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로 제공’이 1993년 7월 제2차 회담 이후 북미회담의 초점이 되는데, 경수로의 의미에 대한 간결한 설명을 옮겨놓는다.

 

경수로는 본래 산화중수소, 다시 말해 중수(重水)를 사용하는 원자로와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으로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핵반응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일반 물을 사용하는 원자로다. 경수로는 영변에서 가동 혹은 건설 중인 흑연 감속 원자로에 비해 훨씬 정교한 장치였다. 당시 북한의 기술 수준으로는 경수로 개발 능력이 없었으므로 거의 모든 기술과 부품을 해외에서 수입해야 할 형편이었지만 경수로는 흑연 감속 원자로에 비해서 성능이 월등했다. 영변에서 유일하게 가동 중인 5MW급 원자로는 별 탈 없이 돌아간다고 가정할 때 생산할 수 있는 전력량은 미국의 대형 빌딩 5개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정도의 양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서 표준형 경수로 2기만 있으면 2천MW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데 이는 워싱턴시 전역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규모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429쪽)

 

불빛이 가득한 남한과 온통 캄캄한 북한이 대비되는 야간 위성사진이 생각난다. 남한의 전력 생산용량이 8천만 kw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북한이 간절하게 바란 경수로는 2백만 kw 용량의 것이었다. 오버도퍼는 북한이 경수로를 추구해 온 사실도 정리했다.

 

북한의 경수로 제의는 미국측 대표단에게는 대단히 생소한 이야기였지만 북한 정부가 경수로 도입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꽤 오래 전 일이었다. 80년대 중반 북한이 소련에게 요구한 소련제 원자로가 바로 경수로형이었다. 결국 경수로형 원자로 제공과 관련한 소련과 북한의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북한 지도부는 현대적인 원자력시설에 대한 관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92년 5월 북한을 방문한 한스 블릭스 IAEA 사무총장은 북한으로부터 경수로를 도입하고 그에 필요한 농축 우라늄 연료를 해외에서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잇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블릭스는 힘닿는 데까지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북한의 김달현 부총리는 서울을 방문해 비무장지대 인근의 북한 지역에 남북 협력으로 경수로를 설치하고 양국 모두에 전력을 공급하자고 제안한 바 있었다. 이 계획은 남한측이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거의 조달하도록 돼 있었다. 당시 공개되지 않고 비밀에 부쳐졌던 김달현의 제안은 그해 말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뒷전으로 밀렸고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같은 책 430쪽)

 

1985년 북한은 소련에게 경수로 제공을 약속받고 NPT 가입을 신청했다. 기술과 원료를 확보하고 있던 흑연감속로를 경수로로 대체할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소련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로 붕괴에 이르렀고, 새로운 제공자가 필요하게 된 북한은 IAEA에도 남한에도 손을 벌렸다. 호응을 얻지 못한 채로 있던 차에 미국이 ‘북핵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하고 나서자 그렇다면 당신네가 해결해 달라고 제안을 꺼낸 것이다.

 

소위 ‘북핵 문제’는 북한이 경수로 제공을 누구에게든 받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1993년 7월의 제안에서도 경수로만 제공해 주면 핵사업과 관련된 문제를 깨끗이 정리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런데 당시 미국 대표단은 경수로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버도퍼는 당시 미국 대표단의 태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네바 회담에서 북한이 다시 한 번 경수로 문제를 제기했을 때 갈루치는 국무부와 국방부 고위급 인사들로부터 받았던 언질, 즉 북한에 대해서 어떤 약속도, 특히 재정적 약속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상기했다. 7월 19일 엿새 일정의 회담 마지막 날 갈루치는 미국은 “북한의 경수로 도입을 지지하며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함께 경수로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공식 선언문을 채택하기로 합의했다. 단, 경수로 제공은 핵문제 해결을 위한 ‘마지막 해결책’으로 검토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훗날 갈루치는 이 모호한 선언문 내용을 일컬어, 경수로를 제공한다는 “약속의 의미를 내포하지 않도록 일곱 차례나 수정한 다음에야 겨우 합의에 이른 표현”이라고 말했다. (같은 책 431쪽)

 

미국 측은 “약속의 의미를 내포하지 않도록” 고심해서 모호한 표현을 짜냈지만 북한 측은 대만족이었다. 한 달 전 뉴욕의 제1차 회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고 무력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유엔헌장 내용을 넘어서지 않는 약속 정도만으로 아무런 실질적 양보 없이 북한의 NPT 탈퇴 보류를 얻어냈지만 북한 측은 그때도 대만족이었다.

 

미국 대표단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 아무런 양보도 아무런 약속도 하지 못하게 하면서 회담장에 내보내는 것은 병사에게 총알도 주지 않으면서 전쟁터에 내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부 요직의 윗사람들은 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 나갈지 아무 생각도 없이, 상황에 떠밀려 대표단을 보낸 것이었다.

 

회담을 시작할 때는 수석대표 갈루치도 별 생각이 없었다. 어떤 협상조건을 허용해달라고 윗선에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막상 북한 대표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북한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회담의 성과를 바라볼 수 있을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뉴욕에서도 유엔헌장 범위 안이니까 아무런 양보도 아니라는 입막음 아래 북한 측이 원하는 이야기를 해줬다. 그리고 제네바에서도 구체적인 약속을 해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북한의 요청이 장차 논의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1993년 7월 제네바에서의 제2차 회담을 끝낼 때 미국은 북한의 경수로 획득을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을 뿐, 그 획득을 도와줄 구체적 방법의 의논은 제3차 회담으로 미뤘다. 그리고 북한이 IAEA 및 한국과의 관계를 잘 풀어나갈 것을 회담 재개의 조건으로 설정했는데, 그 조건이 잘 충족되지 않았다. 그래서 1년 넘게 지난 1994년 8월에야 제3차 회담이 열려 ‘포괄적 타결’을 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미국은 군사적 해결책을 검토하는 상황을 겪고 남한에서는 ‘불바다’ 소동이 일어나는 등 북핵위기의 ‘위기성’이 부각된다.

 

미국이 1년 동안 북미회담 재개를 의도적으로 지연시켰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본다면 그 기간의 ‘위기성’ 부각 덕분에 포괄적 타결에 따르는 재정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막대한 경수로 건설비용의 대부분을 남한과 일본에게 떠맡기는 것이 북핵위기의 부각 없이 가능했을까? 미국이 회담 재개를 일부러 늦춘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재정 대책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재개를 서두를 입장이 되지 못했으리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은 제2차 회담에서 원하는 해결 방향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회담 재개가 늦춰지자 비공식 루트를 통해 더 구체화한 ‘포괄적 타결’ 방안을 미국에 알렸다. 10월 중순 게리 애커만 하원의원의 평양 방문을 수행한 케네스 퀴노네스를 통해서였다.

 

애커만을 수행했던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국무부 소속 북한 담당자 C. 케네스 퀴노네스는 북-미 회담 성사에 일익을 담당한 인물이었다. 북한 외교부는 양국 현안을 놓고 퀴노네스와 오랜 대화를 나눈 끝에 일련의 해결책을 정리한 서류 한 장을 그에게 건넸다. “북한은 NPT에 잔류하고 IAEA가 실시하는 정기적인 사찰을 수용할 용의가 있으며 IAEA가 요구한 ‘특별사찰’ 문제를 토의하기로 한다. 그 대가로 미국은 ‘팀스피릿’ 훈련 중단과 대 북한 경제제재 조치를 철회하는 동시에 오랫동안 지체됐던 3차 회담을 재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북한의 주고받기식 제안은 그들의 협상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은 ‘일괄 타결’ 식의 동시다발적 포괄 협상보다 합의를 향해 한 단계씩 나아간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북한 외교부는 이 제안이 북한 최고 지도부의 승인을 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두 개의 한국> 434쪽)

 

퀴노네스는 이때 평양에서 받은 문서 내용을 <한반도 운명> 242-243쪽에 밝혀놓았는데, 이와 대조해 보면 오버도퍼의 요약은 정확치 못하다. 무엇보다 미국 측 의무 중 “핵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에 경수로 제공 책임을 질 것”이 빠져 있다. 퀴노네스가 밝힌 문서 내용은 이듬해 여름 제3차 회담을 거쳐 ‘제네바합의’로 이뤄질 내용을 거의 그대로 담은 것이었다. 퀴노네스는 이 문서가 구속력 없는 극비문서인 ‘비문서’라고 설명했다.

 

북한 측은 평양 체류기간 중 나를 이용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미스터 리는 수시로 국제원자력기구 사찰에 대한 미국의 입장, 팀스피릿 및 그와 관련된 주제를 놓고 우리의 생각을 떠봤다. (...) 그래서 결국 나는 문서로 그 내용을 작성해서 보여주기 전에는 이제 워싱턴의 그 누구도 그가 하는 말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판문점으로 떠나던 날 아침 일찍, 리는 내게 ‘비문서’ 한 장을 건네주었다. 그는 내가 비문서의 외교적 개념을 설명해 주기 전에는 그 어떤 문서도 남길 수 없다고 우겼다. 그는 처음에는 웃으면서 물었다. “어떻게 문서가 비문서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비문서란 정부 간에 교환되는 극비문서라고 나는 설명해주었다. 따라서 이 문서가 만에 하나 외부에 유출될 경우, 예를 들어 대중에 누출될 경우 정부는 모두 비문서의 신빙성을 부인할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리가 내게 비문서를 줄 수 있지만 혹시 누출될 경우 북한은 이 문서 자체를 부인할 수 있었다. 리는 그 아이디어가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핵문제에 관한 문제의 비문서를 작성하느라 북한 대표단이 밤을 새웠다고 생색을 냈다. 문서를 받아들면서 나는 그에게 북한 정부의 어느 선까지 그 문서에 담긴 내용을 승인했느냐고 물었다. 리는 ‘최고지도자’도 비문서의 내용에 만족했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나 역시 문제의 비문서를 누구에게도 유출시키지 않고 바로 미국 정부에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한반도 운명> 241-242쪽)

 

퀴노네스를 이 시점에 평양에 보낸 사실이 북한과의 대화를 미국정부가(적어도 국무부가) 원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듬해 6월 평양 방문을 앞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게 퀴노네스가 브리핑을 해주지만 수행은 허용되지 않았다.

 

오후 늦게 크리크모어 대사는 국무부에 다시 와서 내게 이번 방북에 동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우리는 그것이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한국과장에게 물었다. 그러나 핵문제에 관한 나의 지식과 북한인들과의 친분 때문에 나는 카터 일행과 동행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반도 운명> 275쪽)

 

카터 방북 당시 특사가 아닌 개인 자격이었고 그 방북에 대해 미국 정부가 아무런 공식 책임을 갖지 않는다는 특별한 사정도 작용한 것이었겠지만, 북미회담 대표단 멤버인 퀴노네스의 평양 방문은 1993년 10월 당시에도 미국 측이 북한 측과의 소통을 바라지 않고 있었다면 금지할 논리가 있는 것이었다. 퀴노네스의 경위 설명을 볼 때 ‘비문서’는 북한 측이 줘서 그냥 받아온 것이 아니라 그가 문서의 형식까지 설명해 가며 요청해서 받아낸 것이었다.

 

이 비문서에 담긴 북한의 포괄적 타결 제안이 “그들의 협상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한다고 오버도퍼는 봤다. 복잡한 협상을 최대한 간단하게 만들려는 노력은 북한이 협상의 목적을 분명히 정해놓았다는 사실과 그 목적을 절실하게 추구한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준다. 불확실한 상태가 오래가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비문서 교부를 북한 측 협상태도 변화의 결정적 계기로 볼 일은 아니다. 포괄적 협상의 절대적 키워드인 ‘경수로’를 북한 측은 6월 뉴욕의 제1차 회담과 7월 제네바의 제2차 회담에서 거듭거듭 꺼냈던 것이다. 뉴욕에서는 미국 측의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고, 제네바에서는 깜짝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불가침 약속과 에너지원 확보를 통해 우리 체제를 보장해 달라. 그러면 당신네가 제기해 온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내용의 포괄적 타결안을 북한 측은 뉴욕회담 이전부터 세워놓고 있었고, 미국이 이 제안을 들어주는 데 따라 차츰 구체화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Posted by 문천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그 나라에도 병역 의무는 있다. 1년간이다. 그러나 종교적 이유나 개인의 소신에 따라 집총(執銃)을 거부할 수 있다. 그런 경우 우리의 공익근무요원과 비슷한 방법으로 같은 기간 봉사활동에 종사하게 된다. 그나마의 조직활동조차 거부하는 경우는 같은 기간 동안 감옥에 들어가 있으면 된다. 이 감옥이란 규율이 좀 엄격한 기숙사 정도로, 운동이나 독서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곳이다.

 

이 감옥생활을 할부제로 하는 방법도 있어서 대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높다. 겨울이 긴 그 나라에서 학생들은 겨울방학마다 이 감옥에 들어가 석 달씩 수용생활을 하고 나오는 것이다. 4년 동안 겨울을 여기서 지내면 병역이 끝난다. 그러나 대다수 학생들은 다양한 경험을 취할 수 있다는 이유로 현역복무를 택한다고 한다.

 

20여 년 전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서울에 머무르고 있던 스웨덴 청년 구스타프 레이프에게 들은 스웨덴 얘기다. 구스타프는 고등학교를 마친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선원이 되었다. 선원노릇으로도 병역을 대신할 수 있다. 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기 식으로 세상을 공부하던 구스타프는 어느 날 승선한 배가 부산에 입항했을 때 다분히 충동적으로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한국을 공부하기로.

 

한국의 대부분 남자들은 군대에 많은 시간을 바친다. 그러나 “X퉁소를 불어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는 군대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시간 때우기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회와 경제가 발달할수록 이 시간낭비의 의미는 심각해진다. 여러 전문직에서 젊은 시절 연마의 기회를 몇 년간 잃는 것은 개인의 손실뿐 아니라 이 나라 전체의 경쟁력에도 적지 않은 굴레가 되고 있다.

 

구스타프에게 스웨덴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스웨덴은 꿈속처럼 머나먼 나라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보다 합리적인 병역제도를 가진 모든 나라가 우리의 대등한 경쟁상대가 돼 있다. 세계가 좁아지기도 했고 우리가 크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의 ‘병역’ 개념은 아직도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대다수 국민이 병역에 대해 막연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병역제도가 그리 합리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지도자를 향한 국민의 분노가 어떤 해명으로도 잘 삭여지지 않는 것은 이 피해의식이 그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의 면제가 정당하냐 하는 시비보다 중요한 것은 복무하는 사람들이 그 복무에서 보람을 느끼도록 해주는 일이다. (1997년 8월)

 

이제 다시 조사해 보니 스웨덴에서는 2010년에 징병제가 폐지되었다고 한다. 스웨덴은 늦은 편이다. 냉전 종식 후 거의 모든 유럽국에서 징병제가 사라졌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핀란드 등 징병제를 남겨둔 몇 나라에서도 대체복무제가 광범위하게 시행되어 실질적 의미의 ‘강제징집’은 사라진 셈이다.

 

우리 헌법에는 국방 의무가 교육, 납세, 근로 의무와 함께 국민의 ‘4대 의무’로 규정되어 있고 병역은 국방 의무의 일부로 시행되어 왔다. 그런데 군 복무를 국민의 보편적 의무로 규정한다는 것은 기본권에 대한 지나친 침해라는 의견이 많다. 종교적-철학적-정치적 입장의 ‘양심적 병역 거부’는 말할 것도 없고, 최근 총기사고의 무고한 피해자들을 보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생명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에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병역 의무의 인권 침해 문제는 인권에 큰 관심 없는 일반인의 눈에도 분명한 것이다. 인생을 즐길 자유는커녕 사회를 위해 일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 겪는 위치에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기 2년을 바쳐야 한다니! 내가 복무하던 40년 전에 비하면 “군대 많이 좋아졌다”는 사실을 알기는 하지만, 막사와 음식이 좀 나아졌다고 해서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권사상의 원조로 꼽히는 장 자크 루소(1712~1778)가 징병제의 열렬한 지지자였다는 사실을 뜻밖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루소는 모든 시민이 자기 사회의 방위를 위해 직접 나서는 것이 명예로운 권리이기도 하며, 이 역할을 직업군인(용병)에게 맡기는 것은 도덕적 타락이라고 주장했다. 로마공화정의 쇠퇴가 징병제에서 모병제로의 전환에 뒤따른 것이었음을 지적했다.

 

대혁명 중의 프랑스에서 징병제를 채용한(1798) 데는 루소의 영향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물론 더 중요한 이유는 혁명을 견제하는 주변 나라들의 압박에 있었다. 징병제를 통해 종래의 10배인 2백만 명 규모의 상비군을 키워냄으로써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영광’을 맛볼 수 있었다. 프랑스의 ‘인해전술’에 혼이 난 프러시아 등 주변 나라들은 다른 혁명은 몰라도 ‘징집 혁명’만은 프랑스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19세기를 통한 국민국가의 성장으로부터 20세기 초의 제국주의시대까지 징병제는 근대국가의 표준이 되었다. 군대가 커짐에 따라 전쟁의 규모도 갈수록 커져서 ‘세계대전’에 접근해 갔다. 근대국가의 발판인 ‘대량생산’ 체제의 급속한 구축을 위한 ‘대량파괴’ 체제의 역할을 대형화된 군대와 전쟁이 맡은 것이다. 이것이 ‘철혈(鐵血)정책’의 본질이었다.

 

이 과정에서 군대는 국민의식 형성의 중요한 통로가 되기도 했다. 여러 지역, 여러 계층 출신의 젊은이들이 하나의 군대 안에서 함께 생활하고 활동하는 경험을 통해 국민국가 구성원으로서 공동의 정체성을 체득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군대의 존재가 근대화를 위한 중요한 인프라 역할을 맡은 것도 이와 비슷한 일이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로는 징병제가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냉전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명목상의 징병제는 유지하되 위에 소개한 스웨덴 경우처럼 대체복무제의 광범위한 시행 등 유연한 운용방법이 발달했다. 그리고 냉전이 끝나자 꼬리를 물고 징병제를 폐지해 이제 중요한 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져버렸다.

 

징병제 폐지 추세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적 문제에 있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강제로 시키는 일과 자발적으로 하는 일 사이에 능률의 차이는 자명한 것이다. 그 이유만으로도 징병제의 비경제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업무의 질적 측면이 그 위에 겹쳐진다. 군대 밖에서 생산성 높은 일을 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군대 안에서는 자기 전문성을 살리지 못하고 생산성이 훨씬 낮은 업무에 매달려야 하는 것이다.

 

징병제가 널리 시행된 19세기에서 20세기 전반까지는 전쟁의 시대였다. 징병제에 인권 침해의 문제가 있고 경제발전에 걸림돌이 되더라도 거대한 군대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징병제를 시행했다. 모든 나라가 비슷하게 짊어진 부담이기 때문에 상대적 경쟁력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전쟁이 훨씬 억제된 냉전기를 거쳐 탈냉전시대에 들어선 이제, 징병제와 큰 군대를 가진 나라는 홀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한국은 이 짐을 벗어 던지지 못하고 있는가?

 

대답은 하나뿐이다. 북한과의 대치 상황. 그런데 이 대치 상황이 정말로 징병제와 60만 대군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내가 어느 전방사단에서 복무하던 40년 전에는 그 필요가 당연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40년 동안 대치 상황의 성격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970년대에는 북한의 ‘적화 야욕’이 분명히 드러나는 일이 많았다. 청와대 습격 시도, 울진-삼척 사태 등 노골적 무력행사도 있었다. 휴전선을 통한 간첩 파견도 많았다. 그러나 1980년대에 남한의 정보통신 발전, 민주화, 개방정책이 진행되면서, 그리고 뒤이어 공산권 붕괴를 맞으면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간첩을 휴전선을 통해 보낼 필요도 없어졌고 북한이 여러 면에서 수세에 몰린 끝에 ‘하나의 조선’ 원칙을 접어놓기에 이르렀다. 1990년대 이후로는 체제 유지가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었다.

 

간간이 일어나는 군사적 긴장에서도 대개 북한의 방어적 입장이 나타났다. 천안함 사건이 거의 유일한 예외인데, 북한 소행이라는 한국 정부 주장의 설득력이 떨어지는 한 가지 이유가 바로 이 예외성에 있다. 1990년대 이래 북한의 강경한 태도는 언제나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는 주장과 함께 나타났는데, 천안함 침몰에 관해서는 그런 주장이 전혀 없었다.

 

북한의 호전성은 크게 줄어든 것이 확실하다. 북한의 호전성을 지금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40년 전과 비교해서 호전성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호전성이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적대행위의 양상도 크게 달라졌다. 북한의 중요한 도발행위로 근년 지목되는 것은 미사일과 핵무기 등 전략무기 개발 사업이다. 서해상에서는 북방한계선의 의미에 대한 이견 때문에 갈등이 수시로 불거지지만, 정전협정 해석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육상의 휴전선을 둘러싸고는 문제가 별로 일어나지 않고 있다.

 

2012년 10월의 ‘노크귀순’ 사건을 생각해 보라. 북한군 병사 한 명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철책선을 넘어와 막사 문을 두드릴 때까지 아무에게도 포착되지 않았다. 악의를 갖고 조직적 침투를 시도한다면 막을 길이 있겠는가.

 

40년 전 부르던 군가 하나가 생각난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으로 시작해서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로 끝나는 노래다. 귀순병이 막사까지 찾아와 문을 두드리게 하는 군대를 믿고 어떻게 단잠을 이루나? 부모형제는 후방의 위험이 아니라 전방에 보내놓은 병사들의 위험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다. 북한 병사가 귀순하러 온 게 아니라 습격하러 온 것이라면 그 막사의 병사들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귀순자 포착 실패는 군대의 존재 의미를 의심케 하는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에 대한 허위보고다.

 

귀순병이 막사 문을 두드린 것은 2012년 10월 2일 늦은 밤중의 일이었다. 그 후 보고과정에서 노크 귀순이 아니라 CCTV로 귀순자를 포착했다는 허위보고가 끼어들었지만 이튿날 저녁 무렵까지는 “문 두드림 확인”으로 합참 본부까지 보고가 정리되었다. 그런데 10월 8일 국정감사장에서 김광진 의원이 노크귀순 의혹을 제기할 때 정승조 함참의장은 “CCTV를 통해 발견한 것으로 안다.”고 답변했다. 이 답변은 10월 11일에야 정정되었다.

 

왜 허위보고가 노크귀순 자체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가? 노크귀순은 말단부대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벌어진 일이다. 반면 허위보고는 군의 중추부에서 일어난 일이고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이다. 노크귀순의 문제점이 일으킬 수 있는 피해는 국지적인 것인 반면 최고지휘관들이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한다면 군대 전체가 제 구실을 못하는 결과에 이른다.

 

세월호 사태에서도 확인되고 있는 일이다. 침몰 자체도 불행한 일이지만, 해경을 비롯한 정부기관들의 기능 상실이 불행을 몇 배로 키웠다. 유병언이 사건의 원흉인 것처럼 정부는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더 큰 원흉은 정부다. 온갖 사람이 어울려 사는 사회에는 예기치 못한 사고가 간혹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사고를 가급적 줄이고, 또 일어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국가와 정부의 존재 의의가 있다. 그런데 정부기관들이 피해를 오히려 더 불리는 역할을 한 문제들이 속속 드러나 왔다.

 

공교롭게도 노크귀순이 있었던 바로 그 부대에서 일어난 임 병장 사건에서도 공권력의 오작동이 또 나타났다. 임 병장의 총기 난사는 예기치 못한 사고였다. 그런데 그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장병들이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몇 차례나 통과시켜 주었다니! 게다가 출동 장병들끼리의 오인사격으로 부상자가 생긴 것을 임 병장 소행으로 발표해 놓고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여러 날 동안 감추고 있었다니!

 

노크귀순 사건과 임 병장 사건을 나란히 놓고 볼 때, 휴전선 경비체제를 대폭 줄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40년 전 내가 복무할 때의 체제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40년 동안 군사기술과 안보 환경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 필요하지 않게 된 강도 높은 경비체제를 오랫동안 억지로 유지하다 보니 기능은 퇴화한 채로 부담만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애꿎은 피가 흐를 때는 사회에 알려지기라도 하지만, 보이지 않게 흐른 애꿎은 땀은 얼마나 많을까.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을 ‘군인출입통제선’으로 바꿔, 그 안에서는 초병 대신 감시 장비만으로 경비체제를 유지하는 편이 효과도 더 낫고 장병의 땀과 피를 아끼는 길이 아닐까. 현장 비용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병력 감축으로 국가경제의 큰 걸림돌을 치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징병제 폐지로 군사제도 후진국을 벗어날 길도 생각할 수 있겠다.

 

[듣건대 군부대 인근 가게에서는 휴대폰 보관 서비스도 제공한다고 한다. 부대 내에 갖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월 얼마씩 내고 맡겨두었다가 외출 나올 때 찾아서 쓴다고 한다. 일과 중에는 휴대하지 못하게 하더라도 내무반에서조차 쓰지 못하게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뉴스를 보다가 우스운 생각이 하나 든다. 임 병장 저지하러 출동한 병사들이 휴대폰을 갖고 있어서 사진을 전송받았다면 마주쳤을 때 그냥 통과시키지 않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

Posted by 문천

 

1990년대 초반의 세계정세 변화 방향과 그에 임하는 북한의 사정과 자세에 대해 나는 내 나름대로의 관점을 갖고 있다. 이 주제에 집중해 온 연구자 중에 나와 다른 관점을 보이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내 관점이 그분들과 다른 점에 대해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일반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입장에서는 내 주관에 매몰되어 독자를 오도할 위험을 피하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2011년에 나온 장달중(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이정철(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임수호(삼성경제연구수 소석연구원)의 <북미 대립-탈냉전 속의 냉전 대립>(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은 내가 “냉전 이후”에서 설명하려는 상황의 대부분을 주제로 삼은 책이고, 여기 담긴 정보와 해석을 나도 많이 활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 나름의 설명을 내놓을 필요를 느끼는 것은 기본 시각에서 다소의 편향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냉전 해소로 빚어진 상황이 이 책에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단극질서로의 재편을 위해 미국이 들고 나온 것은 전 지구적 개입(global activism)정책이었다. 이것은 유일 초강대국 미국 자신은 물론 여타 국가들의 정책과 행동방향까지도 미국적 규범에 따르도록 바꾸어 놓고자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자연히 서로의 정통성에 대한 암묵적 합의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던 냉전 게임의 룰이 유지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 역사의 흐름은 선과 악의 절대적 기준에 의한 싸움으로 바뀌어 전개되기 시작했다.

 

냉전의 종식은 공산권의 정치지배가 결코 정당한(legitimate)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공산독재치하의 민중들은 그들을 지배했던 정권이 비록 ‘사악(evil)’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정당하지 않은(illegitimate)’ 정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냉전의 종식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미국적 가치는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이상과 표리관계를 이루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의 힘이 결코 정당하지 않은 나라와의 ‘국경’에서 멈추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탈냉전기의 불확실성은 바로 이러한 미국적 질서를 전 지구화시킬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따라서 심각한 경제위기 속에 냉전 엔드게임에 몰린 북한 지도자들은 이제 국경에 멈추지 않고 밀려들어 올 탈냉전의 파장이 그들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에게 탈냉전기의 불확실성은 미국과 전혀 다른 의미로, 다시 말해 체제의 ‘생존위기’로 다가왔던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탈냉전의 파장이 몰고 올 가장 심각한 도전은 체제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냉전시기에는 체제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가 테스트 게임의 룰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루마니아의 차우체스크[차우셰스쿠] 처형이나 동독 지도자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 등을 목격하며 정통성이 없는 지도자에 대한 민중의 단죄가 현실로 나타날 수 있음을 피부로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북한도 이제 더 이상 국경에 멈추어 서지 않을 미국적 질서의 역사적 행진에서 반역사적(anti-historical) 세력으로 무대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9-11쪽)

 

이 글에서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정당성’과 ‘정통성’의 차이에 대한 확실한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정당성은 정권의 역할에 대한 객관적 평가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정권을 운용하더라도 국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가져온다면 정당성이 부인될 수 있다. 한편 정통성은 내부 구성원들이 가지는 주관적 인식의 대상이다. 국민에게 ‘고난의 행군’을 강요하는 정권의 정당성을 외부에서 비판할 수는 있지만, 정통성은 체제 내부의 문제다.

 

물론 정당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은 정통성 시비가 쉽게 일어날 수 있는 배경조건이 된다. 따라서 셋째 문단에서 “체제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를 말한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다음 문단의 ‘정통성’ 언급에는 논리의 비약이 있다. 현실의 승패가 도덕적 가치까지도 좌우하는 것처럼 만드는 비약이다.

 

정당성과 정통성의 이 혼동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는 점을 “이제 역사의 흐름은 선과 악의 절대적 기준에 의한 싸움으로 바뀌어 전개되기 시작했다.”고 냉전 이후의 세계정세 변화 방향을 규정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인용 내용은 미국 ‘네오콘’의 관점이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걸쳐 미국 대외정책에 큰 작용을 한 관점이지만 2000년대 후반으로 넘어오면서는 이라크 개입정책 실패를 계기로 정책에 대한 영향력도 잃고 말았다. 2010년대에 들어선 시점에서는 세계정세의 변화를 파악하기에 너무 협소한 관점이라고 생각된다. 예컨대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역할 증대 같은 것을 담을 수 없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의 제약이 북한의 움직임을 해석하는 데 어떤 편향성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대목도 되씹어보게 된다.

 

코너에 몰린 북한이 들고 나온 카드는 미국을 직접교섭의 상대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1993년 3월 북한의 NPT로부터의 탈퇴의사 통보는 미국과의 직접거래를 위한 카드였다. 이른바 ‘가마우지 외교’의 시작이었다. 북한의 눈에는 미국과 거래가 성사되면 일본과 남한은 저절로 따라 올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우리식 사회주의로 내부단속을 하는 동시에 핵카드로 미국을 중립화시키려는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의 시작이었다. 체제의 붕괴 혹은 변화를 전제로 한 미국과 남한의 공세적 냉전 엔드게임에 맞서 북한은 핵이라는 특별한 카드를 이용하여 생존을 보장받고 고립에서 벗어나는 나름의 냉전 엔드게임을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핵 위기는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서로 다른 냉전 엔드게임의 충돌이었다.(같은 책 16-17쪽)

 

‘가마우지 외교’, ‘벼랑 끝 전술’처럼 특정한 해석의 결과물인 용어(jargon)를 논고의 시작 단계에서 너무 쉽게 쓰는 것이 그 특정한 해석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로 보인다. ‘핵카드’란 말이 후에는 널리 쓰이게 되었는데, 과연 1992년 5월 IAEA에 최초보고서를 제출하고 사찰을 받아들이는 단계에서도 북한이 ‘핵카드’를 협상무기로 의식하고 있었을까?

 

나는 전후 사정을 검토한 결과 1992년 5월에는 북한이 ‘핵카드’ 같은 것을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IAEA가 통상적 방식으로 자기네를 대해줄 것이라는 가정 하에 미국의 핵위협을 제거하는 ‘한반도 비핵화’를 바라본 것이었다. 그런데 IAEA가 동위원소 분석이라는 안 하던 짓을 하고 ‘특별사찰’이라는 극한적 조치로 북한의 순조로운 국제사회 진입을 가로막자 대안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려운 사태를 만든 주체인 미국의 태도를 바꾸는 데 노력을 집중하고 ‘핵카드’를 협상무기로 들고 나온 것이 1993년 중 찾아낸 대안이었다. ‘가마우지 외교’나 ‘벼랑 끝 전술’이란 표현이 설령 이 대안에는 적합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그 이전의 북한 정책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적대적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북한이 모험적 정책을 구사하는 것은 1993년 이후 거듭거듭 일어나는 일이다. 미국과 남한의 대결주의 세력은 그것을 빌미로 더욱 강경한 적대정책을 주장하는 에스컬레이션 현상을 일으킨다. 그 과정에서 북한 정책의 모험성을 편향적으로 강조-과장하는 논설이 많이 생산되어 왔다. 1993년 이전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지 역시 소급해서 과장의 대상이 되었다.

 

냉전형 동맹관계의 해체는 북한에게는 생존의 위기를 의미했다. 왜냐하면 그간 북한의 안보와 경제는 상당부분 소련과 중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에 직면한 북한은 무엇보다 비대칭전력인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북한 외교부장이던 김영남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으면, 이때까지 동맹관계에 의거했던 ‘일부 무기들’도 자체로 마련하는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핵개발을 군사적 용도로 활용하는 동시에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외교적 협상카드로도 활용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같은 책 32쪽)

 

북한의 핵실험이 2006년에야 이뤄지는 것을 보더라도 1990년대 초 북한의 기술은 핵무기에서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시점에서 ‘일부 무기들’ 이야기가 나온 것은 수십 년간 제공받아 온 핵우산의 철거를 앞두고 당혹감을 토로한 것이지, 구체적인 계획을 밝힌 것은 아닐 것이다. CIA 등 미국 정보기관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코앞에 닥쳤다느니, 이미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느니, 북한의 핵능력을 엄청나게 부풀려 선전한 것은 북한에 대한 압박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위에 인용된 김영남의 발언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지를 과장해서 부각시키기 위해 편향적으로 해석된 일이 많다.

 

1993년 이전 북한에게 핵무기 개발 의지가 전혀 없었다고는 나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계획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이다. 북한의 의지를 보여주는 증거는 플루토늄 추출뿐인데, 미국 정보기관이 제기한 의혹처럼 폭탄 제조에 충분한 분량이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핵무기 제조와 거리가 멀다. 하물며 운반수단과 정밀보조체계를 필요로 하는 실제 ‘핵전력’은 바라보기도 힘든 아득한 곳에 있었다.

 

이 무렵 김일성이 여러 자리에서 북한에게 핵무기 제조를 위한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다고 한 말이 많이 인용되는데 능력이 없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능력이 없다면 의지가 있더라도 미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 언젠가 장래에 핵무기를 자체개발할 ‘가능성’을 열어두려는 막연한 목적의식을 갖고 플루토늄 추출 등 최소한의 준비를 계속해 나가겠다는 정도의 소극적 핵정책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당시로는 실현가능성이 아득하던 핵무기 개발에 국가의 명운을 걸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에 근거한 합리적인 추측이다.

 

1973년 6-7월 뉴욕과 제네바에서 열린 제1, 2차 북미회담 이후의 교착상태를 장달중-이정철-임수호는 이렇게 설명했다.

 

1993년 6-11 합의 이후 핵문제는 다시 장기교착 국면으로 돌입했다. 핵문제 해결에서 배제된 한국은 북미협상에 제동을 걸면서 남북대화 우선론을 관철시키고자 했으며, 6-11 합의문을 통해 불공정성을 비판받은 IAEA는 추락한 위신을 대북사찰의 강화를 통해 보완하고자 했다. 이에 반해 북한은 통미봉남의 전략 하에서 남북대화에는 형식적으로만 응했으며 NPT 탈퇴를 유보한 특수지위를 내세워 IAEA 사찰은 안전조치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수준의 제한적 사찰만을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사실상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과 한국 및 IAEA의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1994년 봄부터 한반도에서는 빠른 속도로 위기가 재연되기 시작했다. (같은 책 73쪽)

 

지난 주 인용한 퀴노네스의 회고처럼 북한은 IAEA의 ‘특별사찰’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대표단은 ‘special inspection’이란 말을 쓰지 못하면서 대신 ‘full scope’라는 말을 합의문에 집어넣음으로써 IAEA 측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IAEA의 체면이 서지는 못한다. 1993년 2월 25일 IAEA 이사회에서는 ‘특별사찰’이라는 특정한 제도의 발동을 결의했고, 그것이 보름 후 북한의 NPT 탈퇴를 촉발했다. 원인이 된 제도의 이름을 똑바로 지목하지 못하고 비슷한 말로 얼버무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위트-폰먼-갈루치는 <북핵위기의 전말> 71쪽에서 미국대표단이 “공동성명서에 과거 IAEA사찰 요구가 불공정했다는 북한의 주장을 존중하여 안전조치의 ‘공정한’ 적용을 명시하기로 한 것”이라고 분명히 설명했다. IAEA의 특별사찰 요구의 불공정성 인정이 6월 북-미 합의의 기반이었다.

 

IAEA가 일으킨 갈등은 장달중-이정철-임수호가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런데 같은 시기 남한과의 갈등 책임을 북한이 남북대화에 형식적으로만 응한 ‘통미봉남’ 전략에 씌우는 것은 편향적 해석으로 보인다. 대화 노력이 진정성을 가진 것인가, 형식적인 것인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했다는 말인가.

 

지난 주 인용한 퀴노네스의 회고 중에 “나는 김영삼 대통령이 북한과 미국 간의 관계완화를 복잡하게 하고 지연시키는 것을 최우선과제로 삼고 있다고 확신했다.”고까지 남한의 무책임한 태도에 통탄한 대목이 있다. 당시 한국 통일부장관이던 한완상의 회고 <한반도는 아프다> 중에도 김영삼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핵 가진 자와는 악수하지 않겠다.”고 하는 등 대결정책에 치우친 면이 많이 지적되어 있다. 북한은 미국의 안전 보장과 국제사회 진입에 국가의 명운을 걸고 있었다. 남한과의 대화 노력이 그 목적에 도움이 된다면 마다할 여유가 없었다. 김영삼 정부가 북한의 절박한 사정을 이용하려고 고압적인 자세로 임했기 때문에 대화가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통미봉남’처럼 편향적 해석을 함축한 용어(jargon)를 이 대목에 적용하는 것은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북핵위기’에 관한 서술 중에는 위기의 책임을 북한 측에 씌우는 것이 많다. 압박정책을 뒷받침하려는 의도가 드러나 보이는 무리한 논설도 그중에 많이 보인다. 장달중-이정철-임수호의 <북미 대립>은 학술적 기준이 잘 지켜진 작품이고, 사건의 설명이나 자료 제시에서 안심하고 활용할 좋은 내용이 많다. 그러나 위에서 몇 대목 예시한 것처럼 거시적 관점에서 편향된 해석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보인다. 북핵 문제가 정치외교적 현안으로 떠올라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일방적 주장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 휩쓸린 것 같다.

 

1992년 이전에 북한은 ‘핵카드’를 대외정책에 사용한 일이 없는데 미국이 IAEA를 통해 무리한 압박을 가한 결과 ‘핵무기 없는 핵카드’가 만들어진 것으로 나는 본다. 줄곧 거절당해 온 고위급 북미회담을 갖게 되고 ‘경수로 제공’이라는 엄청난 당근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 이 핵카드 덕분이었고, 국제적 고립과 경제난이라는 위기상황 앞에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핵카드에 매달리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핵무기를 갖지 않은 북한은 핵카드를 스스로 만들어낼 능력이 없었다. 북한이 갖고 있던 약간의 불투명성을 미국이 IAEA를 통해 부각시키며 ‘위험 없는 위기’를 만들어내는 바람에 ‘핵무기 없는 핵카드’가 북한 손에 쥐어진 것이다. 그것이 오해와 실수의 결과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북핵위기’의 성립을 바라고 의도적으로 획책한 것이었을까?

 

평화를 등진다고 스스로 표방하는 정치세력은 없다.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는 자들도 더 큰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는 정치적 이익을 위해 평화를 해치는 자들이 존재한다. ‘북핵위기’에 북한의 책임도 물론 있겠지만, 북한의 입장이 외부에 잘 전해지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해서 위기의 책임을 북한에게만 뒤집어씌우며 위기를 악화시켜 온 세력이 미국에도 있고 남한에도 있었다. 북핵위기의 실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편향적 시각을 담은 통념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제일 먼저 필요하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