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후보 시절 박근혜의 역사인식을 놓고 논란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한 마디에 너무 기가 막혀서 몇 자 적은 일이 있다.
한 사회 안에는 온갖 분열의 소지가 있다. 분열을 방치하면 사회가 약화되고 구성원들이 모두 고통을 겪게 된다. 개인에 따라 적게 겪고 많이 겪는 차이가 있겠지만, 분열을 적정선에서 억제할 때보다 고통을 적게 겪을 사람은 거의 없다. 정부와 정치의 첫 번째 기능이 국가사회의 통합성을 지키는 것이다.
역사인식의 차이도 분열의 소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5-16과 유신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역시 많다.
온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 자리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분열의 소지를 해소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자신이 5-16과 유신의 긍정적 가치에 믿음을 가졌더라도 반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에서 받아들일 것이 없는지 고민해야 하고, 반대하는 이유에 허점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 점을 설득하려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내 주장의 지지자도 많이 있으니 숫자로 붙어보자는 배짱은 국민을 섬길 생각 없이 권력만을 노리는 사람의 것이다.
박정희의 평가를 둘러싼 ‘국론 분열’은 일시적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정희를 비판적으로 본 국민은 1987년까지 아주 소수였다. 독재의 문제점에 대한 논의가 독재의 힘으로 막혀있었기 때문이다. 민주화 진행에 따라 비판적 시각이 점점 자라나 오늘에 이른 것이다. 아직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박근혜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 사회의 민주화 수준이 아직 미흡하기 때문이고, 그 수가 계속 줄어들 것이라고 내가 믿는 것은 이 사회의 민주주의가 계속 발전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http://pressian.com/news/article.html?no=4990)
대통령 취임 이래 사람 쓰는 것이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에 너무 제한되는 것 같아서 늘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제 총리 후보로 문창극을 지명하는 데는 정말 말문이 막힌다.
나는 5-16에 대해 박근혜처럼 생각하지 않지만, 긍정적 의미가 전혀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예컨대 쿠데타로 무너진 민주당 정권에 이승만 시대로부터 이어진 문제들이 많이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쿠데타 자체의 타당성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문제는 박정희 집단이 정권 장악 후 추진한 정책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정책 중에 바람직한 것도 적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5-16과 유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 부정적인 측면을 완전히 묵살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고 믿는다. 그런 생각을 가진 친구들과 기회 있는 대로 토론도 하고, 토론을 통해 박정희 정권에 대한 내 관점이 전보다 밝아진 것도 적지 않다.
박근혜가 말하는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지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년 전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5-16과 유신에 긍정적인 면이 많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문창극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5-16과 유신을 조금이라도 비판하는 것은 나쁜 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많지 않다.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다른 당의 박정희 비판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박정희의 독재정치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6년 전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 작업을 하면서 근대화지상주의 논설을 검토할 때, 독재를 미화하고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원리주의 차원의 극단적 역사왜곡은 정략적 동기에서 나오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윤창중부터 시작해서 박근혜가 중용해 온 사람들이 그런 원리주의 성향을 가진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은 그 동안 계속 들었다. 그런데 이제 문창극에서 확인되었다. 4년간 같은 캠퍼스에 다니고 10년간 같은 신문 일을 하면서 보아 온 사람이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가 적다. 역시 같은 신문 일을 하던 윤재석의 증언(http://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8012)으로도 내가 가졌던 인상이 그대로 확인된다.
문창극은 언론인으로 활동해 왔기 때문에 그 언행이 많이 드러나 있다. 이 점은 윤창중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박근혜의 인사 내용 중 윤창중 문제가 가장 두드러지게 불거진 것은 색깔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내온 그가 청와대 대변인이라는 현시적 직책을 맡는다는 것이 너무 ‘황당해’ 보였기 때문이다.
윤창중이 결국 ‘황당한’ 사건으로 자취를 감춘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자신의 대변인 기용이 황당한 조치라는 사실을 그도 의식했을 것이다. 그래서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황당한 짓을 열심히 하다 보니 업무 밖에서까지 황당한 짓을 하게 된 것 아닐까.
문창극은 드러난 색깔을 갖고 현시적 직책을 맡는다는 점에서 ‘제2의 윤창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다. 국무총리와 청와대 대변인이 가진 직책의 무게 차이다. 청와대 대변인은 기관 하나를 대표하는 자리인 데 반해 총리는 행정부 전체를 대표하고, 나아가 국가까지도 어느 정도 대표하는 자리다.
이 차이 때문에 국무총리 자리는 대통령의 임명으로 끝나지 않고 국회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아무리 새누리당이 다수당인 국회라도 이런 수준의 임명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으로 믿는다. 동의했다가는 지지층의 엄청난 동요를 일으킬 것이다. 야당의 역사인식에 불안감을 느껴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자기네 지지가 문창극 같은 ‘꼴통’을 향한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생각해볼 사람이 많을 것이다.
‘국무총리 문창극’을 보는 일은 없으리라고 믿지만, 대통령의 임명 자체가 중요한 정치적 행위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아, 정말 박근혜 대통령 너무한다. 청와대 대변인 자리야 어떤 얼간이를 앉히든 마음대로 갖고 놀아도 좋지만, 어찌 ‘대한민국 국무총리’ 자리를! ‘국무총리 후보 문창극’을 보는 것만도 많은 국민에게 큰 스트레스다.
한탄을 하다 보니 국무총리 자리를 꼭 저런 식으로 갖고 놀던 대통령 하나가 생각난다. 이승만이다.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8월 15일 정부 수립을 앞두고 첫 번째 할 일이 국무총리 임명이었다. 물망에 오르던 총리 후보는 조소앙, 신익희와 김성수였다. 김구가 분단건국 참여를 거부하고 있던 상황에서 조소앙이나 신익희가 참여해서 임정을 대표하는 한 몫을 해주기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분단건국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한민당 영수 김성수의 등용으로 건국세력의 화합과 안정이 이뤄지기 바랐다.
그런데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첫 권한 행사인 총리 임명을 여론에 순순히 따라 할 생각이 없었다. 대통령 선출 직전에는 기자의 질문에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총리 같은 것이 선결문제가 아니”라고 대답했다.(<경향신문> 1948년 7월 17일) 그게 선결문제 아니라면 뭐가 선결문제란 건지. 대통령 당선 후에는 “국무총리는 아직 지정한 사람은 없으나 발표될 때에는 다 놀랄 것”이라고 한다.(<서울신문> 1948년 7월 23일) 국민 놀라게 하는 것을 대통령의 임무로 생각한 모양이다.
7월 27일 이승만은 정말로 국민을 놀라게 했다. 이북 출신 개신교 목사로 조선민주당 부당수를 맡고 있던 이윤영을 임명한 것이다. 인준안은 찬성 59표, 반대 132표로 부결되었다.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임명한 ‘대한민국정부공고 제1호’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해방일기> 작업 중 이 장면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적었다.
이승만은 이런 상식적 전망을 벗어나 인준 부결이 확실한 이윤영을 임명하고 인준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인준 부결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은 것이었을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당시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해방일기”에서 당시 사람들의 현실 인식을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어 왔지만, 이런 일을 놓고는 그 후에 일어난 일을 참고해서 설명을 좀 보충해야겠다.
이승만은 ‘독재’를 원한 것이었다. 자기가 차지하는 대통령 자리를 견제할 만한 다른 자리가 없게 될 것을 그는 획책한 것으로 보인다.
행정부에서 대통령 다음으로 큰 권위를 가지는 자리로 부통령과 국무총리가 있었다. 이승만은 이시영이 초대 부통령을 맡도록 이끌었다. 명망은 높지만 정치적 세력을 갖지 않은 노인을 앉힌 것이다. 이시영이 참다 참다 못해 1951년 사임하자 어쩔 수 없이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 뒤에는 역시 노령인 함태영(1872~1964년)을 앉혔고, 1956년에는 추종자 중에도 평판이 나쁜 인물인 이기붕을 내세웠다가 민주당의 장면에게 부통령 자리를 빼앗기기까지 했다. 4-19의 도화선이 된 3-15부정선거 역시 주목적이 이기붕의 부통령 만들기에 있었다.
국무총리 자리는 임명권을 통해 권위를 죽여 버렸다. 1954년 11월 사사오입 개헌으로 없앨 때까지 다섯 사람이 국무총리 자리에 앉았다. ‘서리’ 또는 ‘임시’ 국무총리는 열 차례 임명되었다.(그중 네 차례가 이윤영이었다.) 이 시기 국무총리들의 능력과 인품을 도매금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내가 감히 할 수 없는 짓이지만, 정부 수립 당시 국무총리의 역할에 대한 사회의 여망과 거리가 크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승만이 국무총리 선택에 있어서 국정수행 능력보다 자기 권력에 대한 위험이 없는 인물 위주로 선택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이범석, 장면, 장택상, 백두진, 변영태가 정식 국무총리를 지냈고, 이윤영, 신성모, 백낙준, 허정, 이갑성, 백한성이 서리 또는 임시 국무총리를 지냈다.)
대통령의 독재를 일컬어 ‘제왕적 대통령’이란 말을 흔히 쓰는데,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근대 이전 군주제 시대의 진짜 임금은 무책임한 독재자가 아니었고, 전근대시대의 군주제를 모두 비민주적 전제정치로 보는 근대인의 통념은 현실에서 벗어난 하나의 ‘신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과 한국의 군주제는 공공성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었고, 비록 상하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갖는 상당 수준의 민주적 원리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규모가 큰 사회는 소수 집단의 전횡을 억제하는 공공성의 원리를 가진다. 이 원리 없이는 내부 질서의 유지도 어렵고 다른 사회와의 경쟁에서 불리하게 된다. 근대와 전근대의 구분 없이 국가란 공공성의 원리를 보장하는 제도다. 나는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펴냄)에서 조선 후기 권력의 과도한 사유화로 인한 공공성의 증발을 조선 망국의 근본적 원인으로 지목했다. 왕과 신하가 모두 ‘분수’를 잃고 권력에만 집착하던 풍조가 유교국가의 원리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일본 침략에 관계없이 왕조 멸망의 조건이 되었다고 본 것이다.
일본 지배에서 해방되어 민족국가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 ‘공화(共和)’의 원리가 필요했다. 국가사회에 대한 시대의 요구를 순조롭게 받아들이기 위해 여러 위치의 사람들이 각자 공헌할 수 있는 ‘협력’의 체제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경쟁’의 대상으로서 권력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행정부 안에서조차 국무총리가 자기 권위를 갖고 자기 몫의 공헌을 하도록 놓아두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후 십여 년간 대한민국 역사가 어둡고 괴로운 길을 걷게 되는 데는 물론 많은 요인이 뒤얽혀 작용했지만, 이승만처럼 공공성 의식이 없는 인물이 큰 권력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중 중요한 하나였다.
이승만 시절에 없던 중요한 사료 하나가 그 사이에 발굴되었다. <정조어찰첩>(성균관대학교출판부 펴냄). 당시의 ‘야당’이라 할 수 있는 벽파 영수 심환지와의 관계에 정조가 얼마나 공을 들이고 심환지의 입장과 역할에 어떤 배려를 했는지 살펴본다면 이승만보다는 나은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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