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0월부터 1996년 2월까지 주한 미국대사로 근무한 제임스 레이니(1927~ )는 특이한 배경의 인물이었다. 예일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중 육군에 입대해 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에 한국에서 복무했는데 이때의 경험으로 신학-성직의 진로를 결심했다고 한다. 학부를 마친 후 예일 신학대에서 공부하고 감리교 목사가 된 후 1959년에서 1964년까지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1964년 한국을 떠나면서 목회직보다 연구직으로 진로를 다시 정하고 예일대 대학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학위를 받은 후 1966년 반더빌트 신학원 교수로 부임했다가 1969년 애틀랜타에 있는 에모리대학의 캔들러 신학대학 학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1977년부터 1993년까지 총장을 지냈다. 그리고 총장을 그만둔 뒤 주한대사로 온 것이었다.

 

한국과의 인연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 레이니는 총장 재임 시절에도 한국과 관계된 일에 많은 성의를 보여주었다. 1993년 7월 그가 주한대사로 임명되어 상원 인준을 기다리고 있을 때 워싱턴 간 길에 그를 만난 자리를 한완상 통일부장관은 이렇게 회고했다.

 

(...) 그는 17년간 총장으로서 대학의 연구 기능을 크게 높여 3,000여 개 미국 대학 중에 20위 안에 드는 명문대로 키웠다. 그는 그러는 와중에도 늘 한국을 잊지 않았다. 특히 한국의 민주화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한 까닭에 정계나 기독교계 지도자들 중에 친구가 많다.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김관석-문익환-문동환-박형규-강원용 목사가 모두 그의 친구들이다. (...)

 

그 역시 주한대사인 자신에게 미국 정부가 전적인 권한을 줄지 염려하는 듯했다. 그에게는 이른바 ‘애틀랜타 인맥’이 있었다. 마틴 루서 킹 목사 계열의 흑인 지도자인 앤드루 잭슨 목사 등이 그의 친구요 동지였다. 에모리 대학교 인맥도 그에게는 큰 자산이었다. 상원 국방위원장 샘 넌 의원과 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그의 지기다. 에모리 대학교 총장 시절 그는 카터를 국제정치학 교수로 초빙하고 부설로 카터 센터를 설립해 세계평화 중재자로 뛸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기도 했다. (<한반도는 아프다> 127-129쪽)

 

카터야 워낙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샘 넌(1938~ )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을 붙이고 싶다. 에모리대학 출신으로 1972년부터 1996년까지 상원의원을 지낸 넌은 1987년부터 8년간 상원 국방위원장을 맡았고, 클린턴 행정부 내내 유력한 국방장관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2000년 대선 때도 고어가 승리할 경우 그의 입각이 널리 예상되고 있었다. 중도보수 입장이지만 걸프전쟁 반대 등 합리적 태도를 널리 인정받은 인물이다. 상세한 곡절을 모르는 채로 얼른 생각할 때, 레이니의 주한대사 등용에도 넌 의원의 역할이 컸을 것 같다.

 

드러난 경력만 보더라도 그의 대사 부임을 한완상이 얼마나 반가워했을지 짐작이 간다. 한국의 진보진영 및 기독교계와 좋은 관계를 갖고 있고 평화 지향 의지가 강한 레이니가 한국 사정을 미국 정부에(적어도 국무부에) 알리는 위치에 있다면 자신이 추구하는 ‘햇볕정책’을 위한 한-미 공조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나아가 DJ-YS로 갈라져온 한국의 진보진영에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키우는 데도 기대감을 가졌을 것 같다.

 

그런데 10월에 레이니가 부임할 때는 김영삼 정부 내에서 한완상의 위치가 이상하게 되어 있었다.

 

1993년 10월 하순 마침내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가 부임했다. (...) 나를 포함해 지인 몇몇이 초청인으로 나서 11월 5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환영연을 준비했다. (...)

 

그런데 얄궂은 일이 생겼다. 청와대의 주돈식 정치담당 수석이 전화로 레이니 대사 환영연에 가느냐고 물었다. 뜻밖의 질문이었다. 간다고 대답했더니 우물쭈물하면서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것이 김영삼 대통령의 뜻이라고 했다. (...) 한 나라의 부총리가 차관급인 미 대사의 환영연에 가는 것은 격이 맞지 않는다고 대통령이 얘기했단다.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나는 부총리가 아니라 레이니 대사의 친구로서 초청인을 맡았다고 분명히 말했다. 중간에서 말을 전하는 주 수석도 꽤나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나로서는 대통령의 속내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대통령이 야당 총재로 외롭게 투쟁할 때 레이니는 에모리 대학교 총장으로서 그를 미국에 초청해 강연을 맡기기도 했다. 그때도 내가 강연 원고를 작성해주었다. 김 대통령도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미국 정계외 민간에 알릴 수 있게 해준 레이니를 내내 고마워했다. (...) 최근 미국의 대북정책에 불만이 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대통령의 뜻을 존중해 행사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

 

나는 초청인들에게 공무로 바빠 환영연에 참석할 수 없다고 통보하고 씁쓸히 뉴스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순간 문득 두 가지 일이 머리를 스쳤다.

 

하나는 레이니 대사 부임 직전 주간지 <뉴스 피플>에서 레이니 박사와 한국의 깊은 인연을 소개한 기사였다. “한반도 통일 문제에 뚜렷한 입장을 표시하고 있는 김대중 전 총재, 한완상 부총리와 교감을 나눠 두 사람에 대한 통일 정책을 뒷받침할 것으로 보인다. 레이니 대사가 김대중 전 민주당 대표와 한 부총리와의 특수한 관계로 인해 두 사람이 추진하고 있는 통일 문제에 상당히 진솔한 대화와 의견교환이 오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 새삼 기억에 떠오른 또 하나는 레이니 대사가 에모리 대학교 총장 시절 김 전 총재에게만 명예박사 학위를 주고 김 대통령에게는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혹시 이 일로 김 대통령의 자존심이 상했다면, 레이니 대사 환영연을 성대하게 준비하는 것이 못마땅했을 것이고 거기에 내가 초청인이 된 것도 불편했을 듯했다. 하여튼 씁쓸한 일이었다. (<한반도는 아프다> 174-177쪽)

 

명예박사 안 준 게 서운해서 성대한 환영연이 못마땅했다니, 이건 김영삼을 너무 치사한 인간으로 보는 것 같다. 아무튼 김영삼을 오랫동안 가까이서 보좌해 온 사람이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그에 비하면 김대중의 정책적 입장이 너무 부각되는 것을 꺼렸다는 것은 현직 대통령으로서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몇 주일 후 한-미 정상회담(11월 23일)에서 파열음을 일으킬 김영삼의 불만이었을 것이다. 김영삼은 당시 대북 강경론자들 사이에 유행하던 북한붕괴론에 휩쓸려 있어서 북한을 쉽게 곤경에서 풀어주려는 포괄적 타결안에 반대였고, 나아가 그런 방향의 결정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내리고 한국에게는 따라올 것을 강요하는 현실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결함이 많은 사람이라도 김영삼은 자기 나름의 자주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레이니의 기용은 미국 정부에서 포괄적 타결안이 진지하게 검토되기 전에 이뤄진 결정이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으로서 클린턴 행정부는 주먹보다는 가급적 말로 하겠다는 기본노선을 갖고 있었고, 그 노선에 따른 레이니의 기용은 대북 유화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클린턴과의 대면에서 한 판 ‘뒤집기’를 벼르고 있던 김영삼은 클린턴의 대리인 레이니에게도 자신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경고를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외교관으로서 대사의 역할에는 본인의 능력과 의지에 따라 큰 편차가 있다. 레이니의 전임자로 1993년 2월에 3년여의 한국 근무를 끝내고 서울을 떠난 도널드 그레그도 역할이 큰 미국대사의 하나였다. CIA 출신으로 군사-정보 분야 전문가이기도 한 그레그는 팀스피릿 재개 방침이 제대로 된 논의를 거치지 않고 군부 쪽에서 나와 버렸다며 자신의 재임기간 중 미국의 정책 중 “가장 큰 실수 중의 하나”라고 했다.(셀리그 해리슨, <코리안 엔드게임> 326쪽) 후임자도 결정되기 전에 그레그가 그만둔 이유가 이 문제에 대한 반발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레그는 그 후 여러 차례(최근에는 지난 2월) 북한을 방문하며 북한의 순조로운 국제사회 진입을 돕는 일에 애쓰고 있다. (<중앙일보> 2014년 4월 18일 “6번째 북한 다녀온 전 주한미국대사 도널드 그레그”)

 

미국의 주한대사는 다른 곳 대사와 달리 주재국과의 관계를 주둔군사령관과 나눠 맡고 있다. 그래서 리스카시 사령관이 (국무부가 참여한) 본국 정부의 결정 없이 팀스피릿 재개 가능성을 표명한 데 그레그 대사가 불만을 품은 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혼선을 빚을 수 있었다. 샘 넌 상원국방위원장을 배경에 둔 레이니 대사는 이런 혼선을 피하면서 북핵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한 자신의 관점을 본국 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을 것이다. 부임 몇 달 후 그의 활동의 일각이 위트-폰먼-갈루치의 <북핵위기의 전말> 202-203쪽에 그려져 있다.

 

짐 레이니 주한 미 대사는 미국정부가 위기관리 능력을 높이지 못하면 북핵 해결이라는 새로운 목표와 한반도의 평화와 억지유지라는 종래의 목표 사이에 사로잡혀 헤어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두 가지 다 중요했다. 그러나 레이니 대사가 보기에 클린턴 행정부는 전자에만 지나치게 집중하여 후자에는 충분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

 

레이니 대사는 미 행정부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가지 조치를 단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첫째, 북한과의 신중한 접촉을 위해 갈루치보다 눈에 덜 띄는 새로운 인물을 임명해야 한다. (...) 슈퍼 화요일 합의가 무산된 후 그의 아이디어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지만 행정부 내에서 많은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위기관리를 위한 정책을 전담하는 총책임자를 임명해야 한다는 레이니 대사의 두 번째 권고가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다른 부처들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이와 별도로 레이니 대사는 국무부 관리들에게 한반도 정책 총책임자를 임명하자는 주장을 계속 했다. 그의 제안에 호응이 없자 그는 오랜 친구이자 외교안보문제에 관심과 활동이 큰 샘 넌 상원의원을 찾았다. 조지아 주 동쪽, 고속도로에서 약간 벗어난 간이식당에서 넌 의원을 만난 레이니 대사는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조지아 주 출신 민주당 의원인 넌은 레이니 대사를 백악관 비서실장 맥 맥라티에게 연결해주었다. 맥라티를 만난 레이니 대사는 “제발 한반도 정책을 총괄할 사람을 임명해주시오. 내리막길은 정말 위험하단 말이오”라고 말했다. 마침내 레이니 대사의 말이 통했다. 백악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갈루치 차관보를 불렀다. 그리고 미국정책의 일관성과 효과적인 정책조정을 위한 방법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상원 국방위원장과의 친분을 이용해 백악관을 설득,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하게 만들다니, 직업외교관이나 직업관료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짓이다. 레이니는 신념과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1994년에 그가 주한대사로 있었던 것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크게 다행한 일이었다. 그의 공헌은 카터 전 대통령을 평양으로 보내는 장면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