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그 나라에도 병역 의무는 있다. 1년간이다. 그러나 종교적 이유나 개인의 소신에 따라 집총(執銃)을 거부할 수 있다. 그런 경우 우리의 공익근무요원과 비슷한 방법으로 같은 기간 봉사활동에 종사하게 된다. 그나마의 조직활동조차 거부하는 경우는 같은 기간 동안 감옥에 들어가 있으면 된다. 이 감옥이란 규율이 좀 엄격한 기숙사 정도로, 운동이나 독서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곳이다.
이 감옥생활을 할부제로 하는 방법도 있어서 대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높다. 겨울이 긴 그 나라에서 학생들은 겨울방학마다 이 감옥에 들어가 석 달씩 수용생활을 하고 나오는 것이다. 4년 동안 겨울을 여기서 지내면 병역이 끝난다. 그러나 대다수 학생들은 다양한 경험을 취할 수 있다는 이유로 현역복무를 택한다고 한다.
20여 년 전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서울에 머무르고 있던 스웨덴 청년 구스타프 레이프에게 들은 스웨덴 얘기다. 구스타프는 고등학교를 마친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선원이 되었다. 선원노릇으로도 병역을 대신할 수 있다. 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기 식으로 세상을 공부하던 구스타프는 어느 날 승선한 배가 부산에 입항했을 때 다분히 충동적으로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한국을 공부하기로.
한국의 대부분 남자들은 군대에 많은 시간을 바친다. 그러나 “X퉁소를 불어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는 군대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시간 때우기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회와 경제가 발달할수록 이 시간낭비의 의미는 심각해진다. 여러 전문직에서 젊은 시절 연마의 기회를 몇 년간 잃는 것은 개인의 손실뿐 아니라 이 나라 전체의 경쟁력에도 적지 않은 굴레가 되고 있다.
구스타프에게 스웨덴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스웨덴은 꿈속처럼 머나먼 나라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보다 합리적인 병역제도를 가진 모든 나라가 우리의 대등한 경쟁상대가 돼 있다. 세계가 좁아지기도 했고 우리가 크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의 ‘병역’ 개념은 아직도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대다수 국민이 병역에 대해 막연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병역제도가 그리 합리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지도자를 향한 국민의 분노가 어떤 해명으로도 잘 삭여지지 않는 것은 이 피해의식이 그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의 면제가 정당하냐 하는 시비보다 중요한 것은 복무하는 사람들이 그 복무에서 보람을 느끼도록 해주는 일이다. (1997년 8월)
이제 다시 조사해 보니 스웨덴에서는 2010년에 징병제가 폐지되었다고 한다. 스웨덴은 늦은 편이다. 냉전 종식 후 거의 모든 유럽국에서 징병제가 사라졌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핀란드 등 징병제를 남겨둔 몇 나라에서도 대체복무제가 광범위하게 시행되어 실질적 의미의 ‘강제징집’은 사라진 셈이다.
우리 헌법에는 국방 의무가 교육, 납세, 근로 의무와 함께 국민의 ‘4대 의무’로 규정되어 있고 병역은 국방 의무의 일부로 시행되어 왔다. 그런데 군 복무를 국민의 보편적 의무로 규정한다는 것은 기본권에 대한 지나친 침해라는 의견이 많다. 종교적-철학적-정치적 입장의 ‘양심적 병역 거부’는 말할 것도 없고, 최근 총기사고의 무고한 피해자들을 보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생명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에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병역 의무의 인권 침해 문제는 인권에 큰 관심 없는 일반인의 눈에도 분명한 것이다. 인생을 즐길 자유는커녕 사회를 위해 일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 겪는 위치에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기 2년을 바쳐야 한다니! 내가 복무하던 40년 전에 비하면 “군대 많이 좋아졌다”는 사실을 알기는 하지만, 막사와 음식이 좀 나아졌다고 해서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권사상의 원조로 꼽히는 장 자크 루소(1712~1778)가 징병제의 열렬한 지지자였다는 사실을 뜻밖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루소는 모든 시민이 자기 사회의 방위를 위해 직접 나서는 것이 명예로운 권리이기도 하며, 이 역할을 직업군인(용병)에게 맡기는 것은 도덕적 타락이라고 주장했다. 로마공화정의 쇠퇴가 징병제에서 모병제로의 전환에 뒤따른 것이었음을 지적했다.
대혁명 중의 프랑스에서 징병제를 채용한(1798) 데는 루소의 영향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물론 더 중요한 이유는 혁명을 견제하는 주변 나라들의 압박에 있었다. 징병제를 통해 종래의 10배인 2백만 명 규모의 상비군을 키워냄으로써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영광’을 맛볼 수 있었다. 프랑스의 ‘인해전술’에 혼이 난 프러시아 등 주변 나라들은 다른 혁명은 몰라도 ‘징집 혁명’만은 프랑스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19세기를 통한 국민국가의 성장으로부터 20세기 초의 제국주의시대까지 징병제는 근대국가의 표준이 되었다. 군대가 커짐에 따라 전쟁의 규모도 갈수록 커져서 ‘세계대전’에 접근해 갔다. 근대국가의 발판인 ‘대량생산’ 체제의 급속한 구축을 위한 ‘대량파괴’ 체제의 역할을 대형화된 군대와 전쟁이 맡은 것이다. 이것이 ‘철혈(鐵血)정책’의 본질이었다.
이 과정에서 군대는 국민의식 형성의 중요한 통로가 되기도 했다. 여러 지역, 여러 계층 출신의 젊은이들이 하나의 군대 안에서 함께 생활하고 활동하는 경험을 통해 국민국가 구성원으로서 공동의 정체성을 체득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군대의 존재가 근대화를 위한 중요한 인프라 역할을 맡은 것도 이와 비슷한 일이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로는 징병제가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냉전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명목상의 징병제는 유지하되 위에 소개한 스웨덴 경우처럼 대체복무제의 광범위한 시행 등 유연한 운용방법이 발달했다. 그리고 냉전이 끝나자 꼬리를 물고 징병제를 폐지해 이제 중요한 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져버렸다.
징병제 폐지 추세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적 문제에 있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강제로 시키는 일과 자발적으로 하는 일 사이에 능률의 차이는 자명한 것이다. 그 이유만으로도 징병제의 비경제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업무의 질적 측면이 그 위에 겹쳐진다. 군대 밖에서 생산성 높은 일을 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군대 안에서는 자기 전문성을 살리지 못하고 생산성이 훨씬 낮은 업무에 매달려야 하는 것이다.
징병제가 널리 시행된 19세기에서 20세기 전반까지는 전쟁의 시대였다. 징병제에 인권 침해의 문제가 있고 경제발전에 걸림돌이 되더라도 거대한 군대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징병제를 시행했다. 모든 나라가 비슷하게 짊어진 부담이기 때문에 상대적 경쟁력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전쟁이 훨씬 억제된 냉전기를 거쳐 탈냉전시대에 들어선 이제, 징병제와 큰 군대를 가진 나라는 홀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한국은 이 짐을 벗어 던지지 못하고 있는가?
대답은 하나뿐이다. 북한과의 대치 상황. 그런데 이 대치 상황이 정말로 징병제와 60만 대군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내가 어느 전방사단에서 복무하던 40년 전에는 그 필요가 당연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40년 동안 대치 상황의 성격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970년대에는 북한의 ‘적화 야욕’이 분명히 드러나는 일이 많았다. 청와대 습격 시도, 울진-삼척 사태 등 노골적 무력행사도 있었다. 휴전선을 통한 간첩 파견도 많았다. 그러나 1980년대에 남한의 정보통신 발전, 민주화, 개방정책이 진행되면서, 그리고 뒤이어 공산권 붕괴를 맞으면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간첩을 휴전선을 통해 보낼 필요도 없어졌고 북한이 여러 면에서 수세에 몰린 끝에 ‘하나의 조선’ 원칙을 접어놓기에 이르렀다. 1990년대 이후로는 체제 유지가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었다.
간간이 일어나는 군사적 긴장에서도 대개 북한의 방어적 입장이 나타났다. 천안함 사건이 거의 유일한 예외인데, 북한 소행이라는 한국 정부 주장의 설득력이 떨어지는 한 가지 이유가 바로 이 예외성에 있다. 1990년대 이래 북한의 강경한 태도는 언제나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는 주장과 함께 나타났는데, 천안함 침몰에 관해서는 그런 주장이 전혀 없었다.
북한의 호전성은 크게 줄어든 것이 확실하다. 북한의 호전성을 지금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40년 전과 비교해서 호전성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호전성이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적대행위의 양상도 크게 달라졌다. 북한의 중요한 도발행위로 근년 지목되는 것은 미사일과 핵무기 등 전략무기 개발 사업이다. 서해상에서는 북방한계선의 의미에 대한 이견 때문에 갈등이 수시로 불거지지만, 정전협정 해석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육상의 휴전선을 둘러싸고는 문제가 별로 일어나지 않고 있다.
2012년 10월의 ‘노크귀순’ 사건을 생각해 보라. 북한군 병사 한 명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철책선을 넘어와 막사 문을 두드릴 때까지 아무에게도 포착되지 않았다. 악의를 갖고 조직적 침투를 시도한다면 막을 길이 있겠는가.
40년 전 부르던 군가 하나가 생각난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으로 시작해서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로 끝나는 노래다. 귀순병이 막사까지 찾아와 문을 두드리게 하는 군대를 믿고 어떻게 단잠을 이루나? 부모형제는 후방의 위험이 아니라 전방에 보내놓은 병사들의 위험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다. 북한 병사가 귀순하러 온 게 아니라 습격하러 온 것이라면 그 막사의 병사들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귀순자 포착 실패는 군대의 존재 의미를 의심케 하는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에 대한 허위보고다.
귀순병이 막사 문을 두드린 것은 2012년 10월 2일 늦은 밤중의 일이었다. 그 후 보고과정에서 노크 귀순이 아니라 CCTV로 귀순자를 포착했다는 허위보고가 끼어들었지만 이튿날 저녁 무렵까지는 “문 두드림 확인”으로 합참 본부까지 보고가 정리되었다. 그런데 10월 8일 국정감사장에서 김광진 의원이 노크귀순 의혹을 제기할 때 정승조 함참의장은 “CCTV를 통해 발견한 것으로 안다.”고 답변했다. 이 답변은 10월 11일에야 정정되었다.
왜 허위보고가 노크귀순 자체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가? 노크귀순은 말단부대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벌어진 일이다. 반면 허위보고는 군의 중추부에서 일어난 일이고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이다. 노크귀순의 문제점이 일으킬 수 있는 피해는 국지적인 것인 반면 최고지휘관들이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한다면 군대 전체가 제 구실을 못하는 결과에 이른다.
세월호 사태에서도 확인되고 있는 일이다. 침몰 자체도 불행한 일이지만, 해경을 비롯한 정부기관들의 기능 상실이 불행을 몇 배로 키웠다. 유병언이 사건의 원흉인 것처럼 정부는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더 큰 원흉은 정부다. 온갖 사람이 어울려 사는 사회에는 예기치 못한 사고가 간혹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사고를 가급적 줄이고, 또 일어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국가와 정부의 존재 의의가 있다. 그런데 정부기관들이 피해를 오히려 더 불리는 역할을 한 문제들이 속속 드러나 왔다.
공교롭게도 노크귀순이 있었던 바로 그 부대에서 일어난 임 병장 사건에서도 공권력의 오작동이 또 나타났다. 임 병장의 총기 난사는 예기치 못한 사고였다. 그런데 그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장병들이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몇 차례나 통과시켜 주었다니! 게다가 출동 장병들끼리의 오인사격으로 부상자가 생긴 것을 임 병장 소행으로 발표해 놓고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여러 날 동안 감추고 있었다니!
노크귀순 사건과 임 병장 사건을 나란히 놓고 볼 때, 휴전선 경비체제를 대폭 줄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40년 전 내가 복무할 때의 체제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40년 동안 군사기술과 안보 환경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 필요하지 않게 된 강도 높은 경비체제를 오랫동안 억지로 유지하다 보니 기능은 퇴화한 채로 부담만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애꿎은 피가 흐를 때는 사회에 알려지기라도 하지만, 보이지 않게 흐른 애꿎은 땀은 얼마나 많을까.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을 ‘군인출입통제선’으로 바꿔, 그 안에서는 초병 대신 감시 장비만으로 경비체제를 유지하는 편이 효과도 더 낫고 장병의 땀과 피를 아끼는 길이 아닐까. 현장 비용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병력 감축으로 국가경제의 큰 걸림돌을 치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징병제 폐지로 군사제도 후진국을 벗어날 길도 생각할 수 있겠다.
[듣건대 군부대 인근 가게에서는 휴대폰 보관 서비스도 제공한다고 한다. 부대 내에 갖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월 얼마씩 내고 맡겨두었다가 외출 나올 때 찾아서 쓴다고 한다. 일과 중에는 휴대하지 못하게 하더라도 내무반에서조차 쓰지 못하게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뉴스를 보다가 우스운 생각이 하나 든다. 임 병장 저지하러 출동한 병사들이 휴대폰을 갖고 있어서 사진을 전송받았다면 마주쳤을 때 그냥 통과시키지 않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
'페리스코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무나 힘들었던 서O삼 병장의 ‘소원수리’ (1) | 2014.08.08 |
---|---|
“유시민 선생, 등불을 줄여야 밤길이 잘 보입니다.” (5) | 2014.07.17 |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윤창중과 문창극을 가리킨 말? (5) | 2014.06.17 |
여성참정권이 지켜준 20세기 문명, 21세기에는? (2) | 2014.06.10 |
권리만 찾으며 책임에 눈감는 사회 (4) | 2014.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