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1일부터 28일까지입니다.

 

 

12월 21일

4溫의 날

오후엔 경기도지부의 한글강습회에 본부를 대표해 나가서 한 시간 동안 금융조합의 나아갈 길에 관해서 8-15 이후의 내 체험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엿다.

나오는 길에 군정청에 들럿더니 朴 선생은 대학으로 옴기서서 아니 계시고 마침 防火데-의 행사를 하는 중이엇다.

東洋史統 세 권을 2백원에 사다.

 

12월 22일 발행

 

12월 24일

서울의 하늘은 흐렷는지 개엿는지도 모르게 흐리멍덩한 날이 많다. 낮에 경석 군 어머니가 환이를 데리고 오피스로 찾아오시었으므로 집에 안내하엿다.

오후 네 시부터 본관에서 크리스마스이브의 파-티-가 있엇다. 재비 뽑는 덴 1번이 나와서 적쇠를 집게 되엇다.

나오는 길에 동료 세 사람과 함께 하상용 씨 댁에 들럿다가 늦게 집으로 왓다.

 

12월 25일

흐렷는지 개엿는지 역시 분명치 않다.

오전에는 이재형 군 댁에 가서 놀다. 봉히의 산술문제 푸리에 그 推理방식이 하도 意外여서 아이들의 머리의 움즈김에 대해서 새삼스리 驚異를 느꼇다.

오후에는 海田 氏 일이 궁금해서 찾아가 보앗더니 벌서 한 달 전에 귀국햇다는 소문.

기봉이가 오늘 머리를 깎엇다. 아주 놈이 으젓해 보인다. 그러나 이지음은 늘 코가 맥히고 잘 찡얼거린다.

 

12월 26일 발행

 

12월 27일

개이고 치웁다.

아침에 哲, 載瀅, 曺日煥 씨와 함께 人民報社에 들렀으나 책임자가 없어서 虛行.

소양증이 심해서 哲의 소개로 적십자병원 李鍾X 씨를 방문, 신세를 젓다.

오후엔 과장회의로 본관에 갓다오니 李本寧 군이 다녀갓다기 천연정 그의 寓舍를 찾아 학문에의 志向과 目下의 사회事象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12월 28일

개이다.

오후에 경기도지부의 간담회에 갓더니 종로조합 李錫範 씨가 이러나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8-15 이전과 정반대가 아니면 않된다, 例하면 우리는 이때까지 우의 지시를 받아서 그 시킨 대로를 잘해 갈려고만 애썻지만 앞으로는 우리가 主動이 되어서 조합계를 움즉여나가야 한다. 書記는 理事의 使用人이 아니다. 너이들이야말로 조합의 中軸이어야 한다 하고 XX的인 演說을 해서 滿堂의 書記들에게 박수갈채를 받고 있으므로 나는 도저히 그러한 견해를 默過할 수 없으므로

“一線 조합에서 창의공부 해가지고 조합을 强力的으로 운영해 나가는 것은 물론 좋다. 오늘날처럼 初創期인 혼란이 있어 중앙기관의 기능이 원활하게 움즈길 수 없을 때는 반드시 그레야 한다. 이러한 때에 있어선 書記도 理事 명령만 기대릴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일을 기획하고 건의하고 추진해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타고 해서 各自 爲主가 되어서 제 주장만 고집해서 지휘명령을 받지 않고 질서를 문란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않된다. 우리 조합계에는 물론 그러한 페단이 없을 터이지만 오늘날 周圍의 現象으로 그러한 유감스러운 경향이 顯著하므로 혹시 李 선배의 말을 오해하는 이가 있을까 해서 그 말을 敷衍한다”고 일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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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1945년 12월 1일부터 20일까지의 일기를 올립니다. 책에 게재된 날자에는 "(발행)"으로 표시하고 넘어갑니다.

 

 

12월 1일 (발행)

 

12월 2일 5시 기상

개이다.

간밤엔 자리에 누어 잠이 들엇는데 누가 대문을 두들기기에 나가보니 이순형 씨와 고옥남 씨가 찾아왔다. 서울 차가 다섯 시간이나 연착해서 열 시에 닿엇다. 두 분 다 귀한 손님들이다. 戰塵 속에서 서로 헤여지고 피차에 구구한 목숨을 부지하기에 골몰해서 소식도 기연미연한 중에 여러 해를 지냇다. 이제 평화 회복되고 조국의 광복이 이루어지려는 이 때 옛 모습 그대로 다시 맛나니 격세지감이 없지 않다. 저 방에선 밤새 도란도란 하는 이야기가 끝치지 않는다. 오래 막혔던 흉금을 헤치면 이야기의 실머리 끝이 없으리라. 가끔 기봉이가 한 목 끼어서 좋아하는 소리도 들린다.

 

12월 3, 4, 5, 6, 7일 (발행)

 

12월 8일 5시 기상

흐리고 치웁다.

첫 시간은 신반고사

둘쩨 시간은 명반고사

셋쩨 시간은 아이들 다리고 남산으로 가서 탑과 석불을 보고 거기 관련해서 불교의 이야기. 한편으론 일본 神社를 헐어내는 마치 소리 겨울 하늘에 반향하고 이 여러 가지가 어울려서 제절로 역사의 일대 파노라마를 펼처놓은 듯. 이중연 씨의 소개로 아이들에게 결별 인사를 하엿다.

한평생 옳고 바른 길로 찾아가라고.

아침 조회시간에는 판장과 개버들나무 이야기.

집에 오니 기봉이가 싱글벙글하고 좋아하였다.

 

12월 9, 10, 11일 (발행)

 

12월 12일 4시 기상

개이다. 흐렷다.

새벽엔 오랫동안 밀렷든 일기를 썻다.

정재륜의 遣閑錄 중에서 자미난 이야기 몇 가지. [인용 내용 나중에 보완하겠음]

오늘이 업무 인계.

아침에 新 이사 신락우 씨가 부임.

낮에는 역장 文씨의 招宴에 나갓더니 그 자리에서 학교 金 선생이 조선은 너무 예절만 숭상하다가 망했으니 이제부터는 예절을 버리고 과학에만 치중해야 한다는 걸 역설하기

“좋은 의견이긴 하나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예절이 나쁜 것이 아니고 번문욕례가 나쁜 것이다. 시대가 이렇게 변할 수록 더욱 예절이 필요한 것 같다. 과학도 예절과 도의, 즉 철학성을 기조로 해야만 하겠다.”

는 이야기를 들려주엇더니 만좌가 옳다 하였다.

저녁에는 조합장 댁에서 만찬 대접.

 

12월 13일 4시 기상

눈 오고 비 오다.

짐 묶어서 정거장에 내느라고 종일 고생.

낮 차로 가족부터 먼저 떠나보내다.

4-5시경에[?] 온다든 화차가 정작 오긴 왔으나 선금을 내라거니 낼 수 없다거니 하는 통에 역장이 잘 교섭해서 2천2백원으로[?] 낙착이 되엇다.

저녁 땐 박제훈 씨 댁에서 만찬 대접.

밤 늦게까지 화차에 짐 실리는 걸 끝내고 新 이사 이삿짐 날러온 차로 제천읍엘 나가서 청전리서 쉬다.

 

12월 14일 [발행에서 생략된 부분]

윤명원 씨의 명주 한 필, 조합 직원 일동 백원, 임순경 씨 30원, 기타의 전별이 있었다. 備忘으로 이걸 적는다. 김장수 씨 50원, 경희 60원 등 유재홍 150원.

 

12월 15일 (토)

개이다.

새벽에 청량리역으로 나가서 김태동 씨란 친절한 분을 만나서 화차 [?] 1904를 용이히 용산역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화물자동차를 구하다 못해서 오늘은 짐을 날르지 못하고 유흥상 씨 댁에 여러 가지 신세를 젓다.

밤에는 이재형 댁에서 술 먹다.

 

12월 16일

비 오다.

아침에 용산역엘 가서 ... 씨의 친절한 주선으로 화차를 구내로 돌려다 놓고 윤씨의 오-트바이로 종일 짐을 날럿다. 장작은 마차로 열두 차 날르고. 하룻동안 비오는 중을 맹활동하엿다. 내중에 유흥상 씨의 感想談이 그 날 일하는 걸 보면 무슨 일이라도 능히 해낼 수 있으리라고 해서 우섯다.

상해 갓다 온 처삼촌, 조합에서 온 직원들의 협력으로 일이 잘 되어나갓다. 특히 염병준 군에게 감사한다.

박 선생 댁에 장작을 한 바리 실어다 드렷다.

권태원 씨가 영사를 갖이고 일부러 찾어오시엇다.

 

12월 17일

날세가 밤 사이 몹시 치워젓다.

이사가 거진 끝나고 이런 혹한이 닥치는 것이 생각할 수록 고마운 일이다. 전에 어머님이 흔이 말슴하시든 천지신명님에게 감사한다.

아침에 출근햇다가 일직 도라와 보니 염병준, 이광[선?]호 양군이 인부들을 데리고 장작을 날러다 실느라고 큰 고생을 하는 중이엇다. 이 치위에 그 辛勤함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팔판정 某씨 댁에 갓더니 전날 주겟다는 옷장을 선금을 받지 않엇다고 팔지 않는다고 한다. 그 동안 물건 값이 올른 때문이리라. 盜척이의 심사도 이렇든 않었을 것이다.

 

12월 18일

혹한

서정하 씨가 취직으로 찾어왓기에 박원식 씨에게 소개하엿다. 낮에는 일직 나와서 짐 끌르다.

저녁엔 이웃 임흥식 씨 댁에서 과장회의 한다고 나오란 말이 있었으나 몸이 앞으다 핑개하고 나가질 않엇다. 내중에 드르니 議題는 연합회 중역진을 部內에서 속히 정비할 것과 본관의 1층만이라도 사용할 수 잇도록 해달라는 것과 그리고 不X한 직원의 징계처분이엇다고 한다. 하나도 신통한 수작이 없다. 모다 제 집 빼앗기고 셋방사리 하면서 징징거리는 못난이들의 잠고대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12월 19, 20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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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역사 앞에서>로 출간된 아버지 일기의 대부분, 1950년 이후의 내용은 대형 원고지의 묶음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것을 연전에 이화여대 도서관에 기증했다. 한편 1945년 11월 말에서 1946년 4월까지 몇 달 간의 일기는 공책 한 권에 적혀 있는데 원고지(24자 12행) 80여 장을(양면 인쇄) 양장으로 몪은 고급스러운 공책 측면과 속 표지에는 "隨想"이라고 인쇄되어 있다. 소화 10년 동경 三省堂 발행으로 뒤쪽 속 표지에 표시되어 있다. 정가는 90전.

 

이화여대에 기증할 때 이 공책을 찾지 못해 뒤쪽 원고만 기증했다. 그런데 연길 집에 3년 만에 와 보니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 하루는 이 공책을 다시 들춰보며 지냈다.

 

예전에 봤던 기억대로 일기의 첫 항목이 "11월 29일 續"으로 되어 있다. 1945년 11월 29일 일기를 아마 이 비슷한 공책에 적다가 내용이 넘쳐 새 공책에 계속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격변의 시대를 역사학도의 눈으로 기록하는 이 일기는 그 전에 시작된 것이다. 언제였을까. 아마 해방과 함께 시작한 것이 아닐까. 봉양 금융조합 이사로 근무하면서 해방 직후의 상황을 기록한 앞 부분을 잃어버린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역사 앞에서> 책과 대조해 보니 빠트린 날자가 꽤 있다. 전쟁 발발 이후는 아무것도 빼지 않고 책에 담는 것을 원칙으로 했는데, 이 부분에서는 그 점을 느슨하게 했다. 등장 인물 입장을 고려하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빠트린 날자가 이제 보니 생각보다 더 많다.

 

당시 빠트렸던 이유를 이제는 별로 개의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책에 담기지 못한 일기 내용을 이 블로그에라도 올려놓으려 한다. 오늘은 우선 책 속의 일기가 시작하기(12월 1일) 전인 11월 29, 30일 일기 내용을 올린다. 속 표지 이면에 적혀 있는 노래 가사를 앞에 붙인다.

 

 

한글 노래

 

세종임금 한글 펴니 스물여듨 글짜

사람마다 쉬 배워서 쓰기도 편하다.

슬기에 주린 무리여 한글 나라로

모든 문화 그 근본을 밝히러 갈까나.

 

온 세상에 모든 글씨 견주어보아라.

조리 있고 아름답기 으뜸이 되도다.

오랫동안 무친 옥돌 갈고 닦아서

새 빛 나는 하늘 아래 골고루 뿌리세.

 

 

11월 29일 續

 

학생들이 애국운동에 挺身하겠다는 그 기개는 좋으나 그러나 국가사회의 문제는 생각한 만치 그리 수얼하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요, 그 때문에 앞날에 이 땅을 움즉여 나갈 주축이 될 학생층이 硏學의 기회를 놓처버린다면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근시안적으로 목전의 事象에 현혹하지 말고 민족의 백년대계를 심사숙려함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일이다. 진실로 조국의 광복과 동포의 행복을 염원할찐대 학생은 물론이어니와 농민이거나 노동자이거나 학인이거나 정치가이거나 간에 모다들 제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해가는 한편 틈 있는 대로 부즈런이 공부하라.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과 딸들이 모다 한 자리에 모여서 가갸거겨를 외이라. 그리고 한글을 이미 깨친 사람은 또 높은 階段을 밟어 올라가라. 그리하여 書冊을 통하여 고금의 先覺들에게서 인생의 바른 길을 배우고 조국 재건의 옳은 방략을 드르라. 그러나 학문에의 길은 길고 먼 것이어서 일조일석에 얼는 무슨 보람을 바라는 것은 잘못이다. 그저 줄기찬 정성과 꾸준한 노력으로 십년을 하로같이 根氣 잇게만 나아간다면 자기도 모르는 새이에 보다 높은 경지에 서 있게 될 것이다. 삼천만 하나하나이 모다 이러한 착실한 길로 자기향상을 지향한다면 우리들의 장래엔 광명이 빛일 것이다. 비단 우리들만의 다행에 끄치지 않고 인류문화의 진전에 큰 이바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11월 30일 4시 기상

 

개이다. 오랫동안 따뜻하던 날세가 오늘부터 갑자기 치워지다.

우연히 얻은 내 기침이 잘 멋지 않고 또 새벽에는 기봉이가 칭얼거리기에 오후엔 병원엘 나가보앗더니 公醫 曺씨가 청풍으로 가겟다고 짐을 묶는 중이엇다. 마침 면장 韓씨 新 면장 후보 朴달서 씨 번영회장 朴제훈 씨 등이 모이었으므로 만류해 보자고 제의해 보았으나 지방의 유력자들이 돈 끌어모으기에만 눈이 팔려서 의료시설 같은 복리사업엔 정신이 없는 것 같어서 여의케 될 것 같지 않다. 人無遠慮면 必有近憂란 말이 잇는데 그들의 근시안적인 태도는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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