는 역사 밖에 존재하는 어떤 법칙이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욕망과 의지다.

 

“현재사”란 말을 한홍구 교수가 처음 쓴 것 같은데, 그 의미를 밝혀서 설명한 글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그의 책 <유신-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를 리뷰하면서 ‘현재사’에 대한 내 생각을 적은 일이 있죠.(http://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4209)

 

근대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근대적 가치관을 받아들일 압력 아래 늘 놓여있다. 그 안에서 활동하는 역사가는 근대역사학의 규범을 받아들일 압력을 받는다. 그런데 자신이 처해있는 체제를 수긍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다른 관점과 다른 길을 찾게 된다. 체제를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은 ‘현재’에 순응할 수 없고, 다른 가치관을 세우려 한다. 그런 입장의 역사가는 직업적 전문가의 입장을 벗어나 사마천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 H 카의 널리 알려진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이 말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맞서 있다. ‘과학적’ 근대역사학의 근거 중 하나인 역사의 ‘실재성’에 대한 믿음 위에서 ‘현재’와 격리된(대화를 통해서만 비로소 연결되는) ‘과거’의 존재를 카는 설정했던 것이다.

 

현재가 과거보다 좋아진 상태이고 미래는 현재보다 더 좋아진 상태가 될 것이라는 ‘진보’의 믿음이 근대세계를 풍미했다. 이 믿음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북돋워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믿음에 지나침이 있을 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위험이 있다. 근대세계에서 자연조건의 제약을 무시하는 길로 나간 인간중심주의의 폐해에 대한 인식이 근년 확산되어 온 데서도 그 위험을 알아볼 수 있다.

 

나는 과거와 현재를 단절시키는 근대역사학의 풍조가 역사인식에 큰 장애가 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 단절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단절과 나란히 이뤄진 것입니다. 따라서 유 선생이 생각하는 과거, 현재와 미래 사이의 연속성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동력을 “사람의 욕망과 의지”에서만 찾는 인간중심주의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홉스의 관점을 넘어서지 못하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연속성을 찾지 못한 것으로 봅니다.

 

홉스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유 선생은 “욕망의 진화”를 말합니다. 욕망의 범위를 좀 고상한 데까지 넓힘으로써 역사 발전의 동력으로서 ‘욕망’의 품위를 확보하려는 것 같은데, 글쎄요... 시야를 넓히려면 욕망에 너무 매달리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욕망 위계설’에 의지했군요. “망치를 가진 자에게는 모든 것이 못대가리로 보인다”는 멋진 말을 남긴 분이죠. 무척 호감은 가는 분인데, 그의 욕망 위계설이 의지할 만큼 든든한 것인지는? 주류 심리학계에서는 실증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고급 욕망의 내용이 근대서양문명의 가치기준에 따라 편향적으로 설정되었다는 비판도 있다더군요.

 

편지가 생각보다 길어졌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요약하고 끝내겠습니다. 욕망을 통해 사회를 보고 역사를 본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좋은 제안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만 봐서는 안 되겠죠. 통념보다 훨씬 고상한, ‘자기 존중’이나 ‘자아실현’까지 끌어들여 시야를 넓히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중심주의의 불빛이 밝을수록 인간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는 오히려 알아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두려움’ 같은 또 하나의 축을 도입해 시각을 입체화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속표지 사인 위에 “부끄러운 책을 드립니다.” 하고 적었군요. 마음에 없는 말 잘 못하는 유 선생인 만큼, 뭔가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아니면 부끄러움을 찾고 싶은 마음에서 적은 말씀이리라 생각합니다. 그 마음을 생각하면서 얼른 읽고 떠오른 생각을 한 차례 정리해 봤어요. 더 얘기할 것들이 많겠지만, 이 편지가 실마리가 되기 바랍니다.

 

김기협 드림

 

 

Posted by 문천
2014. 7. 16. 12:56

분단건국의 길이 뚜렷해져 가고 있는데...

 

 

‘정통성’ 주장으로 맞서는 남한과 북한

 

남한과 북한은 1948년 8-9월 분단건국 이후 각자 ‘정통성’을 주장하며 상대방을 ‘괴뢰’로 규정했다. 자기네가 올바른 정부고 상대방은 일개 반역집단일 뿐이니 상대방을 쳐부수고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991년 가을 유엔 동시가입으로 공식적인 정통성 논쟁은 무대를 내려왔지만, 장외에서 아직까지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쪽 주장이 옳으냐에 앞서 이 ‘정통성’이란 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봐야겠다. 영어에서는 ‘legitimacy’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 말이 실제 쓰이는 것을 보면 ‘정통성’보다는 ‘정당성’의 뜻에 더 가깝다. 안으로는 국민에게 국가 노릇을 제대로 해주느냐, 밖으로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제 역할을 하느냐 하는 것이 ‘legitimacy’의 기준이다.

 

서양에서도 이 말이 ‘정통성’에 가까운 뜻으로 쓰인 적이 있었다. 군주제에서 혈통에 따라 계승자를 정할 때 ‘legitimacy’를 따진 것은 ‘정통성’의 뜻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이념적인 정통성보다 기능적인 정당성이 국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전통적인 정통성 개념이 가장 늦게까지 문제가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프랑스였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1940년 6월 독일군에게 항복하고 독일이 패퇴할 때까지 그 통제를 받았다. 샤를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프랑스는 비시로 수도를 옮긴 국내의 정부를 괴뢰로 규정하고 망명정부를 선포했다. 영국의 처칠 수상은 이 망명정부를 승인했지만,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프랑스 국내의 정부가 정상적 선거를 통해 구성된 정부이므로 자유프랑스는 일개 항쟁단체일 뿐이라며 망명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1945년 봄 루스벨트가 죽고 뒤를 이은 트루먼이 자유프랑스를 승인했다. 그래서 프랑스가 패전국이 아닌 연합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legitimacy’가 이념적 의미보다 기능적 의미로 굳어지는 데 이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기능적 의미의 정당성은 실적을 통해 평가받는다. 아직 실적이 쌓이지 않은 건국단계에서 다툼의 대상은 정통성이다. 건국 방법이 올바른 것이라 하여 정통성이 인정되면 국민의 신뢰와 협조를 얻기 위한 좋은 조건이 된다. 그런데 건국 방법의 올바름을 판별하는 데는 서로 다른 여러 가지 기준이 있다. 남한과 북한이 각자 정통성을 주장하며 상대방의 정통성을 부정한 일차적 이유가 이 기준의 차이에 있다.

 

 

‘유엔 승인’에 의지해 온 대한민국의 정통성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큰 근거로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유엔의 승인을 받았다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국호를 그대로 쓰고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의 계승을 표시하는 등 임시정부의 법통을 겉으로 강조하는 데 비해 그 실질적 의미는 크지 않다. 임정 요인들이 대한민국 건국과 운영에 많이 참여하지 않았다. 주석 김구는 분단건국에 반대하다가 건국 주도세력에게 암살당했고, 임시정부를 대표해 부통령을 맡은 이시영은 분노와 좌절 속에 사임하기에 이른다. 부주석 김규식을 비롯한 다수 임정 요인은 전쟁 발발 때 정부의 버림을 받고 북한군에 붙잡혀 북한으로 끌려갔다.

 

대한민국의 정통성 주장을 임시정부의 법통보다 더 강력하게 뒷받침해 준 것이 유엔 승인이었다. 1948년 12월 12일 대한민국의 독립 승인안이 유엔총회에서 찬성 48, 반대 6, 기권 1로 가결된 것이다. 이 승인안은 대한민국 정부를 “한국 국민의 대다수가 거주하는 지역에 대해 교화적인 지배와 관할권을 가진 합법 정부이며, 한국에서 유엔임시위원단이 감시한 지역 선거인의 자유의사의 정당한 표현에 의한 선거로 수립된 유일한 정부”로 인정했다.

 

전통시대 한국의 왕조는 중국 황제의 승인을 정통성의 근거로 삼았다. 천명을 받은 중국 황제가 제후로 승인함으로써 천명의 일부를 나눠주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은 유엔총회의 이 결정을 마치 중국 황제의 조선 국왕 승인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국민에게 선전했다.

 

그런데 20세기 중엽의 유엔은 전통시대 중국 황제와 성격이 다른 존재였다. 천명을 대표하던 이념적 구심점으로서의 중국 황제와 달리 유엔은 국제관계의 조정을 기능으로 하는 실용적 기구였다.

 

1948년 12월의 총회 결정이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규정했다고 남한 정부가 국민들에게 주장했지만, 실제 그 결정의 내용은 그 시점까지 유엔이 인정하는 방법으로 수립된 것이 확인된 유일한 정부라는 것이었다. 북한까지 포함한 한반도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한 것이 아니었다. 이후에라도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 유엔이 인정하는 방법으로 수립되는 또 하나의 정부를 승인할 길을 없애는 결정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도 1991년 유엔에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엔이 독립국으로 인정했다면 회원으로 가입하는 것이 마땅하다. 유엔의 승인이라면 회원 가입이 진정한 승인이다. 그런데 남한은 1991년에야 북한과 함께 유엔 회원국이 된다. 그때까지는 남한, 북한 어느 쪽도 회원국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안보리 아닌 총회에서 승인이 이뤄진 이유

 

한국을 승인했다는 유엔 결정이 총회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회원 가입은 안보리를 거쳐야 한다. 유엔의 첫 번째 목표가 세계평화 유지에 있는데, 국가 수립은 세계평화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승인받을 조건을 갖춘 국가가 승인을 못 받거나 조건을 갖추지 못한 국가가 승인받는 일이 있다면 전쟁을 어떻게 피하겠는가. 그래서 회원 가입은 안보리를 거쳐야만 한다. 1948년 남한 건국이 안보리를 거치지 않고 총회 승인을 받은 것은 변칙적인 일이었다.

 

왜 이런 변칙적인 일이 일어났는가? 갓 설립된 유엔의 운영방법이 아직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미-소 대립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미국은 총회에서 거의 어떤 의안에 대해서도 유리한 결정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안보리에서는 상임이사국인 소련의 거부권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1947년 봄 그리스 사태 이후 안보리 소관이어야 할 일을 총회로 바로 가져가려는 시도를 거듭하고 있었다.

 

어릴 때 소련의 거부권이 부당하고 무도한 것이라고 배우며 거부권 제도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강대국 하나가 유엔의 결정을 가로막을 수 있다니, 비민주적인 제도 아닌가? 어째서 세계 최고의 정치기구인 유엔이 그런 비민주적 제도를 쓸 수 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해하게 되었다. 유엔은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서가 아니라 현실의 기준에 맞춰 운영되는 기구라는 사실을. 인구 몇 십만의 나라들이 인구 몇 억의 나라들과 같은 한 표씩 가지는 것이 민주주의 원리에 맞는가? 아니다. 세계를 이루고 있는 온갖 형태의 국가들을 모두 ‘주권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현실적인 조직의 길이기 때문이다.

 

국제관계의 정말 중요한 일들은 중요한 나라들로 구성되는 안보리에서 다루고 총회는 이것을 추인하는 형식적 역할을 맡는 것이 유엔의 실상이다. 안보리에서 특히 중요한 나라들은 상임이사국으로서 거부권을 가지는 것도 현실적 기준에서 필요한 일이다. 주요 강대국 하나라도 원치 않는 방침을 채택한다면 불안을 없앨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평화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국제기구에서는 거부권의 존재가 바람직하다. 만장일치를 이루지 못한다면 국제기구가 개입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러면 분쟁이 국지적 규모에 그친다. 완전한 합의가 되지 않은 채로 국제기구가 개입하면 오히려 분쟁이 확대되기 쉽다. 제2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연맹에서는 군사적 결정에 관해 (분쟁 당사국을 제외한) 모든 회원국에 거부권을 주기도 했다.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에 어떤 국가가 들어서느냐 하는 것은 대전 후 세계평화를 위한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이런 전후처리 과제는 아직 유엔이 궤도에 오르기 전에 연합국의 합의를 통해 방침이 정해졌다. 한국 문제도 1945년 12월 모스크바의 연합국 외상회의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처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세계적 미-소 대립이 심화된 끝에 미국은 소련과의 합의를 포기하고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러 나선 것이다.

 

유엔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면 당연히 안보리에서 논의해서 적어도 5대 강국은 모두 동의하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1947년 가을, 미국은 안보리가 아닌 총회에 한국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1948년 12월에 이르기까지 안보리를 배제한 유엔의 한국 개입은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뤄진 것이었고, 전쟁의 위험을 만들어낸 조치였다.

 

 

극좌도 극우도 분단건국을 원했다.

 

미소공위도 배제하고 안보리마저 회피하며 수적 우세를 자신할 수 있는 유엔총회로 조선 문제를 가져간 것은 미국이 소련의 동의 없이 한국의 정부 수립을 추진하겠다는 뜻이었다. 소련이 이북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런 일방적 조치는 분단건국과 내전의 위험을 품은 것이었다. 이 위험에 대해 조선의 정치세력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민족국가 건설을 바라는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분단건국을 반대했다. 그런데 다른 생각을 가진 집단이 있었다. 친일파였다. 제대로 된 민족국가가 세워지면 처단의 대상이 되거나 적어도 특권을 내놓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한민당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모여 겉으로는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눈치를 보고 있다가, 1947년 봄부터 미-소 대립이 뚜렷해지자 정부 수립을 서두르고 나섰다. 일단 이남에서라도 국가를 세워놓은 다음 이북까지 확대한다는 것이 그들의 일반적 주장이었는데, 분단건국과 내전을 말만 그럴싸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들 친일파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이 형성되었다. ‘반탁’을 내걸고 미소공동위원회 반대투쟁을 해온 그들은 미국이 드디어 미소공동위원회를 버리고 유엔으로 가자, 분단건국의 마지막 수순에 접어들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미국이 제안한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한국정부 수립안이 43대 0(기권 6)으로 가결됨으로써 유엔의 한국문제 개입이 시작되었다. 명목상 ‘남북총선거’를 규정했지만, 소련이 이북 지역을 점령한 상태에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분단건국 추진세력은 이 상태에서 이남 지역에서 먼저 선거를 시행하도록 군정청을 재촉했다. 선거 감시를 위한 유엔위원단이 오기 전에 최대한 기정사실로 만들어놓으려는 속셈이었다.

 

이 분단건국 추진세력을 종래 ‘반공’이나 ‘극우’로 표현해 왔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그들의 정치적 동기는 이념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있었다. 이 세력의 주축이 된 친일파집단은 해방 전에 확보해 놓은 기득권을 지키고, 나아가 미국의 비호 아래 더 키워나가려는 속셈이었다. 이승만 등 기회주의적 정상배들이 그들과 손을 잡았다. ‘반공’은 핑계일 뿐이었다.

 

좌파에서 중간파까지 다른 모든 정파들이 분단건국의 획책에 반대했다. 그러나 좌파와 중간파가 바라보는 방향에 차이가 있었다. 좌파에게는 분단건국이 이뤄질 경우 이북에 ‘혁명기지’를 세워 극우파의 ‘반공통일’에 ‘국토완정’으로 맞선다는 복안이 있었다. 그래서 분단건국의 책임을 미국과 극우파에게 씌우면서 실제로는 분단건국의 결과를 가져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순수한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중간파에게는 그런 대안이 없었다. 중간파에게는 좌우합작을 통한 분단건국 저지만이 유일한 목표였다.

 

좌파와 중간파를 맺어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던 여운형이 1947년 7월에 암살당했다. 분단건국 추진의 본격화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암살당했다는 사실에서 분단건국 추진세력이 그를 암살한 동기를 짐작할 수 있다.

 

 

‘분단건국’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김구

 

중도 좌익의 영수 여운형이 사라지자 중도 우익 성향 중간파의 분단건국 저지세력 형성 노력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 막강한 공권력과 자금(테러자금 포함)을 장악한 극우파의 반공 공세에 위축된 중간파는 1947년 연말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면서도 좌익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일 수 없었다. 그 대신 김구가 이끄는 한독당이 분단건국 저지 노력에 참여할 기색을 보임에 따라 ‘좌우합작’ 아닌 ‘우익연합’으로 중간파의 노선이 돌아서게 된다.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 등 분단건국 추진세력과 반탁운동을 함께했다. 그런데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 결렬에 이르고 분단건국의 가능성이 뚜렷해지자 다른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민족주의 입장을 초지일관 지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달리 보면 분단건국 방안이 구체화함에 따라 ‘임정 봉대(奉戴)’ 주장이 분단건국 추진세력 내에서 외면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1947년 가을 중 김구의 행보 중에는 그가 민족주의 이념보다 전략적 득실에 따라 분단건국에 대한 입장을 선택했다고 보는 후자의 의심을 뒷받침하는 대목이 많이 있다. 한독당의 2인자였던 조소앙이 10월 이후 중도파와 손잡고 각정당협의회 활동에 나선 것은 김구의 양해 아래 조소앙 자신의 소신에 따라 설정한 노선으로 보인다. 그러나 11월말 김구가 이승만과 ‘빅딜’을 성사시키고 태도를 표변함에 따라 사정이 달라졌다. 각정당협의회에 대표로 나섰던 사람들이 한독당에서 제명당하고 조소앙은 은퇴를 선언했다.

 

12월 들어 김구가 태도를 바꾸자 중간파는 한독당과의 우익연합 가능성을 바라보는 동안 보류하고 있던 민족자주연맹 결성에 나섰다. 1946년 7월 이래 중간파 활동의 보루 노릇을 해온 좌우합작위원회가 12월 15일 해체되고 12월 20일 민족자주연맹이 출범했다. 민족자주연맹은 독점자본주의와 무산계급사회를 아울러 배격하고 “조선의 현실이 지시하는 조선적인 민주주의 사회의 건립”을 지향한다고 표방하면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정치단체 대표자회의 개최를 제창했다.

 

그런데 김구가 이승만과의 재결합을 공표하던 바로 그 시점, 12월 2일에 장덕수 암살사건이 일어났다. 한민당의 책사로 알려진 장덕수의 위치로 보아 김구에게 의심이 돌아갔다. 장덕수를 무척 예뻐하던 군정청 지도부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강한 압력을 김구에게 쏟기 시작했다. 김구와 이승만의 11월말 빅딜은 김구의 국민의회와 이승만의 민족대표자대회를 통합함으로써 김구의 조직 기반을 넓히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군정청의 탄압 때문에 이것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도착이 임박한 1947년 연말, 극우세력은 분단건국 추진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평양의 집권세력은 겉으로 분단건국에 반대하면서 속으로는 독자적 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로당은 평양에 의존하는 입장에 가 있었고, 걸출한 지도자를 잃은 중도 좌익은 행방을 잃고 있었다. 극우세력 중 민족주의를 앞세우던 김구의 한독당은 이해득실에 따라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중도 우익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는 중간파의 민족자주연맹만이 분단건국에 확고히 반대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